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교육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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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6b3><colcolor=#fff> 대한민국 제40대 교육부장관 | |||
제19대 서울특별시교육감 문용린 文龍鱗 | Moon Yong-lin | |||
출생 | 1947년 7월 3일 | ||
중화민국 랴오닝성 푸순시 | |||
사망 | 2023년 5월 29일 (향년 75세) |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 |||
호 | 이우(以愚)[1] | ||
본관 | 남평 문씨[2] | ||
재임기간 | 제40대 교육부장관 | ||
2000년 1월 14일 ~ 2000년 8월 7일 | |||
제19대 서울특별시교육감 | |||
2012년 12월 20일 ~ 2014년 6월 30일 | |||
제20대 한국교직원공제회 이사장 | |||
2016년 3월 24일 ~ 2018년 9월 30일 | |||
링크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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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슬하 1남 1녀[4] | ||
종교 | 천주교 (세례명: 요한 보스코) | ||
최종 당적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성향 | [[보수주의| 보수 ]] | ||
학력 | 여주농업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교육학[5] / 석사[6]) 미네소타 대학교 대학원 (교육심리학 / 박사) | ||
약력 |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교수 한국교육개발원 도덕교육연구실장 제40대 교육부장관 (국민의 정부) 제19대 서울특별시교육감 (민선 2기 / 보수)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명예교수 한국교육개발원 도덕교육연구실장 제20대 한국교직원공제회 이사장 (박근혜 정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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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교수, 공무원. 2012년 12월 20일부터 2014년 6월 30일까지 서울특별시교육감을 지냈다.2. 생애
1947년 7월 3일, 중화민국 랴오닝성 푸순시에서 평안도 출신 아버지와 간도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주농업고등학교(현 여주자영농업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1976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심리학 전공으로 교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미네소타 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심리학을 전공해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1989년 모교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전형적인 보수 인사이지만, 국민의 정부 시절이던 2000년 1월 14일부터 2000년 8월 5일까지 제40대 교육부장관을 지낸 적이 있었다.[7] 그러나 2000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 전야제 행사가 끝난 직후 광주광역시 시내에 위치한 새천년 NHK 가라오케라는 유흥주점에서 당시 송영길[8] 새천년민주당 인천광역시 계양구 을 국회의원, 우상호[9] 새천년민주당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갑 지구당 위원장 등이 술판을 벌여 논란이 되었을 때 같은 술집에서 한상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 노성만 제15대 전남대학교 총장, 오수성 전남대학교부설5.18연구소장, 천득염 전남대학교 학생처장, 박종율 전남대학교 교무처장 등과 접대부를 대동하고 음주를 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당시 교육부장관[10]이였던 문용린은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장관직에서 사퇴하였다.[11] 이후 다시 2000년 2학기부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교수로 복직했다.
2012년 곽노현 전 교육감이 금품수수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으며 직을 상실하자, 당시 서울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한 문용린 교수는 같은 해 치러졌던 제18대 대통령 선거과 동시에 치러진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제19대 서울특별시교육감으로 당선되었다. 전임 진보 진영의 곽노현 전 교육감의 학생인권조례 등에 대한 반감이 있었던 보수성향 학부모 및 교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며 출발했다.
그러나 2014년, 보수표가 국회의원을 지낸 법조인 출신의 고승덕과 현역 교육감인 문용린으로 분열되면서 재선에 실패하였고, 다음 교육감은 진보 성향의 조희연에게로 넘어갔다. 이 선거에 관한 이야기는 못난 아버지를 둔 딸에게 정말 미안하다! 문서 참고[12].
사실 문용린도 곽노현만큼이나 학부모들에게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농약급식 사건 자체가 자신이 적극 장려했던 전자조달 시스템에 참여한 업체에서 터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새누리당의 서울특별시장 후보였던 정몽준이 박원순에게 농약급식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는 문용린에게 크나큰 치명타가 되고 만다. 거기에 학부모와 시민단체의 참여를 제한해 학부모들이 그 전부터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는 것. 매해 조사하는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서울특별시는 청렴도 1위를 기록했으나, 서울특별시교육청은 전국 17개 교육청 중에서 꼴찌, 그것도 혼자 5등급을 받았다. 그리고 성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전교조나 진보 성향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구시대적인 꼰대 이미지까지 있어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 했다.
