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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민주당 | |
<colcolor=#e6573b> 영문명 | <colbgcolor=#fff,#1F2023>New Korea Democratic Party (NKDP) |
등록 약칭 | 신민당, 신한당 |
등록일 | 1985년 1월 18일 |
해산일 | 1988년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해산) |
선행조직 | [[신민당(1967년)|]] |
통합한 정당 | 민중민주당 (1987년 4월 흡수합당)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06 (인의동) |
총재 | 신도환 |
국회의원 | 4석[7] / 299석 (1.33%) |
당색 | 다홍색 (#E6573B) |
당기 | |
1988.4.26. 기준 |
[clearfix]
1. 개요
왼쪽부터 이철승, 이기택, 이민우, 김수한, 노승환. |
1985년부터 1988년까지 존속했던 대한민국의 정당. 고작 3년밖에 안 되는 짧은 역사를 보냈지만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에서 결코 작지 않은 족적을 남긴 정당이었다.
당시 언론에서 김영삼에게 "신민당은 보수인가 혁신(진보)인가?"라고 질의한 적이 있는데, YS는 "보수 정당이지만 아직 국내에 진보 정당이 없으니 진보 세력까지 수용해줘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한 바 있었다.#[8] 쉽게 말해 미얀마의 민주주의민족동맹이나 태국의 태국인당처럼 빅텐트 성격이 있었다.[9]
2. 상징
당기는 위에서부터 청-백-적 순서의 가로로 비스듬한 삼색기였다. 사진 참조 당시 뉴스에 나온 당기 사진 아래 대한뉴스 전당대회 영상에서도 곳곳에 붙어있는 당기를 볼 수 있다.<rowcolor=#fff> 신한민주당의 당기 | 신민당의 당기 |
당의 상징색은 1985년의 12대 총선에서는 당기 색상 외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 포스터가 흑백 인쇄였기 때문이다. 1988년 13대 총선 서울지역 후보자들의 포스터를 보면 대체로 다홍색 계열로 통일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10] 당시 신한민주당은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뒤라, 자금이 딸렸는지 서울 외의 후보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흑백인쇄 되어 있다.
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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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창당
1985년 제5공화국의 전두환 정권에 의해 내려진 정치 규제가 풀리자, 기존의 민주화추진협의회 쪽 인사와 정치규제가 풀린 옛 신민당 인사들이 합쳐서 새롭게 만든 야당이다. 물론 민주한국당과 한국국민당이라는 야당이 존재하긴 했지만, 한국국민당은 민주공화당 출신 인사들이 주류였기 때문에 야당으로 보기도 애매했고 그나마 기존 야당 인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던 민주한국당조차도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만들어진 관제야당이라 사실상 정통 야당이 없던, 과장 한 마디도 안 보태고 북한, 중국, 투르크메니스탄마냥 사실상 일당제이던 시절이었다. 참고로 민주한국당 부총재였던 신상우가 훗날 회고한 바에 의하면, 안기부에서 넘겨준 명단대로 공천했을 정도였다고.이러한 상황에서 선명 야당을 기치로 들고 나온 게 바로 신한민주당이었고, 정강 정책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지방자치제 조기 실시, 군대의 정치적 엄정중립 같은 선명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것이 6.29 선언 이후 대부분 이루어졌으며 1990년대 들어서 완벽히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말 그대로 민주화 투쟁의 전면에 있었던 정당. 그래서 신한민주당이 그 짧은 존속기간에 비해 정치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한 것이다.
공식적인 당의 총재는 옛 신민당 의원을 지낸 이민우였지만 바지사장이었고 실질적인 지도부는 명목상 당 고문인 김영삼과 김대중이었다. 이 두 사람과 둘을 따르는 상도동계와 동교동계의 중진들은 여전히 정치 규제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대신 이민우를 내세운 것이었다. 더욱이 현실 정치에 남아 있던 옛 야당 인사들 중에 상당수가 민주한국당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 일단 확보할 수 있는 최대의 인원을 가지고 선거에 도전하기로 한 것.
