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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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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ödie
파일:Die Geburt der Tragödie.jpg
<colbgcolor=#dddddd,#010101><colcolor=#373a3c,#dddddd> 작가 프리드리히 니체
장르 철학
언어 독일어
발매일 1872년

1. 개요2. 상세3. 내용4. 관련 영상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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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극의 탄생』은 1872년에 출간된 프리드리히 니체의 첫번째 저술이다. 발간 당시 제목은 『음악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ödie aus dem Geiste der Musik)』이었으나, 14년 후 신판을 출간하면서 제목을 『비극의 탄생, 혹은 그리스 문명과 염세주의 (Die Geburt der Tragödie, Oder: Griechentum und Pessimismus)』로 바꿨다.

2. 상세

니체는 바젤 대학교의 교수로 취임한 뒤, 〈그리스 음악극〉과 〈소크라테스와 비극〉을 주제로 몇 차례 공개 강연을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니체로부터 강의 사본을 받아본 바그너 부부는 니체에게 그 주제에 대한 책을 쓸 것을 제안한다. 당시 니체는 강연 원고를 바탕으로 '디오니소스적 세계관'을 구상하고 있었으나, 때마침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터지면서 의무병으로 참전하고 디프테리아에 감염되어 한달만에 고향 나움부르크로 돌아오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책 『비극의 탄생』은 그 병이 서서히 회복되는 가운데 쓰여지기 시작하여 1871년 10월 경에 완성된 작품으로, 다음해 1월 2일 시중에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을 출간하고 나서 바그너 부부와 몇몇 사람들은 니체를 극찬했다. 하지만 고전문헌학의 내용을 철학적으로 해석한 이 책을, 학계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완고한 문헌학자였던 니체의 스승 리츨 교수도 이 책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으며, 특히 니체의 대학 후배면서 같은 고전문헌학 교수였던 빌라모비츠 묄렌도르프가, 바그너식 '미래의 음악'을 비꼬아 '미래의 문헌학!'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니체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이 치명적이었다. "니체는 자신의 관점에서 벗어난 어떤 미적 통찰도 꾸짖으면서 역사 비평 방법 자체를 경시했고, 이로써 고대 연구에 대한 완전한 오해"를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 비판의 내용이었다.

이후, 평판이 망가진 니체의 강의에 학생들이 거의 가지 않았고, 이 때문에 니체는 건강을 핑계로 교수 생활을 접게 된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니체는 14년이 지난 1886년, 신판을 출간하면서 기존의 제목 「음악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을 「비극의 탄생, 혹은 그리스 문명과 염세주의」로 개정하였으며,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바치는 서문〉을 삭제하고는 대신에 〈자기비판의 시도〉를 서문으로 추가하였다. 니체는 새로운 서문 〈자기비판의 시도〉에서 젊은 시절 썼던 『비극의 탄생』의 공과를 지적하고는 후기 니체의 눈으로 자신의 책을 재해석한다.

3. 내용

니체에 따르면, 건강한 인간은 삶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꿈의 '가상'을 만들어내고, 인간은 이 가상을 통해 자신의 삶을 정당화한다. 인간의 삶은 일생동안 계속해서 변하므로, 건강한 인간은 자신의 가상을 끊임없이 부수고 다시 만들어내는 과정을 겪는다. 끊임없이 가상·환상·오류·변명·핑계를 만들어내는 이러한 과정 자체, ㅡ 이것이 곧 인간의 '예술'이며 문화로서, 온갖 다양한 가치들을 만들어냈던 것이었다.

