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前 축구 선수 | ||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이름 | 렌나르트 스코글룬드 Lennart Skoglund | |
본명 | 칼 렌나르트 스코글룬드 Karl Lennart Skoglund | |
출생 | 1929년 12월 24일 | |
스웨덴 스톡홀름 | ||
사망 | 1975년 7월 8일 (향년 45세) | |
스웨덴 스톡홀름 | ||
국적 | [[스웨덴| ]][[틀:국기| ]][[틀:국기| ]] | |
포지션 |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 |
신체조건 | 170cm | 68kg | |
등번호 | 11 | |
소속팀 | 함마르뷔 IF (1946~1949) AIK 포트볼 (1949~1950)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50~1959) UC 삼프도리아 (1959~1962) US 치타 디 팔레르모 (1962~1963) 함마르뷔 IF (1964~1967) 쉐르토르프 IK (1968) | |
국가대표 | 11경기 1골 (스웨덴 / 1950~19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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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웨덴의 전 축구 선수.1950년대 인테르와 스웨덴의 전성기를 이끈 전설적인 레프트 윙.
2. 생애
2.1. 어린 시절
스코글룬드는 192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축구뿐만 아니라 아이스하키, 농구 등에도 재능을 보였다. 그는 학교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친구들과 축구하고 노는 것을 즐겼고 테니스공으로 드리블을 하며 드리블 능력을 키웠다.스코글룬드는 1943년 IK 스차르난[1]의 유스팀에서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지만 얼마 안가 스차르난의 유스팀이 해체되는 바람에 1944년에는 함마르뷔 IF로 옮겼다. 2년간의 유스 수업 끝에 1군에 데뷔했고, 여기에서 활동하는 동안 그의 가장 유명한 별명인 나카[2]가 붙여졌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2.2.1.1. 알스벤스칸
스코글룬드의 데뷔 시즌은 1946-47이었는데, 당시 소속팀 함마르비의 상황은 극도로 어려웠다. 2부 리그의 동부 지구에서 꼴찌로 처진 팀은 리그 재조정으로 인해 4부 리그로 추락했고 스코글룬드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기 기사로 일을 하며 투잡을 뛰어야만 했다.[3] 하지만 그의 실력 하나는 대단했고 곧 함마르비의 아이콘이 되었다. 1947년에 데게르포르스 IF와 함마르비와의 친선 경기에서 어린 스코글룬드는 국가대표 수비수 올레 올룬드[4]의 수비를 지속적으로 벗겨내서 찬사를 받았다.스코글룬드는 몇 년을 노력한 끝에 결국 1부 리그로 팀을 끌어올리는 데에 성공했고, 이로 인해 스웨덴 내 빅클럽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결국 함마르비는 재정 문제 때문에 AIK 포트볼로 그를 팔 수 밖에 없었다. 당시 AIK는 헨리 칼손의 이적으로 인한 공백을 메울 필요가 있었고, 그를 대체자로 낙점했다. 그리고 AIK는 천크로나, 양탄자, 스코글룬드의 어머니에게 코트 등을 선물했다.
AIK에 합류한 직후 팀은 영국 투어를 떠났는데 스코글룬드의 플레이를 본 리버풀 FC의 감독 조지 케이는 스코글룬드가 크게 성공할 것이라 예측했다. 그러나 스코글룬드가 군대 의무 복무를 수행하느라 그의 정식 데뷔는 늦어졌다. 스코글룬드는 AIK에서 짧은 기간에 스벤스카 쿠펜 타이틀을 획득했다.
브라질 월드컵에 출전한 스코글룬드는 칼에리크 팔메르와 좋은 호흡을 보여주며 스웨덴의 결선 리그 진출을 이끌었다. 결선 리그 첫 경기에서 스웨덴은 브라질에 1:7로 박살이 났는데 경기 후에 스코글룬드와 푸테 코크 코치는 스코글룬드의 행동으로 언쟁을 벌였다. 그 영향으로 스코글룬드는 나머지 두 경기에서 전력외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대회에서 보여준 그의 활약에 꽂힌 브라질의 상파울루 FC가 만 달러로 이적 제의를 했다. 하지만, AIK는 이적의 대가로 더 많은 돈을 갖고 오기를 원했고, 이 제안에 혹한 팀이 바로 이탈리아의 인테르 밀란이었다. 인테르는 상파울루가 제의한 금액의 5배인 5만 달러의 이적료를 제의했고, AIK는 그에 응했다. 결국 스코글룬드는 AIK에서 단 5경기만 뛰고 이탈리아로 가게 되었다.
