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9 19:45:46

메넥세노스


1. 개요2. 등장인물3. 줄거리
3.1. 도입부3.2. 아스파시아의 추도사3.3. 결말부
4. 여담

1. 개요

메넥세노스는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이다. 부제는 <추도사>.

2. 등장인물

소크라테스[1]
메넥세노스[2]

3. 줄거리

3.1. 도입부

소크라테스는 길을 가다가 메넥세노스를 만나고 아고라에서 오는 길이냐고 묻는다. 메넥세노스는 긍정하면서 평의회 회의에서 오는 길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정치인이 되고 싶은거냐면서 메넥세노스가 젊은 나이에 늙은이들을 지배하길 원한다며 가볍게 꾸짖는다. 메넥세노스는 만일 소크라테스가 정치에 참여하지 말라고 하면 그렇게 하겠다면서 변명하고, 오늘은 그런게 아니라 평의회에서 전몰자 추도연설을 맡는 이를 뽑느라 갔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누가 뽑혔나고 묻지만 메넥세노스는 회의가 늦어져서 내일로 미뤘고 아마 아르키노스나 디온이 될 것 같다고 한다.[3]

소크라테스는 전쟁터에서 죽는 것은 꽤나 괜찮은 일일수도 있겠다고 한다. 아무리 가난하게 살았어도 값비싼 장례를 치르고 착하게 살아오지 않았더라도 지혜로운 이들이 추도문으로 칭송해준다는 것이다. 연설가들은 전몰자들이 한 일과 하지 않은 일들을 마구 뒤섞어 아름다운 말로 꾸며내 이 도시와 전몰자들, 조상들, 그리고 살아있는 우리 시민들을 숭배한다면서 그러한 연설을 듣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더 고귀해졌다는 고양감을 느끼게 되고 옆에 외국인이라도 있으면 괜히 우월감이 느껴진다고 한다. 이러한 상태가 3일이나 지속되어 4일은 지나야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4]

메넥세노스는 이번 연설은 급하게 준비해야 해서 즉석연설이 요구되니 쉽지는 않을거라고 하나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인 앞에서 스파르타를 찬양하는 것과 같이 누군가의 면전에서 그의 적을 찬양하는 것도 아니고 아테네인 앞에서 아테네를 찬양하는 것인데 그럴리 있겠냐면서 어차피 내용이야 뻔하니 누가 뽑히든간에 미리 만들어놓은 연설문으로 잘 할거라고 한다. 메넥세노스는 살짝 불편한 심기를 띄며 소크라테스가 연설가들을 존경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자 소크라테스는 하나도 존경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메넥세노스는 그러면 소크라테스가 연설을 맡는다면 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훌륭한 스승 아스파시아가 수사학을 가르쳐줬기에 가능하다고 답한다.[5] 자신에게 페리클레스도 가르친 아스파시아가 수사학을, 훌륭한 키타라 연주자 콘노스가 시를 가르쳐 줬는데 시를 람프로스, 수사학을 안티폰에게 배운 이보다는 낫지 않겠냐고 한다.[6] 게다가 얼마 전에 아스파시아가 전몰자 추모식 소식을 듣고 이러한 내용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연설을 들은 바 있다며 까먹었을까 걱정되지만[7] 그것만 아니면 지금 재현할 수 있다고도 한다. 메넥세노스가 아스파시아의 것이든 소크라테스의 것이든 상관없으니 들려달라고 조르자[8] 소크라테스는 자기 마음대로 연설 내용을 유출하면 아스파시아에게 혼난다며 뜸을 들이다 못이긴 척 연설을 시작한다.

3.2. 아스파시아의 추도사

우리의 전통은 추도 연설을 통해 말로써 그들을 기리는데 이는 굉장히 아름다운 전통이다. 아름다운 말은 아름다운 행동의 면류관이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전몰자들의 훌륭함을 칭송하고 유족들의 아픔을 달래줘야 하는데 어떤 방식으로 하는 것이 좋을까가 문제가 된다. 나는 인과관계의 순서, 즉 그들의 훌륭한 태생부터 양육과 교육, 그리고 그들의 업적 순으로 칭송하고자 한다.

