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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도시 آمل 아몰 | Amol | ||
지역 | 마잔다란주 | |
면적 | 21km² | |
인구 | 238,528명 (2016년) | |
고도 | 76m | |
시장 | 하미드 하셰미 |
9월 17일 광장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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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란 북부 마잔다란 주의 도시. 수도 테헤란에서 동북쪽으로 100km, 주도인 사리에서 서쪽으로 50km 떨어져 있다. 인구는 약 30만으로, 사리와 거의 비슷하다. 시가지는 하라즈 강을 끼고 형성되어 있다. 라슈트, 사리 등 다른 북부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엘부르즈 산맥과 카스피해 사이에 위치하며 바다와는 약 15km 거리를 두고 있다. 이란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들 중 하나로, 마잔다란 문화의 중심이다. 중세의 역사가 아부 자파르 무함마드 앗 타바리, 수피 사상가 사이드 하이다르 아물리 등 여러 위인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산업 역시 공업, 농업, 축산업이 고루 발전하였으며 이란의 쌀 생산 중심지이다.[1] 시내에는 유구한 역사에 비해 많은 전란으로 오래된 건물은 많지 않은 편이며, 아자드 이슬람 대학이 위치한다.2. 역사
아몰의 아타쉬카데 (조로아스터교 사원) 유구 |
아몰에서 주조된 호스로 2세의 은화 |
아몰이란 지명은 상고대에 거주하던 아마르드 (아무이) 민족[2]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전설상의 왕조인 피샤드 왕조 때부터 도시가 형성되었다고 하며, 파르티아 국왕 프라아테스 1세가 현지 부족장 마르다스를 격파하고 주민들을 북쪽 변경으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이주된 주민들은 아물이란 도시를 세웠는데, (현재 투르크메나바트) 그로부터 아무다리야 강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한편 파르티아 시기에 아몰은 하모 혹은 호모..로 불렸고, 사산 제국 시대부터 은도금 접시와 카펫을 생산하였다. 6세기에는 아후라마즈다의 사도임을 칭하며 조로아스터교의 개혁을 주장하던 사상가 마즈다크가 사제들의 압력을 피해 아몰로 피신하였으나 결국 524년에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마즈다크교) 사산 제국기에 아몰은 마잔다란 (타바리스탄)의 주도로 번영하였고, 이스파한보다도 큰 도시였다. 시내에는 성채와 조로아스터교 사원인 아밤 쿠예, 바자르 등이 있었다.
2.1. 북이란 왕조들의 수도
자이디 이맘 하산 알 우트루쉬의 영묘
이슬람 정복 후에도 일대에는 자치가 유지되었고, 아몰은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토착 왕국인 다부이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의 쿠파 총독 사이드 빈 알 아스가 4천 병력과 타바리스탄 정복을 시도했으나 2년 간의 원정에도 다부이 조의 파루칸 대왕에게 격퇴되었다. 다만 760년 압바스 왕조의 페르시아인 장수 완바드 후르무즈드에게 정복된 후 주민들은 점차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압바스 조의 대신 칼리드 빈 바르마크는 아몰 총독을 지내며 궁전을 세우기도 하였다. 9세기 타히르 왕조의 높은 세금에 반발하던 주민들은 자이디 이맘들의 선교에 호응하였고, 864년 아몰을 중심으로 한 알라비 왕조가 성립되어 한세기 만에 재차 자립하였다. 비록 874년 사파르 왕조가 아몰을 일시 점령한 것에 이어 900년에는 타바리스탄 전역이 사만 왕조에게 정복되었으나 알라비 조는 914년 복구되었다. 그 수도로써 아몰은 번영하였고,비단 생산으로 명성을 떨쳤다.
