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2 10:49:29

안티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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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내용
2.1. 현대인의 허무2.2. 가치 전도의 역사
2.2.1. 유대인 사제의 권력 유지 방안2.2.2. 예수의 봉기 : '기쁜 소식'2.2.3. 바울의 왜곡
2.3. 확신과 거짓말2.4. 마누법전2.5. 결론 : 유죄2.6. 그리스도교 탄압법
3. 한국어 번역본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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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티크리스트 : 그리스도교에 대한 저주 (Der Anticrist, Fluch auf das Christentum)』는 프리드리히 니체가 1888년에 저술했으나, 1894년이 되어서야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스에 의해 네 군데가 삭제된 상태로 출간된 책이다.

2. 내용

2.1. 현대인의 허무

선(Gut)이란 무엇인가? ㅡ 그것은 힘의 감정을, 힘에의 의지를, 힘 자체를 고양시키는 모든 것이다. 악(Schlecht)이란 무엇인가? ㅡ 약함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을 말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ㅡ 힘이 증가되고 있다는 느낌, 저항을 초극했다는 느낌을 말한다. 만족이 아니라 보다 많은 힘, 평화가 아니라 전쟁, 덕이 아니라 유능함. 우리의 행복의 공식은 하나의 긍정, 하나의 부정, 하나의 직선, 하나의 목표다. ⋯⋯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용기를 어디에 써야 할지를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나는 출구도 모르고 입구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출구도 입구도 모르는 채 서성이는 자일 뿐이다." ㅡ 현대인은 이렇게 탄식한다. ⋯⋯ 이런 현대성으로 인해 우리는 병이 들었다. 미심쩍은 평화, 비겁한 타협, 현대적인 긍정과 부정의 그 모든 도덕적인 불결함으로 인해 병들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용서하는' 이러한 관용과 넓은 도량은 우리에게 길을 잃어버리게 했다. 우리는 번개와 행동을 갈망했지만, 우리의 대기 속에서는 폭풍이 일고 있었고, 우리의 자연적인 본성은 어두워져만 갔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연민(Mitleiden)의 종교라고 부른다. ㅡ 연민은 생명의 에너지를 고양시키는 강장제로서 작용하는 감정과는 대립되는 것이다. 그것은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연민에 사로잡힐 때 사람들은 힘을 상실한다. 괴로움 자체로 인해 이미 삶에서 일어난 힘의 손실은 연민 때문에 더욱 커지고 늘어나게 된다. 연민을 통해서 괴로움 자체가 전염성을 갖게 된다. 이것이 첫 번째 관점이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관점이 있다. 만일 연민이라는 것을 그것이 보통 초래하는 반응들의 가치에 따라서 측정한다면, 삶을 위협하는 그것의 성격이 훨씬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몰락에 이른 것을 보존하고, 삶의 상속권을 박탈당하고 삶으로부터 단죄받은 자들을 위해 싸우며, 그것에 의해서 살아남게 되는 모든 종류의 실패자들을 통해서 삶 자체를 음산하면서도 의문스럽게 보이도록 만든다. 명심해야 할 것은 이러한 것이 허무주의적인 철학, 즉 삶을 부정하는 철학의 관점으로부터 행해졌다는 사실이다. 쇼펜하우어가 "삶은 연민에 의해서 부정되고, 보다 부정할 만한 것이 된다"고 말했을 때 그는 정곡을 찌른 셈이다. 연민은 니힐리즘의 실천인 것이다. ㅡ 연민은 무를 의지하도록 설득한다! ⋯⋯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무'라고 하지 않고 '피안'이라거나 '신' '참된 삶', 또는 열반, 구원, 지복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도덕과 종교가 어떤 점에서도 현실과 접촉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들에는 순전히 공상적인 원인(신, 영혼, 자아, 정신, 자유의지 ㅡ 혹은 '자유롭지 않은 의지'도 포함하여)과 순전히 공상적인 결과(죄, 구제, 은총, 벌, 죄 사함)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공상적인 존재들(신, 정신, 영혼) 사이의 교제. 공상적인 자연과학(인간중심적이며, 자연적 원인이란 개념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는), 공상적인 심리학(후회, 양심의 가책, 악마의 유혹, 신의 임재 등과 같은 종교적이고 도덕적 특질을 가진 기호언어의 도움을 받아 쾌감과 불쾌감이라는 일반적인 감정의 여러 상태를 스스로 오해하면서 해석하는 것일 뿐인), 공상적인 목적론(신의 나라, 최후의 심판, 영생). '자연'이라는 개념이 '신'에 대한 대립개념으로 일단 고안된 후부터는 '자연적인 것'이라는 말은 '비난할 만한 것'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야만 했다. ㅡ 저 허구적인 세계는 현실적인 것에 대한 깊은 불만의 표현이며, 자연적인 것(현실!)에 대한 증오에 뿌리를 두고 있다. ⋯⋯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 현실을 왜곡하면서 그것으로부터 도망하려고 하는 자는 누구겠는가? 현실로 인해 고통받는 자다. 현실로 인해 고통받는다는 것은 그 현실이 좌절된 현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 쾌감에 대한 불쾌감의 우세가 저 허구적인 도덕과 종교의 원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우세가 데카당스를 위한 공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오늘날 인류의 가장 높은 소망을 포괄하고 있는 모든 가치는 데카당스 가치다. 동물이든 종족이든 개체든 그것들이 자신의 본능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선호할 때 그것들은 타락하는 것이다. '고상한 감정'이라든가 '인류가 품어온 이상'이라든가 하는 것의 역사는 인간이 왜 그렇게 타락했는가에 대한 설명이 될지도 모른다. 사실, 삶 자체는 성장과 존속을 향한 본능, 그리고 힘의 축적과 힘을 향한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힘에 대한 의지가 결여된 곳에는 쇠퇴만이 존재하게 된다. 인류가 숭배해온 모든 최고 가치에는 이러한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 쇠퇴의 가치와 허무주의적 가치가 가장 신성한 이름 아래 횡횅하고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내가 주장하는 바이다.

2.2. 가치 전도의 역사

2.2.1. 유대인 사제의 권력 유지 방안

심리학적으로 고찰해볼 때, 유대민족은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서도 최고도의 교활함으로 자기 보존을 꾀하면서 자발적으로 모든 데카당스적 본능을 편들었던, 가장 질긴 생명력을 지닌 민족이다. ㅡ 유대인은 데카당과는 정반대다. 데카당스적 본능에 의해 지배당해서라기보다는 '세계'에 맞서 이겨낼 수 있는 힘이 그러한 본능에 내재돼 있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들의 착각을 일으킬 만큼 자신을 데카당으로 표현했던 것이었다. 그들은 존재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라는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지없이 섬뜩한 확신을 가지고 어떤 대가를 치르든 존재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그들이 치른 대가는 모든 자연, 모든 자연성, 모든 현실성,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의 철저한 왜곡이었다. 그들은 치유가 불가능한 방식으로 종교, 종교적 숭배, 도덕, 역사, 심리학에서 차례차례 '선'과 '악'의 개념과 '참'과 '거짓'의 개념을 전도시켜 그것들의 자연적 가치와는 모순되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더할 나위 없는 배우적 천재성을 발휘하여 온갖 데카당스 운동의 정점에 섰고, 그 결과 삶에 긍정적인 그 어느 집단보다 더 강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힘을 갈구하는 유형의 인간, 즉 사제적 유형의 인간에게는 데카당스란 수단에 불과하다.