그러한 가상의 가치들 중 하나가 바로 도덕(종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인간은 도덕과 종교를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 삶에서 '예술'을 몰아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삶을 위해서 가상이 있는 것이지, 가상을 위해서 삶이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인간의 삶을 위해서 도덕과 종교가 있어야 되지, 도덕과 종교를 위해서 인간의 삶이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니체는 이 잘못 ㅡ 어느 한 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보아서 나머지 가치 생성의 과정을 막아버리는 것, '삶의 끊임없는 예술가적 가치 생성' 자체를 억압하려고 드는 것 ㅡ 을 바로잡기 위해서 '삶을 정당화하는 예술'의 탄생, 즉 그리스 비극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비극의 탄생』에서 원초적 예술의 충동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구분된다. 아폴론적인 것은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가상 세계의 이미지, 명료한 조형예술로서 경계를 분명히하고 한계를 지어 각각을 개별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가상의 이상적인 환상이다. 오래된 그리스 전설에 의하면, 실레노스[1]를 붙잡은 미다스 왕은 그에게 물었다고 한다. 인간에게 가장 좋고 이로운 게 무엇이냐고. 그러자 실레노스가 대답하길, "최선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차선은 지금 죽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렇듯 인간의 삶이란 고통스럽고 잔혹하다. 그래서 그리스인은 순전히 살기 위해서, 그 섬뜩한 삶의 불합리함에 맞서, 완전하고 절도 있는 이상적인 신들의 세계를 창조한 것이었다.[2]

반면에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내부의 끓어넘치는 도취의 힘으로 그 절도 있는 한계를 넘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곳곳에서 성적 욕망의 분출과 잔인함이 펼쳐지고, 이로써 개별적인 것은 부서지면서 모두가 도취의 과정에서 전율과 희열을 느끼며 자연과 하나가 된다. 자기 자신을 변신시켜서 다른 사람의 몸과 성격 속으로 들어간 듯 행위하는 것, 마치 정령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끊임없이 서로에게 생생한 예술가적 이미지를 전달하고 서로가 내적으로 하나임을 아는 것, 그래서 도취의 상태에서 나의 표현이 나만의 표현이 아니라 모두의 표현을 대표하는 것임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 바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3]

니체에 의하면, 그리스 비극은 이 두 예술적 충동 ㅡ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끊임없는 투쟁과 조화로부터 시작됐다. 아폴론적인 것은 성스러운 세계의 법칙으로 개체들의 한계를 상기시킴으로써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방종을 억제하고자 하며,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모두의 원초적 자연에서 나오는 힘을 분출함으로써 아폴론적인 한계의 경직성을 파괴하고자 한다. 즉, 이 두 예술적 충동이 동시에 섞여서, 삶의 가혹함·전율·악함·문제성이 꿈의 이미지로 만들어지고, 꿈의 이미지는 음악적 도취로 인해 그 상징적인 능력이 최고도로 강화되어, 삶의 가혹함·전율·악함·문제성의 정당화가 예술을 통해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이 이중본질의 예술에 빠져버린 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모든 존재는 정의로우면서도 정의롭지 않으며, 두 경우 모두 정당하다." 예술을 통한 삶의 정당화, 다시 말해 세계의 현존은 오직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적 충동의 조화는 고대 그리스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가무단[4]을 통해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이들의 노래와 춤이 바로 그리스 비극의 기원이 된다. 그러니 그리스 비극은 넘쳐흐르는 충동으로 낭비되는 예술적이고도 불합리한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탄생한 것이라는 게 니체의 생각이다.

마찬가지로 가무단에 영감을 받은 서정시인은 먼저 디오니소스적 예술가로서 '원초일자와 그것의 고통, 그것의 모순'과 전적으로 하나가 되고 나서, 그 느낌을 음악으로 내놓는다. 그러면 그 음악이, 마치 한 폭의 비유적인 꿈처럼, 아폴론적 꿈의 영향력 아래 그에게 다시 눈에 보일 듯이 이야기의 이미지로서 가시화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음악은 디오니소스적 정신을 반영한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아이스킬로스의 프로메테우스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신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신성모독의 죄를 저지르는 존재이다. 신들은 프로메테우스에게 최악의 형벌을 내리지만, 프로메테우스는 굴하지 않고 도리어 신들을 협박하기까지 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인들은 신을 의심할 수 있고 심지어 신을 파멸시킬 수 있다는 거역의 신앙을 자신 안에서 발견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더 높은 지혜를 통해서 가능하며, 이 지혜 때문에 인간은 영원한 고난을 겪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에는 한편으로 대담한 "개체"의 헤아릴 길 없는 고난, 다른 한편으로 신들의 곤경의 예감이 있으며, 또한 이 두 세계 ㅡ 인간과 신의 화해와 형이상학적 합일을 강제하는 원초일자의 강력한 운명적 힘이 있다. 이 상징적 이야기에서 그리스 비극의 윤리적 밑바탕에는 인간적 악의 정당화,[5] 비단 인간적 유책의 정당화일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야기되는 고난의 정당화가 있음이 드러난다.

