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반딧불이의 묘(애니메이션)의 극우 논란 및 반론을 서술한 문서.2. 피해자 코스프레 작품 논란
극우미디어물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을 서술한다.[1]2.1. 감독의 의도
타카하타 이사오: <반딧불의 묘>는 전쟁이 끝나가는 무렵부터 전쟁이 끝난 직후까지를 다룬 영화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전쟁을 다룬 영화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보는 사람들은 자꾸 반전영화 아니냐 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반전영화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전쟁 말기의 비참한 상황을 그렸는데 전쟁의 비참함을 호소해도 별 효과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반전영화를 만들려면 전쟁이 시작될 때의 상황을 문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전쟁의 비참함이라는 건 현재진행형의 전쟁을 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실제로 전쟁의 시대에 살았기는 했지만 반전이라는 주제 보다는 어떤 주어진 상황 속에서 어떻게 아이들이 살았는가가 영화의 주제였지 반전은 영화의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반딧불의 묘>를 한국에서 상영하려고 했을 때 반대가 있어서 이루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이유가 일본을 피해자로 그려서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거 자체는 좀 이상합니다. 거기에 있는 민중들이나 아이들은 확실히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그랬고. 아무리 일본인을 피해자로 그렸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일본이 전쟁을 한 것에 면죄부를 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거기에 나오는 것은 사실 그대로를 그렸던 겁니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가지는 사람이 한국에 있다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박 감독님이 찍으신 <웰컴 투 동막골>은 전쟁이 한국 사람들에게 여전히 아주 무거운 주제,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구요, 그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를 아주 잘 풀어나간 훌륭한 영화라고 봤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전쟁을 다룬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다카하타 이사오, 박광현 한일감독대담 2006년 씨네21 기사에서 @아카이브
다카하타 이사오, 박광현 한일감독대담 2006년 씨네21 기사에서 @아카이브
감독은 이 작품에 대해 '반전 작품 같은 게 절대 아니다. 그런 메시지는 일절 실려있지 않다'고 했으나, 반전 애니메이션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 어쩔 도리가 없다고 회고했다. 그는 "오누이가 둘만의 가정생활을 이뤄내는 것에 성공하지만 주변 사람과의 공생을 거절하고 사회생활에 실패하는 모습이, 현대에도 통한다"고 해설하고, "고등학생과 20대의 젊은이들이 공감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아래는 타카하타 이사오의 인터뷰다. 아니메쥬 1988년 5월호 타카하타 인터뷰 전문을 인용한 블로그 글 (일본어) @아카이브
타카하타 감독은 '반딧불이의 무덤' 제작에 들어가기 전에 세이타라는 소년과 현대 소년들이 닮았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이 가정을 꾸리는 남매라는 점에서 볼 때 그 유사점은 어떤 데 있을까?
"세이타(清太)와 세츠코(節子)는 가정생활에는 성공하지만 사회생활에는 실패합니다. 아니, 실패하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사회생활을 거부하는 거죠. 사회생활이 없는 가정을 만들고 싶었다. 주위의 어른들은 차가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이타도 사람과의 어울림을 적극적으로 구하기는 커녕 차례차례로 그런 기회를 버립니다. 학교도 안 가고 선생님한테 상담도 안 하고. 친척 아줌마는 잔소리를 늘어놓은데, 그 시대, 미망인이 말한 것쯤은 특히 냉혹하지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세이타는 그것을 못참는다. 방공호로 옮겨살 것을 결심하고 세이타는 말한다. "여기서라면 아무도 없고, 세츠코와 둘이서 마음대로 할 수있다." 그리고 생각없이 '순수한 가정'을 세우려고 한다. 그런 일이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으니까 세이타는 세츠코를 죽게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것을 비판할 수 있을가?"