우선 그분들의 태생은 이방인이 아니고, 거류 외국인의 후손도 아닌 이 땅이 길러낸 완전한 아테네 사람이다.[9] 그들은 거류 외인들처럼 계모의 손에서 자라지 않고 진짜 어머니의 품 속에서 자라났다.그러니 우선 위대한 어머니 땅를 찬양하는 것에서 시작하겠다. 첫째로, 이 땅은 포세이돈아테나가 서로 자신이 가지겠다고 탐을 낸 신의 사랑을 받는 땅이고 둘째는 다른 땅들이 여러 야수와 짐승을 낳을 때 이 땅은 덕을 지니고 신을 숭배하는 사람을 낳았다. 어머니는 그 자식을 먹이는 수단을 지니기 마련인데. 이 곳이 사람이 먹는 밀과 보리가 자라는 땅임이 그 증거이다. 어머니 대지는 또한 자기 자식들 뿐 아니라 다른 자식들도 먹일 수 있을 정도로 열매를 풍부하게 공급하고[10] 자식들에게 선물로 올리브 나무를 주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식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아테나, 아레스, 헤파이스토스 같은 신들을 교사로 데려와 인류가 지혜와 무력, 기술력으로 번영하게 해 주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이러한 어머니 아래에서 양육과 교육을 받고 자란 후 정치체제를 세우게 되었는데 이는 최선자 정체이다.[11] 우리의 정치 체제는 언제나 과두정에 가까웠다.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이를 민주주의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언제나 왕은 존재했으며 세습에서 대중이 자기가 훌륭하다 생각하는 이를 추대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언제나 덕과 지혜를 지닌 이가 통치자가 되도록 추구해왔으며 노예와 주인이 존재하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평등과 형재애를 추구해왔기 때문에 나약하고 가난하다고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12]

이제 전몰자들의 업적을 논할 차례이다. 자유롭고 훌륭한 환경에서 자라온 그들은 많은 숭고한 일을 공적, 사적으로 해왔다. 저 옛날 신화 시대부터 우리는 그리스를 위해 그리스인들과 싸우기도 하고 그리스 세계의 자유를 위해 야만족과도 싸워왔는데 트라키아아마조네스 바르바로이의 침공을 격파했고 아르고스를 도와 카드모스의 후예와 싸우던가 헤라클레스의 후손을 도와 아르고스에 맞서기도 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시인들의 입으로 널리 칭송되어 왔기 때문에 많이들 알 것이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위대한 역사가 있어 다 말하기 벅찬데 이 중 아직 널리 알려지지 못한 이야기를 시로 만들어 후대에 길이 알리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 나는 시간이 부족해 이 이야기는 더 하지 않겠다.

내가 가장 먼저 칭송하려는 것은 페르시아의 침공을 저지한 위업이다. 키루스 2세다리우스 1세 치하 페르시아는 동방의 여러 민족을 노예로 삼아 대제국을 건설했는데 마침내 그리스에도 마각을 뻗쳤다. 그들은 에레트리아[13]가 자신들의 땅 사르데스를 치려 든다고 억지를 부리며 에레트리아와 아테네의 왕을 끌고가기 위해 50만의 병사로 그리스를 쳤다.[14] 에레트리아는 용맹한 이들이었으나 3일만에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후 마라톤 평원으로 넘어와 아테네 인들도 같은 식으로 처분하길 바랐다. 전 그리스의 폴리스가 페르시아에 겁먹어 감히 아테네를 지원하러 하지 못했고 용맹스러운 스파르타 만이 도우러 왔지만 그들 또한 전투에 너무 늦게 도착했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전투에서 승리해 그리스의 영광을 드높이고 페르시아를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어줬다. 폴리스들은 모든 자유의 아버지인 우리 아테네를 따라 마라톤의 전사들과 같은 방식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첫째 잔은 마라톤 전몰자들에게 바치고 두번째 잔은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들에게 바친다. 우리 조상들은 살라미스에서 승전하며 육지 뿐 아니라 바다에서도 페르시아를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15] 우리 아테네인이 저항이 가능함을 증명해내며 온 그리스의 스승이 되었다. 세번째 잔은 플라타이아이 전투의 용사들에게 바친다. 그곳에서 그분들은 스파르타인들과 합을 맞추며 단결의 미덕을 보여주었다.하지만 그럼에도 페르시아에 붙은 폴리스들이 많았다. 그러니 페르시아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키몬 휘하에서 바다를 누비며 왕중왕의 시야를 분산시킨 분들도 절대 잊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 전쟁이 끝난 후, 이 도시에는 평화와 번영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사람들의 질투를 낳았고 이제는 같은 그리스인들과의 전쟁에 임해야만 했다.[16] 우리는 보이오티아인들의 자유를 위해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고 싸웠다. 스파르타가 전투 사흘째에 도망치자 우리의 전사들만이 홀로 남아 보이오티아인들을 해방시켰다. 그들은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인의 자유를 위해 그리스인과 싸운 첫번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온 그리스가 합세해 우리 나라를 황폐화 시키려 했다. 우리는 해전에서 그들을 이기고 스파기아에서 스파르타인들을 포로로 잡아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는 우리가 같은 그리스 동포를 존중할 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17]