그것은 그들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자연적 가치들에서 자연성을 박탈해가는 전형적인 역사로서 무한한 가치가 있다. 이스라엘도 본래는 특히 왕조시대에는 만사와 올바른 관계를, 다시 말해 자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의 야훼는 힘 의식의 표현이었고 그들 자신에 대한 기쁨, 그들 자신에 대한 희망의 표현이었다. 야훼를 통해 그들은 승리를 거두고 구원을 얻을 것을 기대했으며 야훼에 의지하면서 그들은 또한 자연이 그들 민족이 필요로 하는 것을 ㅡ 무엇보다도 비를 ㅡ 내려주리라고 믿었다. 야훼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이며 그러한 이유로 정의의 신이다. 이러한 논리는, 힘을 가졌고 그렇게 힘을 가졌다는 데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도 없는 모든 민족이 지닌 논리다. 한 민족이 갖는 자기 긍정의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은 축제 의식을 통해서 표현된다. 그들은 자기 민족을 정상에 서게 한 위대한 운명에 감사를 올리고, 사계절의 순환에 감사를 올리며, 목축과 농경을 통해 얻은 모든 복에 대해 감사를 올린다. ㅡ 이러한 상태는 내부적으로는 무정부 상태, 외부적으로는 아시리아의 침략에 의해 비참하게 끝장이 난 후에도 오랫동안 이상으로 남아 있었다. 이 민족은 그들의 가장 큰 소망으로서 훌륭한 군인이기도 하고 정의로운 심판자이기도 한 왕에 대한 비전을 견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전형적인 예언자(즉 그 시대에 대한 비평가이며 풍자가)인 이사야가 그랬듯이 말이다.

그러나 아무런 희망도 성취되지 않았으며, 과거의 신은 이제 그가 예전에 할 수 있었던 일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 신을 버리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사람들은 신의 개념을 바꾸어버렸다. ㅡ 사람들은 그것에서 자연성을 박탈해버렸다. 이러한 대가를 치르면서도 사람들은 야훼에 집착했던 것이다. '정의'의 신인 야훼 ㅡ 그는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가 아니었고 민족적인 자부심의 표현이 아니었으며 일정한 조건에 구속된 신에 불과하게 되었다. ⋯⋯ 신이란 개념은 이제 사제 선동가들의 손아귀에 놓인 하나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이 선동가들은 이제 모든 행복을 일종의 보상으로 해석하고 모든 불행은 신을 불복종한 데 따른 벌, 즉 '죄'에 대한 벌로 해석한다. 이것이 바로 '원인'과 '결과'라는 자연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 이른바 '도덕적 세계질서'를 내세우는 가장 기만적인 해석 방식이다. 보상과 벌이라는 것에 의해서 자연스런 인과관계를 세상에서 추방해버리고나면 이제 반자연적인 인과관계가 필요하게 되며 이윽고 여타의 모든 비자연성이 그 뒤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도움을 주고 방책을 강구해주는 신, 근본적으로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모든 행복한 영감의 대명사인 신 대신에 ㅡ 요구하는 신이 등장한다. ⋯⋯ 도덕도 이제는 더 이상 한 민족의 생존과 성장 조건을 표현하는 것이나 한 민족의 가장 깊은 삶의 본능이 아니며, 추상적인 것 그리고 삶에 대한 대립물이 되고 말았다. ㅡ 상상력을 근본적으로 악화시키는 것으로서의 도덕, 만사에 대한 '사악한 시선'으로서의 도덕이 되고 만 것이다.

신 개념은 왜곡되어버렸다. 도덕 개념도 왜곡되었다. ㅡ 유대의 사제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고찰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런 것은 버려도 좋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ㅡ 이 사제들은 놀랄 정도의 위조 사업을 완수해냈으며 그러한 위조에 대한 증거가 바로 성서의 상당 부분으로 우리 눈앞에 남아 있다. 그들은 일체의 전승과 일체의 역사적 현실에 대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경멸감을 품으면서 자기네 민족의 과거를 종교적인 것으로 번역해버렸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것을 야훼에 대한 죄와 이에 대한 벌, 야훼에 대한 경건함과 이에 대한 보상이라는 어리석은 구원의 메커니즘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뿐 아니다. 철학자들도 교회를 거들었다. '도덕적 세계질서'라는 거짓말이 근대철학의 전체 발전 과정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도덕적 세계질서'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으로서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결정하는 신의 의지가 단연코 존재한다는 것, 한 민족 및 한 개인의 가치는 신의 뜻에 얼마만큼 많이 또는 얼마만큼 적게 따르냐에 의해서 측정된다는 것, 지배하는 자로서의 신, 복종의 정도에 따라 보상하거나 벌하는 자로서의 신의 뜻은 한 민족이나 한 개인의 운명을 통해서 증명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가련한 거짓말에 의해서 가려진 실상은 다음과 같다. 모든 건강한 형태의 삶을 희생함으로써만 번영하는, 기생충 같은 인간인 사제가 신의 이름을 남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제는 자신들이 만사의 가치를 정하는 상태를 '신의 나라'라고 부른다. 또 그런 상태를 달성하게 할 수 있고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을 '신의 뜻'이라고 부른다. 또 냉혈한 냉소주의적 태도로 민족이든 시대든 개인이든 사제의 지배에 도움이 되었는지 아니면 저항했는지에 따라서 그것을 평가한다. 사제는 엄격하면서도 고루하게, 사람들이 그에게 바쳐야 했던 크고 작은 세금에 이르기까지 자기가 갖고자 하는 것, 즉 '신의 뜻'을 확고하게 공식화해버렸다. 그때부터 사제가 어디서나 불가결한 존재가 되게끔 삶의 모든 일이 규제되었다. 삶의 온갖 자연적 일들, 즉 희생(식사시간 때 바치는)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출생ㆍ결혼ㆍ병ㆍ죽음의 시기에 그것들을 탈자연화할 ㅡ 사제의 말에 따르면 그것들을 '신성화'할 ㅡ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가치를 창출하고 가치를 부여해줄 권력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이제 사제에 대한 불복종, 즉 '율법'에 대한 불복종은 신에 대한 불복종이라는 명목 아래 '죄'라고 불리게 된다. 사제만이 '구원해준다'. 심리학적으로 고찰할 때, '죄'란 사제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죄는 권력의 진정한 지렛대이며, 사제는 죄에 의지해 살고 사람들이 '죄짓는 것'을 필요로 한다. ⋯⋯최고의 법: '하느님은 참회하는 자를 용서하신다' ㅡ 그것은 쉽게 말하면 사제에게 복종하는 자를 용서한다는 것이다.

