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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문제점 및 비판/시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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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19화 냉전3. 33회 초한지(항우와 유방)4. 44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5. 51화 그리스 vs 페르시아6. 56화 기축통화 달러7. 72화 엘리자베스 2세8. 78화 이란 역사 편9. 80화 여왕 마고 편10. 106화 영락제자금성11. 108화 합스부르크 가문12. 109화 화산폭발과 백두산13. 116화 오펜하이머14. 121화 프랑스 와인15. 123화 교황의 탐욕16. 128회 야쿠자17. 129화 이스라엘 vs 이슬람 근본주의18. 130화 크리스마스 특집 1탄19. 131화 크리스마스 특집 2탄20. 138화 마거릿 대처21. 141화 바이킹22. 142화 초콜릿의 역사23. 156화 이스라엘 vs 이란

1. 개요

tvN 역사 예능 벌거벗은 세계사 시즌 3의 나오는 문제점과 비판을 정리한 문서

2. 19화 냉전

  • 냉전의 3번 문항인 '대리전쟁'에서 한국전쟁을 '최초의 대리전'이라고 소개했으나 이후 대리전의 예시에서 국공내전이 언급됐다. 하지만 국공내전은 냉전대립보다 훨씬 이전부터 진행되어오던 전쟁이었다. 중간에 일본군의 대대적 침공에 의한 중일전쟁 발발로 공산당과 국민당이 일시적으로 연합해 일본군에 대항했을 뿐 본질적으로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둘은 앙숙이었고, 일본이 패퇴하자마자 다시 2차 국공내전을 치른게 우연히 냉전과 시기가 겹쳐있었을 뿐이다. 2차 국공내전마저도 1949년에 국민당이 국부천대를 단행하며 사실상의 종전을 맺은, 1950년에 시작된 한국전쟁보다도 먼저 끝난 전쟁이다.

    물론 국공내전의 결과가 냉전에 끼친 영향은 컸지만[1], 대체로 냉전의 최초 대리전으로 평가하는 전쟁은 6.25 전쟁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국공내전 자체는 냉전과는 무관한 중국 군벌의 세력싸움의 연장선이었을 뿐이었다.[2] 실제 강의자는 한국전쟁을 최초의 대리전이라 칭했으니, 제작진이 '공산권과 비공산권이 싸워 공산권이 승리한 전쟁'이라는 결과만 가지고 무리하게 예시로 넣어 발생한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3. 33회 초한지(항우와 유방)

후술할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전체적으로 가공의 소설인 《초한지》를 중심으로 해석한 결과로 빚어진 문제가 많다. 특히 강의 내용을 보면 거진 고우영 화백의 《초한지》를 보고 강의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해당 작품에서 설명하는 인물상과 거의 일치하는 방향으로 인물들을 설명하고 있다.[3][4]
  • 초한쟁패기의 분량을 생각해 보면 이 주제는 사실 최소 2부작으로 해야 했으나, 1부작으로 빠르게 하려다 보니 전후 사정을 전부 스킵하고 진행되어 문제가 많은 편이다. 초 의제가 항우에게는 그의 성격이 포악하고 잔인하니 송의를 상장으로 삼고 항우를 차장으로 삼아 조나라를 구원하고 관중으로 진격하는 루트를 명령하고, 유방은 포용성이 있고 관중을 지배하기 좋은 인재이니 일방적으로 유방을 관중왕으로 밀어줬다는 듯이 이야기했는데 이는 전후 사정이 완전히 생략된 것이었다. 한마디로 송의를 그 자리에 임명한 것은 애시당초 항씨 집안에 의해 왕위에 오른 초 의제가 항량이 함양을 치러 가던 도중 사망하자 항우를 견제하기 위해 송의를 항우 위에 둔 것이지만 유방을 다른 루트의 사령관으로 삼은 것이 꼭 항우를 견제하기 위해서라고 보기는 어렵다.[5][6]
  • 항우가 함양 입성 이후 단행한 행위 중 진시황릉을 파헤치고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를 진시황릉 병마용 일부가 불탄 사진을 보여주며 정설처럼 이야기했는데 이는 아직 학계에서도 설왕설래가 많은 부분이며, 진시황릉을 전부 발굴해야만 밝혀지는 부분이다. <한고제 본기>(漢高帝本紀)에서 항우의 죄목을 나열하여 명분 얻기로 쓰였으나 정작 진나라 멸망까지 적은 <진시황 본기>에서도 일언반구가 없으며 사마천의 《사기》 <항우 본기>에도 이러한 내용은 적혀져 있지 않다. 진나라는 진시황릉을 만든 뒤 이에 연관된 인부와 관계자를 전부 죽여 무덤의 위치를 숨겼는데 초한쟁패기를 각색한 소설에서는 항우의 장수였던 경포가 진시황릉 건설에 복역한 죄수 출신이라는 성분을 넣어 도굴을 했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을 뿐이다.
  • 설명에서 전체적으로 유방에 대한 평가에 구멍이 많다. 특히 유방의 장기인 용병술전략적인 대담성은 죄다 언급하지 않거나 줄여서 말하고, 참패는 크게 부풀렸다. 가령 유방의 가장 큰 공적인 한신의 등용 역시 일면식도 없던 한신을 대뜸 대원수로 기용했던 용인술은 싹 지운 덕분에 한신은 배수진을 언급할 때 쯤에야 겨우 언급되며, 팽성 전투에서 한군의 패배의 원인[7]은 전혀 설명하지 않고, 항우가 30,000명의 정병을 이끌고 560,000명을 깨부쉈다는 결과만 말했다.

