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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5대 종합상사 | ||||
미쓰비시상사 | 미쓰이물산 | 스미토모상사 | 이토추 | 마루베니 |
미쓰비시 상사 三菱商事株式会社 MITSUBISHI CORPORATION | |
정식 명칭 | 미쓰비시 상사 |
일문 명칭 | 三菱商事株式会社 (みつびししょうじ) |
영문 명칭 | Mitsubishi Corporation |
국가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설립일 | 1950년 4월 1일[1] |
주소 | 도쿄도 치요다구 마루노우치2초메 3-1 東京都千代田区丸の内二丁目3-1 |
도쿄도 치요다구 마루노우치2초메 6-1 東京都千代田区丸の内二丁目6-1 | |
창업주 | 이와사키 야타로 |
회장 | 코바야시 켄 |
사장 | 카키우치 타케히코 |
업종명 | 종합상사(무역업) |
기업규모 | 대기업 |
매출액 | 연결 : 16조 1,038억 엔 (2019년 3월 기준) |
순이익 | 연결 : 5,907억 엔 (2019년 3월 기준) |
시가총액 | 13조 7,071억 엔 (121조 2,694억 원)[2] |
종업원 수 | 연결 : 79,994명 (2019년 3월 기준) |
상장시장 (상장일, 종목코드) | 도쿄증권거래소 (1954년 6월 1일, 8058) 나고야증권거래소 (1961년 9월 2일, 8058) 런던증권거래소 (1989년, MBC) |
홈페이지 | 공식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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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미쓰비시 그룹의 종합상사. 일본 5대 상사[3] 중 하나이며 그중에서도 최대규모이다. 더불어 미쓰비시 UFJ 은행, 미쓰비시 중공업과 더불어 미쓰비시 그룹의 3대 중핵 회사. 미쓰비시금요회(Mitsubishi Friday Conference), 미쓰비시공보위원회의 회원사이다.2019년 4월 1일 부로, 종래의 7개 사업그룹체제를 세분화하여 10개 사업그룹[4]으로 재편되었다.
2. 본사
본사 건물 (미쓰비시 상사 빌딩) |
본사 건물 (마루노우치 파크 빌딩) |
- 미쓰비시 상사 빌딩 (도쿄도 치요다구 마루노우치2초메 3-1)
기업 본사 등기주소. 사장단을 비롯한 각 그룹 임원(그룹CEO)들은 본 빌딩에 상주한다. 코퍼레이트 스태프부문, 천연가스그룹, 종합소재그룹, 금속자원그룹이 입주해 있다.
- 마루노우치 파크 빌딩 (도쿄도 치요다구 마루노우치2초메 6-1)
감사부, 석유・화학그룹, 산업인프라그룹, 자동차・모빌리티그룹, 식품산업그룹, 컨슈머산업그룹, 전력솔루션그룹, 복합도시개발그룹이 입주해 있다. 본 빌딩의 저층부에는 스미토모 계열의 일본제철이 입주해 있다.
3. 역사
오미야 사건 이후, 이와사키 야타로에 의해 인수된 츠쿠모상사가 분사되면서 생겨났다.[5]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특수를 맞으면서, 취급하는 화물 품목을 비약적으로 다양화시키고, 이와사키 코야타가 확립한 미쓰비시 그룹의 3대 경영 이념에 따라 발전을 거듭해 나간다. 그리고 1918년 완전 분사되어 미쓰비시 상사가 된다.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재벌 및 생산시설 해체에 따라 그룹은 174개의 회사로 조각난다. 일본이 군정에서 벗어난 이후, 구재벌계 기업의 활동제한이 완화되어, 후지상사, 동경무역, 동서교역 3개사를 주축으로 재집약에 성공하였다. 1954년에는 옛 미쓰비시 상사의 회계를 맡았던 광화실업이 사명을 다시 미쓰비시 상사로 바꾸고 3개 사와 합병했다. 이후 한국 중공업 중개라는 엄청난 수주를 따내면서 부활하여 지금에 이르게 된다.
기존에는 미쓰비시중공업과 미쓰비시 자동차의 무역중개업을 메인으로 하였으나, 1970년대부터 자원 개발(천연가스, 석탄)을 시작하고, 1980년대에는 식품업(미쓰비시 식품) 체인에 진출하여 식품유통업도 하였고, 1990년대에는 편의점체인 로손을 통해 소매업에도 진출하는 등 사업 다각화에 나서고 있다.
