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9:54:16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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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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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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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Antoine de Saint-Exupéry
본명 앙투안 마리 장바티스트 로제 드 생텍쥐페리[1]
Antoine Marie Jean-Baptiste Roger de Saint-Exupéry
출생 1900년 6월 29일
프랑스 제3공화국 론알프 리옹
사망 1944년 7월 31일 (추정)[2] (향년 44세)
지중해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직업 작가, 조종사
장르 동화, 소설, 희곡
신체 188cm
수상 페미나 상 (1929)
레지옹 도뇌르 훈장 (1930, 39)
아카데미 프랑세즈 문학상 (1939)
내셔널 북 어워드 (1940)
배우자 콩쉬엘로 드 생텍쥐페리 (1931년 결혼)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서명.svg
작위 생텍쥐페리 백작(comte de Saint-Exupéry)
1. 개요2. 일생
2.1. 죽음에 대한 논란2.2. 연보
3. 대표작4. 어록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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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작가이자 공군장교, 귀족[3]이며 어린 왕자의 작가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2. 일생

1900년,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성주였으므로 성(城)에서 자랐다.[4] 어릴 적부터 연극 대본 등을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다. 학교 성적은 좋지 않아서 1917년에 보쉬에 고등학교와 생루이 고등학교에서 해군 사관학교에 지원하였으나 1차 필기에 불합격했다. 그 후 파리에 있는 에콜 데 보자르의 건축학과에 비학위과정 청강생으로 입학했으나 학업보다는 대학가 카페와 센 강변의 한 호텔방을 오가며 백수 생활을 즐겼다.

1921년 4월 프랑스 육군 이등병으로 징집되어 프랑스 육군 제2항공연대 항공정비병으로 근무했다. 1921년 6월에 남불 이스트르에서 자비로 민간항공기 조종훈련을 1시간 20분 동안 받고 민간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1922년 1월 육군 상등병으로 진급과 동시에 군용기 조종 면허장을 취득했다. 1922년 4월 파리에 있는 육군 사관후보생 EOS 과정에 입교, 예비군[5] 소위로 임관했다. 1922년 8월 모로코 카사블랑카에 있는 육군 제37항공연대 배치되었으나, 프랑스 본토 근무를 희망하여 1922년 10월 프랑스 파리 르 부르제에 있는 육군 제34항공연대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6] 1923년 후일 유명 소설가, 시인, 언론인이 된 루이스 드 빌모린과 약혼했다. 이후 항공기 추락사고로 두개골이 골절되어 소위로 의병 전역했다.

프랑스 육군 항공의 선구자인 에두아르 바레스 장군의 권유에 따라 재입대를 할 계획이었지만 약혼녀와 가족들의 반대로 포기하고, 보알롱 타일제조회사의 제품 검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23년 9월 약혼녀와 파혼했다. 1924년 Allier and Creuse 트럭회사의 Saurer 자동차판매 대리점 영업사원으로 이직했으나 1년 6개월간 단지 1대의 트럭을 판매하고 일이 힘들어서 사직했다. 이후 몇몇 산문과 시를 집필하기 시작, 1926년 첫 저서인 <비행사(L'Aviateur)>를 발표하였다. 같은 해 라테코에르 항공사에 취업하여,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지배 하에 있었던 현 모로코카사블랑카와 현 세네갈다카르간의 정기 항공우편 조종사로 근무했다.

이듬해인 1927년에는 야간 항공우편 비행을 시작했으며, 불시착 항공기 수리 업무와 조난 비행사 구조 업무도 함께 병행했다. 같은 해 <남방 우편기(Courrier Sud)>를 집필하여 작가로 데뷔하였고, 3년 뒤인 1930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이를 출간했다. 그해 6월에는 <야간 비행(Vol de Nuit)>를 집필하였다. 이듬해인 1931년 1월에 엔리케 고메스 카리요(Enrique Gómez Carrillo)라는 과테말라인 신문 기자의 미망인 콘수엘로 순신산도발 세세냐(Consuelo Suncín-Sandoval Zeceña)와 결혼하였고, 12월에 <야간 비행>으로 페미나 문학상을 받았다.

