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7 15:49:30

부활절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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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독립운동
관련 인물 마이클 콜린스, 로저 케이스먼트, 에이먼 데 벌레라
관련 사건 영국의 자치권 이양, 부활절 봉기, 아일랜드 독립 전쟁, 아일랜드 내전
북아일랜드 분쟁
피의 일요일 사건, 아일랜드 단식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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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봉기
Easter Rising
Éirí Amach na Cásca
파일:The_shell_of_the_G.P.O._on_Sackville_Street_after_the_Easter_Rising_(6937669789).jpg
기간 1916년 4월 24~29일
장소 아일랜드, 더블린
결과 반란군의 무조건 항복[1], 반란 주동자 처형
피해 485명 사망(민간인 260명)[2]
교전국 파일:Irish_Republic_Flag.png아일랜드 공화국 파일:영국 국기.svg영국
아일랜드 의용군[A][4]
아일랜드 시민군[5]
피어너 에런[6]
아일랜드 여성평의회[7]
하이버니안 라이플즈[A]
영국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aster_Proclamation_of_1916.png

봉기 지도자 패트릭 피어스가 봉기 세력의 핵심 거점이었던 더블린 중앙우체국에서 낭독한 독립선언문.
부활절 봉기 100주년 기념으로 위 연설문을 읽는 동영상

1. 개요2. 배경3. 봉기
3.1. 그러나
4. 여담5. 참고 문서

[clearfix]

1. 개요

역사저널 그날 중에서[9]
1916년 부활절 기간에 아일랜드인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일으킨 봉기. 4월 24일부터 4월 30일까지 진행됐으며 압도적으로 우세한 영국의 화력에 의하여 결국 분쇄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아일랜드의 무장 독립투쟁이 활발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마이클 콜린스가 이끄는 IRA의 끈질긴 항쟁 끝에 1922년 독립[10]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부활절 봉기는 아일랜드 독립의 도화선이었다고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2. 배경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아일랜드/역사
, 아일랜드 대기근
, 영국의 자치권 이양
,
,
,

12세기 무렵부터 끊임없이 영국의 침략을 받았던 아일랜드는 1800년 영국의 일부로 합병되었다. 이후 아일랜드 대기근과 같은 사태를 거치면서 아일랜드의 반영 감정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 갔고 독립을 위한 움직임도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독립(자치권)운동의 방향은 폭력을 수반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크게 두 노선으로 분할되었다. 하나는 '청년 아일랜드 운동'이라는 명칭이 붙은 노선으로 대체적으로는 비폭력을 택하고[11] 의회로 진출하여 정치세력을 확보한 후 독립(자치)를 획득하자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무장 투쟁 노선으로 이 세력을 주도한 것은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 혹은 신 페인 등의 단체였다.

이 중에서 청년 아일랜드 운동 세력은 19세기 중후반부터 영국 자유당과의 연합을 통하여 영국 의회로 진출하는 데 성공하기 시작했고 19세기 후반이 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성장했다.[12] 그리고 당시 수상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역시 아일랜드에게 우호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1886년 자치법을 상정하지만 하원에서 부결을 먹었다.[13]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1893년 한 번 더 자치법을 상정하고 이번에는 통과되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상원이 거부해 버렸다. 하지만 의지의 아일랜드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1912년에 마침내 자치법을 통과시켰다.[14]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얼스터 지역에 거주하던 성공회 신자들은 또 자기들 나름대로 '우리는 대영제국의 충실한 신하인데 자치 싫음'을 시전하며 자치를 저지하기 위해 멋대로 군사 세력을 조직했다. 또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을 비롯한 무장 투쟁 세력은 자기들 나름대로 '자치 따위론 만족 못한다. 독립할 때까지!'라는 마음을 가지고 완전히 영국의 영향에서 벗어난 독립 에이레 공화국을 세우려는 계획을 세웠다.

3. 봉기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자치권 이양은 종전 후로 연기됐고 무장투쟁 세력들에게 이러한 상황은 절호의 찬스였다.

