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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오해와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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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오해
2.1. 나치의 파시즘을 옹호했다?2.2. 약자를 폄훼하는 비윤리적 이기주의자?2.3. 니체의 작업도 원한 감정이 아닌가?2.4. 무조건 예스(yes)?2.5. 부자와 경쟁 사회 옹호?2.6. 예수 비판?
3. 논란
3.1. 여성혐오주의자 여부에 대한 논란3.2. 새뮤얼 로스의 위작 논란

1. 개요

프리드리히 니체에 대한 오해와 논란을 정리한 문서.

2. 오해

2.1. 나치의 파시즘을 옹호했다?

나는 이상주의를 믿는 저 최근의 투기꾼들인 반유대주의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들은 오늘날 저 그리스도적ㆍ아리아적ㆍ속물적인 태도로 자신들의 눈을 희번덕이면서, 가장 값싼 수단인 도덕적 태도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남용하면서 민중 속에 있는 모든 멍청이들을 자극하려고 한다. 오늘날 독일에서 모든 종류의 정신적 사기가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은 독일 정신이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황폐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황폐화의 원인은 신문과 정치와 맥주와 바그너의 음악만을 너무 지나치게 섭취한 데 있으며, 덧붙여서 이러한 섭생법의 전제가 되는 것, 즉 첫째는 민족적인 강박과 허영, "독일이여! 독일이여! 만방에 빛나는 독일이여!"라는 저 강력하면서도 편협한 원리이고, 둘째로는 '현대적 이념'이라는 진전마비(파킨슨 병)이다.[1]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니체가 나치의 파시즘과 반유대주의를 옹호했다는 오해가 있지만 이는 사실과 정반대이다.

니체는 프로이센 왕국독일을 통일하여 독일 제국을 선포하는 바뀌는 과도기에 직접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도 참전하며 몸소 역사를 겪었다. 그래서 독일어권민족주의가 자신의 윗세대에서 날조되어서 퍼진 것에 불과한 사상이란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가 중심이 되어서 일어났던 어느정도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반유대주의 또한 혐오했는데, 위 민족주의자들이 백이면 백 반유대주의자였고, 그들이 니체의 생전에도 그의 사상을 읊조리며 이용하려고 했기 때문에 더더욱 싫어했다. 반유대주의자들을 "확 쏴버리고 싶다"고 할 정도로 싫어했다.

역사적으로 니체와 나치를 연관시키는 이러한 오해는 바로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스[2]에게서 나왔다. 니체의 여동생인 엘리자베스는 '니체 문서 보관소'를 만들어 니체추종자들을 모았는데, 여기에 모인 니체추종자들 중 일부가 니체의 사상을 마음대로 왜곡하여 전파시켰고, 이들의 '선택적 읽기'를 통해 니체의 사상은 파시즘적인 것으로 잘못 알려졌던 것이었다. 이를 본 나치가 자신의 나치즘을 정당화하기 위해 니체의 사상을 더욱 적극적으로 왜곡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오해는 더 커지게 되었다.

사실, 나치의 국가사회주의 체제에 제일 반대되는 사상을 가진 사람 중 한명이 니체다. 니체의 대표적인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편에서도, "모든 사람이 서서히 죽어가면서 '산다는 건 원래 이런 거야'라고 말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라고 말했듯이, 니체가 전체주의와 국가주의 및 민족주의를 혐오했다는 것은, 기타 저술 및 편지 등에서 거듭 확인되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니체는 공동체를 혐오했고 공동체의 도덕 또한 혐오했다. 공동체가 창조적인 개인을 말살시키기 때문이다. 니체에 따르면, "모든 공동체는 항상 사람을 천박하게 만든다." [3]

물론 니체는 자신의 저서에서 유대인을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상적 맥락에서 유대인들을 비판한 것이지, 히틀러처럼 인종적인 이유로 유대인을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니체는 오히려 민족주의적 면모를 보인다는 이유로 독일인들을 더 강하게 비판한다. 예를 들어 니체는 유대인의 노예 도덕이 기독교의 근본이라고 비판했지만, 그 반면에 유대인을 오랜 고난의 세월을 통해 단련된 민족이며 질적으로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 평한다. 또한 니체는 반유대주의자들이 유대인들을 공격하는 논거가 단지 유대인들의 돈에 대한 시기와 질투, 원한일 뿐이라고 비판하는데, 이 경우 유대인을 시기하는 독일인들이 노예도덕을 가진 게 된다. 아예 후기 저서에서는 반유대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공격하는데, 그가 바그너와 갈라선 이유 중에는 바그너의 완강한 반유대주의적 성향도 포함되어 있었다.[4]

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니체가 민주주의자유주의를 비판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니체의 사상이 파시즘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많이 받아왔다. 하지만 동시에 니체는 민족주의, 국가주의, 공산주의 등을 전부 비판하기 때문에, 니체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서 파시즘을 옹호할 것이라는 주장은 니체를 너무나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니체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 이념이 모든 사람들을 동일하고 평범하게 만든다는 데에 있는데, 나치의 파시즘 역시 사람들을 동일한 국가의 목적과 명령에 종사하게끔 만드므로, 니체의 사상을 파시즘과 연결시키는 것은 학술적으로도 옳지 못하다. 이는 니체의 사상이 오해하기 쉽기 때문이기도 한데, 니체는 엘리트주의와 계급주의를 옹호하면서도 그 권위주의적 제도 자체가 적극적인 저항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즉, 니체의 주장에 따르면 카이사르 같은 폭군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그에게 복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에게 저항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이다.[5] 그렇다고 니체의 사상이 온전한 엘리트주의를 지향하는 것도 아닌게, 그의 사상은 엘리트주의와 평등주의의 절충을 택하고 있어서 복잡하다.[6] 그러므로 니체의 사상은, 동질적인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국가 수준에서의 완전한 통합을 주장하는 파시즘과는 정반대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차라리 그의 사상이 엘리트주의나 계급주의로 비판받을지언정,[7] 파시즘이나 나치즘으로 비판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8]

2.2. 약자를 폄훼하는 비윤리적 이기주의자?

바보가 아니라면 내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비윤리적이라고 불리는 많은 행위들은 피해져야 하고 극복되어야 하며 윤리적이라고 불리는 많은 행위들은 행해져야 하고 장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전자도 후자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근거들로부터 행해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다르게 배워야만 한다. 아마 상당히 오랜 후가 될지도 모르지만, 마침내 더 많은 것에 도달하기 위해서, 즉 다르게 느끼기 위해서.
프리드리히 니체 『아침놀』 103절.
『선악의 저편』이나 『도덕의 계보』를 읽다가 보면, 니체가 마치 약자 그 자체를 폄훼하고 강자 그 자체를 옹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니체가 약육강식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불편함이 종종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이는 니체 특유의 문학적 강조법[9] 때문에 오해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지 않으려면 니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심리학자'로서 책을 썼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즉,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강자'는 단순히 힘쎈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강자', 즉 내면이 강한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반대로 약자는 자기를 불신하는 사람이다.[10]

니체에 따르면 자기 확신(자기 긍정)을 가진 사람(강자)은 도덕과 종교 등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렇다고 도덕과 종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11] 자기를 확신하고 긍정하는 사람은 도덕과 종교를 자기 자신의 삶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도덕과 종교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유'롭다는 것이다.[12] 그래서 니체의 '자유' 개념은 다른 철학자들과는 매우 다른데, 니체에 의하면 자유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극복할 어떤 것에 시간이나 정성을 쏟아붓는 만큼 얻을 수 있는 것이다.[13] 이러한 니체의 정의에 따르면, 저항할 가치가 있으면서도 그 저항이 클수록 '더' 많은 자유와 행복을 쟁취할 수 있으므로, 역설적으로 진정한 강자는 '깊어지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삶의 고통을 찾아 낮은 데로 내려가고자 한다.[14] 남을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더욱 성숙시키기 위해서. 따라서 니체가 말하는 강자는 낮은 데로 내려가 이런 삶의 허무를 마주할 용기를 가졌으면서도, 체념이나 포기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필요에 의해서 '명랑함'을 가지려는 사람이다. 이는 좌절과 극복의 변증법적 과정이기도 하다.[15]