1935년 생텍쥐페리는 비행기 엔지니어와 함께 코드롱사(Société des avions Caudron)[7]에 의뢰해서 개인 전용기 'Caudron C.630 Simoun'를 주문하게 된다.[8] 당해 11월 파리 - 사이공 구간의 비행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장거리 비행시합 도중 기체결함으로 리비아 사막에 불시착하여 5일 만에 구조되는 사고가 있었다.[9] 물론 애써 주문한 전용기도 부서졌다. 1938년 과테말라 상공에서 항공기 엔진 폭발로 불시착하여 두개골과 좌측 쇄골이 파열되는 사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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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친한 친구이던 앙리 기요메(Henri Guillaumet)도 남미 횡단 비행기를 몰다가 비행기가 추락했으나 놀랍게도 안데스 산맥 척박 산지에서 엿새 밤낮을 걸어와서 구조되었다.당시 생택쥐페리와 다른 친구들이 손수 비행기를 몰며 닷새 동안 안데스 곳곳을 수색해 찾지 못했는데 결국 기요메는 죽었구나!라고 포기했더니만 다음 날, 당당하게 스스로 걸어서 돌아온 기요메를 보고 다들 기겁했다고 한다. 이 일은 생택쥐페리가 쓴 책 <인간의 대지>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이 일을 다룬 책도 나왔으며 1995년에는 아이맥스 영화 사랑의 날개(Wings of Courage)로도 만들어졌으나 흥행과 평은 참패했다. 영화는 아이맥스 상영영화답게 40분으로 짧은 영화이다. 배급은 소니 픽처스.

이 영화에서도 생택쥐페리가 나오는데 바로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를 연기한 톰 헐스가 맡았다. 여담으로 연인, 에너미 앳 더 게이트으로 알려진 장 자크 아노가 감독했으며 발 킬머도 나왔었다. 앙리 기요메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공군 조종사로 참전, 1940년 이탈리아군에게 격추당해 38세로 전사했다. 기요메의 죽음에 생택쥐페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1939년 2월에 <인간의 대지>를 출판하여 그 해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소설 대상을 수상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인 1939년 9월 3일 예비군 동원령으로 민항기 조종 경력을 인정받아 공군 대위 계급을 부여 받고, 프랑스 공군 제33정찰비행대대 2비행대(Groupe de reconnaissance II/33e escadre de reconnaissance)에 동원 지정되어 공군 정찰기 조종사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10] 1940년 5월 10일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5월 23일 블로흐 174 정찰기로 정찰비행 중 독일 전차부대를 발견한 직후 대공화기에 피격되었으나 무사히 귀환하여 정찰비행 사진을 제공했다. 1940년 6월 2일 이 일로 훈장을 받았다. 1년 뒤인 1940년 <성채(Citadelle)>의 집필을 시작하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때문에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함락되어 다 완성하지 못하고 12월에 미국 망명을 위해 뉴욕으로 출발하였다.[11]

