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8:11:27

잔 피에로 벤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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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피에로 벤투라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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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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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대
파일:엘라스 베로나 FC 로고.svg

69대
파일:토리노 FC 로고.svg

97대
}}} ||
이탈리아의 축구인
파일:ventura.jpg
<colbgcolor=#eeeeee> 이름 잔 피에로 벤투라
Gian Piero Ventura
[1]
출생 1948년 1월 14일 ([age(1948-01-14)]세)
이탈리아 리구리아주 제노바현
국적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신체 184cm
직업 축구 선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경력 <colbgcolor=#eeeeee> 선수 UC 삼프도리아 (1968~1969)
FS 세스트레세 칼초 (1969~1970)
USD 엔나 (1970~1974)
SSD 유니온 산레모 (1974~1976)
USD 노베세 (1976~1978)
감독 UC 삼프도리아 (1976~1979 / 유스 감독)
UC 삼프도리아 (1979~1981 / 코치)
ACD 루엔페스 라팔로 (1981~1982)
비르투스 엔텔라 (1984~1986)
스페치아 칼초 (1986)
US 첸테세 (1987~1989)
US 피스토이에세 1921 (1989~1992)
ASD 자레 칼초 (1992~1993)
베네치아 FC (1993~1995)
US 레체 (1995~1997)
칼리아리 칼초 (1997~1999)
UC 삼프도리아 (1999~2000)
우디네세 칼초 (2001~2002)
칼리아리 칼초(2002~2004)
SSC 나폴리 (2004~2005)
메시나 FC (2005~2006)
엘라스 베로나 FC (2006~2007)
AC 피사 (2007~2009)
AS 바리 (2009~2011)
토리노 FC (2011~2016)
이탈리아 대표팀 (2016~2017)
AC 키에보베로나 (2018)
US 살레르니타나 1919 (2019~2020)
국가대표 없음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
3.1. 기나긴 무명 시절3.2. 레체의 영웅3.3. 칼리아리 1기3.4. 삼프도리아3.5. 우디네세3.6. 칼리아리 2기3.7. SSC 나폴리 3.8. 강등 전도사 시절3.9. 바리3.10. 토리노 FC3.11.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3.12. AC 키에보베로나3.13. US 살레르니타나 1919
4. 우승 기록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축구인.

2. 선수 경력

벤투라는 1968년 20살의 나이로 삼프도리아 유스팀에 합류했다. 하지만 그는 실력이 모자라 1군 팀에 합류하지 못했고 1969년에 팀을 떠나야 했다. 이후 벤투라는 1970-71 시즌에 세리에C에 속한 USD 엔나에서 활동한 걸 제외하고는(그나마도 그 시즌에 팀이 세리에D로 강등되었다.) 세리에D에서만 활동했다. 이후 벤투라는 1976년 USD 노베세에 입단하여 선수 생활을 하면서 삼프도리아 유스팀 감독으로 부임해 2년간 투잡을 뛰다가 1978년에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스태프 경력을 시작했다.

3. 지도자 경력

3.1. 기나긴 무명 시절

벤투라는 1979년 삼프도리아의 수석코치로 부임했고 2년간 감독을 보좌했다가 1981년에 팀을 떠나 세리에D의 여러 아마추어 팀들을 맡았다. 그의 감독으로서 첫번째 성공은 1985년 비르투스 엔텔라를 세리에 C로 승격시킨 것이었다. 그후 1987년 벤투라는 세리에C1에 속한 스페지아의 감독으로 취임했지만 성적 부진으로 인해 시즌을 끝까지 수행하지 못하고 경질되었다. 그후 1987년 U.S. Centese의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2시즌 동안 부진을 거듭했고 급기야 팀을 세리에C2로 강등시키는 바람에 경질되고 말았다.

그후 U.S.Pistoiese의 감독으로 부임한 벤투라는 두번째 시즌에 세리에 C2 승격을 달성했고 세번째 시즌엔 4위를 기록하였다. 1993년엔 시실리아의 축구 클럽 A.S.D. Giarre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세리에C1에 복귀했는데 여기서는 훌륭한 경기력을 보이며 4위를 거두었다. 이 성적은 Giarre 축구 클럽 역사상 가장 높은 순위라고 한다.

