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69AB1><colcolor=#fff> 모리타카 치사토 [ruby(森高, ruby=もりたか)] [ruby(千, ruby=ち)][ruby(里, ruby=さと)] | Chisato Moritaka | |
본명 | [ruby(江, ruby=え)][ruby(口, ruby=ぐち)] [ruby(千, ruby=ち)][ruby(里, ruby=さと)] (에구치 치사토, Chisato Eguchi)[1] |
출생 | 1969년 4월 11일 ([age(1969-04-11)]세) |
오사카부 이바라키시 | |
출신 |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
거주지 | 도쿄도 세타가야구 세이조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61cm, O형 |
배우자 | 에구치 요스케(1999.06.03 결혼 ~ 현재) |
자녀 | 딸(2000년 2월생) 아들(2002년 5월생) |
학력 | 호리코시 고등학교 (졸업) |
직업 | 가수, 작사가, 작곡가, 드러머, 배우 |
소속사 | 업프론트 크리에이트 |
레이블 | 워너 뮤직 재팬[2]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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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각(美脚)으로 유명한 아이돌이자 가수. 한결 같은 미모를 자랑하는 연예인[3]으로, 90년대 정석 미인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2. 가수 활동
포카리스웨트 이미지 걸 데뷔 영상[4] |
1986년 오츠카 제약에서 주최한 포카리스웨트 이미지 걸 콘테스트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5] 이후 본격적으로 연예인이 되기 위해 도쿄로 상경하여 호리코시 고등학교로 편입하였다. 1987년 자신이 주연을 맡은 영화 「あいつに恋して」의 개봉 전 영화의 주제가인 'NEW SEASON'으로 데뷔.
활동 초반에는 연기활동과 가수활동을 병행하였으나 1988년 싱글 'ザ・ミーハー'[6]의 여름 라이브투어의 리허설 도중 복통으로 입원한 것이 계기가 되어 연기활동을 중단, 이후 가수로서의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1988년 발매한 앨범 'ミーハー(미하)[7]' 중 동명의 타이틀곡을 통해 작사가로 데뷔, 가사의 유니크함을 주목받았고 상기한 입원생활을 바탕으로 작사한 'ストレス'가 또 한번 화제가 되어 이후 거의 모든 작사를 직접 담당하게 된다. 이 작사하는 아이돌로서의 이미지는 그녀에게 유니크함을 가져주게된다.
1989년에는 'ストレス (스트레스)'를 중동풍으로 믹스한 싱글 'ザ・ストレス (더 스트레스)'에서 이후 모리타카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코스프레 의상이 처음 등장하였다.
히트곡 <17세> |
1970년대의 아이돌 미나미 사오리(南沙織)의 곡을 리메이크한 '17才(17세)'가 대히트를 치면서 일약 초인기 가수로 발돋움하게 된다. 특히 무대에서의 의도적인 판치라는 남성팬들의 열광적인 인기를 불러일으켰다.[8] 이 시기 발매한 앨범 '非実力派宣言(비실력파선언)'의 가사 또한 그 특이함이 높게 평가받았다.
히트곡 <내가 아줌마가 되어도> |
1992년엔 '私がオバさんになっても(내가 아줌마가 되어도)'가 히트, "내가 아줌마가 되면 당신은 아저씨야!!"라는 특유의 가사 센스를 보여주며 여성팬들에게도 큰 지지를 받았다. 정작 본인은 50이 넘은 현재도 20대 시절의 몸매를 유지중이고, 심지어 남편인 에구치 요스케도 배나온 아저씨가 되지 않았다.[9]
당대 여성 아이돌 중에서는 독보적인 "댄스 퀸"으로, 노래와 동시에 활발한 무용을 할 수 있는 (당시) 많지 않은 일본 가수중 하나였다. 물론 일본 외에는 당시 자넷 잭슨이나 마돈나 등 실력파 여성 댄스 뮤지션들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지만, 일본 국내에서는 모리타카 수준으로 춤과 보컬을 동시에 소화할 수 있는 여성 뮤지션은 적었다.
