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5 14:48:34

창가의 토토

1. 개요2. 내용3. 한국 발매4. 등장인물
4.1. 토토짱4.2. 야스아키4.3. 코바야시 소사쿠(小林宗作)4.4. 마사오짱4.5. 토토의 부모님
5. 미디어 믹스

1. 개요

窓ぎわのトットちゃん / Totto-Chan: The Little Girl at the Window
これは、第二次世界大戦が終わる、ちょっと前まで、実際に東京にあった小学校と、そこに、ほんとうに通っていた女の子のことを書いたお話です。
이것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는 바로 직전까지, 실제로 도쿄에 있었던 소학교와, 그 곳을 진짜로 다녔던 여자아이의 일을 쓴 이야기입니다.
소설의 도입부와 애니메이션 영화 처음에 나오는 문구
일본배우쿠로야나기 테츠코가, 어린 시절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집필하여 1981년에 출간한 실화 기반 소설. 그림은 이와사키 치히로 작가가 담당했다.[1]

2. 내용

자전적인 작품이기는 한데, 주인공을 "토토짱"이라고 3인칭 객관화 호칭으로 묘사해서 일단 자서전인 것 같기도 하고 소설인 것 같기도 한 특이한 작품이다.

ADHD로 통상적인 학교 교육에 적응하지 못해서 문제아낙인 찍힌 소녀 토토짱은, 선생님이 "이 아이는 우리 학교에서는 못 가르치겠다"고 거부해 소학교(초등학교) 1학년 때 입학하고 3개월 만에 퇴학을 당한다. 그리고 일종의 대안학교토모에 학원으로 전학을 간다. 토모에 학원에서 그는 친절한 교장 선생님(코바야시 소사쿠)에게 감명을 받고,[2] 소아마비로 팔과 다리가 불편한 학우 야스아키와의 우정과 그의 죽음,[3] 그리고 그녀와 비슷하게 다른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친구들과의 학교생활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다.

후반에는 1941년에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수세에 몰려 점점 패망해가는 상황을 어린이의 시점으로 회상한다. 매일 전철표를 검표하던 남성 역무원이 (군대에 차출되어) 어느 날부터 여성 역무원으로 바뀌고,[4] 토토짱과 친했던 개 로키도 어느 날 사라지고,[5] 모리나가 카라멜 자판기에 어느 날부터 물건이 들어오지 않아서 하나는 남아있을 것이라는 부질 없는 희망을 갖고 매일 동전을 넣어보기도 하고, 물자 부족으로 먹을 것이 없는 이야기라든가, 테츠코의 어머니가 어느 날 삶은 15개를 주면서 '하루에 콩 15개만 먹고 살아라'라고 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콩 15개를 확인했다는 그 이야기는 그림동화책으로도 만들어졌다.[6]

1981년에 발간된 이래로 일본 내 최대 판매량을 기록했고, 그 인세를 기부해서 토토기금(トット基金)을 설립했다.

2023년 10월 3일 후속편인 《속 창가의 토토(続 窓ぎわのトットちゃん)》가 출간되어 일본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테츠코가 패전 이후 배우로써 성공하고 미국으로 유학갈 때까지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2023년 기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자서전으로 기네스북 기록을 세웠다. 전세계에 수출된 책이지만 특히 중국에서 교육서, 아동소설로 인기가 높아 이렇게 많이 팔렸다고 한다. 35개국에서 번역 출판되었고, 총 판매 부수가 2,500만 부 이상인데, 일본에서 판매 누적 부수가 800만 부 이상이고 중국에서 번역본이 1,600만 부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주로 초등학교 학생들이 많이 읽는다고 한다. 2023년에 애니메이션 영화화가 되어서 매스컴에서 다루면서 원작 소설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3. 한국 발매

한국에서는 1992년에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학교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는데, 등장인물이 모두 한국식 이름으로 현지화됐다. 토토는 '또또', 미요는 '유리', 타이는 '다솜이', 야스아키는 '우람이' 타카하시는 '짤막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됐다.

1994년에 못말리는 또또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바도 있다.[7] 배경이 현대 한국으로 바뀜에 따라 인명이 전부 한국식 이름으로 현지화되고 전쟁과 관련된 내용은 삭제되었다. 토모에 학원은 '사랑의 어린이학교'로 옮겨졌으며 주인공의 별명 또또는 기존 학교에서 퇴학 후 어린이학교로 전학하기 전 항상 "너 '또또' 그런다"라는 말을 듣고 살았기 때문에 붙은 별명인 것으로 번안되었다. 현지화된 본명은 이은정이며 작중 아버지만이 그를 이름으로 부른다. 권말부록으로 작가후기 역시 일부 번안되어 첨부되었다.

2000년에야 프로메테우스 출판사에서 현지화 번안 없이 원문 그대로 번역된 정발본이 나왔다. 번역가는 김난주.

2019년에는 김영사에서 재판본이 나왔다. 번역가는 권남희.