그리하여 1개월 뒤인 1941년 1월 뉴욕에 도착하여 <전시 조종사(Pilote de Guerre)>를 집필하였으며, 2년 뒤인 1943년 4월에 그 유명한 어린 왕자를 출간하였다. 비시 프랑스 정부가 생텍쥐페리를 일방적으로 정부 요직에 임명하고, 자유 프랑스 정부의 샤를 드골 장군은 생택쥐페리를 친독일 인사라고 공개적으로 암시하는 등 정치적인 색깔논쟁에 휘말린 생택쥐페리는 자유 프랑스군에 재입대 하기 위해 5월 4일 프랑스령 알제리에 도착했다. 당시 프랑스 공군은 최신형 미제 항공기 조종사 연령을 만 35세 이하로 제한했는데, 당시 43세였던 그는 연령제한을 8년 초과한 데다, 잦은 추락사고로 인한 부상 후유증으로 비행복을 스스로 입을 수도 없었고, 왼쪽으로는 고개를 돌릴 수도 없어서 후방의 적항공기를 확인할 수 없을 지경이었기 때문에 조종사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았지만, 이미 유명인사로 자유 프랑스군 사령부 고위 장교들과 친분이 있었던 그는 예비군 공군 소령 계급을 달고, 조종사로 복무하게 되었다. 다만, 매우 정교한 미제 최첨단 고성능 장거리 정찰기인 F-5B-1-LO 라이트닝 정찰기를 조종하기 위해서는 7주간의 기종전환 훈련을 받아야 했다. 1943년 7월 21일 튀니지 부근의 라 마르사 기지에 위치한 미 제7군 소속 자유 프랑스 공군 제33정찰비행대대 2비행대에 배치되었다.[12]

그러나, 2번째 출격 후 착륙하는 과정에서 조종 미숙으로 항공기를 고장내는 바람에 비행대장은 그를 비행 부적합자로 분류하여, 지상근무를 명령하였다. 이후 8달에 걸친 지루한 지상근무를 견디다 못한 그는 개인적으로 지중해 지역 연합공군사령관 아이라 C. 이커(Ira C. Eaker) 미 육군 중장을 만나 비행을 할 수 있도록 청탁을 넣어, 1944년 5월 16일, 사르데뉴 섬의 알게로 기지에서 비행대로 복귀하였다.

비행대로 복귀한 후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평소 취미였던 조종 중 독서와 조종 중 글쓰기를 재개했다. 전쟁 중에도 문학에 대한 열정은 완전히 그를 사로잡고 있어서 전시에도 그에게 가장 중요한건 문학이었고, 군 복무는 둘째였다. 그는 비행에 필수적인 절차인 비행 전 점검이나 엔진 예열 등의 필수 점검을 하지 않고 그 시간에 혼자 독서를 했다. 한 번은 정찰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는데, 비행 중 읽던 소설책을 다 읽지 못해 지상 병력이 그의 착륙을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기지 상공을 1시간 동안 빙빙 선회하며 소설책을 다 읽은 다음에 착륙을 하기도 했다.

그는 친독일이냐 반독일이냐 하는 정치적 색깔 논쟁에 휘말려 우울증이 왔고, 이 때문에 전쟁 중 술을 마시기 시작해 폭음을 하곤 했다. 이 때문에 그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 상태를 악화일로에 있었다. 1944년 6월 29일에는 출격 순서가 아님에도 자신이 잘 아는 사부아 지역에 대한 정찰이라는 이유를 들어 비행을 지원했고, 안시 상공에서 엔진 고장이 일어나 실수로 방향을 잘못잡아 적 점령지인 이탈리아 제노아 상공에 진입하여 격추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1944년 7월 17일 그의 비행대는 코르시카 바스티아 인근 보르고(Borgo)로 기지를 이동하여, 8월 15일로 예정된 남프랑스 상륙작전(용기병 작전)을 위한 상륙지역 지도제작용 항공사진 촬영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운명의 7월 31일 오전 8시 25분 그는 일상적인 정찰비행을 위해 비무장으로 6시간 분의 연료를 탑재한 정찰기를 몰고 이륙했으나 6시간이 지나도록 기지로 돌아오지 않았고, 이륙 8시간 30분 뒤 실종 보고가 들어왔다. 그를 존경하는 부대원들은 그가 그렇게 흔적없이 사라진 것에 놀랐다. 그의 실종 소식은 국제뉴스에 헤드라인으로 올라갔다. 정찰기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인근에 추락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전시 상황이라 추락지역에 대한 조사나 사고원인은 조사되지 못했다. 공식적으로 실종처리가 되었으나 사망으로 추정되어 1948년 전쟁 중 사망으로 인정되었다. 비행에 대한 일화만 보면 공사를 혼동하는 군대에는 있어선 안 되는 사람이지만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자신의 로망을 추구한 건 이래저래 대단하다.

