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24 22:05:42

손죽도

파일:전라남도 휘장.svg 전라남도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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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손죽도 전경.jpg
손죽도 전경
손죽도
巽竹島
국가 대한민국
주소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면적 2.919k㎡
위도 북위 34°17
경도 동경 127°21

1. 개요2. 상세3. 손죽도의 유래4. 관광5. 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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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죽도(巽竹島)는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에 위치한 섬이다. 소거문도, 평도, 광도와 함께 손죽열도를 이룬다. 여수 시내에서 약 74km 떨어져 있다.

2. 상세

손죽도는 서쪽 해안 일부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구릉지이다. 해안은 암석 해안이 많지만 섬의 북쪽 일대는 사빈 해안이 발달되어 있고, 이곳에 선착장과 마을이 있다. 또 북서쪽 돌출부 끝에는 무인 등대와 해변 길이 1km의 손죽 해수욕장도 있다.

섬 중앙에 깃대봉[1]이 우뚝 솟아 있고 산줄기가 양팔을 벌리듯 뻗어 있는데 왼쪽 끝에는 쌍봉, 오른쪽 끝에는 구릉이 평평한 댄머리[2]봉이 있어 낙타 등허리를 연상케 한다. 또한 호 안은 U자형으로 깊숙이 파여 있어 호수처럼 잔잔한 포구를 이루고 있다.

깃대봉의 남쪽에는 '지지미재'라는 곳이 있어 예로부터 진달래가 필 무렵이면 마을 사람들이 화전인 지지미를 부쳐 먹으며 놀이를 했다고 한다.

손죽도 깃대봉 북쪽이 경사가 완만한 평지여서 농경지가 발달해 농사를 짓는 주민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인근 어장의 쇠퇴로 섬을 떠나는 주민이 많아 인구가 점점 감소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서 조개더미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선사시대에도 이미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기록에 의하면 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400여 년 전으로 제주에서 고씨, 부씨, 양씨가 최초로 섬에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으나 왜구들의 노략질이 심하여 육지로 피신했고, 그 후 전주 이씨, 밀양 박씨, 김해 김씨 등이 다시 들어와 정착했다고 한다.

1937년에 개교한 손죽초등학교는 손죽분교가 되었으며, 면 출장소와 우체국, 보건지소가 있다. 고흥의 내·외나로도가 서로 연륙되어 이곳 마을 사람들의 육지 나들이가 다소 수월해졌다.

섬의 양쪽으로 산책로가 이어져 있다.

3. 손죽도의 유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수년 전에 녹도만호 이대원 장군[3]이 이 섬에 쳐들어온 왜적과 맞서 싸우다 숨진 일이 있었다. 1591년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이 큰 인물을 잃어 큰 손해를 봤다며 '손대도'(損大島)라고 명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손죽도'(損竹島)로 바뀌었다가 현재에 이르렀다.

이대원 장군의 비장한 죽음을 듣고 손대도 가까운 해안에서는 슬픈 노래를 지어 부르던 가사가 오늘날까지 구전으로 전해 온다.
"어허 슬픈지고. 녹도만호 이대원은 오로지 나라 위해 충신이 되었도다. 배가 바다로 들어갈 제 왜적들은 달려들고 수사는 물러나니 백만 명 진중에 빈주먹만 휘둘렀도다."

이조참판을 지낸 한천 정협이 그를 슬퍼하며 지은 조사 또한 아래와 같이 전해지고 있다.
한천 정협(鄭恊)이 지은 조사
충신이라 나라 위해 죽었고 忠臣死國
열사라 머리를 잃었으니 烈士喪元
네 무엇이 슬프리오 夫我何悲
그대는 만족하리라! 子所安兮

4. 관광

손죽도 이대원 사당[4]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 1164번지 위치한 사당으로 1637년[5]에 세워졌다고 하며, 그 이전인 1590년[6] 또는 1597년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모두 근거가 불확실하다. 건물은 초가로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으나 퇴락과 수리가 거듭되어 오다가 1983년 마을 주민의 정성으로 현재 사당 건물을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손죽도 마을 앞 대지 60평, 건평 5평의 목조 기와집으로 충열사(忠烈祠)라 현판을 건 솟을대문 형식의 쌍여닫이 출입문이 있고, 고목이 우거져 있는 경내를 기와 담장으로 둘러 정돈이 잘 되어 있다. 제사는 매년 음력 3월 3일에 모시고 있다.

5. 사건사고

  • 1950년 2월 말에 손죽도와 초도 사이에서 노 젓는 배로 낚시를 하는데 갑자기 부는 샛바람 때문에 대부분 초도로 대피하였으나 그중에 배도 크고 경험이 많은 여섯 명의 어부가 탄 배 한 척이 손죽도로 오다가 그대로 수장되고 말았다.
  • 1959년 9월 추석 무렵, 8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라호 태풍부산 근해로 갈치 잡이를 갔던 손죽도 배 두 척이 침몰하였다. 한 배에 일곱 명씩 탔는데 한 명은 구조되고 나머지 열세 명 모두 사망했다.
  • 1960년대 초에는 연평도에 조기잡이를 갔다가 배가 침몰하여 여섯 명 중 한 명이 살아남고 다섯 명은 수장되었다.
  • 1960년대 중반에는 동지나해로 조업을 나갔던 배가 초가을 손죽도 마을 사람 여덟 명과 함께 바다로 사라져 버렸다.

[1] 242m[2] 배들이 들어와 정박하는 곳[3] 당시 22세[4] 李大源 祠堂, 문화재자료 제239호[5] 인조 15년[6] 선조 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