    결과적으로 공신 처형 역시 처형당한 공신들의 과오는 덮고, 이성왕이었단 이유로 처형했다는 듯이 말하여 패널들에게 한고제 유방이 무능한 폭군으로 낙인찍히게 만들었다. 문제는 당시 한나라가 이제 막 패권을 쥔 신생 국가였고, 당시 중국 땅은 통일보다 분할된 시절이 더 길었기 때문에 한나라는 좋든 싫든 통치 기반의 확립을 위해서라도 이성왕들을 견제해야하는 입장이었으며, 오히려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의 '공신 9족 멸살' 등을 생각하면 유방은 되려 매우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고 봐도 무방하다.[8] 또한, 이성왕 출신들은 유방의 수하로 있었던 시절부터 반기의 조짐을 보이거나 대가가 없으면 쌩까거나 밍기적대는 태도를 자주 보였던 만큼 어찌보면 이성왕들의 숙청은 그들의 자업자득이라고 볼 수 있지만[9][10], 이러한 요소를 하나도 말해주지 않아 패널들이 제대로 혼동을 일으켰다.
  • 한신의 북방정벌에서 배수진을 훌륭히 선보인 정형 전투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배수진을 본 조나라 왕이 비웃는 발언을 했다는 듯이 이야기하는데 애초에 어느 문헌에도 이런 발언은 없으며 진여가 한신을 깔봤다는 내용은 여러 문헌에 있다. 이는 당시 조나라 왕 조헐진여의 영향력 아래에 있어 겉으로 보이는 관계만 군신관계일 뿐 조나라는 진여가 다스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후에도 유방이 한신을 위험분자로 보게 되는 제나라 정벌과 그로 인한 참모 역이기의 죽음 및 제나라 왕으로 봉해달라는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고 진행했다.
  • 가장 큰 문제로, 한신의 실책을 전부 덮거나 언급하지 않았다. 그 고우영 화백조차도 최소한 한신의 행적을 언급은 해줌으로써 독자들에게 한신과 유방 중 누가 더 잘잘못이 있는지 따질 기회라도 줬는데, 이쪽은 아예 한신의 실책을 모조리 덮은 결과, 최종적으로 한신이 무고하게 처형당한 충신으로 미화되어 버렸다. 《초한지》를 조금이라도 읽으면 알겠지만, 유방이 처형시킨 공신들은 대체로 그만한 야욕을 드러내어 견제당한 인물들이었다.[11]