이 평화가 끝난 후 다시 전쟁이 일어나는데 이는 매우 끔찍해서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다. 우리의 시칠리아 원정군은 많은 승리를 거두고 동맹국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지만 불행히도 시칠리아는 아테네에서 거리가 너무 멀었고 제대로 보급과 지원을 하지 못해 수많은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18] 전쟁의 끔찍한 본성은 우리의 적들이 우리의 진짜 적국인 페르시아와 야합을 하게 만들었고 아테네로 쳐들어왔다. 하지만 미틸레네에 우리의 함대가 봉쇄되었을 때 우리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함대를 꾸려 그들을 구원했다. 비록 폭풍우로 그 전투의 전몰자 유해를 수습할 순 없었지만[19] 그들은 영원히 명예롭게 기억될 것이다.

우리 아테네는 전 인류의 공격을 받고도 무적이었다. 우리의 패배는 타국에 정복당한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의 내전으로 인했음이 이를 증명한다.[20] 밖은 평화로웠지만 우리끼리의 싸움이 발발하며 우리 스스로 패배를 맛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친족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내전은 온건했다. 페이라이에우스[21]에 있던 민주파와 아테네에 있던 과두정파는 싸움이 끝난 후 화해하고 서로를 용서했다.[22] 우리의 내전은 다른 폴리스 사람들에게는 만일 내전이 꼭 필요하다면 이 정도만 했으면 딱 좋겠다 싶을 정도로 진행되었다.

우리의 성벽과 함대는 온 그리스를 수호해왔다. 하지만 스파르타 인들은 아테네를 통치하겠다는 야욕에 성벽을 무너뜨리고 배를 빼앗는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렀다. 이후 우리는 이전처럼 그리스 전체를 위해 헌신하지는 않기로 했다.[23] 하지만 우리는 비난받을 정도로 동정심이 깊어 다시 다른 폴리스의 자유를 위해 헌신하는 우를 범했다. 반면 마라톤, 살라미스를 잊을 수 없었기에 페르시아의 왕중왕의 요구는 거절했으나 망명자들과 자원자들이 자발적으로 지원하러 가는 것은 자유롭게 냅두었고 그게 페르시아의 구원이었다. 얼마 안가 우리는 다시 파로스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파르타와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왕중왕은 과거 스파르타인들이 자신들과 맺은 계약[24][25]을 준수해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을 페르시아 치하로 넘기라고 했지만 우리는 천성이 야만족을 거부해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우리의 동맹 코린토스, 아르고스, 보이오티아 등은 두려움에 떨며 스스로 노예가 되는 길을 택했고 우리는 고립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성벽과 식민지를 잃지 않고 전쟁을 끝내는 데에 성공해냈다.[26]

이것들이 우리 전몰자들의 위업이다. 이 밖에도 더 많은 업적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전부 말하기에는 많은 밤낮을 소비해도 모자랄 것이다. 우리 위대한 아테네의 후손들은 비겁함으로 뒤쳐지지 않고 그분들을 본받아 전쟁터에서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전투에 나서기 전 전몰자들이 가족들에게 전해달라 한 이야기를 꺼내볼까 한다.