당명을 정하는 데도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애당초 원 당명은 10월 유신정권 당시 제1야당으로 명성을 떨쳤던 신민당이었으나 전두환 정권하의 선관위가 이를 거부했고 결국 고육지책으로 약칭을 신민당으로 할 수 있는 신한민주당이라고 정한 것.[11] 물론 선관위쪽에서는 약칭 신민당을 쓰지 말라는 식의 언론 지침을 보냈지만, 여당부터가 민주정의당이라는 공식 명칭보다는 민정당이라는 약칭을 즐겨쓰는 상황이라 결국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흐지부지 넘어갔다.[12][13] 그리하여 1985년 1월 18일 창당했는데, 문제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날짜가 불과 한 달도 채 안 남은 2월 12일로 정해졌다는 점. 원래 3~4월을 전후한 시기에 국회의원 선거를 해온 관행을 생각하면 야당 돌풍을 최대한 막으려는 전두환 정권의 꼼수임이 명확했다.[14][15]
3.2. 야당 돌풍
사실 당시에는 선거구당 2인을 뽑는 중선거구제[16] 방식으로 국회의원을 선출했기 때문에 민정당은 가장 취약하다는 호남 지역에서도 2위 당선을 통해 의석을 상당수 확보할 수 있었으며[17], 여기다가 지역구 제1당에게 전국구 의석의 2/3를 몰아주는 선거법까지 있었기에 여당의 과반수는 기정사실이었다.하지만 단순히 과반수를 확보한다고 해서 전두환 정권이 안심할 수는 없었다. 국회에서 여당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면 정권이 국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건 야당이 허수아비마냥 가만히 있을 때나 그런 건데[18] 선명 야당을 주창하는 신한민주당이 제1야당에 오르게 될 경우 정부와 여당을 사사건건 걸고 넘어질 게 뻔했기 때문. 그렇다고 제1 야당을 섣부르게 건드렸다가는 자칫 더 큰 역풍이 불어서 정국 주도권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던데다, 무엇보다도 정권 임기 7년의 정중앙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는 상황이었으니 정부와 여당 입장에서는 신경을 바짝 쓸 수밖에 없었기에 무소불위의 철권 통치를 휘두르는 전두환 정권이 고작(?) 총선 시기를 바꾸는 자잘한 꼼수나 부렸던 것.[19]
다만 총선 직전까지도 신한민주당의 전망은 좋지 않았는데, 노신영의 국가안전기획부의 판세 분석 결과 최대한 많이 얻어봐야 20~30석 정도에 그치고 특히 종로구·중구 선거구(중대선거구제였다)에 출마한 이민우 총재는 3위를 기록해 낙선할 것으로 예측되었다.[20] 이민우 총재가 5선으로 야권의 원로 정치인이긴 했지만 1번은 전국구였고 나머지 4선 역시 충북 청주/청원에서만 지낸지라 서울에 출마할 만한 전국적 인지도도 없고 그렇다고 종로/중구에 지역적 기반도 없었기 때문에 김영삼의 출마 권유에 망설였을 정도. 더군다나 선거 기간은 한 달이 채 안 되는 상황이었기에 더 절망적이었다.[21]
그러나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를 마치고 뚜껑을 열어보니 신한민주당은 엄청난 돌풍을 일으켰다. 지역구 50석에 전국구 17석을 확보하면서 일약 제1야당으로 급부상한 것. 특히 낙선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이민우 총재는 2위로 당선되었으며 그 외 서울특별시, 부산직할시, 대구직할시[22], 인천직할시 등의 대도시 지역에서 민정당을 제치고 1당이 되는 압승을 거뒀다. 한 선거구당 2명을 뽑는데 야당 의석수가 많았다는 건 곧 여당이 3등 이하 득표로 떨어진 선거구가 있었다는건데, 실제로 서울 1개, 부산 3개, 대구 1개나 되었다. 전형적인 여촌야도 현상. 이는 신한민주당조차 예상을 뛰어넘는 의석수에 어리둥절할 정도로 엄청난 결과였다.
실제로 신한민주당은 서울(14개), 부산(6개), 인천(2개)의 모든 선거구에서 당선자를 냈으며, 여당의 아성인 대구에서조차 3개 선거구 중에 2석을 확보했다. 특히 부산의 경우 나머지 6석 중에 민주한국당 2석, 한국국민당 1석을 차지한 결과 민주정의당 달랑 3석밖에 얻지 못했다. 이는 부산 중구-동구-영도구 지역구에서 민주한국당 김정길 후보가 사용한 "아빠는 신한민주당, 엄마는 민주한국당" 같은 유세방식으로 두 야당이 은근슬쩍 공조하면서 여당에 빅엿을 선사한 결과였다.