    당사자인 한신만 해도 자신의 야욕에 눈이 멀어 괴철의 말을 믿고, 기껏 역이기가 포섭했던 제나라를 공격해 초한쟁패기를 1~2년 더 늦춤은 물론 공신이던 역이기조차 사망하게 만들었고[12], 이후로도 왕위 등을 요구하며 한시가 급한 유방에게 반항하며 밍기적대고, 초왕 시절에는 항우의 측근인 종리말을 거두어 보호하는 등 유방에게 제대로 미운털이 박힌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유방은 그를 회음'후'로 강등시키는 선에서 그쳤으며, 실제 처형은 유방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여태후가 손을 써 처형당한 것이다. 즉, 한신의 처형은 어디까지나 그의 오만함이 원인이었던 것인데, 이를 말하지 않고 넘긴 결과, 패널들조차 혼동할 정도의 큰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

    실제로 한신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으로 평가받는 초대형 공신이었던 소하는 후대인 혜제때까지 천수를 누리고 갔고, 마찬가지로 핵심 공신이었던 장량 역시 야사와 달리 끝까지 유방의 책사로써 곁을 지켰었다. 소하, 장량, 번쾌는 유방의 대표적인 3대 공신들이며, 특히 소하는 아예 논공행상에서 1등으로 앉은 인물일 정도였다. 즉, 진짜 공신 견제가 목표였다면 이 셋부터 죽여야 마땅했음에도 이들은 관직을 받고 천수를 누렸으며, 유일하게 번쾌가 사형당할 뻔 했으나, 이것도 공신 견제가 아니라 여후를 위시한 여씨 일가 견제가 더 주된 목적이었다. 야사나 소설에서는 이성왕 견제로 가닥을 잡아놓은 반향인지 소하는 권좌의 욕심이 없음을 내비쳐 목숨을 얻었고, 장량은 아예 신선으로 귀화하겠다고 말하여 목숨을 건졌다고 나오는데, 이를 다르게 해석하자면 숙청당한 이성왕들은 권좌를 노리는 행동을 보여서 처형당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토사구팽이란 단어 자체가 한신의 개소리나 다름없는 셈이다. 즉, 한고제 유방의 숙청은 대체로 이성왕 견제와 더불어,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인물들을 심판한 것에 가까웠는데, 이성왕 견제 쪽만 크게 부각되어 전해진 것이 그대로 강의로 전달된 셈이다.

4. 44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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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51화 그리스 vs 페르시아

  • 설명 중 잘못한 남성 혹은 소년들을 여성들 앞에 세워 놀림감으로 삼게 했다는 설명이 있는데, 예시로 든 삽화가 이와 전혀 관련이 없는 <운동하는 스파르타 젊은이들>(Young Spartans Exercising)이라는 근대 화가인 에드가 드가가 그린 그림이다.
  • 오류라기보단 다소 아쉬운 설명으로, 최후에 남은 군대의 숫자를 줄여서 말했다. 실제 강의 중에는 스파르타인 300명만 남은 듯이 말했으나, 실제론 700명의 테스피아인과 400명의 테베인도 같이 남아, 실질적인 숫자는 약 1,500명이 남았다.[13]
  • 또한, 스파르타군이 남은 이유를 현실적인 면과 더불어 '스파르타 정신'을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대를 이을 자녀가 있는 군인'이라면 왕을 포함해 300명이 전부 지휘관급 인사들일텐데, 항복한 완전 시민 200명을 지키기 위해 해군도 포기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스파르타를 생각하면 왕과 지휘관급 근위대 300명을 고작 정신 하나로 꼬라박한다는건 말이 안된다.[14] 현재 학자들이 저 1,500명이 결사대로 남은 이유를 추정하길, 레오니다스가 보고를 받았을땐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페르시아군이 육박한 상황이라 그리스군이 후퇴하는 동안 전방에서 페르시아 본대를 막아 시간을 벌기 위해서로 추측하고 있다. 즉, 후자보단 전자의 이유가 더 강한 셈인데, 편집상의 실수인지 후자의 이유가 더 부각되는 듯한 편집이 되었다.[15]

6. 56화 기축통화 달러

  • 금 1 온스를 설명하면서 1 온스가 28.35g이라고 표시했다. 그러나, 이는 상용 온스(avoirdupois ounce)와 트로이 온스(troy ounce)를 구별하지 못한 오류이다. 일반적인 물체의 무게를 재는 단위로는 '상용 온스'(OZ)가 사용되지만, 황금을 비롯한 귀금속의 무게에는 '트로이 온스'(OZ.T)가 사용된다. 흔히 금 1 온스라고 말하더라도 이는 금 1 트로이 온스를 의미하는 것이다. 1 상용 온스는 약 28.35g[16]이고, 1 트로이 온스는 약 31.1g[17]이다.

