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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의 고백

생사의 고백 (1970)
L'Aveu (프랑스어)
The Confession (영어)
파일:L'Aveu(1970)_poster.webp
장르 정치 스릴러
감독 코스타 가브라스
각본 호르헤 셈프룬(Jorge Semprún)
원작 L'Aveu(1968)
아르투르 론돈(Artur London) 지음
제작 로베르 도르프망(Robert Dorfmann)[1]
베르트랑 자발(Bertrand Javal)
출연 이브 몽땅, 시몬 시뇨레
음악 죠반니 푸스코(Giovanni Fusco)
개봉일 파일:프랑스 국기.svg 1970년 4월 29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71년 10월 22일
상영 시간 139분

1. 개요2. 줄거리3. 역사적 배경
3.1. 노엘 필드3.2. 아르투르 론돈3.3. 슬란스키 재판
4. 평가5.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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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0년에 개봉한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 이브 몽땅 주연의 프랑스 영화이다. 이브 몽땅의 실제 아내인 시몬 시뇨레가 주인공 "아르투르 루드비크(Artur Ludvik)"의 아내 "리즈(Lise)"를 연기했다. 1952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정권에서 이루어진 간첩 조작 사건인 슬란스키 재판을 다룬다.

슬란스키 재판의 피고 중 한명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스탈린이 사망한 후 복권되어 프랑스로 망명한 아르투르 론돈(Artur London)이 1968년에 출간한 동명 회고록 <고백(L'Aveu)>을 원작으로 했다. 영화 주인공의 이름이 아르투르 루드비크로 성이 바뀐 것만 빼면, 다른 인물들은 모두 실명으로 나온다.

원작 회고록의 유명세에 힘입어서, 개봉한 해에 프랑스에서 관객 214만 명으로 흥행순위 15위를 차지해서 크게 성공했다(출처). 상업적인 성과뿐 아니라, 스탈린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으로 프랑스 내에서 정치적으로 거센 논쟁을 일으켰다. 특히 개봉한 시기가 프랑스 공산당이 지나친 친소련 성향으로 비난받으며 지지를 잃어가던 때와 맞물려서, 영화를 둘러싸고 찬반 양론이 격하게 대립했다. 같은 감독의 전작인 <Z(1969)>가 우파에서 비난받은데 반해, 이 영화는 좌파, 정확히는 친소련 좌파들에게 큰 비난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프랑스 개봉 다음 해인 1971년에 수입되어 반공영화로 개봉했다. 코스타 가브라스의 영화들 중 한국에 가장 일찍 소개된 작품이다. 하지만 불과 1,2년 차이로 만들어진 그의 다른 작품들인 <Z(1969)>와 <계엄령(1972)>은 20여 년이 지난 1989년과 1993년에야 한국에서 개봉할 수 있었다.

2. 줄거리

1951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외무부 차관인 아르투르[2]는 며칠 전부터 자신이 감시, 미행당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아르투르는 외무부 동료인 바우로 하이두(Vavro Hajdů)[3]로부터 자신이 업무에서도 배제된 것을 알게 된다. 아르투르는 자신 뿐 아니라 스페인 내전 기간에 국제여단으로 참전해서 함께 싸웠던 친구들이 모두 감시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깊은 불안에 빠진다.

국제여단 전우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르투르는 국가안전국(체코어: Státní bezpečnost, StB)[4] 국장인 친구 자보드스키(Osvald Závodský)[5]에게 자신을 감시하는 이유를 따지지만, 자보드스키도 아는 게 없는 듯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아르투르는 2년 전 프라하에서 스파이 혐의로 체포된 미국인 노엘 필드(Noel Field)를 떠올리고, 자신에 대한 감시가 노엘 필드와의 관계를 의심받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아르투르의 부탁으로 친구인 당 간부 베드르지흐 게민데르(Bedřich Geminder)[6]는 당 서기장인 루돌프 슬란스키(Rudolf Slánský)[7]와 직접 통화한 다음, 당은 노엘 필드와의 관계를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며 아르투르를 안심시킨다. 그러나 감시는 계속 이어진다.

국제여단 전우들 중 일부는 당을 신뢰해야 한다며 곧 오해가 풀릴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이미 감옥에 간 오토 슐링(Otto Šling)[8]을 거론하며, 2년 전 헝가리에서 있었던 간첩 조작 사건인 러이크 라슬로(Rajk László) 재판[9]이 체코에서도 재현되리라 예상하고 체념한 듯 비관한다. 친구들은 아르투르에게 국가안보부 차관인 카렐 슈바프(Karel Šváb)[10]를 만나보라고 충고하고, 보안국장 자보드스키가 직접 상관인 슈바프에게 전화를 해서 다음날 아침 아르투르와 만나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헤어지는 자리에서 자보드스키는 아르투르에게 배신과 죽음은 혁명과 불가분의 관계이며, 우리가 파멸하더라도 혁명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다음날 아침, 아르투르는 출근길에 아무 설명 없이 납치되듯 연행되어 눈이 가려진채 감옥으로 끌려간다. 그는 죄수복으로 갈아입혀진 후, 거의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수면 박탈 상태로 계속 독방에서 앞뒤로 걷는 고문을 받는다. 아르투르의 집에도 요원들이 들이닥쳐 마구잡이로 집을 뒤진다. 그의 프랑스인 아내인 리즈는 수색영장을 요구하고 당 중앙위원회에 고발하겠다며 반발하지만 이들은 리즈의 말을 무시한다. 리즈는 남편과 자신이 2차대전이 터지자 프랑스 레지스탕스로 함께 싸웠던 과거와, 나치 수용소에서 첫 아들을 낳은 경험을 이들에게 자랑스레 이야기한다. 그러나 요원들은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고 집에 있던 개인 서류들을 모두 압수해간다.

