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1 22:44:09

벌거벗은 세계사/문제점 및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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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비판
2.1. 제작진들에 대한 비판2.2. 패널들의 태도 문제
3. 논란 목록
3.1. 시즌 1
3.1.1. 1~3화 설민석 강의 편3.1.2. 4화 페스트3.1.3. 5화 진주만 공습과 핵폭탄3.1.4. 6화 진시황제
3.2. 시즌 2
3.2.1. 13화 네로 황제
3.3. 시즌 3

1. 개요

tvN 역사 예능 벌거벗은 세계사의 나오는 문제점과 비판을 정리한 문서

2. 비판

2.1. 제작진들에 대한 비판

  • 시청률에서 보다시피 화제성도 크나 성공적인 시청률과 다르게 첫회 분부터 지적이 나오며 비판 여론이 치솟았다. 전반적으로 자극적일 뿐만 아니라 아주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틀린 내용이 많았다. 게다가 2화의 경우 이집트 자문을 맡은 전문가가 프로그램이 자문 내용을 하나도 반영하지 않음은 물론 수준미달의 사실확인임을 지적하고, 자문 과정에서 제작진이 보여준 각종 추태[1]까지 폭로하면서 제작진이 사과했다.(#)[2] 이후 프로그램명에 이름까지 들어간 진행자 설민석의 논문 표절 보도와 함께 그의 하차로까지 이어졌다.
  • 설민석의 하차 이후 그에게 가려져 있던 제작진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6시간 장시간 녹화에 1시간 반 편집본이 방영이 되다 보니 시대 배경 설명도 빈약하게 편집했다는 점이다.[3] 또한 중간에 뜬끔없는 미리보기나 생각보다 많은 퀴즈 등 흐름이 끊기는 편집으로 인해 오히려 집중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만들었다.
  • 주제 설정도 자극적인 주제들로만 구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4화 페스트, 7화 로마 건축사를 제외하고 모든 회차 전쟁을 주제로 강의를 진행하였기 때문에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좋기는 하지만 1, 3화 같은 경우에는 강의 내용이 12금으로 내보내기에는 지나치게 잔인하고 자극적인 내용이 많았다는 점이다. 설민석 하차 이후 스페셜 강사로 진행되면서 잔인한 부분은 최대한 줄어들기는 했으나 주제는 여전히 전쟁 중심으로 갔었다. 이는 시즌 2가 되면서 사건이 아닌 인물 중심으로 가는 것으로 전향하며 다소 해결됐다. 다만 위인이나 역사의 유명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서술하다보니 필연적으로 주제에 전쟁이나 자극적인 소재가 들어가긴 한다[4]지만 인물이 핵심인지라 전쟁 자체에 포커스를 두기보단 '이 인물이 이러한 사건을 일으켰다' 정도로 짚고 넘어가는 수준으로 크게 순화되긴 했다. 심지어 시즌 2 최초의 '사건 중심 편'인 '냉전 편'에서도 전쟁과 관련된 내용은 어느 정도 축소했다. 전쟁처럼 사건 자체를 포커스에 뒀던 시즌 1과 비교하면 상당히 할애량이 줄어든게 눈에 보일 정도.
  • 또한 세계사를 설명할 때 강사가 틀린 내용을 설명하거나 오류된 역사 자료를 넣어 강의를 진행한 채 지적이 있다.[5] 대표적으로 4회 강의를 진행을 맡은 장항석 교수는 의학 교수이면서 페스트의 역사를 잘못 설명하는 부분에서 논란이 있었고, 108회 합스부르크 왕가 편에서 라영균 교수가 합스부르크 역사를 설명할 때 펠리페 2세부터 카를로스 2세까지 가족관계를 잘못 설명하는 부분에서 논란이 있었다.
  • 그리고 역사에 대한 정보가 적거나 전혀 관계가 없는 주제로 진행하는 부분에서 비판이 나오고 있다.[6] 대표적으로 90화의 '바다 오염'과 97화의 '진화론의 돌연변이, 우생학', 107화 '인공지능의 역습' 편 등 일부 에피소드는 역사 전개와 무관한 과학사 계열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비판이 있는 편. 그나마 97화의 우생학은 나치 독일처럼 역사적인 부분에 영향력을 꽤 끼친 에피소드이기 때문에 그나마 비판이 덜하지만, 바다 오염이나 인공지능은 역사가 아닌 과학 관련 이슈이기 때문에 본 방송의 주제인 '세계사'와 무관함에도 최근 이슈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편성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논란이 있다.