'아들들아. 이 제사는 너희 아버지들이 매우 용감한 사람이었음을 증명하는구나. 우리는 자기 자신과 우리의 자식들을 불명예스럽게 하느니 영예롭게 죽는 길을 택하였다. 남겨진 너희들에게 조언을 한마디 하자면, 앞으로 너희들이 살아갈 때 이것만은 기억하거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덕(arete)를 추구하거라. 덕 없는 재산추구, 아름다움, 지혜는 모두 쓸모 없을 뿐더러 사악할 뿐이다. 우리는 미덕 추구에서 너희가 우리를 이기기를 바란다. 우리가 진다면 그것은 더없이 명예로운 일일 것이고 우리가 이긴다면 그것만큼 수치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또한 부모의 명성을 자랑스레 여기는 것은 훌륭하지만 자신의 명예를 직접 쌓아올리지 못하고 부모의 후광에 기대다 죽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일 것이다. 만일 너희들이 자기 자신의 덕과 명예를 쌓아올린다면 죽어서 우리 곁에 왔을 때 환영받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는 너희를 박대할 것이다.

우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부모님이 슬퍼한다면 함께 슬퍼하기보다는 위로해주고 최대한 가볍게 견디게 북돋아주기를 바랍니다. 이미 그분들은 충분히 슬퍼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들 자신들이 자식들이 불명예스럽게 살기보단 용기있게 죽기를 원했을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켜드리길 바랍니다. 우리는 부모님들이 결국 슬픔을 극복하고 우뚝 설 것이라고 믿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고 슬픔에 굴복한다면 그 또한 수치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들이 과유불급이라는 격언을 지키고 행복과 불행은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마침내 극복해 우리의 남겨진 아내와 자식들을 양육하는 데에 마음을 쏟는다면 더 훌륭하고 고귀하게 살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국가에게 요청합니다. 우리 가족을 보살펴 주고 우리 부모님의 노후를 소중하게 여기고 우리 아들들을 올바르게 길러 주십쇼. 하지만 우리는 아테네가 이미 그러고 있다고 믿고 이만 줄입니다.'

이것이 그분들이 떠나기 전 남긴 말씀이다. 그분들의 자식 여러분은 아버지를 본받길 바라고 부모님들은 명예로운 자식을 뒀음을 기뻐하길 원한다. 국가는 정해진 법률에 의거해 유족들을 최대한 돌보겠다. 남겨진 자식들을 훌륭하게 교육해 그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전투 대열에 늠름하게 참여시킬 때까지 바르게 성장시킬 것이다. 그리고 전몰자들에 대해서는 꾸준히 기리고 제사를 지내겠습니다. 유족 여러분이 슬픔을 꿋꿋히 이겨내길 빌며 이만 연설을 마친다.

3.3. 결말부

소크라테스가 연설을 마치고 메넥세노스는 연설에 감탄하며 아스파시아를 찬양한다. 소크라테스는 아스파시아를 직접 만나보겠냐고 하지만 메넥세노스는 자신도 아스파시아가 누구인지 알고 이미 만나봤다고 말한다.[27]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연설 내용을 발설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메넥세노스는 그러겠다고 다짐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앞으로 아스파시아의 더 많은 연설을 들려주겠다며 약속하며 대화편을 마친다.

