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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남헌

파일:송남헌2.jpg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창씨명 마츠바라 쇼이츠(松原秀逸)
본관 은진 송씨 (恩津 宋氏)[1]
출생 1914년 4월 11일[2]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대하리[3]
사망 2001년 2월 20일 (향년 86세)
부모 아버지 송병진, 어머니 기계 유씨
형제자매 2남 2녀 중 차남
학력 대구사범학교 (졸업 / 1회)
서훈 건국포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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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정치인. 2018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송남헌은 1914년 4월 11일 경상북도 문경군(현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에서 울산군청 서기로 근무하던 아버지 송병진(宋秉進, 1883 ~ 1955)[4]과 어머니 기계 유씨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송남헌의 조부 송진수(? ~ 1887)[5]는 본래 충청북도 보은군 출신으로 산북면 대하리 장수 황씨(長水 黃氏) 사정공(司正公) 14대 대종손 황영주(黃永周, 1814 ~ 1872. 4. 7)[6]의 셋째 딸이던 황순희(1859 ~ 1946)와 혼인하였다. 그런데, 1887년 남편이 죽자 조모 황순희는 4살 배기의 송병진을 데리고 본가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부친 송병진 또한 산북면 대하리에서 성장하고 결혼까지 하여 송남헌을 낳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느라 분주한 아버지를 대신해 조모와 모친의 훈도 아래 성장했으며, 1919년 아버지가 성주군청 서기로 근무하게 되자 할머니를 비롯하여 가족들이 모두 고향 대하리를 떠나 성주군으로 이사하였다. 그후 대구부로 이주하여 수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했다.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1934년 군산보통학교 훈도에 발령받아 1935년까지 근무했고, 1936년 경성부 재동보통학교[7] 훈도에 발령받으면서 상경, 소격정(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소격동)에 거주하면서[8] 1941년까지 이 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했다. 그 당시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중일전쟁 등으로 국내외적으로 대단히 불안한 시기였지만, 그는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아동문학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며 방송과 동아일보 등의 신문·잡지 등에 발표하는 등 아동문화운동에 종사하였으며, 이때 방송용 동화를 집필하게 되어 경성중앙방송국에 출입하게 된다.

이때 그는 경성중앙방송국에 드나들면서 제2방송부 편성과 서기로 근무하던 양제현(楊濟賢)을 알게 되었으며, 그를 통해 국외의 소식을 전해 듣고 이를 국내의 인사들과 공유하는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42년 12월 하순경, 그는 경성부 조선저축은행 앞 길을 걸으면서 양제현, 김영일(金英一) 등에게 "미국에서는 이승만 일파가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며 이승만을 대통령이라 하고 국호를 '고려공화국(高麗共和國)'이라 칭하고 있으며, 이미 20여 개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아 소련충칭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그 대표를 파견하고 있다"는 취지로 이야기했다. 당시 「미국의 소리(V.O.A)」 우리말 방송은 하루에 30분씩 3회 했고 '중경방송'은 저녁 6시 반부터 30분씩 진행되었다.
파일:송남헌(항일단파방송 사건).png
1943년 6월 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이와 같은 '항일단파방송 사건'으로 그는 1943년 3월 성기석 등의 방송 관계자와 홍익범, 허헌 등 150여 명과 함께 검거되었다. 이후 1943년 8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조선임시보안령 위반 및 안녕·질서에 대한 죄 혐의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았으며 이에 불복하여 즉시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2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그대로 적용[9]되면서 결국 서대문형무소·청주사상범보호관찰소·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4년 4월 5일 형 집행 만기로 출옥하였으며,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는 조모와 부모님을 모시고 종로구 청운동에 거주하였으며[10], 친구 한학수(韓學洙)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하여 원세훈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45년 9월 창당되자 선전부에 소속되어 함상훈(咸尙勳)·장덕수와 함께 활동하였으며, 당 중앙위원에 취임하였다. 1946년 2월 미군정청 자문기구인 민주의원(民主議院)이 출범할 당시 민주의원 비서처의 비서로 들어갔는데, 이때 원세훈이 송남헌을 민주의원 부의장으로 있던 김규식에게 비서로 추천하여 김규식의 비서실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해 7월 좌우합작위원회가 설립되자 참여하여 비서부 주임이 되었으며, 10월에는 원세훈·한학수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을 탈당하고#, 김규식 등이 창당한 민중동맹(民衆同盟)에 입당, 상임위원에 취임하였다. 1947년 12월 남한 단독 정부수립에 반대하여 김규식 등이 민족자주연맹을 창당하자 준비위원회 비서처장에 취임하기도 하는 등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을 통한 자주통일 민족정부 수립에 진력하였으며 1948년 4월 21일 민족자주연맹 대표의 1인으로서 남북협상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후 남북협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북측 인사들의 서신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949년 4월 이승만 정부에 의해 국가보안법 불고지죄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그해 6월 27일 집행유예석방되었고, 1960년 4.19 혁명 이후 혁신정당 활동과 관련하여 좌익으로 몰린 그는 1961년 5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박정희 정부에 의해 재차 투옥되었다.

이후 정계를 은퇴하였고, 은퇴 후에는 현대사 연구 및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1986년 『한국현대정치사 1』를 번역해서 출판했으며, 1989년에는『해방 3년사』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리고 그는 1989년 12월 '우사 김규식 박사의 연구회'를 이끌면서 2000년 8월『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전기를 펴내고 2001년 2월 20일 사망하였다.

201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1] 24세 헌(憲) 영(永) 항렬.[2] 1월 14일생이라는 기록도 있다.#[3] #[4] 어려서 문중의 도천서당에서 황옥과 동문수학하였으며, 도천학교를 수료하였다. 1910년부터 1911년까지 조선총독부 마산구재판소 서기과 통역생 겸 서기를 시작으로, 1912년부터 1914년까지 울산군 서기, 1915년부터 1918년까지 문경군 서기, 1919년부터 1920년까지 성주군 서기,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성주군 속을, 1925년부터 1927년까지 청송군 속으로 근무했다.[5] 이명 송봉수(宋奉洙).[6] 초명 황한주(黃翰周).[7] 1938년 재동심상소학교로 개칭됨[8] 본적은 경성부 현저정(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으로 되어 있는데, 무슨 연유로 이곳에 본적을 두었는지는 알 수 없다.[9] 미결 구류일수 법정통산 85일.[10] 조모는 1946년 8월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