2.1. 죽음에 대한 논란

항상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싶다던 생텍쥐페리는 결국 1944년 7월 31일, 지중해 상공에서 F-5B-1-LO 라이트닝 정찰기로 정찰비행하다가 실종되었다.[13] 그리고 53년이 지난 1998년 9월 마르세유 남동쪽 앞바다에서 어부 하비브 베나모르와 장 클로드 비앙코가 우연히 그물로 그의 이름이 적혀진 팔찌를 건져올리며 그의 행방이 드디어 밝혀졌다. 또 수중탐사장비로 바다 깊숙히 가라앉은 라이트닝 정찰기를 발견함으로서 그의 최후도 밝혀진 셈.#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점은, 그동안에 제기되어 온 독일군에게서 격추당했으리라는 짐작과 달리 비행기 겉에는 총탄 자국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비불량이나 아니면 일부러 마지막 비행에서 스스로 추락한 건가 하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런데 2008년 3월의 헤르만 괴링 공군 원수에게서 훈장도 받은 공군 에이스 조종사인 호르스트 리페르트(Horst Rippert. 1922-2013)가 생텍쥐페리를 격추했다고 주장하며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최근 자료에 따르면 기존에 제기되었던 독일 전투기 격추 설이 가장 유력해졌다. 왜냐하면 P-38의 우측엔진에 피탄으로 인한 윤활유 누유 흔적이 발견되었기 때문. 기습공격을 받아 엔진 하나가 망가진 상태[14]로 그대로 추락해 버렸다는 게 유력하다.

더불어 프랑스에서 건져올렸다는 팔찌가 가짜라고 주장하는 시각이 많다. 유족들이 팔찌가 생텍쥐페리의 것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관련해서 팔찌를 발견한 어부가 은팔찌가 진짜 생텍쥐페리의 것이라며 유족들을 고소하기도 했으나 진실은 저 너머에. 생텍쥐페리의 아내인 콘수엘로(1903~1979) 집안 사람들은 비웃었다. 마지막 비행 지점으로부터 200km 이상 떨어진 곳이었기에 결국 자살한 거 아니냐는 주장으로 조작했다며 일절 믿지 않았다. 하지만 해저 탐사로 잔해를 발견했다는 잠수부 뤽 반렐은 자살설을 믿었으며 생텍쥐페리가 우울증을 앓았다는 주장을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생텍쥐페리의 친한 친구들도 그가 마지막 얼마 전까지 굉장히 말이 없었고 우울했었다는 증언을 했으며 죽기 하루 전인 7월 30일 비행전에 친구들과 같이 바닷가를 거닐다가 어느 여인(전혀 모르는 여인이었다고)에게 "나와 함께 수영하지 않을래요? 내일이 되면 난 여기에 없을지도 몰라요.라며 쓴웃음짓는 바람에 친구들이 불길한 농담 말라고 한 일화까지 있다.

