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color=#fff><colbgcolor=#169B62> 역사(1916) | <colcolor=#000,#fff>부활절 봉기 |
역사(1919 - 1922) | 아일랜드 공화국 | |
역사(1922 - 1937) | 아일랜드 자유국(아일랜드 내전) | |
독립군 | IRA | |
인물 | 로저 케이스먼트 · 마이클 콜린스(정치인) · 에이먼 데 벌레라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 찰스 스튜어트 파넬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역사 | ||||
영국(북아일랜드), 아일랜드(아일랜드 왕국, 아일랜드 공화국, 아일랜드 자유국) | |||||
정치 | |||||
영국, 북아일랜드, 아일랜드, 아일랜드 통일 | |||||
외교 | |||||
영국-아일랜드 관계, 영국-아일랜드-북아일랜드 관계, 아일랜드-스코틀랜드 관계 | |||||
북아일랜드 | |||||
정치성향·정체성 | 연합주의(민주연합당, 얼스터 연합당), 민족주의(사회민주노동당, 신 페인) 기타(녹색당, 북아일랜드 동맹당, 반긴축동맹-이윤 이전에 인민) | ||||
주요 사건 | |||||
아일랜드 대기근, 북아일랜드 분쟁, 벨파스트 협정, 브렉시트, 북아일랜드 의정서, 윈저 프레임워크, UEFA 유로 2028 | |||||
아일랜드 독립운동 | |||||
관련 인물 | 마이클 콜린스, 로저 케이스먼트, 에이먼 데 벌레라 | ||||
관련 사건 | 영국의 자치권 이양, 부활절 봉기, 아일랜드 독립 전쟁, 아일랜드 내전 | ||||
북아일랜드 분쟁 | |||||
피의 일요일 사건, 아일랜드 단식투쟁 |
부활절 봉기 Easter Rising Éirí Amach na Cásca | ||
| ||
기간 | 1916년 4월 24~29일 | |
장소 | 아일랜드 섬, 더블린 외 | |
결과 | 반란군의 무조건 항복 | |
피해 | 485명 사망(민간인 260명) | |
교전국 |
| |
아일랜드 의용군[A][B][3][4] 아일랜드 시민군[B] 피어너 에런[6] 아일랜드 여성평의회[B] 하이버니안 라이플즈[A] | 영국군 | |
지휘관 | 패트릭 피어스 제임스 코널리 톰 클라크 숀 막 디어르마다 조지프 플런킷 에이먼 칸트 토머스 맥도나 | 아이버 게스트 오거스틴 버럴 매슈 네이선 존 프렌치 로빅 프렌드 존 맥스월 윌리엄 로 |
결국 필요없는 죽음이었던가?
어쩌면 영국이 행했고 말했던 모든 것에 대해
신의를 지킬지도 모르니.
우리는 그들의 꿈을 안다;
그들이 꿈을 꾸었고 죽었다는 것을 알만큼 충분히.
그리고 지나친 사랑이, 죽을 때까지
그들을 당혹하게 한다고 한들 어쩌리?
나는 그것을 시로 쓴다.
맥도나와 맥부리아드
그리고 코널리와 피어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초록이 입혀진 곳이라면 어디든
변했다, 완전히 변했다.
끔찍한 아름다움이 탄생했다.
Easter, 1916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어쩌면 영국이 행했고 말했던 모든 것에 대해
신의를 지킬지도 모르니.
우리는 그들의 꿈을 안다;
그들이 꿈을 꾸었고 죽었다는 것을 알만큼 충분히.
그리고 지나친 사랑이, 죽을 때까지
그들을 당혹하게 한다고 한들 어쩌리?
나는 그것을 시로 쓴다.
맥도나와 맥부리아드
그리고 코널리와 피어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초록이 입혀진 곳이라면 어디든
변했다, 완전히 변했다.
끔찍한 아름다움이 탄생했다.
Easter, 1916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1. 개요
역사저널 그날 중에서[9] |
2. 배경
2.1. 자치 위기 (Home Rule Crisis)
2.1.1. 3차 아일랜드 자치 법안
#!if top1 != null && 문서명1 == null
[[]]{{{#!if top2 != null
, [[]][[]]}}}{{{#!if top3 != null
, [[]][[]]}}}{{{#!if top4 != null
, [[]][[]]}}}{{{#!if top5 != null
, [[]][[]]}}}{{{#!if top6 != null
, [[]][[]]}}}
#!if top1 == null && 문서명1 != null
[[아일랜드/역사]]{{{#!if 문서명2 != null
, [[아일랜드 대기근]]}}}{{{#!if 문서명3 != null
, [[영국의 자치권 이양]]}}}{{{#!if 문서명4 != null
, [[]]}}}{{{#!if 문서명5 != null
, [[]]}}}{{{#!if 문서명6 != null
, [[]]}}}
1909년, 재무장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인민의 예산(People’s Budget)’을 발표하며 정치권에 파장을 일으켰다. 이 예산안은 부유층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핵심으로 했고, 복지 확대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상원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전통적인 귀족층이 다수를 차지한 상원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이 개혁을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총리 H. H. 애스퀴스는 상원의 권한에 맞서기 위해 총선을 계획했다. 하지만 9월과 10월의 보궐선거에서 자유당은 연이어 패배했고, 정국은 불리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때, 아일랜드 의회당의 지도자 존 레드몬드가 전면에 나섰다.
레드몬드는 자유당이 아일랜드 자치제(Home Rule)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만약 이를 회피한다면, 영국 내 아일랜드계 유권자들에게 자유당을 지지하지 말도록 하겠다고 압박했다. 아일랜드 수석장관 어거스틴 버렐은 이에 응답하듯 선언했다.
확실히 말해두건데 아일랜드의 자치는 자유당의 정책이 맞습니다. 영국 국회가 위에 있다는 철 지난 표현 빼고는 어떠한 제한이나 한계를 두지 않을것입니다.
어거스틴 버렐, 아일랜드 수석장관
어거스틴 버렐, 아일랜드 수석장관
자유당은 결국 아일랜드 의회당의 요구를 수용했다. 그 대가로 아일랜드 의회당은 예산안과 상원의 거부권을 제한하는 법안의 통과에 결정적인 힘을 실었다. 이 정치적 연합을 바탕으로 1912년, 아일랜드 자치 법안(Home Rule Bill)은 다시 의회에 상정됐다. 오랜 세월 묻혀 있던 아일랜드 자치의 꿈이 현실로 향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2.1.2. UVF(얼스터 의용군)
하지만 제3차 자치 법안이 하원에 상정되기도 전에, 얼스터의 연방주의자들(Unionsists)은 강하게 반발했다. 1911년, 상원의 거부권이 폐지되자 연방주의자들은 크레가본에 모여 집회를 열었고, 벨모어에서는 무려 10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북아일랜드 연방주의 국기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nopad> |
얼스터 서약 |
얼스터 엄숙 동맹 및 서약(Ulster Solemn League and Covenant에는 무려 50만 명에 달하는 얼스터 연방주의자들이 서명했으며, 얼스터 연방주의자 위원회(Ulster Unionist Council)는 이에 기반해 얼스터 의용군(Ulster Volunteer Force이라는 준군사조직을 결성했다.
