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20:21:56

만부교 사건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wiki style="margin:-10px"<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f9d537><tablebgcolor=#f9d537>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태조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f9d537,#2d2f34><colcolor=#670000,#f9d537> 생애 및 활동 <colbgcolor=#fff,#1f2023>생애 | 평가 | 일리천 전투 | 훈요 10조 | 만부교 사건
가계 가족관계
기타 대중매체
}}}}}}}}} ||


1. 개요2. 발생 배경3. 평가
3.1. 긍정3.2. 부정3.3. 결론
4. 기타

[clearfix]

1. 개요

고려 태조 재위 24년이자 요태종 재위 15년차인 942년 10월, 거란이 세운 요나라가 화친을 맺기 위해 고려에 사신 30명과 선물로 낙타 50마리를 보냈다. 하지만 고려는 도리어 요나라의 사신들을 모조리 섬으로 유배보냈고 이 중 일부는 자살하거나 사약을 받아 죽기도 했다. 그리고 고려는 선물로 데려온 낙타 50마리를 개경 만부교 밑에 묶어서 굶겨 죽이는 것으로 화답했다. 양국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고[1], 후에 거란이 3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하는 간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낙타 50마리가 당시 고려 수도 개경의 만부교 밑에서 굶어 죽었기에 만부교 사건이라고 부른다.

2. 발생 배경

명목상 이유는 고려 태조 왕건"거란과 발해는 원래 우호적인 나라였는데, 거란이 갑자기 의심을 일으켜 발해를 무도하게 멸망시켰기 때문에 벌였다"라는 것이다. 왕건은 거란에 대한 증오가 어찌나 심했는지 아예 거란을 '짐승의 나라'라고 대놓고 비하했다. 유명한 훈요십조에서 "거란은 금수의 나라이니 그 의관을 본받지 마라"라고 못박아 두었을 정도.

고려 태조가 이런 태도를 보인 실질적인 이유는 바로 "발해유민을 위해 거란 사신을 모욕하는 정치적 퍼포먼스"이다. 당시 왕건이 발해 쪽에서 내려온 유민들을 많이 받아들여 국내에 정착시키던 상황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얼추 답이 나온다. 심지어 이 유민들은 단순한 난민이 아니라 왕족, 귀족, 무사 등이 존재하는 사실상의 군벌이었다. 태조-혜종의 재위 기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수백명에 달하는 왕족과 고위급 관리를 비롯한 수만호의 발해인들이 귀부한 상황이었다.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당한데다 귀부한 이들이 고려의 북부 변경 지역에 배치됐다는 점까지 고려해본다면, 발해 출신의 유민들을 다독이기 위해 거란과 적대 노선을 걷겠다는 확실한 퍼포먼스가 필요했던 것이다. 낙타를 단순히 도축하지 않고 굶주림을 잘 견디는 낙타를 물가인 다리 아래에 묶어두었다는 것은 낙타를 죽이기는 죽이되 되도록 오래 살려서 그 의미를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호족들이 사병을 거느리면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해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강성해짐으로 인하여 이를 억제하기 위한 강한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었기에 거란과의 긴장관계를 통해 후삼국 통일 이후 호족들의 왕권에 대한 도전을 무마하고 중앙집권화를 꾀하려는 정치적인 의도도 짙게 깔려있었다.

3. 평가

어느 시대에 내렸느냐에 따라 달라졌다.

3.1. 긍정

강동 6주를 얻게되는 성종, 동북 9성을 차지하는 예종 때까진 고구려 계승을 표방함에 따라 태조 왕건이 추진했던 공격적 북진정책의 기조가 강하게 드러났으며, 따라서 딱히 크게 주목받지 않았다. 윤관 문서에도 나오지만, 윤관은 고구려가 잃은 땅을 고려가 되찾았다며 자화자찬했다. 현종, 덕종 대에도 고려는 거란과 사이가 좋지 않아 흥료국이 등장했을 때 참지정사 곽원이 군대를 끌고 올라간 적이 있고, 거란의 성을 부수자고 유소, 왕가도 등 신하가 출병을 부탁한 적 있다.

물론 사료가 소실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고려 후기에 충선왕과 이제현이 논담을 나눈 것 외에는 고려시대에 이 사건이 언급된 사료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3.2. 부정

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차츰 고구려 계승의식과 고토 수복은 명목상의 이념으로만 남게 된다. 또한 동북 9성 이후 단순히 '고구려계 통일 국가'에서 신라가 주장했던 '삼한일통의 국가'로 고려의 이념이 점차 전환되어 가면서 점차 북진에 대한 의지가 약해졌고,[2] 무엇보다도 여몽전쟁을 겪은 이후에는 이미 고려인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으로 여러 계통의 주민들의 정체성이 완전히 일원화되면서 당대의 복잡한 내부적 사정 또한 잊혀져 만부교 사건은 조금씩 다른 평가를 받게 된다.