이후 재선 도전 과정에서 고승덕이 있었음에도 보수단일후보를 참칭(허위사실 공표)하여 지방교육자치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벌금 200만원형의 선고유예를 받았다.# 2016년 3월 24일부터 2018년 10월까지 한국교직원공제회 이사장[13]을 맡았고, 2019년 5월에는 대교문화재단의 이사장으로 취임해 사망하기 전까지 활동했다. 이 외에도 학교폭력 예방 단체인 푸른나무재단 이사장을 2003~2009년과(3대) 2015~2021년까지(7대) 역임하기도 했다.
2023년 5월 29일 새벽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장지는 경기도 여주시 선영이다. # #
3. 선거 이력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66b3><rowbgcolor=#0066b3><tablebgcolor=#fff,#1c1d1f><rowcolor=#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성향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2012 | 하반기 재보궐선거 (교육감) | 서울특별시교육감 | [[보수주의| 보수 ]] | 2,909,435 (54.17%) | 당선 (1위) | 초선[14] |
2014 |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1,486,160 (30.65%) | 낙선 (2위) |
<rowcolor=#fff> 역대 선거 벽보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
2012년 하반기 재보궐 (서울특별시교육감) | 6회 지선 (서울특별시교육감) | }}}}}}}}} |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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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부인의 족보를 통해서 밝혀졌다.[3] 초대 경기도지사 구자옥(具滋玉)의 손녀이자 화가 구본웅의 당조카, 발레리나 강수진의 당고모다.(족보)[4] 남매는 10살 터울이다.[5] 교육심리학 전공[6] 석사 학위 논문: 心理學的側面에서 본 價値過程의 槪念分析 (1976)[7] 다만 이 때는 새정치국민회의(後 새천년민주당)가 보수정당인 자유민주연합과 연정 중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나중에 국민의힘 소속이 되는 정우택 또한 당시 자유민주연합 소속으로 있으면서 김대중 정부 시절이던 2001년 3월 26일부터 2001년 9월 6일까지 제7대 해양수산부장관을 지냈다. 그리고 민주당계도 당시만 해도 (진영 말고 성향이) 보수에 가까웠다. 애초 1997년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했던 개혁 드라이브 자체가 보수에 가깝지, 진보에 가깝진 않기도 했다.[8] 前 인천광역시장, 더불어민주당 대표, 5선 국회의원. 당시에는 초선이었다.[9] 前 더불어민주당 서대문구 갑 국회의원(5선). 당시 낙선자 신분.[10] 이때의 교육부장관은 부총리급이 아니었다. 다음 해인 2001년 개각부터 부총리급으로 승격되어 교육부장관이 교육부총리라는 명칭으로 보임되어 참여정부까지 이어지다가 이명박 정부 때 폐지되었고, 박근혜 정부 때 사회부총리라는 이름으로 부활하였다.[11] 사실 새천년 NHK 사건은 민주화 운동계에서 5.18 민주화운동이 그 의미와 상징성이 큰 상황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민주화운동을 하던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이 어떻게 감히 그 전야제에서 유흥을 즐기냐는 이유로 많은 비난을 받았던 사건이다. 그런데 문용린 장관은 이들과 술자리를 함께하던 입장이 아니고 한상진 정신문화연구원장 등과 같이 술자리를 갖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당시 새천년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의 술판이 논란이 되고 후속 보도가 이뤄지던 상황에서 하필 같은 술집에서 회식을 하던 사실이 곁다리로 걸려버리면서 대대적인 질타를 받고 사퇴하게 된 것. 또한 문용린은 운동권도, 민주화 운동가 출신도 아니기 때문에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었다.[12] 물론 저것은 문 교육감이 아니라 다른 후보였던 고승덕이 외친 말이다.[13] 그래서 2018년 교육감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다. 사실 그 전에 불출마 선언을 한 데다가 당시 70대였기 때문에 무리라는 지적도 있었다.[14] 전임자 곽노현 교육감직 상실 (지방교육자치법 및 공직선거법 위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