2.2.2. 예수의 봉기 : '기쁜 소식'

그런데 이 민족(유대 민족)은 자신들이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현실의 형식, 즉 '거룩한 민족',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유대적인 현실 자체를 그리스도교를 낳음으로써 부정한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난 그 작은 봉기는 또 하나의 유대적 본능이며 ㅡ 다시 말하면 하나의 현실로서의 사제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사제적 본능이며 훨씬 더 추상적인 존재 형식의 발명이고, 교회 조직에 의해 규정된 세계상보다 훨씬 더 비현실적인 세계상의 발명이다. ⋯⋯ 그것은 '이스라엘의 성자들'에 대한, 사회의 위계질서에 대한 반항이었으며 ㅡ 그것들의 부패에 대해서가 아니라 계급ㆍ특권ㆍ질서ㆍ형식에 대한 봉기였다. 그것은 '더 높은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었으며 모든 사제와 신학자에 대한 부정이었다.

예수는 복음서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있나? '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 복음서의 가장 심원한 말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복음서를 이해하는 관건이다. 모든 싸움, 자신이 싸우고 있다는 모든 느낌의 반대가 복음서에서는 본능이 되었다. 저항할 능력을 갖지 않는 것이 복음서에서는 도덕이 되었고, 평화에, 온유함에, 적의를 가질 수 없음에 깃들어 있는 지복이 도덕이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가 말하는 '기쁜 소식(복음)'이란 이를 통해 진정한 삶, 영원한 삶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다. ㅡ 그것이 내세에 약속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너희들 안에 있다는 것이다. 사랑 속에, 뺄 것도 배제할 것도 없고 거리가 없는 사랑 속에서 사는 삶으로서 말이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이며 ㅡ 예수는 분명 아무것도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다ㅡ, 하느님의 아들로서 모든 사람은 동등하다.

우리는 어떤 것이든 단단한 물체에 닿거나 그걸 쥐기만 해도 기겁을 하고 움츠러드는, 병적으로 민감한 촉각의 상태를 잘 알고 있다. 현실에 대한 본능적 증오. 이것은 모든 접촉을 너무나 깊이 느끼기 때문에 더 이상 '접촉'되기를 원하지 않는, 고통과 자극에 대한 극단적인 감수성의 결과다. 모든 혐오, 모든 적의, 한계와 거리에 대한 모든 느낌의 본능적인 배제. 이것은 모든 저항과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느낌을 견딜 수 없는 불쾌감(말하자면 해로운 것, 자기 보존 본능이 말리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누구에게든, 악에든 악인에게든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 것 가운데서만 지복을 발견하며 ㅡ 사랑을 삶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가능성으로 보는 고통과 자극에 대한 극단적인 감수성의 결과다. 엄밀한 생리학자로서 말하자면 여기서는 다른 말, 즉 백치라는 말이 오히려 적합한 것 같다. 그와 같은 생리적 상태의 궁극적인 논리적 귀결을 생각해보라. ㅡ 그것은 모든 현실성에 대한 본능적 증오, '붙잡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의 도피, 모든 형식과 모든 시간 개념과 공간 개념, 확고한 모든 것, 관습ㆍ제도ㆍ교회와 같은 모든 것에 대한 반감, 어떠한 종류의 현실과도 접촉하지 않는 세계, 단지 '내적인' 세계, '참된' 세계, '영원한' 세계에서의 안주가 될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쁜 소식'이란 우리가 적대시할 것이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천국은 어린이들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앙은 투쟁을 통해 획득된 신앙이 아니다. ㅡ 그것은 처음부터 있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정신적인 면에서 유아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퇴화의 결과로서 발육이 부진해져 사춘기가 늦어지는 현상은 어쨌든 생리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진 것이다. ㅡ 그러한 신앙은 분노하지 않으며 남을 탓하지 않고 자신을 방어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기적에 의해서도, 보상과 약속에 의해서도, 심지어 '성서'에 의해서도 자신을 입증하지 않는다. 그 신앙 자체가 매순간 자신의 기적이며 자신의 보상이고 자신의 증거이며 '신의 나라'인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또한 자신을 정식화하지도 않는다. ㅡ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며 공식에 저항한다. 그는 고정된 모든 것에 무관심하다. 즉 말이란 죽이는 것이며, 고정된 모든 것은 죽이는 것이다. 그가 혼자서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삶이라는 개념, 즉 '삶'이라는 체험은 어떤 종류의 말ㆍ정식ㆍ율법ㆍ신앙ㆍ교리와도 대립되는 것이다. 그는 단순히 가장 내적인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이다. '삶'이라든가 '진리'ㆍ'빛'이라는 것은 가장 내적인 것을 가리키는 그의 표현이다. ㅡ 그밖의 모든 것, 모든 실재, 모든 자연, 언어 자체는 그에게는 다만 하나의 기호나 하나의 비유라는 가치밖에 지니지 못한다. 그 같이 뛰어난 상징주의자는 모든 종교, 제식과 관련된 모든 개념, 모든 역사학, 모든 자연과학, 모든 심리학, 모든 서적, 모든 예술을 넘어서 있다. ㅡ 그의 '앎'이란 그러한 것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순수한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그는 문화, 국가, 시민적 질서 전체와 사회, 노동, 전쟁라는 것에 대해서는 들은 일조차 없을 정도로 그것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그것에 대항해 싸울 필요도 없고 ㅡ 그것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 부정한다는 것이야말로 그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가르침은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다. 그는 다른 가르침들이 존재한다거나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그것과 대립되는 판단이 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대립되는 판단에 접하게 될 경우, 그는 충심 어린 동정심을 품고 그러한 판단의 '맹목성'에 대해서 슬퍼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 속에서 '빛'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 위대한 상징주의자에 대해 어떤 무엇이라도 이해하고 있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오직 내적 실재만을 실재로서, 곧 '진리'로서 간주했다는 것이다. ㅡ 그리고 그가 그 나머지 것, 곧 자연적인 것ㆍ시간적인 것ㆍ공간적인 것ㆍ역사적인 것 모두를 단지 기호로서만, 단지 비유를 위한 수단으로만 이해했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역사 속의 구체적인 인물, 곧 어떤 개별적이고 일회적인 인물이 아니라 어떤 '영원한' 사실이며 시간 개념에서 해방된 어떤 심리적 상징이다. '아들'이라는 말로는 모든 사물이 성스러운 것으로 총체적으로 변용되는 느낌(지복)으로 진입하는 사건의 표현되며, '아버지'라는 말로는 이러한 느낌 자체, 즉 영원과 완성의 느낌이 표현된다. 우리는 이 전형적인 상징주의자의 신, 신의 나라, '천국', '신의자녀들'에 대해서도 위와 동일하게 말할 수 있다. '천국'이란 마음의 한 상태다. 그것은 '지상을 넘어서' 혹은 '죽음 후에' 오는 것이 아니다. 자연사라는 개념은 복음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죽음이란 하나의 다리도, 하나의 이행도 아니다. 자연사라는 개념이 나오지 않는 것은 죽음은 전혀 다른 단순히 가상적인 세계, 단순히 기호로만 쓸모 있는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임종의 시각'이란 그리스도교적 개념이 아니다. ㅡ '시각', 시간, 육체적 삶과 그것의 위기라는 것은 '기쁜 소식'을 가르치는 자에게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 '신의 나라'라는 것도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신의 나라에는 어제도 내일도 없으며 그것은 '천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ㅡ 그것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경험이다. 그것은 도처에 있으면서도 아무 데도 없다.