1993년, 벤투라는 감독을 파리 목숨보다 못하게 아는 마우리치오 잠파리니 구단주의 부름을 받고 세리에 B 소속 축구 클럽인 베네치아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11년만에 처음으로 세리에B 클럽을 맡게 되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첫 시즌엔 6위를 기록해 괜찮은 모습을 보였지만 두 번째 시즌엔 중위권에 머물렀고 베네치아를 세리에A로 승격시키길 원했던 잠파리니 구단주에 의해 전격 경질되었다. 이렇듯 벤투라는 감독 경력을 시작한 이래 십여년간 이렇다할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무명 감독에 불과했다.

3.2. 레체의 영웅

그런 벤투라의 감독 인생을 극적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찾아온다. 1995년, 벤투라는 세리에C1으로 돌아와 레체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이 팀에서 놀라운 성공을 일궈냈다. 1995-96 시즌에 세리에B로 승격하더니 1996-97 시즌엔 곧바로 세리에A로 승격하면서 2연속 승격이라는 환상적인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런 그의 활약을 주목한 칼리아리 보드진은 1997년 벤투라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3.3. 칼리아리 1기

1997년 칼리아리에 부임한 벤투라는 첫 시즌에 팀을 세리에 A로 곧바로 승격시켰다. 이후 그는 1998-99 시즌에 감독 경력 사상 첫 세리에A 무대를 밟게 되었고 팀을 12위에 안착시키며 잔류를 확정지었다. 그러던 1999년, 그는 뜻밖에도 칼리아리를 떠나 세리에B에서 헤매고 있던 삼프도리아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3.4. 삼프도리아

선수 생활을 삼프도리아에서 시작했고 스태프 경력도 삼프도리아 유스팀 감독을 맡으면서 시작했던 벤투라는 자신의 축구 인생의 막을 열었던 삼프도리아의 감독으로 돌아와 세리에A로 승격시킬 임무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그는 5위를 기록해 승격에 실패했고 시즌이 끝난 뒤 경질되었다.

3.5. 우디네세

삼프도리아에서 경질 된 뒤, 벤투라는 1년간 휴식기를 가졌고 2001년 우디네세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그는 14위라는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고 시즌이 끝난 뒤 경질되었다.

3.6. 칼리아리 2기

2002년, 벤투라는 칼리아리로 돌아와 첫 시즌에 9위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다음 시즌에는 성적이 뚝 떨어지는 바람에 결국 시즌이 끝난 뒤 또다시 경질되고 말았다.

3.7. SSC 나폴리

2004년, 벤투라는 파산으로 인해 세리에C에 속해 있던 나폴리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나폴리의 구단주 아우렐리오 데 라우렌티스는 그가 팀을 세리에B로 승격시켜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10위권 안에도 들지 못하는 성적을 찍고 말았고 라우렌티스 구단주는 2005년 1월에 벤투라를 시즌 도중에 경질하고 에두아르도 레야 감독을 선임했다. 레야 감독은 팀을 잘 수습했고 급기야 다음시즌 세리에 C 우승을 달성하고 그 다음 시즌도 연속 승격으로 세리에 A에 복귀시켜 벤투라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3.8. 강등 전도사 시절

2006년, 당시 2005-06 시즌 세리에 A의 밑바닥에서 강등 걱정을 하고 있던 메시나 보드진은 벤투라를 감독으로 선임해 강등권을 탈출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벤투라는 강등권 탈출에 실패해 팀을 세리에B로 떨구고 말았다. 물론 메시나는 마침 그때 터진 칼초폴리 사건으로 유벤투스가 강등당하며 어부지리로 강등을 면했다. 이후 그는 책임을 지고 메시나 감독직에서 물러나 한동안 휴식을 취하다가 2006년 12월 엘라스 베로나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또다시 리그 꼴찌인 팀을 구해야 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팀의 강등을 막지 못했고 이번에도 경질되었다.