- 아니메쥬 1988년 5월호. 타카하타 인터뷰에서
"세이타(清太)와 세츠코(節子)는 가정생활에는 성공하지만 사회생활에는 실패합니다. 아니, 실패하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사회생활을 거부하는 거죠. 사회생활이 없는 가정을 만들고 싶었다. 주위의 어른들은 차가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이타도 사람과의 어울림을 적극적으로 구하기는 커녕 차례차례로 그런 기회를 버립니다. 학교도 안 가고 선생님한테 상담도 안 하고. 친척 아줌마는 잔소리를 늘어놓은데, 그 시대, 미망인이 말한 것쯤은 특히 냉혹하지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세이타는 그것을 못참는다. 방공호로 옮겨살 것을 결심하고 세이타는 말한다. "여기서라면 아무도 없고, 세츠코와 둘이서 마음대로 할 수있다." 그리고 생각없이 '순수한 가정'을 세우려고 한다. 그런 일이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으니까 세이타는 세츠코를 죽게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것을 비판할 수 있을가?"
- 아니메쥬 1988년 5월호. 타카하타 인터뷰에서
위 인용의 원문.
清太と節子は”家庭生活”には成功するけれど、”社会生活”に失敗するんですね。いや、失敗するのじゃなくて、徹底して社会生活を拒否するわけです。社会生活ぬきの家庭を築きたかった。まわりの大人たちは冷たかったかもしれない。しかし、清太の方も人とのつながりを積極的に求めるどころか、次々とその機会を捨てていきます。お向かいの娘に、『うちらも2階の教室やからけえへん?』と誘われて『ぼくらあとでいきますさかい』と断り、学校へも行かず、先生にも相談しない、置かしてもらった親類の未亡人はいやみを次々いい放つけれど、あの時代、未亡人のいうことぐらい特に冷酷でもなんでもなかった。清太はそれを我慢しない。壕に移り住むことを決断して清太はいいます。『ここやったら誰もけえへんし、節子とふたりだけで好きに出来るよ。』そして無心に”純粋の家庭”を築こうとする。そんなことが可能か、可能でないから清太は節子を死なせてしまう。しかし私たちにそれを批判できるでしょうか。 心情的にはべつに現代の青少年たちとだけ類似があるのじゃないと思うんです。マイホームとか核家族とか、個室やオートバイを子どもに与えるとか、おとなもみんな清太になりたがり、自分の子どもが清太的になることを理解し認めているんじゃないんですか。社会生活はわずらわしいことばかり、出来るなら気を許せない人づきあいは避けたい、自分だけの世界に閉じこもりたい、それが現代です。それがある程度可能なんですね。ウォークマン、ステレオ、パソコン、みんなそれを象徴しているような気がします。清太の心情は痛いほどわかるはずだと思います。 でも結局、実のところ、類似というのはこの出発点の心情だけかもしれないんです。清太と節子が生きた時代というのは、隣組とか、愛国婦人会、産業報国会、それにもちろん軍隊、内務班、分列行進歩調とれ! と、ことごとに抑圧的な集団主義がとられていました。制服はもちろん、登下校も集団で班を作っていく。社会生活の中でも最悪最低の”全体主義”がはびこっていたんです。清太はそういうところから自らを解き放つわけでしょう。”純粋の家庭”を築く、というのはおそろしく反時代的な行為ですよね。現代の青少年が、私たちおとなが、心情的に清太をわかりやすいのは時代の方が逆転したせいなんです。こっちは時代の流れに乗っているにすぎない。もし再び時代が逆転したとしたら、果して私たちは、いま清太に持てるような心情を保ち続けられるでしょうか。全体主義に押し流されないで済むのでしょうか。清太になるどころか、未亡人以上に清太を指弾することにはならないでしょうか、ぼくはおそろしい気がします」 |
감독의 발언까지 고려해보면, 영화를 만들면서 세이타-세츠코 남매를 통해 전시의 일본이 피해자라는 코스프레를 할 의도는 없던 걸로 보인다.