940년 아몰은 알라비 조를 무너뜨린 지여르 왕조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본래 지여르 조는 동쪽의 고르간을 수도로 삼았으나, 1012년 아미르 카부스가 폐위당한 후 이어진 혼란기 도중 1035년 가즈니 왕조에게 고르간을 상실하자 아몰로 천도하였다. 당시 지여르 조의 권신 아부 칼리자르 이븐 바이한은 아몰에 알라비 조의 중흥 군주 하산 알 우트루쉬를 기리는 모스크를 세웠는데, 후일 이맘 하산 아스카리 모스크가 되었다. 1090년 지여르 조는 이스마일파가 세운 아사신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그후 651년부터 타바리스탄 산지에서 이어져 오던 열두이맘파 국가 바반드 왕조가 두각을 드러내어 사리를 수도로 하여 해안을 장악하였다. 바반드 조의 알리 1세는 아흐마드 산자르의 침공을 격퇴하고 셀주크 제국의 내전에 개입하여 명성을 쌓았고 마잔다란은 물론 고르간까지 장악하였다. 1141년 라이의 아미르 압바스가 아몰을 장악했지만 알리와 휴전하고 회군하였다.
알리의 뒤를 이은 샤 가지 루스템은 아사신 자객에게 아들을 잃자 1156년 보복에 나서 길란을 점령하였다. 12세기 말엽 바반드 조는 서쪽의 바두스판 조를 제압하는 등 아사신을 제외한 북부 이란을 평정하였다. 다만 1190년대부터 이어진 호라즘 왕조와의 전쟁으로 고르간을 잃고 사리가 파괴되었다. 아몰 역시 점령되었고, 1198년에는 역병이 돌았다. 한편 1200년 호라즘샤 테키쉬의 사후 실지를 수복한 아르다시르 1세 (샤 가지 루스템의 손자)는 파괴된 사리 대신 아몰로 천도하였다. 1210년 바반드 조는 대가 끊겨 호라즘에 병합되었지만, 1238년 아르다시르 1세의 외증손 아르다시르 2세가 아몰을 수도로 삼아 재차 자립하였다. 일 칸국의 휘하에서 자치를 누리며 바반드 조는 이어졌고, 수도 아몰에는 니자미야 마드라사 등 여러 건축물이 세워졌다. 다만 14세기 들어 여러 군벌들의 침공과 내분으로 바반드 조는 쇠퇴하였고, 1344년 사르바다르 군주 와지흐 앗 딘 마수드가 아몰에 입성하였다.
아몰을 포기하고 후퇴했던 바반드 군주 하산 2세는 사리를 수복해 적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동맹인 바두스판 조의 에스칸다르 2세와 함께 마수드를 포위해 그를 사로잡았다. 위기를 극복한 하산 2세는 1349년 점차 세력을 키워가던 사리 총독 잘랄 이븐 아흐마드를 처형했는데, 이에 후자가 속한 잘랄리 가문이 반란을 일으켰다. 하산 2세는 출라브 가문의 도움을 얻으려 했으나, 그 유력자인 키야 아프라시얍의 두 아들들이 목욕 중이던 하산을 암살하였다. (4월 14일) 그후 키야 아프라시얍이 일대를 장악하며 아프라시얍 왕조를 세웠는데, 마잔다란 주민들은 그를 찬탈자로 여겨 반발하였다. 아프라시얍은 무함마드 혈통, 즉 사이드인 미르 부즈루크의 지지를 요구했으나 후자의 추종자들 역시 반발하자 감금해버렸다. 1359년 추종자들의 봉기로 석방된 미르 부르주크는 마잔다란 반군을 이끌고 아몰 부근에서 아프라시얍과 그의 세아들들을 전사시켰다.
2.1.1. 마라쉬 왕조
1425년의 북부 이란. 초록색이 마라쉬 왕조의 영토이다
이로써 미르 부르주크는 아몰을 수도로 하는 마라쉬 왕조를 세웠다. 그리고 지속된 대립의 결과 사리가 함락되 후 출라브 가문은 거의 멸족되었다. 유일하게 생존한 아프라시얍의 아들 이스칸다르 샤이키는 티무르에게 망명하였다. 한편 1362년 미르 부르주크는 종교에 헌신하며 아들들 중 리다 앗 딘을 아몰, 카말 앗 딘을 사리에 봉하였다. 복수의 때를 기다리던 이스칸다르 샤이키는 티무르를 설득하여 1393년 그와 함께 마잔다란을 정복하였고, 아몰의 총독으로 봉해졌다. 마라쉬 가문은 트란스옥시아나로 유배되었고, 이스칸다르는 미르 부르주크의 무덤을 파괴하였다. 이에 아몰의 주민 상당수가 사리로 이주하였다. 그러다 1402년 이스칸다르는 티무르에 반기를 들었다가 패하고 이듬해 자살하였다. 1406년 티무르는 카말 앗 딘의 아들 사이드 알리 사리를 석바하여 아몰 총독으로 봉하였다. 동시에 이스칸다르의 두 아들 역시 사면하여 피루즈쿠에 봉하여 마라쉬 조를 견제하게 하였다.