2007년 6월, 벤투라는 세리에B의 축구 클럽인 피사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 피사의 사탑으로 유명한 피사의 축구 팀에서, 그는 암담하기 짝이 없던 커리어를 개선시키는 데 성공했다. 첫 시즌에 승격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알비노레페를 격파하고 승격을 달성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 시즌에서는 강등 걱정을 하게 되었고 2009년 세월 성적 부진을 이유로 경질되고 말았다.

3.9. 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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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바리 보드진은 아탈란타로 떠난 안토니오 콘테를 대신해 벤투라를 새 감독으로 선임했다. 2009-10 시즌, 그는 공격적인 축구를 선보이며 승점 50점을 획득해 리그 10위를 달성했다. 승점 50점은 바리 축구 클럽 역사상 가장 많은 승점 기록이었다. 또한 벤투라는 바리에서 레오나르도 보누치안드레아 라노키아를 길려냈는데, 두 사람은 훗날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의 대들보 센터백으로 각광받았고 실제로 보누치는 유벤투스로 이적한 후 잠재력을 만개해 이탈리아 최고의 센터백이 되었다. 반면 라노키아는 인터 밀란으로 이적한 뒤 쩌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 시즌, 벤투라는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고 보누치, 라노키아가 빅클럽으로 이적하는 바람에 전력에 생긴 큰 공백을 메꾸지 못하고 부진을 거듭했다. 시즌 중반에 이를 무렵, 바리는 리그 꼴찌에 머물렀다. 하지만 2011년 새해 첫 경기인 US 레체와의 라이벌 더비전에서 스테파노 오카카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둬 반전의 기회를 맞이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후 바리는 4달 간 겨우 1승이라는 굴욕을 안으며 압도적인 꼴찌를 지속하고 말았다. 결국 2011년 2월 10일, 벤투라는 경질되고 말았다.

3.10. 토리노 FC

파일:external/www2.pictures.zimbio.com/Juventus+FC+v+Torino+FC+Serie+72mYL1W2fGXl.jpg

2011년 6월 6일, 벤투라는 토리노의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토리노는 매 시즌 강등권 싸움을 해야 하는 약체팀에 불과했다. 이에 벤투라는 센터백 안젤로 오그본나, 라이트백 마테오 다르미안, 센터백 카밀 글리크 등 유망한 선수들을 적극 기용했고 3-5-2 시스템을 구축해 토리노의 전력을 끌어올렸다. 그 결과 점차 강등권 싸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2012-13 시즌 16위를 기록해 잔류를 확정한 후 2013-14 시즌에 7위를 달성해 유로파 대회 진출권을 확보했다. 또한 벤투라는 이 시즌에 승점 57점을 획득해 그의 감독 커리어에서 가장 많은 승점을 한 시즌에 거두었다.

그후 2015년 2월 22일, 벤투라는 세리에 A에서의 100번째 경기를 맞이했다. 이 경기는 피렌체 원정이었는데, 토리노는 훌륭한 경기력을 선보이며 피오렌티나와 1:1 무승부를 거두었다. 그로부터 나흘 뒤, 토리노는 유로파 32강에서 아틀레틱 빌바오를 3:2로 격파해 16강에 진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2015년 4월 26일, 토리노는 벤투라의 지휘하에 유벤투스를 2:1로 격파했다. 이 승리는 토리노 더비 사상 20년 만에 토리노가 유벤투스를 상대로 이긴 것이었다. 이렇듯 빛나는 성과를 거둔 벤투라는 2015년 11월 16일 감독 계약을 2018년 6월까지 연장했다. 그는 2015-16 시즌에 토리노를 12위로 마감시켰는데, 토리노 보드진은 이 성적을 불만족스러워했고 결국 벤투라는 상호 합의하에 5년간 활동했던 토리노를 떠났다.

