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16년 |
| 평안북도 의주군 | |
| 사망 | 1942년[1] (향년 25~26세) |
| 사망지 미상 |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2021) |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한국국민당 당원, 한국청년전지공작대, 한국광복군 제5지대 대원.2. 생애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17세 때 중국으로 건너가려 했으나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후 중국어를 학습하여 1938년 11월 산시성(山西省) 용지(永濟)에 주둔한 일본 헌병대의 통역이 되었다.2.1. 일본군 탈출
한국의 열혈청년 박동운
-지략을 발휘하여 중국무장동지 5명 구출-
한국국민당 주섬서특파원이 2월 2일 시안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고전문을 중앙당부에 보내왔다.
금년 25세로 의주 출신인 한국의 열혈청년 박동운 군은 중국어를 비교적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1년 전 강요에 의해 왜군통역관으로 중국전장에 배치된 박군은 그간 산시성(山西省) 린펀(臨汾) 주재 헌병대 페이저우(沛州) 분대에서 복무하였다. 평소 열렬한 애국심을 품고 있던 박 군은 비록 왜군에 끌려오기는 했지만 적의 앞잡이 노릇은 할 수 없다는 생각에 탈출을 기도하였으나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작년 말 영용한 중국청년동지 5명이 박 군이 복무하는 부대에 포로로 잡혀왔다. 애초 적들은 금년 1월 6일 이들을 처형할 예정이었다. 본시 혁명의식이 강렬한 박 군은 대세를 보는 눈도 남달라 중국이 반드시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박 군은 또한 이미 오래전부터 중한의 혁명동지들이 공동의 적-일본강도-에 대항하기 위해 함께 손잡고 같은 전선에서 싸우는 동맹군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박 군이 전우와 마찬가지인 중국청년동지들이 왜적의 창검에 목숨을 잃는 것을 가만 두고 볼 리 없었다. 박 군은 비분한 마음을 속으로 삼키며 다섯 전사를 구할 방도를 신중하게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신년을 맞이하여 1월 4일 왜군헌병대 분대장 이하 다수의 관병이 놀거리를 찾아 부대 밖으로 외출하였다. 부대에 남아있는 왜군들도 대낮부터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상태였다. 이를 절대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로 여긴 박 군은 교묘한 수단으로 갇혀있던 중국무장동지 5명을 탈옥시키고, 이들에게 왜군군복을 입혀 왜군으로 가장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어 박 군은 왜군의 중요문건 수백 종과 상세한 군용지도 수십 장 및 권총 6자루를 빼내고 군마 3필을 훔쳐내었다.
3명은 말을 타고 3명은 그 뒤를 따라 헌병대를 무사히 빠져나간 이들이 성문에 다다르자 초병이 이들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박 군은 전혀 위축된 기미 없이 태연자약하게 “방금 긴급한 정보가 입수되어 급히 현장을 조사하러 가는 길이다. 명절이라고 태만하지 말고 경계를 더욱 철저히 하라”며 오히려 초병을 훈계하였다. 평소 박 군이 공무에 열심인 것을 보아온 초병은 감히 대꾸도 하지 못하고 순순히 일행을 성문 밖으로 내보내 주었다.
성문을 벗어난 일행은 쉬지 않고 달려 마침내 적 경계선 밖까지 안전하게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안전한 장소에 다다르자 박 군은 권총과 군마를 중국 청년동지들에게 건네주며 본대로 귀환하도록 하였다. 중국 청년동지들과 헤어진 박 군은 헌병대에서 훔쳐온 문건과 지도를 휴대하고 1월말 마침내 서안에 도착하였다. 각계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박 군은 현재 모 군사기관의 보호를 받고 있다.
소식에 의하면 서안에 도착한 뒤 이곳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집 앞에 걸린 태극기를 보자 감격한 박 군은 태극기를 어루만지고 입 맞추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너를 보고 만져보는구나!”하더니 망국의 설움과 그간의 고초가 떠오르는지 말을 마치자마자 방성대곡하였다. 곁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다수의 동포들도 참지 못해 모두 울음을 터뜨렸다. 이 순간 뜨거운 동포애와 조국광복을 바라는 애국심이 거리에 충만하였다.
중국의 장기항전에 속수무책인 왜적들은 지금 깊은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제위기를 비롯한 내재적인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위기에 처한 적들은 온갖 거짓된 수단과 방법으로 한국인의 정신을 마취시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심지어는 소위 지원병이라는 이름을 걸고 한국청년들을 강박하여 중국전선으로 내몰고 중국동포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도록 강요하고 있다. 적의 압박과 강요 때문에 한국인들은 감히 반항하지 못하고 숨죽이며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게는 용기와 희생정신이 필요하고, 적의 간계를 무너트릴 적절한 대응책이 요구된다. 적들의 허위선전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가를 폭로하고, 해방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중한 두 민족이 반드시 함께 분투해야 한다는 점을 널리 인식시키기 위한 선전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 중한합작의 의의를 널리 선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 압박 하에 중국으로 끌려온 무장, 비무장 한국동포들의 반일진영으로의 귀순도 촉발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제2, 제3의 박동운이 끝없이 이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의 귀순동포 위문
중국항전이 개시된 이후 한국국민당은 조국광복을 앞당기기 위해 적진에 끌려온 한국청년동지들의 귀순을 적극 유도하였다. 당연히 한국국민당은 적진을 탈출하여 귀순한 동포들을 열렬히 환영하고, 이들이 광복진영에 동참하여 함께 노력할 수 있도록 보호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박동운 용사는 광복진영에 동참하기 위한 일념으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을 탈출하여 최근 무사히 서안에 도착하였다. 박 군의 귀순소식을 접하자 정의를 사랑하는 중국인사들은 모두 박 군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중국동지들도 이러한데 우리 한인의 기쁨과 감격은 어떠하겠는가!