위에 나온 것처럼 매우 친했던 친구인 기요메가 격추당해 죽은 것도 생택쥐페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기요메의 죽음을 이야기한 편지에서도 '죽음 속에서, 안데스 산맥을 걸어서 빠져나온 그 친구도 결국 격추당해 죽음을 피할 수 없었네....나도 그럴까?' 라는 글귀가 남아있던 걸 보면 어지간히 충격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가정적으로도 그는 매우 고민했다. 아내인 콘수엘로(Consuelo, 프랑스어식으로 콩쉬엘로)는 엘살바도르 출신 여성으로 이미 나이 27살에 전 남편들과 2번이나 사별한 과부였다. 남프랑스 지방귀족 출신으로 조금 보수적인 생텍쥐페리 집안은 그녀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아서 1931년 결혼 후 13년 동안 그녀를 무시해왔기에 그의 고민은 늘어갈 수밖에 없었다. 둘이 서로 사랑하고 사이도 좋았지만... 두 사람 다 불같은 열정과 때론 확 식어버린 냉기로 갈등하다가 잠깐 별거하는 듯 하더니 다시 불같이 합쳐지는 모습을 보였다고도 한다. 어린 왕자 때문에 순수하다고 사람들이 오해한다는 편견이나 인식과 달리 그는 매우 정열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링크 생택쥐페리는 주변에 여자들이 많았고, 넬리 드 보귀에라는 유부녀와 불륜 관계였다. 넬리는 나중에 피에르 슈브리에라는 필명으로 콘수엘로를 음해하는 저서를 냈다. 생텍쥐페리가 실종되고 그의 집안에선 콘수엘로를 내쫓아서 그녀는 어린왕자의 유명세와 달리 잊혀졌다. 원래 돈많은 과부라서 경제적으로 어렵진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후 여러 다른 사람들과 사귀기도 했지만 그래도 생텍쥐페리를 가장 사랑했다고 한다. 상당히 드라마틱한 여인이었다.

2.2. 연보

1900년 6월 29일 프랑스 리옹에서 출생. 해마다 여러 달을 가족과 함께 외가 쪽 트리코 백작부인의 소유지 생 모리스 드 레망과 외조부의 라 몰 성에서 보냄.

1904년 보험회사 감사로 있던 아버지 장 드 생텍쥐페리 41세로 사망.

1909년 르망으로 이사. 예수회 교단의 노트르 담 드 생트 크루아 중학교에 입학.

1912년 앙베리외 비행장에서 조종사 베드린이 조종하는 비행기를 처음으로 타 봄. 키엘뵈프 선생에게 바이올린 레슨을 받음.

1914년 빌프랑슈 쉬르 소온 시(市)의 노트르 담 드 몽그레 중학교에 들어갔으나 석 달 뒤 스위스 프리부르의 마리스트 수도회에서 경영하는 중학교로 옮겨 1917년까지 공부함.

1917년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합격. 학교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던 남동생 프랑수아가 15세에 죽음. 해군 학교 입시 준비를 위해 보쉬에 고등학교와 생 루이 고등학교에서 공부함.

1919년 해군 학교 입시 구술시험에서 낙방. 미술 학교 건축과에서 15개월 동안 수강함.

1921년 스트라스부르의 제2전투기 연대에서 군복무 시작.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 파견되어 민간 조종사 훈련을 받고 부르주에서는 전투 조종사 훈련을 받음. 공군 비행사 자격시험에 합격. 소위로 진급.

1923년1월 파리 부르제 비행장에서 두개골 골절 사고를 겪고 제대. 3월 루이즈 드 빌모랭과 약혼했으나 약혼녀 측에서 파혼을 통고. 회사원으로 여러 회사에서 근무. 취미로 비행기 조종을 계속함.

1926년 잡지 《르 나비르 다르장(Le Navire d'Argent)》에 중편소설 〈비행사 (Aviateur)〉를 발표. 디디에 도라(《야간 비행》의 주인공. 리비에르의 모델)가 경영하는 툴루즈의 라테코에르 항공회사(현재의 에어프랑스의 모체)에 입사함.

1927년 메르모즈, 기요메 등과 함께 툴루즈-카사블랑카, 카사블랑카-다카르 사이의 정기 우편 비행을 담당. 모로코의 쥐비 곶 비행장 책임자로 18개월 동안 근무. 여기에서 18개월간 사막 체험. 《남방 우편기(Courrier Sud)》 집필.

1928년프랑스로 귀국. 《남방 우편기》 발표. 브레스트에서 해군항공의 고급반 강의 수강.

1929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아르헨티나 우편항공회사의 영업주임으로 일함. 그곳에서 메르모즈, 기요메를 다시 만남.

1930년 기요메가 안데스산맥 횡단비행 중 실종됨. 생텍쥐페리는 동료와 함께 5일 동안 수색 작업을 벌였으나 찾지 못함. 기요메는 불굴의 의지로 살아 돌아옴(《인간의 대지》 참조). 《야간 비행(Vol de Nuit)》 집필.