3.11.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결과는 미안하게 됐지만, 우리는 노력했다.
내가 지난 2년 동안 남긴 성적을 보면 패배가 겨우 두 번뿐이다. 난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본선 진출 실패 직후 인터뷰 중 나온 발언

2016년 여름, 벤투라는 안토니오 콘테의 뒤를 이어 차기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018 러시아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에서 2포트를 받고 G조스페인과 같은 조에 속해 조 1위를 두고 격돌했지만, 스페인과 홈경기에서는 1 : 1 무승부, 원정에서는 0 : 3 패배를 당하면서 자연스럽게 조 2위로 PO에 진출했다. 대진운이 아쉬운 대목. 플레이오프에서는 스웨덴을 만났는데,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도 없는 스웨덴에게 원정에서 0 : 1로 패했다(!). 스웨덴도 유럽의 강호지만, 이탈리아의 부진은 뜻밖이라는 것이 중평.

더 큰 문제는 이제 홈 경기에서 2골 이상을 넣어야 하고, 그마저도 1골이라도 먹으면 3골을 넣어야 하는 몹시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는 것인데, 결국 홈 경기에서조차 득점하지 못한 채 무재배를 하며 무려 60년 만에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탈락하는 치욕을 맛보았다. 벤투라는 이탈리아의 역적으로 몰리게 되었으며, 사퇴나 경질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축구 감독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을지도 의문인 상황이 되었다.

종전까지는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당시 대회 최약체였던 북한에 0 : 1로 무릎을 꿇은, 이탈리아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흑역사를 쓴 에드몬도 파브리(Edmondo Fabbri) 감독과 한국한테 진 조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이 이탈리아 최악의 축구 감독이었으나,[2] 이제는 벤투라가 이를 완전히 뛰어넘고 말았다. 실제로 이탈리아UEFA 유로 2012에서 잉글랜드와 독일을,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잉글랜드를, UEFA 유로 2016에서는 벨기에와 스페인을 격파하고 2014년 월드컵 우승국이었던 독일과 승부차기까지 갔다. 이렇게 강한 전력의 팀을 이끌고도 지역 예선조차 통과하지 못한 것.[3][4]

애초에 선수 시절에도 대단한 업적도 없었고, 그렇다고 이탈리아 국대를 맡기 이전에도 지도자로서도 별볼일 없었던 사람인데,[5] 이런 사람을 이탈리아의 다른 감독들을 제치고 국가대표에 선임한 것부터가 무리였다.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처참한 역사를 기록하게 되어서 그의 감독 커리어 최고 전성기였던 토리노 시절의 성공도 감독의 역량이 아니라 선수들의 역량 덕분이 아니었는지 의심이 들게 만들고 있다.

결국 스웨덴과의 플레이오프 패배 직후 본선 진출 실패의 책임을 지고 잔루이지 부폰, 조르조 키엘리니, 다니엘레 데 로시, 안드레아 바르찰리 등 주축 선수들이 집단으로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으나, 벤투라는 자진사퇴는 커녕 오히려 "협회장 안 만나서 사임한거 아니다."라는 망언을 하며 버티는 최악의 행동으로 어그로를 모으고 있다. 심지어는 '결과에 대해서만 사과한다.'라는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기도... 뿐만 아니라 사임하는 대신 위약금으로 70만 유로(한화 약 9억 원)를 요구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더욱 이탈리아인들을 열불 터지게 만들었다.[6]

경기 후 사임 여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사임한다고 대답했고 증거 영상까지 있으나, 고작 몇 시간 뒤에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부인했다. 후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선수들과의 갈등도 심각했다. 마케도니아와의 무승부 이후 선수들 사이엔 이대로는 안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고, 이를 감독 및 코치진에게 전달했지만 벤투라는 가볍게 무시. 결국 고참선수들을 주축으로 코칭 스태프없이 독자적으로 전술회의를 열기까지 했다.[7] 물론 벤투라는 당연히 격노했다. 스웨덴과의 플레이오프 1차전 패배 후에도 선수들은 '이렇게 플레이하면 안된다.'라고 말했고, 벤투라는 '그럼 니들이 라인업을 짜고, 니들이 감독해라, 나는 사임할 거다.'라고 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그 이후 경기 도중 교체 지시를 받은 데 로시는 대놓고 "우리는 비기는 게 아니라 이겨야 합니다! 저 말고 공격수를 넣으십시오!"라고 외치며 감독한테 개겼을 정도였으니(...).