리즈는 이튿날 곧바로 장관을 찾아가 남편의 행방을 묻는다. 아르투르는 체포된 것이 아니라 단지 보안이 필요한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격리된 것이라는 장관의 답변을 듣고 리즈는 안심한다. 그 사이 아르투르는 심문관들 앞으로 끌려가 다짜고짜 자백하라는 말을 듣는다. 아르투르는 무엇을 자백해야하는지 알지도 못한 상태로 심문에 저항해보지만 집요한 고문만이 돌아온다. 이 장면에서 처음으로, 훗날 이 시기를 회상하는 아르투르의 독백이 깔린다. 회상 속에서 그는 이전까지 당과 소련은 무오류의 존재라고 교육받고 "혼자 옳은 것보다 당과 함께 오류를 저지르는게 낫다"고 믿었던 자기 자신을 수치스럽게 고백한다.

며칠 뒤 다시 심문관 앞에 끌려나온 아르투르는 자신이 미국 스파이 노엘 필드에게 포섭되어 미국을 위해 간첩 활동을 한 혐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다. 그는 터무니없는 누명에 결백을 주장하지만, 자신에게 남은 선택지는 "진실"을 고백하고 참회하던가 당과 소련의 적으로 죽던가, 둘 중 하나뿐이라는 대답을 듣는다. 세번째로 끌려나온 자리에서 심문관은 그의 유대인 혈통을 언급하며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자신들이 완수하겠다고 조롱한다. 아르투르는 당의 이름으로 인종 학살을 입에 담는 심문관에게 무력하게 분노하지만, 자신 뿐 아니라 자보드스키도 체포되어 당원 자격을 박탈당했고, 자보드스키가 이미 아르투르의 죄상까지 모두 자백했다는 말을 듣고 말문이 막힌다.

심문이 이어지면서 아르투르에게 씌워진 죄상이 점점 자세해진다. 아르투르는 일찌기 스페인 국제여단 시절부터 트로츠키주의자 그룹을 이끌면서 티토주의자와도 친하게 지냈으며, 체코 정부 고위직에 오른 후 국제여단 인맥을 이용해서 미국 스파이 조직을 만들었다는 혐의를 받는다. 아르투르는 불과 한두해 전, 헝가리에서 자신과 같은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던 러이크 라슬로를 당 회의에서 열렬히 규탄하던 자신의 모습을 쓰라리게 회상한다.

고문과 세뇌가 이어지면서 아르투르는 점차 체념하고 심문에 순응해간다. 그는 심문관에 불러주는 대로 써내려간 진술서에 서명하고 잠깐의 수면을 허락받는 식으로, 점점 "고백"을 시작한다. 심문이 계속되던 어느 날, 아르투르는 심문관이 조는 틈에 잠깐 쉬다가 들켜 밖으로 끌려나와 목에 밧줄이 걸린다. 그는 자신이 목매달리고, 아내에게는 그가 죄책감에 자살했다는 거짓 설명이 전해지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나 밧줄이 다시 풀리고 아르투르는 목숨을 건진다. 심문관은 소련 고문단이 아르투르를 살려둔 채로 재판받게 하기를 원한다고 알려준다. 소련이라는 말을 들은 아르투르는 외교부 차관 시절에 사실상 비밀경찰인 소련 고문단에게 외교관 자격을 주는 문제로 동료와 논쟁하던 일을 회상한다.

소련 고문단이 원하는 보여주기 재판을 위해, 아르투르에 대한 심문이 새롭게 다시 시작된다. 그에 대한 혐의는 스페인 내전보다도 더 이전인 모스크바 코민테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코민테른 청년단 소속이던 아르투르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것도, 트로츠키주의자인 것이 탄로나는 것을 피하기 위한 도피로 둔갑한다. 아르투르는 당시 모스크바에서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갑자기 사라진 친구 바그너(Wagner)를 회상하며, 그가 애타는 목소리로 "스탈린 동지는 이 일을 모르는게 분명하다"며 헛된 믿음을 버리지 않던 모습을 떠올린다. 같이 체포된 친구들의 조작된 증언을 손에 들고 좋아하는 심문관들을 보며, 아르투르는 독백으로 "인간은 죄를 범했기 때문이 아니라, 죄를 범했다고 믿어지기 때문에 유죄다"라는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의 한 구절을 떠올리고 전율한다.

심문관들은 소련 고문관의 요구대로 트로츠키주의자 간첩 조직을 꾸며내기 위해 아르투르를 몰아붙인다. 체포되고 3주 동안 수면 박탈 상태로 심문 받던 아르투르는 환각 속에서 과거 무고하게 간첩으로 몰린 동료들을 보며, 자신 역시 한때 가해자였음을 깨닫는다. 인간은 가장 소중한 자본이며 곤경에 빠진 인간은 반드시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스탈린의 어록을 떠올리면서 그는 스탈린에 대한 환상을 믿던 과거의 자신을 관조한다. 환각을 보던 아르투르는 결국 쓰러져 기절한다. 그를 깨우려고 끼얹은 물이 해변의 파도로 오버랩되면서, 장면은 훗날 프랑스로 망명해서 슬란스키 재판 당시를 회상하는 아르투르에게로 넘어간다.