2.2. 패널들의 태도 문제

중반 이후부터 패널들이 너무 터무니없는 답변을 하거나 지나친 리액션, 강의와 전혀 연관이 없는 잡담을 하며 강의 분위기를 깨는 모습이 종종 나오면서 불거진 비판이 나오고 있다. 특히 규현은지원의 티키타카는 거의 매화마다 나오는 수준인데, 가끔은 정말 주제와 무관한 뜬금없는 잡담이 대놓고 방송으로 나오는지라 시청자들의 불만이 있는 편이다.

특히 정답을 외칠 때, 이혜성과 일일 외국인 패널들은 정답에 열의를 보이고 빈볼도 그나마 상식적인 축에 속하는데, 은지원규현은 정말 생뚱맞은 대답을 정답이랍시고 얘기하는 경우가 있다.[7]이 때문에 불만이 꽤 있는 편. 그나마 최근엔 아예 주제와 상관없는 잡담의 빈도는 좀 줄어드는 추세이고, 지나친 똥볼 정답 비율도 줄어드는 추세이다.

3. 논란 목록

3.1. 시즌 1

3.1.1. 1~3화 설민석 강의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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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4화 페스트

4편에도 많은 오류가 있었다. 자문에 참여한 박흥식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카파 공성전에 관한 자료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신뢰할 수 없으며, 흑사병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르네상스라는 희망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가 시작된 이후 흑사병이 발생한 사실을 지적하고, 그밖에 강의 전반에 깃든 중세에 대한 편견을 비판했다.

중세는 신본주의이고, 르네상스는 인본주의라는 단순한 도식으로는 당대의 현실을 설명할 수 없으며[8] 인민 주권, 권위의 상승이론과 같이 근대의 특징이라고 여기는 것들의 상당수가 이미 중세 시대부터 오랫동안 준비되고 형성된 것들이었다.[9] 설령 흑사병이 그러한 개념의 발전을 촉진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가정하더라도, 흑사병이 당시 사회에 미친 영향이 전부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아래의 박흥식 교수의 논문에도 언급되는 것처럼 자선이 보편적 인 의무로 간주되었던 이전과 달리 흑사병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빈민층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강화되었다.

