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8 18:07:16

미니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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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텔 단말기. 한국의 하이텔 단말기를 생각하면 된다.

1. 개요2. 개발 과정3. 역사
3.1. 보급3.2. 전성기3.3. 몰락
4. 평가
4.1. 약점과 비판4.2. 옹호4.3. 결론
5. 영향6. 참고한 자료

1. 개요

미니텔(Minitel)은 프랑스에서 사용된 PC통신 서비스이다. 시범 서비스를 포함하면 1980년, 통상적으론 1982년부터 2012년 6월까지 30년간 사용했다. 사실 프랑스의 PC통신 서비스 네트워크의 이름은 '텔레텔'이고 '미니텔'은 단말기의 이름이지만, 사람들이 단말기의 이름을 네트워크를 부를 때도 사용하는 바람에 의미 확대가 일어나 프랑스의 PC통신 서비스는 '텔레텔' 대신 '미니텔'이라는 이름으로 흔히 불리게 된다. 접속번호는 36XY이다.

1990년대에 초/중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기술이나 정보 같은 해묵은 콤퓨타기술 정보가 실린 교과서에서 가족이 어색하게 개다리 소반 앞에 모여앉아 브라운관 TV에 연결된 이상한 상자를 손가락질하며 뭔가를 하고 있는 듯한 사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비디오텍스'라고 불리는 전화선을 통한 정보 송수신 기술이며, 미니텔에 적용된 기술이다. 과거 대한민국의 VT 기반(Virtual Terminal) PC통신에서 제공하는 서비스 중 날씨 정보를 제공하는 서비스나 시설예약 서비스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Windows 95부터 힐그래이브 하이퍼터미널용 미니텔 폰트도 있었다.

한때는 대단히 흥했지만, 적절한 갈아타기에 실패한 나머지 프랑스에서마저 몰락했으며 현재는 정부주도적 인프라 개발의 한계를 보여주는 갈라파고스화의 전형적인 사례가 되었다.

2. 개발 과정

1980년에 일부지역에서 시범적으로 서비스를 도입했고 1981년 대통령 선거와 하원 총선 개표과정에서 미니텔이 널리 활용되면서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렸고, 이듬해인 1982년에 전국적인 서비스를 시작했다. 본래는 프랑스 국립중앙통신 연구소에서 미니텔과 비슷한 PC네트워크 시스템을 고안한것을 바탕으로 했고, 1970년대 들어서 이를 민수용으로 개발하려는 시도를 했었고 1977년부터 개발을 시작했지만 초기에는 자금 부족으로 지지부진 하였는데, 당시 종이값 폭등으로 공중전화전화번호부를 찍어내는데 어려움을 겪던 프랑스텔레콤이 VT를 이용해서 전화번호를 배포함으로 얻을 수 있는 비용절감을 노리고, 영국의 통신회사와 협력하여 막대한 투자를 했다. 여기엔 갓 집권한 프랑수아 미테랑 사회당 정권의 정보격차 축소 의지도 강했다. (따지고 보면 지스카르 데스탱 시절부터 개발을 시작하긴 했다.)

그 결과 3년 만에 터미널, 통신 프로토콜, 통신망을 모두 개발하고, 영국에서는 프레스텔(Prestel), 프랑스에서는 미니뗄(Minitel)이라는 이름으로 서비스를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단말기 값이 비싸게 책정되었고 정부에서도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단말기 보급에 그리 열의적이지 않아 애초에 당시 영국 수상이 마가렛 대처였다 부유층이나 주요기업에서 사무용품으로 쓰는 물품이 되어서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 여타 유럽국가에서도 영국보다는 보급률이 높은 편이었지만 역시 컴퓨터에 관심을 보였던 사람이나 아니면 기업에서 사무용으로 주로 쓰였고 일반인들 대상으로 한 보급은 지지부진하기는 매한가지였는데, 프랑스에서는 단말기를 무료로 보급한데다가 당시로써는 그야말로 최첨단 기술이었던것에 관심을 보였고 정부나 각계 각층에서 엄청난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3. 역사

3.1. 보급

프랑스 정부는 1989년까지 미니텔 단말기를 선착순으로 무료 배포했으며, 게다가 미니텔은 이용료도 무료였다. 당시 개인용 PC가 시장 초창기라서 가격대가 만만치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1] 초창기부터 대중성을 크게 높여준 셈이었다. 물론 새 전화 체계가 미니텔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미니텔에 음성전화가 따라오는 것이며, 단말기는 전화번호부 대용이었으므로 이 정책에도 일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또 터미널에서 출력되는 텍스트 끝에는 기업 광고를 넣기도 했다.