7. 72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가계도에서 오류가 있었는데, 셋째이자, 차남 앤드루 왕자의 전 배우자인 사라 퍼거슨의 출생연도가 1959년이 아닌 1969년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8. 78화 이란 역사 편

팔레비 왕조에 대한 여론이 악화된 원인이 이란의 시아파 이슬람주의자들과 1970년대에 밝혀진 팔레비 왕가의 부정부패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1953년에 이란 민족주의자였던 모하메드 모사데크CIA가 몰아낸 것이었다. 게다가 팔레비 왕조의 백색혁명이라는 것도 도시의 상•중산층에 한정되어 있었고 대부분을 차지하는 하류층은 사회적으로 소외받고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설명은 대안 우파, 신우파 진영이 "이란인들이 미개한 신념에 빠져 팔레비 왕가의 은혜를 모르고 루홀라 호메이니라는 독재자를 선택했다."라는 인종주의적 수사를 정당화하는데 악용되고 있다.[18]

게다가 모하메드 모사데크를 몰아낸 CIA가 1979년에 반서방을 내세우는 루홀라 호메이니에게는 그러지 않았는지에 대해 의혹이 나돌고 있는데 이에 로버트 드레이퍼스는 영국과 미국 정부가 루홀라 호메이니를 중앙아시아에서 반공주의를 확산시키는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 그랬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을 정도이다.

9. 80화 여왕 마고 편

결말부에서 위그노 전쟁으로 수많은 피를 본 결과 프랑스에 톨레랑스가 뿌리를 내렸다고 언급했는데, 애초에 프랑스=톨레랑스라는 공식 자체가 허구적인 면이 많을 뿐더러 당시 낭트 칙령 이후 위그노들이 누렸던 자유는 지속적으로 제약이 확대되다가 100년도 못 가 루이 14세 단 한 명에 의해 그대로 롤백됐다. 프랑스에서 가톨릭 외 종교가 안정적인 대우를 받기 시작한 건 프랑스 혁명 이후다.

10. 106화 영락제자금성

명나라 태조 홍무제 주원장이 만들어낸 음식이 취두부라고 언급됐는데, 주원장이 전파했다고 전해지는 음식은 호피모두부로 취두부와는 다른 모두부다. 자세한 것은 홍무제 항목 참조.

연왕 주체가 미친 척한 것을 누군가가 건문제에게 고변하는 화면을 표출했는데 이때 폐하가 아닌 전하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전하'는 황제가 아니라 제후 왕에게만 사용하는 호칭이다.

방효유 10족 멸족설을 이야기했는데, 사실 딱 한 명만은 죽음을 면했다. 영락제의 아들인 인종 홍희제가 방효유의 사촌동생이었던 방효복을 사면한 것. 방효복은 임오순난 당시 남쪽의 변방인 경원위(慶遠衛, 現 광시성 허츠시 이저우구)에서 군역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면했다고 한다. 그 외의 친구, 친족들 중에서도 10족 멸족 언급 이후 멀쩡하게 활동한 기록이 있는 이들이 꽤 있기에 애초에 이 발언은 진심이 아닌 경고성 언플일 뿐이라고 보는 주장도 있다.

구성상으로 보면 대체로 홍무제든 영락제든 정화의 대원정 정도만 빼면 업적[19]은 축소하거나 거의 다루지 않고 일방적으로 폭정만 부각시켰다. 물론 명나라와 자금성의 역사 전반을 다루다 보니 분량상 생략한 게 크겠지만, 그래도 영국 해군의 아버지로서의 업적을 어느 정도 인정했던 헨리 8세 편이나 무주의 치를 대대적으로 묘사한 측천무후 편에 비하면 아쉬운 부분.