중세인들이 신앙에만 의존하며 흑사병에 대한 합리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거나, 근대 초기에 로마 교황의 권위는 몰라도 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는 등의 설명은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사실 관계가 틀린 것이다. 일례로 '밀라노'처럼 재빠른 격리조치 등을 실행하여 큰 피해 없이 넘긴 케이스도 엄연히 존재한다.[10] 또한 이런 사례가 아니더라도 명확한 반박 사료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1347년 10월 초 제노바의 갤리선이 (시칠리아의) 메시나에 흑사병을 퍼뜨린 이래로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유럽 대부분의 지역은 치명적인 전염병의 굴레에 빠져들었으며, 엄청난 인적•물적 손실을 입었지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각 공동체들도 점차 적응력을 갖게 되었다. 도시들이 초기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체제를 구축하지 못한 것은 이 전염병이 전방위적으로 미칠 파괴력을 미리 가늠할 수 없었으며, 공동체의 지도층 가운데 다수가 희생을 당하여 효과적인 대응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중북부 도시들 가운데 흑사병에 대한 도시의 대응을 잘 보여주는 사례는 피스토이아이다. 이 도시는 인근 도시들이 흑사병으로 피해를 입자 그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보건위생규정>(Ordinamenta sanitatis)이라 이름붙인 법령을 제정하여 대응했다. 1348년 5월 2일 제정된 이래 6월 중 순까지 무려 세 차례나 개정된 이 법령은 당시 도시의 구체적인 대응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총 23개 조항으로 구성된 이 법령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조치는 피사나 루카와 같이 이미 전염병 발생이 확인된 지역을 방문하거나 그곳으로부터 도시로 진입하는 행위를 금지한 것이다. 문지기들은 어느 누구도 비밀리에 잠입하지 못 하도록 철저히 경계를 서야만 했으며, 불법적으로 들어온 자는 발각되면 500 데나리우스라는 엄청난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 . 시민들이 불가피하게 감염지역을 여행해야 할 경우에는 시참사회의 특별 허가가 필요 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품도 통제했으며, 특히 직물의 반입을 경계했다.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에서 보고했듯이 직물을 통해 오염된 독기가 전염병을 옮길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흑사병 시기 도시정부가 시행하였던 여러 조치들은 사실상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 일부 중북부 이탈리아의 도시에서는 그 이전에도 전염병이 발생하면 거리 청소, 비위생적 요소 제거, 위험인물 추방, 종교적인 속죄행진 등으로 질병에 대처했다 . 예컨대 피렌체의 1325년 <도시법>은 도시 내에서 동물의 가죽과 같이 악취를 풍기는 상품의 교역을 금지시켰고, 공적인 장소에서 도축도 금지시켰다. 정기적으로 시장과 도시 전역에 걸쳐 청소 작업도 행하여졌고, 분뇨 구덩이는 밤에만 비우도록 했다. 이와 같은 조치들은 독기가 공기를 오염시키고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는 오랜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1348년 3월 피렌체에 흑사병이 발병했을 때도 앞선 시기의 환경개선조치들을 재차 실행했던 것이다.
오물이나 쓰레기를 치워 도시의 위생상태를 전반적으로 개선하고, 육류 및 생선의 찌꺼기 처리과정을 비롯하여 식료품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며, 흑사병 환자들을 수용할 특별병원을 한적한 지역에 건설하여 환자들을 효율적으로 격리시키고 치료하려 노력했던 점 등은 이 시기에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었던 보편적인 조치들이었다.
도시는 중세 말기에도 외부인들에게 배타적인 공간이었지만, 근대 초기까지 이어진 만성적인 흑사병으로 인해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정부 당국은 전염의 위험성이 큰 빈민들을 도심의 공공장소와 중심가로부터 격리시킬 기회를 얻었다. 흑사병 환자들의 이동을 제한하거나 금지시키던 조치들로 인해 빈민들과 하층계급은 도시 내에서 뿐만 아니라, 타 지역으로 이동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시 당국의 각종 통제조치들, 즉 출입금지와 위험한 인물에 대한 보고 의무, 빈민들과 떠돌이들에 대한 추방 등은 점차 강화되는 추세를 띠었다. 흑사병은 근대 초 부랑자 및 빈민들에 대한 도시의 편견과 억압에 빌미를 제공했으며, 그 결과 유랑민들의 삶은 더욱 위험한 상황에 내몰렸다.
박흥식, <흑사병에 대한 도시들의 대응>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져 널리 퍼진 신화, 즉 '과학자'와 '종교주의자' 사이의 장대한 논쟁을 묵인한다. 유감스럽게도 양 진영의 일부 구성원들이 오늘날까지 이런 신화를 지속시키는 활동을 하고 있지만, 어떠한 과학사가도 이러한 '갈등' 모형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적 상황을 올바르게 반영하지 못한다. 16세기와 17세기, 그리고 중세 시대에는 '종교주의자'의 박해에서 벗어나려고 고군분투하는 '과학자' 진영이 존재하지 않았다. 박해와 갈등이라는 대중적인 이야기들은 기껏해야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거나 아니면 과장한 것이며, 최악의 경우 민간에서 지어낸 이야기다(갈릴레이에 관한 3장의 언급을 참고하라).
근대 초기의 자연철학을 이해하려면 오늘날의 여러 가지 상식적인 가정과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첫째, 거의 모든 유럽인, 특히 이 책에서 거론된 모든 과학사상가는 기독교를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현대적이든 아니든 간에 과학 연구에는 무신론-에둘러 표현하자면 '회의론'-이 필요하다는 개념은, 과학 자체를 종교로 삼기를 바라는 (대체로 자신들을 그러한 종교적 위계질서에 포함시키는) 이들이 제안한 20세기의 신화다.
로런스 M. 프린시프, 《과학혁명》

애시당초 저 시대에는 병원균의 존재를 몰랐다.[11] 당시 주류 견해는 '모든 질병과 해충, 해수 등은 자연적으로 발생한다'였으며, 신앙에 의지하거나 교리에 의지하는 것 역시 저렇게 '인간을 잔혹하게 죽이는 질병이 자연적으로 발생했다 = 우리의 타락으로 신이 심판을 내리는 것이다'라는 인과관계를 유추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당시 인류가 질병에 무지했던건 맞지만 이걸 무조건 신앙의 탓으로 돌리기엔 무리가 있다.[12]