2001년 BHP와 50:50 합작으로 석탄 채굴 업체인 BMA를 설립했다. 호주 석탄 산업의 핵심지인 퀸즐랜드에서 사업을 영위한다.[6]
4. 한국과의 관계
1965년 6월 한일협정 체결 이후 한국 사업은 미쓰비시가 독점하다시피 했다. 대한조선공사 확장공사, 당인리 발전소 건설, 동양 최대 규모인 쌍용시멘트 공장 건설, 경인선 전철화 사업, 포항제철소 건설사업 등이 대표적이다.
박제욱 회고록
박제욱 회고록
미쓰비시 그룹 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대한민국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현재 한국 지사는 100% 자회사로 운영하고 있다. 일단 한일기본조약 직후, 1967년 미쓰비시은행(현 미쓰비시 UFJ 은행) 서울지점을 최초의 일본계 은행으로서 진출했다. 1963년 기준 미쓰비시 상사의 거래량은 1조 엔 대에 불과했으나, 4년 만에 두 배로, 6년만에 세 배로 늘어났고, 1970년에는 4조 엔에 달했다.
오늘날의 미쓰비시 상사는 한국 중공업 중개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미쓰비시상사 후지노 주지로 사장 간의 빅 딜로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의 큰 사업과 금전적 지원을 담당했다. 미쓰비시는 박정희 정권 하의 무역 증진 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자사 해외 지점 인력을 동원하여 한국 제품의 해외 판매에 나섰다. 해당 배경 아래, 미쓰비시상사는 한국 내 주요 인프라 프로젝트의 사업권을 대거 확보하게 된다. 당인리발전소(현재 서울화력발전소) 건설, 경인선 전철화 사업, 쌍용시멘트 공장 건설, 수출공업단지 조성, 포항종합제철소 건설, 서울지하철 건설, 대한조선공사 확장 공사, 신진자동차에 대한 기술 제공, 엘리베이터 제조 기술 제공 등 한국의 기간 시설 사업 대부분에 미쓰비시의 참여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리베이트가 오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해서 논란이 있지만 미쓰비시가 한국의 근대화 및 경제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당시 과거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도 했었다고 한다.[7]
4.1. 서울지하철공사, 포항제철 수주 사업
박정희 정부 시절, 후지노 주지로 사장 시절에는 서울지하철공사 지하철 건설, 포항제철 건설 등에 협력하였으며, 한국의 경공업 상품을 사다가 해외에 팔아 주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특히, 포항제철 지원 사업은 미쓰비시 그룹내의 반대가 극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일본제철과의 지원 계약 등을 따 내어 기술을 제공했다. 이는 대한민국 중공업계를 하청화하여 일본의 대미 수출을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는 의도였다고 전해진다.[8]
그러나 당시 한국 정부와는 민선 박정희 당선 선거자금, 한일기본조약, 서울지하철공사 사업, 포항제철 사업 등에 모종의 뒷거래가 있음을 미국 CIA 에서도 발표하였다. 한일기본조약이 타결되기 전부터 미쓰비시 상사는 한국 군부에 정치자금을 계속해서 제공해 왔다. 이는 전 영진홍산 사장 박제욱의 중개로 가능했던 일로, “1963년 대선을 앞두고 미쓰비시로 부터 100만 달러를 빌려 대선자금으로 사용했다” 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때 빌린 차관은 후일 1967년도에 당인리 발전소 5호기 건설 프로젝트를 미쓰비시 상사에 수주해 주는 걸로 갚았다고 한다. 실제 선거도 1.5퍼 차이의 박빙이었고. 이는 일본 정계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되어, 1977년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쓰비시 상사에 대한 추궁이 들어갔다. 서울지하철 공사가 엔으로 환산하면 185억엔에 육박할 정도이니, 여기서 떼 먹는 리베이트의 액수만 해도 상당할 듯. 실제 당시 사장 타나베 분이치로는 7%의 중개료 중 실제 중개로로 챙긴 건 2%에 불과하며 나머지 5%는 한국 군부에 대한 정치자금이었다고 위원회에서 소환되어 발언했었다.