4. 등장인물

4.1. 토토짱

본작의 주인공. 작가 쿠로야나기 테츠코 본인의 어린 시절이다. 왜 테츠코가 아니고 토토냐면 어린 시절이라 혀가 짧아서 테츠코라는 발음을 못 해서 토토짱이라고 자칭했고,[8] 주변에서도 토토짱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름 뒤에 붙이는 까지 자신의 이름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작품에 나오는 이야기는 대부분 실화다.[9]

4.2. 야스아키

토모에 학원의 남학생. 소아마비에 걸려 한쪽 팔과 오른쪽 다리가 마비된 상태임에도 꿋꿋이 학교에 다니는 소년이다. 토토짱과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되며, 야스아키와 함께 나무에 같이 올라가기도 하고 야스아키가 곤경에 처할 때 토토짱이 도와주기도 한다. 이후 1944년 즈음에 소아마비 증세가 악화되어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만다.

4.3. 코바야시 소사쿠(小林宗作)

너는…사실은 아주 훌륭한 사람이란다.
이번엔 어떤 학교를 만들어 볼까?[10]
토모에 학원의 교장. 인품이 훌륭하고 군국주의·제국주의·체벌에 빠진 당시의 일본의 다른 교육자와 전혀 다른 열린 사고방식으로 토토를 포함한 어린 학생들을 훌륭한 인간으로 키워낸다.[11] 또한 그만큼 온화하고 인격적인 인물로, 토토가 지갑을 찾겠다고 정화조를 파내는 모습을 봤을 때도 야단은커녕 "다 끝나면 원래대로 돌려놓으라."며 토토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기도 했다.

이런 온화한 교장이 딱 한 번 화를 내는 장면이 있었는데, 교사가 악의는 없었지만 키가 제일 작은 학생이었던 다카하시에게 상처를 줄 만한 농담을 하자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12]

실존 인물이며 자식으로는 아들 토모에와 딸 미사, 미요가 있다. 학교 이름도 아들의 이름에서 지은 것이다. 셋째이자 막내딸인 미요는 주인공 토토의 동급생으로 제일 친한 친구 중 한 명이다.

그가 세운 토모에 학원은 자유로운 분위기의 교육을 지향해서 당대 군국주의와 전체주의에 미쳐 돌아간 일본에서는 상당히 이질적인 학교였다. 다행히 코바야시 교장이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학교가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강제로 폐교되는 일은 면했다.

《창가의 토토 후기》에도 따로 언급된다.

토모에 학원은 1945년 도쿄 대공습 당시 폭격을 맞아 파괴되었는데, 열차 형태 학교를 차량기지로 오인해 폭탄을 맞았다. 토모에 학원이 도쿄 대공습으로 사라진 후 제2의 토모에 학원을 설립하고 싶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하고 1963년에 세상을 떠났다.

4.4. 마사오짱

통학길의 토토짱에게 다짜고짜 조센진이라고 욕을 했다. 실은 그 자신이 재일 한국인이었다. 남들이 자신을 조센진이라고 부르자,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고 욕이라는 것만 알고 일본인인 토토짱에게 조센진이라는 욕을 한 것이었다.
본문 ▼
||토토가 아침저녁으로 오가는 집과 역 사이엔, 그 당시 조선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공동주택이 있었다.
토토는 물론 그 사람들이 조선 사람이란 것은 몰랐다. 단지 알고 잇는 것은, 그 중 한 아줌마가 머리 한가운데에 가르마를 낸 머리를 뒤로 아무렇게나 올렸으며 약간 살이 쪘고, 끝이 뾰족한 조그만 보트 같은 흰 고무신과 긴 치마에, 가슴께를 커다란 리본 같은 것으로 묶은 을 입고 있다는 것과, 언제나 큰 소리로
"마사오짜─앙!"
하고 제 아이를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그 아줌마는 매일같이 마사오짱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도 일반적인 발음은 '사'와 '오'에 악센트가 있는데, 그 아줌마는 '사'에 악센트를 넣고 '짱'을 높고 길게 늘어뜨리는 탓에 토토에게는 아주 구슬프게 들렸다.
공동주택은 토토가 타고 다니는 오이마치선 선로를 따라 약간 경사진 언덕빼기에 있었다. 토토는 마사오짱이란 아이를 알고 있었다. 토토보다 좀 크니까 한 2학년쯤 될까…. 아무튼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는 모르지만 머리는 부스스하고 언제나 개를 데리고 다녔다.