특히 서울에서의 승리는 총선 4일 전인 2월 8일 김대중이 전격 귀국하면서 호남 출신 표가 신한민주당에 대거 몰린 것이 결정타였다. 김대중의 귀국 당일 김포공항 일대에 엄청난 환영 인파가 몰려와서 도로가 마비되었을 정도.[23]
선거 결과는 그야말로 메가톤급 후폭풍을 몰고 왔다. 지역구 득표율을 종합해보면 신한민주당 29.3%, 민주한국당 19.7%로 두 야당만 합쳐도 무려 49%로 민주정의당의 35.2%를 한참 앞서는 수치였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 하면, 만약 이때 비례대표를 지역구 득표율에 따라 고르게 배분했을 경우 신한민주당+민주한국당 120석 VS 민주정의당 119석으로 사상 초유의 여소야대 정국이 탄생할 수 있었다. 실제로 총선 결과를 보고받은 전두환이 아무 말없이 탁자를 탁탁치며 허탈해하다가 과반 의석은 차지했다는 노신영 안기부장의 보고에 "전국구가 있으니까 그 정도나마 얻은 거잖소!"라며 역정을 냈고(...), 예측을 잘못했다는 이유로 노신영은 그날로 경질되었다. 하지만 아예 짤린 게 아니라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총선에서 헛다리 짚은 것만 빼면 워낙 일을 잘 해왔기에 전두환은 노신영을 경질시키고 다른 자리를 주려 했는데, 다시 외무부 장관으로 보내자니 부총리급인 안기부장을 했던 사람을 도로 장관급으로 보내는 꼴이라 고민고민하다가 국무총리로 발탁한 것. 본래 노신영은 정통 외교관 출신이라서 외교 본업은 물론이고 안기부장으로 활동할 때도 전공을 살려서 대외 정보 수집 및 공작 분야에서는 유능한 모습을 보여준 반면, 이런 국내 정치 공작 분야에서는 상대적으로 미흡한 모습을 보여줬다. 전두환의 고민도 이 때문에 벌어진 것.
또한 국민들의 민심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 김영삼과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규제 인사들을 대거 해금시키는 등의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기에 이른다. 단, 김대중의 경우 내란 음모 건에 대해 사면복권을 해주지 않았다. 한마디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는 있어도 정치 활동을 여전히 제약한 것.
게다가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공천으로 당선된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하면서 당세는 순식간에 103석으로 불어났다. 이는 당시 야당 사상 최대 의석이었다.[24] (비율상으로는 제8대 국회의원 선거가 최대.) 다만 한 가지 해프닝이 있었는데, 민주한국당의 새 총재로 내정된 조윤형 전 의원이 신한민주당과의 합당을 결의했으나 신한민주당 쪽에서 이를 거부하면서[25] 이에 조윤형 총재를 비롯한 상당수 의원들은 자기 당을 탈당한 뒤에 개별로 신한민주당에 입당해야만 했다.
이 승리를 바탕으로 같은 해 8월 1일,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임시 전당대회를 개최한다. 임시직으로 추대되었던 이민우 총재가 김재광 후보를 이기고 총재로 재선출되었다. 임기는 2년. 땡전뉴스 일색이었던 대한뉴스도 보도해 주었다.