한편, 1999년 발매의 미국판 DVD에 수록된 약17분간의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인터뷰에서는 일본 관객들이 세이타에 대해 동정하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의외였다고 말했다. 세이타에 대한 비난의 의견도 있었으면 좋았다고 말한다. 감독은 세이타가 요즘 시대의 아이들과 무척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며, '부모가 저축해 둔 돈이 있으니까 아줌마한테 머리를 숙이지도 않고, 둘이서 어떡하든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렇지 못했다면서, 굴욕적이라도 머리를 숙여야 할 때는 머리를 숙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것이 요즘 아이들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돈만 있으면 편의점에 가면 뭐든 살 수 있는다고 생각하듯이 세이타도 잘못 생각을 했다. 돈만 있으면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시대는 돈이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 비참한 결과가 되었다. 나도 전쟁의 체험을 했는데 그 보다 힘든 경험을 한 사람도 이를 악물고 참고 버텨낸 사람이 많다. 그런데 세이타는 그렇지 못했다. 그런 점을 봐주었으면 했는데 그런데 일본의 관객들은 그저 세이타 편에서 동정을 하기만 하더라. 그래서 세이타에 대한 비난의 의견이 나와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비난이 나왔으면 좋았다라고 생각한다. 세이타는 그 때 그런 선택을 해서는 안됐다'고 그런 점을 영화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웃집 토토로와 동시 개봉해 어느 쪽을 먼저 봤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졌다고 하면서, <이웃집 토토로>를 먼저 보고 행복감에 젖어있다 <반딧불이의 묘>를 이어 보면 영화가 상영 중인데도 도중에 가버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반대로 <반딧불이의 묘>를 먼저 본 경우에는 그런 일은 안 생겼다고 한다.
2.2. 결론과 해석
요약하자면 이 영화는 한 어리석은 소년이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자멸하는 이야기를 보여줌으로써 2차 대전 당시 일본 상황을 은유적으로 비판하는 영화라는 해석이다.
간단히 말해서 일본의 과거 행적을 대놓고 보여주며 비판의 선상에 놓는 작품은 아니지만, 정작 작품 자체를 보면 극우나 일본의 피해자 행세와도 거리가 멀다. 작중 일본제국의 행적을 미화하거나 찬양하는 내용 같은 것은 나오지 않으며, 그저 두 명의 개인 이야기에만 초점이 집중되어 있다. 특히 가장 중요한 건 주인공 남매가 죽는 직접적인 원인이다. 작품에서 주인공의 사망 원인은 사실상 자업자득이다.
부모의 죽음 이후 자신들이 한순간에 '부잣집 자녀들'에서 '얹혀사는 고아' 신세로 몰락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고 친척 아주머니가 텃세를 부린다고 생각한 세이타가 결국 여동생을 데리고 가출했다가 비극을 맞는다. 세이타, 세츠코 남매가 친척 아주머니집을 나와 살 때 남매에게 채소를 팔던 농부 아저씨조차 '친척 아주머니집으로 돌아가 배급받으면서 살라'고 충고했을 정도였지만 끝내 듣지 않는다. 방화예방 활동을 하고 일감이 몰린다는 공장을 찾아가 일하며 배급을 받고 살았더라면 남의 집에서 눈칫밥 먹을지언정 객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친척 아주머니는 주인공 남매를 딱히 학대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남매 가족의 재산을 약탈한 것도 아니다. 다만 가족의 기모노를 판 것 뿐인데 당시엔 남매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모두 죽은 상태였다. 이미 입을 사람도 없고 놔둬봤자 자리만 차지하는 짐일 뿐이며, 팔면 귀중한 돈 및 식량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오히려 당시 남매 가족의 재산은 인플레이션이 심할 때도 자립을 하고 꽤나 쌀밥을 먹으며 버틸 만큼 상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이타는 부랑아가 되고 막상 본인이 굶주리는 상황이 오자 목구멍이 포도청인지 어머니의 기모노는 물론이고 자신의 옷과 신발까지 다 암시장에서 팔아치운다. 그렇게 얻은 돈마저도 다 떨어지자 맨발에 누더기 차림으로 산노미야역 기둥 한구석에 자리잡는다. 게다가 자존심은 어디로 갔는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동정심에 던져주는 음식으로 연명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아 물로 배를 채워가며 연명한다. 모든 걸 잃고 더 이상 팔 것도 안 남은 이 지경이 되어서도 스스로 일해서 입에 넣을 걸 손에 넣으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아,[2] 결국 세이타는 곧 죽고 만다.