그리하여 원 간섭기에 들어서 충선왕은 "낙타 50마리 키우는 것이 백성들에게 무슨 피해가 간다고, 정 낙타를 받기 싫었으면 돌려보내면 그만이지, 죽일 건 또 뭔가?"하고 선조인 왕건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다고 신하들에게 말한 바가 있다. 고려사 태조 세가에 따르면 "중국에서도 낙타 기르는데, 우리도 한두 마리 정도 기른다고 뭐 안 될 게 있다고 그러신 건가?"하고 이제현에게 충선왕이 묻자, 이제현의 대답이 딱 "뭔가 깊은 뜻이 있으셨기는 하겠지요. 아마도" 식이다. 이 소리를 나중에 누가 또 한다

친명 사대 외교를 기조로 했던 조선 시대에는 대놓고 만부교 사건을 거란에 대한 적대 즉 '고구려 옛 땅인 요동 수복의 의지'로 해석하기가 심히 껄끄러웠다. 정치적 입장을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사람들도 죄없는 짐승 굶겨죽인 행동은 도리가 아니라며 부정적, 비판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보면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 즉 "모든 역사는 현재의 시점에서 재해석되고 재창조된다"는 역사학자 베네데토 크로체의 말이 적용되는 부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사치를 경계하는 의미"라는 해석도 등장했다. 실학자 연암 박지원은 이를 두고 "아무리 오랑캐를 거부한다지만, 죄 없고 말 못하는 짐승을 굶겨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며 비판했다. 외국에서 보내준 코끼리[3]나 원숭이를 돌려보내면 보냈지 도살하진 않았던 조선 사대부들로선 정치적 이해를 떠나 납득하기 힘든 방식이었다.

조선 성종 대 편찬된 동국통감도 이 사건을 가지고 왕건을 비판했다. "그 연유를 추구하여 보면 모두 고려 태조가 강성한 도둑을 대처하는 데에 그 방도를 잃고, 화친을 무시해 끊은 소치로 그런 것이니, 후손에게 물려 줄 계책의 실수를 이루 다 한탄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부정적인 평을 내렸다.

3.3. 결론

만부교 사건은 그 당시 기준으로도 꽤나 극단적이면서도 공격적인 외교적 결례였음은 분명하지만 당시 고려 조정에게는 그렇게 해야 했던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만부교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 왕건의 통치기와 후대 왕조들이 처했던 상황은 상당히 달랐기 때문. 그 탓에 후대의 시각으로만 바라봐서는 해당 사건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태조 왕건을 필두로 한 고려 조정이 해당 사건을 일으킨 뒷배경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로 추측된다.

첫 번째는 고려 초기에 받아들인 수많은 발해유민들의 반 거란의식을 고취시켜 그들을 포섭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발해 멸망 이후 수많은 발해 유민들이 고려에 귀순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규모 역시 유민이라고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컸는데, 최소 수만 명에서 최대 수십만 명까지 추산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고 그중에는 발해의 왕족, 귀족, 지휘관, 무사와 같은 고위 계층도 상당수 있었다. 즉, 고려 입장에서는 국력을 급격히 불릴 수 있을 정도의 양질적으로 엄청난 인적 자원이 내부로 유입되어 왔으니 이 인구를 확실히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4]

고려는 발해 유민들을 발 빠르게 고려 사람으로 인정해 주었는데 특히 그 지배층을 매우 우대하였다. 발해 역시 고구려계 후손들이 주축이 되어 세운 만큼 고려와 동질성이 제법 깊어 고려는 발해 유민들을 빠르게 동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특히 왕족이나 고위 무장들은 고려에서도 왕건이 직접 이들에게 호족에 준하는 귀족 작위를 내려줄 정도로 우대받았다. 그런데 그런 대우와는 별개로 고려 조정에서 만지작거릴 수 있는 카드는 발해 유민들의 반거란의식을 이용해 거란에 맞서는 것이었다. 발해 유민들은 당연히 조국을 멸망시킨 거란에 대해 맹렬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므로 국가 차원에서 거란에 대한 적대 노선을 명확히 한다면, 발해 유민들의 원한을 달래주는 동시에 자연스레 고려와 발해 유민들 사이에 동질감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 고려 조정의 계산이었다. 만부교 사건은 발해유민들을 확실히 고려인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국내 정치적 목적으로 벌어진 외교적 퍼포먼스였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당시 국제정세상 고려 스스로도 거란과 적대할 이유가 매우 많았다는 것이다. 당시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자처하며 북진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고려는 그 정체성부터 창업군주인 왕건을 포함한 건국 세력부터가 패서 지역의 고구려 유민의 후손들 출신으로서, 요동 및 고구려의 옛 영토들을 회복해 고구려의 복원을 꿈구는 고토 회복 의식의 정신적 유산을 대대로 공유하고 있었으며, 개국 이념의 전면에도 서경 확보라는 정통성을 내세웠다. 이들은 당연히 명분만을 따지던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요동을 비롯한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는 것이 목표였다. 당시에 해당 지역을 점유하던 것은 거란족의 요나라였으므로 엄밀히 말해 당시 고려는 거란과 영토 분쟁 상황에 놓여 있던 것이다. 고구려 고토 회복을 위해서는 언젠가 외교적으로든 군사적으로든 고려와 요나라가 충돌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이는 잠재적 적국이나 다름없던 거란에 대한 고려의 적대감을 고조시키는 요인이었다.