2.2.1.2. 세리에 A
이탈리아에 스코글룬드가 처음 왔을 때 인테르 밀란의 서포터 2천여명이 그의 입단을 환영했다. 이탈리아에 진출한 첫 시즌, 21살짜리 풋내기 윙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그는 12골(29경기 출전)로 답을 했다. 비록 우승에는 한 지붕 두 가족 라이벌인 AC 밀란에게 단 1점차이로 아깝게 실패했지만 그의 데뷔 시즌 임팩트는 대단했다. 스코글룬드는 베니토 로렌치, 파스 빌커스 등과 호흡을 맞춰갔고 2년 후에 인테르 밀란은 기어코 스쿠데토를 차지했고, 다음 해에도 우승에 성공했다. 그리고 스코글룬드는 두 번의 챔피언 확정 시합에서 모두 골을 넣는 활약을 보였다.이렇게 스코글룬드는 대단한 기록을 남겼지만, 한 가지 그에게 큰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술이었다. 스코글룬드는 인테르 이적때부터 생활 습관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고 스타덤에 오르고 나서 문제가 더욱 악화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술을 엄청나게 좋아해서 알코올 의존증 수준까지 이르렀고, 훈련장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밀라노의 바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였다. 아예 라커에 위스키를 숨겨놓고 마시는 수준의 스코글룬드의 행동은 점점 인터 밀란 보드진들의 어그로를 쌓았고, 출장수도 반 이하로 줄게 되었다.
결국, 스코글룬드는 1958년에 잠깐의 부흥을 뒤로한 채 1958-59 시즌을 끝으로 삼프도리아로 이적하게 되었다. 스코글룬드는 새로운 팀에서는 잠깐 정신을 차리는 듯 했지만, 알코올 의존증 증세는 더욱 심해져갔다. 그는 술 때문에 결국 이혼당하고 술에 취한 채로 경기를 하는 등[5] 막장으로 치달아갔다. 삼프도리아도 견디다 못하고 그를 팔아치웠고, 그의 또 다른 행선지는 팔레르모였다. 이미 이때의 그는 이탈리아에서 뛸만한 실력은 사라졌고, 팀에서는 야간 통금까지 해가며 그를 단속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실패. 여기서도 그는 1년 밖에 버티지 못하고 방출당하고 말았다.
스웨덴의 친정팀 함마르비로 돌아온 그는 커리어 사상 최고의 골을 넣기도 했지만, 팀은 강등과 승격을 오르내렸고, 커리어의 마지막은 그의 형이 감독으로 있던 쉐르토르프에서 보냈다.
이때의 스코글룬드는 재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클럽의 매니저는 그를 자신의 카펫 가게에서 일하게 해주기도 했다.
2.2.2. 국가대표
스코글룬드는 명성에 비해 국가대표 출전 수가 상당히 부족한데, 이탈리아에서 뛰는 원인도 있었지만 그의 술 사랑도 문제였다. 선수단 전체를 자국에서 뛰는 아마추어 선수들로 구성했던 1950년 월드컵[6] 이후로 A매치 출전이 없던 스코글룬드는 제도가 폐지되면서 결국 홈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뛸 수 있었고 여기에서 모든 경기를 뜀으로서 조국의 준우승에 기여했다. 하지만, 두 번의 월드컵이 그의 A매치 출전의 거의 전부였다.1964년 10월, 스코글룬드의 친구이자 1958년 월드컵을 같이 뛰었던 앙네 시몬손은 스코글룬드를 폴란드와의 친선 경기에서 부를 것을 건의했다. 그렇게 스코글룬드는 11번째이자 자신의 마지막 국가대표팀 경기를 뛰었다.
2.3. 은퇴 이후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스코글룬드의 인생은 완벽히 망가졌다. 알코올 의존증에 빠진 몸 상태는 날로 나빠졌으며, 스톡홀름에서 홀로 살며 이탈리아에 남은 아이들을 그리워했지만 다시 볼 수 없었다. 음주운전으로 그는 운전면허증도 빼앗겼다.어린 시절의 친구와 함께 잡지사를 세워 재기를 노렸지만 그는 1975년 7월 8일, 자신의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나카는 박수를 받으며 살기를 원했고, 코미디언처럼 남들을 웃기며 살기를 원했다. 나카는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웃음소리가 잦아들면 코미디언은 죽는다. 환호가 잦아들자 나카는 죽었다.
스웨덴의 한 저널리스트. 스코글룬드를 추모하며.
