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5 10:51:01

레오나르두 아라우주

레오나르두 아라우주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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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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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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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두 아라우주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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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축구인
파일:leonardo-milan.jpg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이름 레오나르두 아라우주
Leonardo Araújo
본명 레오나르두 나시멘투 지아라우주
Leonardo Nascimento de Araújo
출생 1969년 9월 5일 ([age(1969-09-05)]세)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주 니테로이시
국적
[[브라질|]][[틀:국기|]][[틀:국기|]]
신체 178cm
직업 축구 선수 (미드필더[1], 수비수[2]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경영인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유스 CR 플라멩구 (1984~1987)
선수 CR 플라멩구 (1987~1990)
상파울루 FC (1990~1991)
발렌시아 CF (1991~1993)
상파울루 FC (1993~1994)
가시마 앤틀러스 (1994~1996)
파리 생제르맹 FC (1996~1997)
AC 밀란 (1997~2001)
상파울루 FC (2001~2002)
CR 플라멩구 (2002)
AC 밀란 (2002~2003)
감독 AC 밀란 (2009~2010)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2010~2011)
안탈리아스포르 (2017)
기타 파리 생제르맹 FC (2011~2013 / 단장)
AC 밀란 (2018~2019 / 스포츠 디렉터)
파리 생제르맹 FC (2019~2022 / 단장)
국가대표 60경기 8골 (브라질 / 1990~2002)
1. 개요2. 축구인 생활
2.1. 선수2.2. 스태프
2.2.1. AC 밀란2.2.2. 인테르2.2.3. PSG2.2.4. 안탈리아스포르2.2.5. AC 밀란으로 돌아오다2.2.6. 또 다시 PSG로
2.3. 플레이 스타일
3. 수상
3.1. 선수3.2. 감독

[clearfix]

1. 개요

브라질축구선수 출신 감독. AC 밀란의 미드필더 출신이자 스카우트시절 카카, 티아구 실바, 알레샨드리 파투 등을 발굴했다. AC 밀란인테르 밀란의 감독직을 역임했으며, 그 이후에는 파리 셍제르망 FC의 단장을 역임했었다.

선수 시절 공격형 미드필더, 좌측 윙어, 세컨드 스트라이커, 좌측 윙백 또는 풀백 등을 소화 가능한 AC 밀란 최고의 유틸리티 플레이어로서 대단한 활약을 선보였다. 이후 감독으로서도 AC 밀란과 인터 밀란을 회생시키는 등 훌륭한 지도력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첫번째 파리 단장 시절과 밀란의 디렉터 시절에는 디렉터로써도 좋은 능력을 보여주었다.

2. 축구인 생활

2.1. 선수

2.1.1.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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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 밀란 시절 레오나르두

레오나르두는 1984년 CR 플라멩구 유스팀에 입단한 후 3년간 기량을 갈고 닦아 17살에 1군 무대에 데뷔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동경해온 대선배 지쿠, 호세 레안도르 페레이라, 그리고 베베투와 함께 경기에 뛰는 영광을 누렸고 그들과 함께 1987년 브라질 세리에 A를 우승했고 1990년엔 코파 데 브라질컵 우승을 달성했다. 그후 레오나르두는 1990년 상파울루 FC로 이적하였고 1991년에 텔레 산타나 감독의 훌륭한 지도력에 힘입어 기량을 한층 더 끌어올리며 상파울루가 속한 주별 리그인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을 달성했다.

그후 레오나르두는 1991년 스페인의 명문구단 발렌시아 CF로 이적하여 2시즌 동안 70경기에 출전해 7골을 기록했고 1993년 상파울루로 돌아와 1994년까지 뛰며 인터컨티넨탈 컵레코파 수다메리카나 우승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정작 경기 출전은 잔부상이 많아서 12경기에 그쳤던 그는 1994년 일본 J리그 축구 클럽인 가시마 앤틀러스로 이적했다. 이때 가시마에는 레오나르두의 롤모델이자 존경하는 대선배 지쿠가 말년을 보내고 있었다. 레오나르두는 지쿠의 뒤를 이어 가시마의 플레이메이커로 자리잡아 1996년까지 49경기에 출전해 30골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1996년, 레오나르두는 J리그를 떠나 프랑스의 축구 클럽 파리 생제르맹 FC로 이적했다. 그는 그곳에서도 유로파 위너스 컵 준결승전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결승골을 기록하며 팀을 결승전에 진출시키는 등 훌륭한 활약을 선보이며 한 시즌 동안 34경기에 출전해 7골을 기록했다. 그리고 1997년 여름, 그는 850만 유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AC 밀란으로 이적했다. 그는 AC 밀란에서 좌측 윙어로 활동하며 4시즌 동안 대활약을 선보였고 팀은 그의 활약에 힘입어 1998-99 시즌에 세리에 A 우승을 달성했다.

