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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디지아 보안군



파일:71ApappFVpL._AC_SL1100_.jpg

사나이 중의 사나이가 되어라! - 로디지아 육군 모병 포스터. 임팩트 있는 문구와 강렬한 인상 덕에 매니아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포스터다.

파일:These_women_will_die_for_Rhodesia.jpg

마찬가지로 로디지아군 모병 포스터.

1. 개요2. 상세3. 후대에 미친 영향4. 평가5. 무기6. 관련 문서

1. 개요

Rhodesian Security Forces
로디지아 보안군

로디지아 보안군은 현 짐바브웨의 전신인 로디지아가 건재하던 시기 로디지아의 국군이였다. 로디지아 부시 전쟁(1964~1979)[1]에서 활약했다.

2. 상세

원래 로디지아는 그 지역을 식민화했던 "아프리카나폴레옹" 영국세실 로즈의 이름에서 유래한 국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백인 이주민들의 백인 우월주의가 다른 식민지보다 강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힘을 잃은 영국이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철수하는 과정에서 인접국들에 연이어 친소련/중국정권이 들어서자 엄청난 위기감을 느끼고 당시에는 온건했던 흑인들의 독립운동까지 마구 탄압하는 실책을 터뜨렸다.

이 실책으로 생긴 흑인 사회의 공백에 기다렸다는 듯이 소련탄자니아의 지원을 받는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해방군(ZANLA), 중국의 지원을 받는 짐바브웨 인민혁명군(ZIPRA)의 두 개의 반정부 게릴라 조직이 들어서서 나라는 테러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1964년 영국 노동당 정권이 남로디지아 자치정부에 흑인 인권탄압을 중지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당시 이안 스미스로 대표되는 극우 백인 정권은 이에 발끈하여 1965년 11월 11일[2] 멋대로 독립을 선언했다. 영국에게는 미국의 독립선언 이후 200여 년 만이었다. 당연히 반정부 조직은 물론이고 국제 사회가 이를 납득할 리 없었고 테러는 결국 내전으로 확대됐다.

로디지아 정부는 병역을 의무제로 바꾸고 병역기간도 늘려서 대항하려 했지만 겨우 남녀노소 다 합쳐도 25만명 내외에 불과한 백인 인구로는 병력 부족을 타개할 길이 없었다. 또 UN에 의한 경제제재가 시작되면서 무기 수입도 힘겨워지기 시작했다.[3] 반대로 반군은 인접국과 공산권의 지원으로 게릴라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중무장을 하게 되었는데 심지어 T-55와 중국제 59식 전차로 편성된 전차부대가 있는 판이었다.

결국 병력도 무기도 마음껏 확보하지 못한 로디지아는 전세계에 병사 모집 공고를 냈다. 그런데 이 때 모인 인물들이 그린베레SAS, 프랑스 외인부대, 와일드 기스 같은 각국의 전역한 특수부대원들이나 프로 용병이었던지라 도리어 전투력이 급상승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이들이 연구한 게릴라전 노하우 등은 아직도 아프리카 등지에서 중요한 참고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와 달리 로디지아군 병력의 90% 이상은 흑인들이었다. 로디지아가 징병제를 백인 한정으로 실시했던 탓에 로디지아군의 흑인 군인들은 전원 자원입대자들이었는데 이들은 먹고살기 위해[4] 혹은 게릴라에게 가족을 잃은 복수심 때문에 백인 정권에 충성하는 길을 택한 이들이었다. 때문에 이들의 눈에 게릴라들은 동족이기보다는 자신의 월급통을 빼앗고 가족을 위협하는 적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로디지아 흑인 군인들의 전과는 백인들에게 밀리지 않았다. 지휘관 빼고[5] 전 병력이 흑인이었던 로디지아 아프리카 소총연대(Rhodesian African Rifles, RAR)는 백인으로만 구성된 로디지아 경보병대(Rhodesian Light Infantry)와 대등한 전투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았으며, 로디지아 분쟁 내내 이곳저곳 투입되며 게릴라들을 무자비하게 때려잡고 다녔다.