친척 아줌마는 주인공이 자립하려 할 때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아줌마가 본심으로는 주인공을 걱정했다는 걸 보여주는데 주인공 남매는 아주머니를 자신을 구박하는 모습만 보고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워 집을 떠났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친척집에서 나오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학업에 열중하는 모습 또는 공장에 다니는 모습을 보이며 친척 아주머니의 가계에 도움되는 생활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세이타가 거지가 되어 비참하게 굶어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안타까우면서도 가장 어리석은 사람을 꼽자면 바로 주인공인 세이타일 것이다. 주변이 변하고 환경이 변했으니 이젠 그 자신이 환경과 주변에 맞춰서 살아야 하는데 여전히 환경과 주변이 자신에게 맞춰줘야 한다는 자기중심적 생각을 버리지 못하다 파멸에 이르고 말았다.
중학교 3학년짜리가 무슨 수가 있겠으랴 하는 사람도 있지만 하다못해 자질구레한 일을 해주면서라도 목숨을 연명할 방법은 있었다. 현대의 관점에서야 '고작' 중학교 3학년이겠지만 당대 일본의 중학교 진학률은 고작 10% 초반대에 불과했으니,[3] 세이타가 이렇게 투정이나 부리고 있을 때 또래들 대부분은 이미 공장에서 돈을 벌든 농사를 짓든 뭔가 경제 활동을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도 싫고 주변에서는 자신과 여동생을 (자신들이 느끼기엔) 구박(?)만 해대니 못 견디겠다면서 나왔다는 것은 주인공의 미숙함을 다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바꿔 말하자면 피해자 행세라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는 (전쟁의 피해자인) 개인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개인의 국적과 국가에만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당시의 일본 사회가 이 작품의 배경이 되기 때문에 약간 불편한 장면도 없진 않겠지만 어디까지나 주요 화자는 세이타와 세츠코 남매다. 그리고 이들이 당시 겪었던 어려움은 어느 인간 사회에나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
감독 자신도 극우는 커녕 오히려 대척점에 있는 일본공산당 당원이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헌법 9조의 회' 결성 집회에서 애니메이션 팬들이 전쟁 홍보용 애니메이션을 '일본이 가해자로서 뭔 짓을 했는지도 몰랐고, 전쟁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애니메이터들이 평화적으로 그린 것 같다'고 왜곡해서 받아들인 일화를 언급했다. 바로 '모모타로 바다의 신병(桃太郎 海の神兵)'이라는 애니메이션으로, 전쟁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1980년대 쇼치쿠의 창고에서 필름이 발견된 것으로 유명하다. 이를 통해 자신의 작품이 반전 요소가 부족했던 것은 아닌가, 대다수 일본 국민들이 전쟁에 대한 브레이크 없이 치달은 결과 가해자가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전쟁을 반대하던 이들은 비국민 취급당하며 감옥에 갔고, 나머지는 올림픽 국가대표 응원하듯이 전쟁을 응원했다는 뉘앙스로 강연회에서 언급하였다. 그러면서 전체주의, 군국주의를 견제할 수 있는 평화 헌법을 옹호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일본의 독립 언론인 야스다 고이치가 기고한 기사에도 자세히 나온다. 링크
감독이 2015년 1월 1일자 가나가와 신문에 기고한 글이 네이버 블로그에 번역되어 올라왔는데 참고로 읽어보자. 링크
해당 내용을 한국 블로거가 번역해 게시해도 되는지 문의하자,
"전쟁말기의 자국민의 비참한 체험만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그 근본적인 원인, 즉 그 이전에 타국으로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와, 그것들이 타국민에게 안겨준 참상에 대해 확실하게 전달하고, 생각하게 할 수 있어야만이 비로소 <반전>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한 편의 영화로 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자국의 타국으로의 침략을 영화에서 묘사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우며,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굉장히 힘들다. 그렇기에 진정한 <반전>은 영화에서보다, 교육 등 보다 이성적인 방법으로 끊임없이 실천해야만 할 것이다."