어느 날, 토토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 언덕빼기 아래를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마사오짱이 거기에 장승처럼 떡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아이는 두 손을 허리에다 대고 여봐란 듯한 폼으로 서서, 다짜고짜 토토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조센진!"
악의에 찬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토토는 겁이 났다. 그리고 별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짓궂게 군 적도 없는 남자아이가, 뭔지 모를 악의를 품고 높은 곳에서 자기한테 그런 말을 한 것에도 깜짝 놀랐다.
토토는 집으로 얼른 돌아와서 엄마한테 알렸다.
"나한테 마사오짱이 조센진이라고 그랬어."
엄마는 토토의 말을 듣더니 가만히 손을 입에 갖다댔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눈에 눈물을 가득 고였다. 토토는 깜짝 놀랐다. 굉장히 나쁜 말인가 보다 하고 퍼뜩 생각했었으니까.
엄마는 빨개진 콧잔등에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가없게도…. 다들 마사오짱한테 '조센진! 조센진!'이라고 그러는 모양이로구나. 그래서 '조센진!'이란 말이 남에게 하는 욕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마사오짱은 아직 몰라. 어리니까. 흔히들 욕을 할 때 '바보!'라고 하잖니? 마사오짱은 그런 식으로 누구에겐가 욕을 하고 싶으니까, 항상 자기더러 사람들이 그랬듯이 '조센진!'하고 너한테 해 본 거겠지. 정말 다들 왜 그렇게 심한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나서 엄마는 눈물을 닦더니 토토에게 천천히 말했다.
"토토는 일본 사람이고 마사오짱은 조선이란 나라의 사람이란다. 하지만 너도 마사오짱도 똑같은 어린아이야. 그러니까 절대로 '저 사람은 일본인'이라든지 '저 사람은 조선인'이라든지 그런 걸로 구별하면 못쓴다. 마사오짱한테 친절히 대해 주렴. 조선 사람이라고 해서 그것만으로 욕을 먹어야 하다니, 얼마나 슬프고 또 좋지 못한 일이니…."
토토는 아직 그런 상황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적어도 그 마사오짱이 까닭 없이 사람들한테 욕을 먹는 아이라는 건 알았다. 그래서 항상 엄마가 마사오짱을 걱정하며 찾고 있나 보다 생각했다.

이튿날 아침 그 곳을 지나갈 때, 마사오짱의 엄마가 또 구슬프게
"마사오짜─앙!"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토토는 (마사오짱은 대체 어디 간 걸까?)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다짐했다.
(나는 조센진이라는 사람이 아닌 것 같긴 하지만, 만약 마사오짱이 또 다시 나한테 그렇게 말하면 '우리는 다 똑같은 어린이야!'라고 하고, 친구하자고 그래야지!)
그렇긴 해도 마사오짱네 엄마의 목소리는 애타는 느낌과 불안감이 섞인 특별한 울림으로 길게 꼬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옆을 지나가는 전철 소리에 묻혀버리는 일도 있었다. 아무튼
"마사오짜─앙!"
그것은 한 번 들으면 잊으려야 잊을 수 없을 만치, 애달피 우는 듯한 소리였다….||