그리고 교황의 권위가 줄어든 이유는 십자군 전쟁의 실패와 더불어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간의 알력다툼에서의 교황의 열세가 큰 작용을 했으며, 결정타로 아비뇽 유수에 의해 세속 군주(프랑스 왕)가 교황보다 더 강한 힘을 보인 것을 증명하여 교황의 권위가 크게 추락했다. 이 과정에서 흑사병의 도움이 아예 없었다는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흑사병이 100% 원인이 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또한 가톨릭의 영향력이 줄어든 이유는 가톨릭 자체의 부정부패와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를 이용한 《성경》 인쇄로 책의 가격이 줄어들어 이전보다 사람들이 더 쉽게 《성경》을 접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면죄부 판매라는 부정부패의 끝판왕 덕분에 결정타를 먹은 것이다. 이 면죄부와 더불어 가톨릭의 부정부패가 만연하자 결국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종교 개혁이 일어나면서 프로테스탄트가 득세하게 되는 등의 일련의 변화를 거치며 가톨릭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었을 뿐이다. 즉, 어느쪽이건 흑사병 하나로 퉁칠 수 없는 '시대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에 가깝다.

3.1.3. 5화 진주만 공습과 핵폭탄

  • 5회차는 1~4화와 다르게 해당 회차를 감수했던 전공자와 함께 녹화해서인지 큰 오류는 없었다. 굳이 자잘한 오류를 손꼽자면 리틀 보이 투하를 설명할 때 진주만 공습 당시를 설명할 때 잘만 사용한 육군항공대란 단어 대신 아직 창설되지 않은 공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점이 있다.[13]
  • 최태성 강사가 헨리 스팀슨 전쟁부 장관을 국방부 장관으로 소개하였는데, 실제로 당시 미국은 전쟁부(육군부)와 해군부로 이원화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적절치 않다. 미국에서 국방부는 2차 대전 이후 설립됐으며, 때문에 초대 국방부장관도 1947년 현 미국 국방부의 전신인 '미합중국 국가군사기구' 소속 장관으로 '제임스 포레스탈'이란 인물이 최초로 지내게 되며, 이후 1949년에 국방부로 개정되며 현재에 이른다. 실제로 미국은 현대에도 국방부 산하에 육군부/해군부/공군부로 부서가 나뉘며, 각 부서의 장관이 따로 배정된다.
  • 한반도 분단에 대한 설명 도중에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오류를 범했다. 단, 현재까지 남아있는 분단국가 중 내부의 문제 없이 오로지 외세에 의해 갈라진 국가를 의미하는 설명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게 좀 더 쉽게 다가오기도 하고. 현재 한국 외의 분단국가로는 대만과 중국, 북키프로스와 남키프로스가 있다.[14] 하지만 중국과 대만은 국공내전의 결과 국민당군이 패퇴하여 타이완으로 도망치고, 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집어삼키며 분열된 내전에 의한 분단이며, 북키프로스와 남키프로스 역시 터키계의 북키프로스와 그리스계의 남키프로스가 서로 내전에 준하는 대립을 일으켜 터키와 그리스, 영국의 개입이 있었다지만 엄연히 내분으로 갈라진 케이스이다. 하지만 한국은 외세가 분열시키기 이전까진 서로 어떠한 군사적 대립도 없었으며, 오롯이 외세의 간섭에 의해서만 분열된 유일한 분단국이라고 볼 수도 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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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미카제(가미카제)를 보여주는 자료영상에 슈투카의 풍압식 사이렌(제리코의 나팔)의 소리를 사용했다. 사실 제리코의 나팔이 강렬한 인상을 남겨 전세계적으로 비행기가 급강하하면 풍압식 사이렌 소리가 난다고 믿어서 비행기가 급강하하거나 추락하는 장면이 들어간 2차 세계대전 기록영화 또는 영상 매체에서 제리코의 나팔 소리를 첨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 카이로 회담 부분에서 장제스의 국기가 대만국기가 아닌 중국국기로 표시되었다. 그나마 잠깐 지나가는 장면이라 다행이었지만 굉장히 위험한 부분이었다. 우리나라로 대입하면 이승만 대통령 사진 밑에 국기를 인공기로 붙인 것과 같기 때문. 장제스는 오히려 중국 공산당을 일본보다 더 큰 위협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반공정신이 투철했던 사람이었다.