물론 모리타카의 댄스는 21세기의 걸그룹이나 댄스가수들의 정교한 안무에 비하면 깡총거리는 수준으로 정적으로 보이겠지만, 특유의 길다란 팔다리를 휘두르며 추는 춤은 그녀의 인기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보컬리스트 드러머로 쌓은 내공 덕인지 춤추면서도 보컬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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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곧게 뻗은 다리는 모리타카 치사토의 트레이드마크이지만 [10] , 치사토는 자신이 ‘미각의 아이돌’ 타이틀로 언플 되는 것을 싫어하였고 자신의 실력으로 인정받고 활동하고 싶어했다. 후년에는 실력파 아이돌로 인정 받았지만 데뷔 초 미각의 아이돌 타이틀 때는 치사토의 무대 의상은 다리를 강조하는 짧은 스커트와 하이힐이 포함된 무대 의상을 자주 착용하였으며 데뷔 초에는 소위 판치라, 즉 팬티가 흘낏 보일 정도로 짧은 스커트를 많이 입었다.
아예 팬티[11]에 머릿글자인 "M"을 새겨 놓은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판치라 역시 치사토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훗날 인터뷰 했다. 한국에선 판치라를 일부러 했다는 설이 돌지만 헛소리였던 셈, 판치라가 싫었음에도 성공을 위해 본인 스스로 이러한 퍼포먼스를 마다하지 않아 당대를 대표하는 퍼포먼스가 좋은 아이돌 중 하나가 되었다.
한편 음악적인 면에서는 아이돌이라는 수식이 무색할 만큼의 실력파 뮤지션이기도 한데, 음악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피아노, 기타[12], 드럼, 리코더 등 다양한 악기에 능하며 특히 드럼은 본인의 곡뿐만 아니라 다른 뮤지션의 세션으로 참여할 정도의 수준급.
이러한 재능을 바탕으로 1990년대에 들어서는 앨범 및 싱글의 수록곡 대부분을 직접 연주하여 수록하는#[13] 등 활발한 음악적 참여를 보였는데, 아이돌과 아티스트의 노선이 명확히 갈리기 시작했던 시점에 아이돌가수의 포지션을 유지하면서도 아티스트와 같이 가수 본인이 음악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보기 드문 행보를 보였다.
모리타카 치사토의 활동 당시는 이미 여성 솔로 아이돌들이 한창 유행이던 시기를 지나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솔로 아이돌로써 90년대 후반까지 꽤 유효한 성공을 거두었다. 89년에서 90년대 초반에는 마츠다 세이코, 나카모리 아키나 등의 정통파 아이돌과 쿠도 시즈카, 나카야마 미호 등의 개성파 아이돌의 전성기 시대가 이미 지나고 스핏츠, WANDS, B'z 등과 같은 밴드 음악의 전성 시대가 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전까지의 아이돌 음악과는 다르게 활동 초기 부터 밴드 형식의 음악을 추구하였고, 마침 그러한 스타일이 당시의 유행에 맞았던 것. 요약하자면, 모리타카 치사토는 80년대 후반 스타일의 아이돌 이미지로 90년대 음악을 추구하여 90년대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아이돌 뮤지션인 셈. 또한 전성기가 빠르고 짧았던 기존의 아이돌들과는 다르게 그녀의 전성기는 이전의 아이돌 여가수라면 전성기를 살짝 지나있을 20대 초중반에 맞이하였고, 에구치 요스케와의 결혼 직전인 20대 후반까지 꽤 오랜 기간동안 안정적으로 인기를 유지했다는 것도 특이사항.[14]
1996년 TAIYO Tour에서 부르는 <太陽と青い月> |
보컬리스트로서는 발성과 비음의 사용으로 인해 평이 갈리나 안정감에 있어서는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는 편이며, 데뷔 초 목소리는 전성기 시절 목소리 보다 조금 더 무게감과 허스키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이다.
데뷔 이래 수차례의 콘서트와 라이브 투어를 개최 하였으며 특히 1990년에서 1993년까지의 라이브 전국 투어는 유례를 찾을 수 없이 많은 공연횟수를 자랑한다.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며 한달에 10번 꼴로 공연하기도 했다. 92년의 투어 기록 링크 공식 페이지의 바이오그래피. Live・Event 참조
또한 모리타카의 가사는 솔직하고 직설적이며 여성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 많아 많은 여성 팬들의 공감을 받기도 했다. 비틀즈의 "내가 64세가 되면"의 여성 버전이라 할 수 있는 노래인 "내가 아줌마가 되어도(私がオバさんになっても)", 남친과 헤어졌으니 절친과 함께 여자끼리 올 여름을 만끽하겠다는 내용인 "나의 여름(私の夏)" 등이 특히 유명.