또한 니체는 동정을 아예 하지말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의 제1원리가 '동정'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 니체의 문제의식이다. 그래서 니체는 '동정'을 공격한다. 전통적인 스토아 철학, 가톨릭 철학에서 동정한다는 것은 나의 관점이 아닌 '타인의 관점으로 체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니체의 '관점주의'에서는 모든 가치가 '나의 관점'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니체에게 있어서 '동정'이라는 것은 나의 관점에서 해석된 '나의 이웃 사랑'이어야지, 타인의 관점으로 강요되는 이웃 사랑이 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니체는 인간의 '건강한 이기심'과 '병든 이기심'을 구분하고는, '건강한 이기심'에 '건강한 이타심'의 속성을 포함시킨다.[16] 니체에 의하면, 자신 자신을 사랑하는 '건강한 이기심'을 가진 사람은 그 넘치는 의욕으로 남에게까지 퍼주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이는 의식적인 자랑이나 과시가 아닌 의지 작용에 따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병든 이기심'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만의 이익과 평온에만 몰두하며,[17] [18] '병든 이타심'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사랑할 줄도 모르면서 종교나 도덕에서 '남을 사랑해야 된다'고 말하니까 남을 사랑하고자 한다. 니체의 동정에 대한 공격은 바로 이런 병든 이기심과 병든 이타심을 지적하는 데서 시작된다. 다시 말해, 니체의 이웃 사랑에 대한 비판은 이웃 사랑이 아예 없어져야 한다는 의도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남을 사랑할 줄도 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대들의 이웃을 항상 자신처럼 사랑하라. 그러나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라!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9]
그러므로 니체가 도덕에서 극복하려는 것은 도덕 그 자체가 아니라 도덕에 대한 그릇된 편견임을 알 수 있다. 기존 유럽의 종교와 철학은 도덕의 기원을 인간의 경험적인 심리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이데아의 세계나 신의 계시, 또는 양심에서 찾았다. 이에 반해 니체는 모든 도덕규범들은 사실 인간의 육체적ㆍ정신적 삶을 건강하면서도 강인하게 구현해나갈 수 있는 지침에 불과하다고 본다. 즉 니체는 도덕규범이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무조건 타당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건강한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변형할 수 있고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가 이른바 초월적인 도덕규범의 존재를 부정한 것은 악이 횡행하는 무법천지의 세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도덕규범의 잔인한 지배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인간의 잠재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정신적 토대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20] [21]

즉 니체는 스스로를 "비도덕주의자"라고 말하기도 했을 정도로 기존 도덕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기존 도덕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느끼기 위해서" 비판한 것이지, 기존 도덕을 아예 없애기 위해서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22] 오히려 '기존 도덕'과 니체가 주장하는 '건강한 도덕'은 상호보완적이다. 니체가 말했듯이 "길러냄의 도덕[23]과 길들임의 도덕[24]은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완벽하게 협동할 수 있다."[25]

2.3. 니체의 작업도 원한 감정이 아닌가?

니체는 종교와 도덕을 약자의 원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강자에게 억압 당한 약자들이 '강한 힘'을 나쁜 것으로 몰아감으로서 생기게 된 규칙이 종교와 도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강한 자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하더라도 종교와 도덕은 그것을 불안하게 보며 그런 강자의 자신감에 찬 행동 자체를 비판하고 제한하려고 든다. 하지만 종교와 도덕이 강자의 의욕과 욕망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제한 당하고 있는 강자는 사실 약자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니체 자신도 약자의 입장에서 원한 감정에 사로잡혀 종교와 도덕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한 니체의 생각은 이렇다. 약자의 원한 감정에서 비롯된 비판은 자신의 의욕을 끌어올리기 보다는 강자의 의욕을 끌어내리기를 원하기 때문에 약자 자신의 삶에는 도움이 안 된다. 반면에 강자의 호전적 모험심에서 비롯된 비판은 약자의 의욕과 상관없이 강자 자신의 의욕을 끌어올리기를 원하기 때문에 강자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된다. 즉, 같은 비판이라고 하더라도 약자 자신의 무력함에서 비롯된 비판은 상대도 무력해지기를 바라는 의미의 비판이라서 상대가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좋아하지만, 강자 자신의 호전성에서 비롯된 비판은 자신의 넘치는 의욕에서 나오는 비판이기 때문에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좋아하고 그 자신의 의욕도 같이 커지게 되는 의미의 비판인 것이다.
공격하는 자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가는 그가 필요로 하는 적이 어떤 사람인지를 척도로 하여 측정할 수 있다. 그가 얼마나 성장하였는가는 그가 보다 강력한 적수 또는 보다 강력한 문제를 찾아 나서는가 아닌가에서 드러난다. 왜냐하면 호전적인 철학자는 문제들에게조차 결투를 신청하기 때문이다. 그의 과제는 단순히 일반적인 저항을 제압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의 모든 힘과 유연함 그리고 싸움 기술을 쏟아부을 만한 저항을, 즉 자신과 대등한 적수를 제압하는 데 있다. 적과 대등하다는 것 ㅡ 이것이 정의로운 결투를 위한 첫 번째 전제다. 상대가 내가 얕봐도 되는 상대일 경우, 전쟁은 할 수 없다. 상대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 같은 경우, 즉 상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경우에는 전쟁을 할 것까지도 없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26]
다시 말해,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적에게 증오심과 원한을 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고양하고 강화할 기회를 준 것으로 여기면서 감사해 한다. 자신과 자신의 적은 서로 '이겨야 할 상대'이지 '약해져야 할 무엇'이 아니다. 이에 반해 약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자신을 힘들게 하는 상대에게 증오심과 원한을 품고 자신의 적을 '약해져야 할 무엇'으로 상정한다. 이들은 종교와 도덕을 통해 "인간은 이러저러하게 존재해야 한다!"고 강요하므로, 이들의 의지는 결국 약한 상태에서 더 '약해지게' 된다. 매우 약해진 이들은 삶의 아주 작은 고통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괴로워한다. 그러나 이런 약해진 의지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허무주의자의 삶과 다를 바 없다. 삶은, 아니 생명은 '강한 의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종교나 도덕 등 타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자들은 근본적으로 스스로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강한 의지'를 길러낼 수 없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다.[27]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니체는 자신의 적, 더 정확하게는 자신과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그 적의 신념과 논리가, 더 강해지기를 바라므로 자신의 비판이 원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하는 자신도 비판하라고 종용한다. 니체 자신도 자신의 적을 통해 성장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렇게 도발한다. "이러한 주장 역시 하나의 해석에 불과할 뿐이라고 할 경우,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질시로 가득 차서 그것을 반박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더 좋다."[28]
나의 제자들이여, 나는 이제 홀로 가련다! 그대들도 이제 홀로 떠나라!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 나를 떠나서 차라투스트라에 저항하라! 아니 차라리 그를 부끄러워하라! 그가 그대를 속였을 수도 있으니... 언제까지나 제자인 채로 머무는 것은, 스승에 대한 제대로 된 보답이 아니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나의 월계관을 빼앗으려 하지 않는가?... 이제 나는 그대들에게 명한다.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아라. 그대들이 모두 나를 부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9]

2.4. 무조건 예스(yes)?