이에 한국국민당은 박 군의 애국열정을 칭하하고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는 의미에서 우리의 정성이 담긴 위문편지와 함께 위로금 50원을 전달하기로 결정하였다. 한국국민당은 2월 26일 주섬서특파원에게 편지와 위로금을 발송하고 박 군에게 대신 전해주기를 청하였다.
이외에도 한국국민당은 적진을 탈출하여 지금 ○○○○수용소에 있는 한국동포들에게 위문편지와 위로금 1백 원을 전달하여 그들의 굳은 애국심을 격려하였다. 한국국민당은 앞으로 적진을 탈출하여 귀순하는 동포가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예견하고 있다. 이에 제2, 제3의 박동운 군을 지원하기 위한 필요에서 한국국민당은 목하 미주의 당 지부를 통해 현지 한교들을 향한 모금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한민(韓民)』 제1기 제1호 (1940. 3. 1.)
-지략을 발휘하여 중국무장동지 5명 구출-
한국국민당 주섬서특파원이 2월 2일 시안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고전문을 중앙당부에 보내왔다.
금년 25세로 의주 출신인 한국의 열혈청년 박동운 군은 중국어를 비교적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1년 전 강요에 의해 왜군통역관으로 중국전장에 배치된 박군은 그간 산시성(山西省) 린펀(臨汾) 주재 헌병대 페이저우(沛州) 분대에서 복무하였다. 평소 열렬한 애국심을 품고 있던 박 군은 비록 왜군에 끌려오기는 했지만 적의 앞잡이 노릇은 할 수 없다는 생각에 탈출을 기도하였으나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작년 말 영용한 중국청년동지 5명이 박 군이 복무하는 부대에 포로로 잡혀왔다. 애초 적들은 금년 1월 6일 이들을 처형할 예정이었다. 본시 혁명의식이 강렬한 박 군은 대세를 보는 눈도 남달라 중국이 반드시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박 군은 또한 이미 오래전부터 중한의 혁명동지들이 공동의 적-일본강도-에 대항하기 위해 함께 손잡고 같은 전선에서 싸우는 동맹군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박 군이 전우와 마찬가지인 중국청년동지들이 왜적의 창검에 목숨을 잃는 것을 가만 두고 볼 리 없었다. 박 군은 비분한 마음을 속으로 삼키며 다섯 전사를 구할 방도를 신중하게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신년을 맞이하여 1월 4일 왜군헌병대 분대장 이하 다수의 관병이 놀거리를 찾아 부대 밖으로 외출하였다. 부대에 남아있는 왜군들도 대낮부터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상태였다. 이를 절대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로 여긴 박 군은 교묘한 수단으로 갇혀있던 중국무장동지 5명을 탈옥시키고, 이들에게 왜군군복을 입혀 왜군으로 가장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어 박 군은 왜군의 중요문건 수백 종과 상세한 군용지도 수십 장 및 권총 6자루를 빼내고 군마 3필을 훔쳐내었다.
3명은 말을 타고 3명은 그 뒤를 따라 헌병대를 무사히 빠져나간 이들이 성문에 다다르자 초병이 이들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박 군은 전혀 위축된 기미 없이 태연자약하게 “방금 긴급한 정보가 입수되어 급히 현장을 조사하러 가는 길이다. 명절이라고 태만하지 말고 경계를 더욱 철저히 하라”며 오히려 초병을 훈계하였다. 평소 박 군이 공무에 열심인 것을 보아온 초병은 감히 대꾸도 하지 못하고 순순히 일행을 성문 밖으로 내보내 주었다.
성문을 벗어난 일행은 쉬지 않고 달려 마침내 적 경계선 밖까지 안전하게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안전한 장소에 다다르자 박 군은 권총과 군마를 중국 청년동지들에게 건네주며 본대로 귀환하도록 하였다. 중국 청년동지들과 헤어진 박 군은 헌병대에서 훔쳐온 문건과 지도를 휴대하고 1월말 마침내 서안에 도착하였다. 각계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박 군은 현재 모 군사기관의 보호를 받고 있다.
소식에 의하면 서안에 도착한 뒤 이곳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집 앞에 걸린 태극기를 보자 감격한 박 군은 태극기를 어루만지고 입 맞추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너를 보고 만져보는구나!”하더니 망국의 설움과 그간의 고초가 떠오르는지 말을 마치자마자 방성대곡하였다. 곁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다수의 동포들도 참지 못해 모두 울음을 터뜨렸다. 이 순간 뜨거운 동포애와 조국광복을 바라는 애국심이 거리에 충만하였다.