1965년, 아르투르는 몬테 카를로 해변에서 휴양하며 프랑스인들에게 자신이 겪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프랑스인 중 한 명은 그가 겪은 일을 책으로 낼 것을 제안하지만, 아르투르는 아직 때가 이르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는 자기 자신이 그랬듯, 체코의 공산주의자들도 간첩으로 몰렸던 자기 말을 믿지 않으리라 예상한다. 그는 자기가 1952년 슬란스키 재판을 받을 때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이 소련의 선전을 맹목적으로 믿고 자신을 배신자로 매도했던 것을 냉소적으로 지적한다. 아르투르는 간첩 조작 사건의 직접적인 동기가 동유럽 국가들을 지배하려는 소련과 스탈린의 야욕에 있었다고 분석하고, 위성국가들에 파견된 소련 고문단이 무소불위의 공안권력으로 국가와 당 위에 군림하던 실태를 상기한다.

장면은 다시 1951년으로 돌아간다. 아르투르는 한 달여 만에 일반 감옥으로 옮겨져 약간 나아진 대우를 받지만, 여전히 무죄를 주장하는 그에게 심문관들은 계속 가혹한 심문을 이어간다. 심문관은 아르투르 앞에서 아내인 리즈가 충성스런 당원답게 그와 부부의 연을 끊었고, 그녀가 실은 체포된 이들 중 한 명과 불륜 사이였다며 그를 조롱한다. 아내를 모욕당한 분노에 아르투르는 이 때 처음으로 심문관에게 달려들지만 간단히 제압된다. 한 편 백방으로 남편의 행방을 찾던 리즈는 전에 아르투르의 안전을 장담했던 장관을 다시 찾아가지만, 장관은 리즈를 협박하며 가족들과 프랑스로 돌아갈 것을 강권한다. 리즈는 이를 거절하고, 결국 일하던 라디오 방송국에서 쫒겨나 공장에 일자리를 구한다. 원래 살던 3층짜리 집도 빼앗겨서 가족은 허름한 아파트로 이사한다. 리즈는 전차 안에서 우연히 아는 사이인 당 기관지 편집장인 안드레 시모네(André Simone)[11]를 만난다. 시모네는 당 서기장인 슬란스키가 체포되었음을 알려주고, 먼저 억울하게 잡혀들어간 사람들은 금방 풀려날 거라며 리즈를 위로한다. 그러나 곧 아르투르의 회상을 통해 시모네 역시 훗날 체포, 처형되었음을 보여준다.

체포된지 6개월 째가 되자, 5개월이면 심문을 끝낼 수 있다고 자신하던 전 심문관 스몰라(Smola)가 물러나고, 아르투르는 새로운 심문관인 코우텍(Kohoutek)에게 넘겨진다. 코우텍은 전임자와는 대조적으로, 서두르지 않고 친절한 태도와 고문을 병행하면서 아르투르를 굴복시켜간다. 이 부분에서 아르투르는 독백을 통해, 코우텍이 원래 체코 공산정권이 들어서기 전에는 공산주의자들을 잡아들이던 반공 경찰이었음을 관객에게 알려준다. 코우텍은 진술을 단순한 사실들로 한 문장씩 잘개 쪼개어 서명을 받는 특이한 방식으로 아르투르의 "고백"을 이끌어내고, 이렇게 잘게 쪼개진 사실들을 의도대로 재조합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진술서를 천천히 완성시켜간다. 그 결과 아르투르는 미국 스파이 노엘 필드에게 돈을 받고 간첩 활동을 수행한 범죄자임이 "입증"된다. 이 과정에서 아르투르는 당 서기장이었던 슬란스키도 체포되었고, 그가 영국 스파이 코니 질리아커스(Konni Zilliacus)[12]와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음을 처음 알게 된다.

1952년으로 해가 바뀌고, 체포된지 11개월이 된 아르투르에게는 계속 새로운 죄목이 추가된다. 아르투르는 독일 점령시절 체코 공산당을 게슈타포에게 밀고해서 대독일 투쟁 영웅이던 율리우스 푸치크[13]를 죽게 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당시 체코에 있지도 않았던 아르투르는 이 새로운 혐의에 기가 막혀 한다. 그러나 심문관은 국제여단 일원이던 야로슬라프 클레칸(Jaroslav Klecan)[14]이 아르투르로부터 간첩 임무를 받고 체코로 돌아와 율리우스 푸치크를 밀고했다고 우긴다. 그러나 이 때 코우텍이 끼어들어, 베드르지흐 레이친(Bedřich Reicin)[15]이 이미 그 건에 대해 자백했다면서 다른 건으로 넘어갈 것을 지시한다. 또한 아르투르에게는 어려서부터 공산주의가 아닌 아나키즘을 추종했다는 죄목이 붇는다. 여기서 스페인 공산당 지도자인 돌로레스 이바루리[16]와 스페인의 아나코-생디칼리즘 투쟁 영웅인 부에나벤투라 두루티의 이름이 언급된다. 아르투르는 이러한 고발을 모두 부정하지만, 코우텍은 재판에 쓰이지 않는 형식적인 진술일 뿐이라고 구슬리며 아르투르가 진술서에 서명하게 한다. 그 다음은 스페인 내전 당시 함께 싸운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들을 언급하며 그에게 티토주의자라는 죄목이 씌워진다. 아르투르는 그 시절은 티토스탈린과 갈라서기 전이라고 항변하지만, 심문관은 "변증법적 원리"에 따라 과거의 죄는 현재의 기준에 의해 정해진다고 답한다. 이렇게 짜깁기로 완성된 조서의 내용에 아르투르는 저항해보지만, 코우텍은 조서는 당이 승인한 진실이며, 당에 순응하는 자아비판이 공산주의자의 첫째 덕목이라는 궤변으로 아르투르의 말문을 막는다. 마지막으로, 코우텍은 조서의 "유대인"이라는 표현이 금지되었다면서, 유대인을 시오니스트로 고쳐, 단순한 민족 표기를 유대인 반공 민족주의자라는 새로운 죄목으로 뒤바꾸어놓는다.

