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2 15:05:35

승계련

파일:승계련.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계련(啓璉) / 만송(晩松)
본관 연일 승씨[1]
출생 1899년 1월 3일
평안북도 정주군 신안면 안흥리[2]
(현 평안북도 정주시 신안리)
사망 1961년 7월 16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해방촌
종교 천도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541호
상훈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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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6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99년 1월 3일 평안북도 정주군 신안면 안흥리(현 정주시 신안리)에서 아버지 승처인(承處仁)과 어머니 안동 김씨 김의사(金義師)의 딸 사이의 2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정주군 지역에 흉년이 들자 소 한 필과 논·밭을 팔아 만주에서 잡곡 한 트럭을 들여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등 빈민들을 구조하는 데에 힘썼으며, 평소에도 연일 승씨 문중 및 주변의 고학생들의 학비를 대주는 등 명망이 있었다.

1920년 7월 중순 정주군 신안면 자택에서 만주 독립운동단체 광한단(光韓團) 단원인 김관성·박민희(朴敏熙)·이명환(李明煥) 등에게 독립운동 자금 700원을 제공하였다. 1922년에는 가산을 털어 남강 이승훈을 도와 오산학교의 설립을 주도하여 11월부터 설립자 겸 재단이사를 지냈으며, 1925년 1월에는 재단법인 오산학교의 감사에 선임되어 이후 20여 년 간 역임했다.

1928년에는 강우규 의사의 장남 강중건(姜重建)이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거지로 변장하고서 찾아와 만주 삼원보의 신흥무관학교에 독립운동자금을 보내줄 것을 청하자, 자신의 논밭 15마지기를 팔아 송금해주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고 같은 해 11월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송치되었다가, 이후 정주지방법원 검사분국에서 기소중지 처분을 받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 1931년 정주군 아이포면에 있는 대산농민사(大山農民社)에 회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이후에는 천도교의 농민조직인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에 가담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8.15 광복 후 1948년 5월, 4남 2녀[3]의 자식들을 비롯한 일곱 식구를 이끌고 월남하여 서울특별시 용산구 해방촌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가난으로 손수레를 끌고 다니고 뻥튀기 장사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나갔으며, 1950년 6.25 전쟁 때는 경상남도 부산시로 피난하였고 그곳에서 거리에 토정비결을 봐주는 노점을 차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1961년 7월 16일 별세했는데, 별세 직전에는 100환 어치의 약을 살 돈도 없었을 정도로 빈곤했다고 한다.#

200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2012년 6월 29일 그의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3. 여담

  • 장녀 승영숙(承永淑)은 수도여자고등학교 재학 중에 학비를 낼 길이 없어 졸업하지 못하고 학업을 중도에 포기했는데, 승계련 사후 조선일보에 승계련의 유족들이 어렵게 살고 있다는 기사가 나간 뒤 학교 측에서 납입금을 전액 부담하기로 하고 졸업장을 내주었다.
  • 차남 승영식(承永軾)은 대한민국 육군본부 수송대에 입대하여 복무 중이었는데, 승계련 사후 생계 곤란을 이유로 제대 여부 심사가 이뤄져 결국 특별히 제대가 이뤄졌다.#


[1] 대촌파(大村派)-정문공파(旌門公派) 28세 현(鉉) 항렬. 족보명은 승상현(承商鉉).[2] 연일 승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승병일·승영제·승영호·승준현·승진·승치현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연일승씨대동보 대촌파-정문공파 340쪽에는 승영무(承永武)·승영식(承永軾)·승영빈(承永斌)·승영진(承永振)·승영태(承永泰) 등 5명의 아들이 있는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