3.1.4. 6화 진시황제

  • 진나라가 서쪽에 위치해 실크로드 무역을 운운했는데, 중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해봤다면 실크로드가 실제로 개척되고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전한의 무제가 장건을 파견한 이후라는 점은 누구나 알 것이다.
    • 실크로드는 세 가지 길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오아시스로를 말하는 것이고, 원래 있었던 초원길은 이미 기원전 8~9세기부터 만들어져 무역길로 통용되어 왔다. 오아시스로가 따로 만들어진 이유는 흉노가 초원길을 막는 바람에 전한에서는 그 위험을 줄이고자 돌아가는 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 당시에는 유목민들이 사용하던 초원길이 있었지만 이 길을 진나라가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실제로 초원길은 고비사막 위(현재 러시아 영토)로 한참 돌아가는 길로 진나라 영토와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방송에서는 실크로드를 통해 일찍 서역의 문물을 받아들인 진나라를 언급했는데 당시 어떤 서역 문물을 받아들였기에 강해졌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오히려 진나라는 서역의 문물이 아닌 유목민족의 기마전술을 받아들여 강한 병력을 갖춘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물론 유목민의 기마술도 서역의 문물이라고 주장하면 할 말이 없다.
  • 만리장성을 설명하며 현재 남아있는 석조로 지어진 만리장성 사진을 이용했는데 이는 엄연히 현대에 다시 쌓았거나 명나라 시기에 석조로 개축하여 보이는 모습이다. 실제로 진나라 시대에 쌓은 만리장성은 토성이었을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측도 아닌 정설로 취급하고 있다. 다만 사진자료 이외의 오류는 딱히 없는데, 실제로 만리장성은 본래 있던 장성들을 하나로 이으며 다듬은 과정인데다가, 진~한대의 만리장성은 명나라~현대 중국으로 오면서 중국이 대대적으로 보수했기 때문에 고대 시기의 만리장성은 남은 것이 거의 없고, 사람들의 머릿속 만리장성은 명~현대 시기의 것이므로 구분하기 쉽게 일부러 현대의 것을 가져왔을 가능성도 있다.
  • 서복의 얘기를 하며 한반도를 거쳐갔다는 얘기를 했는데 방송에서도 얘기했지만 어디까지나 전설이다. 문제는 방송 중에 남해 곳곳에도 '서복과차'라는 명문이 남아있는 각석들이 발견된다며 자료사진을 띄웠는데 이는 도망가는 사람이 자기 흔적을 여기저기 뿌리고 다닐 리가 없으니 서복이 남긴 것이 아닌 후대에 한반도인들이 전설을 떠올리며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는 가르치던 강사가 아닌 게스트가 말한 것이므로 강사의 오류는 딱히 없다.

3.2. 시즌 2

3.2.1. 13화 네로 황제

  • 네로의 성장 과정에서 모후인 소 아그리피나칼리굴라 시대때 레피두스, 율리아 리빌라 등과 공모한 가이우스 카이사르(칼리굴라) 암살 미수 사건으로 기소되어, 명확한 증거로 유죄 판결을 받고 유배된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네로와 소 아그리피나에 의해 누명을 쓰고 처형된 네로의 고모인 도미티아 레피다가 유배 중인 소 아그리피나 대신 네로를 키워줬음에도 불구하고, 소 아그리피나가 그녀를 죽인 사실이나, 네로가 친고모가 무죄임에도 뻔뻔하게 재판에서 불리한 증언을 했다는 것도 나오지 않는다.
  • 네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가 소 아그리피나와 권력투쟁을 벌이면서, 네로를 망친 이야기나 세네카가 벌인 악행이 전혀 설명되지 않고 있다.
  • 네로의 본명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이며, 입양 후 즉위 전 이름은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이다. 그런데 가계 설명과 입양 과정에서 부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실제 악행은 빠져 있고, 그가 방계 황족이라는 것이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네로의 양자 입적 후 이름이 잘못 고증된 영화 자료를 그대로 옮겨 소개하고 있다.
네로가 입양된 클라우디우스 씨족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래로 율리우스 씨족과 하나의 가문이 되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로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전통을 지키고 있었다. 따라서 네로의 입양 전 사용한 개인 이름(프라이노멘)인 '루키우스'를 철저히 금지해 사용하지 않은 클라우디우스 가문에서 루키우스와 클라우디우스가 같이 사용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는 클리엔텔라 관계로 클라우디우스 가문에게 성씨를 하사받은 이들의 후손들도 마찬가지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맏사위였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는 자신의 아들에게 루키우스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클라우디우스를 아예 빼고 이름을 지어줬다.