장면은 다시 1965년으로 옮겨진다. 아르투르는 자신의 "한 살짜리 트로츠키주의자 아들"을 언급한 진술서에 서명한 일화를 언급하며, 희극적일만큼 허위로 뒤틀린 심문 과정과, 그 과정에서 실패한 두 번의 자살시도를 회상한다. 하지만 그런 일들을 겪었음에도 자신은 여전히 공산주의자라고 힘주어 말한다. 화제는 슬란스키 재판의 도화선이 된 노엘 필드에게 옮겨간다. 필드가 실제로 미국 스파이었는지, 소련 스파이였는지를 묻는 프랑스인에게, 아르투르는 필드 본인의 회고록을 기다리라며 쓴웃음으로 슬쩍 답변을 피한다.[17]

1952년 10월, 체포 20개월 째가 된 아르투르는 다음 달에 열릴 재판을 위해 진술 내용을 모두 암기할 것을 지시받는다. 예비 심문이 열린 자리에 끌려간 아르투르는 자신의 체포를 처음 지시, 실행했고, 지금은 "공범자"로 죄수 신세가 된 이들—서기장 슬란스키와 국가안보부 차관 슈바프—을 그 자리에서 처음 대면한다. 슬란스키[18]가 단조롭게 자신의 "죄상"을 고백하는 모습 위로, 아르투르의 독백을 통해 그가 심문 과정 중 자살 시도를 했다가 실패했음을 알려준다. 아르투르는 자기 차례 앞에서 날조된 자백을 철회할지를 잠시 갈등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죽임을 당하기보다 살아서 재판에 서는 것을 택하고, 암기한 내용을 읊는다.

대중에게 공개될 재판을 앞두고, 아르투르는 더 나은 식사를 제공받고, 영양제 주사를 맞으며, 창백해진 피부를 감추기 위해 선탠까지 한다. 연출된 재판을 위해 형식적으로 변호사가 지정되지만, 변호사는 단지 사형을 피하기 위해 재판에 협조하라는 조언만을 한다. 증언 내용을 암기하며 재판을 준비하는 중에도, 아르투르에게는 당의 권위와 가족의 안위를 위해 재판에서 주어진 역할을 다하라는 협박과 회유가 이어진다. 재판 전날 밤, 아르투르는 감방에서 아내가 보내준 정장과 구두를 앞에 두고 회한에 젖는다. 그의 기억 속에 사코와 반제티 재판에 항의하는 프랑스 군중들의 시위 모습과, 1945년 소련 전승기념식에서 소련 병사들이 나치 깃발들을 땅에 내던지는 모습이 지나간다.

1952년 11월 20일, 라디오로 방송되는 며칠 간의 공개 재판이 시작된다. 아르투르는 회상을 통해 재판에서 처형된 11명의 화장된 재가 얼어붙은 도로 위에 아무렇게나 뿌려지는 장면을 보여주며 재판의 결과를 미리 알려준다. 아르투르를 포함한 14명의 피고들은 재판정에 불려나오고, 검사는 이들을 국가 반역을 모의한 서방 스파이, 티토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시오니스트로 고발한다. 휴정 시간에 피고들을 찾아온 심문관들은 사형이 언도되더라도 형식적인 것으로, 실제로는 집행되지 않는다는 거짓말로 안심시킨다. 이들은 암기해둔 각본에서 벗어나 돌발상황을 일으킬 경우 목숨으로 댓가를 치른다는 협박을 받는다. 아르투르가 증언대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동안, 리즈는 집에서 라디오로 그 내용은 듣고 절망한다. 리즈는 남편의 죄를 확신하고, 원래 친분이 있던 당시 체코 대통령 클레멘트 고트발트에게 남편을 반역자로 비난하고 처벌을 탄원하는 편지를 쓴다. 이 편지 내용은 다음날 라디오로 그대로 방송된다. 재판에는 율리우스 푸치크의 아내도 증인으로 나와, 남편을 게슈타포에게 "밀고"해서 죽게 한 피고들을 비난하고 남편이 남긴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청중을 선동한다. 피고 중 한 명인 오토 슐링(Otto Šling)이 증언대에서 증언하던 중 갑자기 바지가 내려가 속옷이 보이는 촌극이 벌어진다. 방청객은 물론 피고들까지 이 코미디에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댄다. 하지만 휴정시간이 되자 슐링에게는 법정을 모독한 죄로 사형에 처해질거라는 냉혹한 선언이 내려진다. 재판 결과, 피고 14명 중 11명에게 사형, 3명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된다. 항소할 경우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변호사들의 협박에, 실제 사형이 집행되지는 않는다는 거짓말을 믿는 피고들은 모두 유죄를 인정하고 선고를 받아들인다.