중국의 장기항전에 속수무책인 왜적들은 지금 깊은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제위기를 비롯한 내재적인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위기에 처한 적들은 온갖 거짓된 수단과 방법으로 한국인의 정신을 마취시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심지어는 소위 지원병이라는 이름을 걸고 한국청년들을 강박하여 중국전선으로 내몰고 중국동포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도록 강요하고 있다. 적의 압박과 강요 때문에 한국인들은 감히 반항하지 못하고 숨죽이며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게는 용기와 희생정신이 필요하고, 적의 간계를 무너트릴 적절한 대응책이 요구된다. 적들의 허위선전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가를 폭로하고, 해방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중한 두 민족이 반드시 함께 분투해야 한다는 점을 널리 인식시키기 위한 선전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 중한합작의 의의를 널리 선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 압박 하에 중국으로 끌려온 무장, 비무장 한국동포들의 반일진영으로의 귀순도 촉발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제2, 제3의 박동운이 끝없이 이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의 귀순동포 위문
중국항전이 개시된 이후 한국국민당은 조국광복을 앞당기기 위해 적진에 끌려온 한국청년동지들의 귀순을 적극 유도하였다. 당연히 한국국민당은 적진을 탈출하여 귀순한 동포들을 열렬히 환영하고, 이들이 광복진영에 동참하여 함께 노력할 수 있도록 보호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박동운 용사는 광복진영에 동참하기 위한 일념으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을 탈출하여 최근 무사히 서안에 도착하였다. 박 군의 귀순소식을 접하자 정의를 사랑하는 중국인사들은 모두 박 군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중국동지들도 이러한데 우리 한인의 기쁨과 감격은 어떠하겠는가!
이에 한국국민당은 박 군의 애국열정을 칭하하고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는 의미에서 우리의 정성이 담긴 위문편지와 함께 위로금 50원을 전달하기로 결정하였다. 한국국민당은 2월 26일 주섬서특파원에게 편지와 위로금을 발송하고 박 군에게 대신 전해주기를 청하였다.
이외에도 한국국민당은 적진을 탈출하여 지금 ○○○○수용소에 있는 한국동포들에게 위문편지와 위로금 1백 원을 전달하여 그들의 굳은 애국심을 격려하였다. 한국국민당은 앞으로 적진을 탈출하여 귀순하는 동포가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예견하고 있다. 이에 제2, 제3의 박동운 군을 지원하기 위한 필요에서 한국국민당은 목하 미주의 당 지부를 통해 현지 한교들을 향한 모금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한민(韓民)』 제1기 제1호 (1940. 3. 1.)
박동운 동지의 탈출기
중국 서북 고원의 어느 겨울 아침, 우리는 ○○ 총사령부의 통지를 받자 곧 부대를 출발하였다. 그날의 기온은 영하 아래로 내려갔지만 우리 모두의 마음은 그날의 빛나는 태양과 마찬가지로 다른 날에 비해 밝은 편이다.
○○ 총사령부에 도착한 우리는 펑(彭)과장의 소개로 방금 적진에서 탈출해 온 우리 한국의 혁명지사-박동운 동지를 만나게 되었다. 기골이 장대한 모습에 단정한 얼굴을 가진 그를 보자마자 우리는 북쪽 출신의 청년임을 알 수 있었다. 고향말로 그에게 말을 건네자마자 짙은 눈썹아래 그의 두 눈에는 놀라움과 기쁨이 묻어났고, 그의 눈에는 광채가 더해졌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 그는 자세하게 그간 자신이 겪은 놀랍고도 영용한 경험담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는데, 다음은 박 동지가 말해준 내용이다.
“저는 17세 되던 해에 첫 번째 혁명행동을 실행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40여 명의 청년동지들과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가 활로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몇 명만이 목적을 달성하였을 뿐 대다수는 붙잡혀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도망계획이 실패한 뒤 일본제국주의의 경제적 착취와 압박으로 저는 생활이 극도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제가 첫 번째 도망에 실패한 다음해는 ‘만주사변’이 발생한지 3년째였습니다. 바로 이 해에 저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 변경의 안둥현(安東縣)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의 영화(英華)보습학원에서 외국어를 배우며 일년 정도를 버텼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요인으로 부득이 다시 조국으로 돌아가 조그만 잡화점을 운영하며 그럭저럭 생활을 유지하였습니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장사를 그만 두고 다시 만주의 환런현(桓仁縣)으로 간 저는, 그곳에서 수많은 한국독립당의 동지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후일 저는 ‘만주국’의 수도인 신징(장춘시)으로 가 양복점을 운영하였습니다. 이른바 ‘북지사변(北支事變)’과 ‘상하이 사건(上海事件)’이 연달아 일어나고 마침내 ‘중일전쟁(支那事變)’이 폭발한 무렵, 저는 그간 마음먹었던 것을 행동으로 옮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1938년 5월 저는 의연히 행동하였는데, 본래의 목적은 난징 혹은 상하이의 전선을 통해 중국방면으로 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지난(濟南)에서 ‘통행증’ 문제로 일본군에 억류되고 말았습니다. 제남에서 2개월을 보낸 뒤 어쩔 수 없이 스자좡(石家莊)까지 흘러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당시 저로서는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또한 제 스스로 결심했던 앞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일반백성의 신분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에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결심으로 일본헌병대의 번역에 응모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가 생각해 둔 근무지는 용지(永濟)였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전선과 가까운 곳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저는 1938년 11월 20일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제가 근무하게 된 곳은 헌병 분대였습니다. 