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1 14:35:37

로버트 하웟 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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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57대 법무장관
미합중국 前 연방대법관
로버트 H. 잭슨
Robert H. Jackson
파일:로버트 잭슨 대법관.jpg
<colbgcolor=#00001b><colcolor=#f2ba37> 본명 로버트 하웟 잭슨
Robert Houghwout Jackson
출생 1892년 2월 13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워렌 카운티 스프링 크릭
사망 1954년 10월 9일 (향년 62세)
미국 워싱턴 D.C.
국적
[[미국|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재임기간 제57대 법무장관
1940년 1월 18일 ~ 1941년 8월 25일
연방대법관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 임명)
1941년 7월 11일 ~ 1954년 10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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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1b><colcolor=#f2ba37> 부모 아버지 윌리엄 엘드레드 잭슨
어머니 안젤리나 허우트
배우자 아이린 게르하르트 (1916년 결혼)
자녀 2명
학력 프루즈버그 고등학교 (졸업)
유니언 대학교 올버니 로스쿨 (법학 / 수료)
직업 판사, 변호사
정당

경력 페니, 킬린 & 나이 변호사
미국법률연구소 이사
미국변호사협회 대의원회의 의장
우드로 윌슨 뉴욕주지사 선거 켐페인 제임스타운 조직위원장
뉴욕주 사법개혁위원회 위원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 선거 켐페인 법률위원장
국세청 법무 자문위원
법무부 차관보 겸 세무국장
법무부 차관보 겸 반독점국장
제24대 법무부 송무차관
제57대 법무장관
연방대법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검사
}}}}}}}}}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연방정부 공직 재임기2.3. 연방대법관 재임기2.4. 뉘른베르크 재판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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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법조인이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1892년, 펜실베이니아주 워렌 카운티 스프링 크릭의 가족이 운영하는 농장에서 태어났다. 이후 뉴욕의 프레즈버그로 이사 가 유년시절을 보냈고, 1909년에 프루즈버그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유니언 대학교 올버니 로스쿨에 입학해 2년제 프로그램을 수료하고, 1913년 21세의 나이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여 뉴욕 제임스타운에서 처음으로 변호사사무소를 열었다. 그리고 1916년 아이린 게르하르트와 결혼했다. 1917년 로펌 ‘페니, 킬린 & 나이’에 고용되었다.

로버트는 선도적이고 유명한 변호사가 되었고, 여러 법률단체의 지도부를 맡아 전국적으로 명성을 높였다. 1930년에 미국법률연구소 이사로, 1933년엔 미국변호사협회 대의원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로버트는 정치계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1916년 뉴욕주지사 선거 당시 우드로 윌슨[1] 후보의 선거 켐페인의 제임스타운 조직위원장으로 선거운동을 지휘했고, 민주당 뉴욕주위원회의 구성원이었다. 또한 뉴욕주 사법개혁위원회의 위원으로도 재임했다. 이후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어린 시절 친구였던 프랭클린 D. 루즈벨트[2] 후보의 선거대책본부 법률위원장으로 활동했다.

2.2. 연방정부 공직 재임기

루즈벨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국세청 법무 자문위원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법무부로 옮겨 법무부 차관보로서 세무국장, 반독점국장을 역임하고, 송무차관으로 임명되었다. 법무부 송무차관은 미국 정부를 상대로한 연방법원의 소송을 담당하는 최고직위이자 연방대법관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불린다.

그가 법무부 송무차관직에 있는 동안 미국 정부는 연방정부 상대 소송에서 총 44건 중 38건을 승소하는 엄청난 성과를 보였다. 연방대법관을 역임한 루이스 브랜다이스는 로버트가 평생 법무장관으로 있어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그를 1940년 대선에 출마시켜 자신의 후계자로 만들려고 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가능한 한 자주 대통령 연설에서 로버트를 호의적으로 언급하고, 로버트가 루즈벨트의 공개 행사에 자주 참여하도록 하는 간접적인 형태부터, 1938년 뉴욕 주지사 선거에 출마시키려고 압박하는 등의 행동도 했으나, 뉴욕주 민주당 지도부의 저항에 부딪혀 포기했다.