1965년, 몬테 카를로 해변의 아르투르는 재판 이후의 일들을 회상한다. 재판 이듬해인 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배리야 역시 숙청된 후, 동유럽 국가들의 간첩 조작 사건들이 재조사된다. 아르투르 자신은 56년에 석방되어 63년 복권된다. 아르투르를 심문하던 코우텍은 체포되지만, 불과 2년 후 사면된다. 아르투르는 58년 코우텍과 거리에서 마주친 일을 떠올린다. 코우텍은 자신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마치 아르투르와 자신이 동변상련의 신세인듯 친근하게 굴면서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당신은 이해가 되시오?"라고 묻지만, 아르투르는 말 없이 그에게 등을 돌린다.

1968년, 아르투르와 리즈는 체코에서 겪었던 일을 적은 회고록을 함께 완성한다. 처음 아르투르에게 회고록 집필 이야기를 꺼냈던 프랑스인은 정작 완성된 원고를 읽고 "이걸 정말 출판할 생각이오?"라며 공산당에 대한 여론이 악화될 것을 경계한다. 그러나 아르투르는 체코슬로바키아 작가 연맹의 이름으로 고국에서 책이 출판될 예정이라고 밝게 대답한다. 아르투르는 프라하의 봄으로 당이 변화하면서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기대하며, 회고록 원고를 들고 비행기에 오른다. 그러나 프라하에 도착한 그날, 아르투르는 조국이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군대에 침공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희망의 불씨는 꺼진다. 영화는 마지막으로 소련 침공에 저항하는 시위대가 벽에 쓴 낙서를 비춘다. "레닌, 일어나라, 그들이 미쳤다! (체코어: Lenine, probuď se, oni se zbláznil!)"

3. 역사적 배경

3.1. 노엘 필드

영화에서 여러차례 이름이 언급되는 노엘 필드(Noel Field, 1904-1970)는 미국과 소련 양쪽에서 모두 적국 스파이로 지목됐던 논쟁적 인물이다. 노엘 필드는 영국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국무부에서 외교관 경력을 시작했다. 일찍부터 공산주의에 흥미를 가졌던 필드는 소련 NKVD 요원에 포섭되어 1935년 경부터 소련 첩보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필드는 1936년 국제 연맹에 파견되어 미국을 떠나 스위스로 건너간다. 유럽에 자리잡은 필드는 스페인 내전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공화파, 특히 국제여단을 위한 구호활동을 펼친다. 영화에서 언급된대로, 이 시기 필드는 국제여단에 참여한 공산주의 계열 의용병들에게 의료비를 지원하거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우면서 인연을 맺는다. 39년 2차 대전이 발발하자 필드는 국제 연맹을 사임하고 유니테리언 유니버설리즘 협회의 구호조직에 가담해서 스위스를 거점으로 유대인 난민들의 이주를 돕고, 의료단을 조직하는 인도적 활동을 한다. 스페인 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 때에도 필드는 반나치 활동을 하는 공산주의자들을 원조하면서 인맥을 만든다. 필드는 이 인맥을 통해 당시 미국 전략사무국(OSS)과 공산주의 계열 레지스탕스 사이의 연락을 중개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미국에서 열린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서 자신의 이름이 소련 스파이로 거론되자, 1949년 필드는 스위스를 떠나 체코 프라하로 망명한다.

프라하로 건너간 필드는 곧바로 라브렌티 베리야의 지시로 1949년 5월 체포되어 헝가리에 넘겨진다. 그리고 그의 행방을 찾아 프라하로 온 아내와 동생까지 줄줄이 억류되어 감옥에 갇힌다. 필드는 헝가리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고 자신이 러이크 라슬로를 미국 스파이로 포섭했다는 거짓 자백을 한다. 이것을 빌미로 열린 재판에서 러이크는 사형을 언도받고 49년 10월 처형된다. 그 후에도 필드는 재판도 없이 계속 억류되어 52년 슬란스키 재판에서 피고들의 간첩죄를 날조하는 데에도 동원된다. 필드는 54년 마침내 아내와 동생과 함께 석방되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동생과 달리 필드는 아내와 함께 부다페스트에 정착한다. 이런 일을 겪었음에도, 영화 주인공인 아르투르처럼 노엘 필드도 죽을 때까지 확고한 공산주의자로 살았다.

소련의 관점에서 필드는 간첩 사건 조작을 위한 이상적인 장기말이었다. 국무부에서 근무한 경력 때문에 미국 전략사무국(OSS)의 스위스 지부장으로 훗날 CIA 국장을 역임하는 앨런 덜레스(Allen Dulles)와 공적, 사적으로 직접 연결되어있었고, 스페인 내전과 2차 대전 중의 구호 활동 덕에 동유럽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발이 넓었기 때문이다. 냉전 초기 동유럽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려던 소련은 이런 필드의 경력에 주목하고 그를 미국 첩자로 몰아 다수의 간첩 사건을 날조해냈다. 필드 본인은 공산당 첩자로서의 활동 만큼이나 인도주의 활동에도 헌신했던 인물이지만, 나치즘에 맞서 힘을 합치던 미국과 소련이 냉전의 극한 대립에 돌입하면서 양 진영에서 버림 받고 자신의 가족까지 고초를 겪게 된다.