1916년 4월 24일 1,000여 명 내외의 독립군이 GPO(중앙우체국)을 비롯한 더블린 시내의 주요 거점[15]을 습격하면서 부활절 봉기가 시작되었다. 당일 더블린 내부의 주요 거점들을 거의 다 장악하고 지도자 패트릭 피어스가 시민들 앞에서 아일랜드 공화국을 선언하면서 뭔가 되는가 싶었는데...
In order to prevent the further slaughter of Dublin citizens, and in the hope of saving the lives of our followers now surrounded and hopelessly outnumbered, the members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present at headquarters have agreed to an unconditional surrender, and the commandants of the various districts in the City and County will order their commands to lay down arms.
이후에 벌어질 더블린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학살을 막기위해 그리고 압도적으로 열세이고 포위된 추종자들을 구출할 희망 아래 현 본부의 임시정부원들은 무조건 항복에 동의하며 도시와 카운티에 있는 여러 지역의 사령관들이 무장을 해제하라는 명령을 내릴 것입니다.
패트릭 피어스의 항복 문서, 1916년 4월 29일
사전에 약속됐던 독일 제국의 무기 제공이 무산[16]된 데다 봉기에 참여한 각종 정파들의 이해관계가 엇갈린 탓에 명령이 뒤죽박죽이어서 안 그래도 부족한 병력이 더 엉망으로 운용되었다.[17] 덕분에 봉기세력은 더블린을 장악하기에 급급했다. 이와는 반대로 영국군은 이미 1차대전이 2년 동안 진행되던 상황이었던 만큼 병력 운용이 거의 만렙의 경지였다.[18] 결정적으로 더블린의 시민들 역시 전반적으로 봉기 세력들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봉기세력에게 온갖 욕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 결국 영국군이 본격적으로 진압을 시작한 후 봉기 세력은 무너지기 시작해 4월 30일 더블린 중앙 우체국이 영국군 포병대에게 신나게 맹폭당하는 것으로 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3.1. 그러나

파일:Irish_UK_election_1918.png
1918년 영국 총선(아일랜드) 결과[19]
진압 이후 영국군은 아일랜드의 무장투쟁 세력을 아예 뿌리채 뽑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패트릭 피어스를 비롯한 독립군의 주요 우두머리들은 그대로 총살됐고[20] 수천명의 단순 가담자들도 투옥된 것은 당연지사.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 중 생디칼리슴 혁명가인 제임스 코널리는 봉기 도중 다리에 부상을 입어 제대로 설 수 없었다. 그러자 영국군은 코널리를 의자에 묶어서 총살시켰다. 이 정도로 무자비한 대응은 주동자들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 일으켰는데 프랜시스 쉬이 스케핑턴[21]을 비롯한 일부 지식인들이 봉기 기간 중에 영국군에게 학살된 뒤 암매장되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자 아일랜드인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이후 부활절 봉기를 주도한 세력은 아일랜드의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1918년 영국 총선에서 아일랜드 의석의 대부분을 신 페인이 가져갔고 독립선언 후 아일랜드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다.

4. 여담

  • 부활절 봉기의 전장인 GPO(더블린 중앙 우체국)[22]은 전투로 인해 붕괴되었지만 복원 후 1929년에 아일랜드 우체국(An post)의 본사로서 재개장하였다. 현재는 건물 일부만 우체국으로 쓰고 나머지는 큰 규모의 부활절 봉기 기념 역사 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전시 자료나 설명이 굉장히 충실하고 퀄리티도 높다. 영어가 어느 정도 되고 더블린에 방문할 기회가 있는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방문해 보자.
  • 에이먼 데 벌레라마이클 콜린스도 이 봉기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다. 하지만 데 발레라는 미국 시민권자여서 무턱대고 죽여버리면 외교 문제로 번질 가능성이 높았고 콜린스는 이 때 당시에는 그냥 단순 가담자였기 때문에 영국이 투옥하는 정도로 끝내 버렸다. 출옥 후 이들은 아일랜드의 독립 운동을 이끄는 두 거목으로 성장했다.
  • 당시 처형당한 독립운동가 중에 로저 케이스먼트라는 인물이 있는데 이 사람은 레오폴드 2세콩고에서 저지른 만행을 전세계에 알리는 데 매우 큰 기여를 한 사람으로 인권조사에 대한 공로로 영국정부로부터 기사작위와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훈장을 받았으나 취소된다. 그는 사형 판결을 받았고 아서 코난 도일을 포함한 영국의 정관계 유명 인사들이 감형 운동을 진행하였고 그의 인도주의적 치적 또한 여론의 반발을 야기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케이스먼트가 게이임을 증명하는 일기–일명 블랙 다이어리라고 한다–를 공개하였다. 대다수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의 보수주의 덕택에 그에 대한 사면 옹호 여론은 약화되었고 결국 사형당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가톨릭 아동 성범죄 논란을 거쳐 아일랜드 사회에 교회가 미치는 영향이 극적으로 약화됨에 따라 케이스먼트는 그의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이 독립운동가로서의 것과 연계되어 더욱 자랑스럽게 기억되고 있다.
  • WWE RAW의 아일랜드인 레슬러 핀 밸러의 피니쉬 1916[24]은 부활절 봉기가 일어난 년도에서 따 왔다고 한다.

