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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646년 운그바르 연합으로 분리된 동방 가톨릭 교회의 일파이다. 오늘날에는 우크라이나 자카르파탸주(무카체보 교구)와 북미 피츠버그(대교구)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2. 역사
카르파티아산맥 일대에 거주하던 루신인들은 역사적으로 정교회 신자였으나, 근세 들어서 가톨릭이 국교였던 합스부르크 제국[1]의 지배를 받으면서 가톨릭화 압력을 받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 내 루신인은 대개 가톨릭이나 개신교를 믿는 헝가리인, 폴란드인, 독일인 지주의 농노로 착취당하는 입장이었고, 루신인 정교회 성직자들 역시 일반 농노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환경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엄연히 국교가 가톨릭인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이들을 계속 정교회 신도로 놔두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시키자니 봉기도 일어날 수 있거니와, 농노들과 지주, 귀족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면 사회 구조 유지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은 이러한 배경 하에서 탄생한 종파였다.1646년 헝가리 왕국의 운그바르에서 합의된 운그바르 연합의 결과 정교회 성직자들은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되, 정교회 전례를 유지하는 연합 교회를 만들게 되었다. 빈곤한 상황과 차별에 시달리던 정교회 성직자들은 1649년 운그바르에서 동방 가톨릭 교회로의 개종을 공식적으로 결정했으며 1652년에는 로마 교황청에 이 결정을 전달하여 승인받고 인준받았다. 농노인 평신도들은 자신들도 알게 모르게 동방 가톨릭 신도로 편입되었다. 루신인 농노들은 대개 고립된 산악 지대에 거주하는 상황이었고, 외부와 소통이 적었던 탓에 자신들을 정교회 신도로 알고 있다가, 도시로 나가서야 그동안 자신들이 동방 가톨릭 교회에 속했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내에서 1596년 브레스트 연합의 결과 분리된 종파로, 교회가 분리된 기원, 배경, 시기가 서로 달랐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인과 루신인 사이의 연계성을 이유로 갈리치아와 자카르파탸에서는 똑같은 종류의 종교 서적과 필사본이 사용되었다. 굳이 나누자면 갈리치아 일대의 동방 가톨릭 교회를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라고 칭한다면, 자카르파탸와 슬로바키아 등 루신인들 거주지역 일대의 동방 가톨릭 교회는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 교회라 불렸다.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고,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로부터 독립한 각국 정부로부터 박해와 탄압을 겪게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세르비아, 폴란드, 소련 입장에서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은 오스트리아 식민 지배의 유산으로서 인정할 수 없던 것이었고, 잘못하면 별개의 루신 민족주의와도 연계되어 분리주의 운동 혹은 영토 상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다분했던 것이다.
20세기 중반 68 혁명 그리고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의 반종교 정책으로 중, 동부 유럽 대부분 지역이 세속화되면서, 일반인들 사이에서 과거와 같은 가톨릭, 동방 가톨릭, 정교회 신자 사이의 엄격한 구분이 희미해지면서 소수자에 해당하는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 신도들은 여타 지역 주민들과 동화되기 이르렀다. 우크라이나의 경우 역시 소련 시절 이루어진 루신인 민족 정체성 탄압과 소련 해체 이후 복권된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가 자카르파탸 지역의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 교구 지역을 은근슬쩍 흡수한 것, 그리고 각국에 흩어져 있는 신자가 국가별 독립교단으로 나누어지면서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 자체는 교세가 그리 크지 않은 상황이다.[2]
3. 미국에서의 확장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붐이 불면서 상당수의 루신인들이 미국 각지의 광산 노동자 등으로 이민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오는 사람들 중 헝가리인이나 오스트리아인 비중은 적은 편이었고, 이민자 대부분은 오헝제국의 아웃사이더였던 유대계 혹은 슬라브계 신민들이었다. 미국으로 이주한 루신인 이민자들 중에는 범슬라브주의에 경도되어 자신을 러시아계 미국인으로 규정한 경우도 있었으나, 이들 중 러시아어가 가능한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루신어나 슬로바키아어를 사용하는 이민자들은 피츠버그를 중심으로 그리스 가톨릭 교회를 세우고 운영하는데, 상술한 이유로 유럽에서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 교세가 약화되면서 외려 미국 내 교세가 더 커지는 현상이 벌어졌다.교황 비오 10세는 1907년부로 미국과 캐나다 지역의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과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을 통합해서 운영할 것을 지시하였으나, 루신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 사이에 갈등이 불거지면서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 교회를 독립해서 운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다.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도들은 대개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출신으로 같은 갈리치아 방언을 사용하며, 지역적 연대를 바탕으로 뭉쳤다면 여타 그리스 가톨릭 신도들은 여러 다양한 지역 출신이라 상대적으로 차별받는 입장이 되었다. 특히 헝가리나 트란실바니아 출신 그리스 가톨릭 교회 신도들 사이의 불만이 컸다. 결국 1938년부로 미국 내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와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 교회는 분리되어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 신자 중 유명 인물로는 앤디 워홀을 꼽을 수 있다.
오늘날 미국 내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 교회 소속 신도들은 대략 30~40만여 명 사이로 추정된다. 과거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 교회 신도들 대다수가 루신인 출신 이민자들과 그 후손들이었다면, 오늘날에는 혼혈 및 인종 간 통혼 등의 이유로 상당수의 히스패닉 및 흑인 신자들도 생기고 있다.
[1]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의 트란스카르파티아 지역은 헝가리 왕국 영토였다. 그러나 1526년 모하치 전투로 오스만 제국군에게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군이 대패하면서 러요시 2세가 전사하고 처남이자 매형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가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로 편입되었다.[2]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의 유럽지역 교구인 무카체보 교구 신자와 형제 교단인 헝가리, 슬로바키아 그리스 가톨릭 신자 규모를 합산하면 약 70만 명 규모로 생각보다 그렇게 작은 규모는 아니다. 피츠버그 대교구는 세 교단 소속 북미 신자들을 모두 통할하는데도 신자 통계는 약 10만 명 정도밖에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