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14:45:58

사이버신 계획

1. 개요2. 역사3. 사이버신 시스템의 구성
3.1. 사이버넷(Cybernet)3.2. 체코
4. 평가

1. 개요

스페인어: Proyecto Cybersyn
영어: Project Cybersyn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 시대에 칠레에서 실행된 컴퓨터 통제 계획경제 시스템. 1971년에서 1973년 사이에 진행되었다. 수도 산티아고에 있는 컨트롤 센터의 단일 컴퓨터와 칠레 각지의 공장을 텔렉스(전화기능이 있는 팩스)로 연결하여 제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당시 소련에서도 오가스라고 해서 경제를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각 기업의 사무실과 농장, 공장에 컴퓨터를 설치하고 이를 중앙에서 연결하는 식으로 컴퓨터 통신망을 구축하겠다는 계획이 있었고 일부 실현되기도 했지만 예산 문제에다 당내 경제전문가 및 관료들의 회의론 때문에 실현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는데 칠레에서는 초보적인 단계나마 이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사실 현대에는 CCTV 관제센터과학화 경계시스템 전국에서 올라오는 자료와 영상들을 실시간으로 보고받는것은 흔하기는 해서 특별한 모델이라 할수는 없지만 당시 기준에서는 나름대로 첨단 시스템이기는 했다.

2. 역사

1971년 칠레경제개발공사(CORFO)의 기술 부문 책임자이자 20대였던 페르난도 플로레스가 영국의 연구자 스테포드 비어를 초빙하여 만들어졌다. 당시 칠레의 경제시스템을 첨단화하고 자치권을 보장하면서도 기업 내에서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몫을 제공해 주겠다는 목적에서 매우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이들은 남북 4,600km에 달하는 칠레의 국토 전체에 흩어져 있는 생산 설비와 통신을 하고 생산을 조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방대한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영어권에서는 사이버신(Cybersyn), 칠레에서는 신코(Synco, Sinco, Cinco)라고 불렸다. 이 시스템은 1972년 8월 CIA의 지원에 따른 50,000명의 트럭 운전자들의 파업으로 산티아고의 물류가 봉쇄되었을 때 활약하였다. 아옌데 정권은 사이버신의 텔렉스 장치를 써서 정부에 협조하는 200대의 트럭을 동원하여 산티아고 시내로 음식을 운반할 수 있었고 이 파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렇게 초보적이나마 행정의 전산화가 실현되는 데 성공했다. 다만 속도가 느리다는 문제점은 기술진들도 인지는 하고 있어서 최신형 컴퓨터를 통해 업그레이드할 계획도 있었지만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쿠데타 이후 컴퓨터와 기기들은 쓸모없다면서 철거되었고 그대로 사이버신 게획은 끝났다.[1] 인터넷으로 동영상을 보는 것이 당연한 21세기 기준에서는 1초에 한줄씩 정보가 내려오는 수준의 그야말로 초보적인 시스템이고 후술할 혹평도 이를 반영한 것이지만 당대에는 SF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시스템이 현실화된 사례였기 때문에 이 시스템이 꽤나 흥미거리였다. 다만 스페포드 비어는 이후에도 중남미에서 계속 일했지만 이와 비슷한 네트워크 시스템을 다시 만들지는 못했다. 사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의 시점으로 본다면 비슷한 시기에 속도가 더욱 업그레이드된 미니텔이나 PC통신이 나와 버린지라 만들 기회가 없어지기도 했고 중남미 국가들이 외채위기에 직면하면서 방대한 시스템을 연결하기에 벅차기도 했다.

이 시스템을 운용했을 때 해상 시스템을 운용하는 사무실에 튤립 의자를 놓았는데 튤립 의자가 SF영화에 자주 사용되었던 물품이라서 당시 기준에서 미래적인 분위기를 냈다고 한다. 디자이너들의 말에 의하면 SF영화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과연...

3. 사이버신 시스템의 구성

사이버신은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시너지(synergy)의 합성어다.

"사이버넷"(Cybernet), "사이버라이드"(Cyberstride) "체코"(Checo), "본부 룸"(Opsroom)의 4가지 프로젝트로 되어 있었다.

3.1. 사이버넷(Cybernet)

칠레의 생산 거점을 연결하는 텔렉스를 이용한 네트워크. 빠른 실시간 제어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으나 당대 기술력의 한계로[2] 매일 오후 5시에 한 번 정보를 보내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그 정보도 원재료, 생산량, 결근 자수 같은 일부 수치에 불과했다.

3.2. 체코

경제 모델에 따라서 전체 경제의 장래를 예측하는 시뮬레이터 시스템. 체코라는 이름은 국가명이 아닌 칠레 경제(CHilian ECOnomy)에서 따 왔다.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얻을 수 없었던 문제도 있어서 시험시의 성적은 좋지 않았다. 다만 이러한 문제점은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 컴퓨터는 업그레이드했는데 이러한 시스템이 제대로 활용되기 전에 파괴되었다.

4. 평가

이상은 대단했지만 당대 기술력의 한계로 현실은 시궁창이다.