5. 참고 문서


[1] 참고[2] 참고 자료[A] 출처에서 확인할 수 있음.[4] 아일랜드 공화국 형제단은 비밀결사단체였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이름을 걸지 않고 아일랜드 의용군과 같은 무장단체를 조직해서 은밀하게 지원하는 형태로 주도했다. 아일랜드 의용군은 아일랜드 공화국 형제단뿐만 아니라 신페인 당원 등도 있었다.[5] The Pooles of 1916 Documentary[6] Children of the Revolution[7] The Irish Revolutionary Women of Cumann na mBan[A] [9] 여기서는 영국 해군에 의해 독일 제국의 배가 격침됐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영국 해군에게 들킨 것까지는 맞으나 독일 제국의 선원들이 고의적으로 격침시켰다.[10] 명목상으로는 자치국으로 여전히 영국의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을 허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아일랜드가 명목상으로도 독립을 선언한 것은 1930년대의 이야기다.[11] 대체적이라고 했듯이 청년 아일랜드 운동 내부의 몇몇 분파들은 폭력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고 실제로 행사하기도 했다. 물론 그 때마다 영국에게 오함마로 찍혔다.[12] 여담이지만 이들이 주로 사용했던 전략이 필리버스터였다. 순순히 자치를 허용해준다면 무제한 토론은 피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13] 야당이었던 보수당이야 당연히 반대했고 심지어 여당이었던 자유당에서조차 반란표가 속출했다.[14] 사실 당시에도 상원에서는 부결됐지만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하원이 결정하면 상원은 무조건 따른다'라는 법안이 통과됐기 때문에 간신히 실행에 옮겨질 수 있었다.[15] 더블린 캐슬 및 군병원. 현재는 IMMA로 현대 미술관으로 다시 개장했다.[16] 독일 제국 측이 독립운동가들에게 무기를 제공해 주기로 약속하고 노르웨이 국적으로 위장한 Aud라는 이름의 선박으로 배달해 주기로 했으나 봉기 이틀전 항행 중에 영국에게 딱 걸렸다. 무기라도 압수당하지 않기 위해 선원들이 배를 고의적으로 격침시켰다. 그래서 로저 케이스먼트는 Aud를 보지 못하고 체포되었다.[17] 반란군 측은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만 명 정도로 추산했는데 사학자들의 연구결과 부활절 봉기 내내 동원된 아일랜드 측 군사력이 3,000명이 채 안됐다고 한다(...).[18] 1916년에는 이전까지 영국은 자원병으로 충당했던 병력보충(영국 드라마 아워월드워 2화에서 내용을 알 수 있으며 이곳도 참조할 것) 대신 본격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여 수백만명의 군대를 굴리고 있었다. 또 이 군대를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행정력과 병참력을 감안하면...[19] 선거 이후 독립선언으로 등장한 1919년 의회가 바로 아일랜드 제1대 하원 의회다.[20] 약 100여명 정도가 사형 판결을 받았다. 이 중 실제로 집행된 사람은 15명 정도고 나머지는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21] 비폭력주의자였으며 봉기 기간 동안 봉기자들과 영국을 모두 비판했다.[22] 아카이브[23] 맥스웰 장군은 위험한 신페인을 체포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다.[24]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는 블러디 선데이라는 이름으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