우리의 양심에 따라 자치제가 얼스터와 아일랜드 전체의 물질적 안녕에 재앙을 초래하고, 우리의 시민적 및 종교적 자유를 전복시키며, 우리의 시민권을 파괴하고, 제국의 통합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고 확신하기에, 우리는 얼스터의 남자들이며, 조지 5세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들로서, 우리 조상들이 고난과 시련의 날에 자신 있게 신뢰했던 하나님께 겸허히 의지하여, 이 위기의 시기에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연합 왕국에서의 평등한 시민권이라는 소중한 지위를 지키고, 아일랜드에 자치 의회를 설립하려는 현재의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는 것에 있어 서로를 지키며 단결할 것을 엄숙히 서약합니다.
하느님, 국왕을 지켜 주소서 (God Save the King)
얼스터 엄숙 동맹 및 서약
하느님, 국왕을 지켜 주소서 (God Save the King)
얼스터 엄숙 동맹 및 서약
얼스터 의용군은 총 10만 명 규모로 조직되었고, 영국군 장교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군사 조직으로 재정비되기 시작했다. 조지 리차드슨 장군과 헤켓 페인 대령은 얼스터 의용군을 영국군 모델을 따라 재편했으나, 무기 부족은 심각했다. 한 대대당 리앤필드 소총 하나를 겨우 보유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nopad> |
무기 없이 훈련하는 얼스터 의용군 |
45개의 총기는 변명이 될지 모르지만, 100,000명은 무고하지 않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아일랜드 정부 법률관들
아일랜드 정부 법률관들
아일랜드에서 민간 준군사 조직들이 형성되고 있었지만, 영국 정부는 무능한 태도를 보였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준군사 조직들의 교련이 법적으로 허용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1819년에 제정된 불법 교련법에 따르면, 교련은 "자신들의 권위와 자유를 지키기 위한 목적"일 경우, 그리고 두 명의 행정장관의 허가가 있을 경우 합법으로 간주되었다. 연방주의자들은 이미 얼스터 지역의 고위 행정 기구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스터 의용군(Ulster Volunteer Force)은 아무런 제재 없이 자유롭게 훈련하며 북아일랜드 전역을 활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부의 무능함은 1913년, 에드워드 카슨이 얼스터 임시 정부(Ulster Provisional Government)를 조직하면서 자신감 넘치는 발언을 쏟아내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가 불법이라고 들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훈련은 불법입니다. 의용군도 불법입니다. 정부도 불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정부는 감히 간섭하지 못합니다.
에드워드 카슨
에드워드 카슨
<nopad> |
벨페스트를 퍼레이드 하는 얼스터 의용군 |
2.1.3. IV(아일랜드 의용군)
<nopad> |
오엔 맥네일 |
게일어 연맹의 일원이자, 그 기관지 An Claidheamh Soluis의 전 편집자였던 에오인 맥네일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맥네일은 얼스터 임시 정부를 "정치적 연극 중 가장 우스꽝스러운 작태"라고 비난했으며, 같은 게일어 연맹 편집자였던 마이클 오라일리와 함께 「북쪽의 시작(The North Began)」이라는 비판문을 작성했다.
‘동질적인 얼스터’란 없다. 성 패트릭이 세운 도시, 성 콜럼버가 세운 도시, 패트릭과 브리지드와 콜럼버의 무덤이 있는 도시를 아일랜드로부터 떼어낼 수는 없다. 그들은 결코 순순히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뉴리(Newry)의 국경 도시, 남쪽 다운, 노르만과 게일인, ‘북부의 관문’을 지키는 피어 족의 게일 혈통, 데리(Derry)와 북 안트림의 계곡들—이 모두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이제 유일한 해법은 제국이 아일랜드와 타협하든가, 아니면 아일랜드가 스스로 독립하여 나아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분명한 것은, 아일랜드 사람들은 유니오니스트든 국민주의자든 스스로의 방식대로 아일랜드에서 살고자 한다는 것이다.
맥네일과 오라일리, The North Begun
맥네일과 오라일리, The North Begun
맥네일의 글은 북부 자원병의 반발하는 남부 아일랜드 자원군의 결집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자원군의 공식 출범 뒤에는 IRB(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이라는 급진적 비밀조직의 강력한 주도가 있었다.
2.1.3.1. 아일랜드 공화국 형제단과 아일랜드 의용군
<nopad> |
불머 홉슨 |
IRB(아일랜드 공화국 형제단) 더블린 센터 위원회의 일원이었던 불머 홉슨은 두 가지 핵심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하나는 전국적인 무장조직의 준비,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게일식 보이스카우트 단체였던 피애너 에이렌(Fíanna Éireann)을 군사조직으로 재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략적 구상은 곧 자원군 창설 논의와 맞물려 실제 행동으로 이어졌다. 불머 홉슨은 자원군 창설 구상에 빠르게 참여했으며, 오라일리에게 군사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인물들을 보내겠다고 보장했다.
1913년 11월 11일, 윈스 호텔(Wynn's Hotel)에서 열린 첫 회의를 시작으로, 아일랜드 자원군 창설을 위한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회의 직후 몇 주 동안 IRB 인사들이 꾸준히 위원회에 추가되었고, 초기에는 12명이었던 구성원이 결국 30명에 달하는 규모로 확대되었다.
<nopad> |
아일랜드 의용군 |
결국 1913년 11월 25일, 로툰다 링크에서 아일랜드 자원군은 공식적으로 출범하게 된다.
우리는 그저 영국 정치가 우리를 구원해주리라는 희망 속에 무기력하게 기다려야 하는가? 영국 정치 체계는 본질적으로 영국의 이익에 의해 좌우되며, 영국 국민들의 주요 관심사는 아일랜드의 권리가 아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우리의 권리를 지키는 것은 아일랜드 국민의 가장 우선적인 의무이다....아일랜드 자원군이 추구하는 목표는, 아일랜드 민중 모두가 향유해야 할 권리와 자유를 확보하고 지키는 것이다. 이들은 방어와 보호에 전념할 것이며, 침략이나 지배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아일랜드 자원군 선언문
아일랜드 자원군 선언문
2.1.3.2. 페트릭 피어스
<nopad> |
페트릭 피어스 |
봉기의 핵심 인물인 패트릭 피어스는 아일랜드 자원군을 통해 IRB에 가입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그는 급진적인 민족주의 성향의 아일랜드어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다. 그가 창간한 『An Barr Buadh』(승리의 나팔)에서는 민족주의와 무장 투쟁에 대한 과도한 찬양이 담겨 있었고, 폭력을 미화하는 어조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우리는 조상들이 맹세했던 서약을 다시 맹세하노라,
우리 민족을 속박에서 해방하리라,
아니면 맨손으로 싸우다 쓰러지리라.
아멘
페트릭 피어스, 서약(Mionn)
우리 민족을 속박에서 해방하리라,
아니면 맨손으로 싸우다 쓰러지리라.
아멘
페트릭 피어스, 서약(Mionn)
1913년 11월, 맥네일의 글이 나온 다음 주에, 피어스는 무장 반란에 대한 노조를 본격화 한다.
민족은 무기를 통해서가 아니면 결코 독립을 이룰 수 없다....우리는 무기를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무기를 바라보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무기를 사용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피를 흘리는 것은 정화와 성화의 행위이다. 그리고 유혈사태를 최종적 공포로 여기는 민족은 이미 남성성을 상실한 것이다. 유혈보다 더 끔찍한 일은 많으며, 노예 상태가 그중 하나다.
