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28 10:50:38

스티브 해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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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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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해킷
Steve Hackett
파일:Steve Hackett.jpg
<colcolor=#fff><colbgcolor=#000> 본명 스티븐 리처드 해킷
Stephen Richard Hackett
출생 1950년 2월 12일[1] ([age(1950-02-12)]세)
영국 잉글랜드 런던 웨스트민스터 핌리코
국적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소속 제네시스 (1971 – 1977, 탈퇴)
장르 프로그레시브 록, 클래식 음악, 팝 록, 월드 뮤직
사용 악기 기타, 보컬, 베이스, 키보드, 하모니카
활동 기간 1968년 – 현재
1. 개요2. 생애3. 평가와 영향력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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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기타리스트. 제네시스 소속의 기타리스트로 유명하다.

2. 생애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에서 태어났다. 어릴때 전 가족이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갔지만 영국에 대한 향수병에 시달리던 어머니 때문에 얼마 안가 영국으로 돌아왔다. 어렸을적에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등의 클래식 음악에 심취하였으며 조금 더 커서는 존 메이올, 로버트 존슨 등의 블루스 기타리스트를 접했다. 다른 음악가들과 마찬가지로, 당시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비틀즈에게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1970년 피터 가브리엘이 멜로디 메이커지에 개시한 제네시스 멤버 모집 광고를 보고 필 콜린스와 함께 제네시스 오디션을 봤고, 기타리스트로 영입되었다. 제네시스로서 그가 나타난 첫 공연은 1971년 런던 시티 칼리지 공연이다. 이후 피터 가브리엘이 탈퇴하고 필 콜린스가 밴드의 주도권을 잡을 때도 별 문제 없이 밴드 활동을 계속하였지만, 이내 필 콜린스와 갈등을 겪기 시작했다. 보다 상업적인 음악을 하고 싶었던 필 콜린스와 달리 스티브 해킷은 클래식 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정통 프로그레시브 록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1977년 스티브 해킷은 제네시스를 떠나 솔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2]

그의 솔로 활동은 피터 가브리엘, 필 콜린스 등과는 달리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수준 높은 음악성으로 평론적으로는 매우 좋은 평가를 얻었다. 최근에는 제네시스 활동과 자신의 솔로 활동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2005년 원년 멤버 5인방의 재결성 논의가 있었을 때 다시 제네시스 가입 직전까지 갔지만, 피터 가브리엘이 불참하는 바람에 그 역시 불참하게 되었다. 그러나 피터 가브리엘이 빠진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는 다른 멤버들과 함께 참석하였다. 최근인 2014년에는 BBC의 다큐멘터리인 "Genesis: Together and Apart"에서 자신의 분량이 너무 적었다고 공개 비판하였으며, 2020년 7월에는 자서전을 출간했다.

3. 평가와 영향력


제네시스가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기 전인 1977년[3]에 제네시스에서 탈퇴했기 때문에, 프로그레시브 록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 영향력은 커녕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평론가들과 록 리스너들 사이에서는 역사상 가장 과소평가된 기타리스트로 불릴정도로 큰 영향력을 행사한 기타리스트로 꼽힌다.

흔히 록 음악에 태핑 기법을 도입한 사람으로 에디 밴 헤일런이 꼽히는데 이는 잘못된 정보이다. 에디 밴 헤일런이 1978년 Van Halen 앨범에서 태핑을 선보이기 수년 앞서서 스티브 해킷은 제네시스의 음악에 태핑 기법을 도입하였다. 재즈를 제외한 다른 음악 장르에서 태핑 기법을 도입한 것은 스티브 해킷이 거의 처음이라고 한다. 밴 헤일런이 1980년대 헤비 메탈 밴드중 세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크게 성공한만큼, 스티브 해킷의 인지도가 에디 밴 헤일런의 발끝만도 못미쳐 묻혔을 뿐이다. 그러나 에디 밴 헤일런은 스스로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준 기타리스트로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그리고 스티브 해킷을 꼽았다. 직접적으로 그에게서 태핑 기법의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한만큼, 스티브 해킷의 영향력은 크다고 할 수 있다.

클래식 음악록 음악을 결합한 시도 역시 후대의 프로그레시브 메탈, 네오 클래시컬 메탈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이 두 분야에서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러시알렉스 라이프슨잉베이 말름스틴[4]이 모두 스티브 해킷의 영향력을 인정하였다.

스티브 해킷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등의 클래식 음악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에릭 클랩튼, 존 메이올, 피터 그린, 지미 페이지 등의 블루스 음악가들로부터도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 외에 대중 음악가로는 비틀즈킹 크림슨의 영향력을 언급하였다.

4. 여담

  • 지미 페이지, 슬래시, 믹 테일러 등과 함께 가장 대표적인 깁슨 레스폴 사용자로 꼽힌다.
  • 프로그레시브 록 기타계의 "두 스티브"중 한명이다. 나머지 한명은 예스와 아시아에서 활동했던 스티브 하우. 둘은 같이 슈퍼밴드 GTR에서 활동한 바 있다.
  • 유독 한국에서 표기가 들쭉날쭉한 사람이다. "스티브 해킷"이 자주 쓰이지만 그 외에도 "스티브 하켓" "스티브 해켓" "스티브 하킷" 등 수많은 바리에이션이 존재한다.
  • 결혼은 총 세번했다. 두번째 아내와는 이혼 과정에서 로열티 및 저작권 문제가 생겨 수년간 법적공방을 벌여야했다.
  • 폴란드계 영국인이다. 가족이 1차 세계대전 도중 독일과 러시아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유럽 난민 사태 당시 난민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다.


[1] 피터 가브리엘보다 딱 하루 일찍 빨리 태어났다.[2] 하지만 제네시스의 멤버들과는 음악적인 갈등이었을 뿐 개인적으로 별 문제는 없다. 필 콜린스가 당뇨와 척추 질환으로 급격히 노쇠한 모습을 보고 2024년 데일리 텔레그래프 인터뷰에서 북받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3] 제네시스는 1981년 Abacab 앨범에서 노선을 프로그레시브 록에서 팝으로 바꾸고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4] 특히 스윕 피킹을 그로부터 배운거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