준위가 분대장인 이 부대에는 12명의 일본헌병과 2명의 한국국적(韓籍) 번역이 함께 근무하는 곳이었습니다. 이외에도 5명의 중국인 비밀정보원이 있었습니다. 중국유격대원을 체포할 때마다 심문시 제가 통역을 맡았습니다. 업무상의 관계로 저와 유격대는 긴밀한 연락을 취할 수 있었고, 후일 제가 거사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유격대와 맺은 관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6월, 중국유격대의 대장 한 명이 포로로 잡혀 왔습니다. 저는 일본헌병들이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초보적인 임무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그 유격대장에게 무슨 수를 써서든지 반드시 탈출시켜 주겠노라 약속하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후일 제가 탈출할 때 도움을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헌병 분대장에게는 유격대장 한 명을 죽이는 것으로는 별다른 공을 세울 수 없으니, 차라리 유격대장을 매수하여 살려 보낸 뒤 더욱 많은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설득하였습니다. 내 계획이 주효하였던지 헌병 분대장은 ○ 대장을 놓아주었습니다. 물론 ○ 대장은 이후 헌병 분대와 아무런 연락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저는 유격대와 더욱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습니다. 동시에 저는 대규모의 폭동을 계획하고 ○○ 방면의 동지 및 ○○유격대와 연계, 내외에서 호응하여 영제 일대의 적들에게 강력한 타격을 주고자 기도하였습니다. 저는 또한 비교적 높은 지위에 있는 적 지휘자를 암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우고 수시로 상황의 진전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대규모 폭동을 위한 준비가 아직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신년(新年, 1940년)을 맞이하여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사형이 확정된 다섯 명의 중국유격대원을 탈출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대규모 폭동을 일으키려던 계획을 잠시 접어두고, 저와 마찬가지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일본군벌과 투쟁을 벌이다 체포된 혁명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해 또 다른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단숨에 여기까지 말을 이어왔던 박 동지는 우리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려는 듯 고의로 잠시 말을 멈추어 우리들의 마음을 급하게 하였다. 박 동지는 꽁초가 다 된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이더니 이어서 차 한 잔을 마신 뒤에야 다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때는 바로 금년(1940년) 신정(1월 1일)이었습니다. 새해를 맞아 헌병대의 모든 사병과 장관들은 술독에 빠져 있었지요. 1월 3일 저녁, 분대장이 자리를 비운 틈에 저는 분대장 방에 있던 25장의 군용지도와 암호 책, 명령문 등 문건은 물론, 압수되어 보관 중이던 반전(反戰) 사병들의 편지까지 닥치는 대로 큰 마대에 집어넣고 군복 두 벌도 함께 넣었습니다.
1940년 1월 4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성문은 여덟시 정각이 되어야 열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성문이 열린 다음에야 비로소 성 밖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순간이 너무나도 긴장되었습니다. 다행히도 분대의 모든 대원들이 전날 저녁 귀대하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술에 취했거나 아가씨와 노느라 귀대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날은 또한 제가 당직을 서는 날이라 부대 안에는 저와 또 다른 당직병 두 사람 뿐이었습니다. 저는 일부러 마당 밖을 왔다 갔다 달려 다니며 당직병이 사무실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어렵사리 7시 반까지 버틴 저는 곧장 유치장으로 달려가 중국유격대원 5명을 풀어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두 사람에게는 일본 군복을 갈아입히고 6자루의 권총과 경기관총 1정 및 600발의 실탄, 그리고 각종 문건이 담긴 큰 마대 한 자루를 건네주었습니다. 빨리 도망칠 수 있도록 말 3필과 자전거 한 대도 준비해 주었습니다. 권총을 나누어 준 뒤 저는 유격대원 두 명과 문건이 들어 있는 마대를 메고 말에 올라탔습니다. 경기관총을 메고 실탄을 가진 또 다른 유격대원은 자전거를 타고 나머지 유격대원들은 도보로 이동하였습니다. 우리가 성문에 이르러보니 그곳에는 8명의 일본 사병이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우리 일행의 길을 막자 나는 곧장 정색을 하며 “어느 녀석이 감히 우리 앞길을 막는거야? 나는 헌병이다. 지금 적정을 살피기 위해 비밀정보원 몇 명을 데리고 교외로 나가는 중이다. 알겠나?” 하고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그러자 보초들은 즉각 ‘경례’를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 일행은 가장 어려운 난관인 영제성을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성문 수비병의 시야를 벗어나자마자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성에서 1리 정도 떨어진 곳에 이르러 전날 저녁 미리 우리를 마중하기로 약속했던 유격대원 몇 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성에서 약 20리 정도 떨어진 ○○촌으로 향했습니다. ○ 촌장은 다시 우리를 촌 뒤편으로 1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언덕배기에 숨겨주었습니다. 그날 오후 우리는 촌장이 제공한 은신처에서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그날 저녁 8시 무렵, 언덕배기 아래 마을의 개짖는 소리가 유난히 시끄러웠습니다. 우리는 분명 뭔가 일이 벌어진 것으로 직감하였습니다. 