니체가 '운명(필연)'을 강조하므로 니체의 사랑 개념이 어떤 것에 대해서든 무조건 '예스(yes)'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니체가 말하는 사랑은 무조건 '예스'를 말하고 이를 견뎌내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니체의 필연 개념이 어떨 때 적용되는지 몰라서 생기는 오해다. 니체에 의하면, 세계 자체는 '우연'이지만 그 우연을 '자기 자신'의 해석을 통해 자기 자신만의 가치로 만들게 되면서, 그 가치가 그 자신에게만큼은 '필연으로 여겨질 정도의 확신'이 된다. 즉, 어떤 우연에 마주쳤을 때, 자신의 취향에 따라 '예'와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자유, ㅡ 즉,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이 있어야, 그 이후의 결과들을 필연적인 것으로 여기며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 자신의 선택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니체가 말했듯이 일단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극복해내는 과정, 그래서 자신만의 관점으로 녹여내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식의 무조건적 긍정은 절반의 진실이다. '자기 자신이 만든 가치라서'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것이지, '자기 자신이 만든 가치가 아닌데도' 피할 수 없으니까 즐겨야 된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30] 그래서 니체는, 나 자신의 선택 이후에야, 그 선택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것들을 비로소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런 이후에야 니체는 그것을 자신의 긍지와 확신를 파괴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자극제로 변환시킨다. 니체가 말하는 '위대한 경멸'도 바로 그러한 것을 의미한다.[31]

이러한 점은 니체의 글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마냥 긍정만하는 예스맨을 '나귀'라고 비판한다.[32]
"저들 모두가 다시 경건해졌구나. 기도를 하고 있다니, 미쳤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고는 그 터무니없음에 놀라버렸다. 그리고 실제로! 그 모든 좀 더 높은 인간들, 두 명의 왕, 실직한 교황, 고약한 마술사, 자발적 거지, 방랑자이자 그림자, 늙은 예언자, 정신의 양심을 갖춘 자 그리고 가장 추악한 자가 어린애나 독실한 노파들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나귀를 경배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가장 추악한 자가, 그의 내면에서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나오려고 하는 것처럼 꾸르륵대며 헐떡이기 시작했다. 그가 그것을 말로 드러내었을 때, 보라, 그것은 저들이 향을 피워 올리며 경배하는 그 나귀를 찬양하는, 경건하고 기이한 기도(Litanei; 연도)였다. 이 기도는 이렇게 울렸다. (중략)

그는 우리의 짐을 짊어진다. 종의 모습을 하고는, 진심으로 인내하며, '아니'라고 말하는 법이 없다. 그리고 자신의 신을 사랑하는 자가 신에게 채찍질을 한다.[33]
ㅡ 그러자 나귀가 '이 - 아'[34]하고 화답했다. (중략)

그가 긴 귀를 갖고서 오직 '그렇다'라고만 할 뿐, 결코 '아니다'를 말하지 않는 것, 이 얼마나 감추어진 지혜인가![35] 그는 자신의 형상에 따라, 말하자면 가능한 한 멍청하게 세상을 창조해내지 않았던가?
ㅡ 그러자 나귀가 '이 - 아'하고 화답했다. (중략)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6]
또한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 행복의 공식: 하나의 '예', 하나의 '아니오', 하나의 직선, 하나의 목표." (Formel meines Glücks: ein Ja, ein Nein, eine gerade Linie, ein Ziel...)[37] 즉, 내 취향에 따라 "예" 또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나 자신으로 살 수 있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런 삶의 목적[38]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의 결단에서 비롯된 좌절과 슬픔, 경멸마저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지, 그냥 무작정 예스만 말한다고 해서 삶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봐서는 안 되는 것이다.[39] 물론, 그런 '취향이나 목표를 이룬 나'로 고정되기를 고집하는 삶도 니체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 작든 크든 끊임없이 자신의 의지가 원하는 창조적인 가치로 자신의 삶을 채워나가는 것, 그래서 자신이 창조한 것마저도 끊임없이 넘어서려는, 삶에 대한 담담하고도 명랑한 자세를 바라는 것이다.

2.5. 부자와 경쟁 사회 옹호?

노예의 르상티망(원망)이 귀족의 의지를 부당하게 깎아내리고 있다는 니체의 주장은, 부자들을 시기 질투하는 가난한 자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그래서 니체는 부자들을 옹호하는 논리를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가 많은데, 이는 니체가 추구하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다. 니체는 생전에 자신의 '귀족' 개념이 핏줄이나 돈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 바 있다.[40] 니체는 돈 많은 사람을 귀족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고귀함'을 가진 사람을 귀족이라고 부른 것이다.[41] 그리고 니체에 따르면 정신적으로 고귀한 사람은 남이 하니까 따라하는 사람을 경멸하면서 매순간 자신의 삶을 자신의 창조적 가치로 채우려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창조적 가치'를 추구하지, 남들도 다들 추구하는 '돈'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앞서 말했던 '부자들을 시기 질투하는 가난한 자들'의 경우를 살펴보면, 니체에게 있어서 가난한 자나 부자나 모두 똑같이 비천한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니체가 '경쟁'을 옹호한 것은 맞지만, 니체의 경쟁 개념은 결코 '물질적 경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 경쟁 사회가 그러하듯, 돈을 남들보다 더 벌어야 된다든지 성적을 남들보다 더 올려야 된다든지 명예를 남들보다 더 가져야 된다든지 등을 말하는 게 아닌 것이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명예와 여자와 돈 때문에 애쓰지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42] 그렇다면 '니체가 말하는 경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물질적 부, 성적, 명예를 얻기 위한 경쟁이 아닌, 자신만의 '가치'를 갈고 닦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가치를 두고 펼치는 경쟁을 말한다. 즉, '가치의 경쟁'이다. 이러한 니체적 경쟁은 승자만 살아남고 패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승자독식의 세계가 아니라, 승자와 패자 모두 자신을 반성적으로 돌아볼 수 있게 만들어 이 반성을 통해 모두가 성장할 수 있게끔 한다.[43]

니체가 물질적 경쟁 사회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비판했다는 사실은 그의 글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니체는 『아침놀』 204절 「다나에와 황금의 신」[44] 편에서, 주식시장과 그곳에서 돈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한다. "옛사람들이 '신을 위해서' 행했던 것을 요즘 사람들은 돈을 위해서 행한다."(und was man ehedem "um Gottes willen" that, thut man jetzt um des Geldes willen.)[45] 자본주의는 니체에게 있어서 돈이 신이 되어버린 사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또다른 '신'을 받드는 사람일 뿐이다.[46]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에서도 국가에 관한 얘기를 꺼내면서, 그 속에서 사람들은 부와 권력을 추구하지만 그로 인해 정신적으로는 더 빈곤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들 쓸모없는 자들을 보라! 그들은 부를 획득하지만 그 때문에 더욱 가난해진다. 그들은 권력을 원하고 무엇보다도 권력의 지렛대인 많은 돈을 원한다. 이 무능력한 자들은!", "보라, 이 재빠른 원숭이들이 기어오르는 꼴을! 그들은 서로 밀치며 기어오르고, 따라서 서로를 진흙탕과 심연 속으로 끌어내린다. 그들 모두는 왕좌에 오르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광기다. 마치 행복이 왕좌에 앉아 있기라도 하다는 듯! 때로는 진흙탕이 왕좌에 앉아 있고, 때로는 왕좌가 진흙탕에 앉아 있다."

2.6. 예수 비판?

니체는 종교를 비판했지 예수 그리스도를 비판한 것은 아니다. 니체는 자신의 책 『안티크리스트』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존경심을 표하되, 그의 이름으로 성장한 기독교라는 '종교'는 혹독하게 비판한다. 기독교는 현실의 삶보다 내세의 삶(천국)을 더 강조하기에, '현실에서의 삶'은 점점더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교회와 사제는 대중들의 원망(르상티망)이라는 심리를 이용해, 더 높은 힘을 추구하는 자의 욕망에 대한 의지를 꺾어버림으로써 전 인류를 노예근성에 빠뜨렸다는 것이 니체의 지적이다.