레오나르두는 AC 밀란에서 2001년까지 96경기 22골을 기록하였고 2001년 브라질로 돌아가 상파울루, 플라멩구를 거치다가 2002년 AC 밀란으로 복귀하여 2003년 코파 이탈리아 컵 우승을 달성한 후 은퇴를 선언했다.

2.1.2.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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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두는 1989년 브라질 U-20 국가대표팀에 차출되어 1989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쉽 대회에 참여해 좋은 경기력을 보이며 3위를 기록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1990년 성인 국가대표팀에 데뷔한 그는 1994년 미국 월드컵에 차출되어 브랑코와 함께 브라질의 레프트백을 담당했다. 그는 첫 경기에서 훌륭한 활약을 선보였지만 16강 미국전에서 미들필더 텝 라모스를 팔꿈치로 가격해 광대뼈를 부러뜨려 석달 반 동안 병원 신세를 지게 만드는 병크를 저지르는 바람에 4경기 출장 정지를 당하고 말았다. 결국 레오나르두는 월드컵을 통째로 날려버리고 말았고 그 사이에 브랑코가 주전 레프트백으로서 활약하며 브라질의 월드컵 우승에 기여했다.

그후 레오나르두는 여전히 국가대표로 차출되었고 1995년에 브라질이 코파 아메리카 결승전에 진출해 준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1997년 등번호 10번을 부여받은 후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달성하는 데 절대적으로 공헌했고 뒤이어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우승을 달성했다. 그후 레오나르두는 2번째 월드컵인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전 경기를 출장하며 브라질을 결승전에 진출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정작 결승전에서는 프랑스의 완벽한 수비에 짓눌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전반전만 뛴 후에 데니우손과 교체되었다. 팀도 결국 준우승. 레오나르두는 2002년까지 국가대표로 활동했고 60경기에 출장해 8골을 기록했다.

2.2. 스태프

2.2.1. AC 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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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 밀란에서 은퇴한 뒤, 레오나르두는 축구 스카우트가 되어 AC 밀란에서 계속 일했다. 그는 어린 선수들의 재능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매우 탁월해 AC 밀란을 위해 월드클래스급 재능을 갖춘 선수들을 발굴했다. 그가 발굴한 선수들 중 최고는 카카, 티아구 실바, 알레샨드리 파투를 들 수 있다. 이렇듯 AC 밀란에서 천재 스카우트로서 명성을 쌓아갔고 2006 월드컵 때 BBC에 출연해 Match of the Day 프로의 축구 전문가로 활동하는 등 여유로운 생활을 하던 레오나르두는 2008년 초 AC 밀란의 기술 디렉터가 되어 본격적으로 코치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던 2009년 5월,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이 첼시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에 AC 밀란 보드진은 레오나르두를 새 감독으로 세웠다. 이때 그는 UEFA 감독 라이선스가 없어서 논란거리가 되었지만 선수로서 1994 월드컵 우승을 거머진 명성과 2009년 6월 UEFA A 코치 연수를 완료한 것을 바탕으로 삼아 UEFA 프로 라이선스를 획득해 밀란의 감독으로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텔레 산타나가 추구했던 '아름다운 축구'를 AC 밀란에 구현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이 당시 AC 밀란의 상황은 암울해보였다. 90년대~00년대 중반 AC 밀란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선수들은 이 시점에 30대 후반이 되었는데도 계속 주전으로 활약해 '노인정'이란 비아냥을 들을 지경이 되었다. 그런데도 보드진은 선수 영입에 적극적인 의사를 보이지 않았고 이에 사람들은 AC 밀란이 부진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시즌 초기엔 이런 예상이 적중하는 듯 했다. AC 밀란은 시즌 시작 후 초반에 부진했고 급기야 최대 라이벌인 인터 밀란에게 4:0으로 완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4-2-1-3 전술로 전환해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고 챔피언스리그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원정에서 3:2 승리를 거두는 등 선전해 16강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챔피언스리그 16강전에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격돌해 홈경기 3-2, 원정경기 4-0으로 더블 패를 당하는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도 리그에서는 많은 선수들의 부상과 부진으로 스쿼드가 영 좋지 않게 돌아가는 상황에서도 클라렌스 셰도르프의 맹활약을 앞세워 리그 3위를 기록해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확정짓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보드진은 영입을 제대로 하지 않은 주제에 성적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그와 갈등을 빚었고 결국 레오나르두는 시즌이 끝난 뒤 감독직을 사임했다.