당연하게도 복음서의 '심리'에는 그 어디에도 죄와 벌이라는 개념이 없다. 보상이란 개념도 마찬가지다. 복음서에서 '죄'란 신과 인간 사이에 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지만, 이러한 모든 거리가 제거되었다는 것 ㅡ 바로 그것이 '기쁜 소식'이다. 지복은 약속된 것이 아니며 어떤 조건에 매여 있지도 않다. 지복은 유일한 실재다. 어떠한 다른 태도에서도 '천국에 있다고 느낄' 수 없는 반면에, '천국에 있다고' 느끼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이 '영원하다고' 느끼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본능에 대한 실천이 필요하다. 오직 이것만이 '구원'의 심리적 실재인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변화일 뿐 새로운 신앙은 아니다. 나머지는 그것에 대해 말하려는 기호들이다. 그러므로 복음과 함께 폐기된 것은 '죄' '죄의 용서' '신앙' '신앙에 의한 구원' 등의 개념으로 이루어진 유대교였다. 유대 교회의 모든 교설은 '기쁜 소식'에서는 부정되었다.

그러한 상태의 결과는 하나의 새로운 실천, 진정으로 복음적인 실천 속에 투영된다. 그리스도교인을 구별짓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인은 행동한다. 그는 다른 행동 방식에 의해서 구별된다. 그는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말로도 마음속에서도 저항하지 않는다. 그는 이방인도 본토인도 차별하지 않으며 유대인도 비유대인도 차별하지 않는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경멸하지 않는다. 그는 법정에 나서지도 않으며 변호를 요구하지도 않는다('서약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도, 심지어는 부인의 부정이 입증된 경우에도 부인과 갈라서지 않는다. ㅡ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한 가지 명제로 귀착되며, 모든 것은 결국 한 가지 본능의 결과다. 구세주의 삶이란 바로 이러한 실천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ㅡ 그의 죽음도 역시 다른 것이 아니었다. ⋯⋯ '기쁜 소식을 가져온 자'는 ㅡ 자신이 살아왔고 가르쳤던 대로 ㅡ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죽었다. 그가 인류에게 남긴 것은 실천이었다. 그가 남긴 것은 재판관, 간수, 고소하는 자, 그리고 모든 종류의 중상과 조소 앞에서의 태도 ㅡ 십자가 위에서의 태도였다. 그는 저항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권리를 변호하지도 않는다. 그는 최악의 사태를 피할 수 있는 조치도 강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사태를 도발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과 더불어, 그들 자신이 되어 간구하고 괴로워하고 사랑한다.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다는 것, 노하지 않는다는 것, 다른 사람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악인에게마저도 저항하지 않고 ㅡ 그를 사랑한다는 것. 그는 사람들이 오직 삶의 실천을 통해서만 자신을 '신적이고' '복되며' '복음적이고' 언제나 '신의 자식'으로 느끼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신에게 이르는 길은 '회개'도 아니고 '용서를 구하는 기도'도 아니다. 복음에 따른 실천만이 신에게 인도해주며, 실천이 바로 신이다.

물론 이와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데카당한 유형으로서의 그는 사실 특이한 다양성과 모순성을 지녔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한 가능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전승된 내용은 매우 충실하고 객관적이었어야 했을 것이지만. 그러나 모든 사실이 그러한 가능성에 반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그 반대의 경우를 상정할 만한 근거가 있다. 인도와는 별로 같은 점이 없는 땅에서 부처의 모습처럼 보이는 산과 호수와 들판의 설교자와, 유대 신학자 및 사제의 불구대천의 원수로 보이는 저 공격적인 광신자 사이에는 하나의 거대한 모순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은, 저 공격적인 광신자의 엄청난 분노가 그리스도교적 선전의 흥분상태로부터 '주님'의 유형으로 넘쳐흘러 들어간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모든 종파가 그들의 '주님'을 자신들을 변호하는 데 무분별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니까 말이다. 최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다른 신학자들에 대항하기 위해 판결하고 다투고 분노하며 사악하게 궤변적인 신학자 하나를 필요로 했을 때 그들에게는 필요 불가결하게 된 전적으로 비복음적 개념들, 즉 '재림' '최후의 심판' 그리고 온갖 종류의 시간적인 기대와 약속을 주저 없이 예수가 말한 것으로 만들었듯이 말이다.

2.2.3. 바울의 왜곡

'그리스도교'란 말 자체가 이미 오해되어온 개념이다. ㅡ 근본적으로는 오직 단 한 명의 그리스도교인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복음'도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 순간 이래로 '복음'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가 살았던 삶과는 이미 정반대의 것이었다. 즉 그것은 '나쁜 소식', 즉 화음이었다. 하나의 '신앙'을 갖는다는 것, 즉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으리라는 신앙을 그리스도교인의 징표로 보는 것은 터무니없이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교적인 실천,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살았던 것과 같은 삶만이 그리스도교적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ㅡ 더구나 십자가에서의 죽음 이래 ㅡ 하나의 근원적인 상징체계를 갈수록 조야하게 오해해온 역사다. 그리스도교는 수적으로 훨씬 우세하고 훨씬 더 미개한 대중 속으로 퍼져나갔고 그런 과정에서 그것이 태어난 선행조건들이 갈수록 사라졌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교는 더 통속적인 것이 되고 야만적인 것이 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분명 그 그리스도교 초기 공동체는 예수의 가르침의 요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죽어간 방식이 보여주는 모범적 요소, 모든 원한 감정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초월을. ⋯⋯ 그의 제자들은 이러한 죽음을 결코 용서해줄 수 없었던 것이다.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의미에서 복음적인 것이었을 텐데도 말이다. 그들이 부드럽고 기분 좋은 평온한 마음으로 자신을 그러한 죽음에 바치지 못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 그들에게는 그러한 죽음으로 일이 끝나게 해선 안 되었다. 다름 아닌 가장 비복음적인 감정, 복수심이 다시 머리를 들고 일어났다. 사람들은 '보복'과 '심판'을 요구했다. (그러나 '보복' '벌' '심판' 보다 더 비복음적인 것이 있을까!) 그리하여 메시아에 대한 민중의 기대가 다시 한 번 전면으로 부각되었다. '하느님의 나라'가 적을 심판하러 오는 역사적 순간이 올 것이라는 기대가! ⋯⋯ 그러나 그와 함께 모든 것이 오해되어버렸다.