라는 말을 자신이 평소 해왔는데, 그 내용도 첨가해 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저 코멘트에 따르자면 본인의 입장에서도 반딧불이의 묘는 불완전한 반전 영화로 인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헌법 9조의 회' 강연회에서도 자신의 영화는 전쟁으로 인한 비참한 체험까지는 충분히 묘사했지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불충분하다고 인정하였다. 다양한 해석을 통해 논란이 있는 영화이며 외적으로 오용되지만 나쁜 영화라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영화 초반 공습 장면 중 시민들이 폭격에 맞아 사망하고 부상당하며 참호 밑으로 대피해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와중에 한 일본 군인이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는 모습이 등장한다. 이 장면은 일본 군부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할 수 있다.
원작 소설을 기준으로 볼 때, 이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 중에는 작중 세이타와 세츠코 남매의 모습이 문학적으로 당시 일본 국민과 지배층의 모습을 은유한다는 것도 있으니 참고할 것.
작품을 보면, 주인공 남매가 처음부터 가난했던 것도 아니다. 주인공 남매가 겪은 고난과 빈궁은 엄밀히 말하면 당시 일본인들이 겪었던 평균적인 상황과는 좀 다르다.
단적으로 작품 초반부에 나오는 산노미야역 구내에 있던 다른 부랑아들은 세이타처럼 스스로 친척집에서 뛰쳐나온 것이 아니라 진짜로 의지할 곳이 전혀 없는 처지일 가능성이 높다. 받아줄 친척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리에서 부랑아 생활을 하는 세이타와는 다르게 말이다.
1944년에 설탕 절인 복숭아를 먹었다거나, 게 통조림을 먹었다는 대목도 있고, 심지어는 음식을 상한 것도 아니고, 단 게 싫다고, 냄새가 이상하다고 버렸다는 대목도 있다. 게다가 은행에는 7,000엔의 저금이 있었고 폭격을 피하기 위해 시골로 내려가면서 바리바리 싸간 것이 우메보시, 버터, 치즈, 기모노, 풍금 등인데 이것들은 모두 당시 기준으로는 대단한 사치품들이었다.
당시 일본의 상황은, 내각의 고위 인사 기시 노부스케도 고작 '버터 바른 군고구마'를 먹지 못해 별미라 칭할 지경이었으며, 군대로 차출된 사람에게 송별회를 한다며 준 음식이 '구운 오징어'이다. 심지어 영화 일본 패망 하루전에서는 도쿄 대공습 이후 히로히토 덴노와 나가코 황후 부부가 궁성에서 하는 식사 메뉴가 단출한 바지락죽 한 그릇이 전부이며, '민간에선 아직 식량 유통이 가능해 앞으로 폐하와 함께 식사를 할 때는 자택에서 각자 도시락을 지참하도록 하겠습니다.'라는 고위 관료들의 건의가 나오자 히로히토가 허락하는 장면이 나온다. 황실쯤 되는 곳에서조차, 덴노와 함께 식사 자리를 가질 정도의 고관대작쯤 되는 사람들조차 먹을 음식들을 제대로 구하기 힘들 지경이던 것.
