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01:18:43

시칠리아(속주)

<colbgcolor=#cc0000> 시칠리아
Provincia Sicilia
로마의 속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icilia_SPQR.png

로마 제국 전성기 시절 (120 AD) 시칠리아 속주의 위치
241 BC–476 AD
<colcolor=#fff> 위치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시칠리아
파일:몰타 국기.svg 몰타
중심 도시 시라쿠사
국가원수 로마 황제
언어 라틴어
그리스어
민족 라틴족
그리스인
멸망 이후 동고트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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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walksofitaly.com/DSC_7760.jpg
빌라 로마나에서 발견된 모자이크 벽화 비키니를 입은 소녀들[1]

1. 개요2. 역사
2.1. 포에니 전쟁과 로마의 정복2.2. 라티푼디움과 노예 전쟁2.3. 속주의 발전과 로마의 쇠락
3. 경제4. 하위 지역들

1. 개요

시칠리아는[2] 로마 공화정속주로서 정복한 첫 번째 지역으로 지금의 이탈리아시칠리아 섬과 몰타로 구성되었다. 로마가 발을 들이기 전, 시칠리아의 동남부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인 시라쿠사가, 서부는 지중해 서부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했던 카르타고가 점유하고 있었다. 이때, 카르타고와 로마 공화정 간에 포에니 전쟁이 발발했고 로마는 1차와 2차 포에니 전쟁에 걸쳐 시칠리아와 몰타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고, 시칠리아와 몰타는 하나로 묶여 시칠리아라는 이름으로 속주가 되었다. 이후, 시칠리아는 로마 제국의 최대 밀 생산지가 되었고 로마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3]. 그러나 4~ 5세기에 들어서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가 되고, 훈족의 침입이 시작되며 북쪽 야만족들이 로마의 땅으로 남하를 하는 등 로마는 쇠퇴해 갔고, 시칠리아 또한 야만족들에게 정복당해야했다. 이후, 동고트 족이 이탈리아 지역을 정복하여 동고트 왕국을 세웠고, 시칠리아와 몰타 지역 역시 왕국에 정복당하게 되었다.
파일:sicilia.jpg
당시 시칠리아 속주의 지도[4]

2. 역사

2.1. 포에니 전쟁과 로마의 정복

시칠리아의 기록된 역사로는 처음 발을 디딘 사람들은 그리스인이었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무역을 더욱 활발히 하기 위해 지중해 곳곳에 식민지를 세웠는데, 시칠리아 역시 테네아와 코린트에 의해 식민지가 세워졌다. 이 식민 도시의 이름은 시라쿠사로 시칠리아 섬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이후,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한 페니키아계 국가인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시라쿠사를 포함한 여타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시칠리안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전쟁은 승패없이 섬의 서부는 카르타고가, 섬의 동남부는 시라쿠사가 차지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고, 시라쿠사와 카르타고는 서로 동맹을 맺게 되었다.

BC 264년,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로마 공화정이 신흥 강국으로서 떠오르기 시작했고,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때, 당시 시라쿠사의 독재자였던 히에론 2세가 시칠리아 북동부를 점유하고 있던 마메르인들[5]을 섬에서 몰아내기 위해 메사나를 공격했고, 마메르인들이 카르타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런데, 카르타고는 시라큐스의 군대를 막기만 했을 뿐 아니라, 아예 메사나를 점령해 버렸다. 이에 마메르인들은 로마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로마가 카르타고 군대를 몰아내고 메시나를 점령하며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자연스레 전쟁에 휘말리게 된 시라쿠사는 해군력은 강했으나 육군에서 크게 밀린 카르타고를 배신하고 해군력은 약하지만 육군에서 큰 승리를 여러번 거둔 로마와 동맹을 맺는다. 기원전 241년, 드디어 로마가 카르타고를 이기게 되고, 카르타고가 로마의 시칠리아 점유권을 인정하며 시칠리아 속주가 세워지게 되었다.

기원전 218년, 카르타고가 히스파니아에 식민지를 세워 국력을 회복한 후, 카르타고의 장군인 한니발이 선제 공격을 하며 로마와 카르타고 간에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따라 시칠리아 역시 카르타고 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으며, 로마와 동맹을 맺었던 시라쿠사가 위기를 직감한다. 이후, 1년도 안 지나 한니발이 피레네 산맥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고 시라쿠사는 로마를 배신하고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는다. 그러나 로마는 나라를 재정비한 후, 그리스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카르타고 군을 물리쳤고 자마 전투에서 카르타고가 큰 피해를 입으며 전쟁이 끝났다. 이때, 로마는 배신을 한 시라쿠사를 점령[6]해 시칠리아를 통일했다. 이후,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가 카르타고를 멸망시켜면서 로마는 시칠리아 뿐만이 아닌 히스파니아 남부와 아프리카[7]지역에도 속주를 세웠고, 우후죽순으로 아시아, 발칸 반도, 시리아 지역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로마 공화정의 성장은 로마 내부의 전쟁을 불러오게 되었다.