페트릭 피어스, 혁명의 토대 (Coming of the Revolution)
페트릭 피어스, 혁명의 토대 (Coming of the Revolution)
IRB는 피어스를 신뢰하는데 꽤 오랜 시간을 들였다. 그러나 결정적인 전환점은 그가 에밋 기념 연설을 맡게 되면서, IRB 내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게 된 순간으로 보인다.
오늘 밤 이 자리에서 말하는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결코 사라지지 않을 어떤 것의 목소리입니다. 우리는 어떤 제국보다도 오래되었고, 모든 제국보다 더 오래 지속될 사상의 목소리입니다. 우리는, 그리고 우리 세대는, 지금껏 지구상에 세워진 제국 중 가장 강력한 제국 중 하나와 오랜 세월 싸워왔습니다. 그리고 그 제국이 사라지기 전에는 결코 우리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국보다 오래되었고, 우리는 영국보다 강합니다. 우리는 매 세대마다 투쟁을 다시 일으켜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영국이 우리의 투쟁을 피로 진압했다고 믿는 순간, 어떤 용감한 이가 다시 일어나 우리를 이끕니다. 영국이 뇌물로 우리를 샀다고 믿는 순간, 어떤 선한 이가 희생을 통해 우리를 되찾습니다. 영국이 제국의 사명을 들고 나아가는 곳마다, 우리는 그곳에서 맞서고 그녀를 공격합니다. 어제는 남아프리카의 벌판에서, 오늘은 워싱턴 상원에서, 내일은 더블린의 거리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녀를 집요하게 쫓고, 어둠 속 도둑처럼 잠복하여 그녀를 덮칩니다. 언젠가는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로 그녀를 압도할 것입니다.
우리가 증오의 사도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누가 우리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했습니까? 하지만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주노라" 하신 그리스도는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도 하셨습니다. 정의와 불의, 진실과 거짓, 정의와 억압, 자유와 폭정 사이에는 결코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사이에는 영원한 전쟁이 있으며, 이는 잘못이 바로잡히고, 진실이 확립되고, 정의가 실현되며, 자유가 획득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페트릭 피어스, 에밋 기념 연설
영국이 우리의 투쟁을 피로 진압했다고 믿는 순간, 어떤 용감한 이가 다시 일어나 우리를 이끕니다. 영국이 뇌물로 우리를 샀다고 믿는 순간, 어떤 선한 이가 희생을 통해 우리를 되찾습니다. 영국이 제국의 사명을 들고 나아가는 곳마다, 우리는 그곳에서 맞서고 그녀를 공격합니다. 어제는 남아프리카의 벌판에서, 오늘은 워싱턴 상원에서, 내일은 더블린의 거리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녀를 집요하게 쫓고, 어둠 속 도둑처럼 잠복하여 그녀를 덮칩니다. 언젠가는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로 그녀를 압도할 것입니다.
우리가 증오의 사도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누가 우리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했습니까? 하지만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주노라" 하신 그리스도는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도 하셨습니다. 정의와 불의, 진실과 거짓, 정의와 억압, 자유와 폭정 사이에는 결코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사이에는 영원한 전쟁이 있으며, 이는 잘못이 바로잡히고, 진실이 확립되고, 정의가 실현되며, 자유가 획득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페트릭 피어스, 에밋 기념 연설
2.1.3.3. 아일랜드 자원병 구조
아일랜드 자원병은 1914년부터 군사 지침이 마련되었으며, 이는 영국 군대의 기본 구조를 본뜬 것이었다. 대대는 여덟 개의 중대로 구성되었고, 각 중대는 네 개의 8인 소대로 이루어진 두 개의 하위 중대로 편성되었다. 장교들 역시 상사부터 대령까지 정규군의 계급 체계를 따랐다.그러나 얼스터 자원군과는 달리, 총사령관은 군인이 아니었고, 장교들은 선출 방식으로 임명되었다. 규율도 느슨했으며, 신병에게 선서를 요구하는 절차도 없었다. 보급 상황 또한 초기에 열악했는데, 자원병 조직인 만큼 각 구성원이 자신의 제복과 소총을 직접 구매해야 했고, 중대 단위로는 1911년판 영국 보병 교범을 1실링을 주고 구입해야 했다.
1913년 말까지 1만 명이 모집되었지만, 군인의 부재 속에서 병사 흉내를 내는 데에는 상당한 한계가 있었다
아일랜드에서는 우리는 군사 훈련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죠. 우리는 영국 군인들이 훈련하는 것을 보지도 않았고, 병영 광장에서 근무 교대조차 지켜보지 않았으며, 아일랜드 은행 앞에서의 근위병 교대도 보지 않았어요.
아일랜드 자원병
아일랜드 자원병
규율에 대한 문제는 케리 자원병의 기록에서도 드러나는데, 케리 지역 조직자인 데즈먼드 피츠제럴드는 군사적 적성이 있는 사람들을 엄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열을 맞추지 못하는 한 남자에게 다가가 무슨 문제냐고 묻자, 이렇게 말하더군. "당신이 술 멀리하라고 하도 말해서, 지난 일요일 트라리에선 레모네이드를 너무 많이 마신 탓에 발을 제대로 쓸 수가 없다고."
데즈먼드 피츠제럴드
데즈먼드 피츠제럴드
총기를 확보하는 일 또한 상당히 불확실했다. 1대대 소속 세 중대를 담당했던 마이클 스테인스는, 소총을 원하는 자원병들로부터 주당 1실링을, 리엔필드 소총을 원하는 이들로부터는 2실링 6펜스를 모금했다. 스테인스는 결국 자신이 맡은 모든 인원에게 소총을 지급하는 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많은 자원병들은 권총, 산탄총, 심지어 창을 들고 훈련에 참가해야 했다.
유니폼 마련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유니폼 소위원회(Uniform Sub-Committee)는 1914년 8월이 되어서야 보고서를 제출하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는 카자크 스타일을 닮은, 넓은 챙에 한쪽이 접혀 있는 모자로 결정되었고, 군모와 허리띠 버클에는 게일 문화를 상징하는 해 모양이 새겨졌다. 재미있게도, 아일랜드의 진정한 국색에 대한 논쟁을 반영하듯, 초기 회원 카드들은 초록색이 아닌 파란색으로 제작되었다. 깃발 역시 1915년 5월까지 논쟁이 계속되었고, 그제서야 초록 바탕에 금색 하프가 그려진 디자인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2.1.3.4. 아일랜드 의회당의 개입
의회당(Irish Parliamentary Party)의 지도자였던 존 레드몬드, 존 딜런, 조 데블린 또한 점차 성장하는 의용군 운동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 레드먼드와 의용군 창립자들 간의 충돌을 예고하는 신호였다.6월 9일, 레드먼드는 의회당이 공식적으로 의용군 운동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의용군 집행위원회가 대표성이 부족하다며, 의회당 측 인사들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노골적인 영향력 확대 시도는 자원군 내부 지도부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자원군은 아일랜드군의 시작이며, 모든 아일랜드인은 자신의 정치나 종교적 견해를 묻지 않고 자원군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로저 케이스먼트
로저 케이스먼트
맥네일 또한 이 문제로 몇 달 동안 의회당과 싸운 나머지 마치 국왕 조사위원회 앞에 서는 기분이었다 라고 서술했다. 오라일히 또한 레드먼드가 운동의 힘을 빼버릴려고 한다고 강하게 반발하였다.