즉 니체는 자신이 비난하고자 하는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교회와 사제들에 한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오히려 인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존경심을 표했다. 니체는 도스토옙스키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층민과 소외계층, 죄인을 일깨워 지배 질서에 저항하게 한 성스러운 아나키스트였다고 말한다. '기쁜 소식을 가져온 자'인 그리스도는 그가 살아왔던 방식과 그가 가르친 방식대로 죽음을 맞았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몸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가 인류에게 남긴 것은 그가 실천한 모습이다. 재판관과 간수 앞에서, 온갖 조롱과 비난 앞에서,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앞에서 그가 보여준 태도가 이를 증명했다. 그는 악에 맞서지 않았고, 부당한 상황에도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사랑했다. 르상티망(원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태도로서 '네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영원한 긍정을 몸소 가르쳤다.[47]

하지만 지금의 기독교를 탄생시킨 사도 바울로가 그리스도의 모범적인 삶을 가장 혐오스럽고 야만적인 형태로 둔갑시켰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대신해 희생했다는 전설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아무 죄 없는 사람(예수)의 피로 죗값을 대신하다니 이 얼마나 끔직한 이교도의 모습이냐고 니체는 반문한다. 사도 바울로는 세상을 향해, 인간의 육체를 향해 증오심을 키웠고, 최대한 모든 기회를 이용해 르상티망을 퍼뜨려서 기독교라는 거대한 힘을 탄생시켰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48]
'그리스도교'란 말 자체는 이미 오해되어 온 개념이다. 근본적으로는 오직 단 한 명의 그리스도교인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복음'도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 순간 이래로 '복음'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가 살았던 삶과는 이미 정반대의 것이었다. 하나의 신앙을 갖는다는 것, 즉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으리라는 신앙을 그리스도교인의 징표로 보는 것은 터무니없이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적인 실천,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살았던 것과 같은 삶만이 그리스도교적인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안티크리스트』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니체는 예수를 '숭고한 것과 병적인 것과 유치한 것이 기이하게 결합하여 있는 가장 흥미 있는 데카당'이라고 보고 있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위버멘쉬의 유형으로는 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니체의 생각에 따르면, 예수는 현실에 대한 모든 저항과 투쟁을 포기하고 내면적인 평화로 도피해 들어가려고 하는 정신이기 때문이다.[49]

3. 논란

3.1. 여성혐오주의자 여부에 대한 논란

니체가 여성혐오주의자였다는 의혹은 그의 글 전반에서 드러나는 매우 공격적인 어조로 인해 처음부터 널리 퍼져있었고, 이에 대한 논쟁은 항상 있어왔다. 의견은 크게 긍정, 부정, 수정으로 나뉜다.

여성혐오주의자라고 해석하는 쪽에서는 그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 여성의 권리에 대한 반감을 여과없이 드러낸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여자들에게 정치와 학문의 개별적인 부분들이 맡겨진다면, 작지 않은 위험이 생긴다. 왜냐하면 학문이 뭔지 정말 안다고 하는 여자보다 무엇이 더 낯설겠는가?",[50]
"여성 해방에 대하여 - 여자들이 사랑하는 데, 그리고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똑같이 느끼는 데 그렇게 익숙하다면, 그들은 도대체 고정할 수 있을까? 따라서 그들은 또한 어떤 사태에는 드물게 홀딱 빠지지 않지만, 사람에게는 자주 홀딱 빠진다. 그들이 사태에 홀딱 빠질 경우, 그들은 곧바로 이것들의 당파적 추종자가 되고 그로서 이것들의 순수하고 무구한 작용을 망쳐버린다.",[51]
"그래서 여자는 복종해야 하며, 자신의 표면에 대응하는 깊이를 찾아내야 한다. 여자의 기질은 피상적이며, 얕은 물 위에서 쉽게 변하고 격렬하게 흔들리는 피막(皮膜)과 같다. 그러나 남자의 기질은 깊다. 그것은 지하의 동굴 속을 소리 내어 흐르는 격류이다. 여자는 그의 힘을 예감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한다.―" [52]

반면 여성혐오주의자가 아니라고 해석하는 쪽에서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인용한다.
"그러므로 아마도 삶의 가장 강력한 마법은 이런 것일 것이다. 아름다운 가능성으로 빛나는 금실로 짠 너울이 삶 위에 놓여 있다. 미래를 예고하면서, 저항하고, 부끄러워하며, 조롱하는가 하면, 동정하고, 유혹하면서. 그렇다. 삶은 한 여자이다.",[53]
"여성은 철학적 차원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제까지 철학자들에 의해 보편적 진리라고 주장된 것은 서투른 독단이고, 실제 진리의 모습은 여성의 태도와 행위에 가깝다는 관찰이 그것이다." [54]
여기에서 니체는 여성성을 진리에 비유하기도 하는 등 여성성의 재발견을 이끌어낸다. 다시 말해 여성성은 없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성은 진리에 가깝기 때문에 심지어 남성도 참조해야 할 좋은 것이다. 따라서 여성성을 은연중에 극복할 것으로 치부하고 성별 간의 차이를 없애려고 한 당대의 여성 운동에 대하여 니체는 대체로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관점이다. 또 해체론적 시각에서는, 니체가 현대적 페미니즘과는 다르게 사회적ㆍ정치적 관점에 국한되지 않는 철학적 분석과 주장을 하였다고 말한다.[55]

수정주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바라본다.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을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려는 니체의 관점주의적 의도를 생각해본다면, 니체는 '여성혐오적인 부정적 시각'과 '여성성이 진리라는 긍정적 시각' 모두를 주장했다는 것이 제일 타당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56] 설혹 여러 관점에서 살피는 것이 서로 모순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로써 니체는 사건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예를 들면, 니체는 여성에게 성적인 것들은 유해하고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세뇌시켜 순결을 강요하는 문화를 비판한다. 결국 순결을 지키는 여자는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남자인 남편에 의해, 유해하고 수치스러운 일(섹스)을 당하게 될 것이지 않는가? 니체는 거기서 "여성은 평등하지 않은 심리적 매듭을 묶게 된다"고 지적한다.[57]

니체가 살던 시기가 19세기였던 것과 당대의 사회적 한계를 감안했을 때 이런 내용은 오히려 진보적인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독일의 독특한 보수적 성향과 1860년대 중반 이후의 독일 자유주의의 쇠퇴, 독일 중간계급의 정치적 취약성의 결과가 반영된 19세기 독일 여성 운동의 성격은, 교육의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어머니로서의 소양 교육 정도에 만족하고, 기혼 여성의 재산권이나 자녀에 대한 권리를 말하면서도 그 적극적 모색에는 주저하며, 여성 참정권에 대한 강력한 주장도 오랫동안 표출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하에서 “여성의 영향력은 여성의 권리와 요구가 증대한 것에 비해 감소되어 왔다”는 말에서처럼, 초기 페미니즘의 동일화 운동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

현대 제3세대의 페미니스트들은 니체가 제기했던 이러한 인식을 수용하고, 여성성이 파괴되지 않는 양성 평등을 지지한다. 여성성이 지니는 고유의 장점을 결핍으로 파악하고, 인위적으로 남성성과의 동일화를 꾀하여 여성성을 없애려 한 당시의 페미니즘의 경향은 니체가 볼 때 그릇된 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니체가 당대 페미니즘의 선봉장이었던 말비다 폰 마이젠부크와 친교를 나누고, 여성에게 동등한 기회를 요구하며 캠페인 활동도 벌였던 신여성이자 페미니스트였던 메타 폰 잘리스 마흐슐린스와도 교류를 했던 것도, 니체가 여성 혐오주의자가 아니라는 근거로 거론된다.[58] 또한 니체는 다수가 반대하는 가운데에도 바젤대학 박사학위 과정의 여성 입학을 허용하는 결정에 찬성표를 던지기도 했다.[59]#

3.2. 새뮤얼 로스의 위작 논란

니체와 여동생, 50년간 숨겨져 왔던 두 사람 사이의 수상한 관계가 마침내 그 위대한 철학자 자신의 고백으로 드러났다. 뛰어난 철학자, 무섭도록 야심만만한 그의 여동생,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눴고, 그 사랑은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돼 그들의 삶에서 다른 이성이 배제됐다. 독자들은 몇 페이지만 읽어도 깨닫게 될 것이다. 숨 막힐 듯 긴장감을 선사하는 이 책이 왜 그토록 오랫동안 금서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19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는 무서우리만치 솔직하면서도 담담하게 고백한다. 어쩌다가 동생과 그런 위험한 관계에 빠졌는지. 왜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 수밖에 없었는지. 동생의 남편을 어떻게 자살로 이르게 했는지. 《여동생과 나》는 니체가 예나의 정신병원에 갇혀 있을 때 쓴 책이다.
책 《여동생과 나》의 광고 중에서...
니체가 정신병원에 갇혀 있을 때 쓴 자서전이라고 알려진 《여동생과 나》라는 책에서, 니체가 여동생과 육체적인 사랑을 나눴다고 주장을 하는데, 이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다. 월터 카우프만은 각종 증거를 제시하며 그 책 자체가 위작임을 밝혀냈다. 그 책의 실제 저자는 '새뮤얼 로스[60]'로, 감옥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사기꾼이었다. 그는 다른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도 빌려, 비슷한 위작을 만들었고 그렇게 그들의 명예를 실추시켰던 전과범이다. 그런 사실이 일찍이 밝혀졌음에도 지금도 영국과 미국에서는 《여동생과 나》가 표지에 사기꾼의 이름이 아닌 '프리드리히 니체'로 적힌 채, 여전히 출판되고 있다. 물론, 방대한 문헌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출간하여 현재 정본으로 평가받는 '비평판 니체 전집'에서는 이 책을 당연히 포함시키지 않는다.