이러한 그리스 비극을 몰락하게 만든 것은 에우리피데스였다. 에우리피데스는 비극에서 디오니소스적 음악 정신을 솎아내고 극화된 서사시만을 남겨놓았다. "모든 것은 지성적이어야만 아름답다"는 소크라테스의 명제를 들고 나와 비극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측정했으며, 이 원칙에 따라 언어·성격·희곡구성·가무단 음악 등을 정정했다. 음악적 분위기가 아니라 어떤 인물이 등장하여 자신은 누구인지, 지금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설명함으로써 비극의 긴장효과 전체를 포기해버렸다. 더 이상 비극은 사람들을 디오니소스적 몰입에 빠뜨리지 못했고, 이리하여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의지하던 아폴론적인 세계마저 무너지게 되었다.

4. 관련 영상


서양고전학자 김헌 교수의 강의. 그리스 비극의 탄생을 설명하고 있어서 니체의 책을 읽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5. 여담

  • 니체를 처음 접한 사람이 읽기에는 쉽지 않은 책인데,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투쟁과 조화를 헤겔의 변증법적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6] 즉 시대 순서에 따라 아폴론적인 것이 우세할 때가 있고, 반대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우세할 때가 있어서 어느 시대가 무엇을 대표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흐름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각 시대 구분은 다음과 같다.
    {{{-1
    순서 설명 대표자

    1 문화가 없는 야만의 시대 없음[7]

    2 그리스인들은 참혹한 현실에 맞서 아폴론적 가상의 이상적인 신들의 세계[8]를 만듬 호메로스의 서사시

    3 그리스 지역에 디오니소스 문화[9]가 침입했으나 도리어 신들의 세계가 굳건해짐 도리스 예술[10]

    4 결국 그리스인들이 자기 방식대로 디오니소스[11]를 받아들여 비극이 탄생 아르킬로코스의 서정시[12]

    5 에우리피데스가 음악[13]이 핵심이 아닌 연극이 핵심인 무대를 만듬 에우리피데스[14]