로디지아군의 규모는 최전성기에조차 1만 1천명 내외였고 경찰, 외인부대, 민병대, 파트타임으로 근무하던 군인들을 긁어모아야 겨우 4만 5천명 정도였으나 상대하는 게릴라들[6]을 상대로는 언제나 우위를 차지했다. 일반 보병 부대의 손실비율이 1:8 정도였고 셀루스 스카우트나 로디지아 SAS 등의 특수부대는 1:50에 달했다고 한다.[7]보수는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부대의 사기는 좋았고 인종차별적인 백인 정부 휘하의 부대임에도 아이러니하게 백인, 흑인 할 거 없이 서로 동지애가 투철했다고 한다. 흑인 병사가 게릴라로 변장하고 백인 병사가 그에게 포로로 잡힌 것으로 위장해서 게릴라 기지에 침투하여 공격하는 식의 전술까지도 있었을 정도.

후대에도 연구되는 이들의 주요 전술 중 하나로 “파이어포스”라는 전설적인 전술이 있는데, 정찰대[8]가 게릴라들을 발견하거나 공습으로 발을 묶어놓은 뒤 측면에서 우회한 로디지아군 보병부대[9]의 공격으로 한 곳으로 몰아넣은 후 정면, 후방, 측면을 지상공격기 및 강습시킨 정예 경보병부대로 포위한 뒤 사방에서 포위망을 조여가며 화력으로 섬멸하는 전술이다. 남아공군과 이스라엘군도 이 전술을 참고해 게릴라들을 상대했다고 한다.

압도적인 전과 덕에 한 때 무장 게릴라 집단들을 꽤나 위험한 상황까지 몰고 갔으나[10] 머릿수가 딸리는 것은 천지가 뒤집어져도 어쩔 수 없었고[11] 여기에 로디지아에 인접해 있던 포르투갈령 식민지였던 모잠비크가 독립하고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지원도 서서히 줄어들면서 싸움을 오래 끌 수는 없었기에 결국 1979년 백인 정부가 협상을 통해 온건 흑인 정부에게 정권을 이양하려 투표를 하게 되었다. 이 선거로 온건파이자 상식적인 지도자였던 아벨 무즈레와가 당선되었으나 이미 권력욕이 상당했던 무가베와 짐바브웨 전선은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고 전투는 1979년말 랭커스터 협정때까지 지속되었다. 1980년 선거에서 승리한 무가베는 총리로 취임했고 이후...

정권이 교체되자 로디지아군은 짐바브웨군이 되었고, 많은 부대가 해산되었으며 백인 군인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제대한 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넘어갔다.

이 덕에 실전경험을 갖춘 능력 있는 인재들을 대거 영입하게 된 남아공군의 전투력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남아프리카의 백인 지배도 언제까지고 버티진 못했지만 말이다. 당시 군인뿐 아니라 흑인 탄압에 동조하던 상당수 백인들도 여전히 인종차별 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유지하던 남아공으로 탈출했다. 그리고 이때 로디지아 군에서 싸우던 용병들은 이후 세계로 흩어져 나가면서 온갖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그 중 네임드 용병 몇명은 로디지아를 정신적으로 계승하겠다는 듯이 여러 소국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쓴 맛을 보기도 했다.