3.2. 아르투르 론돈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행적은 실제 아르투르 론돈(Artur London, 1915-1986)의 삶과 동일하다. 하지만 론돈이 스페인 내전 당시 의용병으로 싸운게 아니라 정치경찰이었다는 사실은 영화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론돈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체코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공산주의를 접한다. 19살이던 1934년에 체코를 떠나 모스크바코민테른 청년단에서 일하면서 프랑스인 공산주의자인 엘리자베스 리콜(Elizabeth Ricol, 1916-2012, 리즈Lise는 애칭이다)을 만나 결혼한다. 1938년에 론돈은 아내와 함께 내전 중인 스페인으로 건너가 국제여단에 합류했다. 론돈은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고, NKVD 산하 조직인 군사정보부(스페인어: Servicio de Información Militar)에 속해서 공화파 내의 국민파 첩자들을 색출하는 일을 했다. 스페인 내전프랑코 정권의 승리로 끝난 후, 론돈과 리즈는 프랑스로 넘어간다. 부부는 2차 대전 중 나치에 저항하는 공산주의 계열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지만 42년 둘 다 체포되어 수용소로 끌려간다. 영화에서 설명한 것처럼 체포됐을 때 리즈는 첫 아이를 임신한 상태라서 처형을 면했다. 론돈의 부모 형제들은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그는 살아남아 종전을 맞는다. 이후 그는 프라하로 돌아와 체코 공산당과 정부의 요직을 거쳐 1949년 외무부 차관에 임명된다.

슬란스키 재판 당시 리즈는 영화처럼 실제로 남편의 유죄를 확신하고 이혼을 요구했다. 그러나 1953년 감옥에서 론돈을 만나 진실을 알게 된 후 이를 철회했다. 론돈은 1963년 복권되고 같은 해에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프랑스로 이주한다. 프랑스에서 부부는 함께 스페인 내전 시기를 회고한 <스페인(Espagne, 1966)>과 영화로 만들어진 <고백(L'Aveu, 1968)> 등의 회고록을 집필했다. 론돈과 리즈는 모두 죽을 때까지 공산주의를 지지했지만, 공산당과는 인연을 끊었다.

영화 속에서 아르투르는 심문을 받으며 어린 시절 좌익 사상에 눈을 뜨게 된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는데, 20세기 초 사상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아르투르의 아버지는 1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러시아 포로들을 통해 볼셰비즘을 처음 접한다. 곧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된 그의 아버지는 고향에서 공산당 위원회를 조직하지만,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유대인 공동체에서 추방되고 일자리를 잃는 등 고난을 겪는다. 아르투르는 아버지를 통해 로자 룩셈부르크, 레닌, 크로포트킨, 하인리히 하이네 등을 접하고, 동시대의 좌익 사건들인 스파르타쿠스 봉기(1919), 광저우 봉기(1927), 사코와 반제티 사건(1927)의 영향을 받았다. 아르투르는 1935년 자신과 며느리를 보러 모스크바까지 찾아온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난 기억을 회상한다. 아들까지 공산주의자로 키울만큼 열렬한 당원이었던 아버지가 막상 모스크바의 현실을 접하고 혼란스러워했다는 론돈의 고백은, 마치 그의 삶의 복선처럼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3.3. 슬란스키 재판

2차 대전 종전 후 수립된 체코슬로바키아 제3공화국은 망명 정부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등이 모두 참여한 연립 정부 형태의 제한적인 민주주의 체제였다. 하지만 체코를 위성국화하려던 소련의 지령으로, 클레멘트 고트발트와 그가 이끄는 체코 공산당은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를 일으키고 공산당 1당 독재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을 수립한다. 명분 없는 쿠데타와 강압적인 공산화는 국민들의 거센 저항으로 이어져서, 이 시기 공산당의 통치 기반은 상당히 취약했다. 때문에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내부의 적을 만들어낼 필요가 생겼고, 당시 대통령이던 고트발트는 자신의 친구이자 권력 서열 2위인 체코 공산당 서기장 루돌프 슬란스키를 표적으로 삼는다.

슬란스키 재판 항목에 설명되어있듯, 1952년 벌어진 이 사건은 소련 고문단이 관여한 간첩 조작 사건이라는 점에서 헝가리의 러이크 재판과 성격이 비슷하다. 하지만 처형된 사람들의 숫자가 11명으로 훨씬 많은데, 이는 그만큼 체코슬로바키아 정권의 기반이 약했고, 당과 정부 부처 곳곳에 공포를 확산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형된 사람들도 거기에 맞추어 다양한 부처에서 골라졌다. 또한 이 재판은 공공연히 반유대주의를 드러낸 것으로도 악명이 높은데, 기소된 14명 중 11명이 유대인이었다. 영화도 이 점을 반영해서 유대인인 주인공 앞에서 심문관과 재판부가 노골적인 반유대 정서를 드러내는 장면들이 여러번 나온다.