레드먼드는 추가로 자신의 지지자 25명을 위원회에 포함시킬것을 주장하였고, 비슷한 단체를 구성해서 IV의 주도권을 빼았겠다고 협박했다. IRB 소속 위원들은 강하게 반대하였으나, 홉슨은 예외였다. 홉슨은 레드몬드에게 양보해도 크게 차이가 없을 거라고 설득하였고, 결국 오라일히는 레드먼드의 협박에 굴복하게 된다.
그 항복 이후, 저는 제 자신에게 너무 실망해 자원위원회 사임서를 써서 페트릭 피어스에게 넘겼습니다. 그는 그걸 보내지 말라고 조언했죠.
오라일리
오라일리
이 갈등은 IRB의 핵심 인물이었던 톰 클라크의 격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지난 4년간 홉슨을 거의 아들처럼 여겨왔지만, 홉슨에게 “더블린 성이 너에게 얼마를 주었느냐”는 심각한 모욕의 말을 던졌다 [10]. 이 일 이후, 두 사람은 사적으로 다시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홉슨은 IRB 최고 평의회에서 사임했고, 이는 그가 공화주의 운동의 주도적 활동가로서 한 발 물러서기 시작한 전환점이 되었다.
2.1.4. 아일랜드 시민군의 출범
더블린은 좌파 생디칼리즘의 전초기지로도 기능했다. 1913년 9월, 짐 라킨이 이끄는 아일랜드 운수 일반 노동조합(ITGWU)의 파업은 윌리엄 마틴 머피가 주도한 고용주 연합과의 전면적인 충돌로 번졌고, 9월 22일까지 도시 전체가 파업 상태에 빠졌다. 결국 머피가 2만 5천 명의 노동자들을 해고하면서 노동조합의 파업은 무너졌지만, 위기의식을 느낀 노동조합은 이에 대응해 노동자 민병대를 조직하게 되었다.다음번 우리가 거리로 나설 땐, 네 개 대대의 훈련된 병사들과 하사관, 부사관이 함께하길 원한다
제임스 코널리
제임스 코널리
초기에는 파업 파괴자들과의 대치 과정에서 제한적으로 활용되던 민병대는, 라킨이 선동죄로 체포되면서 보다 조직적인 시민군으로의 전환을 모색하게 되었다. 라킨이 석방된 바로 다음주, 아일랜드 시민군이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
아일랜드 시민군 헌법
1914년 3월 22일 채택
아일랜드 시민군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원칙은, 아일랜드의 도덕적·물질적 소유권이 정당하게 아일랜드 국민에게 귀속된다는 선언이다.
시민군의 주요 목적은 다음과 같다:
(a) 무기를 들 수 있는 모든 아일랜드인을 무장시키고 훈련시켜, 이 첫 번째 원칙을 강제하고 방어할 수 있도록 한다.
(b) 태생, 특권, 종교의 차이를 모두 아일랜드 국민이라는 공통의 이름 아래 해소한다.
시민군은 아일랜드 민족의 완전한 통합과, 세계 민주주의 국가들이 인정하는 권리와 자유의 인정을 지지한다.
시민군은 아일랜드 국민의 평등한 권리와 기회를 받아들이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조직된 노동과 조화를 이루며 활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다.
모든 입대한 구성원은 가능한 한, 아일랜드 노동조합 총연맹(Irish Trades Union Congress)에 의해 인정된 노동조합의 조합원이어야 한다.
신이여, 인민을 구하소서. (GOD SAVE THE PEOPLE.)
아일랜드 시민군 헌법
1914년 3월 22일 채택
아일랜드 시민군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원칙은, 아일랜드의 도덕적·물질적 소유권이 정당하게 아일랜드 국민에게 귀속된다는 선언이다.
시민군의 주요 목적은 다음과 같다:
(a) 무기를 들 수 있는 모든 아일랜드인을 무장시키고 훈련시켜, 이 첫 번째 원칙을 강제하고 방어할 수 있도록 한다.
(b) 태생, 특권, 종교의 차이를 모두 아일랜드 국민이라는 공통의 이름 아래 해소한다.
시민군은 아일랜드 민족의 완전한 통합과, 세계 민주주의 국가들이 인정하는 권리와 자유의 인정을 지지한다.
시민군은 아일랜드 국민의 평등한 권리와 기회를 받아들이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조직된 노동과 조화를 이루며 활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다.
모든 입대한 구성원은 가능한 한, 아일랜드 노동조합 총연맹(Irish Trades Union Congress)에 의해 인정된 노동조합의 조합원이어야 한다.
신이여, 인민을 구하소서. (GOD SAVE THE PEOPLE.)
아일랜드 시민군 헌법
<nopad> |
우리는 왕도, 카이저도 아닌 오직 아일랜드를 위해 |
하지만 ICA(아일랜드 시민군)는 철저히 더블린에 기반을 둔 조직으로, 노동운동의 한계 속에 갇혀 있었다. 1913년 파업 이후 ICA는 아일랜드 자원군과의 경쟁 속에서 점차 지지 기반을 잃어갔는데, 이는 ICA 헌법에 담긴 사회주의적 이상이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1.5. 커라 반란
정부는 얼스터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드리고 군대를 투입하더라고 명령이 반드시 이행되도록 보장하려 애쓰다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전쟁부는 얼스터 출신 장교들에게는 얼스터 군사작전에 대해서 제외해줄터이니 "일시적으로 사라진 것 처럼 행동할것"이라는 면제를 제안했다. 그외의 장교들에게는 만약 파병을 거부할 경우 사임은 불허하되 강제로 면직시키겠다고 협박했다.아일랜드 주둔 총사령관이 커라 기지의 제3기병 여단 장교들에게 이 선택시를 제시했을때, 대부분은 얼스터 반란군과 충돌하느리 차라리 군 경력을 포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제5창기병연대(5th Lancers) 지휘 장교는, 두 명과 입장이 불확실한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장교가 오늘 사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제16창기병연대에서도 같은 상황이 벌어질까 심히 우려됩니다. 병사들 또한 북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거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제3기병여단 소속 고프 준장과 장교 57명은 북쪽으로 파견되라는 명령을 받을 경우 차라리 해임을 택하겠다고 보고드립니다.
전쟁부에 아일랜드 주둔 총사령관 아서 피젯이 보내진 서문
전쟁부에 아일랜드 주둔 총사령관 아서 피젯이 보내진 서문
결국 정부는 군대가 얼스터에서 자치법안을 강제로 집행하는 데 사용되지 않을 것임을 보장해야 했고, 이는 아일랜드 국민주의 여론에 큰 충격을 안겼다. 자치법안의 실현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로워 보였다.
2.1.6. 의용군의 무기 밀수
자치에 대한 여론의 변화는 다음 달 더욱 심화되었다. UVF(얼스터 의용군)가 밤사이 라른, 뱅거, 도너헤디 등 얼스터 항구로 거의 5만 정의 소총과 300만 발의 탄약을 밀수입한 것이다.<nopad> |
에드워드 카슨과 얼스터 의용군 |
무기의 품질은 좋지 않았고, 대부분이 구형 이탈리아제 소총으로 실사용이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 그럼에도 이 정교하게 조직된 작전은 UVF 참모진의 능력을 과시했으며, 얼스터 위기에 결정적인 충격을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IRB의 불머 홉슨은 아일랜드 의용군을 위한 무기 수송 작전을 조직했다. 이는 독일에서 구매한 1,500정의 소총과 49,000발의 탄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무기들 또한 1870년대제 단발 마우저 소총으로, 군사적 기준에서는 완전히 구식이었지만, UVF의 무기와는 달리 상태는 양호했다. 그러나 의용군의 재정 상황은 매우 열악하여, 이 무기조차 극히 소수만 확보할 수 있었다.