그 중 제일 유명한 인간은 밥 디나드(Bob Denard,1929 ~ 2007)라는 용병으로 코모로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GIGN, 해군 코만도, 제13용기병공수연대, 제1해양보병공수연대 등의 특수부대들이 주축으로 이뤄진 프랑스군 부대에 의해 진압당한 후 재판받아 무기징역을 받았다. 놀라운 건 4번이나 코모로에서 쿠데타를 꾸몄고 베냉, 콩고민주공화국 등지에서도 이랬다는 것. 하지만 모조리 실패하고 이후 10개월 징역을 살다 나왔고 2001년 마지막 쿠데타 당시에는 진압 이후 2007년 악화된 알츠하이머로 인해 4년 징역도 제대로 받지 못 하고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

의외의 사실이지만 무가베는 10년 넘는 세월 동안 적으로 싸운 로디지아군 출신들을 오히려 우대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무가베가 자기 정권의 공신들인 게릴라 출신들보다 과거 적이었던 로디지아군 출신들을 더 신뢰한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었다.[12] 로디지아군에서 복무하며 게릴라들을 소탕하던 흑인 군인들은 짐바브웨군에서도 잘만 승진했으며, 이제는 무가베의 정적이 된 게릴라 동료들, 즉 짐바브웨의 독립운동가들[13]의 숙청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14][15]

그리하여 로디지아는 사라지고 짐바브웨로 개명하게 되지만 서양권에서 로디지아군은 아직까지도 전설적인 전사 집단 중 하나로 간간히 언급되고 있다.

메탈기어 솔리드 시리즈의 용병 국가 아우터 헤븐은 이 시절의 로디지아가 롤모델이다.

3. 후대에 미친 영향

로디지아 전쟁에서 단위 부대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의 적을 때려잡은 것으로 악명 높은 적 후방 침투 부대 "셀루스 스카우트(Selous Scouts)" 소속이던 용병 마이크 루소의 모잠비크 월경 작전에서 방탄복이나 마약에 쩔은 상대에게 몸통을 두 번 쏘는 더블탭 사격이 잘 통하지 않던 경험을 토대로 현대 실전 권총 사격술의 아버지인 제프 쿠퍼모잠비크 드릴이란 2+1 사격술을 고안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16].

파일:5792-1-recon-vest__96302-horz.jpg

또한 로디지아군의 후방 침투 부대가 애용하던 체스트 리그에 착안하여 앞판만 착용하면 방탄복이 되어 장거리 침투 작전에 적합하고 뒷판을 결합하고 방탄판을 넣으면 플레이트 캐리어가 탄생하여 근접전에서 방호력을 제공해주는 군장인 RRV[17]는 2000년대 들어 일본 육상자위대 수륙기동단에서 제식 장비로 채용한 것을 포함, 전 세계 여러 특수부대에서 야전용으로 애용하고 있는 등 특수작전 분야에 로디지아군이 남긴 유산이 크다.

MRAP로디지아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트럭 개조 장갑차가 기원이다.

후대에 실용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에는 뭐하지만 로디지아군이 사용했던 위장무늬 패턴이 패션이나 밀리터리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나름 인기 있는 편이다.

또한 문서 상단의 모병 포스터가 꽤나 인상깊은 디자인이라 매니아들에게 인기가 많다.

파일:British_Army_Rangers_Insignia.png

2021년 12월 영국 육군 '전문화보병단'을 개편해 창설된 영국 육군 레인저연대 부대 마크를 셀루스 스카우트의 마크에서 따 왔다는 주장이 있지만 영국 육군은 아무 관련도 없다고 한다. #

4. 평가

서구권과 남동아프리카 지역 국가들에서 로디지아군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다. 민주주의 원칙에 의거해 선출된 로디지아 신 정권이 내놓은 흑백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한 법안에 극단적으로 반대하며 들고 일어선 사실상의 쿠데타를 행하여 흑인들의 땅인 아프리카에 일방적으로 백인국가를 세운, 더 정확히는 저물어가는 시대의 격류를 거부하고 제국주의의 잔재를 지키기 위해 들고 일어난 군대였고, 더 넓게 보면 무가베의 경쟁자들을 무가베 대신 모조리 죽여 버린 탓에 잠바브웨가 독재 국가로 폭주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도와준 것이나 다름없던 데다가 인종차별 문제를 이야기한 영국에게 반기를 들고 국제 사회를 무시했던 인종차별적 정권의 군대였다.