그러나 일행 가운데 어느 누구도 아래로 내려가 소식을 탐문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 마을에 살고 있는 8 · 9세 가량의 꼬마가 용감하게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되돌아온 꼬마의 말에 의하면 일본군들이 마을을 에워싸고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꼬마도 일본군에게 뺨 두 대를 맞고 쫓겨 왔다 하였습니다. 이미 일본군이 뒤를 좇아온 데다 언덕배기와 마을이 너무 가까운 탓에 우리는 다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지고 도망치던 문건들을 마른 샘 속에 묻어둔 우리는 적의 추격을 분산시키기 위해 몇 갈래로 나누어 도망하기로 하였습니다. 유격대원 두 명이 다른 방향으로 도망하자, 저와 함께 탈출했던 나머지 유격대원 세 명 및 ○○ 유격대에서 우리를 마중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유격대원 한 명은 ○○ 방향을 향해 길을 재촉하였습니다. 일행 가운데 세 명은 말을 타고 두 명은 도보로 이동하였습니다. 밤을 이용하여 계곡과 산비탈을 되는대로 달린 우리의 눈에 우리를 찾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의 자동차와 오토바이 불빛이 환히 들어왔습니다. 도로와 마을을 피해 다니느라 우리는 많은 길을 돌아야 했습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적어도 100리는 내달렸을 것입니다. 우리가 ○○촌에 도착했을 때 ○ 촌장은 방금 일본군들이 다녀갔다고 말해주며 말 세 필을 구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조금 늦게 ○○촌에 도착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큰 낭패를 당할 뻔한 것입니다. 우리는 ○○촌에서 두 시간 가량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漢奸 한 명이 우리가 다녀간 소식을 일본군에게 밀고하여 ○ 촌장과 ○ 부촌장 및 마을 주민 한 명이 일본군에게 끌려가 살해당했다 합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충심으로 호의를 베풀어주었던 ○ 촌장의 인상이 내 가슴속 깊은 곳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1940년 1월 5일 저녁, 우리는 마침내 ○○촌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은 ○○○유격지대의 근거지였습니다. 수많은 중국 전사들의 열렬한 환영에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유격대원 모두들 솔직담백하게 저를 대해 주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공동의 적 앞에 우리는 모두 한 가족이라는 단결정신을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긴장되면서도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저는 ‘토굴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1940년 1월 7일 아침 8~9시경 얻은 정보에 의하면 적들이 ○○촌을 향해 수색을 시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보가 들어오자 ○ 지대장은 즉각 전투배치를 시작하였습니다. 영용한 유격대 전사들은 신속하면서도 민첩한 동작으로 지정된 장소를 향해 출동하였습니다. ○○촌에는 돌연 적막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였습니다. 신비한 기운마저 감도는 골짜기에 위치한 ○○촌에는 곳곳에 함정이 설치되어 있었고, 우리는 사냥감이 다가오기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80여 명의 일본군이 마침내 ○○촌에서 남쪽으로 4 · 5리 정도 떨어진 ○촌과 ○촌 일대에 나타났습니다. 적들은 야포 1문과 여러 정의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채 겁을 잔뜩 먹은 듯 느린 걸음으로 북쪽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적들은 사면팔방에 무수히 많은 신출귀몰한 유격대 전사들이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적들이 ○촌 부근에 접근했을 때, 적들은 강력한 자력을 가진 80여개의 자석처럼 순식간에 유격대원들의 총구에서 쏟아진 총탄을 빨아들이고 말았습니다. 맹렬한 습격전이 황량한 서북의 황토고원에서 벌어졌던 것입니다. 유격대의 기관총이 불을 뿜어대자 위협을 느낀 적들은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감히 고개를 쳐들지 못하였습니다. 이 순간 유격대원들의 소총에서 뿜어져 나온 탄알들이 비 오듯 쏟아지며 귀를 찢을 듯한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수류탄은 끊임없이 아름다운 불꽃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고원 위에는 누런 안개가 덮힌듯 하였습니다. 유격대원의 기습공격을 받은 적군은 목표물도 정하지 못하고 사방을 향해 되는대로 총을 난사하였습니다. 야포도 덩달아 목표 없이 발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황혼이 다가올 무렵이 되어서야 적군들은 마침내 ‘소탕’의 임무를 마쳤습니다. 그들의 전리품은 이미 호흡이 멈춘 13명의 ‘황군’이었습니다. 우리도 5명의 영용한 대원을 잃었습니다.
1940년 1월 9일, 저는 마침내 ○○에서 황하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도하 후 저는 잠시 ○○○ 사단과 ○○ 사단에서 며칠간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이 기간 중국군의 열렬한 환영과 따뜻한 접대를 받았습니다. 지금 저는 비록 시안에 있지만 한시도 내가 만났던 무수히 많은 충성스럽고 용감한 전사들과 ○○방면의 동지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머지않은 장래에 그들이 영제 일대의 적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박 동지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났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도 모두의 맥박은 평소보다 훨씬 빨리 뛰고 있었다.
지금 박 동지는 이미 우리 부대에 와 있으며, 우리 전체 대원들에게 큰 정신적인 자극을 주었다. 박 동지가 있음으로 해서 우리의 역량은 더욱 충실해 졌다. 적 점령구역에서 생활하고 있는 무수히 많은 본국 청년들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박 동지와 마찬가지로 적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기회를 노리고 있으리라 믿는다!
『한국청년』 제1기 (1940. 7. 15)
중국 서북 고원의 어느 겨울 아침, 우리는 ○○ 총사령부의 통지를 받자 곧 부대를 출발하였다. 그날의 기온은 영하 아래로 내려갔지만 우리 모두의 마음은 그날의 빛나는 태양과 마찬가지로 다른 날에 비해 밝은 편이다.