2.2.2. 인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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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24일,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는 지난 시즌 트레블을 달성한 팀을 리그 7위로 몰아넣은 라파엘 베니테스를 경질하고 레오나르두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그는 이후 치른 12경기에서 승점 30점을 획득하며 팀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고 챔피언스리그 16강전에서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홈에서 1:0으로 패했으나 원정에서 3:2 역전승을 거두는 드라마를 창출해 극적으로 8강에 진출했다.

이후 8강전에서 샬케 04에게 패해 기세가 끊기긴 했지만 이내 팀을 재정비해 리그 2위로 시즌을 마쳤다. 코파 이탈리아에서는 결승에 진출해 사무엘 에투의 활약으로 팔레르모 FC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인테르 팬들을 중심으로 팀을 극적으로 회생시키는 데 성공한 레오나르두와 재계약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고 구단 보드진도 재계약 의사를 밝혔지만 정작 레오나르두 본인은 감독직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재계약을 거부하고 2011년 6월 PSG의 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이후 인터밀란은 멸망했다.[3]

2.2.3. PSG

2011년 6월, 파리 생제르맹 FC의 새 구단주가 된 카타르 왕자 하마드 알 타니는 레오나르두에게 거액의 급료를 제시해 단장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이후 레오나르두는 세리에A의 탑 클래스로 평가받는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예를 들어, 제레미 메네즈, 모하메드 시소코, 살바토레 시리구, 하비에르 파스토레, 그리고 티아구 모타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빅사이닝에도 불구하고 팀이 몽펠리에 에로 SC에게 리그 우승을 뺏기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아들여야했다.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2012-13 시즌엔 아예 치아구 시우바,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에세키엘 라베시까지 대거 영입했다. 이에 국내 세리에A 팬들은 레오나르두가 세리에를 말려 죽이려 든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 덕분인지 PSG는 드디어 이 시즌 19년만의 리그 우승에 성공했고 팀의 황금기를 열어젖혔다.

2013년 7월 10일, 레오나르두는 PSG 단장 직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하고 8월 말 PSG를 완전히 떠나 야인의 삶으로 돌아갔다.

2.2.4. 안탈리아스포르

4년간의 야인 생활에서 벗어나 2017년 9월에 터키 쉬페르 리그 소속 안탈리아스포르의 감독에 취임했으나 곧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2018 러시아 월드컵 이후 위르겐 클린스만에게 접촉했다가 거절당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기사 해당 매체에 따르면 "레오나르두가 현장 복귀를 강하게 원하고 있으며, 일본 대표팀 감독 제안이 들어오면 바로 수락할 것"이라고 보도했으나, 이미 클린스만 건으로 한 차례 심하게 까인 터라 신빙성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

2.2.5. AC 밀란으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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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6일, AC 밀란은 레오나르두의 스포츠 디렉터 부임을 공식 발표했다. 18/19 시즌의 여름이적시장은 레오나르두가 맡게 되었다.

골치아픈 보누치 문제[4]마티아 칼다라를 걸고 넘어지며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이는 중이다. 그리고 8월 2일, 보누치를 유벤투스로 보내고 칼다라와 이과인을 영입하는 거래를 성사시켰다. 보누치와 칼다라는 별도의 이적료 없이 선수 트레이드로 진행되었고 이과인은 2018-19 시즌엔 임대선수로서 18M을 지불하고 2019-20 시즌부터 35M 유로를 2회계연도에 걸쳐 지불함으로서 완전 영입한다. 그리고 이과인이 부진하자 윤리적 지탄을 받으면서도 이과인의 완전 영입을 포기하고 크시슈토프 피옹테크를 영입하고 루카스 파케타까지 영입하며 스쿼드 강화에 성공했다.

시즌 종료 후, 가투소와 마찬가지로 사임했는데 새 CEO인 이반 가지디스[5]의 운영방식에 불만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가지디스는 적은 금액으로 어린 선수들을 긁어모은 뒤, 비싸게 되팔아 안정적인 재정 관리를 하려고 한 것이다. 이는 구단을 셀링 클럽으로 만드려는 계획이니 팀의 황금기를 함께한 밀란의 레전드이자 구단에 큰 애정을 갖고 있는 가투소와 레오나르두에게는 큰 불만일 수 밖에 없었다.

2.2.6. 또 다시 PSG로

2019년 7월 1일 부로 PSG로 돌아오게 됐다. 직책은 단장.