2.2. 라티푼디움과 노예 전쟁

카르타고를 멸망시키며 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 로마 공화정은 새로 정복한 속주들의 넓은 땅에 농장들을 건립하고 포에니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군들과 귀족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다. 이때, 매우 넓은 땅이 분배되다 보니 땅의 값이 떨어졌고, 농장의 주인들은 값싼 인건비의 전쟁 노예들을 부려 엄청난 양의 밀을[8] 생산해내었다. 그리고 이 농장들은 노예 노동에 의한 대농장이라는 뜻의 라티푼디움이라고 불리운다. 값싼 인건비와 땅 값으로 생산된 곡식들은 로마 본토의 도시들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속주 식민지들에서 생산한 곡식의 값이 너무 싸다보니 로마 본토의 자영농이 망하게 되었다. 자영농민들에 의해 돌아가는 시스템이었던 로마 공화정은 지나치게 확장된 속주들과 라티푼디움으로 인해 위기를 맞았다. 이후, 로마 공화정 내부에서 내전이 일어났고, 로마는 제정 시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특히나 여러 속주들 중 에서도 곡식의 생산량이 제일 많았던 속주는 밀 셔틀 시칠리아였다. 북아프리카와 발칸 지역의 통제가 어려워지며 시칠리아에 수요가 집중된 것도 이유였지만, 시칠리아 농장들의 노예들이 매우 안좋은 대우를 받고 심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노동을 하고 있었기에 밀 생산량이 가장 많기도 했다. 결국 기원전 135년, 고된 노동과 안 좋은 대우에 화가 날대로 난 시칠리아 속주의 노예들은 시리아 출신 노예였던 에우노스(Eunus)를 왕이라고 부르며 반란을 일으켰고, 이 반란은 제1차 노예 전쟁(Servile War)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반란군은 에우노스의 뛰어난 무력과 20만[9]이나 되는 반란군의 수로 로마 공화정 군대를 여러 번 격퇴했으나 기원전 133년 메시나 근처에서 로마 장군 푸블리우스 루필리우스에게 굴복당하며 전쟁은 끝이 났다. 전쟁의 결과로 수많은 시칠리아 노예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되었다.

기원전 103년 시칠리아의 노예들은 다시 한 번 제2차 노예 전쟁을 일으킨다. 노예들은 트뤼폰(Tryphon)과 아테니온 (Athenion)을 에우노스의 뒤를 이을 사람으로 선포하며, 로마공화정에 계속해서 저항을 했다. 하지만 이번 반항 역시 집정관 마니우스 아퀼리우스에게 진압당했다. 그러나 기원전 73년 노예 검투사인 스파르타쿠스드라마 주인공이 맞다.를 중심으로 노예들이 다시 한 번 제3차 노예 전쟁을 일으킨다. 이 전쟁은 이전 전쟁의 주 무대였던 시칠리아 지역을 벗어나 전 이탈리아 반도에서 일어났다. 일개 노예 검투사였던 스파르타쿠스는 막대한 군사력을 지녔던 크라수스에게서 연이은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펜텔리아에서 막대한 수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로마군에게 패배하고 최후를 맞게 되었다. 이후, 로마 공화정은 본보기로서 6000명의 노예들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그러나, 자영농민들의 쇠락으로 인한 시스템 붕괴와 노예 전쟁으로 인한 본토의 큰 피해, 내전으로 인해 공화정은 무너져 내리고, 로마 제정이 들어서게 되며 타민족과 전쟁 노예에 대한 개방적인 정책[10]이 실시되었고, 노예들의 삶은 한층 나아지게 되었다.[11]

2.3. 속주의 발전과 로마의 쇠락

시칠리아 속주는 계속해서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농장 지주들이 통치권을 장악하는 등의 굴곡진 역사를 쓰기도 했지만, 엄청난 양의 밀 생산으로 경제가 발전되고 거의 로마 본토 다음으로 문화가 발전해 나가는 등 평탄한 역사를 쓰기도 했다. 이 시대에 시칠리아에서는 로마 문화가 적극적으로 수용되며 문화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 그를 증명해주는 것이 세계문화유산인 로마나 빌라와 피아자 아르메니아의 모자이크 벽화이다.