로디지아 전쟁이 중반기를 넘어갈 때 즈음엔 로디지아의 구 정권은 완전히 뒤엎어져서[18] 사실상 군벌로써 활동했다. 그리고 현대에 파탄이 난 짐바브웨와 로디지아를 비교해 가며 백인 우월주의를 퍼뜨리려는 자들에 의해 로디지아군도 과도하게 미화되는 경향이 있다. 로디지아 군대가 여러 특수부대 출신 전역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백인과 흑인이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결국에는 인권 탄압의 최전선에 나선 이들이었다. 로디지아군을 우상화하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에 대한 뉴욕 타임즈 논평 "Rhodesia’s Dead — but White Supremacists Have Given It New Life Online" 당장 영국군 레인저 연대 부대마크 문제로 영국에서도 큰 논란이 일었다. 당시 영국 언론의 비판 기사

5. 무기

냉전기의 로디지아군 보병장비
파일:로디지아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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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5px -0px -11px"
냉전기
로디지아군보병장비
<colbgcolor=#0F4B32> 개인화기 소총 볼트액션 소총 <colbgcolor=#fefefe,#393b42>SMLE No.4 Mk.I, Kar98k
반자동소총 L1A1, M21, Mini-14
자동소총 FN FAL, R1A1, G3A3, M16A1
기관단총 Lanchester Mk.I, Sten Mk II, Austen Mk I, GM15, Sanna 77, LDP, Cobra, CH9/25, R-76, Rhogun, Owen Mk.I, L2A1, American-180, UZI
산탄총 Greener GP, Auto-5, M37, M870
권총 Enfield No.2 Mk I, S&W M49, Browning Hi-Power, Mamba, P1, Star M1920, BM
지원화기 기관총 경기관총 Bren Mk.III, L4A4, FN FAL HBAR
다목적기관총 M1919, MAG-58
중기관총 M2HB
대전차화기 M20, M72, M40, ENERGA, MILAN
박격포 M-4 Patmor, L16
유탄 No.36, Mk.2, M962, M26, M963
지뢰 M18A1
노획무기 반자동소총 SKS, SVD
자동소총 AK-47, AKM
권총 PP
기관총 DP-28, RPD, RPK, PKM. KPV
대전차화기 RPG-2, RPG-7, B-11
대공포 ZPU-4, ZU-23-2
대전차화기 9K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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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국 개발, *:노획

