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련 자료: KBS(#1, #2), MBC[1]
- YTN 탐사보도 : 5공화국의 강제수용소
1. 개요
1998년 충청남도 연기군 전동면[2]에 위치한 사회복지법인 천성원 산하의 부랑인 재활 시설이었던 양지마을에서 벌어진 인권침해 행위가 적발된 사건이다. 사실상 형제복지원의 축소판[3]이나 다를 바 없는 사건.2. 양지마을이란?
양지마을은 충청남도 연기군 전동면[4]에 위치한 사회복지법인 천성원[5] 산하의 부랑인(=노숙인) 재활 시설이다.[6]천성원은 1958년에 대전 삼성동에서 충남농아학교[7]를 설립한 이후 대전에서 자강원[8], 대전복지의원[9], 평강의 집(원장은 노재중의 셋째 아들), 해 뜨는 집 등 대전/충남 지역의 여러 사회복지 관련 시설과 병원을 보유하고 있다. 양지마을은 이 천성원 소속의 부랑인 재활시설로, 한 울타리 안에 양지 요양원과 송현원(정신질환자 수용시설)이 같이 있다.
다만 이곳이 일반적인 사회복귀시설이라면 유명하지도 않은 곳인데 이렇게 문서로 등재될 리가 없다. 양지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무시무시한 곳이었는데 1998년 7월 16일 진상조사단에 의해 실체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문단 참조.
3. 탈출 원생의 폭로
이름만 들으면 음지에 있는 노숙인을 건강한 양지의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고 아픔을 회복시켜 주는 양지바른 곳일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충남(및 대전) 인근 지역의 기차역에서 노숙하는 사람 혹은 천성원(또는 양지마을)과 결탁한 파출소 직원에게 밉보인 사람을 납치하여 강제로 수용했다.
- 양지마을과 양지 요양원 그리고 송현원을 둘러싸고 있는 외벽에는 교도소의 것과 유사한 콘크리트 담이 둘러져 있고 정문에는 두꺼운 철문이 있는데 대부분은 닫혀 있다. 그리고 그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역시 두 번의 철문과 담을 통과해야 양지마을이 나온다. 원생들의 생활실의 창은 두꺼운 쇠창살로 가로막혀 있으며 생활실의 문은 외부에서 잠그게 되어 있다.[10]
- 빽빽하게 짜인 하루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는 군대식 생활, 일상은 일어나서 밥 먹고 시설 내 보호작업장에서 하루 종일 작업을 하는 것이 전부인데 모든 노동은 무임금이며 구내매점에서 쓸 수 있는 카드를 받는 것이 전부였다.[11][12]
- 걸을 힘만 있으면 누구나 작업에 참여해야 하며 이 작업은 공식적인 취침 시간인 9시 이전에 끝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철야작업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 공식적인 취침시간은 9시이며, 9시가 되면 모든 불을 끄고 생활실 밖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 가족의 면회, 전화통화와 서신교환은 절대로 불허되었다. 또 가족이 직접 시설로 찾아와도 온갖 이유를 대며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 퇴소는 허락되지 않으며 퇴소를 하고 싶다는 의중만 드러내거나 탈출을 시도하다 발각될 경우 폭행을 당했다.
- 시설 내 시스템이나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불합리한 대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건의를 할 경우 폭행과 더불어 신경안정제를 의사 처방 없이 투여하고 감금시켰다. 시설 측 직원이 보기에 질이 너무 안 좋다고 판단될 경우 이사장인 노재중의 허가 하에 송현원으로 보냈다.
- 젊은 여성 원생들의 경우 성적 착취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 노 이사장이나 시설 측 직원들이 보기에 충성도가 있어 보이는 원생에게는 특별히 간부 직책을 주고[13] 지정해 주는 여성 원생 한 명과 독방을 배정하여 같이 살 수 있도록 허락했다. 다만 이때 임신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여성 원생에게는 루프 장치를 삽입하여 임신을 방지했다.
- 하지만 간부 원생이 시설 측 말을 안들을 경우 다시 간부 직책을 없애고 여성 원생과도 분리시켰다. 이때 여성 원생에게 삽입했던 피임장치는 다시 뺐다.
