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 문화유산 | 1992년 앙코르 អង្ | 2008년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 ប្រាសាទព្រះវិហាររបស់ | 2017년 삼보르 프레이 쿡 사원, 고대 이샤나푸라의 고고 유적 សំបូរព្រៃគុ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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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 한국어 | 앙코르 | |
크메르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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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위치 | [[캄보디아| ]][[틀:국기| ]][[틀:국기| ]] 씨엠립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지정번호 | 668 | ||
등재연도 | 1992년 | ||
등재기준 | (ⅰ)[1], (ⅱ)[2], (ⅲ)[3], (ⅳ)[4] | }}} |
앙코르와트의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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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អង្គរវត្ត (ʼɑngkɔɔ vŏət) (크메르어)Angkor Wat (영어)
유네스코가 지정한 불교의 성지이자 세계 최대 규모의 사원. 본래 힌두교 사원으로 지어졌고, 완공된 후 30년은 힌두교 사원이었으나, 그 이후 불교 사원으로 바뀌었다.
캄보디아 씨엠립성의 성도 씨엠립에서 북쪽으로 약 4 km 정도 떨어진 곳, 크메르 제국의 수도였던 앙코르 톰(Angkor Thom)에서는 남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있다. 앙코르(Angkor)는 크메르어(語)로 왕조를 뜻하며 와트(Wat)는 사원을 뜻하기 때문에 왕조의 사원이라고도 한다. 가장 높은 3층의 중앙 성소까지의 높이는 총 65m이고 계단이 매우 가파른 것이 특징이다.[5]
이 유적이 위대한 이유는 오랜 역사와 웅장한 규모는 물론이고 오래 전에 거대한 규모로 지어졌음에도 전혀 손색이 없는 고도의 정교한 건축기술에 있다. 또한 사람의 손에서 방치되는 역사를 겪으며 덩굴과 나무 등이 사원의 벽을 뚫고 자라나고 있는데, 이는 인간의 건축물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며, 문명의 무상함이라는 불교적 메세지와 인간과 자연이 큰 시간 단위에서 결국 어우러지는 우주의 질서를 몸소 나타낸다. 앙코르 와트 건물은 동향으로 지었지만, 건물의 축을 정동쪽이 아니라 시계 방향으로 0.5도 틀었다. 이는 실수가 아니다. 주야평분시(晝夜平分時), 즉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과 추분 무렵 서쪽 통로에서 일출을 보면, 땅 위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사원의 중앙 탑 꼭대기를 지나가는 듯이 보인다. 만약 건물을 정동향으로 지었다면 태양이 떠오르면서 남쪽 하늘로 움직이기 때문에 중앙탑과 태양이 틀어져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없다. 직접 보면 장관이다. 중세 크메르인들의 고도의 지식과 기술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
2. 역사
앙코르와트는 크메르 제국의 왕 수리야바르만 2세가 1122년부터 1150년까지 28년에 걸쳐 세웠다. 불교 성지로 알려진 지금과는 달리 사실 앙코르와트는 힌두교 사원인데, 당시 크메르 제국의 국교가 힌두교였기 때문이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이만한 거대한 사원은 시바 신에게 봉헌하던 전통을 깨고 앙코르와트를 질서의 신 비슈누에게 바쳤다. 비록 수리야바르만 2세는 앙코르와트 완성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6] 앙코르와트는 완공된 이래로 국왕 직속의 핵심사원이자 크메르 제국의 가장 중요한 사원으로 자리잡았다.하지만 앙코르와트가 완공되고 30년도 되지 않은 1177년, 크메르 제국은 인근의 참족에게 공격을 당해 치명타를 입었다. 이때 크메르 제국의 수도 앙코르도 이때 참족에게 약탈당해서 크메르 제국은 나라가 휘청거려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그나마 중흥군주 자야바르만 7세가 다시 제국을 회복하고 수도를 앙코르 톰으로 옮겨 천도하면서 크메르 제국은 기사회생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자야바르만 7세는 국교를 힌두교에서 불교로 바꿨는데, 그동안 힌두 신들을 그렇게 믿어왔는데도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갔으니 힌두교 신앙심이 완전히 떨어져버렸던 것. 자야바르만 7세는 국교를 불교로 바꾸면서 앙코르와트에 있던 각종 힌두교 부조와 석상들도 상당수 불상으로 대체했다.
안타깝게도 중흥군주 자야바르만 7세 이후로 크메르 제국은 끝없이 쇠락했다. 인근의 태국, 베트남 등에 치이면서 고대의 영광은 온데간데없고 허구한 날 공격당하는 약소국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앙코르에 세운 각종 사원들과 건축물들도 모조리 잊혔고, 앙코르와트 역시 17세기 말 이래로는 거의 사람이 찾지 않는 폐허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앙코르와트가 워낙 면적이 엄청난 건축물이라 아예 잊히진 않았고, 일본 순례자들이 찾아와 작은 초막을 짓고 살기도 했다.[7] 이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의 가톨릭 수도자 안토니오 다 마달레나도 1586년에 이 곳을 찾아와 방명록을 남겼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앙코르와트가 아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앙리 무오의 여행록 속 삽화.