그러므로 불쌍하게 여기라고 만든 캐릭터는 아니다. 작품 초반에 나오는 역 구내에서 부랑아가 된 세이타의 모습은 그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난 뒤인 1945년 9월의 모습이다. 즉 최소한 친척집에 있을 때까지는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친척 아주머니에게 천대받기 싫다는 여동생의 징징거림에, 아직 어린 오빠가 빡쳐서 자기들이 독립하겠다고 집을 뛰쳐나가는 바람에 그 꼴이 난 것. 아무리 친척 아주머니가 아주 잘했다는 건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상식적인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눈치밥은 좀 줘도 상당히 인간적인 대우를 해줬다는 점을 잘 알 수 있는데 말이다. 세이타가 성숙해서 칭얼대는 여동생을 달래고 방화조에 들어가거나, 하다못해 친척 아주머니 집안일이라도 돕는 것으로 밥값을 하려고 노력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가출이란 곧 토나리구미(隣組)를 비롯한 지역 조직을 중심으로 편성된 식량 배급 체계에서 이탈하는 것이기도 했기에 문제가 된다. 처음에는 부모가 남겨준 유산으로 암시장에서 식량을 사 와 남매끼리 재미있게 살았으나, 돈이 다 떨어지고 가진 걸 다 팔아치운 뒤 더 이상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되자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다. 결국 여동생을 영양실조로 죽게 만들고, 혼자 남은 오빠는 산노미야역에서 거지처럼 생활하다 동생의 뒤를 따르게 된 것이다.
세이타가 판단력이 미숙하다는 것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여동생마저 굶어 죽은 상황이라면 친척집에 돌아가는 게 현명한 선택이겠지만, 부랑아 생활을 하며 암시장에 가진 물건을 다 팔아치운다. 입은 옷에 신발까지 팔아버리고 난 뒤에도 친척집에 돌아가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산노미야역에서 생활하는 모습은 세이타의 쓸데없는 자존심이 만들어낸 모습이다. 물건들을 헐값에 넘겼는데, 친척집에 있었다면 아주머니가 팔아줘 제값을 받고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남매가 그동안 누렸던 풍요로움이 이들의 인격 형성에 상당히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부족함 없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살았기에 한순간에 자신들이 누리던 특권을 모두 잃어버리면서 밀려드는 상실감을 버틸 수가 없었던 것. 오늘날로 말하면 갑의 입장에서 누리던 것을 잃고 을의 입장으로 내려왔을 때 이를 수용할만한 포용력이 모자람을 보여주기도 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아직 판단력이 미숙한 오빠가 판단력이 더 미숙한 여동생이 투정부리는 것을 적당히 달래지 못하고, 부화뇌동하여 친척집을 나가버린 것이 죽음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세이타와 세츠코가 아직 미성년자로 판단력이 미숙한 게 정상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도 냉정히 생각하면 세츠코 한정으로나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고작 4살의 철부지 유아는 사리분별을 제대로 못하는 게 지극히 당연하지만, 그보다 11살이나 많은 중학교 3학년 학생인 오빠 세이타에게는 같은 말을 해주기가 다소 머뭇거려지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청소년이고 어린이인 것은 맞으나, 마음만 먹으면 세츠코와 같은 철부지 어린아이를 달래고 바로잡아주어야 할 정도의 판단력과 능력쯤은 갖출 수 있는 나이다. 당시는 잘 살건 못 살건 모두가 정신을 차려야 하는 전시였다. 게다가 사실 1940년대 당시에 세이타 나이(만 14세)면 그리 어리다고 볼 수도 없다. 미국이건 일본이건 일제 시절의 한국이건 바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다.[4]
더구나 2차 대전 시작 이전에 일본이 다른 동양 국가들에 비해 여유로운 상황인 점이나 전쟁에 돌입한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여동생 세츠코는 일본 민중을 은유하는 것, 오빠 세이타는 일본 지도부를 은유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전후 일본이 겪은 고난은 결국 자업자득이라는 것을 은유하는 것이다. 또한 발간 당시 '전쟁은 국가지도층의 잘못으로 일어난 것이고, 일본 민간인은 오히려 지도층의 무모한 야욕에 희생되었을 뿐이다'라는 역사관이 유행하던 것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결국 지배층은 어떤 식으로든 다수 대중의 요구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고, 전후의 참상은 결국 일본 국민들이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책임의 대가를 스스로 치른 것일 뿐이라고 비판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무적의 일본 함대 운운하는 대사 역시 세이타의 시점에 가깝게 진행되는 이야기 특성상 주인공 입장에서는 아주 당연한 대사고, 더 나아가 이것이 주인공(그리고 당시의 일본 대중)의 전쟁에 대한 무지를 상징하는 대사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점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불쌍한 애들을 괴롭히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쯤으로 묘사되는 친척 아주머니 역시, 제3자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보면 악인이라고 할 수 없다. 어머니의 기모노를 대신 내다 팔아준다고 하더니 자기들에게는 고작 쌀 한 단지 주고 말았냐는 부분도, 사실 암시장 거래의 위험성이나 아이들을 부양하는 비용을 생각하면 적절한 분배 비율에 대한 이견의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기모노와 바꿔온 쌀 중에서 자기 가족 몫을 챙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세이타 남매가 사는 동안 눈치를 주었을지언정 하숙비 등을 요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 정도의 챙김은 악덕 행위로 보긴 더욱 어렵고, 윈윈 정도라 할 수 있는 정도의 얘기다.
