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30 15:23:53

소공석

소강공에서 넘어옴
소나라의 역대 군주
소나라 건국 초대 소강공
(召康公)
희석(姬奭)
??대
소 유백(召幽伯)[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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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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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라 초대 국군
연나라 초대 국군
'''
(姬)
석(奭)
아버지 주문왕(周文王) 희창(姬昌)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996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996년
1. 개요2. 생애3. 평가

[clearfix]

1. 개요

소공(召公) 석(奭). 서주시대 소(召)나라의 초대 공작이자 연(燕)나라의 초대 백작. 주문왕의 아들이자 주무왕주공 단동생이었으며, 연후 극의 아버지였다.

그는 형인 주 무왕을 따라 상나라를 멸망시키는데 큰 공을 세워 계(薊) 땅[2]에 분봉받아 연나라의 초대 백작이 되었지만, 연나라가 주나라의 수도인 호경에서 굉장히 멀기도 하고 자신이 맡은 주 왕실의 재상일을 등한시할 수 없어, 아들인 공자 극(克)을 보내 연나라를 다스리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무왕이 봉한 채읍인 소 땅에 머물러 소나라 공작 '소(강)공 석'이라 불리게 되었다.

주 무왕 사후 형인 주공 단과 함께 조카성왕을 모시며 나라를 잘 다스려 주나라 최고 전성기인 성강지치(成康之治)를 이룩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2. 생애

주 무왕 원년(기원전 1046년), 형인 주 무왕을 따라 목야대전에서 상군을 쳐서 격파했다. 대패한 주왕 제신은 달기와 함께 분신자살했다. 그리하여 주나라가 천하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역성혁명을 성공시킨 주 무왕은 신정권의 안정을 위해 공신과 희성 종실 및 성현의 자손들을 분봉했다.

그리하여 소공 석은 동북 변경의 땅에 분봉받아 연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그는 주나라의 정사를 돌봐야 했으므로 연나라를 다스릴 여력이 없어 아들인 극에게 연나라의 백작위를 맡기고, 주나라의 내정을 돌보는데 전념했다. 그리하여 주 무왕은 석을 소읍에 봉해 소나라의 공작이 된다.

주 무왕이 죽고 아들인 태자 송(誦)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주 성왕이다. 이때 3공 중 하나인 태보(太保)가 되었다. 주 성왕이 어려 형인 주공 단섭정하자 그것을 불쾌히 여겼다고 하는데, 이에 주공 단이 〈군석〉이라는 글을 지어 주었다.
탕왕 대에는 이윤, 태무 때에는 이척·신호·무함, 조을 대에는 무현, 무정 대에는 간빈 등이 상나라를 다스렸는데, 이들은 현자로서 국정을 잘 이끌었다네.
소공 석이 그 말을 듣고서야 의구심을 누그러뜨렸다.[3]

섬서 지역을 다스릴 때 친히 송사를 살피며 정사를 돌봤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연나라는 아들 극이 다스렸다. 소나라는 어느 아들에게 물려주었는지 알 수 없다.

3. 평가

형인 주공 단과 함께 유능한 충신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역설적으로 후대의 찬탈자들이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해 주공 단을 많이 들먹인만큼 소공 석의 평가도 그와 궤를 같이 한다. 조카인 주성왕을 보좌하면서 나라를 잘 통치했기 때문이다.


[1] 아들의 기록이 없어 후손인 소 유백으로 표기.[2] 현 북경 즉 베이징시.[3] 사기에 따르면 주공단은 소공석과 강태공에게 비슷한 글을 주는데(참고로 성왕은 강태공의 외손자다), 요약하면 본인이 섭정하는 것은 천하가 무왕 사후 성왕이 어린 시기 주나라를 배반하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작 삼감의 난이 벌어진 주요 명분 중 하나가 주공단의 섭정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묘하긴 하다만. 아님 악습 폐지같은 덕치 개념에 입각하면 상의 체계를 끊고 서주 초기의 체계를 확립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