물론 앙코르와트가 완전히 사람들에게 잊히진 않았어도 어디까지나 일부 호기심 많은 탐험가나 여행자들이 왔다 갔다 하는 정도였다. 동남아인들을 제외하면 세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앙코르와트의 존재조차도 몰랐다. 이렇게 방치된 앙코르와트를 처음으로 서방세계에 알린 사람이 그 유명한 앙리 무오(Henri Mouhot 1826-61)이다.[8] 프랑스 출신 박물학자 앙리 무오는 1860년에 캄보디아를 탐험하는 과정에서 앙코르와트를 방문했고, 그가 쓴 여행록이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앙코르와트는 마침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다. 앙리 무오는 '이 신전의 아름다움은 솔로몬의 신전이나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비견될 정도'라고 극찬하면서 앙코르와트를 유럽인들에게 소개했는데, 이 여행록이 이색적인 신세계에 관심이 많던 당대 유럽인들의 입맛에 딱 맞았기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는 얼마 지나지 않은 1863년 캄보디아를 보호령, 즉 사실상 식민지로 삼았다. 의도치 않았지만 이 과정에서 캄보디아의 영토가 넒어지기도 했는데, 유적에 관심이 많던 프랑스가 크메르 유적들을 모조리 손에 넣기 위해서 당시 태국령이던 씨엠립과 바탐방, 시소폰 일대를 침공해서 합병한 후 캄보디아령에 붙여버렸기 때문이었다. 어찌됐든 프랑스인들의 앙코르 유적 사랑은 계속돼서 1931년에는 앙코르와트의 모형을 파리 만국박람회에 통째로 전시하기도 했고, 수많은 학자들이 앙코르와트를 방문해 연구와 발굴작업을 계속했다. 그동안 앙코르와트에 무성하던 초목과 나무들을 모두 뜯어내고 보존 처리를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하지만 당연히 프랑스인들이 앙코르와트에 좋은 일만 한 건 아니었다. 당시 유럽에선 동남아시아인들이 이렇게 위대한 건축물을 지었을 리 없다며 고대 로마의 후예들이 남겼다든지 심지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에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후예가 남아 만들었다든지 하는 별별 억지 주장이 다 나왔다. 심지어 처음 이 유적을 발견한 앙리 무오도 캄보디아인들이 이런 유적을 만들었을 리 없다고 의심했을 정도. 그리고 프랑스는 여기 있는 문화재들을 상당수 약탈해 뜯어가 루브르 박물관에 두기도 했는데, 심지어 훗날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작가 앙드레 말로도 이곳의 문화재를 훔쳐간 전력이 있었는지라 이 사실이 그의 명성에 먹칠을 했다.
1976년 앙코르와트 옆을 행군하는 크메르 루주. | 앙코르와트를 점거한 크메르 루주의 모습. |
1992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나, 전쟁과 약탈로 인해 중요 유물 30점 이상이 소실, 전체 유적지의 70%가 심하게 훼손되었으며 사원 근처의 왕궁에 있는 유물 천여 점이 도난 및 파괴되는 등 유적지의 훼손이 매우 심각하다. 실제로 해자의 다리와 벽에 기관총으로 생긴 홈을 볼 수 있을 정도. 이 때문에 유네스코에서는 문화유산에 등재되기 전인 1982년에 유적지 복구를 위한 조사단을 파견하겠다고 통보하기도 했다.[9] 다만 2000년대 들어서 캄보디아의 치안이 그럭저럭 안정화되고 난 이후, 앙코르와트가 사실상 캄보디아의 상징이기 때문에 조금씩 복구와 유지 작업에 시동을 거는 중이다.
3. 구조
3.1. 건축
사원으로 들어가는 석조 다리. | 다리를 지나면 마주하는 서쪽의 중앙 고푸람. |
해자를 건너 앙코르와트로 들어가는 다리는 해자 서쪽에 있다.[10] 석판으로 포장된 다리에는 석조 사자상이 양 옆을 지키고 있다. 원래는 이 다리 앞에도 건물과 문이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무너졌다고 추정된다. 동쪽에도 들어가는 다리가 있지만 사실상 흙길이 깔린 제방에 더 가깝다. 다리를 따라 해자를 건너가면 고푸람[11]이 나온다. 해자에서 약 30 m 정도 떨어진 곳에 앙코르와트의 외벽과 고푸람이 있는데, 정문이 있었던 서쪽의 고푸람이 가장 거대하다. 서쪽에는 윗부분이 살짝 무너진 고푸람이 총 3개 있는데 개중에 중앙에 있는 고푸람이 가장 크다. 중앙 고푸람 내부에는 팔이 여러개 달린 비슈누 석상이 있다. 앙코르와트가 힌두 사원이던 시절에는 아마 중앙 탑에 안치되었으리라 추정되는 신상이다.
