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13:01:17

순천화학련합기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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順川化學聯合企業所

Sunchon Chemical Compl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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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D1C27,#222222><colcolor=white> 설립 1983년 (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
2010년 (순천화학련합기업소)
규모 미상
주소

순천화학련합기업소
(평안남도 순천시 련봉동)
1. 개요2. 역사
2.1. 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2.2. 순천화학련합기업소

[clearfix]

1. 개요

북한의 기업소. 최상급인 '련합기업소'에 해당되며, 평안남도 순천시 련봉동에 있다.

2. 역사

2.1. 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

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는 1983년 김일성의 지시로 평안남도 순천에 연간 10만 t 규모로 건설된 비날론 공장이었다. 북한 정부는 이 공장이 완공되면 400여 가지 화학제품 생산이 가능해 경공업 발전의 토대가 되어 이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산소열법에 의한 카바이드 생산[1]에 기초한 단지였으며, 건설계획에 따르면 연간 1만 t을 생산하던 60년대 초 건설된 비날론 공장들과는 달리 연간 10만 t의 비날론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이었기에 비날론 공장에 투자한 100억 불만 허공에 날린 꼴이 되었다. 100억 불은 현 기준으로도 매우 큰 돈이지만 당시 북한 입장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규모였는데, 공장이 완공된 해이자 김정은 이전 북한 총생산이 가장 높았던(157억 불) 1989년 기준으로도 총생산의 64%에 육박하고, 건설을 시작한 1983년 기준으로는 총생산(약 128.6억 불)의 77.8%(!!!)[2]에 육박하는 천문학적 수치다. 심지어 이는 2024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200~300억 불에 달하는 거액으로, 한화로는 대충 30조~40조 원에 달한다.[3] 공사비가 너무 막대했으니 공사 중인 1984년 2월 북한이 디폴트를 선언할 수밖에 없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공장은 1989년 10월 9일[4] 김일성, 김정일이 참여한 가운데 성대한 조업식을 열며 문을 열긴 했지만, 김일성은 기술자들과 학자들이 제출한 이의서들을 화를 내며 책상에서 쓸어내릴 정도로 전문가들을 무시했고, 비전문가들이 모여 만들어낸 공장이 제대로 돌아갈 리는 없었다. 그나마 돌아가던 기존 비날론 생산도 90년대 연이은 대홍수로 탄광이 물에 잠기자 석탄생산을 감당하지 못해 김일성 사후인 1994년에 이르러 모두 중지되었을 정도. 김일성이 생전 마지막[5]에 열린 경제부문 책임일군협의회에서 비날론생산을 정상화할데 대한 간곡한 '가르치심'[6]을 줬다는 것을 보면 그 이전에도 제대로 작동이 안 됐다는 것은 확실하다. 여기에 고난의 행군이 닥치자 노동자들이 설비 대부분을 몰래 고철로 바꿔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비날론 생산공정이 '전기 먹는 하마'라고 불릴 정도로 비효율적이었는데 전기까지 없어지니 가동이 될 리가 없었다.

운영 당시 사진을 보면 거대한 공업단지 수준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도 1단계 구간(건설 계획의 절반 규모)밖에 공사하지 못한 것임에도. 참고로 이 공장부지의 면적은 여의도 면적의 2배를 넘는 18제곱킬로미터라고 한다.

2007년에는 김정일이 비날론 재건을 지시해 2010년 2월 7일 2·8비날론연합기업소[7]가 재가동에 들어갔다.[8] 물론 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는 손도 못 대고 고철 상태로 방치되다가 결국 철거된 것으로 추정되며, 주성하가 전한 바에 따르면 재가동되었다는 2·8비날론연합기업소도 김정일이 시찰했을 때에나 가동했지 그 이후로 제대로 가동한 적이 없다고 한다. #

파일:attachment/Sunchon_vinalon_section1_305.jpg

2009년 5월, 인공위성이 촬영한 '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 의 사진을 2004년에 촬영한 모습과 비교해보면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9] 철거하는 데만 20년 가까이 걸렸다.


2009년 7월, 일본의 아시아프레스에서 현지취재한 영상. 일부 시설은 여전히 남아있었는데 계속 폐허가 되어 있는 상태로 공장 부지 일부는 아예 주민들의 으로 전락한 상황이다. 현재는 아예 이조차 완전히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프레스 기사 기사에 따르면 당시 시점으로 북한 주민의 대부분은 이 곳을 북한식 사회주의 민족자립경제노선의 실패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북한처럼 자본이 메마른 경제에서는 치명타가 될 수 있는 돈 낭비였다. 정확히는 자본이 메마른 경제라서가 아니라, 애초에 케인스의 이론은 당연히 그 나라가 자본주의일 때 적용되는 얘기다. 즉 민간 시장이 확실히 분리되어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개인의 자본이 (공식적으로는) 허용되지 않는 배급제 사회주의에선 당연히 의미가 있을 리가 없다. 즉 저 건설을 위해 노동자를 고용해서 오는 "고용창출" 효과와, 임금을 지급하고 노동자들이 그 임금으로 소비를 하여 오는 경제적인 효과가 중요한 것인데 당연히 둘 다 북한 같은 사회주의적 구조에선 의미가 대폭 줄어든다.