4.5. 토토의 부모님

아버지 '쿠로야나기 모리츠나'는 바이올리니스트, 어머니 '쿠로아냐기 초'는 작가였다. 상당히 개방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토토의 자율적인 성장을 위해 토모에 학원을 찾았다.
==# 작가 후기 #==
토모에 학원에 관한 추억을 쓰는 것은 제 오랜 숙제 중의 하나였습니다.
모자란 글, 읽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글은 모두 꾸며낸 것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들입니다. 그리고 고맙게도 저는 이런 일들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그 추억을 글로 남기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약속」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밝힌 것처럼, 코바야시 선생님과 '어른이 되면 꼭 토모에의 선생이 되겠노라'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족하나마 코바야시 선생님이란 존재, 그가 아이들을 얼마나 큰 사랑으로 대했는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아이들을 교육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전하고 싶었습니다.
애석하게도 코바야시 선생님께선 1963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오래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계셨더라면 훨씬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셨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써 내려가다 보니 젊었을 적엔 그저 재미있는 추억으로만 남아 있던 토모에 학원에서의 일들이 '아, 코바야시 선생님은 그 때 그러실 생각이셨구나!'라든지, '선생님은 이런 것까지 염두에 두고 계셨구나…'라는 걸 깨닫고, 그때마다 놀라고 감동하여 감사하게 여길 따름이었습니다. 저로서는 (넌, 정말은 착한 아이)라고 끊임 없이 말씀해 주셨던, 이 한 마디가 얼마나 큰 버팀목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만약 토모에 학원에 다니지 않았고, 코바야시 선생님도 못 만났더라면, 저는 아마 무엇을 하든 '못된 아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콤플렉스에 고뇌하며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채 어른이 되었을 것입니다.
토모에 학원은 1945년에 불타버렸습니다. 코바야시 선생님의 사재로 설립한 학교였기 때문에 재건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고 그만큼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전후, 선생님은 우선 불탄 자리에 자그마한 유치원을 세움과 동시에 쿠니타치음악대학의 보육과(지금의 유아교육과)를 창설하는 데 협력하기도 했고, 쿠니타치음악대학에서 리드미크를 가르치고 거기에 초등학교가 생길 때도 협력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꿈이자 이상을 담은 학교를 미처 세우기도 전에 69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토모에 학원의 자리는 토요코선의 지유가오카역에서 걸어서 3분, 현재는 피콕 슈퍼마켓[13]과 그 주차장이 들어서 있습니다. 얼마 전 문득 그리운 생각에, 옛 자취는 흔적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차를 몰고 가서 지금 주차장이 들어서 있는 부근(전철 교실과 운동장이었던 터)을 둘러보려고 서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곳에 계시는 주차장 아저씨가 제 차를 보고는, "만차요, 만차! 지금 주차 못합니다!"라고 소리치는 겁니다. 그 순간 저는, "아니에요, 단지 제가 다니던 학교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심정을 누가 알아주랴 싶어 부랴부랴 그곳을 떠나왔습니다. 한데 왠지 모를 슬픔이 밀려와, 달리기 시작한 차 속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일본에, 나아가 전세계에도 수많은 훌륭한 교육자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모두 이상과 애정과 꿈을 지니고 있을 터인데, 그것을 현실 속에서 실천하기가 보통 힘들지 않다는 것은 저도 잘 압니다. 코바야시 선생님의 경우도 이 토모에 학원을 세우기 전, 몇 년씩이나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본격적으로 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 1937년, 그리고 1945년에 불타버렸으므로 참으로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다니던 때가 선생님께서 가장 열정적으로 자신의 꿈을 꽃 피웠던 시기였으리라 생각에, 그 점은 행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만 없었더라면 '더욱 많은 학생들이 선생님의 손을 거쳐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을 텐데'하고 생각하면 아쉽고 서글픈 마음뿐입니다.
코바야시 선생님의 교육 방침은 이 책에도 썼듯이 항상 '어떤 아이든지 갓 태어났을 땐 선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점점 커가면서 이러저러한 주위 환경이나 어른들의 영향으로 변질되고 만다. 그러니 이런 '선한 기질'을 일찌감치 찾아, 그걸 키워주며 개성 있는 사람으로 자라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자연을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아이들의 성격도 되도록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도 자연을 좋아해 막내딸인 미요의 말로는 어릴 적에 "자연 속에서 리듬을 찾아보자꾸나."하는 선생님을 따라 늘 산책을 나서곤 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그때마다 어김없이 커다란 나무가 있는 데로 가서 '바람을 맞고 있는 나뭇잎이며 나뭇가지의 흔들림, 그리고 가지 하나를 보고 나면 그 윗가지와 그 이파리…다시 줄기와의 관계, 바람의 세기에 따라 잎의 흔들림은 어떻게 다른가?' 이런 걸 가만히 관찰하고, 바람이 없으면 언제까지고 위를 쳐다보았다고 합니다. 