1405년 티무르의 사후 마라쉬 조는 사리를 수복하며 재차 마잔다란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15세기 중반 마라쉬 조는 아몰과 사리의 왕공들끼리 내전을 벌이며 쇠퇴하였고, 내전은 1489년 사리의 왕공 지나 알 아비딘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다만 1502년 지나 알 아비딘의 동생 샴스 앗 딘이 사망한 후 장군 루스템이 찬탈하였는데, 그 역시 사망한 후 미르 부르주크의 아들로 아몰에 봉해졌던 리다 앗 딘의 고손자인 미르 알리가 아몰을 기반으로 마잔다란을 통합하였다. 한편 아프라시얍 왕조의 키야 후세인 2세는 백양 왕조의 해체를 틈타 라이와 셈난을 점령하며 이란 중부로 진출했지만 1504년 이스마일 1세에게 패하고 자살하였다. 그들과 달리 샴스 앗 딘, 루스템과 마찬가지로 미르 알리는 이스마일의 심복이 되었고 후자의 경우 찰디란 전투에 참전하여 후퇴하던 이스마일을 보호하기도 하였다. 1521년 미르 알리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다시 알리 사리의 5대손인 압둘 카림 2세가 계승하였다.
마라쉬 시대에 세워진 미르 하이다르 영묘
압둘 카림 2세에게는 미르샤히와 마흐무드의 두 아들이 있었다. 그중 미르샤히가 타흐마스프 1세의 지원을 받으며 제위를 유지하였고, 그가 사망하자 마흐무드의 아들 압둘라 2세가 계승하였다. 불안정한 권력을 누리던 압둘라 2세는 딸 카이르 앗 니사 베굼 (마흐디 울야)을 타흐마스프 2세의 장남 무함마드 호다반다와 결혼시켰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 바로 후일 사파비 조의 중흥을 이끈 아바스 1세이다. 한편 민심의 반발을 사던 압둘라 2세는 결국 사촌인 미르샤히의 아들 술탄 무라드 칸에 의해 폐위된 후 살해되었다. 무라드 역시 얼마간 통치하다가 사망하였고 그후 아들 미르자 칸이 계승하였다. (1575년) 그 이듬해 타흐마스프 1세가 사망하고 차남 이스마일 2세가 즉위했는데, 1577년 암살당하고 동생인 무함마드 호다반다가 계승하였다. 후자는 정치적으로 무능하였기에 왕후인 마흐디 울야가 전면에 나섰다. 그녀는 부친 압둘라 2세의 복수를 하고자 하였다.
당시 원수인 당숙 무라드가 이미 죽은 상태였기에 마흐디 울야는 그의 아들이자 자신의 6촌인 미르자 칸을 복수의 대상으로 삼았다. 1579년 그녀는 미르자 칸의 폐위를 선포, 자신의 조카 미르 알리 칸을 마잔다란 총독으로 삼았다. 그후 미르자 칸에게 수도 카즈빈으로의 소환을 명령하며 미르 알리 칸에게 2만 기병을 주어 마잔다란으로 파견하였다. 소환을 거부한 미르자 칸은 격렬한 저항에도 사파비 군에 패배하자 피루자 성채로 피신해 농성하였다. 공성전이 길어지자 사파비 군은 성내로 향하는 수로를 끊었고, 미르자 칸은 목숨 보장을 대가로 항복하였다. 이때 미르 알리 칸을 비롯한 키질바시 장군들이 함께 쿠란을 걸고 맹세했는데, 카즈빈으로 압송되던 중 결국 미르자 칸은 살해되었다. 자신들의 약속을 파기한 것에 분노한 키질바시 군부는 카즈빈의 하렘으로 쳐들어가 마흐디 울야를 살해하였다. 이후 미르자 칸의 아들 미르 무라드가 마라쉬 왕위를 이었다.