3.3. 시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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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텝롤에서 빼려고 했다거나, 자문료를 무리하게 깎으려고 한 것 등[2] 페스트 편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벌어졌으며 이번에는 스텝롤에 포함이 되었다.[3] 그리고 특히 1929년 대공황에 대한 설명도 빈약하고, 3편의 경우 산둥반도에 대한 일본의 점령도 그 때 당시에 조차지로 삼고 있었던 독일이 와서 점령하는 것처럼 오해 하게 편집하였다.[4] 네로 황제는 유명한 '로마 대화제'와 '그리스도 대학살' 등이 있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은 애초에 일대기 자체가 전쟁 수준이고, 링컨은 '미국 남북전쟁', 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과의 '칼레 해전' 등이 존재하고, 루이 14세도 일생에 전쟁을 했다.[5] 이마저 잘못된 설명이 있는 부분을 제대로 개선하지 않나는 시청자들의 불만이 있다.[6] 인물사나 과학 등.[7] 또한 71~72회에서 대타로 나왔던 이진호 역시 71회(메디치 가문)에서 쓸데없는 잡담을 하여 시청자들에게 비판을 받았다.[8] 당장 중세 이미지의 대표격인 마녀사냥은 오히려 르네상스~근대 시대에 더 많이 이루어졌다.[9] 예를 들어 농노제 문서의 상단에 인용된, 중세 후기의 법률가 보마누아르의 신분제에 대한 설명을 보자. 그는 당시의 많은 사람들처럼 신심이 깊은 기독교인이었고 귀족 출신의 고위 관료였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책에서 왕과 귀족들의 권력은 기본적으로 다수의 민중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임을 강조했으며, 이를 자신의 신앙이나 신분적인 특권과 모순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10] 당시 밀라노의 방식이 환자와 의심군을 완전히 가두고 굶겨죽이는 비인간적인 격리법이긴 했으나, 엄연히 현대에도 시행하는 '격리조치'의 원시적인 단계임을 고려하면 아예 의학적 지식이 0이 아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11]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데, 인류가 세균을 직접 관찰한건 17세기 경이지만, 병원균을 눈치챈건 1861년 파스퇴르의 실험으로 자연발생설이 원천적으로 부정당한 이후, 로베르트 코흐에 의해 1883년 비브리오균이 콜레라를 일으키는걸 밝혀내면서 본격적으로 병원균에 대한 인식이 밝혀졌다. 즉, 현대에서도 채 200년도 지나지 않은 셈이다.[12] 애당초 과학이 어느정도 발전한 20세기에도 방사능의 존재를 몰랐던 탓에 원폭 실험지에 방사복 보호의 없이 돌아다니거나, 방사능 원소를 이용한 원자력 발전소를 애들 장난감으로 판매하는 일도 있었다. 대표적인게 바로 다음화인 5화에서 나온 '트리니티 실험' 후 관계자들이 신발에 종이만 감고 폭심지를 돌아다니던 사진이다.[13] 다만 '육군항공대'라는 명칭 자체가 일반인에게 생소한 단어임을 고려하면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공군'이란 용어로 칭했을 가능성도 있다. 영문 명칭 자체도 육군항공대가 Army Air Force이고, 공군은 Air Force라서 별 차이가 없는 것도 있고.[14] 물론 단순히 한 민족이 분단된 사례는 정말 끝도 없다. 대체로 독립된 한쪽이 강대국에게 아예 집어삼켜진 케이스인 북아일랜드, 아일랜드나 내몽골, 몽골과 같은 사례나 서로 통일을 포기한 채 완전히 독립국을 유지하기로 합의한 네덜란드, 벨기에, 수단 등 이래저래 따지고보면 분단국은 생각보다 많지만, 서로가 통일을 원하며 각자 독립된 별개의 정부를 둔 한 민족끼리의 분단국은 사실상 저 3개국을 포함하면 극히 드물다.[15] 이 사례와 일치하는 대표적 사례들이 과거의 서독, 동독과 북베트남, 남베트남 정부 등이 있다. 예멘은 북예멘, 남예멘때는 이 사례가 맞지만, 최근 내전은 또 다른 사례라 섣불리 집어넣기엔 복잡한 케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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