그러나 벤투라는 이 이후에도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나는 지난 40년 간 최고의 '결과'를 얻었다. 고작 1년 사이에 2경기(스페인전 0 : 3 패배, 스웨덴전 0 : 1 패배)만 졌을 뿐이다."라는 말도 안되는 망언을 하며 자신의 연임을 주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8] 출처. 그러나 이탈리아는 지난 16년간 월드컵 예선에서 단 1패만을 기록했다.[9]

이에 단단히 열받은 이탈리아 축구협회는 탈락 직후 드디어 벤투라 감독에게 경질통보를 날렸다. 80만 유로의 위약금은 2018년 6월까지 분할 지급하기로 했으며, 만약 그 사이에 벤투라가 재취업에 성공할 경우 위약금 지급은 종료되는 것으로 합의했다고 한다. 결국에는 위약금을 모두 지급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기사 참조

후임 감독으로는 로베르토 만치니선임되었다. 일단 유로 2020까지는 보장. 성과가 좋으면 카타르 월드컵까지 보장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후 후임 만치니가 만신창이가 된 팀을 아주아주 완벽하게 만들어 이탈리아 국대팀은 한층 탄탄해진 전력에 무패 행진을 달리며 유로 2020에서 우승해 53년만에 2번째 유로 우승까지 이끌며 벤투라 시절과는 당연히 비교도 안될 정도로 달라진 모습을 보이면서 벤투라는 다시금 욕을 먹고, 현 이탈리아는 벤투라 시절을 완전히 청산했다.

물론 만치니마저 스위스에게 밀려 또 플레이오프로 떨어지고 북마케도니아에게 패배해 본선 진출이 좌절되긴 했지만, 그래도 유로 대회 우승이라는 눈에 띄는 성과가 있어 여전히 벤투라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만치니에게는 실례다.[10] 게다가 원래 우리가 알던 이탈리아였다면 가차 없이 경질했겠지만 이제는 감독 문제가 아닌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경질하지 않았기에 더더욱.

3.12. AC 키에보베로나

밀라노 쇼크 이후로 감독 커리어를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을 것 같다 싶었는데, AC 키에보베로나 감독직에 취임했다. 계약 기간은 2년이라고 한다. 기사 참조.

그리고 현재 10라운드까지는 모두의 예상대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시즌 시작 이전에 승점 삭감 징계를 받으면서 불리하게 출발했다고는 하나, 2무 8패를 기록하면서 리그 유일의 무승 팀이라는 불명예를 얻고 있다. 그러다가 2018년 11월 11일, 4경기 만에 사임했다. 것도 당시 1무 3패 11실점을 기록한 채로... 키에보는 벤투라 사임 이후 라치오, 나폴리 원정을 치러야 한다.

결국 키에보베로나는 27경기만에 1승 10무 16패에 리그 꼴찌를 찍으면서 빼도 박도 못할 강등 확정을 당한 상황이다. 키에보베로나의 시즌 최종 성적은 2승 13무 22패에 리그 꼴찌로 강등 확정. 결국 벤투라가 키에보베로나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고 나간 셈이 되었다.[11]

3.13. US 살레르니타나 1919

키에보베로나를 끝으로 더 이상은 어디에서도 감독직을 못 하게 될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2019년 하반기부터 살레르니타나의 감독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2부 리그 팀이고 시즌 초부터 준비해서 그런지 생각보다는 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12] 그러나 승격 경쟁 끝에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고, 한 시즌만에 사임한다.[13]

이후로는 어디서 감독직을 맡는다는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고령의 나이와 능력 때문에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4. 우승 기록