그리고, 남들은 다 농사일이나 대피 훈련 등으로 바쁘게 일하는데 여동생 세츠코는 방에서 종이를 오리거나 피아노를 뚱땅거리며 논다. 아직 어린아이인데다 폭격에 의한 공포로 인해 생긴 행동이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피아노 소리도 시끄러운 데다, 전시에는 공간을 차지하기만 하고 쓸 데가 없는 가구인 피아노를 얘 때문에 팔지도 못하니, 짜증이 날 만한 상황이다.
게다가 오빠 세이타는 방 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안 하니 좋지 않은 눈으로 보게 되는 것 역시 당연하다. 하다못해 공부라도 하라는 친척 아주머니의 말에 전쟁의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식으로 답했는데 정작 친척 누나와 하숙인은 각자 공부와 일을 하러 나갔다. 더구나 세이타는 누구보다 학업에 더 집중해야 할 중학교 3학년인데도 말이다. 거기다 친척 아주머니가 알아서 해먹으라고 쌀을 줬을 때도, 먹고 나서 뒷처리도 안 했다. 아주머니 입장에서 이 남매는 도움이 하나도 안 되는 밥벌레나 다름없는데 내쫓기는 커녕 구박하면서도 식사는 꼬박꼬박 챙겨줬다.
즉, 전쟁에 돌입한 일본의 태도가 마치 네살짜리 어린애와 다를 바 없었다는 비판으로도 해석 가능한 셈. 작중의 묘사에서 그러한 의도를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는 의견이 있으나, 그런 의도가 드러난 부분이 있다. 작중에서 아주머니가 주인공 남매가 부모 돈으로 밥을 사 먹자 섭섭하게 생각하는 장면이 등장하며, 집을 떠날 때는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걱정하는 표정을 짓는다.
또한 친척 아주머니가 주인공 남매의 재산을 뺏는 장면도 없다. 작중에선 물가가 극단적인 속도로 올라가는데, 주인공 남매가 물건을 한 번에 사지 않고 천천히 쓰는 장면이 나온다. 부모의 돈이 엄청났다는 증거인데, 이걸 뺏지 않은 것만 해도 과연 나쁜 사람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를 종합적으로 봤을 때 세이타와 세츠코는 전쟁의 희생자인 동시에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물이다. 그나마 세츠코는 어려도 너무나 어린 나이니 봐줄 여지가 있지만 세이타만큼은 무조건적인 동정의 대상이 되기에는 석연찮은 인물임은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특히 이 아이들이 당시 일본 사회에서 일종의 특권 계급이던 해군 장교의 자식들로, 남보다 훨씬 많은 특권을 누렸다는 점은 작중에서 명확히 묘사된다.
이러한 비평적 해석과는 별개로 적지 않은 독자나 시청자가 이 작품을 일본인의 자기연민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이다. 주인공 남매가 상징하는 의미를 심층적으로 이해하였다 하더라도, 남매들을 동정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감성적 연출이 비판론 측에서 삼는 문제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다. 앞서 비판적 의견을 대변하는 데 평론이 인용된 정성일도 이 해석은 분명히 언급하고 넘어갔다. 이는 오롯이 작가나 감독이 책임져야 할 영역인 것 역시 분명하다.