그러고 나서 이제 '신이 어떻게 그러한 일을 허용할 수 있었을까?'라는 터무니없는 물음이 대두되었다. 그러한 물음에 대해 그 작은 공동체의 혼란스러워진 이성은 정말이지 끔찍하리만큼 터무니없는 대답을 발견했다. 신이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물로 보냈다는 것이다. 복음은 단번에 끝장이 나버렸다! 예수의 죽음이 죄에 대한 희생이라니, 더구나 죄에 대한 그러한 희생이 가장 역겹고 가장 야만적인 형식으로 나타나다니! 죄 있는 자들의 죄 때문에 죄 없는 자가 희생이 된다니! 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이교적 사상인가! 그때부터 구세주라는 유형 속으로 심판과 재림의 교리, 그의 죽음이 희생이라는 교리, 부활의 교리가 점차적으로 들어왔다. 바울의 소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증오와 환상의 냉혹한 논리를 만들어내는 데 천재였던 바울이 자신의 증오의 희생물로 삼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무엇보다도 구세주였다. 예수의 삶과 모범, 가르침과 죽음, 그리고 복음 전체의 의미와 정당성을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면서, 바울은 존재 전체의 중심을 '부활한' 예수에 관한 거짓말 속으로 송두리째 옮겨놓아버렸다. ⋯⋯ 스토아적 계몽의 중심지에서 태어난 바울 같은 사람이 구세주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증거로서 어떤 환영을 꾸며낼 때, 그 같은 사람을 정직하다고 보거나 그러한 환영을 보았다는 그의 이야기만이라도 믿는다는 것은, 심리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필요로 했던 것은 권력이었다. 바울은 원하는 목적이 있었고, 그에 따라 수단도 원했다. 대중을 마음대로 지배하고 가축으로 만들 수 있는 ㅡ 그의 개념과 가르침과 상징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곧 불사에 대한 믿음이었다. 곧 '심판'에 대한 교리였다.

오늘날 우리는 알고 있으며 우리의 양심은 알고 있다. 사제와 교회가 고안해낸 그 섬뜩한 허위들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목적에 사용되는 것인가를. 인간의 모습만 봐도 역겨움이 일어날 정도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모독하게 하는 상태를 초래한 개념들 ㅡ 곧 '피안'이니, '최후의 심판'이니, '영혼의 불멸'이니, 또 '영혼'이니 하는 개념들이 말이다. 그것들은 고문의 도구이다. 사제를 지배자로 만들어주고 지배자로 남아 있게 해주는 체계적이고도 잔학한 수단이다. ⋯⋯ 모든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 삶의 중심을 삶 안에 두지 않고 그것을 '피안'으로 ㅡ 무(無) 속으로 ㅡ 옮겨놓는다면, 삶으로부터 중심을 박탈하는 것이 되고 만다. 개인의 불사에 관한 그 엄청난 거짓말은 본능에 깃들어 있는 모든 이성, 모든 자연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ㅡ 본능 가운데 있는 유익한 모든 것, 삶을 증진시키는 모든 것, 미래를 보장해주는 모든 것이 이제 불신을 일으킨다. 그래서 사는 것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식으로 사는 것이 이제 인생의 '의미'가 되고 만다. ⋯⋯ 공공심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집안과 선조에 대한 감사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협동하고 신뢰하며, 전체의 복지를 증진하고 염두에 두는 것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 그 모든 것이 '유혹'이요 '올바른 길'로부터의 이탈이다. ㅡ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이다.' ⋯⋯ 모든 사람은 '불사의 영혼'으로서 서로 평등하다는 것, 존재 전체에서 모든 개개인의 구원이 영원한 중요성을 갖는다고 주장될 수 있다는 것, 보잘것없는 위선자들과 미치광이가 다된 자들이 자신을 위해 자연법칙들이 항상 파괴되고 있다고 상상해도 된다는 것, ㅡ 온갖 이기주의가 그처럼 무한한 지경에까지 그리고 그처럼 파렴치한 지경에까지 이른다는 것에 대해서는 경멸의 낙인을 아무리 많이 찍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신앙' ㅡ 나는 이미 그것을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교활함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사람들은 입으로는 항상 신앙을 이야기하면서도 사실은 항상 본능대로 행동해왔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결론은 무엇인가? 신약성서를 읽을 때는 장갑을 끼는 게 좋다는 것이다.

2.3. 확신과 거짓말

확신(Überzeugung)을 가진 사람들은 가치와 무가치와 관련된 근본적인 모든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확신이란 감옥이다. 그것은 멀리도 보지 못하고 자기 아래도 보지 못한다. 반면에 가치와 무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위대한 일을 하고자 하는 정신은 자기 아래에 ㅡ 그리고 자기 뒤에 ㅡ 500가지나 되는 확신들을 봐야 한다.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을 바라는 정신은 정녕 회의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종류의 확신으로부터의 해방, 자유롭게 볼 수 있는 능력은 강한 힘의 특성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회의가는 확신마저도 허용한다. 그것은 회의가를 대담무쌍하게 만들며, 심지어 신성하지 못한 수단들을 사용할 수 있는 용기까지도 부여한다. 많은 것이 확신에 의해서만 달성된다. 다만 회의가는 그것을 수단으로서의 확신으로 이용한다. 위대한 정열은 확신을 이용하면서 확신을 다 사용해버리고 확신에 굴복하지 않는다. ㅡ 회의가는 자신을 자신의 주인으로 생각한다.

반대로 어떤 무조건적인 긍정과 부정을 필요로 하는 신앙인은 확신을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수단으로 삼아 확신의 목적을 달성한다. '신앙인'이란 자기 자신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다. 신앙을 가진 인간, 모든 종류의 '믿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의존적인 인간이며 ㅡ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정립할 수 없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목적을 정립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수단이 될 수 있을 뿐이고 사용되어야 하며, 자기를 사용하고 버릴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그의 본능은 자기 소멸의 도덕에 최고의 명예를 부여한다. 모든 것이 그에게 자기를 소멸하도록 설득한다. 그의 지성, 그의 체험, 그의 허영심이 다 그렇다. 신앙은 어떤 것이든 그 자체가 자기 소멸, 자기 소외의 한 표현이다. ⋯⋯ 신앙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를 외부로부터 구속하고 고정시키게 만드는 규제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리고 강제, 즉 보다 높은 의미에서의 노예제가 어떻게 의지박약한 인간을 잘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조건이 되는가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확신과 '신앙'의 본질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확신은 확신에 사로잡힌 인간을 지탱해주는 기둥이다. 여러 가지 사물들을 보지 않는다는 것, 어떤 점에서도 공평하지 않다는 것, 철저하게 편파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것, 모든 가치를 하나의 엄격하고 필연적인 관점에서 본다는 것 ㅡ 이것만이 확신에 사로잡힌 인간이 존속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는 진실한 인간과 진리에 반대하고 그것에 적대하는 자가 된다. 신앙인에게 '참'과 '거짓'의 문제에 대한 양심을 갖는 것이 자기 뜻에 달려 있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그 문제에 대해서 성실한 태도를 취하면 그는 즉각 파멸하고 만다.