니체의 자서전은 《이 사람을 보라》 단 한권 뿐이며, 이 책에서 니체는 자신의 유년기와 가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어머니와 여동생에 대해서는 철학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는 식으로 악평을 써놨다. 거기다가 니체는 반유대주의자를 싫어했는데, 바로 니체의 여동생이 그 반유대주의자였다.


[1]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1, p.294[2] 엘리자베스를 반유대주의자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지만, 혹자는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니체 철학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을 뿐 왜곡할 의도는 없었고, 니체의 생각을 정말로 왜곡시켜 버린 것은 당시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던 속칭 '니체 추종자'들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니체의 생각이 그들에 의해 왜곡되었던 것.[3] 『선악의 저편 284』[4] 양대종 『니체와 반유대주의』 한국니체학회, 2022, 42호, 한국니체학회연구 311p ~ 346p 참조[5] 개인에게서나 민족에게서 자유는 어떻게 측정되는가? 극복해야 하는 저항의 크기, 높은 곳에 머무르기 위해 치러야 하는 노고의 정도에 의해 측정된다. 가장 자유로운 인간의 유형은 가장 큰 저항이 끊임없이 극복되고 있는 곳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곧 폭군의 정치에서 다섯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그리고 예속이라는 위험의 문턱 가까이에서. 이것은 특히 '폭군'이라는 말이 일종의 무자비하고 끔찍한 본능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최대의 권위와 규율을 요구하는 본능으로 이해됐을 때, 심리학적으로 참이다. ㅡ 폭군의 가장 아름다운 전형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그런데 그것은 정치적으로도 참이다. 확인해보려면 역사를 한 번 둘러보기만 해도 된다. 어느 정도라도 가치가 있었거나 가치를 갖게 된 민족은 자유주의적 제도 아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외경할 만한 무엇인가로 만들었던 것은 커다란 위험이었다.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145~146)[6] 니체의 이러한 사상은 『우상의 황혼』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48절에 "동등한 자들에게는 평등을, 동등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불평등을"이라는 구호로 드러난다. 이것을 단순한 불평등 구호로'만' 생각해선 안 된다.(백승영 교수의 논의 참조) 니체가 말하는 '동등함'의 자격이란,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자' 또는 '주권자로서의 개인'을 말하는데, 이는 일종의 마음가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권자로서의 개인'이란, 오직 자신에게만 충실하고, 관습의 도덕에서 다시금 벗어난 개인이며, 자율적이고 초윤리적인 개인, 요컨대 자신만의 독립적이고 끈질긴 의지를 지닌 인간,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인간을 말한다.)[7] 노동자 운동이나 페미니즘 운동에 있어서 니체는 기존 권위를 인정하는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 '권위'가 있어야 되는 이유는 복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항하기 위해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물론 그렇게 저항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할 것이라는 점, 저항하지 않고 만족하는 다수의 문제에 대해서는 방관할 것이라는 점에서 니체는 '계급주의(엘리트주의)'에 해당된다.[8] 니체가 파시즘의 선구자라는 이러한 오해는 20세기 전반에 걸쳐 지속되어 왔으나, 니체 전문가들의 지속적인 노력 덕택에 서양에서는 2000년대 초에 니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많이 사라졌으며(68혁명이 니체 연구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맞으나 그와는 별개로 순수 니체 전문가들의 연구결과에 의해 이런 부정적인 인식이 걷히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2010년대 이후부터 이런 부정적인 인식이 많이 사라졌다. 그래서 2000년대 이전 논문들을 보면 니체를 파시즘과 연관시키는 논문들을 매우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9] 이상화는 흔히 믿어지는 것처럼 사소하거나 부차적인 것을 빼내거나 제거하는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주요한 특징들을 크게 드러내어 강조하는 것이 결정적이다. 그럼으로써 다른 특징들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109)[10] 니체가 말하는 약자와 강자라는 것도 이렇게 명랑한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느냐 없느냐를 말하는 것으로서, 약자가 어느 한 순간이라도 타인이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존재할 수 있다면 그는 그 순간만큼은 강자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의 방식이 이분법이 아니냐고 의문을 품을 수 있는데, 니체는 이 구분이 혼재되어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분법적 표현을 '이용'한 것이지, 강자와 약자가 이분법적으로 분명하게 구분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니체는 애초에 말 자체가 이분법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말을 이용해서 이분법을 해체하는 것이 니체의 과제인 것이다. 니체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떤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미 그것을 훨씬 넘어서 있다. 모든 말에는 일말의 경멸할 만한 점이 들어 있다. 언어는 오직 평균적인 것, 중간의 것, 전달할 수 있는 것만을 위해서 고안되었다." (『우상의 황혼』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26절.)[11]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사상 자체에서나 통치, 웅변과 설득, 예술, 윤리 등의 어느 분야에서든지 이 지상에서 자유롭고 정교하며 대담하고 춤처럼 경쾌하며 대가다운 확신을 갖는 것으로서 존재하거나 존재해온 모든 것은 '그러한 전횡적인 법칙들의 폭정' 덕분에 비로소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해서 '자유방임'보다는 바로 이러한 폭정이야말로 '자연'이며 '자연스러운' 것이다. (중략) 도덕 속에 깃들어 있는 '자연'은 자유방임과 지나치게 분방한 자유를 증오하도록 가르치며, 제한된 지평에 대한 욕망과 가장 가까운 과제를 해결하려는 욕망을 심어준다. 즉 삶과 성장의 조건으로서 우리의 시야를 좁힐 것을, 어떤 점에서 본다면 어리석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대는 어떤 누군가에게 그리고 오랜 기간에 걸쳐서 복종해야만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대는 파멸하게 될 것이며 그대 자신에 대한 일말의 존경심마저도 잃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나에게는 자연의 도덕적 명령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그러한 명령은 노(老) 칸트가 요구했던 것과 같은 정언적 명령이 아닐 뿐 아니라(그렇기 때문에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다), 개인에게 향해진 것도 아니다(자연에게 개인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그것은 민족, 인종, 시대, 신분, 무엇보다도 특히 '인간'이란 동물 전체, 즉 인류에게 향해진 명령이다. ㅡ 《선악의 저편》 188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195~198)[12] 수단으로서의 확신! 많은 것이 확신에 의해서만 달성 된다. 위대한 정열은 확신을 이용하며 확신을 다 사용해버리고 확신에 굴복하지 않는다. ㅡ 그것은 자신을 자신의 주인으로 생각한다. ㅡ 반대로 신앙을 필요로 하고, 어떤 무조건적인 긍정과 부정을 필요로 하는 것, 이런 표현이 용서된다면 칼라일주의는 약자에 속하는 것이다. 신앙을 가진 인간, 모든 종류의 '믿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의존적인 인간이며 ㅡ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정립할 수 없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목적을 정립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신앙인'이란 자기 자신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수단이 될 수 있을 뿐이고 사용되어야 하며, 자기를 사용하고 버릴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ㅡ 《안티크리스트》 54절. (프리드리히 니체 《안티크리스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3, p.134~135)[13]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자유주의를 언급하면서 자신의 자유 개념을 설명한다. "자유에 대한 나의 개념 . – 어떤 것의 가치는 때로 당신이 그것으로 무엇을 성취하느냐에 있지 않고, 당신이 그것에 대해 지불하는 것, 즉 우리에게 드는 비용에 있다. (중략) 개인에게서나 민족에게서 자유는 어떻게 측정되는가? 