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영제(英濟) |
본관 | 연일 승씨[1] |
출생 | 1896년 10월 18일 |
평안북도 정주군 신안면 안흥리[2] (현 평안북도 정주시 신안리) | |
사망 | 1928년 12월 |
중화민국 길림성 길장도(吉長道) 반석현(磐石縣)[3] | |
종교 | 대종교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승준현은 그의 맏형이며, 독립유공자 승치현은 그의 5촌 당숙이다. 독립유공자 승병일은 그의 조카[4]이다.
2. 생애
승영제는 1896년 10월 18일 평안북도 정주군 신안면 안흥리(현 정주시 신안리)에서 아버지 승지홍(承址弘)과 어머니 녹주 전씨(麓州 全氏) 사이의 4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그는 정주 오산중학교에서 수학하다가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집안현(輯安縣)[5]으로 망명한 뒤 대종교에 입교했다. 이후 1919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독립단 단장 조맹선의 부관으로 활약하는 한편 봉천성 흥경현(興京縣) 제2구(第二區) 왕청문촌(旺淸門村)[6] 반납배(半拉背)학교에서 청년 교육에 정진했다.
1920년 12월, 그는 친일단체인 보민회 간부를 숙청하고 일본영사관을 습격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청산리 전투 후에는 통의부의 이천민(李天民)과 함께 활동하는 한편 대한독립단 의무부감으로서 오광선·김창환(金昌煥) 등과 함께 활동했다. 이후 지청천을 따라 연해주로 건너갔다가 자유시 참변 때 하마터면 소련군에게 체포될 뻔했지만 가까스로 빠져나와 봉천성 동변도 통화현(通化縣) 삼원보(三源堡)[7]로 귀환했다.
1924년에는 조병준·신우현 등을 따라 수원특별구(綏遠特別區) 포두설치국(包頭設治局)[8]으로 이주하여 의민부(義民府)를 조직, 섭외부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28년 12월 만주보민회 회계 신모(申某)의 밀고로 길림성 길장도(吉長道) 반석현(磐石縣)에서 김정산(金正山)과 함께 일본군 헌병대에게 체포된 뒤 고문 끝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승영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 여담
- 부인 김해 김씨와의 사이에 외아들 승천석(承天錫)을 비롯해 1남 4녀를 두었다. 승천석은 1987년 10월 23일 독립유공자 이인영의 손자 이종갑(李鍾甲), 이강년의 아들 이인규(李麟揆), 신채호의 아들 신수범(申秀凡), 민영환의 손자 민병덕(閔丙德), 신팔균의 아들 신현택(申鉉宅), 조명하의 아들 조혁래(趙赫來) 등 6명의 독립유공자 손자녀들과 함께 순국선열유족회 회원 380명을 대표하여 '순국선열에 대한 보상법 제정'을 대한민국 국회에 청원하였는데, 한일수교 당시 대일청구권 자금 3억달러 중에는 순국선열에 대한 보상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일본 정부로부터 답변을 받았으나 현재까지 모든 보상에서 제외되었었으므로 정부에 합당한 보상을 요구한 것이 당시 청원의 골자였다.#
[1] 행단파(杏壇派) 28세 현(鉉) 항렬. 족보명은 승제현(承濟鉉).[2] 연일 승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승계련·승병일·승영호·승준현·승진·승치현도 이 마을 출신이다.[3]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지린시 판스시(磐石市).[4] 승병일의 아버지 승영기(承英基, 족보명 승민현承民鉉)는 본래 승영제의 둘째 형이나, 자식이 없던 5촌 당숙 승치현에 입양되었으므로, 승영기의 차남인 승병일은 족보상으론 7촌 재종질(再從姪)이 된다.[5]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지안시(集安市).[6]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만주족자치현(新賓滿族自治縣) 왕칭먼진(旺淸門鎭) 왕칭먼조선족촌(旺淸門朝鮮族村).[7]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류허현(柳河縣) 싼위앤푸조선족진(三源浦朝鮮族鎭). 이 지역에 삼원포촌(三源浦村)이 생긴 것은 1922년의 일이며, 1934년에서야 통화성(通化省) 유하현(柳河縣) 관할이 되었다.[8] 현 중화인민공화국 내몽골 자치구 바오터우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