스웨덴의 한 저널리스트. 스코글룬드를 추모하며.
3. 플레이 스타일&평가
스코글룬드는 볼 기술이 대단했고 빠른 윙어였다. 또한 그는 정확한 킥을 가지고 있어서 코너킥을 직접 골로 넣은 적도 있다고 한다. 때로 그는 지나친 개인 플레이를 펼쳐 비판을 받기도 했고 약한 신체 내구도와 체력은 약점이었다.나카는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공을 가지고 플레이했어요. 훈련 세션이 끝난 후 그는 저를 골문에 세워놓고 추가로 슈팅을 더 하곤 했는데 공은 항상 나를 지나쳤습니다. 그리고 경기 중 그가 제공한 패스는... 그의 팀 동료들은 항상 중립을 지켰습니다.
로니 헬스트룀
로니 헬스트룀
4. 사생활
1952년 8월, 스코글룬드는 이탈리아의 모델 누차 치렐리(Nuccia Zirelli)와 결혼해 두 아들 에베르트(1953년생)와 조르조(1957년생)를 뒀다. 나중에 그들은 둘다 축구 선수가 되었는데 에베르트는 인테르, 조르조는 AC 밀란에서 뛴 적이 있다. 스코글룬드는 2명의 혼외자가 더 있었는데 1949년에 태어난 한 아이는 입양되었고 1959년생 페테르는 스웨덴에서 자랐다.5. 뒷이야기
- 이탈리아에서 뛸 당시 스코글룬드는 시즌이 끝나고 휴식기에는 스웨덴으로 가서 사람들과 지내며 묘기를 보여주는 것을 즐겼는데 이것이 그의 인기 비결 중 하나였다.
- 1952년 1월, 스코글룬드는 술에 취한 채 택시 기사와 말다툼을 벌이다 택시 파손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 스코글룬드는 순진하고 세상 물정을 잘 몰라서 사기를 당한 적이 있었다. 아내와 함께 밀라노에 레스토랑을 열었는데 레스토랑 나카는 장사가 돼서 초기에는 가족들에게 경제적 안정을 제공했다. 그러나 재정 적자가 심해지자 부부는 1958년에 재정 고문을 고소하기도 했다.
- 스코글룬드는 1958년 월드컵에서의 성공을 발판 삼아 스티그 안데르손[7]의 작곡과 프로듀싱을 받아 음반 발표를 했다. 이렇게 발표한 음반 Vi hänger me(We hang me)는 스웨덴 차트 7위에까지 오르는 등 인기를 끌었다.
- 1963년에 함마르뷔 IF로 돌아오기 직전에 스코글룬드와 그의 아이들은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의 두 아들과 함께 피렌체로 가던 중 그의 차량은 도로를 벗어나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스코글룬드의 아이들은 지나가던 운전자들에 의해 구조되었고 병원에서 약 3주를 보내야 했다.
6. 수상
6.1. 클럽
- 세리에 A 우승 2회: 1952–53, 1953–54(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 스벤스카 쿠펜 우승 1회: 1949–50(AIK 포트볼)
- 세리에 준우승 1회: 1950–51(FC 인테르나치오날네 밀라노)
- 코파 이탈리아 준우승 1회: 1958–59(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6.2. 국가대표
[1] BK Stjärnan. 한국어로 별이라는 뜻이다.[2] Nacka. 이 별명이 붙은 이유는 함마르뷔에 스코글룬드와 동명이인의 선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코글룬드에게 여러 차례의 이적 제의를 보냈던 축구팀의 이름이자 그의 형이 뛰었던 축구팀이었다는 설도 있고 나카 지방에서 축구를 해서 붙여졌다는 설도 있지만 나카의 정확한 유래는 사실 불분명하다.[3] 그러나 그는 이때도 유흥을 즐기느라 직업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4] 올룬드는 1951년 골드불렌(골든볼)까지 타게 되는 수비수였고 나중에 그들은 1950년 월드컵 대표팀에서 재회하게 된다.[5] 삼프도리아 시절 스코글룬드의 팀동료 프란체스코 모리니는 스코글룬드가 코너 플래그 근처에 물병을 놨지만 사실은 술이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모리니에 의하면 스코글룬드가 코너킥을 처리하려할 때 무릎을 꿇고 축구화 끈을 묶으며 마셨던 것이 술이었다고 한다.[6] 그래서 1949년에 AC 밀란으로 이적한 1948년 올림픽 금메달의 주역 그레놀리 트리오는 이 대회에 소집되지 않았다.[7] 나중에 안데르손은 ABBA의 매니저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