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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흐 رَفَح Rafah | |||||
<colbgcolor=#00966E><colcolor=#fff> 국가 | 팔레스타인 | ||||
현 | 라파흐 현 | ||||
면적 | 64km² | ||||
인구 | 171,899[1] | ||||
시간대 | UTC+02:00(서머타임 적용) | ||||
전화코드 | 00970 | ||||
링크 | 공식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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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랍어 رفح영어 Rafah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최남단의 도시이자, 가자 지구 제3의 도시. 현재 기준 인구는 약 16만명이다. 전통적으로 ‘이집트의 관문’으로 여겨지던 요충지로, 현재도 가자 지구와 이집트를 잇는 유일한 통로인 라파 국경 검문소가 위치해 있다. 그외의 국경에는 철제 장벽이 세워져 있다. 현대 시가지는 20세기 중반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지배 하에 형성되었는데, 1982년 이스라엘의 시나이 반도 철군과 함께 그어진 국경이 라파 시가지를 양분하였다. 이집트 편의 라파 역시 인구 8만의 도시였으나, 2015년 후방의 신도시 개발을 위해 전면 철거되었다.[2]
면적은 64km²이며 울릉도(72.86km²)와 비슷한 면적이다.
2. 역사
이집트 상형문자로 쓴 라피흐
고대 이집트 시기에 라피흐라 불렸고, 이집트 신왕국 파라오들이 이곳을 거쳐 팔레스타인-시리아 원정에 나섰다. 기원전 720년에는 아시리아 제국의 사르곤 2세가 이곳에서 이집트 군을 격파하였다. 헬레니즘기에는 라피아 (Raphia)라 불렸다. 기원전 217년에는 4차 시리아 전쟁의 최대 충돌로써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프톨레마이오스 4세와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 간의 라피아 전투가 벌어졌다. 양측 합쳐 14만의 병력과 200여 마리의 아프리카-인도 코끼리가 충돌한 끝에 전투는 이집트 측의 승리였다. 다만 다만 기원전 200년, 안티오코스 3세는 기어코 시리아-팔레스타인을 석권하였다. 기원전 96년 알렉산드로스 야나이가 점령하여 하스몬 왕조령이 되었다가, 기원전 57년 폼페이우스의 부장 가비니우스가 점령하여 재건하였다. 이어진 로마 제국기에 라피아 주교구가 설치되었고, 서기 431년 그 주교 로마누스가 에페수스 공의회에 참가하였다. 현재도 소수지만 그리스 정교회 신자가 거주한다.[3]
2.1. 중세
635년 이슬람 제국군이 점령했고, 준드 필라스틴 (팔레스타인 주)의 최남단이 되어 현재와 같은 경계가 설정되었다. 9세기의 지리가 알 야쿠비 역시 라믈라에서 이집트로 향하는 마지막 마을이라 언급하였다. 10-12세기 일대에는 유대인 및 사마리아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는데, 1080년 대거 북쪽의 아슈켈론으로 이주하였다. 십자군 시기에는 별 주목을 받지 못하였고, 1226년 지리가 야쿠트 알 하마위는 시가지 자체는 폐허 상태이나 역참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1596년 오스만 제국의 조세 기록에는 15가구의 무슬림들이 거주했고, 각종 곡물이나 염소 및 벌꿀을 바쳤다 한다.2.2. 근현대
1881년에 묘사된 라파의 두 기둥
19세기 들어 라파는 이집트-오스만 국경이 되었고, 후자에 속했다. 1863년 라파를 방문한 프랑스인 여행가는 주민들이 도시의 문이라 부른 2개의 화강암 기둥을 기록하며 현지인들이 이집트와 시리아의 경계석으로 여긴고 기록하였다. 세계 1차 대전기 1915-16년 오스만 군의 시나이 반도 공세를 격퇴한 이집트의 영국군은 1917년 1월, 팔레스타인 진격을 게시하여 라파에 주둔하던 2천의 터키군을 격파하였다. 이때 영국군 70여, 터키군 200여명이 전사하였다. 다만 이후로도 영국군이 팔레스타인을 석권하는 데에는 2년 가까이 소요되었다. 영국군 주둔으로 주민들이 모이며 20세기 초엽 라파의 인구는 1천여로 늘어났고, 난민들이 유입되며 1960년경에는 1만으로 급증하였다.
2.3. 현대
2009년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파괴된 라파 모스크
1956년 2차 중동전쟁 중에 칸유니스와 마찬가지로 라파에서도 이스라엘 군의 학살이 벌어져 111명이 희생되었다. 1967년 3차 중동전쟁 시에도 이스라엘 군이 인근 난민캠프의 주택 144개를 철거하며 23명을 사살하였다. 1971년 여름에는 아리엘 샤론의 이스라엘 군이 라파 난민촌의 주택 5백여개를 철거했고, 4천여명이 집을 잃었다. 1970-80년대 라파에는 유엔군 산하의 브라질, 캐나다 부대가 주둔하며 난민들을 위한 주택 건설에 나섰다. 1989-90년의 제1차 인티파다 당시 라파에서는 여러 희생자들이 나왔다.
오슬로 협정 후 1998년, 팔레스타인 국가 기반 시설 건설의 일환으로 가자 지구의 유일한 공항인 야세르 아라파트 국제 공항이 중동 각국의 지원 하에 문을 열었으나 2001년 제2차 인티파다 당시 이스라엘 당국에 의해 불도저로 폐쇄되었다. 2004년, 아리엘 샤론은 이번에는 총리로써 라파의 주택 1백여개를 철거하여 ‘불도저’란 별명을 얻었다. 2005년 이스라엘 군이 철수한 이후로도 라파는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사이에 분단된 채로 남았고, 2007년 하마스가 집권하자 이집트는 미국의 후훤 하에 국경 장벽을 세웠다. 이로써 완벽히 봉쇄된 가자지구의 고립을 탈피하기 위한 밀수 동굴들이 만들어졌고, 이에 이집트는 2009년 지하 장벽을 세워 차단하였다. 그리고 2011년 이집트가 라파 국경 검문소를 개방하며 밀수 동굴들은 더 이상 쓰이지 않았고, 2013-14년 이집트 군에 의해 대부분 파괴되었다.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이후 2024년 5월 기준 가자 지구 피난민 140만명 이상이 밀집한 상태다. 이스라엘군은 하마스 세력이 남아있다는 이유로 가자 지구 피난민들이 몰려있는 라파흐로 지상공세를 추진하고 있어서 서방 국가들과 중동국가들로부터 비난받고 있다.
2024년 5월 26일에 이스라엘군이 라파 피난민 텐트촌에 폭격을 가해 수백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4]
[1] 2017년 추정.[2] 이는 엘시시 정권이 가자 지구와의 완충 지대를 설정하기 위한 조치이다[3] 무슬림 99.9%인 가자 지구에서는 나름 이례적인 사례이다[4] 국제사법재판소(ICJ)가 라파 공격 중지를 요구하자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화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