무기 인수를 맡은 어스킨 칠더스(Erskine Childers)는 북유럽 신화에서 이름을 딴 아스가르드(Asgard) 호를 타고 독일로 향했다. 그는 독일 슈헬트 강 어귀에서 독일 예인선을 통해 900정의 소총과 3만 발에 달하는 탄약을 실었다. 약 600정의 소총을 옮겨 실었을 때, 아스가르드의 선실과 통로는 무기로 가득 찼고, 칠더스는 작전 수행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내비치기도 했다.
<nopad> |
아스가르드를 타고 오는 메리 스프링 라이스와 몰리 칠더스 |
무거운 아스가르드는 해군이 순찰하는 수백 마일의 해안을 항해해야 했고, 한밤중에는 구축함과 충돌할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스가르드는 마침내 더블린 인근 호우스(Howth) 항구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시간은 점점 흘러갔고 –– 11시가 되었지만 여전히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모터보트는 10시에 우리를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우리는 섬의 동쪽을 따라 내려갔다가 다시 돌아왔고, 내 기분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어스킨은 모터보트가 오든 말든 무조건 입항하자고 결심했고, 그건 정말 위험해 보였다. 우리는 이미 임시 위원회로부터 3주째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한 상황이었고, 어쩌면 자원군은 아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만조 때 호우스 항구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했기에, 더 이상 지체할 시간도 없었다. 항구에 가까워졌을 때 나는 아래로 내려가 우리 벙커에 있던 총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작업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다시 출항해야 한다면 이 총들을 다시 싣는 건 얼마나 지겨운 일일까.’
총을 다 치울 즈음, 우리는 항구 바로 앞에 도착했고, 호우스 부두가 뚜렷이 보였다. 몰리는 자원군이 보이는지 바라보며 계속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 자원군이 올지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모터보트가 나올 수 없을 만큼 파도가 거칠다고 생각되지 않았고, 어쩌면 뭔가 일이 생겨 작전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어쨌든 내 빨간 치마가 신호가 되어야 했기에, 나는 갑판 위에서 눈에 잘 띄게 서 있었다. 북서풍이 불고 있는 상황에서, 딱 맞는 타이밍에 돛을 내리고 부두에 바짝 붙여 정박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분이 아쉬운 순간이었기에.
몰리는 키를 잡고, 어스킨과 남자들이 돛을 내렸다. 그리고, 오, 기쁨이여 –– 부두 끝에 줄을 받아줄 남자들이 모여 있었다!
처음에는 부두에 있던 자원군들이 넘겨받는 소총을 서로 가지려 하며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그러자 어스킨은 누군가 책임자를 찾을 때까지 총기 전달을 중단시켰고, 곧 어느 정도 질서가 회복되었다. 몰리와 나, 그리고 고든 씨는 미즌 돛대 옆에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꿈만 같았다. 항해 내내 우리는 이 순간을 수도 없이 상상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수천 번도 더 이야기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 항구 건너편에서 해안경비대(coastguards)가 배를 타고 요트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자원군들은 해안경비대에게 권총을 겨눴고, 나는 그들이 정말 발포할까봐 잠시 두려웠다. 하지만 현명하게도 해안경비대는 네 명으로는 천 명을 상대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다시 노를 저어 물러났다. 몇 분 후, 그들은 구조 요청을 알리는 조명탄(로켓 신호)을 쏘아 올리고 있었다.
《아스가르드호의 일기(Diary of the Asgard)》 – 메리 스프링 라이스
우리는 만조 때 호우스 항구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했기에, 더 이상 지체할 시간도 없었다. 항구에 가까워졌을 때 나는 아래로 내려가 우리 벙커에 있던 총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작업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다시 출항해야 한다면 이 총들을 다시 싣는 건 얼마나 지겨운 일일까.’
총을 다 치울 즈음, 우리는 항구 바로 앞에 도착했고, 호우스 부두가 뚜렷이 보였다. 몰리는 자원군이 보이는지 바라보며 계속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 자원군이 올지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모터보트가 나올 수 없을 만큼 파도가 거칠다고 생각되지 않았고, 어쩌면 뭔가 일이 생겨 작전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어쨌든 내 빨간 치마가 신호가 되어야 했기에, 나는 갑판 위에서 눈에 잘 띄게 서 있었다. 북서풍이 불고 있는 상황에서, 딱 맞는 타이밍에 돛을 내리고 부두에 바짝 붙여 정박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분이 아쉬운 순간이었기에.
몰리는 키를 잡고, 어스킨과 남자들이 돛을 내렸다. 그리고, 오, 기쁨이여 –– 부두 끝에 줄을 받아줄 남자들이 모여 있었다!
처음에는 부두에 있던 자원군들이 넘겨받는 소총을 서로 가지려 하며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그러자 어스킨은 누군가 책임자를 찾을 때까지 총기 전달을 중단시켰고, 곧 어느 정도 질서가 회복되었다. 몰리와 나, 그리고 고든 씨는 미즌 돛대 옆에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꿈만 같았다. 항해 내내 우리는 이 순간을 수도 없이 상상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수천 번도 더 이야기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 항구 건너편에서 해안경비대(coastguards)가 배를 타고 요트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자원군들은 해안경비대에게 권총을 겨눴고, 나는 그들이 정말 발포할까봐 잠시 두려웠다. 하지만 현명하게도 해안경비대는 네 명으로는 천 명을 상대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다시 노를 저어 물러났다. 몇 분 후, 그들은 구조 요청을 알리는 조명탄(로켓 신호)을 쏘아 올리고 있었다.
《아스가르드호의 일기(Diary of the Asgard)》 – 메리 스프링 라이스
더블린 인근에서 시도된 상륙은 무기 하역을 용이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경찰과의 충돌 가능성을 높였다. 이는 홉슨이 계산한 전략으로, 만약 충돌이 발생할 경우, 라른에서의 얼스터 의용군과는 달리 정부의 편향성을 드러내는 선전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홉슨의 기대와 부흥하듯 더블린 시경(DMP)은 빠르게 대응하기 시작했다.
<nopad> |
호우스에서 라이플을 이송중인 아일랜드 의용군 |
부국장 하렐은 군 병력을 요청한 뒤 호우스로 향하던 중, 말라하이드 도로에서 행진 중이던 아일랜드 의용군 대열과 마주쳤다. 무장을 해제하려 했으나, 의용군 측이 권총과 자동권총을 발사해 인근에 있던 병사 두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어 도망치려는 의용군과 이를 막으려는 경찰이 얽히면서 현장은 대혼란에 빠졌고, 결국 의용군은 북부 더블린 교외로 흩어졌다. 경찰은 의용군 대열의 앞부분에서 19정의 소총을 압수했지만, 이들 모두는 충돌 과정에서 손상된 상태였다. 이후 아일랜드 의용군 감찰총장인 모리스 무어는 침착하게 더블린 성을 찾아가 총기의 잔해를 돌려받았다
이 짧은 대치 상황하는 의용군 선전에서 클론타르프 전투의 재현이라고 묘사되었다. 이 사건은 의용군 운동에 엄청난 활력을 불어넣었고, 많은 의용군과 피어나 소년들의 인생을 바꾼 순간이였다.
