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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가 독일인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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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가 독일인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Автономная Советск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Немцев
Autonome Sozialistische Sowjetrepublik der Wolgadeutsc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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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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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0월 19일 ~ 1941년 8월 28일
수도옌겔스[1]
민족볼가 독일인, 러시아인
면적28,400㎢
인구606,000명(1939)
역사 • 건국: 1918년 10월 19일
• 멸망: 1941년 8월 28일

1. 개요2. 역사3. 멸망 이후, 그리고 재건국 시도4. 인구

[clearfix]

1. 개요

1924년[2]부터 1941년까지 존재한 소련 러시아 SFSR자치공화국. 볼가 강 연안, 사라토프 주와 현 볼고그라드 주의 일부에 위치하였다.

1941년 기준 22개의 칸톤(кантон, Kanton)으로 이뤄져 있었다.

2. 역사

볼가 독일인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의 배경은 멀게는 다수의 독일인들이 러시아에 정착하게 된 동방식민운동까지 내려가지만 더 짧은 설명으로는 1917년 소비에트 러시아의 선언이 있다. 1917년 11월 2일(15일), 민족자결주의를 원칙으로 러시아 내의 다른 소수민족들의 권리를 약속했고 이는 러시아 영내에 거주하는 약 180만명의 독일인[3]에게도 해당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은 소수민족위원회의 조사 후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까지의 절차를 밟게 된다.

1918년 10월 29일에는 '볼가 독일인 노동자 코뮌'이 세워짐과 동시에 볼가 독일인이 다른 비러시아인들 중에선 특별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 볼가 독일인 노동자 코뮌은 1924년 2월 20일[4]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ASSR)의 위치로 격상되어 이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두번째 ASSR가 되었다.[5] 당시 소수민족위원회 의장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명망있는 독일 사민당원 에른스트 로이터[6]를 서기장으로 임명한다.

1920년대 볼가 독일인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 체제의 '관용성'을 선전하기 위해 자주 언급되었고, 라팔로 조약 등을 통해 바이마르 공화국과 소련의 관계가 개선되자 볼가 독일인 자치공화국은 독일과의 무역으로 이득을 누린다. 또한 독일 공산당도 지역을 방문하여 '최초의 독일인들의 사회주의 국가'라 칭송했다. 또한 소련 초기의 '코레니자치야(коренизация)'[7] 정책으로 공문서의 독일어 사용, 독일인의 지역 관리 채용, 그리고 독일어 신문인 《나흐리히텐(Nachrichten)》도 발행되었다.

하지만 1933년, 독일에서 나치당이 집권하자 소련 전역에서 독일인들은 파시스트 앞잡이라는 의심을 받으며 탄압받게 되었고 이는 볼가 독일인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볼히니야에서는 독일인 자치현이 아예 해산되어 지역민들이 추방되었고 볼가 독일인 자치공화국도 대숙청의 영향을 받았다.

다만 독소 불가침 조약으로 독일-소련 관계가 개선되자 볼가 독일인들에 대한 탄압도, 그리고 자치권 축소 추세도 중단이 되어 볼가 독일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이때 1940년히틀러의 볼가 독일인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방문도 예정되어 지역이 준비를 하는 등 밝은 앞날이 기다리는 것 같았지만 독소전쟁이 발발했다.

1941년 독일의 침공으로 스탈린은 볼가 독일인 ASSR을 해산, 사라토프 주스탈린그라드 주로 분할시켰고 볼가 독일인들을 시베리아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다. 또한 독일어식의 지명들도 대거 지워졌는데 가령 발체르(Бальцер, Balzer)는 붉은 군대의 도시라는 뜻의 크라스노아르메이스크(Красноармейск)로, 마리옌탈(Мариенталь, Mariental)은 소베츠코예(Советское)로, 젤만(Зельман, Seelmann)은 로브노예(Ровное)로 바뀌었다.

3. 멸망 이후, 그리고 재건국 시도

1953년 스탈린의 죽음 이후 볼가 독일인들의 상황은 극적으로 개선되었다.