1931년 프랑스 귀국. 디디에 도라와 함께 우편항공회사 사임. 중미의 엘살바도르 출신 미망인 콘수엘로 순신과 결혼. 우편항공회사에 다시 입사하여 모로코에서 근무함. 《야간 비행》으로 페미나(Femina) 상 수상함.
1932년 라테코에르 회사의 시험비행사가 됨.

1934년 프랑스 항공사들이 통합된 에어프랑스에 입사. 선전부원으로 외국에 자주 출장. 《남방 우편기》를 시나리오로 각색함.

1935년 《남방 우편기》가 피에르 비용에 의해 연출됨. 《파리 수아르(Paris Soir)》지 특파원으로 모스크바 파견. 기사로 대중의 호응을 얻음. 상금이 걸린 파리-사이공 간 장거리 비행 기록 갱신 도전. 이집트의 사막에 추락. 닷새 동안 사경을 헤매며 사막을 걸어 베두인 대상에 의해 정비사 프레보와 함께 극적으로 구출됨(《인간의 대지》 참조).

1937년 카사블랑카-톰북투-바마코-다카르 간의 항로 개척. 《파리 수아르》지 특파원으로 스페인내란 취재.
1938년 뉴욕-테르 드 푀(남미의 남단) 간의 시험비행을 항공부 장관에게 허락받았으나 과테말라에서 생애 다섯 번째의 사고를 당함. 중상을 입고 뉴욕에서 치료받는 동안 《인간의 대지(Terre des Hommes)》 집필.

1939년 《인간의 대지》 발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소설대상 수상. 2차 세계 대전이 발발. 공군 예비역 대위로 동원되어 기술교육을 담당하다 2의 33 정찰 비행단에 전속됨.

1940년 6월 22일 독일과 프랑스의 휴전협정. 동원해제되자 프랑스로 귀국. 아게에서 《성채(Citadelle)》 집필 시작. 포르투갈을 거쳐 12월 뉴욕으로 떠남. 《전시 조종사(Pilote de guerre)》 집필.

1941년 뉴욕에서 집필 생활.

1942년 《전시 조종사》, 영문판 《아라스 전선비행(Flight to Arras)》이 발간됨. 프랑스어판은 점령국 독일의 군당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됨. 11월, 라디오를 통해 프랑스인의 단결을 호소.

1943년 뉴욕에서 2월에 《어떤 볼모에게 보내는 편지(Lettre à un otage)》, 3월에 미국인 지휘하에 있는 알제리의 2의 33 정찰 비행단에 재편입 교섭, 4월 6일에 《어린 왕자(Le Petit Prince)》 출판. 5월에 미국을 떠나 알제에 도착. 브레이크 조작 미숙으로 착륙에 실패, 지상 배치됨. 우즈다의 본대에 편입됨. 《성채》 집필. 지중해 지구 공군 총사령관 이커 장군에게 청원, 5회만 출격한다는 조건으로 사르데냐에서 정찰 비행단에 복귀.

1944년 동비행단이 코르시카로 이동. 생텍쥐페리는 이미 8회의 출격을 마쳤음. 7월 31일 8시 30분, 그르노블 안시 지역으로의 마지막 출격을 허락받아 떠난 그는 복귀 예정 시각인 13시 30분을 넘어 영영 돌아오지 않았음. 코르시카의 바스티아 북쪽에서 독일군 정찰기에 의해 격추되었으리라고 추측됨. 향년44세.