우리는 환호하고 또 환호하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흔들며 다시 환호했다. 그날 내가 보고 들은 건 내 인생 최고의 일이었다.
아일랜드 여성평의회(Cumann na mBan)
아일랜드 여성평의회(Cumann na mBan)
이때 밀수입된 무기들은 전부 호우스 마우저(Howth Mauser)라고 불리게 된다. 이 마우저 소총들은 크고 무겁고, 11mm 대구경 탄환을 사용하였으며, 특유의 둔탁한 발사음은 이후 1916 봉기의 대표적 소리 중 하나로 남았다.
의용군 부사관중 한명이였던 잭 플렁킷은 마우저 한정을 15실링에 구매하고서는 "기쁨"이라고 이름 짓기도 하였다.
총신 내부도 훌륭했고, 반복된 청소를 통해 반짝거릴 때 정말 자랑스러웠다...1874년까지의 날짜가 표시된 원래의 종이 포장에 담겨 있었고, 초록녹(verdigris)도 거의 없었으며, 정교하게 만든 탄약은 모두 반짝였고, 거대한 탄약주머니에 담겨 있었다. 마치 코끼리와 싸울 준비라도 된 기분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잭 플렁킷
잭 플렁킷
2.1.7. 영국정부의 무능
호우스 총기 밀수 사건 이후, 아일랜드는 급격히 긴장 상태에 빠져들었다. 영국군은 아일랜드 민중에게 끊임없는 야유와 비난을 받았고, 군과 시민 사이의 긴장은 극에 달했다. 제2 스코틀랜드 국경 보병연대의 병사들이 리피 강변을 따라 막사로 돌아가던 중, 분노한 군중이 뒤따르며 거친 욕설과 야유를 퍼부었다.병사들은 그간의 일을 겪고 매우 흥분한 상태였고, 통제하기 어려웠다.
보병연대 소위
보병연대 소위
배철러스 워크를 지나던 중, 군중이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당황한 병사들은 진압을 위해 멈춰섰다. 그리고 그 순간, 총성이 울렸다. 민간인 네 명이 사망했고, 이 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파장을 불러왔다.
이후 열린 공식 조사에서는 발포 명령이 명확히 내려지지 않았지만, 병사들은 명령이 있었다고 믿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당시 지휘관 하이그 소장은 병사들이 공포탄을 장전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했으며, 조사위원회는 이 사건을 단지 “유감스러운 일"로 축소해버렸다.
더 나아가 조사 과정에서는 아일랜드 의용군의 교련 행위가 불법일 수 있다는 해석까지 제기되었고, 이는 영국 정부에 대한 거센 역풍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민족주의자들에게 영국 정부가 얼스터 연방주의자에게는 관대하고, 아일랜드 의용군에게는 억압적이라는 인식을 더욱 확고히 심어주었다. 과거 얼스터의 무기 밀반입 작전에는 아무런 제재가 없었던 것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영국 정부는 점차 아일랜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차관은 정부가 상황에 대해 얼마나 정보가 부족한지를 뒤늦게 인지하고, 3월 20일, 아일랜드 사령부에 정보부 설립을 요청했다. 그러나 군은, 이처럼 민감하고 섬세한 조직을 이제 와서 꾸리기엔 너무 늦었다며 강한 우려를 표했다. 게다가 커라 사건의 여파로 인해, 군이 다시 전면에 나설 경우 여론의 비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계심도 여전했다.
이 시점에서 경찰 정보부는 아일랜드 행정부에 매우 강경한 권고를 전달했다.
아일랜드 비밀정보기관에 더 나은 인재를 끌어들이는 데 어떤 노력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는 즉각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1914년 3월 31일자 아일랜드 상황에 대한 정보국 문서 중
1914년 3월 31일자 아일랜드 상황에 대한 정보국 문서 중
그러나 아일랜드 행정부는 이 강도 높은 조언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늦은 상태였다.
곧 각 카운티마다 훈련된 군대가 경찰보다 많아질 것이며, 자원군을 통제하는 이들이 법의 집행 범위를 결정짓는 자가 될 것이다.
더블린 캐슬 보고서
더블린 캐슬 보고서
이 위기의 파장은 제국군 총참모장에게도 즉시 전달되었다. 그는 7월 초, 애스퀴스 총리에게 보고하며, 만약 양측에서 각 20만 명 규모의 병력이 충돌을 하게되면 이를 다룰 군사적 계획조차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한, 정부가 어떤 정책을 택할지 결정하지 않는 한, 군은 어떠한 준비도 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아일랜드를 지키려고 한다면 전면적 동원령, 특수예비군의 항구 배치, 본토 방위군의 소집 등을 해야 하며, 영국의 해외 작전 수행 능력이 완전히 마비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1914년 여름. 더블린의 배철러스 워크에서 민간인을 향한 총성이 울릴 때, 독일군은 이미 벨기에 국경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아일랜드 자치 문제는 국내 정치의 범주를 넘어, 세계 전쟁의 한가운데로 휘말려 들어갔다.
2.2. 세계대전
3. 봉기
<nopad> |
아일랜드 공화국 선언서 |
POBLACHT NA hÉIREANN
아일랜드 공화국
임시정부가 아일랜드 민중에게 고함
남녀 아일랜드 인민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우리 후손들에게 아일랜드 국민으로서의 오랜 전통과 깃발을 전해주며 자유를 위한 봉기를 소환한 돌아가신 선조들의 이름으로.
아일랜드는 자신의 인민을 조직하고 단련하여 왔다. 비밀리에 혁명을 조직한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당이 있으며 군사 조직으로서 아일랜드 의용군과 아일랜드 시민군이 조직되었다. 이들은 엄정한 규율아래 적당한 때가 도래하여 스스로를 드러내어야 할 때까지 인내하여 왔다. 이제 그 때가 되었다. 아메리카로 추방당한 아일랜드의 아이들이 지원하고 있으며 유럽 각지에 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완전한 승리의 쟁취를 위하여 스스로 강인함을 보여야 한다.
우리는 아일랜드의 주인은 아일랜드인임을 선언한다. 또한, 아일랜드의 양보할 수 없는 주권과 아일랜드의 통치권 역시 아일랜드인의 것이다. 외국인과 그들 정부가 벌인 오랜 세월의 착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권리는 소멸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압제는 결국 아일랜드인에 의해 종결될 것이다. 모든 아일랜드인은 주권과 자유로운 조국을 소유할 권리가있다. 이러한 권리의 쟁취를 위해 지난 삼백년간 여섯 차례에 걸친 항쟁이 있었다. 우리는 이를 계승하여 세계와 당당히 대면할 것이다. 여기 우리는 독립 주권국가인 아일랜드 공화국의 국민들이다. 우리는 아일랜드 공화국의 자유와 복지, 국가 번영을 위해 우리 자신과 전우들의 생명을 걸 것을 맹세한다.