이는 나무뿐만이 아니라 강도 마찬가지여서, 가까운 다마 강에 나가서도 강물을 쳐다보며 싫증 한 번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건 그렇고, 전쟁 중이었는데 왜 국가나 문부성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운영되는 학교를 그냥 놔두었는지 의문이 생기는 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직 자세한 내용을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뭐니뭐니 해도 코바야시 선생님이 선전을 싫어하는 분이어서, 요샛말로 매스컴을 기피하는 분이었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학교의 사진 촬영을 허락하거나 독특한 학교라고 선전하는 일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덕분에 이 조그마한, 전교생 50명도 채 안 되는 학교가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요. 토모에 학원의 학생이었던 우리는 학년에 관계없이 지금도 해마다 11월 3일(그 멋진 운동회가 열린 추억의 날)이면 구혼부츠 절의 방을 빌려서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모두 마흔이 넘어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삿코!"니 "오에!"니 어렸을 적 이름을 그대로 부르면서 어린 시절처럼 허물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 또한 코바야시 선생님이 남겨주신 귀중한 선물입니다.
제가 처음에 다니던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는 것도, 사실은 잘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친동야며 책상 뚜껑 사건 따위도 어머니가 얘기해 준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정말일까? 난, 내가 그렇게 심한 말썽꾸러기라곤 생각 안 했는데'라며 내심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5년 전, 아사히 TV의 「나라카즈 모닝쇼」에서 만남의 시간이 있어 "누굴까?"하고 궁금했는데, 퇴학을 당한 바로 그 학교의 옆 반 담임선생님이었습니다. 그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테츠코 씨는, 그때 옆 반 학생이었어요. 수업 중 내가 교무실에 볼일일 있어 아이들한테 자습하라고 해놓고 복도에 나가면, 매일같이 복도에서 벌을 받고 있었지요. 그리고 내가 지나가면 불러 세워선, "선생님! 나, 왜 여기 서 있어야 돼요?"라는 둥,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했나요?"라는 둥, "선생님은 친동야 아저씨 싫어해요?"라는 둥 계속 말을 걸어서 난처하기 짝이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에 교무실에 볼일이 있어도 문을 열어 보고 테츠코가 있으면 아예 안 나갔어요. 테츠코의 담임선생님도 곧잘 교무실에서 나한테 "쟤는 도대체 왜 저럴까요?"라고 말씀하시곤 했지요. 그래선지 테츠코 씨가 나중에 텔레비전에 나왔을 때, 이름만 보고도 금방 알겠더군요. 워낙 오래된 일인데도 테츠코 씨의 1학년 때 일은 생생하게 남아 있었으니까요."
벌을 받고 있다니? 저는 전혀 기억에 없는 일이어서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른 시간인데도 나와주신 백발에 인상 좋아 뵈는 선생님의 젊을 적 모습과, 복도에서 벌받는 와중에도 '호기심쟁이 테츠코'다운 모습을 발휘하고 있는 자신을 상상하고는 우습기도 하고, 아울러 '퇴학을 당한 게 역시 사실이었구나!'하고 그때서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제 어머니께 진심으로 고맙단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건 '퇴학을 당했다'는 사실을 제가 20살이 넘을 때까지 단 한번도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스물이 지난 어느 날, 어머니가
"그 때, 왜 학교를 바꿨는지 아니?"
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응?"
하고 되묻자, 엄마는
"사실은, 너 그 때 퇴학을 당했었단다."
라고 가볍게 말했습니다. 만약 그 무렵,
"어쩜 좋으니? 벌써 퇴학이라니! 너, 만약 요번에 갈 학교에서도 또 퇴학당하면 이젠 정말 갈 데 없는 줄 알아!"
어머니가 이런 식으로 저를 다그쳤다면, 저는 얼마나 비참한 심정으로 겁에 질려 토모에의 문을 들어서야 했을까요…. 그랬다면 그 뿌리난 교문도, 또 전철 교실도 그토록 재미있어 보이진 않았을 겁니다. 저는 이런 어머니의 품에서 자랄 수 있었던 것, 역시 행복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전쟁 중이었으므로 토모에 학원 시절의 사진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몇 장 안 되는 사진 중에 졸업식 때 찍은 사진은 압권입니다. 졸업생들은 대개 강당 앞 중앙 계단께에서 사진을 찍는데, "사진 찍는다! 사진!" 하고 졸업생들이 늘어서면, 재학생들도 함께 찍고 싶어해 여기저기서 얼굴을 내미는 통에 누가 진짜 졸업생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사진이 나온 후에는 모두 모여서 "이건 누구네 반 졸업사진이지?"하며 한참을 연구해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도 코바야시 선생님은 잠자코 계시기만 할 뿐 결코 제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졸업식이란, 틀에 박힌 사진보다 모두가 생기발랄하고 자유롭게 찍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요…. 지금 와서 생각하니 이 사진만큼 토모에 학원 다운 것도 없다 싶습니다.
토모에 학원에 관해서는 아직도 쓸 거리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토토 같은 아이라도, 주위 어른들의 가르침으로 모두와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토모에 학원이 있다면, '등교를 거부하는 학생이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곤 합니다. 토모에 학원에서는 수업이 끝나도 다들 집에 가기 싫어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는 어서 빨리 학교에 가고 싶어 안달한 정도였으니까요…. 토모에 학원은 정말 그런 학교였습니다.