    6 음악 정신의 상실로 극화된 서사시만 남음 (비극의 죽음) 아티카 신희극

    }}}
  • 쉽게 설명하자면, 아폴론적인 것 = (삶의 고난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이상적인 가상 / 디오니소스적인 것 = (잔인하고 방종한 것으로서의) 도취 /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투쟁과 조화 = '예술적 도취(음악)로 인해, 끊임없이 부숴지고 만들어지는 가상'이, 삶의 가혹한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마주보게 하고, 이로써 삶을 정당화할 수 있게 함.[15]
  •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구별은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표상' 개념은 아폴론적인 것에, 쇼펜하우어의 '의지' 개념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대입된다. 그렇다고 해서 니체가 쇼펜하우어의 개념을 완전히 똑같이 그대로 가져온 것은 아니다. 쇼펜하우어에게서 예술은 수동적 체념과 연관되지만, 니체에게서 예술은 능동적 낭비와 연관되기 때문이다.[16] 이런 차이로 인해서 니체는 삶을 결핍의 충족이 아닌,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예술적 낭비의 자기 표현이라고 본다.
  • 아폴론적인 것은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대표하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바빌론의 축제 사카이아[17]가 대표하며, 이 둘의 조화가 그리스 비극이다. 니체는 그리스 비극 중에서 아이스킬로스의 프로메테우스를 최고로 친다.[18] 이러한 그리스 비극을 망가뜨린 인물이 에우리피데스로, 에우리피데스는 "모든 것은 지성적이어야만 아름답다"는 소크라테스의 논리를 끌고 들어와 그리스 비극에서 디오니소스적인 요소들을 솎아내어 그리스 비극을 몰락시킨 장본인이라는 게 니체의 주장이다.
  • 니체는 소크라테스의 논리가 발달한 것이 '학문'이라고 보며, 결과적으로 학문이 예술 정신을 죽여버린 것이 이 사태의 진정한 본질이라고 본다. 그러나 학문의 논리 정신 역시 언젠가는 무너지고 다시 예술 정신이 부활할 시기가 오는데, 그것을 독일음악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니체는 주장한다. 그리스 비극의 부활이, 바흐에서 베토벤으로, 베토벤에서 바그너로 달려가는 독일음악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십년 이후에 바그너의 음악이 민족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색채를 띄게 되자, 니체는 생각을 바꾸어 바그너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바그너의 음악은 대중들을 지배하려고 하고 대중들의 복종을 바라는 음악이지, 개개인의 삶과 자유와 해석을 존중하는 음악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니체는 후기에 들어서 학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는데, 문제를 만들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즐거운 학문'으로 여겨 긍정하게 된다.)
  • 니체는 14년 후에 새로 지은 서문 「자기 비판의 시도」에서 『비극의 탄생』이 자신의 어설픈 초기작이었음을 인정한다. 쇼펜하우어식 공식들을 가지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설명하려고 했었기 때문에 제대로된 설명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좋게 평가한 점도 있는데, 이 책에서 "세계의 현존은 오직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는 예술가-형이상학을 처음으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 결국 중요한 것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핵심, 즉 '도취'라는 것이냐? 로 볼 수 있는데, 다만 니체는 이 책을 쓰고 난 뒤, 후기로 갈수록 도취의 개념을 '건강한 도취'와 '병든 도취'로 구분하기 시작한다. 술취한 듯이 혼미해져서 생명력을 깍는 도취를 '병든 도취'로 보고, 밝고 건강하고 생명력이 넘쳐서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도취를 '건강한 도취'로 본다. ('병든 도취'에는 바그너의 음악, 맥주, 그리스도교, 민족주의적 혁명 등이 있다.)