우리는 이 선언을 통해 모든 아일랜드 남녀 인민이 충성을 맹세할 국가의 이름을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명명한다. 공화국은 종교와 공민의 자유권과 평등권 그리고 모든 시민에게 평등한 기회를 보장한다. 또한 공화국은 국가 전역의 모든 분야에서 행복과 번영을 추구할 것임을 공표한다. 국가의 모든 아동은 평등하게 존중될 것이며, 단일하게 결성된 >정부에 의해 과거에 다수와 소수자로 나뉘어 있었다 할지라도 차별없이 보살핌을 받으며 양육될 것이다.
아일랜드의 모든 남녀 인민의 투표에 의해 선출된 대표로 구성된 항구적인 국가 정부가 수립될 수 있는 적당한 시기를 우리의 군대가 획득할 때 까지, 공화국의 시민과 군사에 관한 정무는 인민의 신의를 바탕으로 이 선언서에 의해 집행될 것이다.
우리는 지엄하신 하느님의 축복이 우리의 군대를 가호하여 아일랜드 공화국을 수호하기를 기원할 뿐, 단 한 사람도 비겁하고 비인도적인 약탈자들에게 복종하는 불명예를 감수하지 않을 것이다.
임시정부 대표로 서명됨:
토머스 J. 클라크
산 막 디어르마다 토마스 막 돈하가
F. H. 피어스 제임스 코놀리
에이먼 칸트 조지프 플렁킷[11]
아일랜드 공화국
임시정부가 아일랜드 민중에게 고함
남녀 아일랜드 인민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우리 후손들에게 아일랜드 국민으로서의 오랜 전통과 깃발을 전해주며 자유를 위한 봉기를 소환한 돌아가신 선조들의 이름으로.
아일랜드는 자신의 인민을 조직하고 단련하여 왔다. 비밀리에 혁명을 조직한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당이 있으며 군사 조직으로서 아일랜드 의용군과 아일랜드 시민군이 조직되었다. 이들은 엄정한 규율아래 적당한 때가 도래하여 스스로를 드러내어야 할 때까지 인내하여 왔다. 이제 그 때가 되었다. 아메리카로 추방당한 아일랜드의 아이들이 지원하고 있으며 유럽 각지에 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완전한 승리의 쟁취를 위하여 스스로 강인함을 보여야 한다.
우리는 아일랜드의 주인은 아일랜드인임을 선언한다. 또한, 아일랜드의 양보할 수 없는 주권과 아일랜드의 통치권 역시 아일랜드인의 것이다. 외국인과 그들 정부가 벌인 오랜 세월의 착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권리는 소멸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압제는 결국 아일랜드인에 의해 종결될 것이다. 모든 아일랜드인은 주권과 자유로운 조국을 소유할 권리가있다. 이러한 권리의 쟁취를 위해 지난 삼백년간 여섯 차례에 걸친 항쟁이 있었다. 우리는 이를 계승하여 세계와 당당히 대면할 것이다. 여기 우리는 독립 주권국가인 아일랜드 공화국의 국민들이다. 우리는 아일랜드 공화국의 자유와 복지, 국가 번영을 위해 우리 자신과 전우들의 생명을 걸 것을 맹세한다.
우리는 이 선언을 통해 모든 아일랜드 남녀 인민이 충성을 맹세할 국가의 이름을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명명한다. 공화국은 종교와 공민의 자유권과 평등권 그리고 모든 시민에게 평등한 기회를 보장한다. 또한 공화국은 국가 전역의 모든 분야에서 행복과 번영을 추구할 것임을 공표한다. 국가의 모든 아동은 평등하게 존중될 것이며, 단일하게 결성된 >정부에 의해 과거에 다수와 소수자로 나뉘어 있었다 할지라도 차별없이 보살핌을 받으며 양육될 것이다.
아일랜드의 모든 남녀 인민의 투표에 의해 선출된 대표로 구성된 항구적인 국가 정부가 수립될 수 있는 적당한 시기를 우리의 군대가 획득할 때 까지, 공화국의 시민과 군사에 관한 정무는 인민의 신의를 바탕으로 이 선언서에 의해 집행될 것이다.
우리는 지엄하신 하느님의 축복이 우리의 군대를 가호하여 아일랜드 공화국을 수호하기를 기원할 뿐, 단 한 사람도 비겁하고 비인도적인 약탈자들에게 복종하는 불명예를 감수하지 않을 것이다.
임시정부 대표로 서명됨:
토머스 J. 클라크
산 막 디어르마다 토마스 막 돈하가
F. H. 피어스 제임스 코놀리
에이먼 칸트 조지프 플렁킷[11]
1916년 4월 24일 1,000여 명 내외의 독립군이 GPO(중앙우체국)을 비롯한 더블린 시내의 주요 거점[12]을 습격하면서 부활절 봉기가 시작되었다. 당일 더블린 내부의 주요 거점들을 거의 다 장악하고 지도자 패트릭 피어스가 시민들 앞에서 아일랜드 공화국을 선언하였다.
이후에 벌어질 더블린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학살을 막기위해 그리고 압도적으로 열세이고 포위된 추종자들을 구출할 희망 아래 현 본부의 임시정부원들은 무조건 항복에 동의하며 도시와 카운티에 있는 여러 지역의 사령관들이 무장을 해제하라는 명령을 내릴 것입니다.
패트릭 피어스의 항복 문서, 1916년 4월 29일
사전에 약속됐던 독일 제국의 무기 제공이 무산[13]된 데다 봉기에 참여한 각종 정파들의 이해관계가 엇갈린 탓에 명령이 뒤죽박죽이어서 안 그래도 부족한 병력이 더 엉망으로 운용되었다.[14] 덕분에 봉기세력은 더블린을 장악하기에 급급했다. 이와는 반대로 영국군은 이미 1차대전이 2년 동안 진행되던 상황이었던 만큼 병력 운용이 거의 만렙의 경지였다.[15] 결정적으로 더블린의 시민들 역시 전반적으로 봉기 세력들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여주었는데 봉기세력에게 온갖 욕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결국 영국군이 본격적으로 진압을 시작한 후 봉기 세력은 무너지기 시작해 4월 30일 더블린 중앙 우체국이 영국군 포병대에게 신나게 맹폭당하는 것으로 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패트릭 피어스의 항복 문서, 1916년 4월 29일
4. 봉기 이후
4.1. 사형
오, 그러나 열여섯 명이 총살되기 전
우리는 한참을 이야기했지
무엇을 주고받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말할 수 있을까?
그 죽은 이들이 저기 서서
끓는 가마솥을 휘젓고 있는데!
당신은 말하지, 우리가 땅을 조용히 지켜야 한다고
독일이 무너질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지만 누가 그런 주장을 할 수 있겠는가
이제 피어스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데?
그 논리가
맥도너의 마른 엄지손가락보다 무거운가?
그들이 들을 거라고 어찌 꿈꿀 수 있었나
그들의 귀는 오직
새로운 전우들,
로드 에드워드와 울프 톤의 목소리만을 듣는 것을
우리의 주고받음을 건드릴 수 있겠나
뼈와 뼈가 대화하는 그 세계에서?
16 Dead Man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우리는 한참을 이야기했지
무엇을 주고받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말할 수 있을까?
그 죽은 이들이 저기 서서
끓는 가마솥을 휘젓고 있는데!
당신은 말하지, 우리가 땅을 조용히 지켜야 한다고
독일이 무너질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지만 누가 그런 주장을 할 수 있겠는가
이제 피어스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데?
그 논리가
맥도너의 마른 엄지손가락보다 무거운가?