1940년, 제57대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샘 홉스 하원의원이 발의한 중범죄가 의심되는 상황에 한해 연방수사국이나 다른 정부기관의 도청을 합법화하는 법안에 찬성했다. 다만 이 법안은 제임스 로렌스 플라이 연방통신위원회 위원장의 반대로 결국 폐기되었다. 또한 그는 미국이 공식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 전에 연합군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한 무기를 공급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무기대여법을 만드는 작업을 도왔다.

2.3. 연방대법관 재임기

1941년, 연방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연방 사법부 선서[3]를 위한 법정에서 웅변적인 글쓰기 스타일과 개인의 자유를 옹호한 것으로 유명했다.

‘웨스트버지니아주 교육위원회 대 바넷’ 사건(1943)에서 성조기에 대한 경의를 표하도록 의무화한 공립학교 규정이 위헌이라고 판결하여 바넷의 편을 들어줬고, ‘영스타운 시트 & 튜브 주식회사 대 소여’ 사건(1952)에선 미국 대통령이 사유재산압류할 수 있는 권한을 제한하는 결정에 다수의견을 내어 동의했다. 이 사건에서 대통령의 권한 주장을 평가하기 위한 3단계 절차[4]를 공식화했으며, 이는 미국 연방대법원 역사상 가장 널리 인용된 의견 중 하나로 남아있다.

코레마츠 대 미국’ 사건(1944)에서 소수의견을 냈다. 일본 제국진주만 공습의 여파로,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2년 2월 19일, 전쟁부가 일부 또는 모든 미국인의 거주를 금지할 수 있는 군사구역을 설정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 법을 악용해 미육군 서부방위사령부는 모든 일본계 미국인의 서부 해안 지역의 거주를 금지하고, 이들을 수용소에 갈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23세의 일본계 미국인인 프레드 코레마츠는 군사구역을 떠나기를 거부하여 미국이 미국 수정헌법 제5조를 위반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로버트는 이 사건 판결에서 전쟁 시 국가 안보를 위해 개인의 권리를 박탈하는 전쟁부의 능력이 가진 위험에 대해 경고했고, 인종차별에 대한 반대 의견을 내었다. 로버트의 의견과 반대로, 인종차별과 일본계 억류를 묵인한 이 판결은 ‘역대 최악의 대법원 판결 중 하나’로 불리며 널리 비판받았다.

‘데니스 대 미국’ 사건(1951)에서 스미스법[5] 제2조 및 제3조 위반으로 기소된 미국 공산당 사무총장 유진 데니스가 수정헌법 제1조에 따라 언론, 출판 및 집회의 자유를 행사할 권리가 없다고 판결한 것에 동의의견을 냈다. 로버트는 이 사건 판결에서 공산주의자에 대해 철저히 분석하여 그들을 공산주의 정책에 의해 규율되고 세뇌된 매우 헌신적이고 고도로 선택적인 그룹으로 특징지었으며, 이들을 법적으로 보호하는 것은, 공산주의 혁명의 음모가 잠복기 기간 동안 보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명시했다.

획기적인 대법원 판결로 유명한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1954)에서 다른 대법관들과 함께 인종이 분리된 학교가 비록 교육의 질이 동등하더라도 공립학교에서 인종 분리를 강제하는 주들의 주법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2.4. 뉘른베르크 재판 파견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로버트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나치 전범들의 기소와 처벌을 위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미국 측 검사로 임명했다. 그는 기소장을 작성하는 작업을 도왔다. 그는 재판에서의 검찰의 역할을 강하게 주장했으며, 뉘른베르크 법원 앞에서의 그의 개회 및 폐회 변론은 크게 환호받았다.


[1] 제28대 미국 대통령[2] 제32대 미국 대통령[3] 미국의 모든 연방판사는 이 선서를 하여야 한다.[4] 첫번째로 대통령이 의회의 명시적 또는 묵시적 동의에 의한 권한으로 행동하는 경우, 두번째로 의회가 동의, 부여 및 권한 행사 거부 없이 침묵하는 경우, 마지막으로 대통령이 의회 명령을 무시하는 경우.[5] 공식적인 약칭은 ‘외국인 등록법’으로, 무력 및 폭력에 의한 미국 정부의 전복을 옹호하는 것에 대한 형사 처벌을 규정하고, 모든 비시민권자 성인 거주자가 연방 정부에 등록하도록 규정한 법이다. 한국의 국가보안법과 비슷한 법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