11. 108화 합스부르크 가문

주제와 밀접한 권위 있는 전문가들을 꾸준히 섭외하며 사실관계 오류가 거의 사라진 시즌 2~3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편 다음으로 가장 오류가 많은 에피소드로 꼽힌다. 다만 러우전쟁 편에 비해 욕은 거의 안 먹었는데, 가장 예민한 주제에서 중심 내용인 양국 간 갈등의 맥락 부분이 획일화되고 왜곡된 러우전쟁 편과 달리 이번엔 상대적으로 화제성이 적은 주제에다 오류들도 수만 많지 거의 다 강의 내에서는 지엽적인 부분이었고, 오류가 발생한 원인 역시도 상당수 납득되기 때문.[20] 시청률도 밤 10시 편성으로 변경된 이후 가장 잘 나온 축에 들어간다.

첫 번째로 호엔슈타우펜 왕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프리드리히 2세에 관련된 그림이 화면에 나와야 되는데 호엔촐레른 왕조 프로이센 왕국의 초대 왕 프리드리히 1세와 대왕 프리드리히 2세의 초상화가 화면에 나오는 실수를 저질렀다. 중세의 호엔슈타우펜 왕조와 근대 초기의 호엔촐레른 왕조는 연대 차이가 무려 600년에 이른다는 점에서 제작진의 서양사에 대한 무지함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한국으로 신라태종 무열왕을 설명하면서 조선태종 어진을 띄우는 꼴이다. 아마 구글링 후 검토도 없이 사진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 제2대 왕 펠리페 2세의 가족관계가 설명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펠리페 2세의 두 번째 부인 메리 1세는 부왕 카를 5세의 이종사촌인데다가 펠리페 2세와 오촌관계였고, 세 번째 부인인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의 사이에서 생존한 두 딸인 이사벨과 카탈리나가 있었다. 게다가 네 번째 왕비였던 오스트리아의 안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이었던 막시밀리안 2세[21]와 그의 황후인 스페인의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첫째였다. 어머니 마리아는 펠리페 2세의 여동생이었고,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2세는 펠리페 2세와 사촌지간이었다. 또한 펠리페 3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부부 역시 모계 한정으로 오촌 관계였다.

세 번째로 펠리페 4세의 가족관계를 설명한 부분에서 틀린 내용이 있었다. 펠리페 4세는 23살 때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 공주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고 설명했는데, 이는 틀렸다. 실제로 펠리페 4세는 10살짜리 어린 나이로 3살 연상인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 게다가 후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의 자녀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틀린 내용이 있었는데,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는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이인데다가 막내동생 카를로스 2세를 제외한 남동생 2명과 여동생 1명이 먼저 요절했다. 또한 마르가리타 테레사레오폴트 1세의 결혼식을 설명할 때 레오폴트 1세가 44세로 표시되어 있어서 오류가 있었는데, 실제로 레오폴트 1세와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11살 차이가 났다.

마지막으로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의 계비 마리아 아나가 오스트리아 귀족의 딸이라고 했는데 이는 틀리다. 마리아 아나의 아버지인 필리프 2세 빌헬름은 합스부르크 가문과 경쟁했던 비텔스바흐 가문 노이부르크 분가의 첫 번째 팔츠 선제후로서 오스트리아 귀족이 아니었다. 팔츠는 독일 서부로써 오스트리아와 멀다.

12. 109화 화산폭발과 백두산

고대 로마 학자 소 플리니우스(Pliny the Younger)를 잘 쓰지 않는 영거 플리니우스라고 번역했고, 영어 철자도 Pliny the Youger라고 잘못 썼다.

13. 116화 오펜하이머

고품질 우라늄 생산지인 요아힘스탈 광산이 독일이 합병한 오스트리아에 있다고 했으나 당시 체코슬로바키아[22]에 있었다. 또한 방송에서는 요아힘슈탈로 표기했으나 요아힘스탈(Joachimsthal)이 맞다. 영상에 나온 지도는 더욱 문제인데, 프랑스 영토에 독일이라고 표기했고, 뜬금없이 스위스에 요아힘스탈 광산이 위치한 것으로 표시했다. 현재의 체코 북서부에 표시해야 맞다.