앙코르와트 외벽은 그 길이가 무려 가로 1024 m, 세로 802 m에 달하며 높이는 약 4.5 m 정도로 꽤 높다랗다. 외벽은 회랑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바깥쪽 부분에는 사각기둥들이 열을 지어 서있고 안쪽 부분은 벽으로 막혀있다. 기둥들 사이의 천장은 연꽃으로 아름답게 장식이 되어있으며 벽면에는 웃는 압사라[12]의 모습이 조각되었다. 특히 이 서쪽 고푸람에는 앙코르와트에서 유일하게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고 유명한 압사라 부조가 있다. 어쨌든 외벽은 총 82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면적을 둘러싸는데, 원래는 이 외벽 안에 빽빽하게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이야 목조로 만든 궁전과 건물들이 죄다 썩어서 돌로 만든 가장 중앙의 사원만 남았지만 전성기 시절에는 외벽 안에 발 디딜 틈도 없이 건축물들이 들어섰다고 생각하면 된다.
고푸람을 통과하면 나오는 석조 보도. | 석조 보도와 양 옆의 도서관의 모습. |
보도를 걷다보면 마침내 사원 본건물에 도착할 수 있다. 중앙 사원 본체는 크게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갈수록 높아지며 맨 마지막 3층에 중앙 탑이 위치하는 구조이다.[14] 모든 층에는 사면의 정중앙에 고푸람들이 1개씩 세워져 있으며, 특히 2층과 3층에는 중앙뿐만 아니라 모서리 부분에도 고푸람이 1개씩 세워져 있다. 사원이 서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세워졌기에 사원의 건축물들은 상대적으로 동쪽으로 치우친 구조다. 또한 왕이 들어올 때 가장 잘 보이는 부분이 정문과 가까운 서쪽 부분이었던 터라 서쪽 부분에 가장 정교하고 자세한 부조들이 가득 조각되어 있다. 또한 왕이 주로 사용했던 서쪽의 계단들이 다른 방향의 계단보다 상대적으로 경사가 낮게 만들어진 것도 특징이다.
사람들이 앙코르와트의 겉모습만 보고 채석장에서 채굴한 돌로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겉부분만 회색 사암을 사용해 만들었고 그 안은 적갈색의 라테라이트 벽돌로 채워넣은 구조이다. 라테라이트는 산화철을 함유하고 있는 적갈색 토양으로 땅 속에서는 부드럽지만 땅 밖에서는 철분 때문에 습기가 말라 굳으면서 굉장히 단단해진다. 가공하기는 쉽고 건물을 지은 나중에는 단단해지는 특성 때문에 아열대 지방에서는 라테라이트를 이용한 경우가 많았고, 앙코르와트 역시 라테라이트를 이용해서 지었다. 앙코르와트 유적을 잘 보면 일단 라테라이트 벽돌을 쌓은 다음 겉에는 사암 덩어리를 깎아서 덮었다. 물론 라테라이트를 쌓지 않고 통째로 사암으로 만든 부분도 일부 존재한다.
1층 회랑은 가로 215 m, 세로 187 m이다. 2층과 3층 회랑과는 달리 모서리 부분에 고푸람 대신 작은 파빌리온이 하나씩 있다. 회랑은 사원 외부로 뚫렸고 사각 기둥들이 회랑을 받친다. 1층을 2층과 연결하는 통로가 서쪽에 있는 십자 회랑인데, 이를 '1천 신령들의 홀(Hall of Thousand Gods)'라고 부른다. 순례자들이 이 곳에 불상이나 부조를 새겼으나 싸그리 약탈당해서 현재는 몇 개밖에 남지 않았다. 특히 1천 신령들의 홀에는 순례객들의 선행에 대한 글들이 유난히 많은데, 대부분은 크메르어지만 일부 버마어나 일본어도 있다. 십자 회랑 사이의 공간에는 한때 물이 차 있었다고 추측된다. 남북쪽의 회랑은 도서관이다.
1천 신령들의 홀.[15] | 2층에서 올려다본 3층의 모습. | 3층의 중앙 성소. |
3층 회랑은 2층에서부터의 높이가 약 40 m에 달할 정도로 그 경사가 극히 가파르게 올라간다.[16] 정사각형 모양의 단에는 모서리에 각각 2개씩, 중앙에 1개씩 총 12개 계단이 있는데, 각 계단에는 단이 약 40여 개 정도가 있고, 이 경사가 70도 정도로 매우 가파를 뿐만 아니라 폭도 보통 계단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친다. 이러한 계단을 오르는 사람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위를 올려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자세를 취하는데, 크메르인들이 사원을 지을 때 바로 이와 같은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17]
3층의 정사각형 모양 기단 둘레는 60 m이고, 모서리 쪽 계단이 올라오는 부분에 고푸람들이 1개씩, 그리고 정중앙에 가장 거대한 고푸람이 1개가 있어 총 5개 고푸람이 있다. 2열 기둥으로 장식된 지붕 덮인 회랑이 외벽 역할을 하는데, 이 회랑이 십자형 통로와 연결되어 자연스레 중앙의 성소로 향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맨 중앙에 있는 고푸람은 그 높이가 지면에서 65m나 되는데, 특히 크메르 특유의 그 솟구치는 듯한 장식 때문에 더더욱 그 높이가 높아 보인다. 본디 이 성소에는 비슈누 상이 있었으나 이후 불교가 전래되면서 비슈누가 쫓겨나고 그 자리에 불상이 놓였다. 허나 원래 있던 불상은 진작에 도굴당해 사라졌다. 그나마 1934년에 고고학자 조지 투르베가 중앙 성소 아래에서 모래와 물이 찬 비밀 구덩이를 발견했지만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고.[18] 현재는 이 중앙 성소 한가운데에 새로 불상을 안치해 놓았다.