- 구타를 심하게 당한다든지, 가지고 있던 지병이 악화된다든지, 자살을 한다든지 하여 사망하는 원생이 생길 경우 그 시체는 인근의 개미고개라는 곳에 암매장했는데 이때 원생이 동원되었다.
- 원생을 동원하여 대전역, 온양온천역 등 충남 인근의 기차역을 돌아다니다 잡아가도 될 만하게 보이는 사람을 탑차에 강제로 태워서 입소시켰다.[14]
- 입소 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원장 및 관계자 면담과 입소심사위원회 등은 없었고 입소 절차도 간단한 인적사항을 적고 묻는 게 끝이었다.
위 내용은 당시 양지마을 원생이었던 박모씨가 생활실의 쇠창살을 뚫고 천신만고 끝에 인권운동 사랑방이라는 곳에 찾아가 증언한 것인데# 처음 사건에 대해 들은 박래군 인권운동가는 믿지 못하였으나 증언이 너무 구체적이었고 사실 확인을 위해 찾아간 지역 언론사의 기자도 대부분 맞는 이야기 같다는 확인을 해 주면서 결국 아래의 조사를 착수하기로 결정했다.
4. 햇볕작전
탈출 원생 박 모 씨의 증언을 들은 박래군[15] 운동가가 자신이 속한 인권운동 사랑방의 관계자들과 인권운동을 하다 알게 된 천주교인권위원회 활동가, 새정치국민회의의 이성재 의원, 정신과 의사 김병후 등과 이른바 '햇볕 작전'이라는 것을 추진하기로 했다. 한마디로 국회의원을 끼고 시설에 급습하여 진상을 조사하겠다는 것이었다. 또 혹시 모를 상황에서 자신들을 보호할 목적과 양지마을의 실상을 외부세계에 알릴 목적으로 방송사와 신문사의 취재기자들에게도 협조를 구하여 양지마을로 가게 되었다. 최초 보도는 1998년 7월 16일 KBS가 했다.처음에는 언론사 기자들과 방송 카메라, 국회의원이 포함된 민간 조사단에 순순히 문을 열어 주었던 시설 측에서는 시설 측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노 이사장이 도착하자 돌변하여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성재 의원이 경찰을 불러서 결국 조사는 계속되었다.
5. 추가로 밝혀진 것
탈출 원생 박 모 씨의 폭로 외에 조사단 방문 이후에 퇴소한 60여 명의 원생들의 제보로 찾아낸 문서를 통해 추가로 드러난 것은 다음과 같다.
- 납치 과정에서 신원 확인 과정은 없었다.
- 시설에 입소할 경우 종교인, 사회복지전문가, 의사, 교육자 및 지자체 관계공무원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가 열려야 하지만 양지마을의 경우 그런 절차가 없었다.
- 직원 중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없었고 간호 인력도 말을 안 듣는 원생에게 신경안정제를 직접 투입했던 오모 간호사 외에는 모두 간호조무사였다. (당시 기사에는 '간호보조인력'이라고 나옴)
- 영양사, 조리사 등은 없었으며 그 일은 모두 원생이 도맡아 했다.
- 양지마을 시설 건물을 증축하는 데 원생들을 동원하였지만 서류상으론 외부 인력을 동원한 것처럼 하여 비용을 착복했다.
- 국가에서 내려오는 보조금을 원생들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착복했다.
- 원생 중 일부를 서류상으로만 퇴소시키고 실제로는 계속 시설의 노동력으로 사용했다.
- 보호 작업 시에 작업 확인서에 서명하도록 하여 억지로 시킨 작업이 아님을 증명하는 데 사용했다.[16]
- 천성원의 타 시설(주로 자강원)에서 쓸만하다고 판단되는 이용자를 본인 동의 없이 양지마을로 전원시켰다.