거짓말과 확신은 정녕 서로 대립하는가? ㅡ 온 세상이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온 세상 사람이 무엇은 믿지 않는다는 말인가! ㅡ 어떠한 확신이든 그것에는 나름의 역사, 나람의 예비 형식, 나름의 시행착오가 있다. 그것은 오랫동안 확신이 아니었던 기간을 거친 후에, 그리고 확신인지 아닌지가 불투명한 더 오랜 기간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하나의 확신이 된다. 뭐라고? 거짓말이 확신의 이러한 태아적 형태 가운데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ㅡ 때로는 사람만 바뀌면 되는 수도 있다. 아버지 대에는 아직 거짓말이었던 것이 자식 대에 와서는 확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ㅡ 내가 거짓말이라고 부르는 것은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보려고 하지 않는것, 어떤 것을 보이는 그대로 보려고 하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다. 거짓말이 증인이 있는 데서 행해지는가 아니면 증인이 없는 데서 행해지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가장 통상적인 거짓말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이다.

이런 일에 더 교묘한 자는 사제다. 확신이란 어떤 목적에 유용하기 때문에 원칙적ㆍ원리적인 것이 되는 거짓이지만, 사제들은 확신의 이러한 개념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이의를 아주 잘 이해하면서 '신' '신의 뜻' '신의 계시' 등의 개념을 하나의 확신에 끼워넣는 영리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ㅡ 인간이 결정할 수 없는 참과 거짓에 대한 문제들이 있다. 최고의 문제들, 최고의 가치에 대한 문제들은 모두 인간 이성의 한계 너머에 있다.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자신의 힘만으로는 알 수 없다. ㅡ 이런 이의제기에 맞서, 사제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래서 신은 계시라는 것을 통해 자신의 뜻을 사제에게 알려주는 것이라고. 그러므로 사제는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사제는 신의 뜻을 대변하는 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ㅡ 이렇게 거짓말을 뻔뻔하게 할 수 있는 권리와 '계시'를 내세우는 영리함은 사제라는 전형에 속한다. 그것은 데카당스의 사제와 이교의 사제 모두에게 속하는 것이다. '율법' '신의 뜻' '성전' '영감' ㅡ 이것들은 그것을 이용해서 사제가 권력을 잡고, 권력을 유지하는 여러 조건을 가리키는 말일 뿐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모든 사제적 조직과 모든 사제적, 철학자적이면서 사제적인 지배형태의 기초에서 발견될 수 있다. '성스러운 거짓말' ㅡ 그것은 공자, 마누법전, 마호메트, 그리스도교 교회에 모두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플라톤에게도 존재한다. ⋯⋯ '진리가 여기에 있다'는 말은 그것이 어디서 말해지든 사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그러니 궁극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목적으로 거짓말을 하느냐에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는 '신성한' 목적이 결여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내가 그리스도교적 수단에 반대하는 이유다. 그리스도교에는 나쁜 목적만 있다. 삶에 해독을 끼치고 삶을 비방하고 부정하려는 것, 육체를 경멸하려는 것, 죄라는 개념을 가지고 인간의 가치를 폄하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모독하게 하려는 것뿐이다. ⋯⋯ 따라서 그 수단도 나쁘지 않을 수 없다. ㅡ 그리스도교의 경우와는 정반대의 느낌을 받으면서 나는 마누의 법전을 읽는다. 그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신적이고 탁월한 책이며, 그것을 성경과 동렬에 놓고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에 대한 죄가 될 정도의 책이다.

2.4. 마누법전

마누법전과 같은 법전은 모든 훌륭한 법전들과 동일하게 생성되었다. 그것은 수세기에 걸친 오랜 경험과 지혜와 실험적 도덕을 총괄하여 완결짓고 있으며 아무것도 새롭게 창조하지 않는다. 그러한 법전 편찬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서서히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획득된 진리에 권위를 부여하는 수단은 진리를 증명하는 수단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통찰하는 일이다. 법전이란 어떤 법의 유효성과 근거 그리고 그 법에 선행하는 결의론을 보고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다가 법전은 명령적인 어조를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는 마땅히 이렇게 행해야만 한다'는 명령적인 어조는 그 법이 준수될 수 있는 전제조건인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 점에 있다. ㅡ 어떤 민족의 발전이 일정한 지점에 도달했을 때, 그 민족의 가장 사려 깊은 계층, 다시 말해 과거와 미래를 가장 멀리까지 꿰뚫어보는 계층은 그 민족이 지키고 살아야 할 ㅡ 다시 말해 지킴으로써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ㅡ 경험이 완성되었음을 선포하게 된다. 그들의 목표는 실험과 괴로운 경험의 시대로부터 가능한 한 가장 풍부하고 완전한 수확을 거두어들이는 데 있다. 따라서 무엇보다 피해야 할 것은 실험을 계속해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법전은 전통을 내세운다. 그것은 그 법이 이미 태곳적부터 있어왔으며 따라서 그것을 의문시한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것이며 조상에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 법이 갖는 권위는, 신이 그 법을 주셨고 조상이 그 법에 따라서 살았다는 명제에 의해 근거 지어진다. 이러한 절차가 갖는, 보다 그럴듯한 합리적 근거는 올바르다고 인정된 생활방식(즉 막대한 양의 면밀하게 걸러진 경험에 의해 증명된 생활방식)에서 점차 의식을 축출해버림으로써 본능적인 완전한 자동화에 도달하려는 의도 속에 존재한다. ㅡ 본능적인 이러한 자동화야말로 살아가는 기술과 관련하여 모든 종류의 대가적 경지, 모든 종류의 완벽함을 달성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마누법전과 같은 법전을 만든다는 것은 한 민족에게 이후부터 대가가 될 수 있는 권리, 완벽해질 수 있는 권리 ㅡ 삶의 최고도의 기술에 대한 야심을 가질 수 있는 권리를 허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는 법전은 무의식적인 것이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성스러운 거짓말의 목적이다. ㅡ 최고의 지배적 법칙인 카스트 계급 질서는 인간의 어떠한 자의도 어떠한 '근대적 이념'도 좌우할 수 없는 첫째가는 자연법칙인 자연 질서를 재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건강한 사회에서는 어디서나 서로 다른 생리적 경향을 지닌 세 가지 유형의 인간을 구별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유형의 인간은 서로를 조건지우면서 제각기 고유한 위생법, 일의 고유한 영역, 완벽성에 대한 고유한 느낌과 고유한 대가의 경지를 지니고 있다. 자연은 극소수의 정신력이 뛰어난 자들과 소수의 근육과 기질이 강한 자들 그리고 이상의 어떤 점에서도 뛰어나지 못한 대다수의 범용한 인간들을 서로 구별하고 있다. 카스트 질서, 곧 서열은 삶 자체의 최고의 법칙을 공식화한 것에 불과하다. 세 가지 유형의 인간들을 구분하는 것은 사회의 보존을 위해 필수적이며, 보다 더 높은 유형과 최고의 유형의 인간들을 형성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ㅡ 권리의 불평등이야말로 권리가 존재하기 위한 조건인 것이다. ㅡ 권리란 하나의 특권이다. 각자의 특권은 각자의 존재 양식에 의해 결정된다.