또한 정말 특이한 내용의 노래들도 제법 많아서, 건물 지붕이 날아갈 정도의 대형 태풍이 상륙했는데도 당일 데이트가 취소될까봐 걱정하는 내용인 “태풍”, 무엇 때문에 토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운전 속도 좀 줄이고, 기름도 간당간당한데 주유 좀 하라고 남친에게 타이르는 내용인 “짜증내면 손해(短気は損気)”, 어릴 적 친구와 지갑을 주워 경찰에게 가져다 줬는데 6개월 뒤에 주인에게서 아무 연락이 없어 결국 반반 나눠 가졌다는 내용의 댄스곡인 “지갑 발견(見つけたサイフ)” 등이 유명하다.
그리고 渡良瀨橋(와타라세 다리), 二人は恋人(두사람은 연인)의 PV에서 뮤지션으로서의 모리타카 치사토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이외에도 콘서트 및 라이브투어에서 직접 연주를 선보이기도 했다.
3. 결혼 후의 활동
2018년의 모습, 전성기 시절처럼 한결같은 아름다움. |
5년간 사귄 2살 연상의 배우 에구치 요스케와 1999년에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고 있다. 2000년 이후에는 여성잡지에 연재를 하거나 드러머로 활동중이며 광고에도 간간이 출연중.
2007년에는 자신의 1993년 히트곡 <渡良瀬橋(와타라세 다리)>의 배경이 된 아시카가 시(足利市)에 그 곡의 노래비가 세워졌다.
2010년에는 일본 어머니 협회의 베스트마더상을 수상하였다.
2011년부터 애들이 웬만큼 컸으니 활동 재개를 고려중이라는 발언을 시작으로 방송에 간간이 얼굴을 비추었고, 공식 유튜브에 꾸준히 셀프 커버곡을 올리고 있다. ‘가창력이 전보다 더 좋아졌다.’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건재. 특유의 비음이 사라지고 보다 차분한 느낌의 목소리가 되었다.
2012년부터는 싱글 컬렉션인 'ザ・シングルス'의 발매 및 연말 가요제 출연, 셀프 커버곡의 공개 수록 등 뮤지션으로서의 활동을 재개하고 있다! 2013년에는 도쿄, 오사카, 나고야에서 콘서트를 개최하였으며 데뷔 25주년 기념 기획인 셀프 커버 시리즈의 음반 발매, 방송 활동 및 라이브 공연 등 조금씩 활동 범위를 넓혀 나가는 중.
FNS의 음악 교양 프로그램인 Love Music에 진행자로 고정 출연하고 있다. DA PUMP의 ISSA 등이 게스트로 출연.
2018년 후지 TV의 연말 가요제인 'FNS 가요제' MC로 활약하였다.
2020년대부터 다시 활발히 음악방송에도 얼굴을 비추고 라이브 투어도 자주 도는데, 20대 시절이랑 똑같이 춤추고 노래하면서도 전성기 시절 외모의 차이도 미소 주름 빼고는 자연스러움을 보여주는데다 목소리톤, 호흡의 변화와 관련된 기복이 없는 굉장한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50대라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꾸준한 관리, 댄스와 목소리 등 주름이 없었다면 냉동인간급 무대로 평가받았을지도. 그녀의 최근 공연 유튜브 댓글을 보면 ‘현역 아이돌들 보다 관리, 실력이 훨씬 좋다.’‘요즘 아이돌들! 모리타카 치사토를 본받으라’라는 식의 찬양이 넘친다.
과연 80-90년대 일본 팝음악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가수로 손색없다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4. 여담
- 구마모토 시의 관광버스 가이드가 '모리타카'는 부모의 출신지인 타카모리마치, '치사토'는 쿠사센리(草千里)에서 따온 예명이다" 라고 얘기했는데 모리타카 본인이 자신의 이름은 본명이라고 필사적으로 여러번 부정했다고 한다. 애당초 이 가이드의 말은 거짓말인데, 모리타카 치사토의 아버지는 로커빌리 밴드에서 활동했던 음악가 모리타카 시게카즈(森高茂一)이기 때문에 모리타카라는 성은 원래의 성이 맞다.