영화에는 슬란스키 재판과 비슷한 시기에 투옥된 폴란드 공산당 서기장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와 1949년 처형된 불가리아의 트라이코 코스토프(Traicho Kostov)의 이름도 등장하는데, 슬란스키가 자백 중에 이 둘이 자신과 함께 스파이 행위를 했다고 언급한다. 영화에 나온대로 슬란스키는 심문 중에 자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처형된 11명의 화장된 재가 도로 위에 버려진 장면도 사실과 같다. 겨울 빙판길 위에서 차가 안 나가다보니, 멀리 가지 않고 아무렇게나 길에 흩뿌렸다고 한다. 영화에서 여러번 액자에 든 사진으로 나란히 등장하는 스탈린고트발트는 이들이 처형된지 불과 넉 달 후인 53년 3월에 둘 다 사망했다. 죽임을 당한 자들과 권력을 탐해 그들을 죽인 자들이 거의 함께 세상을 뜬 셈이니, 부조리한 역사적 희극의 한토막이라 하겠다.

헝가리의 러이크, 체코의 슬란스키, 폴란드의 고무우카, 불가리아의 코스토브 등등, 내부의 적을 날조해서 소련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공포 정치는 냉전 초기 동유럽 국가들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심지어 스페인 내전에서 패배한 후 조국에서 쫓겨나 망명생활을 하던 스페인 공산당에서도 이런 식의 내부 숙청이 벌어졌다. 이 영화의 각본을 맡은 호르헤 셈프룬은 원래 스페인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다 제명된 인물로, 바로 이 내부 숙청의 책임 문제로 이 시기 당 서기장이던 돌로레스 이바루리를 날 새워 비판했다.

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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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별점 - / 5.0 관람객 별점 4.0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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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 3.7 / 5.0



프랑스에서는 이 영화가 소련을 동경하던 좌파 지식인들의 환상을 깨트려 프랑스 공산당 몰락에 일조한 것으로 평가한다. 정치 논쟁에서 한 발 물러선 미국 평론가들은 대체로 본작이 감독의 전작 <Z(1969)>보다는 덜 다듬어진 영화이지만, 다루고 있는 주제의 성격 상 불가피한 단점이며, 이를 상쇄하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는 평가를 내린다.

실화를 각색하면서도 적절한 생략의 묘를 발휘한 <Z(1969)>와는 대조적으로, 본작에서는 인물들의 실명과 함께 실제 사건을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살려놓았다. 때문에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소의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개봉 시점에서 이미 20여 년 전의 일임에도 이렇게 상세하게 실제 사건을 재구성한 것은, 그만큼 이 사건이 당시 프랑스에서 정치적으로 첨예한 현재진행형의 이슈였음을 보여준다. 두 시간이 넘는 상영시간 동안 고문과 강압에 의한 허위 자백을 세밀하게 묘사하기 때문에 마음 편히 볼 수 있는 영화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68운동 이후 소련식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던 시기를 잘 탄 덕분에, 큰 화제를 일으키며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다. 당시 프랑스 사회가 필요로 하던 메시지를 영화가 시의 적절하게 전달했다고도 볼 수 있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이 영화가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영화가 아니라 스탈린주의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영화라고 설명했다. 이는 끝내 공산주의를 버리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에도 반영되어 있다. 이 영화는 독단적 이데올로기가 전체주의 권력과 결합해서 인간성을 파괴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과정을 고통스러울만큼 자세하게 보여준다. 이 과정을 통해, 처음에는 자연스레 저항하던 피고들은 점차 있지도 않은 일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조작된 재판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된다. 심지어 재판이 끝나고 역할을 완수한 심문관들이 모두 사라지자, 피고들이 마치 부모를 찾는 아이처럼 심문관들을 애타게 부른다. 고문하는 자와 고문받는 자 사이의 기괴한 심리적 의존관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영화는 당 관계자임이 암시되는 한 프랑스인을 통해 프랑스 공산당을 비판하는 짧지만 인상적인 장면들을 보여준다. 이 프랑스인은 슬란스키 재판 당시 다른 믿을 만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소련의 말을 신뢰했다고 아르투르 앞에서 변명하지만, 동석한 다른 프랑스인이 "당신이 말하는 '부르주아 언론'이 그 때도 이미 진실을 보도했었다"고 지적하며 "닫힌 세상에 살며 당을 신처럼 떠받드는" 태도를 신랄하게 비난한다. 게다가 이 공산당 계열 프랑스인은 처음에는 아르투르에게 회고록 집필을 권유하다가, 정작 스탈린 정권의 실체를 폭로하는 원고가 완성되자 출간을 말리는 위선을 보인다.

자신의 영화에서 항상 블랙 코미디를 중요하게 활용하는 코스타 가브라스답게 이 암울한 영화에도 곳곳에 희극적 요소들이 삽입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재판 중에 증언대에 선 피고의 바지가 내려간 해프닝에서, 영화에서 처음으로 웃는 얼굴을 보이는 피고들 위로 이들이 처형되고 화장된 유골이 눈 위에 흩뿌려지는 모습이 오버랩된다. 이 장면은 슬란스키 재판, 나아가서 당시의 공산 정권 자체가 하나의 잔인한 코미디라는 감독의 직설적인 풍자이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당과 이념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 그리고 그것을 철저히 이용하는 비도덕적인 권력이 선명히 대조되는 장면들을 영화 곳곳에 삽입했다. 예를 들어 남편의 행방을 찾으러 온 리즈를 안심시키면서, 장관이 언제든 자신에게 연락하라며 전화기를 가리키는 장면 뒤에 곧바로 아르투르의 집에서 전화기를 압수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안드레 시모네가 리즈에게 당이 곧 모든 실수를 바로잡을 거라며 위로하는 장면 뒤에는 시모네 자신이 교수형 당하는 장면이 무심하게 삽입된다.