가장 높은 계급은 완전한 계급으로서 극소수의 인간들에게만 허용된 특권을 아울러 가진다. 그 특권 가운데는 행복, 아름다움, 선의를 지상에서 체현하는 것이 속한다. 가장 정신적인 인간에게만 아름다움과 아름다운 것들이 허용된다. 그들에게서만 선의는 약함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소수의 것이다. 선은 하나의 특권이다. 한편 그들에게 추한 태도나 염세적인 시가, 사물들을 추하게 만드는 눈 이상으로 엄격하게 금지된 것은 없다. ㅡ 사물의 전체적인 모습에 대해 분개하는 것조차도 그들에게는 허용되어 있지 않다. 분개는 찬달라들의 특권이다. 염세주의도 마찬가지다. "세계는 완전하다." ㅡ 가장 정신적인 본능, 긍정하는 본능은 그렇게 말한다. ㅡ "불완전, 우리보다 미천한 모든 것,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거리의 파토스, 찬달라족 자체가 이러한 완전성에 포함된다." 가장 강한 자로서 가장 정신적인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파멸하는 곳에서 행복을 발견한다. 즉 그들은 미궁에서, 자신과 아울러 다른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혹독함 속에서, 시험 속에서 행복을 발견한다. 그들의 기쁨은 극기다. 그들에게는 금욕이 천성이고, 욕구이고, 본능이다. 그들은 어려운 과제를 하나의 특권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라면 짓눌려 죽을 수 있는 짐을 가지고 유희하는 것을 하나의 기분전환으로 생각한다.

두 번째 계급은 법을 수호하는 자들, 질서와 안전을 유지하는 자들, 고귀한 전사들, 그리고 전사와 재판관과 법의 보호자를 나타내는 최고 형식으로서의 왕이다. 두 번째 계급에 속하는 자들은 가장 정신적인 게급 밑의 행정가이며 그 계급과 가장 가까운 자로서, 첫 번째 계급의 통치행위에 얽힌 모든 거친 일을 떠맡으며 ㅡ 그 계급의 추종자이고 그들의 오른팔이며 그들의 가장 훌륭한 제자들이다. 거듭해서 말하지만 이상에서 말한 모든 것에는 어떠한 자의도 어떠한 '작위'도 없다. 그것과 다른 것이야말로 모든 작위의 산물이며 ㅡ 그 경우 자연은 파괴된다.

세 번째 계급인 범용한 자들에게도 특권은 있다. 삶은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점점 더 가혹해진다. 점점 더 추워지고 책임도 무거워진다. 낮은 곳에 있는 범용한 자들의 특권을 과소평가하지 말자. 또한 높은 문화는 일종의 피라미드다. 그것은 넓은 토대 위에서만 서 있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강하고 건강하게 다져져 있는 범용성을 전제로 한다. 공업, 상업, 농업, 학문, 대부분의 예술, 한마디로 직업적 활동이라고 할 만한 것은 모두 능력과 욕망에서의 범용성하고만 어울릴 수 있다. 그러한 것들은 예외적인 인간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공적으로 유용한 인간이 되고, 하나의 톱니바퀴 및 하나의 기능으로 존재하는 것에는 천부적인 소질이 필요하다. 범용한 소질이 말이다. 그들을 지적인 기계로 만드는 것은 사회가 아니라 대다수만이 얻을 수 있는 종류의 행복이다. 범용한 자들에게는 범용하게 사는 것이 행복이다. 어떤 한 가지 일에 통달하는 것, 곧 전문성은 하나의 타고난 본능이다. 범용성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보다 심오한 정신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범용성은 높은 문화의 예외적인 것들의 존재를 위한 첫 번째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예외적인 인간이 범용한 자들을 자기 혹은 자기와 동등한 자들보다도 더 부드럽게 다룬다면 그것은 단순히 마음에서 우러나온 예의만이 아니다. ㅡ 그것은 바로 그의 의무인 것이다. ⋯⋯ 그런데 오랜 시간 동안 서서히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획득된 건강한 사회를 증오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노동자의 본능과 즐거움 그리고 보잘것없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족감을 파괴하면서 ㅡ 그에게 시기심을 불어넣고, 그에게 원한을 가르치는 ㅡ 찬달라적 사도들인 사회주의자 ㅡ 천민이다.

2.5. 결론 : 유죄

이것으로 나는 결론에 도달했기에 판결을 내린다. 나는 그리스도교에 유죄 판결을 내린다. 나는 지금까지 어떤 고발자가 입에 담았던 어떤 고발보다도 더 혹독하게 그리스도교 교회를 고발한다. 내가 보기에 그리스도교 교회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부패 중의 최고의 부패이며, 가능한 부패 중에서 가장 궁극적인 부패에 대한 의지를 품어왔다. 그리스도교 교회는 어느 것 하나 자신의 타락한 손길을 대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이 없다. 그리고 가치 있는 모든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모든 진리를 거짓말로, 모든 정직한 영혼을 비열한 영혼으로 만들어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에게 감히 교회의 '인도주의적인' 축복에 대해 이야기하려 든다! 그리스도교 교회로서는 어떠한 불행이 됐든 그 불행을 없애는 것은 그지없이 불리한 일이었다. 교회는 불행을 양식으로 삼아 살아왔고 스스로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불행을 만들어냈다. ⋯⋯가령 죄라는 벌레가 그 예다. 교회야말로 인간에게 이러한 불행을 듬뿍 가져다주었다. ㅡ '신 앞에서의 영혼의 평등'이라는 그 허위, 모든 저열한 자의 원한을 위한 그 구실, 마침내는 혁명과 근대적 이념과 사회 질서 전체가 쇠망하게 되는 원리가 되고 만 개념인 이 폭발물 ㅡ 그리스도교적인 다이너마이트다.

벽이 있는 곳이면 나는 어디든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 영원한 고발을 적어놓겠다. 나는 소경도 볼 수 있는 글자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리스도교를 단 하나의 엄청난 저주, 단 하나의 엄청난 가장 내적인 타락, 단 하나의 엄청난 복수 본능이라고 부른다. 그에 비하면 그 어떤 수단도 독성이 강하다거나, 은밀하다거나, 지하적이라거나, 비소하다고 할 수 없다. ㅡ 나는 그리스도교를 인류의 단 하나의 영원한 오점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우리는 그 숙명적 불행이 시작된 흉일을 기점으로 ㅡ 곧 그리스도교가 시작된 첫날을 기점으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다! ㅡ 왜 그리스도교의 최후의 날[1]을 기점으로 하여 계산하지 않는 것인가? ㅡ 오늘부터, 모든 가치의 전환이 이루어진 오늘부터 말이다!

2.6. 그리스도교 탄압법

제1년의 첫째 날, 구원의 날에(잘못된 시간 계산법으로는 1888년 9월 30일에) 선포되었다.


악덕에 대한 사투: 그리스도교는 악덕이다!

제1조. 모든 종류의 반자연은 악덕이다. 가장 악덕한 인간은 사제다. 그는 반자연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사제와는 논쟁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교도소에 처넣어라.

제2조. 어떤 식으로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공중도덕을 어기는 짓이다. 가톨릭 신자보다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에게 더 엄격해야 하며, 독실하게 믿는 자들보다는 리버럴한 프로테스탄트들에게 더 엄격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인에게 존재하는 범죄적인 성격은 사람들이 학문에 가까이 다가가는 정도에 따라서 증대된다. 따라서 모든 범죄자 가운데 가장 심각한 범죄자는 철학자다.