3. 대표작

제목 연도
비행사(L'aviateur) 1922
남방 우편기(Courrier Sud) 1927
야간비행(Vol de Nuit) 1931
인간의 대지(Terre des Hommes) 1939
전시 조종사(Pilote de Guerre) 1941
어린 왕자(Le Petit Prince) 1943
성채(Citadelle) 미완성 유고

4. 어록

Si tu veux construire un bateau, ne rassemble pas tes hommes et femmes pour leur donner des ordres, pour expliquer chaque détail, pour leur dire où trouver chaque chose… Si tu veux construire un bateau, fait naître dans le coeur de tes hommes et femmes le désir de la mer.
당신이 배를 만들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목재를 가져오게 하고 일을 지시하고 일감을 나눠주는 일을 하지 말라. 대신 그들에게 저 넓고 끝없는 바다에 대한 동경심을 키워줘라.
Semble que la perfection soit atteinte non quand il n'y a plus rien à ajouter, mais quand il n'y a plus rien à retrancher.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완벽함이 성취된다.
La vie crée l'ordre, mais l'ordre ne crée pas la vie.
생명은 질서를 만들지만, 질서는 생명을 만들지 않는다.
전시 조종사(Pilote de Guerre) 中
Fais de ta vie un rêve et d'un rêve une réalité.
인생을 꿈으로 만들고 꿈을 현실로 만들어라
Aimer, ce n'est pas se regarder l'un l'autre, c'est regarder ensemble dans la même direction
사랑이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15]
인간의 대지 中
부모들이 우리의 어린 시절을 꾸며주셨으니 우리는 그들의 말년을 아름답게 꾸며드려야 한다.

5. 여담

Aviation Week & Space Technology지에서 뽑은 항공 우주 분야에서 손꼽히는 인물 100인 중 공동 25위에 꼽혔다.[16] 어린 왕자, 야간비행항공기를 소재로 한 작품을 여럿 집필한 것이 크게 작용한 듯하다. 참고로 생텍쥐페리 바로 아래의 순위는 커티스 르메이, 바로 위의 순위는 최초의 열기구를 개발한 몽골피에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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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대지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은 책이라며, 일본어 번역판 표지도 그렸다. 스무 살 때 처음으로 생텍쥐페리를 읽은 미야자키는 인생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1998년에는 남프랑스 툴루즈에서 사하라 사막까지 생텍쥐페리의 흔적을 따라 복엽비행기 여행을 한 적도 있다.유튜브 영상

공군 장교로 항공 분야에서 명성을 날렸기 때문에(+세계적인 문학가임을 감안해서) 리옹에서는 관할 공항의 이름을 생텍쥐페리에게 헌정해 리옹 생텍쥐페리 국제공항이란 이름이 되었다.

프랑스인들이 그를 가장 존경하는 이유는 그의 문학적인 이유도 있지만 그의 애국심 때문이기도 하다. 상당히 많은 수의 문인들과 달리 생텍쥐페리의 경우 프랑스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군대에 자원입대하여 조국을 위해 싸웠다고 한다.

앙투안 본인은 자손이 없어 직계 후손도 없었지만 형제자매가 많았던 만큼 방계 후손은 있다. 생텍쥐페리 청년 재단의 대표인 올리비에 다게(Olivier d'Agay)라는 사람이 생택쥐페리의 여동생인 가브리엘의 손자라고 한다.

생텍쥐페리의 모국인 프랑스의 컨테이너 해운 회사인 CMA CGM에서 작가의 이름과 같은 선박을 건조하였다.#필리핀에 소재한 한진 수빅 조선소에서 건조

키가 188cm나 되는 장신에 다리도 매우 길다.

본격 2차세계대전 만화에서는 고증대로 자유 프랑스군 소속으로 나오며 이사람이 M3 리 전차와 파생형 그랜트, 셔먼 전차를 디자인한 것으로 나온다.[17]

발음이 어려워서라는명분으로 어떤 책들에는 '쌩 떽쥐뻬리' 라고 되어 있다.