[1] 국내에서는 잠피에로(Giampiero)로 잘못 알려졌는데 정확한 표기는 잔 피에로(Gian Piero)이다. 출처[2] 그래도 파브리는 북한이 8강에서도 에우제비우가 이끄는 포르투갈에게 무려 3골이나 넣으며 선전했다는 점에서(결과는 포르투갈의 5 : 3 승리) 재평가될 여지가 있으며, 트라파토니는 판정 논란을 일으켰던 비론 모레노 주심에게 책임을 몽땅 다 뒤집어 씌워서 겨우 살아남았다. 물론 한국이 4강까지 진출한데다가 16년 후엔 독일의 미하엘 발락이 이탈리아 60년만의 예선 탈락을 조롱했던 것과 한국이 피파 랭킹1위 & 디펜딩 챔피언 독일도 2 : 0으로 이기고 조별리그에서 탈락시키면서 이탈리아 내에서도 서서히 그 때의 패배를 받아들이는 중이다.[3] 다만 2010, 2014년 대회에서 연달아 조별리그 탈락을 하는 등 2010년대 이후로 이탈리아가 월드컵 무대에서 굉장히 부진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적어도 지역 예선만큼은 무패로 통과하면서 축구 강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는데, 벤투라는 그것조차도 하지 못해서 이탈리아를 60년 만에 지역 예선에서 떨어뜨린 것이다.[4] 전임 감독이던 안토니오 콘테와 비교하면 두 감독의 역량이 더욱 명확하게 비교된다. 콘테가 감독을 맡던 시절의 이탈리아는 유망주들이 잠재력을 미처 터뜨리지 못하고 있었고, 유로 2016 때는 팀을 조율할 수 있는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 리카르도 몬톨리보, 마르코 베라티 등등의 플레이 메이커들이 부상으로 출전하지도 못하던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콘테는 그라지아노 펠레, 에마누엘레 자케리니, 마르코 파롤로 같은 선수들을 기용하여 벨기에와 스페인을 꺾으며 8강까지 진출했고, 8강에서도 독일을 상대로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는 등 모두의 예상을 넘어서는 선전을 보였다.[5] 디에고 마라도나만 해도 그 리오넬 메시가 활약하는 아르헨티나를 이끌고 남미 최약체인 볼리비아 따위에게 1 : 6으로 참패한 흑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선수로서는 전세계 축구 역사를 통틀어서도 손꼽히는 커리어를 자랑하는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이었다. 그리고 마라도나는 비록 아슬아슬했다고는 하나 자력으로 자국의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본선행을 확정지었고, 당시 대한민국과 그리스에게 각각 4 : 1, 2 : 0으로 승리하며 8강까지 진출하는 등 적어도 본전은 건졌다. 굳이 따지면 이 양반의 감독 커리어는 역시 별볼 일 없는 감독이었다가 뜬금없이 한국 대표팀 감독으로 왔던 울리 슈틸리케와 비슷한데 슈틸리케도 선수 시절은 당대 독일 최고의 수비수로 불릴 정도로 굉장했던 사람이다.[6] 심지어 2018 월드컵 예선 탈락으로 이탈리아 축구협회는 스폰이 다 잘려서 무려 7,000억 원이 넘는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기사 참조[7] 주장이던 부폰, 부주장인 데 로시, 바르찰리 등이 중심이 됐다. 다만 이것만큼은 명백한 하극상이기 때문에 벤투라가 맘먹으면 다 잘라도 할 말 없었고, 이후 그들도 이 점을 고려했는지 순수한 동기부여 목적이지 전술을 논한 미팅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기사 참조[8] 문제는 나머지 이긴 경기들조차도 경기 내용들이 별로인 경우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것이다.[9] 참고로 그 1패는 이탈리아가 우승한 2006 독일 월드컵 대회 예선에서의 슬로베니아와의 원정 경기에서 패한 것이다.[10] 다만 스페인과 스웨덴에 비해 약팀인 스위스와 북마케도니아에 밀려서 떨어진 만치니호에 대한 충격이 더 클 수 밖에 없다.[11] 그리고 키에보는 강등 후 파산하여 해체되고 만다.[12] 선임 과정에서 먼저 맡았던 키에보베로나가 사실상 붕괴상태라 감독이 능력이 있어도 강등을 면할 수 없었다는 점도 고려됐을 것이다.[13] 1년 뒤에는 22년만에 승격에 성공했다. 원래 21년만에 승격해야 되는 건데 벤투라 때문에 밀렸다 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