극복해야 하는 저항의 크기, 높은 곳에 머무르기 위해 치러야 하는 노고의 정도에 의해 측정된다." ( Mein Begriff von Freiheit. – Der Wert einer Sache liegt mitunter nicht in dem, was man mit ihr erreicht, sondern in dem, was man für sie bezahlt – was sie uns kostet. (...) Wonach mißt sich die Freiheit, bei einzelnen wie bei Völkern? Nach dem Widerstand, der überwunden werden muß, nach der Mühe, die es kostet, oben zu bleiben.) 즉, 니체에게서 자유란, 외부의 압박에 맞서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활동을 얼마나 쟁취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14] "지배욕: 그것은 순수함과 고독에까지도 유혹적이며 자족한 높이에까지 올라간다. 지상의 천국에 진홍빛 행복을 매혹적으로 그리는 어떤 사랑과도 같이 불타면서. 지배욕: 그것이 높은 곳에서 내려와 힘을 갈망할 때, 누가 그것을 병적인 욕망이라 부르겠는가! 진실로 그와 같은 욕망과 하강에는 아무런 유약함의 흔적도 없다. 고독한 봉우리가 영원히 고립되는 자기 자신으로 만족하지 않는 것, 산이 골짜기로 내려오는, 봉우리에서 낮은 곳으로 부는 그 바람. 오, 누가 그와 같은 갈망에 대한 올바른 세례명과 덕의 이름을 발견하랴! ‘선사하는 덕’ — 차라투스트라는 일찍이 이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을 이렇게 불렀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Herrschsucht: die aber lockend auch zu Reinen und Einsamen und hinauf zu selbstgenugsamen Höhen steigt, glühend gleich einer Liebe, welche purpurne Seligkeiten lockend an Erdenhimmel malt. Herrschsucht: doch wer hieße es Sucht, wenn das Hohe hinab nach Macht gelüstet! Wahrlich, nichts Sieches und Süchtiges ist an solchem Gelüsten und Niedersteigen! Daß die einsame Höhe sich nicht ewig vereinsame und selbst begnüge; daß der Berg zu Tal komme, und die Winde der Höhe zu den Niederungen: O wer fände den rechten Tauf- und Tugendnamen für solche Sehnsucht! »Schenkende Tugend« – so nannte das Unnennbare einst Zarathustra.) 「Also sprach Zarathustra, Von den drei Bösen」[15] 니체에 따르면 한 사람의 내부에서도 약자의 마음과 강자의 마음이 혼재되어 있으며, 사람은 약자가 되었다가 강자가 되었다가를 반복한다. 심지어 니체는 강자의 마음과 약자의 마음이 '영원 회귀'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되도록 강자의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되지만 그렇다고 약자의 마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오히려 그것마저 사랑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고통 또한 기쁨이고, 저주 또한 축복이며, 밤 또한 태양이니. 그대들은 꺼져버리든지 아니면 배우든지 하라. 현자 또한 바보이니. 그대들은 일찍이 하나의 기쁨에 대해 '그렇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오, 내 벗들이여, 그랬다면 그대들은 또한 모든 비애에 대해서도 '그렇다'라고 말한 셈이다. 모든 것이 사슬로 연결되어 있고, 실로 묶여 있으며, 사랑에 빠져 있으니. 그대들이 일찍이 '한 번, 또 한 번'을 원한 적이 있는가? 그대들이 일찍이 "네가 마음에 든다, 행복이여! 찰나여! 순간이여!"라고 말한 적이 있다면, 그대들은 그 모든 것이 되돌아오기를 원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고, 모든 것이 영원하며, 모든 것이 사슬로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이 실로 묶여 있고, 모든 것이 사랑에 빠져 있다. 오, 그대들은 이런 세계를 사랑한 것이다. 그대 영원한 자들이여, 이러한 세계를 영원히 그리고 항상 사랑하라. 그리고 비애에 대고 "사라져라. 하지만 때가 되면 돌아오라!"라고 말하라. 모든 기쁨은 영원을 원하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632~633)[16] 이기주의의 자연적 가치. ㅡ 이기심이 갖는 가치는 이기심을 갖는 자가 생리적으로 갖는 가치에 따라 달라진다. 즉 이기심은 매우 큰 가치를 가질 수 있고, 무가치하고 경멸받을 만할 수도 있다. 모든 인간은 삶의 상승선을 나타내는지 아니면 하강선을 나타내는지에 따라 평가될 수 있다. 이 점이 결정되면 각 개인의 이기심이 어떤 가치를 갖는지 가늠할 수 있는 규준도 주어지는 셈이다. 어떤 사람이 상승선을 나타낸다면, 그의 가치는 실제로 비범하다. (중략) 그러나 만약 그가 나타내는 것이 하강, 쇠퇴, 만성적 퇴락, 질병이라면, 그는 거의 가치를 갖지 못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133~134)[17] 스스로 제물이 되고 선물이 되는 것. 이것에 그대들은 갈증을 느낀다. 바로 그 때문에 그대들은 온갖 부를 그대들의 영혼에 쌓아놓기를 갈구하는 것이다. 그대들의 영혼은 만족을 모른 채 보물과 보배를 취하려 한다. 덕을 선사하려는 그대들의 의지는 만족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만물이 그대들을 향하여, 그대들 속으로 흘러들어 오도록 강제한다. 만물이 그대들의 샘으로부터 그대들의 사랑의 선물이 되어 다시 흘러나가도록 하기 위해서. 실로 그런 선사하는 사랑은 모든 가치를 강탈해내는 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이런 이기성을 온전하며 신성하다고 말한다. 또 다른 이기성도 있는데, 늘 훔치려고 드는 너무나 가난하여 굶주린, 병든 자들의 이기성, 병든 이기성이다. 이 이기성은 광채를 내는 모든 것을 도둑의 눈으로 응시하며, 먹거리를 풍부하게 갖고 있는 자를 굶주린 자의 탐욕스러운 눈으로 헤아린다. 그러면서 선사하는 자들의 식탁 주변을 늘 어슬렁거린다. 이런 욕망으로부터는 병증과 보이지 않는 퇴화가 말을 해댄다. 이런 이기성의 도둑 같은 탐욕은 신체가 병들었음을 말해준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153~154)[18] 내 형제들이여, 말해보라. 우리에게 나쁜 것은 무엇이고, 또 가장 나쁜 것은 무엇인가? 퇴화가 아닌가? 선사하는 영혼이 없는 곳에서는 우리는 늘 퇴화를 알아차리지. 우리의 길은 저 위쪽으로 향한다. 종으로부터 종을 넘어서는 것으로 향한다. 반면 고작 "모든 것은 나를 위해"라고 말하는 퇴화된 감관은 우리에게는 섬뜩하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154)[19]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352[20] 니체는 아침놀 103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바보가 아니라면 내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비윤리적이라고 불리는 많은 행위들은 피해져야 하고 극복되어야 하며 윤리적이라고 불리는 많은 행위들은 행해져야 하고 장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전자도 후자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근거들로부터 행해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다르게 배워야만 한다. 아마 상당히 오랜 후가 될지도 모르지만, 마침내 더 많은 것에 도달하기 위해서, 즉 다르게 느끼기 위해서." 이런 의미에서 도덕을 극복하려는 작업에서 사실 니체가 극복하려는 것은 도덕 그 자체가 아니라 도덕에 대한 그릇된 편견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편견들은 플라톤 이래 유럽의 철학과 종교를 지배해온 것으로서, 인간이 따라야 할 도덕적 규범들은 인간들의 강성적인 충동이나 욕구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본다. 또한 도덕의 기원을 인간의 경험적인 심리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이데아의 세계나 신의 계시 혹은 경험적 심리와 무관한 양심에서 찾는다. 이에 반해 니체는 모든 도덕규범들은 사실 인간의 육체적ㆍ정신적 삶을 건강하면서도 강인하게 구현해나갈 수 있는 지침에 불과하다고 본다. 즉 니체는 도덕규범이 우리의 경험적 현실을 초월한 것으로서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무조건 타당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건강한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변형할 수 있고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가 이른바 초월적인 도덕규범의 존재를 부정한 것은 악이 횡행하는 무법천지의 세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도덕규범의 잔인한 지배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인간의 잠재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할 수 있는 정신적 토대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23~24 에서 박찬국 교수의 주석)[21] 차라투스트라는 많은 나라를 보았고 많은 민족을 보았으며, 지상에서 사랑하는 자의 작품보다 더 막강한 힘을 발견하지 못했다. '선'과 '악', 이것이 그 작품의 이름이다. 