3.2. 부조
앙코르와트에서 복잡한 건축 양식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빽빽하게 새겨놓은 부조들이다. 대부분 힌두교 신화나 불교 설화의 내용들을 1층 회랑벽에 새겨놓은 것들인데, 정말 공백을 찾아보기 힘들만큼 벽에 그득그득 부조를 새겨서 보고 있다보면 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19] 위의 그림은 부조의 위치와 그 내용을 설명한 그림이다. 왼쪽이 서쪽이고 오른쪽이 동쪽인데, 맨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데바와 아수라의 전투', '크리슈나의 승리', '비슈누의 승리', '우유 바다 휘젓기',[20] '천당과 지옥', '수리야바르만 2세의 행렬', '쿠룩셰트라 전투', '랑카의 전투' 순서다. 개중 가장 유명한 건 '우유 바다 휘젓기', '천당과 지옥', '수리야바르만 2세의 행렬', '랑카의 전투' 정도다.
앙코르와트 회랑에는 위처럼 수많은 부조들이 새겨져있으나 개중 가장 볼만한 부조는 역시나 '우유 바다 휘젓기'다. 신과 악마들이 만다라 산을 꽁꽁 둘러싼 뱀의 왕 바수키의 머리와 꼬리를 잡은 채 맷돌처럼 천 년 동안 우유 바다를 휘저었다는 내용인데, 이 과정에서 불사의 영약 암리타와 신들의 무희 압사라, 그리고 락슈미 여신 등 수많은 존재들이 탄생했다는 일종의 창세신화다. 더 자세한 내용은 우유 바다 휘젓기 문서 참조. 어쨌든 앙코르와트의 우유 바다 휘젓기 부조는 대단히 알아보기가 쉬운데, 일단 중심이 되는 신 비슈누, 남쪽의 악마왕 라바나, 그리고 북쪽의 하누만이 큼직하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92명의 아수라들이 바수키의 머리 부분을 잡고 있고, 88명의 데바들이 바수키의 꼬리를 잡고있다.
'수리야바르만 2세의 행렬' 역시 유명한 편이다. 앙코르와트를 창건한 수리야바르만 2세 대왕의 모습을 새겨놓은 부조인데, 보통 관람객들도 한 번쯤은 쓱 둘러보고 가는 경우가 많다. 부조의 길이는 약 93.6m, 위치는 남쪽 회랑의 서편에 있다. 이 부조의 내용은 크메르의 대왕 수리야바르만 2세가 공주와 신하, 그리고 군사들을 데리고 위풍당당하게 행진한다는 내용이다. 곁에는 그에 충성하는 왕 18명이 따로 새겨졌다. 참고로 당시 동남아에서는 왕이 쓴 일산과 부채가 많을수록 그 왕의 권위가 높음을 상징했는데, 당시 동남아 전체를 호령하던 수리야바르만 2세 위에는 무려 일산 14개와 부채 5개가 올라가 있다.[21] 이 부조에는 시암 용병들을 묘사한 부분이 훼손되어 있는데, 학계에선 아마 태국인들의 짓이 아닐까 추정한다.[22]
우유 바다 휘젓기 부조.[23] 앙코르와트 부조 중 가장 유명하다. | 1층 회랑에 새겨진 수리야바르만 2세의 모습. |
'랑카의 전투' 부조도 볼만하다. 자세한 내용은 라마야나 문서를 읽으면 더 잘 이해되겠지만,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이 랑카의 전투는 대서사시 라마야나의 클라이맥스이자 최종 결전의 장이다. 선한 영웅 라마와 그의 동료 하누만이 함께 랑카 섬에서 사악한 악마 라바나를 물리치는 내용이다. 기둥 19개에 장면 총 19개를 묘사했는데, 보통 라마와 원숭이 군대 쪽이 왼쪽에, 라바나의 악마 군대가 오른쪽에 있다. 원숭이 군대는 무기를 거의 쓰지 않고 이빨로 물어뜯거나 눈을 찌르는 모습이고 악마 군대는 정교한 갑주를 차려입은 모습이다. 서로 싸우는 모습도 가지각색인데, 이빨로 목을 물어뜯는 원숭이, 발로 가슴을 누르고 위에서 의기양양해하는 원숭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악마 병사의 모습 등 자세히 보면 온갖 군상들의 모습이 다있다.