경제 전체를 컴퓨터로 분석해서 관리하고 예측하는 것은 21세기에도 빅 데이터 프로세싱의 활용 방안 중 하나이며 수많은 전문가가 컴퓨터와 함께 달라붙어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당시 칠레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컴퓨터가 거의 없어서 단 1대의 IBM 360/50 메인프레임이 사실상 시스템의 거의 전부였다. 흔히 사이버신은 거대한 컴퓨터실을 배경으로 대단히 미래지향적인 시스템으로 소개되었지만, IMB System 360/50은 1964년에 판매된 컴퓨터로 1971년의 기준으로도 이미 구식이었다. 원래 계획했던 실시간 제어를 실현하기 위해 요구되는 계산량을 달성할 수 없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덕분에 경제 전체의 장래를 시뮬레이션으로 분석한다는 사이버신에서 실제로 수행한 것은 단순한 수준의 베이지안 필터링 정도에 불과했다. 컴파일러도, 고급 언어도, 심지어 텍스트 에디터도 없이 천공카드로 기계어 프로그래밍을 해야 하는 시대에는 그 정도도 대단한 첨단기술을 지향한 셈이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사이버신 계획을 떠받친 것은 이전 정권에서 구입해 놓은 500대의 텔렉스 머신으로, 이를 각지의 공장, 광산에 한 대씩 배치하고 일일 생산량을 중앙에 보고하는 정도였다. 물론 이러한 보고는 컴퓨터로 분석되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사이버신은 사실상 90년대에 삐삐를 이용해 문자메시지로 보고하는 수준도 되지 못했다.

이러한 수준의 시스템에 의존해서 칠레 전체의 경제를 중앙에서 아옌데 본인이 직접 관리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모한 발상이었다. 현장 관리자들은 문자메시지만 받는 아옌데에게 사실상 보고하고 싶은 사항만을 보고하면 그만이었고, 칠레 전체에서 보고를 받아야 하는 아옌데는 보고서를 읽어보는 잠깐의 시간 동안 내릴 수 있는 정도의 판단만을 내릴 수 있었다. 이 정도의 네트워크로도 파업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지지자들과 연락을 취하는 용도로는 유효하게 사용할 수 있었지만, 정작 일상적인 상황에서 경제를 관리하는 업무에서는 큰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좌파 일각에서는 중앙집권에서 탈피해 신경망을 모델로한 평등하고 분권적인 민주적 시스템이라는 이유로 사이버신에 하앍거리는 케이스도 없지 않으나 이것은 이념과잉의 분석일 것이다.# 좌파 일각의 주장과는 달리 사이버신 계획은 실제 신경망이 그렇듯이 중앙집권적인 시스템이었다. 모든 정보는 중앙에 있는 아옌데의 컴퓨터에 흘러들어가고 아옌데의 결정이 모든 단말로 되돌아가도록 설계되어 있었지, 단말 간의 횡적인 정보 교환 같은 것은 사이버신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단지 문제가 해결되었는지를 확인하는 몇 단계의 피드백 구조 정도만이 있었을 뿐이다. 즉 사이버신 시스템에 결정권을 단말로 이양하기 위한 구조는 없었고, 시스템에 그러한 변화를 계획했던 흔적 역시 발견되지 않는다. 중앙에서 독점하는 메인프레임과 각 단말에 나누어준 텔렉스 머신으로 이루어진 시스템이 '분권적'이기는 매우 어렵다. 메인프레임의 역할은 현대의 기준으로 빅 데이터 프로세싱에 가까운데 빅 데이터 프로세싱 역시 사용자에게 권한을 나눠주는 분권적인 활용 분야가 아니다. 아옌데가 추구한 경제체제는 중앙에서 전체를 관리-감독하는 계획경제였지 각 단말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방식이 아니었다. 중앙의 결정권을 단말로 이양하는 '평등하고 분권적인'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분권적인 네트워크 모델이 주목을 받은 것은 PC가 보급되기 시작한 80년대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전에는 이러한 시스템을 갖춘 곳이 얼마 되지는 않았으므로 초보적이기는 해도 당대 기준으로는 이것도 매우 혁신적인 시스템이었다. 미국에서 알파넷이 등장했기는 했지만 등장한지 2년밖에 되지 않았던 데다 소련에는 오가스 계획이 있었지만 이건 실현조차 되지도 못했다.

2015년에 알리바바 그룹마윈 회장이 사이버신 계획과 유사하게 빅데이터 기술을 활용하여 계획경제가 시장경제를 능가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중국공산당 당원으로서 중국 공산당의 입장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실제 가능성이 있는지, 그리고 이 전망이 사이버신 계획과 연관성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 당시에도 SF영화를 통해 컴퓨터가 미래의 최신 첨단기술로 홍보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1973년 시점에는 미국에서조차 컴퓨터가 보편화되지 않아 일부 연구소와 행정 및 연락, 연구에나 쓰던 수준이었는데 피노체트와 그 수하 입장에서는 컴퓨터를 새로 배우는 것도 머리가 굳었으니 굳이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듯하다. 물론 나중에서야 행정전산화라며 컴퓨터를 설치하기는 했지만 말이다.[2] 당시 모뎀 속도라고 해 봐야 300bps에 불과했으니 차라리 전화로 직접 얘기하는 것이 훨씬 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