1941년 12월 7일에 일어난 일본진주만 공습이 1942년 12월 7일에 일어났다고 잘못 말했으며, 자막도 그대로 답습했다. 이어지는 화면에서는 1941. 12. 07로 올바르게 표기했다.

14. 121화 프랑스 와인

고대 로마에서의 와인 보급을 설명할 때 석회질의 물 대신 와인을 사실상 식수로 썼다는 언급을 했는데, 포도주/역사에서 보듯 이는 오랜 기간 정설로 인정받긴 했으나 최근으로 올수록 반례가 제기되며 부정되는 학설이다.

15. 123화 교황의 탐욕

테베레 강인데 지도의 자막은 '테레베 강'으로 표시되었다.

기독교의 확산을 보여주는 지도의 영역은 제정 시대의 로마 제국인데 국호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오기했다.

또한 카노사의 굴욕을 설명하는 부분에 오류가 있다. 강의에서는 사건의 발단이 된 주교 서임권 문제를 단순히 황제 vs 교황의 이분법적인 대립 구도로만 설명했으나, 실제로는 당시 하인리히 4세의 선제 하인리히 3세가 생전 교황을 3번 갈아치웠고, 하인리히 4세 본인도 파문이 취소되자마자 친교황파 세력을 손쉽게 전원 숙청했을 정도로 이미 세속 권력의 입지가 훨씬 올라온 상태였다. 그럼에도 카노사의 굴욕이 가능했던 건 과도한 황권을 견제한 제후들이 교황 편에 붙었기 때문이었다.

16. 128회 야쿠자

야쿠자의 기원을 설명할 때 893 어원설을 언급하지만, 일본 내에서는 공식적으로 893 어원설을 부정하고 있다.

<전후 일본의 주요 암시장> 지도에서 시코쿠(四国)를 시고쿠로 오기했다.

17. 129화 이스라엘 vs 이슬람 근본주의

헤즈볼라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오류가 심하다. 설명에선 마치 헤즈볼라가 하마스 수준의 극단적인 이슬람주의로 묘사되나, 실제 헤즈볼라는 오히려 파타사우디아라비아와 흡사하게 현실과 타협한 이슬람주의 정당에 더 가깝다.

비록 헤즈볼라의 주요 동맹 세력들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긴 하지만, 헤즈볼라는 비이슬람권에도 유하게 대처하고 있다. 애당초 그들이 집권하고 있는 레바논은 기독교계도 40%가 넘는데다, 현재 헤즈볼라가 참여 중인 연정은 제1당이 마론파 기독교 정당자유애국운동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을 적대하는 이유는 애당초 헤즈볼라의 창립부터가 PLO를 쫓아내겠다고 레바논을 침공한 이스라엘 세력을 방어하기 위해 탄생한 시아파 유격대에서 출발한 집단이기 때문에 이스라엘과는 친하게 지낼 건덕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즉, 창립 이념부터 반 이스라엘, 반 유대주의가 잡혀있는 집단일 뿐, 이념 자체는 이슬람 원리주의 계열이 아니며, 오히려 다른 종파나 종교도 수용하고 문화 개방에도 적극적인 세속주의에 가까운 집단이기에 과격한 이슬람 근본주의를 신봉하는 하마스와는 거리가 꽤 있는 집단이다.

똑같이 박현도 교수가 진행했으며 이란-이스라엘 관계에 집중한 156화에서는 헤즈볼라에 대해 '이슬람 강경파'라고 언급했는데, 이는 해석이 갈릴 수는 있으나 일단 129화의 '이슬람 국가 건설론'이나 하마스에 대해 사용하는 수사인 이슬람 근본주의(원리주의)보다는 온건한 표현으로 바꾼 것이다. 이후에도 합법적인 선거를 통한 집권 사실을 언급하고 비판점에 대해서는 무장투쟁 과정에서의 문제 위주로 언급하며 본 화보다는 중립적으로 묘사해 준 편이다.

18. 130화 크리스마스 특집 1탄

동지(冬至)의 양력 날짜를 12월 22~23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평년에는 12월 22일, 윤년에는 21일이고, 간혹 23일이 되는 경우가 있다. 즉 12월 21~23일이라고 해야 맞다.