○○ 총사령부에 도착한 우리는 펑(彭)과장의 소개로 방금 적진에서 탈출해 온 우리 한국의 혁명지사-박동운 동지를 만나게 되었다. 기골이 장대한 모습에 단정한 얼굴을 가진 그를 보자마자 우리는 북쪽 출신의 청년임을 알 수 있었다. 고향말로 그에게 말을 건네자마자 짙은 눈썹아래 그의 두 눈에는 놀라움과 기쁨이 묻어났고, 그의 눈에는 광채가 더해졌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 그는 자세하게 그간 자신이 겪은 놀랍고도 영용한 경험담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는데, 다음은 박 동지가 말해준 내용이다.
“저는 17세 되던 해에 첫 번째 혁명행동을 실행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40여 명의 청년동지들과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가 활로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몇 명만이 목적을 달성하였을 뿐 대다수는 붙잡혀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도망계획이 실패한 뒤 일본제국주의의 경제적 착취와 압박으로 저는 생활이 극도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제가 첫 번째 도망에 실패한 다음해는 ‘만주사변’이 발생한지 3년째였습니다. 바로 이 해에 저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 변경의 안둥현(安東縣)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의 영화(英華)보습학원에서 외국어를 배우며 일년 정도를 버텼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요인으로 부득이 다시 조국으로 돌아가 조그만 잡화점을 운영하며 그럭저럭 생활을 유지하였습니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장사를 그만 두고 다시 만주의 환런현(桓仁縣)으로 간 저는, 그곳에서 수많은 한국독립당의 동지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후일 저는 ‘만주국’의 수도인 신징(장춘시)으로 가 양복점을 운영하였습니다. 이른바 ‘북지사변(北支事變)’과 ‘상하이 사건(上海事件)’이 연달아 일어나고 마침내 ‘중일전쟁(支那事變)’이 폭발한 무렵, 저는 그간 마음먹었던 것을 행동으로 옮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1938년 5월 저는 의연히 행동하였는데, 본래의 목적은 난징 혹은 상하이의 전선을 통해 중국방면으로 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지난(濟南)에서 ‘통행증’ 문제로 일본군에 억류되고 말았습니다. 제남에서 2개월을 보낸 뒤 어쩔 수 없이 스자좡(石家莊)까지 흘러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당시 저로서는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또한 제 스스로 결심했던 앞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일반백성의 신분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에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결심으로 일본헌병대의 번역에 응모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가 생각해 둔 근무지는 용지(永濟)였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전선과 가까운 곳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저는 1938년 11월 20일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제가 근무하게 된 곳은 헌병 분대였습니다. 준위가 분대장인 이 부대에는 12명의 일본헌병과 2명의 한국국적(韓籍) 번역이 함께 근무하는 곳이었습니다. 이외에도 5명의 중국인 비밀정보원이 있었습니다. 중국유격대원을 체포할 때마다 심문시 제가 통역을 맡았습니다. 업무상의 관계로 저와 유격대는 긴밀한 연락을 취할 수 있었고, 후일 제가 거사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유격대와 맺은 관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6월, 중국유격대의 대장 한 명이 포로로 잡혀 왔습니다. 저는 일본헌병들이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초보적인 임무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그 유격대장에게 무슨 수를 써서든지 반드시 탈출시켜 주겠노라 약속하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후일 제가 탈출할 때 도움을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헌병 분대장에게는 유격대장 한 명을 죽이는 것으로는 별다른 공을 세울 수 없으니, 차라리 유격대장을 매수하여 살려 보낸 뒤 더욱 많은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설득하였습니다. 내 계획이 주효하였던지 헌병 분대장은 ○ 대장을 놓아주었습니다. 물론 ○ 대장은 이후 헌병 분대와 아무런 연락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저는 유격대와 더욱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습니다. 동시에 저는 대규모의 폭동을 계획하고 ○○ 방면의 동지 및 ○○유격대와 연계, 내외에서 호응하여 영제 일대의 적들에게 강력한 타격을 주고자 기도하였습니다. 저는 또한 비교적 높은 지위에 있는 적 지휘자를 암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우고 수시로 상황의 진전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대규모 폭동을 위한 준비가 아직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신년(新年, 1940년)을 맞이하여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사형이 확정된 다섯 명의 중국유격대원을 탈출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대규모 폭동을 일으키려던 계획을 잠시 접어두고, 저와 마찬가지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일본군벌과 투쟁을 벌이다 체포된 혁명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해 또 다른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단숨에 여기까지 말을 이어왔던 박 동지는 우리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려는 듯 고의로 잠시 말을 멈추어 우리들의 마음을 급하게 하였다. 박 동지는 꽁초가 다 된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이더니 이어서 차 한 잔을 마신 뒤에야 다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때는 바로 금년(1940년) 신정(1월 1일)이었습니다. 새해를 맞아 헌병대의 모든 사병과 장관들은 술독에 빠져 있었지요. 1월 3일 저녁, 분대장이 자리를 비운 틈에 저는 분대장 방에 있던 25장의 군용지도와 암호 책, 명령문 등 문건은 물론, 압수되어 보관 중이던 반전(反戰) 사병들의 편지까지 닥치는 대로 큰 마대에 집어넣고 군복 두 벌도 함께 넣었습니다.