그리고 프랑스텔레콤의 독점 사업이라 다양성에 위배될 수 있으며, 안정성 문제에 의문을 제기받기도 했으나 아무튼 단말기가 공짜라서 많이 보급되었고, 이후로 미니텔을 통한 각가지 서비스들이 프랑스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면서[2] 프랑스의 자부심이 되었다. 이 당시 미니텔의 성공이 얼마나 인상이 깊었던지 미국의 정보통신기업이나 월스트리트가에서 프랑스 미니텔을 정보통신산업의 모범이 되는 사업이라고 관심을 가졌을 정도였다. 애초에 미국내 PC통신 서비스인 컴퓨서브와 프로디지의 이용자수를 합쳐도 미니텔 사용자보다도 훨씬 적었고, 인터넷은 아직 전문가들이나 이용하던 수준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3.2. 전성기

1988년 프랑스에는 560만대의 미니텔 단말기가 보급되었으며,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온라인 서비스였다. 90년대 초반엔 미국에 수출되기까지 했다고. 참고로 미국에서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민간에 개방된것은 월드 와이드 웹1990년에 개발되면서부터.

1994년 120만 명의 프랑스인들이 '미니텔'로 전자상거래를 할 때, 미국인들은 이제 막 80만 명이 '인터넷'으로 전자상거래를 이용했다. 프랑스 내 수익은 60억 프랑(=12억 달러)에 달했다.

최전성기는 1999년으로, 단말기 900만대(2002년 정점값)에 사용인구 1500만, 1년간 총 통화수는 1950억통. 10억 유로 가량의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기본 서비스인 음성통신, 메시지 전달, 전화번호부[3] 이외에 다음과 같은 많은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미니텔로 제공되는 서비스는 약 25,000가지에 달했다.

유료 서비스 요금을 전화요금 통지서로 간단히 청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미니텔의 유료 결제 서비스는 굉장히 발달하였다. 분당 0.02 유로에서 1.41 유로에 이르기까지 비용도 다양했다. 물론 비싼 서비스를 멋모르고 이용했다가 혼쭐났다는 경험담도 종종 보인다.

3.3. 몰락

그러나 미니텔의 속도 업그레이드가 늦었고, 또한 미니텔 기능도 개인용 컴퓨터에 비해 뒤떨어졌다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속도가 훨씬 빠른 인터넷이 세계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자[4] 프랑스 내에서 미니텔에 대한 문제점이 제기가 되었고, 논쟁끝에 프랑스 당국에서도 결국 인터넷을 밀어주게 되었다. 그럼에도 1990년대 말까지도 미니텔의 이용객은 매년 꾸준히 늘어났지만, 1999년 이후 2005년까지 미니텔은 가입자수가 매년 30%씩 줄어들어 몰락의 길을 걸었다.

한동안은 폐쇄회로 덕분에 보안이 우수했다는 이점이 있었고, 프랑스 정부에서 인터넷을 밀어주기 시작했다고 해도 한 동안 미니텔과 인터넷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항공권, 연극 티켓 예약&결제, 미니텔 뱅킹, 주식거래에서는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나 결국 줄어드는 가입자수 때문에 기업들이 미니텔 서비스를 잇따라 종료하고 인터넷으로 갈아탔다.

프랑스 텔레콤은 1998년 인터넷 접속도 되는 'MINITEL Magis'란 단말기를 보급했지만, 인터넷이라고 해봐야 ISDN 기반이었기때문에 ADSL이 보급되면서 정부의 소외계층을 위한 인터넷 단말기 취급이나 받게 된다. 넷북의 초기 모델이었지만 지금 기준에서 보면 느리기 마찬가지였다. 사회당이 시작한 이 계획에 사회당 총리인 리오넬 조스팽헤드샷을 날렸다는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 아래 한겨레 97년도 기사에서는 30만~40만원 상당의 미니텔 매지스[5]를 상당히 매력적으로 소개했으나, 현실은 시궁창.