율리우스력을 설명하면서 율리우스 시저가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이름은 없다. 고대 로마 제국의 라틴어로 율리우스 카이사르(IVLIVS CAESAR)이며 영어식으로는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이다. 율리우스 시저는 라틴어+영어의 혼합인 셈이다.

구세군(The Salvation Army)의 캠페인 문구인 KEEP THE POT BOILING, Help us bring Christmas Cheer to the needy를 읽을 때 needy를 ready로 잘못 읽었다.

19. 131화 크리스마스 특집 2탄

132화 예고편에서 조조에게 촉나라 깃발을 유비에게 위나라 깃발을 연결하는 오류를 범했다.

20. 138화 마거릿 대처

다트포드그레이터런던(大런던)의 그리니치 자치구에 위치하고 있는 것처럼 표시하였다. 다트포드는 그레이터런던 동부에 인접한 켄트주의 서부에 위치한 도시이다.

21. 141화 바이킹

알프레드 대왕의 화면에 아무런 설명 없이 (871년~988년)이라고만 표기했다. 이럴 경우 보통 생몰년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제작진은 재위기간을 의도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느 경우로 보든 오기이다. 알프레드 대왕의 생몰년은 849년~899년이고, 재위기간은 871년~899년이다.

22. 142화 초콜릿의 역사

자막에 마야 피라미드 엘 카스티요(El Castillo)가 9~13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해놓고는 이어진 자막에 수천 년 전에 만든 건축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야 문명이 시작된 것이 약 4000년 전[23]으로 수천 년 전인 것이지 엘 카스티요 자체는 700~1200년 전의 건축물이다.

23. 156화 이스라엘 vs 이란

진실의 약속 작전 당시 양국이 치른 비용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방어 비용은 한화 기준 2조 원, 이란의 공격 비용은 330억 원 정도로 추산했는데 이는 군사 전문가들의 추산 중 가장 크게 잡은 편인 자료들을 가져온 것이긴 해도 오류라고 할 수는 없으나, 바로 뒤에 두 비용의 비율이 분명 60:1 정도임에도 120:1로 계산하는 문과스러운(...) 실수를 범했다.