4. 여담

소크라테스의 대화편 중 유독 길이가 짧은 대화편으로 손꼽힌다. 구성도 특이한 편이라 사실상 아스파시아의 연설이 내용 전부라고 볼 수 있고 대화편 형식임에도 대화를 통한 철학적 탐구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린 플라톤)이 수사학적 연설을 좋지 않게 여기고 그것의 필요성을 논파하려 들었다는 점을 고려해 보았을 때 의문은 더더욱 깊어진다. 그러다보니 과거에는 위작 논란이 끊이지를 않았다. 하지만 아카데미아에서 플라톤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에서 메넥세노스의 구절을 인용하기도 하고 키케로 역시 메넥세노스에 나온 플라톤의 추도 연설을 아테네인들이 매우 좋아했다고 언급해 현재는 플라톤의 친저임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28]

메넥세노스가 진품이라면 이를 통해 플라톤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가 논쟁 여부가 된다. 숨겨진 진의를 해석하려 들면 이 대화편은 수수깨끼 투성이가 되는데 크게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 문제가 존재한다. 1. 연설의 저자를 소크라테스가 아닌 아스파시아라고 자꾸 강조하지만 사실 소크라테스의 창작이라는 복선이 존재해 연설의 주체가 애매해진다. 2. 안탈키다스 평화조약 언급을 통해 극 중 시기는 확실하지만 이 시기는 소크라테스 사후로 허구임도 더더욱 확실하다. 3. 연설에서 제국주의 행보를 정의롭게 포장하거나 사건을 숨기는 등 역사왜곡을 꾸준히 저지른다. 4. 대화편 초반부의 메넥세노스와의 대화는 분명 연설가들을 조롱하는 투인데 연설 후반부는 사뭇 진지할 뿐더러 덕과 용기 같이 다른 대화편에 많이 등장한 개념들이 튀어나온다. 5. 다른 대화편에서 반감을 드러내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던 아테네 민주주의를 메넥세노스의 연설에서는 최선자 정치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려는 시도가 나온다.

이에 관한 해석으론 크게 두가지가 존재한다. 첫번째 해석은 당대 수사학과 연설을 풍자한 것이라는 관점으로, 초반부의 익살스러운 분위기에 주목해 당대의 추도 연설 형식으로 연설을 해보이며 비꼬았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메넥세노스에게 자신이 연설을 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데, 원래 연설은 다수 대중 앞에서 하는 것이라는 점을 미루어보아 이는 다수 대중을 현혹하는 연설가들과 메넥세노스 한명에게 정치 진출과 연설의 무용성을 주장하기 위해 수사학을 써보이는 소크라테스를 대조하고 있다. 이렇게 해석하는 이들은 연설 후반부의 전몰자들의 유언 부분도 진지함과 익살을 오가면서 비야냥댄 것이라고 본다. 그 부분에 나온 덕과 용기 등의 개념들은 <국가>에서 주장한대로 그 본질을 엄밀히 따져보기보단 당시 사회에서 쓰는 보편적인 개념으로 쓰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바라보면 메넥세노스는 <고르기아스>의 수사학 비판 연장선 상에 있다. 하지만 이 해석에는 그렇기엔 추도문이 상당히 제대로 쓰여있고 키케로에 의하면 아테네 사람들도 추도 연설로써 이 대화편을 상당히 좋아했다고 전해진다는 점을 설명할 수 없다는 맹점이 존재한다.