- 모리타카 치사토는 스스로를 구마모토 사람이라 생각하며[15] 애향심도 깊다. 방송에서도 고향 얘기를 자주 하며 ANA 큐슈 CM에도 나왔으며, 구마모토 지진이 났을때도 메세지를 남기고 구마모토 캐릭터인 구마몬 테마송을 부르기도 했다. 모리타카의 노래인 "이 거리”(この街)에서도 큐슈 사랑을 엿볼수 있다.
- 초기 히트곡인 17세는 린 앤더슨의 'Rose Garden'과 유사하여 1970년대 일본 음악계에서 표절 의혹을 받았던 곡이다. 실제로 전주+도입부 부분이 매우 비슷하다. 물론 모리타카가 이 곡을 커버(리메이크)한 시점에서는 이미 옛날 얘기.
- 라이브 도중 의상에 걸려 넘어진 적이 있는데 가볍게 수습하고 프로답게 이어나갔다.
- 업프론트 그룹이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도록 만든 일등공신 중에 한 명이다.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업프론트 그룹 초기 시절의 간판 스타로 활약하면서 많은 자본을 쌓는데 큰 기여를 했으며 하로프로 특유의 투어 뺑뺑이도 이 분이 원조격이다.[16][17] 하로프로 부흥에 기여한 모닝구무스메의 초대 에이스였던 아베 나츠미는 팬들 사이에서 '업프론트의 공주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회사의 연혁을 잘 아는 고참급 팬들은 '아베가 공주님이면 모리타카는 여왕님'이라며 '업프론트의 여왕님'이라고 부른다. 한 회사의 개국공신이니 여왕님 소리를 들어도 이상할게 없다. 실제로 1980년대 일본 여자 아이돌계의 4대 여왕으로 군림했던 것도 거의 사실이라서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도 않은데다 현재 업프론트 그룹의 사장이나 중역들의 상당수가 모리타카 치사토의 담당 스탭 출신이며 모닝구무스메를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
- 한국에선 어째서인지 세일러 마스의 모델이라고 잘못 알려져있는데 원작자 타케우치 나오코가 밝힌 세일러 마스의 모델은 배우이자 가수인 미즈키 아리사이다. 세일러 마스가 세일러문 만화에서 가장 다리가 길쭉한 일본형 미녀로 손꼽히는 데 그만큼 모리타카의 외모와 각선미가 출중했다는 반증. 여담으로 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에서도 그녀의 리즈시절 뮤직비디오들을 유튜브에서 보고 세일러문을 떠올렸다는 덧글을 엄청나게 많이 달아놨다. 사람보는 눈은 다 비슷비슷 하다는 뜻..
- 활동 복귀 이후로는 절친이자 비슷한 시기 활동을 재개한 쿠도 시즈카와 방송에 종종 함께 출연하고 있다. 두 사람은 나이도 한살 차이[18]인 데다가 결혼도 비슷한 시기[19]에 했고, 똑같이 두 자녀를 둔[20] 엄마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젊은 시절에도 성숙한 스타일을 추구했던 쿠도가 노안 소리를 듣는 반면 모리타카는 세월을 빗겨간지라(...) 본의 아니게 쿠도에게 굴욕짤을 선사하는 경우가 있다.#
- tofubeats가 그녀의 열렬한 팬으로, Don't Stop The Music을 함께 작업하였으며, 그녀에게 사인회를 개최할 것을 제안하였다.
- 지금도 미모가 화제 되는 아이돌이면서도 수많은 유명 음악가에게는 존경받고 있다.
- 드러머로서의 모리타카 치사토는 "아이돌인데 드럼을 치는구나" 정도로 생각되기 쉽지만 일본 최고의 드러머인 무라카미 폰타 슈이치는 자기의 자서전 등을 통해 "드러머로서의 치님을 존경한다"라고 한 적이 있다.