복귀 첫 시즌인 2019-20시즌에는 영입에 대해선 일단은 나름 괜찮게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레알 마드리드를 떠난 골키퍼 케일러 나바스, 인테르와 불화를 겪은 공격수 마우로 이카르디를 영입해 전력을 보강했고 PSG는 이 시즌 리그와 리그컵 더블을 차지했고, 특히 그동안 잘해봐야 8강이었던 챔스에서도 비록 준우승에 그치긴 했지만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 시즌에 생겼는데 2020-21시즌 이적시장때부터 계속해서 마찰이 있던 투헬과 끝없는 불화 끝에 결국 그를 경질당하게 만든 것.[6] 후임으로는 포체티노가 선임되었고, 슈퍼컵과 FA컵을 우승하긴 했으나 중요한 대회인 리그에선 에게 밀려 2위를 기록하며 리그 4연패에 실패했다. 챔스에서도 16강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승리 거두었고 8강에선 지난시즌 결승전에서 붙었던 바이에른 뮌헨과 만나 설욕을 했지만 4강 맨시티를 만나 패배하였고 경기내용도 안좋았다.

설상가상으로 사실상 레오가 경질당하게 만든 투헬은 첼시로 가서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성공하고 레오는 후임 감독인 포체티노와도 관계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났다.

상황이 이렇자 PSG 차기 감독 후보인 지네딘 지단은 아라우주가 없어야 PSG 감독이 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21-22 시즌을 앞두고 바이날둠, 하키미, 라모스, 돈나룸마, 여기에 리오넬 메시까지 영입하는 미친 이적시장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슈퍼컵부터 릴에게 지고 준우승을 하였고 리그에선 우승을 했지만 경기력에 대한 비판이 매경기 나왔으며, 리그컵에서는 16강 니스와 승부차기끝에 패해 16강 조기 탈락을 하였다. 그리고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만나 총합 스코어 2대 3으로 패배하며 광탈했다. 또한 경기 종료 직후 켈라이피 회장과 함께 심판대기실을 찾아 심판의 잘못된 판정을 비난했다. 심판을 위협하고 난동을 부렸다는 혐의로 징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시즌 종료후 사실상 팀을 떠나는게 확정되었다 후임은 루이스 캄포스

PSG에서 해고당한 이후 과거 AC 밀란 시절 한솥밥을 먹던 가투소가 취임한 스페인의 발렌시아 CF 단장직으로 연결되기도 했으나, 결국 가투소도 이사회와의 마찰 끝에 발렌시아를 떠나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

2.3. 플레이 스타일



레오나르두는 왼발을 주무기로 활용했고 이를 토대로 레프트 윙어, 레프트 윙백, 레프트 풀백 등 경기장의 좌측 측면을 모두 커버 가능한 유틸리티 플레이어였다. 또한 찬스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탁월해 중앙 공미 자리에서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고 드리블 및 골결정력도 우수한 편이라 세컨 톱으로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다. 또한 그는 중미 자리에서 딥 라잉 플레이메이커 역할도 할 수 있었다.

그의 최고의 장기는 개인기와 축구 지능이었다. 그는 이를 통해 상대 수비진을 마음껏 농락했고 팀원들에게 찬스를 줄곧 만들어내 수많은 어시스트를 쌓아나갔다. 이렇듯 그는 브라질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군림할 만한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커리어 내내 잔부상이 많아 그렇게 많은 경기에 뛰지 못했고 역마살 기질이 있었는지 4년을 머무른 AC 밀란 시절을 제외하면 브라질과 유럽의 여러 축구 클럽을 전전했기에 명성과 실력에 비해 커리어는 저조한 편이다.

3. 수상

3.1. 선수

3.2. 감독



[1] 공격형 미드필더, 윙어[2] 레프트백[3] 실제로 그가 거둔 2010-11 코파 이탈리아 우승은 2020년까지도 인테르의 마지막 메이저 대회 우승으로 남아있었다. 인테르는 이후 20-21시즌 스쿠테토를 따낼 때까지 약 10년간 햇수로 11년간 인고의 시간을 견뎌냈다.[4] 보누치가 역제의를 할만큼 보누치의 이적의사가 확실해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5] 가지디스는 아스날에서 오랫동안 CEO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벵거 사임 이후 거액을 받고 밀란으로 왔는데 아스날 단장 시절 삼권분립 체제 가동 당시 욕만 먹었으며 영입한 선수들은 거의 다 폭망했다. 챔스권은 들던 아스날을 무너뜨린 적폐 중 한명.[6] 다만 첼시에 가선 좀 나아지긴 했으나 원래 투헬은 실력에 대비되는 최악의 인간성으로 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