이 모든 것은 박 전 대통령과 후지노 전 사장의 개인적인 친분에서 비롯된 일이며, 이 친목을 주선한 장본인은 영진홍산의 박제욱 전 사장이다.[9]
4.2. 현대자동차, 미쓰비시 자동차 기술제휴 중개 사업
4.3. 당인리 발전소 사업
4.4. 대한 청구권 관련
현재 미쓰비시 상사는 제국주의 시절 조선 거주자들의 미쓰비시 중공업에의 징용 중개는 이미 한일기본조약에서의 청구권 협정으로 보상이 완료되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중이다.5. 한국 이외의 사업
5.1. 필리핀 병원진출 중개
5.2. 멕시코 만 해저유전개발
일본우선, 로열 더치 쉘과 합작 사업.6. 주요 자회사
- 일동후지제분(2003)
- 일본케어서플라이(2393)
- 로손(2651)
- 일본식품화공(2892)
- 미쓰비시식품(7451)
- 중앙화학(7895)
이상 6개사. (2021년 3월 31일)
7. 관계사
- 마스다제분소(2008)
- 칸로(2216)
- 롯코버터(2266)
- 이토햄(2284)
- 카도야제유(2612)
- 시그마크시스(6088)
- 치요다화공건설(6366)
- 히말라야(7514)
- 후루야금속(7826)
- 카녹스(8076)
- 명화산업(8103)
- 라이프 코퍼레이션(8194)
- 마루이치산업(8228)
- 미쓰비시UFJ리스(8593)
- 일본KFC홀딩스(8973)
- AGP(9377)
7.1. 미쓰비시 상사가 대주주인 출자회사
7.2. 미쓰비시 상사가 주요 주주인 출자회사
- WOWOW
- 도쿄산업(東京産業)
- 북해제련(北海製罐/トーモクグループ)
- 세기토큐공업(世紀東急工業)
- JX홀딩즈(구 신일본석유)
- 미쓰비시광석운송(三菱鉱石輸送)
- 대일본도료(大日本塗料)
- RF라디오(アール・エフ・ラジオ日本)
- 닛신식품(日清食品ホールディングス)
- 이로짓(イー・ロジット)
- 젯스타 재팬(ジェットスター・ジャパン)
- 일본 타타(日本タタ・コンサルタンシー・サービシズ)
- 일본레지본(日本レヂボン)
- 시오미즈미나토제당(塩水港精糖)
- 서니메이즈(サニーメイズ)
- 메모리테크(メモリーテック)
8. 여담
- 2019년에 실시한 한 앙케이트에 의하면, 도쿄대학 및 교토대학 학부생이 입사하기를 희망하는 기업 랭킹에 골드만삭스나 맥킨지 등의 쟁쟁한 외자계 금융을 제치고 1위에 선정된 바 있다. 상세 랭킹은 하기 참조.
순위 | 도쿄대 | 교토대 |
1위 | 미쓰비시 상사 (종합상사) | 미쓰비시 상사 (종합상사) |
2위 | 골드만삭스 (투자은행) | 리크루트 홀딩스 (인재관련) |
3위 | 맥킨지&컴퍼니 (컨설팅) | 미쓰이물산 (종합상사) |
4위 | 덴츠 (광고대행사) | 보스턴컨설팅그룹 (컨설팅) |
5위 | 이토추 (종합상사) | 맥킨지&컴퍼니 (컨설팅) |
- 엄청난 양의 출장 비중에 알맞게도, 일본내 기업 임직원 급여 평균이 가장 높은 회사였던 적도 있다. 한국 지사 대졸 초임은 2023년 계약연봉 기준 5,600만 원이라고 알린 바 있다.
- 평균 급여 수준이 상당히 높은 편이며 사회적 인식, 명망 또한 높은 업계이다. 2019년 현재 5대 종합상사의 평균급여는 다음과 같다. 미쓰비시 상사 1,607만엔, 이토추 상사 1,520만엔, 미쓰이 물산 1,430만엔, 마루베니 1,389만엔, 스미토모상사 1,389만엔 등이다. 키엔스 등의 급여가 높다고 소문난 기업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1] 광화실업(光和実業株式会社)의 창립일 기준[2] 일본증시 8위. 2024년 2월 기준[3] 미쓰비시 상사, 미쓰이 물산(三井物産), 이토추 상사(伊藤忠商事), 스미토모 상사(住友商事), 마루베니(丸紅)[4] 천연가스그룹, 종합소재그룹, 금속자원그룹, 석유・화학그룹, 산업인프라그룹, 자동차・모빌리티그룹, 식품산업그룹, 컨슈머산업그룹, 전력솔루션그룹, 복합도시개발그룹[5] 미쓰비시상회, 미쓰비시증기선(현 NYK Lines(일본우선)), 미쓰비시사[6] 2020년대 기준 호주 최대 규모의 석탄 채굴업체다.[7] 훗날 21세기 미쓰비시가 반한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과 대조적이다.[8] 출처: 야기 다이스케 참의원 회고록.[9]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65년 2월에 처음 만나게 되었다고 하며 이는 한일기본조약 체결 네 달 전이다.[10] 지분 8.62%를 출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