- 일본 음악의 대부 같은 존재인 요시다 타쿠로가 "우리 프로작사가들이 수십 년간 쌓아온 작사의 세계관을 모리타카 치사토가 나타나 한순간에 파괴해 버렸다"라고 평가했다.
- 미스터 칠드런의 리더 사쿠라이 카즈토시는 메이저 데뷔 후 심각한 슬럼프에 빠져있을 때 모리타카 치사토의 "내가 아줌마가 되어도"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큰 감명을 받고 슬럼프에서 나올 수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진 비주얼 락그룹 페니실린의 기타리스트 "치사토"는 그 예명이 바로 모리타카 치사토의 광팬이기 때문이 지은 거로 유명하고 운전 중에 모리타카의 결혼 소식을 듣고 그 충격에 교통사고를 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이다.
- 업프론트의 메인 프로듀서인 층쿠는 나이는 모리타카 보다는 많지만 평소에 오네짱(누나~~정도)로 부르면서 따르는데 샤란Q 로 데뷔할때부터 많은 도움을 주어서 그렇다고.
5. 작품 일람
- 총 판매량: 11,584,690장
- 싱글 판매량: 6,408,070장
- 앨범 판매량: 5,176,620장
5.1. 싱글 디스코그래피
<rowcolor=white> 발매일 | 제목 | 순위 | 판매량 |
1987.5.25 | <colbgcolor=#black> NEW SEASON | 23위 | 43,950장 |
1987.10.25 | オーバーヒート・ナイト (오버히트 나이트) | 24위 | 22,490장 |
1988.2.25 | GET SMILE | 28위 | 13,860장 |
1988.4.25 | ザ・ミーハー (더 미하) | 29위 | 28,940장 |
1988.10.25 | ALONE | 25위 | 26,110장 |
1989.2.25 | ザ・ストレス (더 스트레스) | 19위 | 40,120장 |
1989.5.25 | 17才 (17세) | 8위 | 195,300장 |
1989.9.25 | だいて (안기) | 8위 | 57,120장 |
1990.1.25 | 道 / 青春 (길과 청춘) | 5위 | 163,500장 |
1990.5.25 | 臭い物にはフタをしろ!! (냄새가 나는 것엔 뚜껑을 덮어!!) | 4위 | 116,720장 |
1990.9.10 | 雨 (비) | 2위 | 179,870장 |
1991.2.10 | 勉強の歌 / この街 (공부의 노래/이 거리)(HOME MIX) | 4위 | 184,450장 |
1991.6.25 | 八月の恋 (8월의 사랑) | 6위 | 105,630장 |
1991.10.25 | ファイト!! (파이팅!!)) | 10위 | 268,880장 |
1992.2.25 | コンサートの夜 (콘서트의 밤) | 7위 | 104,010장 |
1992.6.25 | 私がオバさんになっても (내가 아줌마가 되어도)(싱글 버전) | 15위 | 227,720장 |
1993.1.25 | 渡良瀬橋 / ライター志望 (와타라세 다리/작가 지망) | 9위 | 309,660장 |
1993.4.10 | 私の夏 (나의 여름) | 5위 | 382,210장 |
1993.6.25 | ハエ男 (파리 남자) / Memories (싱글 버전) | 12위 | 135,940장 |
1993.10.11 | 風に吹かれて (바람이 불어와) | 1위 | 380,540장 |
1994.1.25 | ロックン・オムレツ (로큰 오믈렛) | 13위 | 99,800장 |
1994.1.31 | 気分爽快 (기분상쾌) | 3위 | 437,870장 |
1994.5.10 | 夏の日 (여름날) | 5위 | 409,100장 |
1994.10.10 | 素敵な誕生日 / 私の大事な人 (멋진 생일/나의 소중한 사람)(싱글 버전) | 1위 | 380,300장 |