4. 평가

4.1. 약점과 비판

처음 출시된 미니텔은 1200bps 정도로 속도가 매우 느렸으며 1990년대에는 9600bps 단말기가 보급되었지만 이것도 동영상도 못볼 정도의 속도라서 동영상을 볼수있게 된것은 미니텔 단말기로도 인터넷 접속이 가능하게 된 뒤의 일이었다. 그리고 저화질 영상빼면 무한의 버퍼링 또한 미니텔 단말기를 이용해서만 접속할 수 있었지만 컴퓨터가 어느정도 보급된 이후로는 타 PC통신들이 그랬듯이 하이퍼터미널 같은 에뮬레이터를 사용하면 PC에서도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

요금에서도 인터넷에 뒤졌는데, 미니텔을 이용해 AFP통신 속보를 보는 경우 1분에 3백원 이상을 내야 하지만 같은 요금으로 인터넷을 이용하면 30분이나 볼 수 있다. 전화번호 열람 같은 기본 서비스는 무료로 제공하기는 했지만 기본 서비스 이외의 서비스 이용요금은 수익성을 위해 비싸게 책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랑스 텔레콤이 미니텔에 과도하게 집착한 탓에 프랑스인터넷 기술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비판적 의견이 있다. 인터넷과 월드 와이드 웹에 미니텔이 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프랑스 사람들의 자부심과 집착이 원인이라는 것. 공교롭게도 월드 와이드 웹의 고안자인 팀 버너스리는 프랑스와 숙명의 라이벌 관계인 영국 출신이다. 재미있는 것은, 프랑스가 고안한 새로운 단위계인 미터법이 세계적 표준이 되면서 야드파운드법을 고수한 영국을 갈라파고스화시켜버리고 표준 경쟁에서 영국을 이겼다는 것이 프랑스인들의 큰 자부심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미니텔의 사례에서는 이와 정확히 반대로 된 셈이다. 결국 미니텔 몰락 이후 프랑스 인터넷 환경은 MSN, 구글, 야후 등 미국계 인터넷 검색 엔진 사이트들에게 점령되었다.

결국 2006년 12월을 끝으로 외부 서비스 제공자가 모두 사라졌으며, 그리고 마침내 2012년 6월 30일, 정확히 30년만에 40만의 단말기가 사용되는 시점을 마지막으로 미니텔 서비스는 중단되었다.

4.2. 옹호

고작 토스터 크기(9인치)에 심지어 자판을 접을 수 있는 휴대성까지 있어 각광을 받았다.

BBC 영상 등에도 나타났듯이 노년층에 대한 보급에 대단히 탁월했다.# 1992년광고. 이 점에서 프랑스는 인터넷 노년층 보급에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또 농촌과 산간벽지에서도 정보 격차를 줄일 수 있었던 건 분명했다. 물론 그 때문에 치러야 하는 비용과 대가가 너무 지나쳐서 문제였지...

비디오텍스 기반으로는 매우 이상적인 체계라고 할 수 있는데, 컨텐츠에 기업 광고를 곁들여서 광고비로 수익을 충당하고 이용 비용을 무료화 하거나, 전화 요금 통지와 결합하여 유료 컨텐츠의 결제를 간편하게 하는 등. 상당히 선진적인 운용 개념이 많이 도입되었다.

비록 미니텔은 수십년전의 유물이 되었지만 적지 않은 프랑스인들에게는 나름대로 이런저런 추억이 많은 물건이기도 하고 물론 미니텔을 통해서 비싼 서비스를 이용했다가 제대로 혼이 났다는 경험담도 종종있다 철통같은 보안 때문인지, 가정에 보급된 미니텔 단말기를 해킹하면서 정보기술을 익히거나 기업을 차려서 미니텔에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돈을 벌여들인 인물들이 프랑스 IT업계에서 대성한 사례들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4.3. 결론

국가 주도로 진행된 폐쇄적 정보 시스템과 선발주자의 몰락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려 30년간 지속된 미니텔의 존속 기간과 그간의 성과를 본다면 결코 실패로 간주할 수 없다. 미니텔의 보급은 인터넷 대중화보다 무려 20년 가까이 앞서 있고, 그 당시에는 전세계적으로 비교 상대가 없을 정도로 유용한 서비스였으며 이용자 수도 미국이나 일본, 영국, 독일, 한국 등지의 PC통신 이용자 수보다도 월등히 많은 수준이었다.