마지막으로 설명할 부조는 '쿠룩셰트라 전투', 혹은 '쿠루 평원의 전투'로 불리는 부조다. 라마야나와 함께 힌두 서사시의 양대산맥인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내용인데, 전체적인 내용은 판다바 형제들과 카우라바 형제들이 왕위를 놓고 싸운다는 이야기다. 판다바 형제들이 선한 쪽이고 카우라바 형제들이 악한 쪽이다. 당연히 선한 판다바 형제들이 크리슈나 신의 도움을 받아 승리한다. 이 부조 역시 마찬가지로 전투 도중 활을 쏘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 온 몸에 수많은 화살이 꽂힌 채로 죽어가며 유언을 남기는 영웅 비슈마의 모습 등 볼만한 장면들이 많다. 다만 부조의 전반적인 모습이 위의 '랑카의 전투'와 상당히 겹치기 때문에 관광객들 중 시간이 없거나 빠르게 둘러보는 사람들의 경우 이 쿠루 평원의 전투 부조는 안 보고 가는 사람들도 있다.
4. 투어
패키지 투어라면 여행사에서 일정이 만들어져 있어 따라서 소화하면 되기에 자유여행자들의 경우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자유여행자들의 경우엔 앙코르 와트를 비롯한 앙코르 유적군을 묶어서 투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크게 스몰 투어와 그랜드 투어로 나눌 수 있다.
- 스몰투어는 일반적으로 오전에 앙코르 톰[25]을 시작으로 타 프롬[26]을 본 뒤 오후에 앙코르 왓 사원을 구경하는 일정이다.
- 그랜드 투어는 프레아 칸 사원을 시작으로 닉뽀안, 따 솜 사원을 거쳐 동 메본 사원과 프레룹 사원을 도는 일정이다. 이 일정은 빠르게 돈다면 반나절이면 충분하나 보통 반티아이 스레이를 추가해 시간을 맞춰 프레룹 사원에서 일몰을 보는 일정으로 많이 소화한다.
일반적으로 현지 여행사를 통해 조인해서 가거나, 툭툭 기사를 고용해서 코스를 도는 방법, 한국어가 가능한 캄보디아인 가이드 고용, 현지 한국업체의 한국인 투어상품, 이렇게 보통 4가지를 많이 이용한다.
- 현지 여행사 조인은 차량을 통해 이동하기 때문에 이동간 차량 에어컨을 쐴 수 있고 가격이 싸다는 장점이있으나 가이드가 일반적으로 영어를 사용하며 일정대로 맞춰가야한다는 단점이 있다.[27] 그러나 천천히 말하는 영어는 알아들을 수 있고, 기초적인 질문정도는 가능하다면 한국 가이드보다 현지 가이드가 낫다. 그 나라의 유적이니만큼 더 많은 지식이 있을 뿐더러, 조각이나 판화 등 문화를 반영하는 유적들에서 경험이 담긴 자세한 설명을 해줄 수 있다.
- 툭툭 기사 고용은 툭툭 이동시 도로에 날리는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 쓰며, 툭툭 기사는 사원에 데려다 주고 출구에서 기다리고, 가이드는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어찌 보면 가격이 가장 쌀 수 있기 때문에 많이들 선택한다.[28]
- 한국어가 가능한 캄보디아인 가이드 고용은 한국어가 가능하면서 캄보디아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는 캄보디아인의 가이드를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한국어가 약간은 부족한지 가끔 제대로 된 설명 혹은 대답을 하지 못할 때도 있다는 단점이 있다.[29]
- 한국인 투어상품은 여러 명이 함께 투어한다고 가정시 1인당 가격이 가장 비싸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제대로 된 한국어 가이드를 받을 수 있고 요청사항에 대한 피드백이 빠르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5. 사건사고
2003년에는 태국의 여배우인 수와난 콘잉이 "앙코르와트는 태국의 유물", "캄보디아에서 앙코르와트를 태국에 반환하지 않으면 캄보디아 공연을 하지 않겠다."[30]라고 발언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성난 캄보디아 군중들이 주 캄보디아 태국 대사관과 태국 음식점, 그리고 태국계 상점 등을 습격하고 태국의 국기를 찢거나 불태우기도 하였다. 실종자까지 발생하자, 열받은 태국이 국경지대에 전면 경계령까지 내리며 캄보디아 씨엠립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는 자국 업체의 전기를 끊어버렸다. 결국 캄보디아 정부가 사과를 하게 된다. #2012년에는 인도의 한 힌두교 재단이 앙코르 와트 복제를 추진하려고 하자, 캄보디아 정부가 이에 발끈한 적도 있었다. 재단 측에선 "앙코르와트는 비슈누를 모시던 힌두교 사원이었으나 훗날 불교 사찰[31]로 사용된 것이다."라며 재차 사업의지를 밝혔다. # 이후로는 후속 보도가 나오지 않고 있다.