- 이러한 문제를 감독해야 할 연기군청에서는 현장 조사나 방문 한 번 하지 않았으며 시설 측의 말을 100% 믿고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6. 사회적 파장과 정부당국의 미온적 대처
이 사건이 언론을 통해 앞다투어 보도되자 사회는 뒤집어졌고 당시 보건복지부는 긴급 실태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복지부는 충청남도로, 충청남도는 연기군으로, 연기군은 다시 충청남도로, 충청남도는 다시 연기군으로 서로의 책임을 떠넘기는 행태를 보이며 책임을 떠넘기다가 결국 검찰에 고발하였는데 검찰에서는 강제노역, 납치, 암매장, 성폭행 등에 대해서는 기소조차 하지 않았고 재판을 거듭하다 결국 징역 10개월이라는 가벼운 처벌만 받고 끝났다. 심지어 탈옥수 신창원 수배 등 온갖 이슈로 이 사건은 묻혔다.7. 사건 이후
7.1. 양지마을
양지마을은 대한불교조계종 산하의 모 절에서 3년 동안 위탁운영하다 다시 천성원으로 넘어갔고 이후 이름을 금이성마을로 바꾸고 양지마을과 한 울타리를 쓰던 양지 요양원(이후 노아의 집으로 변경), 송현원(이후 방주의 집으로 변경) 등과 함께 사회복지법인 이화로 독립하였다. 또 양지마을과 송현원, 양지 요양원을 둘러싸고 있던 담들도 철거되었고 정문의 쇠문도 사라졌다.[17] 하지만 양지마을 사건 당시의 직원들이 대부분 그대로 근무하고 있고 사회복지법인 이화의 이사장도 노재중의 둘째 부인이라는 점, 그리고 사회복지법인 이화의 주요 이사들이 노재중 관련자라는 논란에서 보듯이 겉만 바뀌었지 속은 그대로라는 비판도 있다.또 사회복지법인 이화에서 발행하는 소식지에 나온 금이성 마을 후원자 명단을 보면 천성원이 단체 후원자 리스트에 올라가 있다. 보통 재단 산하의 기관에 재단에서 후원하거나 보조금을 전달하는 경우는 흔하지만 사회복지 공동모금회나 삼성 복지재단 같이 공익적 목적의 재단인 경우가 아니면 특정 사회복지재단이 다른 사회복지재단 산하의 기관에 후원을 하는 경우는 아주 흔하지는 않다. 이것이 법적으로는 재단이 분리되어 있지만 천성원 측과 아직도 금전적인 관계는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할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7.2. 노재중과 사회복지법인 천성원
이후 노재중은 구속되었으나 짧은 형기를 마치고 다시 사회로 나와 천성원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무엇보다 2024년 기준으로 사회복지법인 천성원의 이사장이 노재중의 첫째부인인 윤○순이다. 또 최근까지도 천성원 산하의 대전 한일병원에서 회장 직함을 가지고 활동하는 등 잘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훈시하시는 노재중 회장님 또 천성원 산하의 평강의집 원장도 노재중의 아들이 맡고 있다. 참고로 해당 기사에서 노재중의 아들이“일부 복지법인의 안 좋은 사례가 영화화 되면서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왜곡된 시선도 간혹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 재산을 털어 천양원을 설립해 지금껏 사랑과 봉사로 지켜온 저의 부모님을 존경합니다.”
라며 자기 부모의 잘못이 무엇인지 모르는 듯한 발언을 하였다.또 천성원 자체도 여전히 건재하며 산하기관을 늘려 가고 있으며 대전광역시와 산하 자치구의 수탁기관으로도 선정되는 등 재단의 가세는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천성원은 2022년에도 세종특별자치시 종촌종합복지센터 종합사회복지관 신규수탁 사업가로 선정되었다. #
피해자들은 변변한 보상도 못 받고 다시 거리로 가거나 자리를 잡아도 일용직이나 경비원을 하는 실정과 비교하면 너무나 극명한 차이가 난다.# 심지어 양지마을 사건은 형지복지원 사건과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인지도가 낮아 국가 차원에서의 진상규명 시도도 없고[18] 피해자들이 제대로 조명받지도 못하니 더욱 암울하다고 할 수 있다.[19]
7.3. 한국 사회복지에 끼친 영향
7.4. 관련 기사
# # # # # # #8. 관련 사건
-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 장항 수심원 사건
- 분류:장애인 학대 분류의 수용시설 관련 문서들