5. 영향

미니텔은 단순히 역사 상에만 기록되는 게 아니라, 인터넷 컨텐츠 제작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인터넷은 그저 학술용이나 군사용까지만 생각했던 데에 반해, 미니텔은 프랑스 사람들 취향처럼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방향을 택했었다.

미니텔은 인터넷과는 달리 매우 단순한 4자리 숫자로 서비스를 접속하는 형태였다. 이러한 직관적인 사용법은 아이패드를 비롯한 애플 제품에 영향을 끼쳤다. 스티브 잡스, 미니텔에 관심 최초의 앱스토어, 미니텔 물론 1980년대~90년대 초반 당시에 미니텔만한 PC통신망이 없었기 때문에 IT기업인 입장에서 최첨단 기술로써 미니텔에 흥미를 가지는것은 당연하기는 했다.

한국에서도 미니텔을 모델로 하여, 체신부한국통신 주도로 1990년대 초중반에 걸쳐 하이텔 단말기 보급사업을 벌였고 당초에 300만대를 보급할 계획이었지만 문제는 다운로드가 불가능했던데다가 단말기 속도가 단점을 커버해줄 만큼 빠르지도 않았고[6] 컴퓨터가 비싸서 못산 영세민이나 당대의 다수 중장년층처럼 컴퓨터가 익숙치 않던 계층을 상대로 열심히 보급사업을 벌인것도 아니라서 결국 사업은 28만대 보급 시점에서 흐지부지 종료되었다. 이후로 2000년대 초반에 유선전화로 인터넷도 할수있는 리빙넷이라는 것도 내놓았지만 이것도 이미 훌륭한 대체제가 있던 시기인지라 흐지부지 되었다. 독일에도 BTX라는 비슷한 서비스가 있었다고 한다.

6. 참고한 자료

블로그

#1996년 매일경제 기사 - 당시 1400만명.
#1997년 한겨레 기사.

# 2001년 외국 인터넷 언론 기사 - "미니텔, 오래된 신제품."
# 2007년 기사 - 아직도 사용자가 1천만명이라고 나오나, 단말기가 최소 100만대 이하였을 시점이란걸 감안하자. 어디까지나 프랑스 텔레콤이 자체 집계한 "잠재 사용자"로, 6천만 프랑스 인가운데 16.9%가 미니텔을 사용한 적이 있다라는 설문조사에 바탕한 것이다. 이걸 사용자라고는 하지 않지

#2011년 한겨레 기사.
#2012년 BBC, "프랑스식 웹망(French-Wide-Web)의 영광과 몰락"
#2012년 뉴욕 타임즈, "미니텔의 종말". 7분 30초부터.
9분 10초경에 나오는 조립과정에서 망치로 툭 때리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프랑스에서 주로 쓰이던 물건이니 당연하겠지만 각 언어 가운데 프랑스어 위키백과의 문서가 가장 상세하다. 다른 언어판에서는 대부분 토막글이거나, 개략적인 설명 정도.링크


[1] 물론 당시 프랑스의 경우에는 몇달치 봉급을 쓰면 되는 수준이기는 했다. 한국의 경우에는 1~2년치 급여를 써야했지만 말이다.[2] 물론 당시 미니텔의 이용자수가 많았다 해도 최대 2000만명 이내로 프랑스 인구의 40%에도 못미치는 수치였지만, 그래도 당대에는 이 만한 성공을 거둔 PC통신망이 없었다.[3] 전화 번호 문의의 3611. 2001년이 피크였다고 한다.[4] 물론 이 당시의 인터넷 속도가 빨라봐야 56K, 128K, 256K 정도(64K 부터 256K까진 ISDN의 속도다.)가 고작이었기는 했지만(그리고 미국 상당수 지역과 아프리카, 남아시아, 중국 다수 지역 등 많은 나라에서 훨씬 이후까지 인터넷 속도가 이 정도 수준에 머물러있었다.) 그래도 미니텔보다는 빨랐다.[5] 매직이 아니다!! 매지스(Magis)다!! 아마 Magis를 Magic의 오자로 생각한듯 하다[6] 이미 보급 개시 당시에 9600bps 모뎀이 현역이었고 1993년에는 아예 14400bps 모뎀의 보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