6. 여담
- 당연하지만 캄보디아에서는 조상이 남긴 위대한 문화유산이자 국가의 상징인 랜드마크로 캄보디아 독립 이후 제정된 캄보디아의 모든 국기에는 앙코르 와트가 그려져 있다. 국가 무신론을 표방하며 불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던 민주 캄푸치아 시절 국기도 마찬가지.
- 지금 남아있는 앙코르 와트는 앙코르 제국 시절의 원형은 아니다. 원래 목조건축과 석조건축이 어우러졌는데 제국 멸망 이후 오랜 세월 방치되면서 목조 부분은 소실되어 없어지고 석조 부분만 남은 것. 지금도 과거 목조 건축물이 끼워져있던 홈들은 그대로 남아있다.
- 태국과의 소유권 분쟁이 유명하다. 서로 뺏고 뺏기는 역사가 반복되었던 동남아 특성상 이런 분쟁이 발생하게 된 것인데, 실제로 태국은 앙코르 유적이 대거 있는 씨엠립 지방을 몇 백년 간 지배한 적도 있다. 태국 역시 화려한 앙코르 유적에 눈독을 들인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라마 4세 시절에 아예 앙코르와트를 뜯어서 방콕으로 옮기려 시도한 적도 있다. 물론 캄보디아인들의 극렬한 반대와 자금난으로 실패했지만 나름 태국이 앙코르와트에 미련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라마 4세는 이 작업을 실패한 이후에도 미련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방콕의 왓 프라깨오 한복판에 앙코르와트 모형을 만들어놨다. 반대로 캄보디아는 앙코르와트와 크메르 문화가 나라의 정체성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태국에서 앙코르와 관련된 일만 생기면 당연히 거세게 반발한다. 위의 태국 연예인 망언사건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나왔던 것이다.
앙코르와트의 춘분 일출의 모습.
- 주야평분시(晝夜平分時), 즉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과 추분 무렵 서쪽 통로에서 일출을 보면, 땅 위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사원의 중앙 탑 꼭대기를 지나가는 듯이 보인다. 크메르인들이 치밀한 계산 끝에 만들어낸 극적인 효과로, 매년 이 광경을 보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춘분과 추분에 앙코르와트를 찾는다.
- 나라사정이 낙후되었다보니 당연히 여기까지도 관광객들의 주머니를 털어먹는 도둑들이 많은데 한술 더 떠서 유적이 더 잘 보이는 곳으로 안내하는 척 하다가 강도로 돌변하는 이들도 많다. 또한 앙코르 와트까지 싼 가격에 데려다 주겠다고 하고서는 도착 후 바가지를 씌우는 경우도 비일비재 하는 등, 이곳의 현지인들은 그야말로 관광객들 주머니 털어서 먹는 것이 직업인 자들이 많으니 항상 주의해야 한다.
- 북한의 지원으로 건립된 앙코르와트 박물관이 2015년 12월 4일에 개관했다. 링크 최초 10년은 북한이 입장료 수입의 전부를 가져가고 나머지 10년은 캄보디아와 반반 나눠 갖고, 그 이후에는 캄보디아 정부에 무상 기증한다. 그러나 관광객들은 진짜 앙코르와트를 보러 왔지 앙코르와트 파노라마를 보러 온 게 아니고 위치도 좋지않아 현지인 직원들 월급 주기도 벅찬 상황인데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30% 할인까지 내걸었다. 현지인 입장료는 더 싸다. # 결국 대북제재 강화로 폐쇄되었다고 한다.#
앙코르 석공들이 만들다만 압사라의 모습. 훼손당한게 아니라 애초부터 미완성으로 남은 조각이다.
- 규모에 걸맞지 않는 정교한 조각들로 유명하지만 사실 뒤쪽에는 만들다 만 부분이 있다. 왕이 자주 시찰을 오는 정면 부분부터 공사를 진행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되는데 혹자는 '앙코르 와트를 사람의 손으로 만든 증거'라고 평하기도 한다.
- 앙코르 유적의 보수와 복원은 캄보디아와 세계 각국의 전문가들이 도맡아 수행하는 국제 사업이다.
- 한국문화재재단에서 앙코르톰과 프레아피투 사원의 보수를 맡아 진행하고 있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1차 복원정비 사업을 진행했고, 캄보디아 정부의 요청으로 2023년까지 추가 복원 사업을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기초조사를 통해 프레아피투 사원이 처음 조성된 시기를 기존에 알려진 13세기보다 이른 12세기 초반으로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
- 2024년, 앙코르 유적에서 달리기를 하는 챌린지가 유행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벽에 부딪히거나 하면 유적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 #
- 과거 프랑스가 식민지 지배를 하던 19세기 당시 앙코르 와트에 왔던 유럽인들은 "동양의 로마" 라고 평가했다.
- 처음 발견될당시, 조각들이 너무 정교하고 리얼한나머지 깜짝놀래서 시름 시름 앓았다는 탐험가나 고고학자들이 있다.