[1] 디오니소스를 따르는 반인반수.[2] 그리스 민족의 지혜가 무어라고 말하는지를 먼저 들으시라. 오래된 전설이 있다. 미다스 왕은 숲에서 디오니소스의 동반자, 지혜로운 실레노스를 오랫동안 사냥하려 했으나 잡지못했다. 마침내 그를 손아귀에 넣었을 때 왕은 물었다. 인간에게 가장 좋고 이로운 게 무엇이냐고. 그 신귀는 요지부동 침묵했다. 그런데도 왕이 강압하자 그는 마침내 쩌렁쩌렁 웃으며 설파했다. "처량한 하루살이여, 우연의 자식이여, 고생의 자식이여, 듣지 않음이 너에게 제일 유익하거늘, 어찌 너는 나더라 말하라 하는가? 최선은 네가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태어나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 무無가 되는 것이 최선이므로, 하지만 차선은 네가 얻을 수 있다. ㅡ 어서 죽는 것이므로." (중략) 현존의 참혹함과 섬뜩함을 알았고 또 느꼈기에 그리스인들은 순전히 살기 위해 그에 맞서 올림포스 존재들의 광휘로운 꿈의 탄생을 내세웠따. (중략) 그리스인들은 올림포스 신들의 저 예술가적 중간세계를 통하여 부단히 새롭게 극복했으며 어떻게든 은폐했으며 시야에서 배제했다. 그리스인들은 더없이 심각한 절박함에서 살기 위해 그 신들을 창조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김출곤·박술 옮김, 읻다, 2023(개정판), p.42)[3] 무엇보다 분명한 점은, 시인은 생을 펼치고 행위하는 군상에 자신이 에워싸여 있음을 봄으로써, 그리고 그 군상의 가장 내밀한 본질을 들여다봄으로써만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대적 재능 특유의 약점 때문에 미적인 원초현상을 너무 복잡하고 추상적으로 표상하는 경향이 있다. 진정한 시인에게는 은유란 수사적인 형용이 아니라 시인 앞에서 개념을 대신하여 실제로 떠다니는 대리영상이다. 그에게 성격이란 하나하나의 특성들을 취합하여 조합한 전체가 아니라 그의 눈앞에서 집요하게 생을 펼치는 인물이므로, 그것은 화가의 환시와 다를 바 없으며, 단지 끊임없이 생과 행위를 펼친다는 점에서만 구별된다. (중략) 근본적으로 미적 현상은 단순하다. 끊임없이 생생한 유희를 볼 수 있고 줄기차게 정령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살아갈 수 있는 능력만 가져보라, 그러면 시인이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을 변신시켜서 타인의 몸과 영혼으로 발설하려는 충동만 느껴보라, 그러면 극작가가 될 것이다. 디오니소스적 격동은 이 예술가적 재능을 한 무리 전체에 전달하여 그들로 하여금 정령들의 무리에 에워싸인 자신들을 볼 수 있게 하나니, 이 다중은 정령들과 내적으로 하나임을 안다. 변신한 자기 자신을 목도하는 것, 그리고 실제로 다른 몸, 다른 성격 속으로 들어간 듯 행위하는 것, 바로 이와 같은 비극 가무단의 등장이야말로 극적 원초현상이다. 이 등장은 극 발전의 시초에 자리한다. (중략) 이 현상에는 이미 낯선 본성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이루어지는 개별자의 포기가 있다. 이 현상이 전염병처럼 번져나갔던 까닭에 무리 전체가 주술에 걸렸다고 느끼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김출곤·박술 옮김, 읻다, 2023(개정판), p.70~71)[4]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제의예술인 디티람보스의 가무단을 가리킨다. 디티람보스 제의에서 춤, 노래, 악기반주가 함께하는데, 이 디티람보스에서 비극이 기원했다.[5] 신은 선(善)을 상징하므로, 신에 대항하는 인간은 악(惡)이 된다.[6]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자신의 첫번째 책 『비극의 탄생』이 "불쾌한 헤겔적 냄새를 풍긴다"고 비판한 바 있다.[7] 그리스 지역에 문화가 없던 시기. 니체는 이 시기를 (올림포스 신들 이전의) 티탄적 시기라고 칭한다.[8] 그리스 신화 중에서도 올림포스 신들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9] 성적 방종과 잔인함의 도취로 이루어진 문화. 바빌론의 축제 사카이아가 대표적이다.[10] 엄격한 조형예술이 발달한 시기.[11] 이로써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그리스적 종합이 이루어진다. 즉, 아폴론적인 것으로 순화된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도취적 음악으로서 받아들여진다. (성적 방종과 잔인함으로서가 아니라..)[12] 아르킬로코스는 민요를 받아들였는데, 니체는 이를 두고 음악(디오니소스적 정신)까지 받아들인 것으로 본다.[13] 음악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대표한다.[14] 니체의 생각에 의하면, 에우리피데스가 소크라테스의 논리를 그리스 비극에 접목시킴으로써 음악을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생겼다고 본다.[15]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게 되는 이야기의 비극이 있다고 하자. 보통, 사람들은 공감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비극(음악+드라마)의 분위기에 도취된 사람은, 이런 기분과 감정이라면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분명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는 일은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비극은 그런 상황을 충분히 설득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삶의 고난도 마찬가지다. 불합리한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인생사이지만, 비극은 그 도취와 가상의 힘으로 그런 삶도 살아간다는 것을 우리에게 설득시킨다. 즉, 예술로 삶을 정당화한다.[16] 쇼펜하우어는 욕망을 이룰 수 없다는 데서 결핍을 느끼고 체념을 하지만, 니체는 의지의 충만함 자체가 고통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선다.[17] 사카이아는 2세기 아테나이오스의 저술에서 바빌론의 축제로 소개되었다. 닷새간 벌어지는 이 축제에서는 관계의 전복이 이루어져 주인이 노예가 되고 노예가 주인 노릇을 했다고 한다. 기원 전후의 스타라본은 사카이아를 두고 "사카이아인들의 일종의 박코스 축제"라고 칭했다.[18] 사람들에게 고평가를 받는 소포클레스도 그리스 비극을 말하긴 했으나, 니체는 소포클레스가 비극의 핵심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