[1] 참고로 저 정문은 3개 시설(양지마을, 양지 요양원, 송현원)의 정문이 아니라 메인 정문을 통해 들어가면 나오는 두 번째 정문을 거친 후의 3번째, 양지마을 고유의 정문이다. 저 정도 되는 정문을 3개나 통과한 후에야 외부로 나올 수 있었다.[2] 현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3] 사망자 규모만 비교적 적을 뿐이지 일어난 참상과 무고한 사람들이 납치 수용되었다는 것, 주범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후 말년까지도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것은 형제복지원과 판박이이다. 심지어 군사정권 시절 일이던 형제복지원과 달리 양지마을 사건은 민주화 이후 10년 넘게, 심지어 김대중 정부 출범 극초기까지도 악행이 지속되어왔으니 어느 면에서는 형제복지원 이상으로 악질이라고 할 수 있다.[4] 현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5] 당시 이사장 노재중(盧載重, 1942~), 현재는 노재중의 첫째 부인인 윤○순이 이사장[6] 사건 이후에는 양지마을 인근의 금이성에서 이름을 따온 금이성 마을로 이름을 바꾸었고 양지마을과 한 울타리 안에 있던 양지요양원(현재는 노아의 집으로 명칭 변경), 송현원(현재는 방주의 집으로 명칭 변경, 참고로 송현원도 인근의 지명이다.)과 함께 사회복지법인 이화로 분리하였다. 하지만 언론 기사에 따르면 이화의 이사장이 노재중의 첩이라고 한다. 후술할 내용 참조.[7] 현 대전원명학교[8] 최초의 명칭은 성지원이었고 자강원에서 운주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재는 자강의 집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실 이 사건이 성지원 사건 시즌 2인 셈인 게 이미 군사정권 말기에 원생 20명의 집단 탈출로 성지원의 실체가 한번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이때(정확히는 1987년 2월 10일)도 하술할 때처럼 국회의원(당시 야당 신한민주당)까지 동원해서 진상을 캐려고 했으나 정권과 결탁한(?) 시설 측의 방해를 받았다고 한다. 말이 방해지 폭력까지 동원했다는 듯.(KBS(1:40부터), MBC) 얼마나 개판이었는지 부랑인(물론 말만 부랑인이지 절대다수가 억울하게 검거, 납치된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500명을 수용했는데 1984년부터 1987년까지 3년간 121명이 사망했을 정도.(사망자 비율로 따지자면 형제복지원도 거뜬히 능가한다!) 심지어 사망자들은 단 4구의 사체만 연고자에게 인계되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충청남도 대덕면 계곡리 공설묘지에 가매장된 후 장례비(1인당 11만 원)조차 강탈당했다. # 당시 이사장도 노재중이었다.[9] 현 대전한일병원, 신탄진한일병원[10] 여기서 중요한 건 이들은 정신질환자가 아닌 노숙인이라는 것이다. 즉 급성기 정신질환처럼 어쩔 수 없이 쇠창살과 외부에서 잠그는 문을 만들어야 했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11] 이후 조사단이 원생의 통장을 확인해 본 결과 1년에 8천 원~만원이 고된 노동에 대한 대가의 전부였다고 한다.[12] 반면 노재중은 공식 월급 150만 원이었는데도 70억 원에 이르는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재산 축적에는 부동산 투기, 국고보조금 횡령도 동원되었다. #[13] 이 사건의 전신인 성지원 사건에서 국회의원과 취재기자를 폭행하면서 방해했다는 일부 원생들 역시 이러한 카포 격 원생들로 추정됨.[14] 증언에 따르면 여러 이유로 지방에 왔다가 수중에 돈이 떨어져 하루 이틀 부득이 노숙을 한 경우도 있었지만 기차표 시간을 바꾸러 왔다가 납치를 당하거나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다 도둑질을 당한 것을 경찰에 항의하다 끌려간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 설령 100% 양보해서 그들이 행색이 남루한 노숙자(실제 노숙자든, 단순히 자기 관리가 안되어서 노숙자처럼 보이든 간에)라고 하더라도 납치는 불법이다.[15] 민주화운동가 박래전 열사의 형이다.[16] 다만 서명을 하지 않을 경우 폭행을 당하거나 신경안정제를 투여받을 두려움이 있었기에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조사단의 의견이 있다.[17] 다만 로드뷰를 보면 얇은 철제 문은 있다. 하지만 과거처럼 굳게 닫혀 있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18] 그나마 2002년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오긴 했다. #[19] 다만 동일 재단에서 터진 성지원 사건은 2024년 가서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진실규명이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