실로 이 선과 악이 행사하는 칭찬과 질책의 힘은 거대한 괴물 같다. 그대 형제들이여, 말해보라, 누가 이 괴물을 제압할 것인가? 말해보라, 누가 이 짐승의 천 개나 되는 목에 족쇄를 채울 것인가? 지금까지 천 개나 되는 목표가 있었다. 천 개나 되는 민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천 개의 목에 채울 족쇄가, 그 하나의 목표가 없을 뿐이다. 인류는 아직도 목표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말해보라, 내 형제들이여, 인류에게 아직도 목표가 없다면, 인류 자체가 아직 없는 셈이 아닌가?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119)[22] 바보가 아니라면 내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비윤리적이라고 불리는 많은 행위들은 피해져야 하고 극복되어야 하며 윤리적이라고 불리는 많은 행위들은 행해져야 하고 장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전자도 후자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근거들로부터 행해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다르게 배워야만 한다. 아마 상당히 오랜 후가 될지도 모르지만, 마침내 더 많은 것에 도달하기 위해서, 즉 다르게 느끼기 위해서. (프리드리히 니체 『아침놀』 103절)[23] 주인 도덕(귀족 도덕).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는 방법과 방향을 제시하는 도덕을 말한다.[24] 노예 도덕. "~해야 한다"의 도덕. 사회의 규칙과 규범 등을 말한다.[25] 길러냄의 도덕과 길들임의 도덕은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완벽하게 협동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83)[26]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53~54[27] 니체는 종교가 말하고 있는 '자유 의지'라는 것도 개인에게 죄의 책임을 지우기 위해 고안해낸 개념이라고 본다. 사실 이 개념은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 죄를 저질렀으므로 그것은 신의 잘못이 아니라 인간의 잘못이라는 변명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즉, 이 '자유 의지'라는 개념은 언뜻 보기에 스스로의 의지를 찬양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죄의 원인을 인간 책임으로 몰아감으로써 인간에게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인간의 의지를 크게 약화시키게 만드는 이중의 장치라는 점에서 악독하다는 것이 니체의 지적이다.[28] 『선악의 저편』 22절[29] Allein gehe ich nun, meine Jünger! Auch ihr geht nun davon und allein! So will ich es. Wahrlich, ich rate euch: geht fort von mir und wehrt euch gegen Zarathustra! Und besser noch: schämt euch seiner! Vielleicht betrog er euch. (...) Man vergilt einem Lehrer schlecht, wenn man immer nur der Schüler bleibt. Und warum wollt ihr nicht an meinem Kranze rupfen? (...) Nun heiße ich euch, mich verlieren und euch finden; und erst, wenn ihr mich alle verleugnet habt, will ich euch wiederkehren. (Also sprach Zarathustra, Von der schenkenden Tugend)[30] 나는 경건한 배후세계론자들이 자신의 양심에 대고, 참으로 어떤 악의도 거짓도 없이 "세상을 세상 그대로 놔두라. 그것에 맞서 손가락 하나도 들어 올리지 마라!"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 세상에 그보다 더 거짓되고 악의적인 것은 없는데도.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418)[31] 그대들이 경멸했다는 것, 그대 좀 더 높은 인간들이여, 이것이 내게 희망을 품게 만든다. 말하자면 크게 경멸하는 자들은 크게 존경하는 자들인 것이다. 그대들이 절망했다는 것, 거기에 존경할 만한 점이 많다. 그대들은 어떻게 순종하는지를 배우지 않았고, 자잘한 꾀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리고 순종하느니 차라리 절망하라. 그대들이 오늘을 살 줄 모른다는 것, 그대 좀 더 높은 인간들이여! 진정 그 때문에 나는 그대들을 사랑한다. 그러니 그대들은 최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564~565)[32] 물론 니체는 '자기 자신'이 될 자신이 없는 사람의 경우, 삶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아 허무주의에 빠지기 보다는 차라리 '나귀'와 같이 예스(yes)만 말하며 참고 견디는 삶이 더 나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이는 당연하게도 임시방편일 뿐이다.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33] 나귀처럼 '예스'만 말하며 견디는 자기 자신을 신으로 섬기는 것은, 자기 자신을 채찍질 하는 것이랑 다를 바 없다는 것.[34] 독일어로 '예' 내지 '그렇다'는 'Ja(야)'이다. 즉 독일어 Ja를 당나귀 울음소리로 희화화한 것이다.[35] 비꼬는 것이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니체는 나귀(예스맨)를 신으로 모시는 이런 상황을 계속해서 비판하고 있다.[36]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610~611[37] 『우상의 황혼』 1장 잠언과 화살 44절에 나온다. 또한 『안티크리스트』 1절 마지막에도 나오는 말이다.[38] 여기서 '목적'은 목적론에서 말하는 목적이 아니다. 목적론의 목적은 '세상'에 어떤 목적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여기서의 목적은 '나'의 목적을 말한다. 니체가 목적론을 비판하는 까닭은, 세상의 목적에 따라서 사는 것은 그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을 잊게 만들기 때문이다. 즉 세상의 목적이 아닌 자신의 목적에 따라서 살아라는 것이다.[39] 인간은 발견해내기 어려운 존재다. 자기 자신을 발견해내는 것은 가장 어렵다. 정신이 영혼에 대해 거짓말을 자주 하기 때문이다. 중력의 정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을 발견해낸 자는 "이것이 나의 선이요 나의 악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만인의 선과 만인의 악" 운운하는 두더지와 난쟁이의 입을 막아버린다. 정말이지 나는 모든 것을 다 좋다 하고 심지어는 이 세계를 최선이라고 하는 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자를 나는 매사에 만족하는 자라고 부른다. 모든 것에서 맛을 느낄 줄 아는 매사에 대한 만족. 이런 것은 최선의 취향이 아니다! 나는 극도로 반항적이고 까탈스러운 혀와 위장을 존중한다. "나"와 "그렇다"와 "아니다"라고 말하는 법을 배웠으니 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397~398)[40] 오, 내 형제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새로운 귀족으로 서품하고 인도한다. 그대들은 미래를 낳는 자, 미래를 기르는 자, 미래의 씨를 뿌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진정, 그대들은 소상인들이 그러하듯 그들의 금으로 살 수 있는 귀족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가격이 매겨진 것은 하나같이 가치가 적은 법이다. 앞으로는 어디서 왔는가가 아니라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그대들의 명예로 삼도록 하라! 자기 자신을 넘어가려는 그대들의 의지와 발, 이것을 그대들의 새로운 명예로 삼도록 하라! 어떤 군주를 섬겼다는 것은 정녕코 명예가 아니다. 군주가 다 뭐란 말이냐! 서 있는 것을 더욱 단단히 세울 보루가 되었다는 것도 명예가 아니다! 그대들의 일가가 궁정에서 궁정에 어울리는 자가 되고, 그대들이 홍학처럼 알록달록한 옷차림으로 얕은 못에 오랜 시간 서 있는 법을 배웠다는 것도 명예가 아니다.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궁신들에게나 하나의 공훈이기 때문이다. 모든 궁신들은 앉아도 된다는 것이 사후의 복에 속한다고 믿지!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414)[41] 다만 주의해야할 점은, ‘정신적 귀족주의’라는 말 자체는 니체가 그리 좋아하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신'만 중요하게 여긴다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의 사상이 '정신적인 고귀함'을 말하고 있는 것은 맞으나, 그렇게 말할 때 그 '정신'이란 '신체의 표현'이라는 단서를 빠뜨려서는 안 된다. 