[1] 성씨인 생텍쥐페리(Saint-Exupéry)는 프랑스어로 툴루즈의 주교인 성 엑스수페리오(9.28)를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하다. 프랑스어 발음은 '[sɛ̃t‿ɛɡzypeʁi\](생테그쥐페리)'이지만 관용을 존중한 '생텍쥐페리'가 규정 용례이다. 한국에서 예전에 출판된 책에서는 이름을 '쌩떽쥐뻬리'라는 된소리 가득한 표기로 된 책들도 많았다. 외래어 표기법을 원칙대로 적용하면 '드생텍쥐페리'가 되지만 '생텍쥐페리'로 알려져 있어서 관용적 예외가 인정된다. 또한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규정 용례이다.[2] 그가 실종된 날이며, 1990년에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P-38 라이트닝의 잔해가 발견되어 실종된 당일에 추락사했다는 게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또 1998년 9월 7일, 어부 하비브 베나모르(Habib Benamor)와 장-클로드 비앙코(Jean-Claude Bianco)가 마르세유 남쪽 바다에서 생텍쥐페리의 은팔찌를 발견하면서 사망 장소도 밝혀졌다.[3] 다만, 프랑스는 군주제가 폐지되고 완전히 공화국이 성립된 1870년 이후부터는 귀족의 특권을 작위나 호칭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 박탈했으므로 사실상 빈껍데기긴 했다.[4] 유럽의 귀족들은 기본적으로 기사였으며 상비군 제도는 16~18세기에야 보편화되었다. 귀족의 후손들은 오늘날까지도 성을 지키며 살아간다.[5] 우리나라의 예비군과는 다르고 우리나라의 상근예비역과 유사한 복무제도.[6] 말단 소위가 부임 2달 만에 근무지를 옮기는 것은 귀족 집안의 자제만 가능한 특별한 혜택이다.[7] C.714를 만든 그 회사[8] 항공기 등록번호 F-ANRY. 'F-'는 프랑스의 국가코드, ANRY는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의 이름 첫글자(AN)와 마지막 글자(RY)에서 따왔다.[9] 이때 경험이 어린 왕자 집필에 영감을 주었다.[10] 1934년 프랑스 육군항공대가 공군으로 독립하는 바람에 육군 소위로 의병 전역했던 그는 공군 대위로 동원소집 되었다.[11] 동원소집 중에 망명을 했으니 프랑스 군형법 및 병역법 위반이겠지만 당시 프랑스 파리가 나치에 의해 함락된 점, 자유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군인으로써의 의무를 마친 점을 생각한다면 무죄라 봐도 무방하다.[12] 소속 부대인 비행대장과 동일한 계급에 이미 유명인이었던 그는 군 생활을 제멋대로 해서 물의를 일으켰지만 비행대의 장병들은 그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13] 두 번째 비행에서 조종미숙으로 항공기를 파손하여 조종부적합 판정을 받고 지상 근무 중이던 그는 지중해 지역 연합 공군 사령관, 이커 중장에게 끈질기게 청탁하여 5번의 조건부 비행을 허락받았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연합군이 공세에 나서긴 했지만 상륙 직후 약 2달간은 연합군의 진격이 더뎠으므로 프랑스 대부분의 지역은 아직 나치 독일군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게다가, 그가 탑승한 F-5B-1-LO 라이트닝 정찰기의 경우 해당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비무장에다 비행 성능도 압도적이지 않았다. 그런 판에 동료기를 대동하지 않는 단독 비행이었으므로 독일군의 공격에 매우 취약할 게 뻔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날고 싶어하여 장군은 3번을 추가로 더 허락했고 8번째 마지막 비행을 하던 와중에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14] 물론 P-38은 엔진이 2개라 한개가 피탄되도 비행이 가능했지만 120마일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항공기가 추락하거나 스핀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아마 피탄되어 속력을 유지하려다 실패하여 급격하게 추락한것으로 보인다.[15] 걸즈 앤 판처다즐링도 이 말을 한 적이 있다.[16] 다른 한 명은 크리스토퍼 크래프트. 제미니 계획부터 초기 우주왕복선 계획까지 유인우주선 계획을 총괄 관리한 인물[17] 물론 작가가 잘못 알고 한게 아니라 개그만화 다운 농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