6. 관련 문서



[1] 일명 로디지아 국경 전쟁, 서양권에서는 '로디지아 분쟁', 흑인 독립 운동 세력들은 '짐바브웨 독립 전쟁'이라고 부른다.[2] 1차대전 전사자 추모일.[3] 똑같은 백인 정권 하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무기와 연료 지원이 있기는 했다. 이쪽도 나중엔 아파르트헤이트로 국제적 비난을 받으면서 로디지아와 똑같이 어려워지지만. 아예 이쪽에서 병력을 파병하거나 모잠비크로 군사 작전을 실행하는등 사실상 로디지아 국경 전쟁에 참전하였다.[4] 로디지아의 군인 월급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절대 많은 편이 아니었으나 농촌이나 도시에서 빈민으로 살던 흑인들 입장에서는 사회에서 받는 월급의 두 배 이상이었으며, 일선 전투원 대다수가 흑인인 로디지아군 특성상 인종 문제를 겪을 일도 적었다. 때문에 훈련을 감당할 만한 신체능력이 되고 출세를 원하는 흑인이라면 로디지아군 입대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5] 로디지아군은 1977년부터 장교 임관을 흑인들에게 개방했으며 전쟁 말기였던 1979년에는 중/소대장급까지 흑인 장교가 근무하고 있었다. 그 이전에도 프랑스군 시절 계급을 안정받아 임관한 프랑스 식민지 출신 흑인 장교가 몇몇 있었다.[6] 무가베의 짐바브웨 전선이 2만 5천명, 조셉 은고모의 인민전선이 2만명 내외였고 게릴라들의 규모는 로디지아군 작전의 악랄함이 심해지며 점점 더 커졌다.[7] 대표적으로 1976년에 실행된 이랜드 작전이 있다. 84명의 셀루스 스카우트가 모잠비크 해방군으로 위장하고 게릴라 캠프를 습격했으며, 로디지아군은 4명이 경상만 입고 1,000명 이상의 게릴라를 살해했다. 게릴라들과 국제앰네스티는 난민 캠프라고 주장했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8] 전향하는 게릴라들이 꾸준히 나왔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순찰을 돌며 침투 경로를 잡아냈지만 가끔은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하는 경우도 있었다.[9] 로디지아군의 현역들은 거의 정예부대로 활주로가 있는 기지에서 5대기하는 신세였고 지역에 주둔하며 도보나 차량으로 출동하는 병력들은 대부분 파트타임 근무하는 예비군이거나 경찰관, 민병대였다.[10] 전성기의 로디지아군은 로디지아 국내로 침투한 게릴라들을 때려잡는 건 물론, 모잠비크와 잠비아에 있는 본대까지 쳐들어와 휘젓고 다녔다.[11] 애초에 방대한 국경지대를 수천여명의 정규군+2만명 내외의 경찰과 예비군으로 남는게 숫자인 게릴라들을 상대해야 했으니 이 정도 전과도 대단한거다. 4만-5만명의 게릴라들을 안정적으로 상대하려면 적어도 정규군 10만명이상이 요구된다.[12] 대표적인 예시를 들자면 무가베는 초대 짐바브웨군 총사령관에 샌디 맥린(Sandy Maclean, 1932~2019) 중장을 대장 진급시켜서 임명했고 정보기관 수장에는 과거 자신을 포함한 게릴라 지도자들을 감시하고 암살 시도까지 했던 로디지아 경찰(BSAP) 정보국장 케네스 플라워(Kenneth Flower, 1914~1987)를 그대로 유임시켰다. 둘 다 로디지아군 출신으로도 모자라 백인이었다.[13] 특히 중국의 지원을 받은 ZIPRA 출신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14] 웃기게도 무가베는 짐바브웨에 콜레라가 퍼질 때 콜레라를 영국이 개발한 화학무기라고 진지하게 주장할 정도로 개인적으로는 영국을 혐오한 인물이었다.[15] 다만 구쿠라훈디 학살에 가담한 제5여단은 단원 대부분이 무가베파 게릴라 출신이었으며, 이들은 은데벨레족을 학살한 것마냥 조슈아 은코모파 게릴라들도 학살했다.[16] 다만 루소는 결국 로디지아에서 전사했다[17] RHODESIAN RECON VEST, 한국 서바이벌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RHODESIAN을 스펠링대로 읽어 로데시안 베스트라고 알려져 있다.[18] 1975년 이후 오랜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 등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스미스 총리는 기존의 입장을 뒤집고 로디지아 의회의 흑인 의원들을 비롯한 온건파 흑인들과 정권 이양 문제를 놓고 협상을 시작했는데, 이 문제를 놓고 백인 중심의 로디지아 전선이 온건파와 강경파로 파벌이 갈렸다. 논쟁이 격화되다 못해 당이 쪼개지기 일보 직전에 몰리면서 총리직까지 위태로워지자 스미스는 의회해산 후 조기총선을 한 끝에 협상에 반발하는 강경파를 의회에서 축출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로디지아 백인들의 인종관 실태를 여지없이 국제사회에 드러냈으며 백인 우월주의자로 가득하던 로디지아군의 정예부대와 로디지아 내각의 관계를 악화시키는데 일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