7. 매체에서의 등장
- 영화 툼 레이더(2001)에서 첫번째 빛의 삼각형 반쪽이 앙코르와트 안에 숨겨져 있다.
- 게임 툼 레이더 4에서 라라의 어린시절 플레이의 주요 무대이다.
- 영화 화양연화에서 남자주인공인 주모운이 비밀을 묻는 공간으로 나온다
- 머메이드 멜로디 피치피치핏치에서 코코를 포함한 노란색 꼬리의 머메이드들이 살고 있는 남태평양 나라가 이 유적을 모티브로 하였다. 퓨어편 12화에서 잠깐 나왔으며 1기에서는 파괴되었으나 2기에서는 복구에 성공한다.[32]
- 메이플스토리의 슬리피우드의 배경 모티브가 되었다.
- 서든어택의 맵 몽키가든의 모티브이다.
- 디아블로 2의 액트3 트라빈칼은 앙코르와트를 모델로 하고 있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의 불가사의 건물 중 하나이다.
- KOF 2002에서 캄보디아 배경 스테이지로 쓰였는데 여기서는 지붕 부분이 손실된 상태로 나온다.
- 철권 1에서 스테이지로 등장한다.
- 철권 2에 나온 쿠니미츠의 스테이지인 캄보디아 습지는 철권 1 앙코르와트 스테이지의 BGM을 유용한것이다.
- 메탈슬러그 스테이지 1의 초반부가 바로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유적이다.
- 다크 소울의 등장 지역인 폐허도시 이자리스가 여기를 모티브로 하였다.
- 시드 마이어의 문명에서는 문명 4, 문명 5, 문명 6에서 불가사의로 출연한다.
- 문명 4: 위대한 선지자 점수와 문화를 매 턴 제공하고 성직자 전문가가 매 턴 생산력을 추가로 생성하게 하며 이 불가사의가 건설된 도시의 주민 셋을 성직자 전문가로 만들 수 있게 한다. 평은 그다지 좋지 않은데, 생산력을 추가로 생산한다 해도 성직자가 눈이 돌아갈 정도로 강력해지는 것도 아니고 성직자 전문가를 많이 배치하게 되면 위대한 선지자 점수가 쌓이는데 성지 불가사의를 다 건설한 뒤의 선지자는 성능이 영 말이 아니기 때문.
- 문명 5: 약간의 문화와 위대한 기술자 점수를 매 턴 제공하고 도시가 영토를 확장하는 속도를 높여 주며 타일 구매 비용을 깎아 준다. 이번에도 평가는 좋지 않은데, 이 불가사의를 건설할 수 있게 되는 중세쯤 되면 웬만한 대도시들은 타일을 충분히 확보했거나 몇 군데만 구입하면 될 정도기 때문. 더군다나 문명 5는 과학과 생산력이 높으면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임인데, 앙코르와트를 지을 수 있게 하는 기술인 교육은 과학 산출을 크게 높여 주는 대학도 지을 수 있게 하므로 이걸 짓는 게 더 급하다.
- 문명 6: 약간의 신앙을 매 턴 제공하고 모든 도시의 인구를 1 증가시키고 인구 수용 공간인 주거도 1 증가시킨다. 이전 두 작품의 설욕을 씻어내듯 이번에는 짓는 보람이 있는 불가사의라는 평.
-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에서는 계몽 시대의 불가사의로 등장한다. 효과는 금속 채취 속도를 크게 높여 주고 금속 상업 한계치를 올려 주며 병영, 마구간, 항구에서 생산되는 유닛들의 가격을 깎아 주는 것.
- 고대왕자 공룡킹 TVA 1기 38화에서 스테고사우루스의 출현 장소로 등장한다.
- 대항해시대 온라인의 4성 종교학 발견물로 등장한다.
- 도미네이션즈에서는 화약 시대의 불가사의로 등장한다.
- 만화 앙코르와트에서 살아남기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 인피니트에서 환생의 장소이자 새로운 시작점이 되는 장소로 나오며 후반부에 환생한 여주인공이 봉인에서 영혼이 해방이 되어 환생한 파트너와 재회를 한다.
- 게게게의 키타로의 앙코르 와트의 망령이라는 존재가 등장. 애니판 2기에 등장했다가 이후 6기에서 다시 등장. 6기에서 오인이라는 이름의 일본에서 시암으로 넘어간 무사라는 설정이 추가되었다.
- 팡(게임)에서 4번째 스테이지 배경으로 등장한다.