최근 각광받는 두번째 해석은 아테네의 제국주의와 패권주의를 이끈 페리클레스의 추도사 연설[29]과 이로 대표되는 당대의 정치철학을 비판하고 그 안티테제를 제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우선 연설의 저자로 아스파시아를 언급한다는 점에서 그녀를 정부로 둔 페리클레스를 염두에 뒀다는 것을 암시하고, 람프로스와 안티폰의 제자라는 이름으로 투키디데스를 언급한다.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수록되었고, 또 현대 학자들은 연설이 투키디데스의 윤색을 거쳤을 것으로 강하게 의심된다는 점에서 메넥세노스를 분석하기 위해선 페리클레스 연설과의 비교대조가 필요하다.
사실 소크라테스적 입장과 투퀴디데스 내지 페리클레스적인 입장의 방식 사이에는 철학과 정치, 이성과 현실, 보수와 진보, 평화 공존과 제국주의 등 서로 다른 목적들과 해결해야 할 서로 다른 문제들이 내재되어 있다.『메넥세노스』에서의 소크라테스는 분명 페리클레스적 삶의 방식에 맞서 당시의 아테네인들은 물론 『메넥세노스』를 읽는 오늘날의 우리들로 하여금 지상에서의 불멸성과 정치적 위대성에 대한 지향을 버리고 자연적 본성에 입각한 정치학에 충실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소크라테스의 연설은 역사에 대한 패러디 또는 조롱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의견의 개진 내지 훈계에 가까운 것이다.
플라톤, 『메넥세노스』, 이정호 옮김, 아카넷, 2021, p.132
페리클레스 연설은 이 추도사가 전몰자들의 용감한 행동에 발끝에나 미칠까를 의심하는 구절로 시작해서 아테네 자체와 역사는 짧게 언급하고 본인들의 제국주의 시대로 바로 넘어가 강력한 제국의 위업에 대해 길게 논한다. 그리고 자유와 행복, 용기를 엮어 강력한 아테네와 그 정치체제, 생활 방식이 가장 숭고한 삶의 이유라고 강조한다. 강한자의 무제한적인 자유를 옹호하며 시민들에게 제국의 영광에 동참하라고 호소한다. 반면 메넥세노스 속 연설은 추도사를 전몰자들의 행동에 걸맞은 행동이라고 칭송하며[30] 시작해 아테네의 땅, 양육, 교육, 신화 그리고 대화편 시잠에서 상당히 오래전인 페르시아 전쟁의 역사 등 제국주의 시대의 강력한 위업보다는 아테네 자체와 그 역사를 강조한다. 또한 그리스 세계의 동포애를 강조하며 이에 걸맞지 않는 역사는 왜곡해 넘기고 역사의 다른 부분 또한 플라톤이 생각하는 미덕에 걸맞은 방향으로 윤색한 것이 보인다. 숭고한 인간의 가치보다는 종교적인 정의관을 중시하고 공격적이고 진취적인 윤리보다는 덕, 용서, 화해 등을 더더욱 강조한다. 메넥세노스의 내용 전반이 페리클레스로 대표되는 제국주의멜로스의 대화와 같은 약육강식 논리를 만들어내 이를 부추긴 소피스트들의 윤리관을 비판하고 미덕과 정의를 중시하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에도 한계는 존재한다. 플라톤이 가치관을 진지하게 주장했다기에는 초반의 익살스러운 풍자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가 걸린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평소 글쓰기 스타일을 고려해 보면 플라톤은 결국 상기 두 가지 해석적인 의도를 모두 가지고서 독자로 하여금 '두 마리 토끼 잡기'를 하도록 했을 가능성이 있다. 교조적인 이론이 많은 <<국가론>>만 하더라도 엄밀히 말하면 결론이 흐지부지되면서 초기 대화편들과 마찬가지로 아포리아로 끝난다. 즉 플라톤의 주관이 강하게 피로 혹은 권유되되 끝내 강요되지는 않는 것이다. 여러 대화편에 일관된 플라톤의 저술 목적은 특정 관점을 무조건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관점을 나름대로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이로써 굳어 있는 권위적 사조와 대중적 상식의 해체를 유도하며, 독자로 하여금 놀라움[31]과 혼란, 문제의식, 지적 호기심, 주체적 해결 욕구 등을 느끼게 하여 스스로 사유하게끔 하는 데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메넥세노스>>의 경우, 플라톤은 먼저 연설문을 대할 때의 주의점을 충분히 숙지시켜, 후속할 연설문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소위 국뽕에 차는 것에 대비할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당대 아테네인들 역시 연설문 속 시종일관 도덕적, 영웅적으로 묘사되는 아테네의 행보에서 이상적인 모범성을 발견하고 매료되는 동시에, 플라톤의 경고를 잊지 않았다면, 이것이 현실 역사적 아테네의 모습과는 좀 딴판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아테네인들은 플라톤의 경고를 얼마 안 가 잊어버리고 감동적인 연설문에 취하여 키케로의 보고와 같이 다만 애호했을 것이고, 몇몇 사람들만이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두고 진지하게 끊임없이 고뇌했을 것이다.