2.2. 근대
아바스 1세에 의해 재건된 미르 부르주크 (카붐 앗 딘 이븐 압둘라 알 마라쉬, ~ 1379년)의 영묘
비록 미르 무라드가 계승하긴 했지만 이미 1579년의 침공으로 마라쉬 조의 세력은 미약해진 후였다. 마흐디 울야의 살해 후 이어진 혼란에 1590년 무함마드 호다반다가 폐위되고 즉위한 아바스 미르자, 즉 아바스 1세는 내우외환을 극복한 다음 자신이 압둘라 2세의 외손임을 내세워 마라쉬 조를 병합하였다. (1596년) 그는 외가측 조상 미르 부르주크 영묘의 돔에 황금을 입혔다. 이로써 바반드 왕조 때부터 5세기간 이어지던 마잔다란 지역의 쉬아 왕조들의 계보가 종식되었고, 이란 제국에 포함되었다. 사파비 시대에 아몰에는 여러 다리와 함께 사리, 고르간 방면 도로가 건설되었다. 아몰은 마잔다란 주의 주도가 되었고, 샤한샤들 중 아바스 2세가 선호하여 즐겨 찾았다고 한다. 18세기 나디르샤는 아몰에서 철광석 광산을 발견, 이를 기반으로 대포와 포탄 등을 주조하였다. 이때 도시에는 이란 최초의 총포 공장이 설치되었고, 한때 철갑선을 제작할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1879년 나시르 앗 딘 샤의 명으로 조성된 석각. 2차 대전 당시 러시아 군의 사격 연습 표적이 되었다..
18세기 말엽 아몰의 주민들은 잔드 왕조의 편에서 카자르 왕조의 아가 모하메드 칸을 격퇴하였다. 분노한 아가 모하메드는 결국 아몰을 점령한 후 주민들을 학살하고 도시를 파괴하였다. 이로써 아몰은 사리에게 주도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그럼에도 아몰은 여전히 중요한 산업 도시였고, 하라즈 강가에 늘어선 대장간들은 유럽인 여행가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세기 말엽, 아몰은 아민 알 자라브가 주도한 근대화 정책의 중심지였다. 이란의 첫 근대적인 제철소가 아몰에 세워졌고, 1887년 아민은 30년간 그 용광로의 사용권을 얻었다. 그와 함께 이란의 첫 철도 역시 아몰과 카스피해의 항구 마흐무다바드 사이에 놓였다. (1891년, 나세리야 철도) 1906년에는 러시아 인들에 의해 면화 제련소가 세워졌다. 20세기 들어서 심화된 영국과 러시아의 경제 침탈에 대항하여 아몰에서는 아미르 모바예드 사바둑히의 저항 운동이 있었고, 아몰 출신의 물라 알리 카니는 입헌혁명의 지도자 중 한명이었다.
2.3. 현대
19세기에 세워져 20세기에 꾸준히 보수된 다바즈다 체슈메 대교. 아몰의 랜드마크로, 12개의 아치가 특징이다.
레자 샤 팔라비는 유럽인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아몰에 각종 학교, 호텔, 창고, 궁전, 저택 등을 지었고 그 스스로도 1948년 방문하였다. 이후로도 상하수도와 전기 시설이 정비되고 직물 공장이 지어지는 등 발전이 이어졌다. 다만 테헤란과의 철도 건설은 엘부르즈 산맥의 험준한 지형 때문에 고초를 겪다가 1940년대 영국-러시아 군의 침공으로 60km를 남겨두고 중단되었다. 70년대에는 쌀 생산 증진을 위해 중국과 농업 기술 협력을 체결하고 아몰에 쌀농사 연구 기관을 설치하였다. 개방적인 도시였던 아몰은 이란 혁명 후 각종 반동 움직임의 거점이 되었다.
80년대 초엽 마오주의를 따르는 이란 공산당 연대가 봉기하여 게릴라 전에 나섰고 (정글 봉기), 이란 혁명 수비대에 6백명의 전사자를 안겼다. 1981년 7월 이들은 폭동을 통해 아몰을 장악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주동자들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비록 실패했지만 이 사전은 이란 좌파들의 뇌리 속에 강렬히 남아있다. 그 영향인지 2022년 9월 이란 시위 초반의 희생자 42명 중 아몰에서만 11명이 나와 이란 도시들 중 최다를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