- 만화 몬타나존스 에피소드 14화의 제목이"앙코르와트의 연꽃" 인데 앙코르와트에서 <황금 곡식> 이라는 보물을 찾는다는 이야기다.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경사가 급해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몸을 앞으로 숙이고 때로는 앞의 계단을 잡고 기어가는 듯한 모습으로 올라야 한다. 즉 신 앞에서 겸손하라는 의미로, 다른 힌두교 사원도 가파르다. 경제적인 이유로 계단 폭을 줄이고 간격을 넓힘으로써 석재를 절약하는 효과도 노렸다고 한다.[6] 앙코르와트가 완공되기 몇 년 전에 죽었다고 추정한다. 그래서 수리야바르만 2세가 죽은 이후에 만들어진 부조들에는 약간 성의없게 마감한 부분들도 존재한다.[7] 일본인 순례자들은 앙코르와트를 불경에서 석가모니가 오래 머울고 설법했다고 설명한 사찰 '기원정사'라고 생각했다. 이 곳에 살던 일본 순례자가 크메르 신년을 축하하는 의미로 남긴 비석도 남아 있다.[8] 따라서 앙리 무오가 앙코르와트를 발견했다는 말은 틀렸다. 캄보디아인들은 앙코르와트란 장대한 건축물이 어디 있는지는 잘 알았다. 앙리 무오는 단지 앙코르와트를 서양에 처음 알렸을 따름이다. 우리로 따지면 어느 백인 탐험가가 1800년대에 조선을 여행한 뒤 '내가 석굴암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격이다.[9] 거대한 규모는 확실히 경이롭지만 천장을 떠받치는 구조가 그리 정교한 편은 아니라 자체적으로도 조금씩 내려앉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도 있다. 예를 들자면 아치, 볼트, 돔과 같은 천장 구조가 미흡한 편인 것. 아치를 만들고 싶었지만 도달하지는 못했다는 의견도 있다.[10] 서쪽은 힌두교에서 비슈누를 상징하는 방향이다.[11] 힌두교 사원의 독특한 탑문 양식.[12] 힌두교와 불교의 여신들이자 천상의 무희. 물을 관장하며 굉장히 아름다운 존재들이라고 한다.[13] 고푸람의 크기가 코끼리가 통과해도 될 정도로 크다고 해서 '코끼리 문'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14] 어떤 학자들은 이 층들이 왕, 브라흐마, 달, 비슈누에게 봉헌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15] 저 계단으로 내려가는 공간에 물이 가득 차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16] 워낙 경사가 가파르고 안전사고의 위험이 커서 3층에는 한 번에 100명밖에 못 올라간다. 3층을 구경하는 데에는 딱히 시간제한이 없어서 만약 3층으로 올라가고 싶은데 사람이 꽉꽉 찼다면 누군가 내려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17] 참고로 크메르 제국 시기 앙코르와트의 3층은 오직 최고위 승려들과 국왕만 올라갈 수 있는 신성한 공간이었다. 평민들은 고작 해봐야 1층 회랑까지만 들렀다 가는 게 끝이었다.[18] 다만 이 곳에서 도굴꾼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황금 잎사귀 유물을 발굴하는 성과를 남겼다고 한다.[19] 다만 왕이 드나들던 서쪽 벽과 수리야바르만 2세가 죽기 전에 만들어진 부조들은 정말 정교하게 새겨져있는데, 수리야바르만 2세가 죽고 난 후 새겨진 부조들은 약간씩 대충 마감한 곳들도 보인다.[20] 이름이 생소해 보이지만 사실 힌두교의 창세신화다.[21] 다른 왕들은 모두 일산 8~9개 남짓만 썼다.[22] 이때까지만 해도 크메르, 곧 지금의 캄보디아가 동남아의 패왕국이었고 반대로 현 태국의 전신인 시암은 크메르의 속국 신세였다. 이 걸 그대로 새겨놓은 부조를 태국인들이 보기 싫어해서 일부러 훼손했다는 것.[23] 해당 인물은 뱀의 왕 바수키의 머리 부분을 잡고 우유 바다를 휘젓고 있는 악마와 왕 라바나다.[24] 이 외에도 자세히 찾아보면 재미있는 장면들이 상당히 많다. 심지어 야마의 법정으로 들어가기 전에 사람들이 쭉 줄을 서서 기다리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에서 어떤 아이가 어머니에게 안아달라고 조르는 장면까지 묘사해놓았다.[25] 인면상으로 유명한 바이욘사원과 코끼리 테라스, 문둥왕의 테라스.[26] 툼 레이더의 촬영지로 유명.[27] 보통 그랜드 투어 $15, 스몰투어 $13이다.[28] 보통 그랜드 투어 $18, 스몰투어 $15이나 툭툭 한대 가격이기 때문에 사람이 늘어나면 가격이 훨씬 싸진다.[29] 현지인 가이드의 경우 가이드 가격이 $50으로 통일되어있고 차량이나 툭툭 대절은 따로다. 차량 이용시 $85부터 시작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캄보디아 카페나 태사랑 등 여행 커뮤니티에서 투어 동행을 구하는 경우가 더러있으니 경비절감을 위한다면 컨택해보는것도 추천한다.[30] 한국으로 치면 일본 배우가 "석굴암, 금동대향로는 일본의 문화유산"이라고 주장한 격이다.[31] 캄보디아는 국민 다수가 상좌부 불교를 믿는다.[32] 참고로 루치아의 나라인 북태평양 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나라는 가쿠토의 침략에 의해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