이번에는 토모에 학원의 전철 교실에서 저와 함께 여행했던 친구들이,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간단하게 써보겠습니다.
운동회 때면 늘 1등을 도맡아 차지했던 타카하시는 초등학교 때의 키 그대로 고교에 보란 듯이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메이지대학의 전기공학부를 졸업하여 현재는 한 전기 주식회사의 '조사담당'으로 있습니다. 이 업무는 사원들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을 들어주고 함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오랜 체험으로 타인의 어려움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타카하시야말로 잘 해나갈 수 있겠죠. 타카하시는 이 회사의 첨단 대형기계를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후배들에게 그 기술을 가르치는 전문적인 일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이 책을 쓰기에 앞서, 그녀 자신도 마치 다녔던 것처럼 토모에를 잘 알고 있는, 친절하고 너그러운 그의 반려자를 만나 여러 가지 얘기를 들었습니다. 타카하시는 육체적인 핸디캡에서 오는 콤플렉스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더군요. 저도 동감합니다. 만약 어떤 류의 콤플렉스가 있었다면 그렇게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더 나아가 사원들의 화합을 도모하는 중요한 직책을 맡을 수 없었겠죠.
타카하시가 직접 들려준 '토모에 학원에 처음 간 날'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자기하고 어떤 면에서 비슷한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첫날부터 안심하면서 토모에 학원에 다닐 수 있었고, 그 후로는 하루하루가 즐거웠으며 덕분에 게으름을 피우거나 결석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고요. 수영 시간에 옷을 벗어야 하는 것도 처음에는 부끄러웠지만, 곧 한 겹 한 겹 옷을 벗을 때마다 이윽고 수치심도 한 겹 한 겹 벗겨져 사람 앞에 나서도 당당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코바야시 선생님은 타카하시가 자기 키보다 훨씬 높은 뜀틀을 넘어야 할 때도 '괜찮아, 타카하시! 뛸 수 있어! 반드시 할 수 있을 거야!'라고 격려하면서 마지막 단계에서만 손을 빌려주었고, 거의 타카하시가 스스로 뛰어넘은 듯한 생각이 들게 하여 (지금 생각하면) 매번 자신감을 심어주었다고 합니다. 뜀틀을 뛰어넘었을 때, 타카하시가 얼마나 기뻐했을지 쉽게 상상이 가시겠죠. 그리고 뒤꽁무니에서 우물쩍거리고 있으면 앞으로 나오라고 더욱 채근하셨기 때문에 보다 적극적이지 않을 수 없기도 했다고요. 타카하시는 그때와 조금도 변함없이 반짝이는 눈과 신중한 목소리로, 그 운동회 날의 후련하고도 기뻤던 마음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자상한 부모님 밑에서 올바른 가정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타카하시의 성격을 완만하게 다독여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눈에 우선 보이는 것보다 먼 앞날을 내다보며 우리들을 가르쳐 주셨던 코바야시 선생님…. 선생님께서 저에게 '넌 사실은 착한 아이란다!'라고 늘 말씀해주셨던 것처럼, 타카하시에게도 '너는 반드시 할 수 있어!'라고 늘 말씀해 주셨을 겁니다.
헤어질 무렵이 거의 다 되었을 즈음, 타카하시는 저는 전혀 기억에 없던 일화를 얘기해주었습니다. 자기도 토모에 교문을 나섰다가 다른 학교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고 풀이 죽어 다시 들어오면, 제가 '왜 그러니? 누가 그랬어?'라고 묻기가 무섭게 밖으로 달려나갔고 잠시 후에 또 달려와서는 '이제 괜찮아, 안심해'라고 했다는군요.
막 헤어지려고 할 때 타카하시는 다시 한 번 '그 땐 정말 고마웠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천만에, 타카하시! 너야말로 나는 잊어버리고 있었던 일, 기억해 주어서 정말 고마워….