그들이 들을 거라고 어찌 꿈꿀 수 있었나
그들의 귀는 오직
새로운 전우들,
로드 에드워드와 울프 톤의 목소리만을 듣는 것을
우리의 주고받음을 건드릴 수 있겠나
뼈와 뼈가 대화하는 그 세계에서?
16 Dead Man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진압 이후 영국군은 아일랜드의 무장투쟁 세력을 아예 뿌리째 뽑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패트릭 피어스를 비롯한 독립군의 주요 우두머리들은 그대로 총살됐고[16] 수천명의 단순 가담자들도 투옥된 것은 당연지사였다.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 중 생디칼리슴 혁명가인 제임스 코널리는 봉기 도중 다리에 부상을 입어 제대로 설 수 없었다. 그러자 영국군은 코널리를 의자에 묶어서 총살시켰다. 이 정도로 무자비한 대응은 주동자들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 일으켰는데 프랜시스 쉬이 스케핑턴[17]을 비롯한 일부 지식인들이 봉기 기간 중에 영국군에게 학살된 뒤 암매장되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자 아일랜드인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이후 부활절 봉기를 주도한 세력은 아일랜드의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4.2. 1918 총선
<nopad> |
1918년 영국 총선(아일랜드) 결과[18] |
5. 여담
- 부활절 봉기의 전장인 GPO(더블린 중앙 우체국)[19]은 전투로 인해 붕괴되었지만 복원 후 1929년에 아일랜드 우체국(An post)의 본사로서 재개장하였다. 현재는 건물 일부만 우체국으로 쓰고 나머지는 큰 규모의 부활절 봉기 기념 역사 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전시 자료나 설명이 굉장히 충실하고 퀄리티도 높다. 영어가 어느 정도 되고 더블린에 방문할 기회가 있는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방문해 보자.
- 신 페인이 아일랜드 독립 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다. 사실 신페인은 이 봉기 당시 그냥 이름을 올린 여러 연대단위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는데 이들을 봉기의 주도세력이라고 오해한 영국 측에 의해 아일랜드 민중 사이에서 이름이 크게 퍼져나갔고 마침내 독립 운동을 이끄는 핵심세력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20]
- 에이먼 데 벌레라와 마이클 콜린스도 이 봉기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다. 하지만 데 발레라는 미국 시민권자여서 무턱대고 죽여 버리면 외교 문제로 번질 가능성이 높았고 콜린스는 당시에는 그냥 단순 가담자였기 때문에 영국이 투옥하는 정도로 끝내 버렸다. 출옥 후 이들은 아일랜드의 독립 운동을 이끄는 두 거목으로 성장했다.
- 당시 처형당한 독립운동가 중에 로저 케이스먼트라는 인물이 있는데 레오폴드 2세가 콩고에서 저지른 만행을 전세계에 알리는 데 매우 큰 기여를 한 사람으로 인권조사에 대한 공로로 영국 정부로부터 기사작위와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훈장을 받았으나 취소되었다. 그는 사형 판결을 받았고 아서 코난 도일을 포함한 영국의 정관계 유명 인사들이 감형 운동을 진행하였으며 그의 인도주의적 치적도 여론의 반발을 야기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케이스먼트가 게이임을 증명하는 일기–일명 블랙 다이어리라고 한다–를 공개하였다. 대다수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의 보수주의 덕택에 그에 대한 사면 옹호 여론은 약화되었고 결국 사형당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가톨릭 아동 성범죄 논란을 거쳐 아일랜드 사회에 교회가 미치는 영향이 극적으로 약화됨에 따라 케이스먼트는 그의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이 독립운동가로서의 것과 연계되어 더욱 자랑스럽게 기억되고 있다.
- 아일랜드에는 법정 공휴일로서의 독립기념일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부활절 봉기가 발발한 1916년 4월 24일이 사실상의 독립기념일로 여겨지는 분위기다. 구글 이미지에서도 아일랜드 독립기념일을 검색하면 부활절 봉기일인 4월 24일을 적은 일러스트가 다수 발견된다
- 아일랜드의 저항가요 Come out Ye Black and Tans에서도 이때 처형당한 16인의 아일랜드인들이 언급된다.
부활절 봉기 100주년 기념으로 위 연설문을 읽는 동영상 |
6. 참고 문서
- BBC 부활절 봉기 페이지
- 아이리시 타임즈 부활절 봉기 페이지
- 1916 - RTE
- Waiting For The Guns 1969 - RTE
- 아일랜드 정부 총리실 - 1916 기념
- The Easter Rising, my grandfather and the untold story of Sir Roger Casement - 인디펜던트
- Black night in Ballykissane - The Kingdom
[A] 출처에서 확인할 수 있음.[B] 1916 Easter Rising, Profiles - BBC[3] 아일랜드 공화국 형제단은 비밀결사 단체였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이름을 걸지 않고 아일랜드 의용군과 같은 무장단체를 조직해서 은밀하게 지원하는 형태로 주도했다. 아일랜드 의용군에는 아일랜드 공화국 형제단뿐만 아니라 신페인 당원 등도 있었다.[4] 훗날 아일랜드 의용군은 IRA로 재편되며 이 중 조약찬성파는 아일랜드군이 된다.[B] [6] Material Culture and 1916 - RTÉ[B] [A] [9] 여기서는 영국 해군에 의해 독일 제국의 배가 격침됐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영국 해군에게 들킨 것까지는 맞으나 독일 제국의 선원들이 고의적으로 격침시켰다.[10] 더블린 성은 당시 영국 식민 행정의 중심 기관으로, 조선 총독부에 비견될 수 있다.[11] 번역 출저. https://ko.wikisource.org/wiki/%EC%95%84%EC%9D%BC%EB%9E%9C%EB%93%9C_%EA%B3%B5%ED%99%94%EA%B5%AD_%EC%84%A0%ED%8F%AC[12] 더블린 캐슬 및 군병원. 현재는 IMMA로 현대 미술관으로 다시 개장했다.[13] 독일 제국 측이 독립운동가들에게 무기를 제공해 주기로 약속하고 노르웨이 국적으로 위장한 Aud라는 이름의 선박으로 배달해 주기로 했으나 봉기 이틀전 항행 중에 영국에게 딱 걸렸다. 무기라도 압수당하지 않기 위해 선원들이 배를 고의적으로 격침시켰다. 그래서 로저 케이스먼트는 Aud를 보지 못하고 체포되었다.[14] 반란군 측은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만 명 정도로 추산했는데 사학자들의 연구결과 부활절 봉기 내내 동원된 아일랜드 측 군사력이 3,000명이 채 안됐다고 한다(...).[15] 1916년에는 이전까지 영국은 자원병으로 충당했던 병력보충(영국 드라마 아워월드워 2화에서 내용을 알 수 있으며 이곳도 참조할 것) 대신 본격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여 수백만명의 군대를 굴리고 있었다. 이 군대를 유지시키는 데 필요한 행정력과 병참력을 감안하면...[16] 약 100여명 정도가 사형 판결을 받았다. 이 중 실제로 집행된 사람은 15명 정도고 나머지는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17] 비폭력주의자였으며 봉기 기간 동안 봉기자들과 영국을 모두 비판했다.[18] 선거 이후 독립선언으로 등장한 1919년 의회가 바로 아일랜드 제1대 하원 의회다.[19] 아카이브[20] 맥스웰 장군은 위험한 신페인을 체포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다.[21]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는 블러디 선데이라는 이름으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