또한 시칠리아에서는 그리스도교 문화가 매우 빠르게 전파되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그리스도교를 믿는 것은 큰 범죄였으나 시칠리아에서는 그리스도교가 크게 성행했다. 그래서 시칠리아에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카타니아의 성녀 아가타(축일 2월 5일)와 시라쿠사의 성녀 루치아(축일 12월 13일)이다. 시칠리아에서는 수많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등장하였으며, 로마의 국교가 그리스도교가 되는 데에 약간이라도 공헌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팍스 로마나 시대가 끝이 나고, 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으로 나뉘어지며 시칠리아도 같이 쇠락을 맞는다. 그에 겹쳐 훈족의 침입이 이루어지며 수많은 야만족들이 훈족으로 부터 도망치고, 따뜻한 곳으로 이주하기 위해 자신들과의 상호 협력 계약을 어긴 로마의 땅을 침입했다.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는 430년대에 아프리카를 점령하고 해적 행위를 시작했으며, 437년에 처음으로 시칠리아 해안을 습격했다. 439년 10월 카르타고를 점령한 후, 반달족은 카르타고에 정박한 서로마 함대의 일부를 빼앗아, 시칠리아사르데냐(서로마 제국의 주요 곡물 공급원), 코르시카, 발레아레스 제도를 포함한 지중해 전역의 로마영토를 공격했다. 서로마 제국은 마르켈리누스나 달마티아 군단을 파견하는 등 시칠리아를 끈질기게 방어했기 때문에 시칠리아에서 반달족은 해적질만 할 수 있었다. 468년에 본 곶 해전에서 로마가 패배하여 시칠리아는 마침내 함락되었지만 476년 오도아케르가 다시 빼았았고 이후 493년에 테오도리크 대왕에게 양도되었다.

3. 경제

고대 시대의 시칠리아는 사실상 로마 제국의 서쪽 지역을 모두 먹여 살리는 지역으로 막대한 양의 밀을 수출하며 경제적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시칠리아는 로마의 속주들에서 가장 많은 양의 밀을 생산해냈다. 이는 시칠리아가 로마의 본토와 가깝고, 비교적 통제가 쉬운 지역이었기에 가능했다. 당시에 많은 지역들이 반란과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 로마 제국의 통제가 힘들었는데 비해, 시칠리아의 통제는 순조로웠고 로마 제국에서 가장 많은 곡식을 생산해내게 되었다.

시칠리아는 수많은 농장들이 설립되기 이전에는 두터운 삼림으로 유명했다. 이 삼림은 섬 전체를 뒤덮고 있었으며, 이후 카르타고와 로마에 의해 거의 다 파괴되고 만다. 로마는 이 삼림을 함대를 건조하거나 로마 본토의 도시에 나무집을[12] 짓는 데 사용했다. 결국에 모든 삼림이 파괴되고, 그 땅에는 수많은 농장들이 세워져 밀을 생산하게 되었다. 나무 셔틀 그 외에도 시칠리아는 과일이나 아몬드도 수출했다.

4. 하위 지역들

시칠리아 속주는 총 2명의 관리가 두 지역으로 나누어 통치를 했다. 이는 시칠리아 서부를 제1차 한니발 전쟁에서 이겨 획득한 후, 나중에서야 시라쿠사를 정복했기 때문이다.
  • 시라쿠사(Siracusa): 고대 그리스식민지였던 도시 시라쿠사가 주도시인 이곳은 시칠리아 섬의 동부 지역에 위치해 있었으며, 로마인보다 그리스인들의 비율이 높아, 본토로부터 차별 대우를 많이 받았다.
  • 릴리배움[13](Lilybaeum): 시칠리아 섬의 서부 지역에 위치해 있었으며, 로마인들이 매우 많이 살았다.


[1] 고대 로마시칠리아를 점령했을 때 만들어진 것으로 대표적인 시칠리아의 로마 시대 유물이다.[2] 영어로는 sicilia로 발음이 시실리아이고 이탈리아어로는 sicilia로 발음이 시칠리아이다.[3] 다만 북이탈리아처럼 본국 이탈리아에 합병하자는 여론은 꾸준했지만, 북이탈리아와는 달리 합병되지 못하고 결국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속주로 남아있었다.[4] 단, 몰타가 지도에서 빠져있다.[5] 시라쿠사의 용병 출신 민족이다.[6] 시칠리아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시라쿠스 출신의 인물인 아르키메데스가 목숨을 잃는다.[7] 당시의 아프리카는 아프리카 대륙 전체가 아닌 알제리 해안 지역과 튀니지, 리비아 해안의 서쪽을 가리켰다.[8] 옥수수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건너온 작물이다. 당연히 로마 시대의 유럽에는 그런 거 없었다.[9] 시칠리아의 역사학자인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의 추측으로 정확하지는 않다.[10] 사실 로마 제국이 넓은 영토에도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 이 때문이다.[11] 제3차 노예 전쟁은 로마 공화정의 역사에서 큰 비중이 있지만 주제인 시칠리아 속주의 역사에서 멀리 벗어나므로 자세히 서술하지 않는다. 스파르타쿠스 문서의 스파르타쿠스 전쟁 문단을 통해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12] 여담이지만, 특히나 로마를 확장하는데 많이 쓰였던 이 나무들은 네로 황제의 방화로 순식간에 다 타 버린다(...)[13] 지금의 마르살라(marsala)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