제3조. 그리스도교가 바실리스크의 알을 부화했던 저주받아 마땅한 곳은 완전히 파괴되어야 한다. 그곳은 지상에서 가장 사악한 곳으로 간주되어 후세의 모든 사람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거기에서는 독사를 사육해야만 한다.

제4조. 순결을 가르치는 설교는 사람들을 반자연적인 것으로 향하도록 공공연하게 자극하는 것이다. 성생활에 대한 모든 경멸, 성생활을 '불결하다'는 개념을 통해 더럽히는 것은 삶의 성스러운 정신에 대한 진정한 죄다.

제5조. 사제와 한 자리에서 식사하는 사람은 축출해버려라. 사제와 식사를 함께 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을 정직한 사회로부터 자신을 파문한 것이다. 사제는 우리의 찬달라다. ㅡ 그를 추방하고 철저하게 굶겨서 사막으로 내쫓아야만 한다.

제6조. '성스러운' 역사를 그것에게 마땅한 이름인 저주받은 역사라고 불러야만 한다. '신' '구세주' '구원자' '성자'라는 말들을 욕으로 사용하거나 범죄자에 대한 표지로 사용해야 한다.

제7조. 나머지는 이상으로부터 따라나온다.

안티크리스트

3. 한국어 번역본

한국어 번역본은 2021년을 기준으로 총 5권이 존재한다.
  • 백승영 역, 책세상, 2002 (니체전집 15)
  • 박찬국 역, 아카넷, 2013 (대우고전총서 35)
  • 나경인 역, 이너북, 2014
  • 두행숙 역, 부북스, 2016
  • 곽복록 역, 동서문화사, 2017

나경인 역, 곽복록 역, 두행숙 역은 비전공자의 번역이다. 보통 백승영 역이나 박찬국 역, 이렇게 두 번역본으로 갈리는데, 백승영 역본인 책세상 니체전집판은 직역 위주로 번역한 것이 장점이지만, 자세한 주석이 거의 없는 것이 단점이다. 박찬국 역본은 주석이 달려 있으며 의역 위주로 번역을 해서 읽기가 쉽고 니체의 경쾌한 문장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장점이지만, 몇몇 주요 번역어 선택에 있어서 기존과 다른 견해를 보여준다.[2]

4. 여담

  • 『안티크리스트』는 『도덕의 계보』를 더 자세히 풀어놓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도덕의 계보』를 읽는 것이 필수다.
  • 마누법전을 높이 평가하는 것을 보면 니체는 다시 계급사회로 돌아가자는 것이냐고 비판할 수 있지만, 그렇게 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 책에서 니체가 일관되게 분석하고 있는 것은 심리학적 유형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니체는 자신의 '귀족 개념'이 '핏줄'이나 '부'로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계급'이라고 말한 바 있다.[3] 그렇다고 똑똑한 사람이 정신적으로 높은 계급인 것이 아니라, 니체는 창조적인 사람이 정신적으로 높은 계급이라고 주장한다. 즉, 니체는 인간 삶의 심리에 있어서 정신의 귀족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지식만 많은 사람'은 비록 자기 분야에서는 전문가이긴 하지만 그 자신만의 새로운 가치와 명령을 만들어낼 용기는 없기 때문에, (부와 명성과는 상관없이) '삶을 귀족처럼 즐기는 정신'을 갖지 못한다.
  • 그 격렬한 어조 때문에 니체가 무턱대고 사제를 비판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니체의 문제 제기에서 핵심은 그리스도교는 현실의 삶보다 내세의 삶(천국)을 더 강조하기에, 천국을 강조할수록 '현실에서의 삶'은 점점더 무기력해진다는 데에 있다. 이런 가치관 아래에서는 내세의 행복을 위해 현실의 삶을 희생시키는 것이 합리화된다. 니체에 따르면, 신앙(확신)은 오로지 삶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하지, 신앙(확신) 그 자체가 목적이 되게 해선 안 된다. 더군다나 신앙이 목적이 된 사제들은 자신의 신앙(확신)을 타인에게 강요하기까지 한다. 이럴 때 사제들이 목소리 높여 말하는 '죄와 보상'이라는 개념도, '천국과 지옥'을 전제하기 때문에 삶에 적대적인 개념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물론이다. 그럼에도 사제들은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천국과 지옥', '죄와 보상'을 얘기하면서 사람들에게 ㅡ 또한 자기 자신에게도 ㅡ 매순간 '심판'을 내리고 있다. 니체가 보기에 그 심판은 신의 이름을 빌린 사제의 심판에 불과하다.[4]
  • 니체는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둘 다 데카당스적 종교이긴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천국', '죄와 보상'을 말하면서 내세의 삶을 높이고 현실의 삶을 낮추는 반면에, 불교는 현실의 고통을 똑바로 마주보기 때문에, 불교가 그리스도교보다는 백배나 더 진실되고 더 객관적인 종교라고 말한다.[5] 다만, 불교는 고통에 지나치게 민감하고 개인적 본능을 과도하게 정신화시키는 '늙은' 종교라는 것이 문제다.[6]
  • 이 책에서는 그리스도교를 극렬하게 비판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한명의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고평가하고 있다. 혹자는 예수가 아이로 되돌아 갔다는 식으로 니체가 말하기 때문에, 이것이 낙타-사자-아이로 이어지는 위버멘쉬의 아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니체가 예수를 높이 평가한 것은 맞지만 위버멘쉬의 유형으로까지는 보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니체에 의하면, 예수는 무저항의 내적 평온을 추구하며 내적 충만을 통한 영원과 완성의 느낌에서 행복해하지만, 위버멘쉬는 저항의 극복과 싸움(놀이)을 추구하며 성장한다는 느낌에서 행복해하기 때문이다.

[1] 1888년 9월 30일. 안티크리스트가 저술된 날이다.[2] Wissenschaft를 '과학'으로 번역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다만 니체는 Wissenschaft에 의학과 문헌학을 포함시키기 때문에 '과학'이라기보다는 '학문'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옳다.[3]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정신의 귀족'을 설명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도 자신의 귀족 개념이 핏줄과 돈으로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4] 니체는 마태 복음 7장 1절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다."를 언급하면서, 심판하는 사제들을 비꼰다.(『안티크리스트』 45절에 나옴.) 니체에 따르면 사제들은 예수의 진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심판하는 것이다.[5]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불교는 그리스도교보다 백배나 더 냉정하고, 더 진실되고, 더 객관적이다. 불교는 굳이 자신의 괴로움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죄라고 해석함으로써 고상한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나는 괴롭다'고, 자신이 느끼는 바를 말할 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안티크리스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3, p.55)[6] 불교가 자신의 기반으로 삼으면서 주시하는 두 가지 생리적 사실이 있다. 첫째는 지나치게 민감한 감수성으로서 고통을 잘 느끼는 섬세한 능력으로 나타난다. 둘째는 지나친 정신화, 다시 말해 개인적인 본능이 해를 입고 '비개인적인' 것이 우세해질 정도로 개념과 논리적 절차에 지나치게 오랫 동안 몰두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안티크리스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3, p.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