[1] 중국 공산당 정권의 승리로 아시아 일대에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력이 매우 커졌고, 6.25 전쟁의 발발 원인에도 지분이 있을 정도였다. 이 탓에 유럽전선에선 다소 신승한 자유주의 정권이 아시아권에선 사실상 패배 판정을 받고, 사회주의 정권이 태평양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해안 국가들을 포섭하는 단계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2] 다만, 승리자측이 사회주의 정권 세력이라 결과적으로 냉전에서 사회주의쪽 세력에 힘이 크게 실렸을 뿐이다.[3] 오히려 고우영 화백은 대놓고 한 고제 유방을 찌질이 취급했고, 한신은 미화했으나, 역으로 한신이 저지른 과오도 모두 넣었기에 미화와 별개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한신의 잘못도 어느정도 존재하는걸 볼 수 있었으나, 이 강의에선 한신의 과오가 전혀 담겨있지 않다.[4] 똑같이 이성원 교수가 진행한 3편의 삼국지 강의들은 정사 삼국지 위주로 진행하며 연의의 각색된 부분들을 조목조목 지적한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후술하는 대로 시간적인 문제로 제대로 내용을 설명할 시간이 부족했거나, 아니면 교수 본인의 시기별 전문성에 차이가 나는 듯 보인다.[5] 물론 애시당초 군대를 둘로 나눈 것 자체가 항량과 항우를 견제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데고 그게 전략전술에 어긋난 것은 아니므로 꼭 어느 한 쪽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또, 유방이 항량이나 항우와 척을 졌던 것도 아니다.[6] 관중왕 분봉 역시 어디까지나 양쪽을 경쟁시키기 위한 떡밥이지 어느 한 쪽을 편들기 위해서라는 말도 어불성설이다. 누가 봐도 당시 상황에서 관중왕에 가장 가까웠던 사람은 항량이었다. 그리고 정작 항우는 유방을 촉 땅으로 쫒아낸 후 자신이 관중왕 자리에 앉을 수도 있었지만 고향에 돌아가겠다면서 돌아간 것을 보면 관중왕 자리에 그다지 흥미가 있었는지도 의문이다.[7] 56만이란 머릿수만 많지 전혀 통솔되지 않은 군벌들의 연합체라는 점이나, 승리에 도취해 방만해진 점 등.[8] 이성왕이 아니라 동성왕이라고 해도 중앙정부에서 제대로 견제하지 않으면 오초 7국의 난이나 서진의 팔왕의 난같은 꼬라지가 나게 된다.[9] 대표인 한신도 후술하겠지만 소하, 장량급 공신인 역이기를 죽게 만든 원흉인데다가 그렇게 유방의 공신마저 죽음에 이르게 한 후 얻은 제나라에서는 '왕으로 임명을 안해주면 안가겠다'고 밍기적대는 등, 제대로 눈 밖에 날 짓을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나라의 통일 이후에도 과거 유방의 숙적인 항우의 수하 종리말을 거두는 등 어그로를 있는대로 끌었음에도, 유방은 끝내 회음후 강등 이후로는 한신을 견제하지 않았으나, 여후가 손을 써 한신을 제거한 것이었다.[10] 그나마 가장 억울하다고 여겨지는 팽월도 여러 번 중앙에 바쳐야 할 공물을 쌩까는 등 중앙정부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 적이 있었다.[11] 거의 유일한 예외가 번쾌로, 이쪽은 외척인 여씨가문 견졔를 위해 임의로 처형하려 했던 인물이었으나, 유방이 붕어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12] 참고로 역이기는 그 소하장량에 버금가는 초창기 개국공신급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는데, 유방이 관중으로 향할 때 남부 영토 대다수를 역이기 덕분에 넘을 수 있었다. 즉, 유방이 관중에 최초로 입성할 수 있게 큰 도움을 준 공신 중 한 명이었던 셈이다.[13] 다만, 이는 조금 이해해야 할 것이 패널들이 하도 영화 300을 언급해댔기 때문에 강사 본인이 혼동이 왔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방송을 보면 강사는 꾸준히 영화와 현실의 차이를 지적하면서 강의를 했다.[14] 실제 이 전투의 여파인지 스파르타는 테르모필레 이후 1년 가까이 제대로 군을 꾸리지 못하다가, 최후의 전투인 플라타이아이 전투에 가서야 제대로 활약하게 된다.[15] 정작 웃긴건 강사는 되려 후방에 군이 있어 시간을 끌어야했기에 남았을 것이다라는 추론을 그대로 말했었다. 즉, 강의 문제가 아닌 순수하게 편집에서 오류가 난 것이다.[16] 1 상용 온스(OZ)=28.349523125g[17] 1 트로이 온스(OZ.T)=31.1034768g[18] 이 부분은 역시 박현도 교수가 진행한 156화 이란-이스라엘 관계 편에서 훑고 지나가는 수준이긴 했으나 백색혁명 이후 심각했던 빈부격차 문제가 혁명의 원인 중 하나로 언급되며 어느 정도는 정정되었다.[19] 농업 생산량 증대, 중앙집권체제 강화, 성공적인 정복 활동 등. 두 사람의 치세 모두 숙청은 잔인했어도 대체로 중국사에서 손에 꼽히는 한족 왕조의 황금기로 평가받는데, 강의에서는 마치 이러한 치세가 운 좋게 얻어낸 결과물인 것마냥 다뤄진다.[20] 합스부르크 가문은 수백 년간 서양사 전체를 주름잡은 가문이라 그 역사의 스케일이 무지막지한데, 서양사 전공자도 아닌 독일어 전공자인 라영균 교수에게 그 모든 부분을 완벽하게 설명하라고 하는 게 오히려 무리한 요구라고 볼 수 있다. 설령 오류를 지적하더라도 비판받아야 하는 건 강사 본인보다는 100분 분량으로 무리해서 방대한 내용을 담아내려 하고 오락적 면모에만 집중한 제작진일 것이다.[21] 카를 5세의 동생이었던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이었다. 즉 펠리페 2세의 사촌형제였다.[22] 현재는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뉘어짐.[23] 방송에서는 마야 문명이 BC 1500년경에 시작되었다고 했으나 일반적으로 BC 2000년경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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