인간의 정신은 인간 자신의 자연적 조건을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지훈의 논문 『니체의 ‘위대한 정치’에서 위계질서』 참조)[42] 나는 44년을 살고 나서도 명예와 여자와 돈 때문에 애쓴 적이 없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들을 얻을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100)[43] 논문 『물질주의적 경쟁 대한 비판과 니체적 경쟁의 의미』 김세욱 (영남대), 새한철학회, 철학논총 제110집, 2022. p.19~42 참조.[44] 다나에는 '황금으로 된 비'를 맞고 제우스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전해지는 그리스 신화 속 여인으로서, '돈에 굴복한 사랑'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여기서는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인용되었다.[45] 『아침놀』 204절. 다나에와 황금의 신. ㅡ 오늘날 사람들을 범죄자로 만드는 이 과도한 초조함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범죄 성향과는) 반대되는 성향을 더 초래할 것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은 이 과도한 초조함으로 인해 범죄자가 된다. 어떤 사람은 불공정한 저울을 사용하고, 어떤 사람은 고액의 보험을 든 후에 자신의 집에 방화하고, 어떤 사람은 위조 화폐의 제조에 참여한다. 상류 사회 사람 중 4분의 3이 합법적인 사기에 몰두하고 주식 거래와 투기로 인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로워해야 할 때, 그들을 부추기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그들이 실제로 궁핍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들은 그렇게 심하게 형편이 나쁘지 않으며 아마 음식에 대한 걱정도 없을 것이다. 그들을 그렇게 부추기는 것은 돈이 쌓이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초조감과 (이 초조감 못지않게) 축적된 돈에 대한 끔찍한 욕망과 애정이 밤이든 낮이든 그들을 몰아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초조감과 애정 속에서 힘에 대한 저 열광적인 욕망이 다시 나타난다. 힘에 대한 이러한 열광적인 욕망은 옛날에는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신념에 의해 불붙었고 너무나 아름다운 이름으로 자신을 가장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떳떳한 양심으로 비인간적인 일을 감행할 수 있을 정도였다. 힘에 대한 욕망이 자신을 채우는 수단은 변화되었지만 동일한 화산이 여전히 불타오른다. 초조함과 과도한 애정은 자신의 희생물을 원한다. 이전 사람들이 '신을 위해' 행한 일을, 지금 사람들은 돈을 위해, ㅡ 오늘날 힘의 감정과 떳떳한 양심을 제공하기 위해 ㅡ 행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아침놀』 박찬국 옮김, 책세상, 2004, p.223~224)[46] 『아침놀』 해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가로서의 니체) ㅡ 건강한 삶에 대한 니체의 모색은 단순히 기존의 종교와 도덕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본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중략) 니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기계의 나사가 되었고 인간의 발명품에 대한 보완물이 되었다고 비판한다. 아울러 니체는 임금이 높아진다고 해서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노예 상태가 치유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아울러 니체는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있는 노동에 대한 찬미와 열광은 자신한테서 도피하는 것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니체는 사람들이 노동에 쓸 에너지를 자신의 정신적 성숙과 독립을 위해서 써야 한다고 본다. 또한 니체는 전통적인 종교가 몰락한 대신 이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물신을 숭배하게 되었다고 본다. 사람들이 그전에는 신을 믿는데서 힘과 위안과 안심을 구했다면 이제는 가능한 한 많은 부를 축적하는 데서 힘과 위안과 안심을 구한다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아침놀』 박찬국 옮김, 책세상, 2004, p.446~447)[47] 수 프리도 《니체의 삶》 박선영 옮김, 로크미디어, 2020, p.521~522[48] 수 프리도 《니체의 삶》 박선영 옮김, 로크미디어, 2020, p.522~523[49] 예수의 정신과 바울이 정립한 그리스도교의 교리 사이의 차이를 니체가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는 니체가 예수를 긍정적으로 본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심지어 니체 연구자 중 어떤 이들은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 예수와 동일하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니체는 예수를 '숭고한 것과 병적인 것과 유치한 것이 기이하게 결합하여 있는 가장 흥미 있는 데카당'이라고 보고 있다. 니체는 예수의 정신을 생리적인 허약함으로 인해서 현실에 대한 모든 저항과 투쟁을 포기하고 내면적인 평화로 도피해 들어가려고 하는 정신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도덕의 계보』 첫 번째 논문 8절에서 예수의 이념도 바울에서 보이는 유대적인 증오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정화(精華)라고 보고 있다. 예수 역시 궁극적으로는 가난한 자, 병든 자, 죄인에게 축복과 승리를 가져다준 '구세주'로서, 예수의 이른바 사랑의 복음에는 지상의 강력한 자들에 대한 원한이 승화된 형태로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ㅡ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1, p.54)[50]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416번[51]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416번[5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두행숙 옮김, 제1부 18. 늙은 여자와 젊은 여자에 대하여[53] 《즐거운 학문》 339번[54] 김진석 저술,《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 p.161~162[55] 김진석 저술,《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 p.163[56] 모든 방면에 의심의 싹을 심었던 니체는 위험한 철학자는 진실에 관한 생각만큼 거짓에 관한 생각에서도 흥미로움을 찾는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왜 다양한 관점에서 진실을 조사하지 않는가? 가령, 왜 개구리의 관점에서는 조사하지 않는가? 그가 이미 말한 대로 진리는 여자의 본성만큼이나 신비롭다는 점을 고려하여 영원히 여성은 진리를 다룰 수 없다는 점으로 돌아간다. "여성에게 진리가 무슨 소용인가! 여성에게는 처음부터 진리보다 낯설고 불편하고, 적대적인 것은 없다. 그들의 가장 큰 기술은 거짓말이고, 최고의 관심사는 겉모습과 아름다움이다." 모든 진리는 개인적인 해석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사회 내에 존재하는 기억과 정신 상태에 불과하다. 앞 단락의 마지막 문장은 확실히 이를 증명한다. 니체가 말년에 보여준 철학은 여성 혐오적인 특징이 강했다. 루 살로메는 자유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결혼은 절대 하지 않겠다며 니체의 청혼을 거절해놓고, 당시 프레드 안드레아스와 결혼한다고 발표해 또 한 번 니체를 충격에 빠뜨렸다. 니체는 그녀의 편지에 답장을 쓰지 않았다. (수 프리도 《니체의 삶》 박선영 옮김, 로크미디어, 2020, p.455~456)[57] 니체는 그럴 만했다고 인정되기는 하지만 여성 혐오주의자로 유명하다. 그는 어머니와 엘리자베스 때문에 멀미의 사슬에 빠질 때마다 여성에 대해 좋지 않은 글을 많이 남겼다. 하지만 이 기간 여성에게 보인 연민과 그들의 심리에 대한 통찰력은 당시로 보면 주목할 만하다. 특히 《즐거운 학문》에 등장하는 여성에 관한 아포리즘은 긍정적이고 매우 호의적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상류층 여성들이 자라온 환경의 모순점을 지적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 문제에 가능한 한 무지한 환경에서 길러지고, 성적인 것들은 유해하고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다. 그러고는 어느 날 갑자기 날벼락처럼 결혼이라는 환경에 내던져져 지배를 받는다. 그들이 가장 사랑하고, 가장 존경한 남자에 의해 섹스의 공포와 의무감에 시달리는 것이다. 신과 짐승이 예상치 못하게 다가오는데 그들이 어떻게 대처할 수 있겠는가? 니체는 통찰력을 발휘하여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거기서 여성은 평등하지 않은 심리적 매듭을 묶었다." (수 프리도 《니체의 삶》 박선영 옮김, 로크미디어, 2020, p.339)[58] 수 프리도 《니체의 삶》 박선영 옮김, 로크미디어, 2020, p.505[59] 베르너 슈텍마이어 《니체 입문》 홍사현 옮김, 책세상, 2020, p.45[60] 1893~1974. 유태인이라고 하지만 본명도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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