1964년, 두 번째 포고령이 발표되어 무고한 사람들을 고발한 정부의 유죄를 공공연히 인정하고 볼가 독일인들의 "경제적, 문화적 팽창"에 대한 모든 지원을 촉구하였다. 또한 이 당시 중앙아시아로 추방된 다른 민족들[8]과 같이 고향으로 귀향이 허용되었으나 볼가 강 연안의 독일인 인구는 전간기 수준으로 다시 복구되지 않았다. 하지만 중부유럽동독이 세워진 전후 현실을 감안하여 러시아 내의 자치 공화국은 재수립되지 않았고 많은 볼가 독일인은 러시아를 떠난다.

하지만 여전히 볼가 독일인들의 자치 공화국 재건국 시도는 계속되었는데, 중앙아시아로 추방된 독일인들이 중앙아시아 내에 독일계 자치 공화국 수립을 요구했기 때문에 중앙정부에서 카자흐 SSR에 독일인 자치주 설치를 진지하게 검토하기도 하였으나 카자흐인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1980년대에는 볼가 독일인 자치공화국의 재수립 시도가 있었고 이는 독일 본국의 지원도 받았었다. 소련 말기에 전연방 독일계 소련인 사회 "르네상스"(Всесоюзное общество советских немцев «Возрождение»)가 결성되어 다시 한번 자치공화국의 부활 운동을 하였고 1992년 새로운 러시아 정부의 독일 정부와의 협약으로 볼가 독일인 자치공화국이 수립되는 듯하였으나 수십 년간 지역에 정착한 다수의 비독일인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자치공화국의 재수립 시도는 끝나게 된다. 이들의 요구 요점이 "자치공화국이 부활하지 않으면 우리가 떠나겠다!"였는데, 자치공화국이 결국 부활되지 못하면서 볼가 독일인들이 대거 러시아를 떠나 독일로 이주하게 된다.

또한 19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어 소련 붕괴 이후 가속화되어 많은 볼가 독일인들은 독일계 난민이나 추방자, 또는 그러한 사람의 배우자나 후손임을 증명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정책인 독일 반환법을 이용하여 독일로 이민을 갔으며 1990년대2000년대간 약 2백만명의 볼가 독일인이 독일로 돌아갔다고 한다.

다만 모든 독일인이 떠나간 것은 아니어서 2010년 기준 사라토프 주와 볼고그라드 주에 각각 만 2천여명과 만 7천여명씩 볼가 독일인이 남아 있다.

4. 인구

  • 1939년 인구통계 (총인구 606,352명)
    • 볼가 독일인 - 366,685명 (60.5%)
    • 러시아인 - 156,027명 (25.7%)
    • 우크라이나인 - 58,248명 (9.6%)
    • 카자흐인 - 8,988명 (1.5%)
    • 타타르인 - 4,074명 (0.7%)
    • 모르드바인 - 3,048명 (0.5%)
    • 벨라루스인 - 1,636명 (0.3%)
    • 중국인 - 1,284명 (0.2%)
    • 유대인 - 1,216명 (0.2%)
    • 기타 - 5,146 (0.8%)


[1] Энгельс, Engels. 자치공화국 수립 당시에는 포크롭스크(Покровск, Pokrowsk)라고 불렸으나 1931년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이름을 따 개명되었다. 이전에 쓰인 다른 명칭으로는 코자켄시타트(Козакенштадт, Kosakenstadt)가 있다.[2] 1923년이라는 설도 있음[3] 1897년 기준[4] 1923년 12월 19일이라는 설도 있음.[5] 이 당시 지역 관리들이 중앙정보가 볼가 독일인 노동자 코뮌을 단순 자치현으로 격하시키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중앙정부에 자치공화국 설립을 요구했다.[6] Ernst Reuter (1889–1953). 1918년 10월부터 1919년 3월까지의 반년간 서기장을 지낸 뒤 독일로 돌아가 공산당과 독립사민당을 거쳐 최종적으로 사민당에 복당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1947년년부터 1953년까지 서베를린 시장을 역임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베를린 봉쇄 당시 스탈린과 대립하고 서베를린을 동구권에 넘겨주지 말 것을 호소하고 서베를린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다.[7] 지역화·지역 문화 장려.[8] 체첸인, 고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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