류경호텔을 성공작으로 보이게 할 정도로 망해도 너무 심하게 폭망했기에 조선의 오늘, 우리민족끼리 같은 대외 선전매체와 로동신문도 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를 언급하는 것은 완전히 포기한 상태다.[10] 농담이 아니라 류경호텔을 '기적 같은 일'로 찬양한 자주시보마저 순천화학련합기업소는 아예 언급 자체를 하지 않을 정도이니 이 정도면 말 다 한 셈이다.

다만 2016년 5월 22일 김일성종합대학 공식 사이트에서는 순천화학련합기업소에 대해 다룬 글이 올라왔지만 이 글도 비날론의 개발사와 김일성의 관계에 대해 다룬 글인 만큼 언급할 수밖에 없는 일이긴 했으며, 순천화학련합기업소의 실패는 김일성의 마지막 지시 외에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으며 얼렁뚱땅 넘어갔다.

참고자료(주성하의 글)

2.2. 순천화학련합기업소

2010년경 '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가 '순천화학련합기업소'로 변경됐는데, 2007년경 재건축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2012년 5월 30일, 최영림 내각총리가 순천화학련합기업소에 현지시찰을 나왔다. 기사(연합뉴스)

2013년 4월 29일, 박봉주 내각총리가 순천화학련합기업소에 현지시찰을 나왔다. 기사(연합뉴스)

2013년 8월 13일, 조선중앙통신김정은이 순천화학련합기업소에 현지시찰을 나와서 자력갱생을 강조했다고 보도했다. 기사(연합뉴스) 기사(뉴스1) 사진#1(연합뉴스) 사진#2 박봉주 내각총리와 리무영 내각부총리 겸 화학공업상이 동행했으며, 아크릴산 합성 및 정류 공정과 수성칠감 생산공정, 유성칠감 생산공정 등을 둘러봤다고 한다.

2017년 5월 15일, 순천화학련합기업소에서는 조선로동당 제7차대회에 언급한 '탄소하나(C1)화학공업' 창설을 위한 대상건설 착공식이 진행되었다. 기사(통일뉴스)

2020년 8월 1일, 순천화학련합기업소의 '탄소하나(C1)화학공업' 대상건설 공사 진행상황이 보도됐다. 기사(뉴스1)

2022년 11월 19일, 김덕훈 내각총리가 순천화학련합기업소를 현지시찰하여 '탄소하나(C1)화학공업' 대상건설 상황을 파악했다. 기사(뉴스1)

2024년 6월, 역시 북한답게 촉매제 개발이 늦어져 기술자가 자아비판을 하고 내부설비는 내팽개친 채 외관만 그럴싸하게 지어지고 있다고 한다. 관련 기술자체가 부족해보이는 듯 싶다. RFA


[1] 실험실에서 성공한 것 외에는 실사용에 검증이 되지 않은 방식이었다.[2]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당시 재산피해가 당시 아이티 GDP의 66~71% 수준이었으며, 산업은행리먼 브라더스를 인수했을 당시 한국이 졌을 예상 손해액이 당시 대한민국 GDP의 58.5~64%였다.[3] 참고로 북한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부유하고 경제적으로 건실한 나라인 대한민국삼성전자미국 텍사스 테일러에 지을 반도체 공장 건설비가 33조 원(250억 불)으로 추산되며,(#) 세계 최대 기업 Apple의 본사 Apple Park 건설에 들어간 돈이 약 5조 3400억 원(약 50억 불)이다. 덤으로 맨해튼 프로젝트에 들어간 돈이 현재 가치로 40조 원 남짓이다.[4] 조선로동당 창립 44주년으로부터 하루 전이다.[5] 1994년 7월 6일, 사망 이틀 전[6] 북한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왔다.[7] 함경남도 함흥시 사포구역에 위치한 비날론 공장. 1961년 건설된 후 1973년 연합기업소로 등극했다. 연간 5만 톤의 비날론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였으며, 부지 면적은 약 0.5제곱킬로미터였다. 이 역시 고난의 행군 시기 작동이 거의 중단되었다.[8] 이때 김정일은 인민들 입을 걱정이 없어졌다며 눈물을 흘리며 "새로운 원자탄을 쏜 것과 같은 특대형 사변이고 사회주의의 대승리" "어버이 수령님께서 계셨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셨겠냐. 수령님의 평생 소원을 드디어 풀어드릴 수 있게 됐다"라고 격찬했다고 한다. 평생 소원이라면서 왜 46년이나 못 푼 건지는 묻지 말자. # 당시 사진[9] [라디오 세상] 100억 달러 투자 '순천 비날론 공장' 폐허로, 자유아시아방송 워싱턴-노정민[10] 찬양하는 언급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게 아니라, 존재를 언급하는 것 자체를 사실상 포기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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