1940년 1월 4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성문은 여덟시 정각이 되어야 열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성문이 열린 다음에야 비로소 성 밖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순간이 너무나도 긴장되었습니다. 다행히도 분대의 모든 대원들이 전날 저녁 귀대하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술에 취했거나 아가씨와 노느라 귀대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날은 또한 제가 당직을 서는 날이라 부대 안에는 저와 또 다른 당직병 두 사람 뿐이었습니다. 저는 일부러 마당 밖을 왔다 갔다 달려 다니며 당직병이 사무실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어렵사리 7시 반까지 버틴 저는 곧장 유치장으로 달려가 중국유격대원 5명을 풀어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두 사람에게는 일본 군복을 갈아입히고 6자루의 권총과 경기관총 1정 및 600발의 실탄, 그리고 각종 문건이 담긴 큰 마대 한 자루를 건네주었습니다. 빨리 도망칠 수 있도록 말 3필과 자전거 한 대도 준비해 주었습니다. 권총을 나누어 준 뒤 저는 유격대원 두 명과 문건이 들어 있는 마대를 메고 말에 올라탔습니다. 경기관총을 메고 실탄을 가진 또 다른 유격대원은 자전거를 타고 나머지 유격대원들은 도보로 이동하였습니다. 우리가 성문에 이르러보니 그곳에는 8명의 일본 사병이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우리 일행의 길을 막자 나는 곧장 정색을 하며 “어느 녀석이 감히 우리 앞길을 막는거야? 나는 헌병이다. 지금 적정을 살피기 위해 비밀정보원 몇 명을 데리고 교외로 나가는 중이다. 알겠나?” 하고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그러자 보초들은 즉각 ‘경례’를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 일행은 가장 어려운 난관인 영제성을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성문 수비병의 시야를 벗어나자마자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성에서 1리 정도 떨어진 곳에 이르러 전날 저녁 미리 우리를 마중하기로 약속했던 유격대원 몇 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성에서 약 20리 정도 떨어진 ○○촌으로 향했습니다. ○ 촌장은 다시 우리를 촌 뒤편으로 1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언덕배기에 숨겨주었습니다. 그날 오후 우리는 촌장이 제공한 은신처에서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그날 저녁 8시 무렵, 언덕배기 아래 마을의 개짖는 소리가 유난히 시끄러웠습니다. 우리는 분명 뭔가 일이 벌어진 것으로 직감하였습니다. 그러나 일행 가운데 어느 누구도 아래로 내려가 소식을 탐문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 마을에 살고 있는 8 · 9세 가량의 꼬마가 용감하게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되돌아온 꼬마의 말에 의하면 일본군들이 마을을 에워싸고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꼬마도 일본군에게 뺨 두 대를 맞고 쫓겨 왔다 하였습니다. 이미 일본군이 뒤를 좇아온 데다 언덕배기와 마을이 너무 가까운 탓에 우리는 다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지고 도망치던 문건들을 마른 샘 속에 묻어둔 우리는 적의 추격을 분산시키기 위해 몇 갈래로 나누어 도망하기로 하였습니다. 유격대원 두 명이 다른 방향으로 도망하자, 저와 함께 탈출했던 나머지 유격대원 세 명 및 ○○ 유격대에서 우리를 마중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유격대원 한 명은 ○○ 방향을 향해 길을 재촉하였습니다. 일행 가운데 세 명은 말을 타고 두 명은 도보로 이동하였습니다. 밤을 이용하여 계곡과 산비탈을 되는대로 달린 우리의 눈에 우리를 찾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의 자동차와 오토바이 불빛이 환히 들어왔습니다. 도로와 마을을 피해 다니느라 우리는 많은 길을 돌아야 했습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적어도 100리는 내달렸을 것입니다. 우리가 ○○촌에 도착했을 때 ○ 촌장은 방금 일본군들이 다녀갔다고 말해주며 말 세 필을 구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조금 늦게 ○○촌에 도착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큰 낭패를 당할 뻔한 것입니다. 우리는 ○○촌에서 두 시간 가량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漢奸 한 명이 우리가 다녀간 소식을 일본군에게 밀고하여 ○ 촌장과 ○ 부촌장 및 마을 주민 한 명이 일본군에게 끌려가 살해당했다 합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충심으로 호의를 베풀어주었던 ○ 촌장의 인상이 내 가슴속 깊은 곳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1940년 1월 5일 저녁, 우리는 마침내 ○○촌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은 ○○○유격지대의 근거지였습니다. 수많은 중국 전사들의 열렬한 환영에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유격대원 모두들 솔직담백하게 저를 대해 주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공동의 적 앞에 우리는 모두 한 가족이라는 단결정신을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긴장되면서도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저는 ‘토굴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1940년 1월 7일 아침 8~9시경 얻은 정보에 의하면 적들이 ○○촌을 향해 수색을 시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보가 들어오자 ○ 지대장은 즉각 전투배치를 시작하였습니다. 영용한 유격대 전사들은 신속하면서도 민첩한 동작으로 지정된 장소를 향해 출동하였습니다. ○○촌에는 돌연 적막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였습니다. 신비한 기운마저 감도는 골짜기에 위치한 ○○촌에는 곳곳에 함정이 설치되어 있었고, 우리는 사냥감이 다가오기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80여 명의 일본군이 마침내 ○○촌에서 남쪽으로 4 · 5리 정도 떨어진 ○촌과 ○촌 일대에 나타났습니다. 적들은 야포 1문과 여러 정의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채 겁을 잔뜩 먹은 듯 느린 걸음으로 북쪽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적들은 사면팔방에 무수히 많은 신출귀몰한 유격대 전사들이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적들이 ○촌 부근에 접근했을 때, 적들은 강력한 자력을 가진 80여개의 자석처럼 순식간에 유격대원들의 총구에서 쏟아진 총탄을 빨아들이고 말았습니다. 맹렬한 습격전이 황량한 서북의 황토고원에서 벌어졌던 것입니다. 유격대의 기관총이 불을 뿜어대자 위협을 느낀 적들은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감히 고개를 쳐들지 못하였습니다. 이 순간 유격대원들의 소총에서 뿜어져 나온 탄알들이 비 오듯 쏟아지며 귀를 찢을 듯한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수류탄은 끊임없이 아름다운 불꽃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고원 위에는 누런 안개가 덮힌듯 하였습니다. 유격대원의 기습공격을 받은 적군은 목표물도 정하지 못하고 사방을 향해 되는대로 총을 난사하였습니다. 야포도 덩달아 목표 없이 발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황혼이 다가올 무렵이 되어서야 적군들은 마침내 ‘소탕’의 임무를 마쳤습니다. 그들의 전리품은 이미 호흡이 멈춘 13명의 ‘황군’이었습니다. 우리도 5명의 영용한 대원을 잃었습니다.