결국 거란이 침공할 때 이를 명분으로 내세우기는 했지만 이는 전쟁의 실질적인 원인은 절대 아니었다. 여요전쟁은 이 사건으로부터 50년이나 뒤에나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는 거란이 어디까지나 고려를 침공하기 위한 억지에 가깝게 내세운 명분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또한, 거란만이 아니라 몽골이나 후금도 중원을 공격하기 이전에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한 예방전쟁 격으로 후에 여몽전쟁이나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을 일으켜 한반도로 쳐들어온 사례가 있었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북방의 기마민족이 대륙 침공 이전에 예방 전쟁을 위해 한반도를 먼저 공격하는 것은 상례였다. 그러므로 이 사건이 없었다 하더라도 거란의 침공은 불가피했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 대륙의 분열기에는 한반도 통일 왕조가 충분히 북진해 패권국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중국에 통일 국가가 자리잡고, 군사적인 부분에서만은 그 통일 중국도 능가하는 유목국가 또한 탄생하며 고려의 정책이 공격에서 방어로 전환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만부교 사건의 의의도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4. 기타

  • 역사적으로 유목민족들은 낙타를 선물한다는 명목으로 사신을 보냈는데 이들은 외교관이자 전사이며 동시에 첩자였다.[5] 특히 낙타는 짐을 많이 실을 수 있어 전쟁시 군수물자를 나르는데 많이 쓰는데 이러한 낙타를 50마리나 보냈다는 것은 대규모 침략을 예고한 것이었다. 실제로 병자호란 당시 숭덕제는 조선에 말과 낙타를 선물한다는 명목으로 보냈는데 이들은 청나라와 조선을 오가며 말과 낙타가 오갈 수 있는 길을 파악했다. 평생을 전장에서 지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태조 왕건이 유목민족이 보낸 사신과 낙타의 의미를 모를리 없었을 것이다.
  • 이 죄 없이 굶어 죽은 낙타들은 쌍봉낙타로 추정된다. 고구려 시대 때부터 쌍봉낙타를 거란에서 특산품으로 뽑아가 왜국에 선물했다는 기록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
  • 만부교라는 이름은 '1만 명이 나서서 놓은 다리'라는 의미였는데, 이 사건이 발생한 후로 탁타교(橐駝橋, 약대. 즉 낙타다리)로 개칭했으며, 정월대보름에 이 다리를 건너면 다리에 병이 낫는다고 해서 밤만 되면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 현재 탁타교는 북한개성시에 위치해 있다고는 하는데 북한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서 상상도를 내놓은 것을 보면 현재 그 원형이 남아있는 것 같지는 않다. #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2008년에 북한에서 낙타교 유적을 발굴했다고 한다. #
  • 유사사례로 호주-중국 무역 분쟁 당시 중국에서 컨테이너에 실려온 호주산 랍스터들의 통관을 거부하면서 랍스터들이 컨테이너 안에서 무참히 폐사하는 일도 벌어졌다.#

[1] 만부교 시간 5년 후에 후진에서 유학하다 거란에게 붙잡혀 거란의 관리가 된 최광윤이 ‘거란이 고려를 침공할 계획을 짜고 있다’면서 서신으로 이 사실을 정종에게 알렸고, 정종도 거란의 위협을 심각하게 인식했는지 광군 제도를 도입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였다.[2] 이는 이념적인 것보다는 현실적으로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와 같은 강대국들이 연이어 만주를 장악한 탓이 더 크다. 이때로부터 한참 뒤인 원말명초에도 공민왕이 그 틈을 탄 제1차 요동정벌을 시도하는 등 이념적인 것을 떠나 요동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당대인들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나 나하추를 비롯한 만주의 몽골 군벌들 및 명나라에 대적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웠기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나게 된다.[3] 조선 태종 때 외국에서 선물받은 코끼리가 사람을 밟아죽이는 사건이 벌어지자 태종은 이 코끼리를 죽이진 않고 귀양보낸 적이 있다.[4] 특히 왕건은 개성 일대, 즉 상대적으로 발해와 가까운 지역을 근거지로 하고 있다. 발해 유민들도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한반도 남쪽까진 안 갈테고 그리고 기존의 신라는 너무 남쪽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즉 왕건 입장에서는 발해 유민이란 자기 지역 인근을 발전시킬 좋은 기회다. 이는 당시의 고려는 중앙집권제 국가라기보다는 봉건제에 가까운 국가로 보면 이해가 쉽다.[5] 쉽게 말하자면 이들은 일종의 화이트 요원인 셈이다. 현대에도 많은 국가들이 자국 소속의 정보기관원이나 국방무관, 경찰주재관 등을 이런 식으로 써먹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