페리클레스-투키디데스적으로 자랑되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이상성이든, 플라톤이 안티테제로서 제시하는 이상성이든, 현실의 아테네는 연설문 속 이상화, 미화된 그런 모습들과는 다르다. 이를 사려 깊게 주시한 사람은 추도사 연설문으로 대표되는 선동적 수사학의 감성에서 한 발 물러나, 이성적, 비판적, 반성적인 철학을 시작했을 것이고, 그것이 아마 플라톤의 궁극적 의도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러면서도 플라톤 그 자신이 엄청난 수사학적 재능으로 독자에게 유발하고 있는 감성, 이를테면 '너무나도 아름답고 숭고하게 묘사된 저 이상적 모범성을 정말 현실화하고 싶다'는 감성 역시, 독자가 철학을 시작하게끔 되는 동기의 하나로서, 아니 어쩌면 가장 결정적 동기로서 너무나도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 플라톤 문학/철학 특유의 유쾌한 아이러니이다. 이는 훗날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을 재평가하는 바탕을 마련하기도 한 것이다.
[1] 60~70대 노인으로 등장한다. 소크라테스 사후에 있었던 코린토스 전쟁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이 대화편의 광경은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가상의 상황임이 확실하다.[2] 명문가 출신 젊은 정치 지망생으로 등장한다. 이 대화편에서는 아스파시아가 했다는 추도연설을 전해듣고는 감탄하는 역할로만 나왔지만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등장한 뤼시스에서는 적극적인 대화상대로 묘사되었고 파이돈에서도 소크라테스의 곁을 지킨 등 자기 이름을 딴 이 대화편보다 다른 대화편에서 더 제대로 등장한다.[3] 아르키노스는 트라시불로스와 함께 크리티아스 30인 과두정을 몰아낸 인물이고 디온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아 학자마다 누구를 지칭하는지 의견이 분분하다.[4] 당대의 전몰 추도문 전통과 수사학을 은근히 비꼬는 것이다.[5] 페리클레스의 정부. 뛰어난 교양과 능력을 지닌 기녀로 명성을 날렸다.[6] 람프로스와 안티폰 모두 당대의 명사들이다. 이 구절은 실제 람프로스와 안티폰의 제자이자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저자 투키디데스를 저격하는 것으로 보통 해석된다. 투키디데스는 자기 저서에 페리클레스의 전몰자 추도 연설을 수록했는데, 현대 학자들은 현재 전해져 내려오는 연설문에 투키디데스의 윤색이 많이 들어갔을 거라 여긴다. 이 대화편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스파시아의 연설은 사실 플라톤이 페리클레스 연설을 비판하고 이에 대한 안티테제를 제시하려는 의도로 저술된 것으로 보이는데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린 플라톤)가 자신이 투키디데스보다 추도사를 더 잘 쓴다고 주장하는 식으로 해석하면 들어맞는다.[7] 그러면서 자신이 수사학을 배우며 연설 내용을 잊었을 때 아스파시아에게 체벌을 당하며 혼났다고 너스레를 떤다.[8] 사실 아스파시아 얘기는 그냥 둘러댄거고 소크라테스 본인의 창작 연설인지 의심해보는 것이다.[9] 고대 그리스 폴리스들의 시민권 소유 비율은 현대 기준으로 상당히 제한적이었다.[10] 사실 연설 내용과는 달리 아테네 지역은 농사 짓기에 적합하지 않아 솔론 시기 이미 상공업 위주로 전환해 트라키아나 소아시아 등지에서 식량을 수입한지 오래였다.[11] 아테네는 직접민주주의 시기에도 명목상 최고지도자인 10인의 아르콘이 존재했다.[12] 아테네 민주정을 플라톤의 이상인 철인정치 엘리트주의로 꼬아 해석한 듯한 이 문단의 저술 의도는 논란이 많다. 이 대화편의 주 비판 대상이자 민주정 신봉자였던 투키디데스를 비꼰다는 설과 확고한 엘리트주의자였던 플라톤이 자기 나름대로 아테네 민주정을 긍정적으로 재해석해보려 한 시도라는 설, 말년의 <법률>처럼 대의민주주의법치주의같은 대안을 물색해 이를 최선자 정체라는 이름으로 주장한 시도라는 설이 있다.