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09:39:58

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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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언어별 명칭
한국어 송상
송도상인
개성상인
한문

商人

1. 개요2. 상세3.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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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늘날의 개성시 일대를 연고로 활동하였던 조선 후기의 상인 집단. 교과서에서는 주로 사상에 관해서만 다루나, 엄밀하게는 개성 내 공인된 상인인 개성시전상인과 개성에 연고를 둔 민간상인을 모두 포함한다.

주로 한국사 수업시간에 조선 후기의 상업의 발달 현상을 설명하면서 접하게 된다.

2. 상세

개성은 조선 건국 이전부터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다. 고려의 수도로서 공인상점인 시전()이 설치되고 경시서(京市署)로 하여금 거래행위와 품목, 가격 등을 통제·감독하였으며, 예성강 하구의 외항벽란도에서 공·사무역을 막론하고 국제교역이 활발하였다. 따라서 개성의 상인들은 다른 지역상인들보다 일찍이 자본을 축적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도 개성상인은 대표적인 상인집단으로 여겨졌다. 특히 개성 출신은 개성이 이전 고려왕조의 어향(御鄕)이자 도읍이라 하여 정치적 차별을 받았으므로 상업에 종사하는 경향이 컸다.[1] 지리적으로도 서울과 가까웠으므로 중심도시에 대한 배후도시 역할을 할 수 있었고, 중국과의 사행길에 위치하여 조공무역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조선 초에 이르러서도, 개성 시전은 한성 시전과 마찬가지로 상업세와 관용품을 납부하는 대신 전매권을 누리는 등 여전히 특권상인으로 남았고, 그밖에 사무역을 하는 상인들도 계속 생업을 이어갔다. 특히 명나라와의 교역 규모가 공무역만으로 소화하기에는 상당히 커서, 사신단이 올 때마다 사상(私商)과 난전(亂廛)도 승인을 받아 사무역을 실시하였고, 거기에 더해 관의 통제를 벗어난 민간상인 간 밀무역도 일어났다.[2] 송상들은 그뿐만 아니라 행상업에도 종사하여 소속 상인들은 전국 각지에 지점인 송방(松房)을 두어 광범한 유통망을 조직하였다.[3]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시장과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송상의 규모도 더 커져갔다. 17세기에 이르러 시전에 금난전권을 주고 시전의 수와 규모를 확대하여 사설시장을 억제하고 공인시장의 공급력을 시장수요에 맞추고자 시도하였으나, 실효성의 한계와 더불어 난전의 거센 저항, 독점에 따른 고물가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 그리고 이들 시전상이 권세가와 결탁하는 폐단이 생기자 18세기금난전권을 육의전에 국한하는 조치로써 사실상 난전의 활동을 용인하게 되었으며, 그중에서도 규모가 큰 사상(私商) 혹은 사상도고(私商都賈)가 두드러졌다.

송상은 다채로운 사업을 벌였다. 국내에서는 광업에 투자하고 선대제로써 종이포목, 가죽, , 유기 등을 매점매석하였다. 또한, 많은 상인들은 재지사족 등 전통적인 지주들로부터 토지를 매입하여 새로이 지주가 되어 상업적 농업경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송상의 가장 중요한 상품은 단연 인삼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일본 등에 수출하였을 뿐만 아니라,[4] 가공상품개발에도 투자하여 홍삼을 새로운 주력 상품으로 내놓았는데, 관에서 승인한 것 이상으로 대규모 재배와 가공, 판매가 이루어졌다. 결국 순조 연간에 홍삼제조시설인 증포소(蒸包所)가 개성으로 이전될 정도로 재배·유통·가공 등 전 과정을 사실상 독점하였다.

이후 한반도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기록된 개성상인들의 기록은 이렇다. 6.25 전쟁 이후 화마속에 돌아갈 고향을 잃은 개성상인들은 서울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들은 탁원한 장사수완으로 남대문 시장에서 돈을 많이 벌지만, 정작 투자할만한 곳을 찾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이미 사대문 안쪽 부동산은 유지들에 의해 꽉 잡혀있는 상태라, 어쩔 수 없이 개성상인들은 사대문 밖의 땅을 찾아보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강 건너 장안평이라는 곳에 정착해 개성상인들을 필두로 이북출신들이 세운 `장안평농지개량조합`이 세워진다. 그렇게 개성상인들은 조합을 통해 그곳에서 인삼농사나 지으려고 50년대 내내 모여 그 일대의 땅을 샀지만, 그 누가 알았을까, 그곳이 논현동, 양재동, 도곡동, 역삼동, 삼성동 같은 강남개발의 핵심 땅들이였다는걸. 이후 그곳은 60년대 강남개발의 열풍과 엮이면서 수많은 송상들은 땅부자가 되었고, 그렇게 많은 수의 개성상인들은 강남부자 1세대들이 되어버렸다.

3. 대중매체

고려시대에나 조선시대의 상인집단으로서 유명하기에 상인이 등장한다면 곧잘 나오는 편이다. 대중적으로는 흔히 독자적인 국내 복식부기 발명으로도 알려져있다.


[1] 어디까지나 야사로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 개성은 8도감사의 윗자리인 전기조선 유일의 경관직 유수가 보임되던 사실상의 부수도였다.[2] 종종 공무역만이 합법이고 사무역은 비합법 혹은 불법이라고 오해하는데, 엄밀히 말해서 공무역은 조공품과 답례품의 교환 등으로 국한되었다. 사신을 따라간 역관이나 상인들이 하는 교역, 남쪽의 왜관이나 북쪽의 개시(開市) 등 공인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교역은 사무역이라고 불리기는 했어도 실제로는 국가의 통제를 받아서 그 품목이나 수량, 업자 등 제한된 선 안에서 하는 것이었다. 진짜로 나라의 개입 없이 이루어지는 밀무역은 잠상(潛商)이라고 불렸다.[3] 일반적으로 육로망은 송상이, 수로망은 강상(경강상인)이 장악하고 있었다.[4]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송상은 생산과 공급에 중점을 두고 해외판매는 의주만상이나 동래내상에게 맡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