이 영화를 보고 아이들에게 연민을 느끼지 않는 시청자는 드물다. 받아들이는 쪽에서 남매의 어리석음을 제대로 지적할 수 없을 정도로 연민에 빠지는 연출이 의도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제대로 된 해석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남매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이 영화에서 의도된 결과다. 일단 어린 남매가 주인공이니 관객들은 일단 이들의 입장과 관점에 서서 작품을 감상하며 자연히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으니, 연민을 먼저 느낄 수밖에 없긴 하다.
원작에 나오는 표현조차 생략해가며 남매에게 연민을 느끼게 한 것은 이 영화가 가진 한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 행세라는 비판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이다. 어쨌든 어린 아이들이 비참하게 죽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불쌍한데,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대한민국 국민은 대단히 불편한 심경이 될 수밖에 없고 비판을 안 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감독 자신이 "전쟁 개시 전부터 일본 국민들이 브레이크 없이 치달은 결과, 가해자가 되어버렸다"고 이야기하며 일본의 전쟁 범죄 행위에 당시 일본 국민의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주장한 바 있다는 점 역시 감안할 필요는 있다. 전쟁의 광기에 대해 그 국가 구성원인 국민 자신들 역시 명백한 책임이 있다는 전제에 따라 본다면, 이와 같은 해석에도 일리가 있다.
실제로 일본의 좌파들은, 일반 국민들에게 흔히 박혀있는 책임회피의식 즉, '전쟁은 당시 지도자들의 책임이며 자신들은 그에 쓸려갈 뿐이었다'는 논리에 대해 꾸준히 비판해왔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이렇게 일본의 전쟁 책임을 꾸준히 주장해온 사람으로 이런 사람이 피해자 행세물을 만드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볼 수 있다.
스폰서 때문에 감독 의향과 다른 작품이 나오는 경우가 있지만 스튜디오 지브리는 타카하타 이사오와 미야자키 하야오가 자유로운 창작을 할 수 있게 만들어진 회사로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는 작품에 대해서 거의 간섭을 안 하는 걸로 유명하다. 즉 이 작품은 타카하타 이사오 개인의 메시지가 온전히 담겼다는 것이다.
평론가 오카다 토시오는 "전쟁이 나빠서 불쌍한 일본인이 피해로 죽는다는 내용의 영화였으면 오빠와 여동생이 둘 다 죽는 내용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여동생만 죽으며 여동생이 죽는 원인은 오빠에게 있다. 그런 영화가 아니다. 빈부와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1] 아래에도 써있지만, 90년대 초반 상영회를 했을때 한국인들의 반응은 많이 갈렸다. 세이타가 전범국 군인의 아들이니 꼴좋다는 반응과, 다 떠나서 전체주의에 대항한 소년이라는 메시지는 고사하고 전시 상황에 자존심 때문에 집을 나가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을것이다. 1990년대 초반이면 30대 후반까지도 전쟁의 참상을 알고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이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일제 강점기를 겪은 40대부터는 세이타의 최후를 꼴좋다고 욕할수도 있었다는것.[2] 이 때 몸 상태를 생각해보면 뒤늦게 정신차려서 취직을 해보려고 해도 이미 늦어, 어느 일자리에서도 받아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몸이 망가졌으니 제대로 일을 못하고 폐만 끼치다 곧 쫓겨났을 수도 있고. 물론 작중의 세이타는 일해보겠다는 시도조차 하지 않지만.[3] 관련 기사[4] 예를 들면, 경의선 마지막 기관사로 유명한 한준기는 1943년부터 17세의 나이에 일본에서 철도 기관사로 근무했다. 그 당시 일제가 닥치는 대로 징병을 하는 바람에 철도도 10대 인력을 써야 할 정도로 막장이 된 것도 감안해야겠지만, 당시는 구제중학교나 구제고등학교 진학 비율이 높지 않고 10대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