1995.2.10 | 二人は恋人 (둘은 연인) | 5위 | 443,610장[21] |
1995.10.10 | 休みの午後 (휴일의 오후) | 5위 | 219,050장 |
1995.12.1 | ジン ジン ジングルベル (징 징 징글벨) | 2위 | 252,510장 |
1996.2.19 | SO BLUE | 7위 | 269,650장 |
1996.6.10 | ララ サンシャイン (라라 선샤인) | 5위 | 178,660장 |
1996.11.11 | 銀色の夢 (은빛 꿈) | 9위 | 236,070장 |
1997.2.25 | Let's Go! | 19위 | 93,130장 |
1997.6.11 | SWEET CANDY | 10위 | 92,960장 |
1997.10.15 | ミラクルナイト (미라클 나이트) | 20위 | 29,670장 |
1997.11.19 | SNOW AGAIN | 9위 | 134,240장 |
1998.3.4 | 電話 (전화) | 17위 | 57,730장 |
1998.7.15 | 海まで5分 (바다까지 5분) | 20위 | 31,840장 |
1998.10.1 | 冷たい月 (차가운 달) | 33위 | 13,810장 |
1999.3.17 | 私のように (나처럼) | 37위 | 11,400장 |
1999.5.19 | まひるの星 (대낮의 별) | 41위 | 22,950장 |
1999.10.1 | 一度遊びに来てよ'99 (한 번 놀러와) / EVERY DAY | 60위 | 6,700장 |
5.2. 앨범 디스코그래피
<rowcolor=white> 발매일 | 제목 | 순위 | 판매량 |
1988-03-25 | <colbgcolor=#ffebee> ミーハー | 17위 | 72,390장 |
1988-07-10 | Romantic | 22위 | 23,820장 |
1988-11-17 | 見て | 5위 | 66,110장 |
1989-07-25 | 非実力派宣言 | 2위 | 215,610장 |
1989-12-10 | 森高ランド | 3위 | 312,860장 |
1990-10-17 | 古今東西 | 1위 | 353,710장 |
1991-07-10 | ザ・森高 | 2위 | 353,030장 |
1992-03-25 | ROCK ALIVE | 3위 | 313,340장 |
1992-11-18 | ペパーランド | 5위 | 197,080장 |
1993-05-10 | Lucky 7 | 3위 | 420,830장 |
1994-07-25 | STEP BY STEP | 3위 | 573,170장 |
1995-03-25 | DO THE BEST | 2위 | 1,340,110장 |
1996-07-15 | TAIYO | 3위 | 385,840장 |
1997-07-16 | PEACHBERRY | 4위 | 321,330장 |
1998-05-21 | 今年の夏はモア・ベター | 10위 | 62,050장 |
1998-09-09 | Sava Sava | 7위 | 91,500장 |
1999-02-15 | the best selection of first moritaka 1987-1993 | 6위 | 73,840장 |
5.3. 주요 히트곡
- 1988년 - ストレス (스트레스)
- 1989년 - 17才(17세)
- 1990년 - 雨(비)
- 1992년 - 私がオバさんになっても(내가 아줌마가 되어도)
- 1993년 - 渡良瀬橋(와타라세 다리), 私の夏 (나의 여름)
- 1993년 - 風に吹かれて(바람을 맞으며)
- 1994년 - 気分爽快(기분상쾌),
- 1995년 - 二人は恋人(둘은 연인), 素敵な誕生日(근사한 생일)
- 1995년 - ジン ジン ジングルベル (징 징 징글벨)
- 1996년 - ララ サンシャイン(라라 선샤인), 銀色の夢(은색의 꿈)
- 1997년 - SWEET CANDY, SNOW AGAIN
- 1998년 - 海まで5分(바다까지 5분), 冷たい月(차가운 달)
- 볼드체는 홍백 출장곡.