하지만 이런 냉소적인 유머만 있는 것은 아니고, 때로는 도저히 웃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장면에서도 뜻밖의 꽁트같은 대목들이 튀어나온다. 고문에 초췌해진 아르투르가 심문 중에 하인리히 하이네를 언급하는데, 하이네가 누군지 모르는 무식한 심문관이 "엔리히 엔(Enrich N)이란 놈이 어쨌다고?"라고 반문하자, 아르투르는 힘없이 "하인리히 하이네..."라고 바로잡아준다. 심문관이 맥주를 곁들인 새참을 먹고 졸다 잠이 들자, 아르투르는 눈치를 보다가 슬쩍 가구에 걸터 쉬면서, 자백하는 척 방안 풍경을 읊조리며 농땡이를 친다("녹색 캐비넷이 있고, 타자기가 있고, 빈 맥주잔과 커피가 있다...."). 그러나 이 모습을 들켜서 하마터면 목이 매달릴 뻔 한다. 이런 웃지 못할 장면들은 무겁고 참혹한 현실을 대중영화로 옮기는 코스타 가브라스의 독창적인 연출 감각을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본작이 70년대 초에 일찌감치 반공영화로 소개된 덕분에 코스타 가브라스의 초기작들 중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흔히 "좌파 감독"으로 알려진 그가, 실은 냉전 시대의 한복판에서 좌우 진영논리를 거부하고 이념 그 자체의 위험성을 직시했음을 알려준다.

5. 이야깃거리

  • 이브 몽땅은 이 영화의 주인공 역을 연기하기 위해 촬양 당시 50대를 바라보던 나이에도 불구하고 15킬로그램이나 감량했다. 고문 받는 장면을 보면 앙상한 갈비뼈가 안쓰러울 만큼 도드라진다. 이브 몽땅은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해서 시위를 유혈진압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는데, 이 영화에는 그 자신이 소련 공산주의에 느낀 환멸이 반영되어 있다. 본작에 출연한 것을 하나의 속죄의 기회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 영화 중간에 심문 조서를 클로즈업하면서 종이에 "2월 4일 화요일"이라는 글자가 찍힌 모습이 잡히는데, 시간적 배경인 1951년의 해당 날짜는 화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이다. 2월 4일이 화요일인 연도는 공교롭게도 영화를 촬영하던 시기인 1969년이다. 제작진이 실수했다고 보는게 가장 명쾌하겠지만, 어쩌면 영화에 묘사되는 상황이 과거가 아닌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다는 숨겨진 메시지일지도.


[1] 한국에는 빠삐용(1973)의 제작자로 잘 알려져 있다.[2] 아내와 친구들 사이에서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시절 사용하던 가명인 제라르(Gérard)로 불린다.[3] 슬란스키 재판에서 무기징역 선고.[4] 체코 공산정권의 비밀 경찰로, KGB의 체코 버전이다.[5] 영화에 묘사된 대로 이 사람도 숙청되어 1954년 스탈린이 사망한지 9개월만에 처형된다. 체코에서는 스탈린 시대의 마지막 희생자로 불린다.[6]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장. 슬란스키 재판을 통해 처형됐다.[7] 슬란스키 재판을 통해 처형됐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슬란스키 재판의 핵심 표적으로, 숙청 전까지 체코 공산정권의 2인자였다.[8] 체코 공산당 브르노(Brno) 지역 위원회 수석 비서. 슬란스키 재판을 통해 처형됐다.[9] 헝가리 내부부 장관과 외무부 장관을 지낸 러이크 라슬로(Rajk László)가 티토주의자이자 미국 간첩으로 몰려 1949년에 처형된 사건. 같은 해에 먼저 체포됐던 미국인 노엘 필드가 고문 끝에 자신이 러이크의 미국 접선책이라고 허위 자백한게 간첩 혐의의 증거로 이용됐다.[10] 슬란스키 재판을 통해 처형됐다.[11] 슬란스키 재판을 통해 처형됐다.[12] 영국 노동당 소속 하원의원이었으나, 지나친 친소련 행적이 문제가 되어 당에서 재명당했다.[13] 원래 언론인으로 체코 공산당에서 활동하다 1943년 게슈타포한테 체포, 고문 끝에 처형되었다. 처형되기 전 밀반출한 그의 감옥 수기가 사후 책으로 출간되어 전후에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체코에서는 독일 점령기의 저항 영웅으로 기려지고 있다.[14] 체코 공산당원으로 스페인 내전에 국제여단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이후, 프랑스에 머물다 체코로 돌아와 율리우스 푸치크와 함께 나치 저항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1943년 푸치크와 함께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처형됐다.[15] 국방부 차관. 슬란스키 재판을 통해 처형됐다.[16] "정열의 꽃(Pasionaria)"이란 별명으로 알려진 스페인 공산당 정치가. 스페인 내전 후 망명생활을 하며 스페인 공산당 서기장으로 재임했다.[17] 노엘 필드는 이 영화가 개봉하고 몇 달 후인 1970년 9월 12일 사망했다.[18] 얼굴은 나오지 않고, 그의 특징인 붉은 머리에 가까운 짙은 금발이 주로 비추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