[13] 현 그리스 에비아 섬에 있던 폴리스[14] 실제로는 밀레투스의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아테네와 에레트리아가 사르데스를 선제공격한 것이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이었다. 소크라테스(혹은 아스파시아)가 역사왜곡을 저지르고 있는 부분 중 하나.[15] 사실 살라미스 해전은 아테네만의 승리가 아닌 그리스 연합함대의 승리이다. 또한 영화 300으로 유명한 스파르타의 영광 테르모필레 전투 언급은 하나도 없는데 역시 소크라테스(혹은 아스파시아)가 역사왜곡을 하는 장면이다.[16] 실제로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의 제국주의 패권 행보가 전쟁의 큰 원인이 되었다.[17] 실제로는 전염병으로 인한 타격과 전쟁에 염증을 느끼는 분위기, 페리클레스의 사망, 강경파 실각으로 인해 온건파 정치인 니키아스의 주도로 평화협정을 맺어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종결시킨 것이다.[18] 아테네는 시칠리아의 동맹국들을 지원하기 위해 알키비아데스 등의 주전파의 주장으로 무리하게 개입을 시작하며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하지만 원정 사령관을 맡은 알키비아데스가 미심쩍은 신성모독 누명으로 출항 직전 스파르타로 망명간 후 스파르타 편에 붙어 오히려 아테네에 타격을 주는 등 악재가 겹쳐 아테네는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입었다.[19] 이 사건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악명을 드높인 장군들의 재판의 원인이 된다.[20] 실제로는 크리티아스의 과두정과 트라시불로스의 민주정 세력간의 내전은 리산드로스가 이끄는 스파르타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해 완패한 이후에 발발했다.[21] 아테네의 외항. 과두정 시기 민주파의 망명지로 기능했다.[22] 실제로 내전이 끝난 후 회복을 위해 과거의 일은 불문에 붙이기로 결의했다. 소크라테스 사형 재판도 사실은 제자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의 매국노적 전횡을 문제삼기 위함이었으나 이 협의에 어긋났기 때문에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신을 모독했다는 애매모호한 죄목을 들이밀게 된다.[23] 사실은 아테네의 국운이 쇠퇴해 패권과 제국주의가 무너져내렸을 뿐이다.[24] 스파르타의 장군 안탈키다스는 이오니아를 페르시아에 넘기는 것을 대가로 페르시아를 끌어들여 힘겨운 코린토스 전쟁을 끝마쳤다.[25] 그런데 이 안탈키다스 평화조약은 기원전 387년에 체결된 것으로 소크라테스 사후 13년 뒤이다. 당대인들이 이를 몰랐을 리 없으니 이 대화편은 기본 배경 설정에서부터 허구의 이야기임이 드러난 셈이다.[26] 이민족 페르시아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해 윤색되었지만 실제로는 아테네 역시 전쟁에서 되찾은 식민지와 성벽을 유지하는 대가로 안탈키다스 평화조약에 굴복한 것에 가깝다.[27] 역시 연설이 소크라테스 본인의 창작임을 의심해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28] 플라톤과 멀지 않은 시대를 산 고대 유명 철학자가 해당 대화편을 언급하거나 인용한 사실은 대화편의 진품 여부를 파악하는 데에 매우 큰 근거로 작용한다.[29]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기도 하는 명연설이기 때문에 윈스턴 처칠이나 에이브러햄 링컨, 프랭클린 루즈벨트 등 유명 위인들의 연설도 이의 영향을 받았고 현대에도 연설 연습을 할때 필수적으로 참고하는 고전 연설문이다.[30] 플라톤 대화편에서 덕 없는 행동을 끊임없이 비판한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말보다는 행동을 중시하는 페리클레스를 비판한다 볼 여지가 있다.[31] 철학은 놀라움에서 시작된다고 플라톤은 언급한 바 있다. 이는 그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언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