[1] 결혼 전 본명은 모리타카 치사토.[2] 업프론트 가수들이 대부분 업프론트의 자회사인 zetima를 통해서 음반을 발매하는데, 모리타카는 데뷔 당시부터 워너 뮤직 재팬 쪽에서 음반을 발매했기에 이러한 것으로 보인다.[3] 목소리가 활동 초기와 현재의 상태가 똑같다! 20대의 치사토와 50대의 치사토. 나이가 나이인 만큼 얼굴에서 자연스러운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데, 성형수술을 하지 않아 무너짐이 없고 자연스럽게 세월을 흘려보내 대중들에게 지금의 외모도 다른 의미로 호감을 받고 있다.[4] 1분 10초 경에는 나카모리 아키나의 히트곡 '십계 (1984)'를 부르는 모습도 나온다.[5] 사실상 포카리스웨트 초대 이미지걸로 미야자와 리에가 후임자로 나오기까지 꽤 오랜 기간 포카리스웨트 광고에 출연했다.[6] 1988년 발매한 앨범 'ミーハー(미하)'의 타이틀곡 'ミーハー'를 새롭게 믹스하여 발매.[7] 유행에 쉽게 휩쓸리는 젊은 세대(특히 여성)를 지칭하는 단어.[8] 참고로 이때의 의상은 KOF 97에서 아사미야 아테나를 1P측에서 1번 엔트리로 놓았을때 나오는 복장의 원본이다. 아이돌 마스터 신데렐라 걸즈에 나오는 N 나가토미 하스미의 특훈후 복장도 이 복장의 오마쥬이다.[9] 참고로 이 가사는 크레용 신짱의 극장판인 암흑 마왕 대추적에서도 노하라 미사에의 대사로도 간접적으로 등장하기도 했으며, 노래가 히트한 당시의 1992년도엔 닛폰 테레비에서 방영된 'まったナシ!'라는 드라마에 오프닝곡으로 쓰이기도 했다. 여담으로 1992년 당시 히라마츠 에리의 部屋とYシャツと私(방과 와이셔츠와 나)와 더불어 결혼식 축가로 큰 인기를 모았다고. 제목만 봐서는 의아할 수 있으나, 가사의 맥락은 '나는 아줌마가 되고 당신도 아저씨가 되었지만, 젊은 시절처럼 변치말고 사랑하자'는 훈훈한 내용이라 축가로 굉장히 잘 어울린다. 또한 이박사의 일본 데뷔앨범 Encyclopedia of Pon-Chak에서 이박사 특유의 뽕짝 스타일로 리메이크 리메이크 된 적도 있다. NHK 홍백가합전에는 1992년부터 1997년까지 연속으로 출장하였다.[10] 실제로 지금 기준으로도 대단한 각선미인게 굶어서 저체중으로 만든 다리도 아니라 굵고 건강한 다리이다. 그러다 보니 허벅지~히프와 허리로 이어지는 실루엣이 좋아서 전체적인 비율이 탈 동양인 수준이고 그러다 보니 서양인, 동양인 불문하고 몸매에 대한 호불호가 없다. 일예로 영상만 보면 170cm는 훌쩍 넘을 것 같은 이 가수의 실제 키가 160cm도 될까 말까한 단신이라고 하면 다들 놀란다. 장신 가수로 착각 하게 만들정도로 그녀의 상체 대비 다리 비율이 월등하다는 것.[11] 실제 팬티는 아니며 노출을 염두에 두고 입은 의상.[12] 일렉트릭 기타의 경우 Bill Lawrence에서 출시된 시그네춰 모델까지 나와 있다!(사용 사진&사용 영상)[13] 링크는 PEPPERLAND 앨범의 가사집 중 일부[14] 80년대 후반까지 보통의 여성 아이돌 가수들은 10대 때 최전성기를 맞이하고 20대 들어서면서는 '아이돌'로서는 전성기가 저물기 마련이다. 굉장한 인기를 구사했던 마츠다 세이코, 나카모리 아키나 또한 20대 초반 이후에는 아이돌 이미지를 탈피하고 아티스트로서의 활동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시대가 한참 흐른 2010년대 이후로는 아이돌로서의 유효기간이 꽤 길어진 편이다.[15] 출생지는 오사카부 이바라키시이지만 어릴적부터 구마모토에서 자랐기 때문이다.[16] 심할 때는 한 달에 10회 꼴로 콘서트 스테이지에 섰다고 한다.[17] 업프론트의 메인 프로듀서 층쿠 및 그가 속한 그룹사운드였던 샤란Q보다도 선배이기도 하다.[18] 모리타카가 69년 4월생, 쿠도가 70년 4월생[19] 이 역시 모리타카가 1999년에, 쿠도가 2000년으로 딱 1년 차이.[20] 모리타카는 슬하에 남매, 쿠도는 자매를 두었다. 공교롭게도 모리타카와 쿠도의 자녀들은 또 딱 1살씩 차이가 난다. 모리타카의 아이들이 각각 00년/01년생이고 쿠도의 딸들이 각각 01년/03년생.[21] 싱글 커리어 최고 판매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