1940년 1월 9일, 저는 마침내 ○○에서 황하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도하 후 저는 잠시 ○○○ 사단과 ○○ 사단에서 며칠간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이 기간 중국군의 열렬한 환영과 따뜻한 접대를 받았습니다. 지금 저는 비록 시안에 있지만 한시도 내가 만났던 무수히 많은 충성스럽고 용감한 전사들과 ○○방면의 동지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머지않은 장래에 그들이 영제 일대의 적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박 동지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났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도 모두의 맥박은 평소보다 훨씬 빨리 뛰고 있었다.
지금 박 동지는 이미 우리 부대에 와 있으며, 우리 전체 대원들에게 큰 정신적인 자극을 주었다. 박 동지가 있음으로 해서 우리의 역량은 더욱 충실해 졌다. 적 점령구역에서 생활하고 있는 무수히 많은 본국 청년들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박 동지와 마찬가지로 적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기회를 노리고 있으리라 믿는다!
『한국청년』 제1기 (1940. 7. 15)
1939년 통역의 직책을 이용하여 포로로 잡힌 중국인 유격대장이 석방될 수 있도록 도왔다. 중국 유격대와 연계하여 대규모 폭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940년 1월 4일 사형이 확정된 5명의 중국인 유격대원을 탈출시키고 자신도 일본군을 탈출하였다. 이 때 일본군 군용지도와 명령문 등의 기밀 문건을 소지하고 중국인 유격대에 합류하였다. 중국 유격대에 소속되자 추격해 온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2.2.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입대
이후 시안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합류하였다. 박동운이 시안에 도착하여 처음 본 태극기를 어루만지며 대성통곡하자 이를 본 동포들도 모두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중국 유격대원을 탈출시키고 일본군을 탈출하여 항일전선에 합류한 박동운의 활동은 당시 여러 중국 신문과 『한민(韓民)』, 『한국청년』 등 독립운동 단체의 기관지에 실려 큰 반향을 일으켰다. 즉 한국과 중국의 항일 연대와 일본군 소속 한인 청년들의 항일전선 참여의 상징적인 사례로서 주목받았다. 그의 일본군 탈출은 이후 일본군 소속 한인 병사들이 탈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서는 박동운의 사례를 ‘한국의 한 용사’라는 연극으로 제작하여 여러 차례 공연하였다. 사실에 입각한 내용에 박동운이 직접 주인공으로 출연하여 연기함으로써 사실감을 더하였다. 이 공연은 중국인들에게도 큰 감명을 주어 한중연대와 항일의식 고취에 기여하였다.
이후 1941년 1월 1일,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개편됨에 따라 제5지대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 특과총대(特科總隊) 학원대(일명 韓靑班)에 마련된 한인 청년 군사훈련과정을 수료하였다.
2.3. 사망
1942년 3월 1일 나월환 암살 사건의 주동자로 국민혁명군에 체포되어 사형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한국청년전지공작대 창설의 정당이자 한국 아나키즘 소수정당이었던 조선혁명자연맹[2]나월환 제5지대장은 암살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박동운은 한국국민당 당원이었기 때문에 정화암 회고록에 따르면 나월환 암살 사건에 대해 백범 김구에 편지를 써 따져 묻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충칭와 시안에는 거리가 있었기에 김구가 직접 시킨 일도 아니었거니와 시안 주재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 중 하나인 송호성의 소행이었다.[3]
사건 발생 후,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간부 박기성(제2구대장)은 나월환 장례를 치르고 중국 아나키스트 후쭝난, 후보이를 찾아가 체포된 동지들을 구명운동을 펼쳤고 이후, 국민혁명군에 다시 들어갔다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정보참모부장으로 근무한다.[4] 김동수(부지대장/제1구대장)도 충칭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로 전출간다. 이하유(정치지도원)와 이재현(공작조장)이 무기징역으로 2년차가 되는 1944년 봄에 이범석 보증으로 가석방된다.[5]
조선의용대 본부구대가 한국광복군에 합류되면서 한국광복군 제2지대로 개편되고 1942년 말, 이범석 장군이 소장에서 상교(대령)계급장을 달고 한국광복군 제2지대장으로 부임해오는데, 송호성을 따르던 배아민 대원에 의하여 '이범석 암살미수 사건'이 일어난다.
또한, 박동운은 1941년 조선혁명당 현익철 조카 현이평도 죽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