교장선생님의 셋째 딸이었던 미요는 현재 자그만 초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항상 어린아이들과 호흡하고 가르치고 싶어하신 코바야시 선생님의 뜻을 이어받은 것이죠. 코바야시 선생님은 미요가 3살이 될 무렵 리듬에 맞추어 걷고 몸을 움직이며 말하게 된 것을 참고로 어린이들을 접했던 것 같습니다.
토모에 학원에서 수업을 받기 시작한 첫 날, 토끼 점퍼 스커트를 입고 와서 절 무척이나 들뜨게 만들었던 장본인인 삿코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현재는 YWCA에서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여름캠프 때는 예전의 토모에 학원 시절의 경험을 살려 대활약을 펼친다는군요. 일본 알프스의 호다카를 등산하면서 만난 남자와 결혼, 이제는 대학교 2학년짜리 아이들의 엄마이기도 합니다.
나를 색시감으로 삼지 않겠다던 타이는 지금 미국에 살고 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물리학자가 되었습니다. 일리노이주에 위치한 「페르미국립가속연구소」의 부소장을 맡고 있는데, 이 연구소는 물리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알고 있는 굉장한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타이가 얼마나 천재적인지 충분히 짐작이 가시겠죠. 원래 머리가 좋았던 타이였으니 어떤 초등학교에 갔더라도 지금처럼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겠죠. 하지만 아침마다 학교에 오면 자기가 하고 싶은 것부터 할 수 있었던 토모에의 수업 방식이 그 재능을 한층 꽃피우게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저는 으레 타이의 모습 하면 늘 알코올 램프와 플라스크 옆에 있는 모습이라든지, 아니면 자기 자리에 조용히 앉아 어려운 과학 책이나 물리학 책을 읽던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으니까요.
나의 땋은 머리를 잡아당겨 코바야시 선생님께 꾸중을 들었던 아이. 하지만 타카하시의 「꼬리」 사건 때는 멋진 뉴스를 전해 주었던 오에는 현재 '동양란 전문가'입니다. 들은 얘기지만 동양란은 한 촉에 몇억 엔이나 하는 것도 있답니다. 그래서 전문가가 필요한 것이죠. 그리고 판매나 배양도 몹시 힘이 드는데, 오에는 그런 일을 터득해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 후기를 쓰기 위해 막 여행길에서 돌아온 오에와 전화로 잠깐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나: 너 학교 어디였지?
오에: 난 아무 데도 안 갔는데.
나: 안 갔다니! 그럼 토모에만 다니고 끝?
오에: 응.
나: 정말? 중학교도 안 갔어?
오에: 아아, 그러고 보니 피난지 근처에서 잠깐 다녔던 적은 있긴 해.
나: (정말 느긋한 성격이로군요. 전쟁통에 자기네 화원이 불에 다 타버렸을 때도 그토록 마음이 넉넉하더니만….)
오에: 그보다 중에서 제일 향기가 좋은 꽃이 뭔지 알아? 나는 중국의 춘란이라고 생각하는데, 춘란의 향기는 정말이지 어떤 향수도 당해내지 못한다니까!
나: 춘란? 비싸?
오에: 음…좀 비싼 것도, 싼 것도 있지.
나: 동양란은 어때? 대체 어떤 꽃이 피는데?
오에: 글쎄 뭐랄까…아주 소박한 꽃이야. 그런데 그게 정말 좋다니까!
토모에 학원 시절과 조금도 다름 없는 느긋한 오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저는 '오에는 겨우 중학교를 중퇴한 학력밖에 없지만, 스스로 연구하고 스스로 뭔가를 개척해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 열등감 없이 자신감에 차 있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정말이지 감동하였습니다.
동물을 좋아하던 아마데라의 어린 시절 꿈은 수의사가 되어 목장을 경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깝게도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의축한 전문학교에서 180도 전향하여, 현재는 병원에서 임상조사원으로 전력투구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사립초등학교를 다니다 도중에 토모에 학원으로 들어온 사이쇼는, 그 시절 우리는 '얌전한 아가씨'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미 아버지를 여윈 상태였다고 합니다. 여고를 졸업하고 건축가와 결혼, 현재 큰아들은 건설회사에 다니고 있고 둘째아들도 취직자리가 정해져 한시름 놓은 참이라는군요. 간혹 노래를 짓기도 한다는데, 전화로 목소리를 들어보니 무척 온화한 가정이 상상되더군요.
이 밖에 장례식 유명했던 미기타는 원예과를 나왔지만, 역시 어린 시절부터 좋아한 그림 공부를 다시 하기 위해 미술 디자인과에 재입학, 현재는 친구와 함께 그래픽디자인 회사를 설립해 열심히 일하고 있으며, 또 하늘을 나는 닭을 길렀던 케이코는 벌써 은혼식이 지났고 결혼한 딸까지 있다고 합니다. 한편, 전쟁터로 불려나갔던 료 아저씨는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11월 3일에는 우리들과 함께 모임을 갖습니다.
이제 코바야시 소사쿠 선생님의 간단한 경력을 써보겠습니다.
선생님은 1893년 군마현의 자그만 한 마을에서 태어나셨는데, 어렸을 적부터 음악을 좋아하여 하루나 산이 보이는 집 앞 개울가에서 항상 지휘봉을 휘두르며 놀았다고 합니다. 6형제에 그다지 윤택하지 못한 농가의 막내였기 때문에 검정시험을 거쳐 교원자격증을 땄다고 하고요. 그리고 오늘날의 도쿄예술대학을 졸업하고 세케초등학교의 음악교사가 되셨는데, 이 독특한 학교를 설립하셨던 분의 교육방침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교육은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 아래 학생 수도 많아야 한 반에 30명, 그리고 자유로운 교육, 아이들의 개성을 존중하는 교육 방침을 내세웠고 또 실천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수업은 오전 중에 끝내고 오후에는 산책을 한다든가 식물을 채집하고, 그림을 그리고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노래를 부르는 식으로 말입니다. 훗날 코바야시 선생님이 토모에 학원에서 실행한 수업 방식이었죠. 어쨌든 이 학교에서 코바야시 선생님은 어린이를 위한 오페레타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우연히 보고 감동한 그 설립자[14]가 "유럽 교육실태를 시찰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게 되었으며, 이윽고 선생님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유럽 유학길에 올랐다고 합니다. 당시 선생님이 30살 때의 일이었죠.
유럽의 많은 학교를 견학하고 2년 만에 돌아온 코바야시 선생님은 곧바로 세케 유치원을 설립하셨는데, 이 유치원에서 선생님은 '어린이를 교사의 계획에 맞추지 말며 자연 속에 풀어놓아라, 교사의 계획보다는 어린이들의 꿈이 훨씬 크다'고 각 선생님들을 교육하셨고, 결국 종래의 유치원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유치원을 꾸려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후 현장에서 실제로 가르쳐 본 결과, 리드미크 공부를 다시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코바야시 선생님은2 번째 유럽 유학길에 올라 둘크뢰즈에게 다시 사사하고 여러 학교를 견학한 후, 자신의 구상을 펼칠 수 있는 학교를 세울 결심을 굳히고 귀국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37년, 토모에 유치원과 토모에 학원(초등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토모에 학원이 소실된 후, 끝내 토모에 같은 초등학교를 다시 설립하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공습으로 불탄 토모에를 바라보면서 "이번에는 어떤 학교를 만들지?"라고 말씀하셨던 선생님의 정열이 되살아나기 전에 말입니다….
전후 코바야시 선생님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선생님은 상당히 과묵하신 분)이었다는 인상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토모에 시절, 곧잘 얘기를 많이 들려주셨던 선생님을 생각하면, 전후의 선생님은 여러 가지로 슬픈 일이 많았던 게 아닌가 싶어 저도 슬퍼집니다. 어쨌거나 코바야시 선생님이 실천하셨던 어린이 교육의 구체적인 예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시의 우리들 외에 이제 극소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많은 분들의 연구와 노력으로 코바야시 선생님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알 수 있게 되기를 지금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덧붙여 이 책의 제목을 「창가의 토토」로 한 까닭은, 이 글을 쓰기 시작한 무렵 '창가족'이란 말이 유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소외되어 있는 층, 이미 현역이 아니라는 말의 울림…. 저 역시도 친동야 아저씨를 기다리기 위해 늘 창가에 있었습니다. 처음 다니던 학교에서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늘 느끼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 까닭에 이런 제목을 정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아름답고 귀여운 그림의 화가 이와사키 치히로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안타깝게도 치히로 씨는 7년 전에 돌아가셨죠. 아시다시피 치히로 씨는 어린아이 그림의 천재였고, 이렇게 생생하게 어린아이를 그린 화가는 세계적으로 드물리라 생각합니다. 늘 어린아이들 편에서 그 아이들의 행복과 평화를 바라마지 않았던 그녀의 그림을 토모에를 다른 굴에 함께 실을 수 있기를 저는 꿈꿔왔습니다. 그 꿈이 실현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문장과 치히로씨의 그림이 너무 잘 어울리는 탓에, 돌아가시기 전에 이미 그려 둔 것은 아니냐고 여기는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어쨌든 저를 도와주신 치히로 씨의 아들 마츠모토 타케시 씨와 그의 부인 유리코 씨, 그리고 그림의 사용을 기꺼이 허락해 주신 남편 마츠모토 요시아키 씨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치히로미술관의 관장이며 저에게 '얼른 얼른 토모에에서의 일과 교장선생님 얘기를 써라'고 격려해 주신 극작가 이이사와 선생님에게도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물론 미요를 비롯한 토모에 시절의 여러분의 협력에도 감사를 드리고요.
「창가의 토토」는 이렇게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완성되었습니다. 토모에 학원은 이제 없지만, 독자 여러분들이 이 글을 읽는 동안에나마 옛날처럼 토모에의 모습이 되살아날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쁘겠습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한 중학교 졸업식장에서 선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학생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경찰관이 학교에 진입했다는 뉴스를 들은 어느 날[15]

5. 미디어 믹스

5.1. 애니메이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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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9~1974. 아동문학가였으며 사후 그녀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도쿄 아주미노에 설립되었다. 하지만 이와사키 본인이 직접 토토의 삽화라고 그린 적은 없고, 생전 이와사키가 남긴 그림을 사후 쿠로야나기가 골라서 삽화로 넣었다고 한다.[2] 첫 만남에서 무려 4시간을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다 들어주었다. 그리고는 "너는 착한 애란다."라고 말했다. 테츠코는 2023년 영화 공개 후에 그런 말을 해 줘서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고 무척 소중한 추억이라고 말했다. 코바야시 교장 선생님은 자주 "너는 착한 애란다"라고 말을 해주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는 사실은 착한 애란다."라고 말을 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너한테 말썽꾸러기라고 생각할 수 있는 면이 많지만 사실 네 성격은 밝고 아주 착하다는 말을 해주고 싶던 뜻이였지만 토토는 이 뜻을 몇 십년이 훨씬 지나고 이해하게 되었다.[3] 쿠로야나기가 짝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본명은 야마노우치 타이지(山内泰二). 그에게 크면 신부가 될 거라고 구혼을 했는데, 스모에서 그를 내팽겨쳐 버리자, 그는 난 너를 절대 신부로 삼지 않겠다고 말해서 퇴짜를 맞았다. 그는 작가 후기에도 나오는데 훗날 미국에 거주하는 물리학자가 되었다.[4] 쿠로야나키 테츠코의 아버지도 전쟁 말기가 되자 젊은 군인들이 다 죽고 부족하게 되자, 결혼해서 딸이 초등학생 5학년인데도 불구하고 군대에 징집되어 출정했다. 그 때의 출정식 사진이 남아 있다.[5] 전시의 식량난이라서 잡아먹혔을 것으로 추정.[6] 이 부분은 어느 정도 과장이 들어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쿠로야나기 테츠코는 그 시절에 자가용 차를 소유할 정도로 부유한 상류층 가정에서 자라서, 하루에 콩 15개 먹어야 할 정도로 집안이 쪼들린 것도 아니었다. 본인의 전쟁 체험담에 의하면, 도쿄 대공습 후에는 아오모리현온천 료칸으로 피난을 갔고, 숙박비를 현금으로 지불했다고 말했다. 유튜브 출전 당시의 경제 상황은 전쟁으로 인해 물가가 인플레이션으로 폭등해서 돈의 가치가 50배 이상 폭락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츠코의 가족은 고급 숙박시설인 료칸에서 피난 생활을 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7] 옮긴이 이영호, 도서출판서지원, 1994[8] 애니메이션에서는 아빠가 테츠코를 '토토스케'라는 애칭으로 불렀는데 줄여서 토토쨩이라 부르는 거라고 한다.[9] 원작을 읽지 않고 애니메이션 영화를 본 어떤 관객은 토토는 소설 속 허구의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영화 속에서 토토짱을 본명으로 부를 때 쿠로야나기 테츠코라는 이름이 나와서 허걱 놀랐다고.[10] 공습으로 토모에 학원이 불탔을 때, 아들에게 한 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끝내 제2의 토모에 학원을 세우지 못 하고 타계했다.[11] 2024년 현재 기준으로 봐도 놀라울 정도로 매우 열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당시 배경이 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였으니 엄청나게 개방된 교육관을 가지고 있는 셈.[12] 교사는 다카하시가 귀여워서 혹시 꼬리가 있지 않냐고 말실수를 했다고 한다.[13] 이후 피콕 스토어 지유가오카점(ピーコックストア自由が丘店)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영업하였으나 2021년 건물의 노후화 등의 문제로 폐업하였고, 2023년 같은 자리에 지유가오카 듀 아오네(自由が丘 デュ アオーネ)라는 상업시설이 개장하였다. 1988년에 피콕 스토어 지유가오카 앞에 이 자리에 토모에 학원이 있었다는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지유가오카 듀 아오네가 개업하며 기념비도 새롭게 단장되었다. 새롭게 단장된 기념비의 제막식에는 쿠로야나기 테츠코 본인이 참석하였다. 1988년 기념비 관련 기사 새로운 기념비 관련 기사[14] 니토베 이나조였다.[15] 1980년대 초반 당시 일본은 학교폭력 문제가 심각했던 시기였다. 또한 관리교육 체제가 아직 남아있던 시절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