3.3. 대여 투쟁
그리고 모두의 예상대로 전두환 정권 말기에 이르러 신한민주당과 민주정의당은 국회에서 정면으로 충돌한다. 특히 신한민주당 유성환[26] 의원이 1986년 10월 "국시는 반공보다 통일이어야 한다."라고 발언한 것을 문제삼은 민주정의당의 주도로 체포 동의안이 그것도 한밤중에 날치기로 가결되면서[27] 다음날 새벽에 구속되는 사태까지 발생하는 등[28] 정권 차원의 탄압이 매우 거셌지만, 신한민주당 역시 직선제 개헌을 정면으로 주장하면서 강경하게 맞섰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게 바로 5.3 인천항쟁과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다만 이 와중에 같이 직선제 개헌 투쟁을 하던 재야 운동권과는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는데, 신한민주당쪽에서는 운동권이 너무 과격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고 반대로 운동권쪽에서는 신한민주당이 선명성이 결여된채 이리저리 간 본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3.4. 몰락
그런데 이 와중에 1986년 12월 이민우 구상이 발표되면서 신한민주당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당 총재이지만 바지사장이던[29] 이민우가 무슨 생각인지 내각제 개헌도 수용할 수 있다고 폭탄선언을 한 것. 당연히 전두환 정권은 이를 환영했고, 신한민주당의 실질적인 대표이던 YS/DJ 및 그 계파는 격하게 반발했다. 그리고 계속된 갈등 속에 1987년 4월 YS/DJ 계파 의원 74명[30]이 탈당해 버리며 새롭게 당을 꾸렸다. 그게 바로 통일민주당이다. 그러면서 순식간에 26석으로 쪼그라들은 신한민주당은 몰락했다. 가장 적을 때는 12명이었지만 민중민주당과 합당하여 다시 28석까지 긁어모았다.물론 이철승의 주장처럼 1988년 선거 결과를 생각하면 내각제 개헌과 함께 동시에 과반을 확실하게 확보했을 신민당이 여당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견해가 있지만... 독재 정부가 호구인가. 심지어 선거 승리 후에도 국가원로자문회의[31]에는 50대의 정정한 전두환이 막후 대통령으로 버티고 있고, 선거 승리를 위해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1988년 총선의 소선거구제와는 달리 자신들에게 여전히 유리한 중선거구제를 했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는 군부의 재쿠데타도 고려해야한다.
무엇보다, 직선제 개헌은 국민의 손으로 이룩한 것이고, 내각제 개헌은 정당간의 협상의 산물일 뿐이다. 차원 자체가 다르다. 전두환-노태우의 감옥행이 "정치보복"이라는 비판을 최소화한 것도 노태우가 한 번, 김영삼이 또 한 번 여당의 이름으로 전직 대통령을 처벌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김대중이 두 대통령을 석방한 것도 정권교체에 따른 맥락이다. 하나회 일소나 일해연구소 폐지 등도 대통령제였기에 가능한 이야기.[32][33][34]
6월 민주 항쟁 이후에 치러진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때까지 간판을 유지했으나, 이철승 등 소속 후보들이 전원 낙선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35]
4. 역대 당직자
4.1.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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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원내총무
원내총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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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역대 선거결과
-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 67/276 29.3%
-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 0/299 0.2%
6. 여담
신한민주당의 (민한당 출신) 의원내각제주의자들은 1985년 8월 말 '신보수회'라는 서클을 만든 다음 이듬해인 1986년 8월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민중민주당(총재 유한열)을 창당하였다. 선관위에 약칭이 등록되어 있지 않아 1987년 4월 창당한 통일민주당에 밀렸고, 한 달 뒤인 5월 다시 신한민주당 잔당과 합당하였다. 한편 총재였던 유한열 의원(당시 신민당 부총재)은 다시 11월 통일민주당에 합류했다(...).신한민주당이 창당할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창당을 막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쓰긴 했지만 결국 창당 자체를 방해하진 못하고 위에서 나왔듯이 12대 총선의 날짜를 앞당기거나 '신민당'이란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하는 정도의 치졸한 행동을 보였다.
여기엔 당시 안기부의 수장인 노신영에게도 원인이 있다는 해석이 있다. 본래 노신영은 정통 외교 관료 출신으로 국내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국가안전기획부의 대외 첩보 및 해외 공작 등의 분야에서는 본인의 전공을 살려서 제법 좋은 성과를 거뒀지만 정작 이런 국내 정치 공작에는 문외한 수준이었던 것. 그래서 안기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게 이 해석이다.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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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보수회[2] 신보수회[3] 해산 후 재합류[4] 상도동계, 동교동계 등.[5] 김봉호 등.[6] 예춘호 등.[7] 지역구 3석, 전국구 1석. 자당 출신 무소속은 제외.[8] 여담으로 YS는 이후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시절에도 진보 인사들을 적극 영입할 정도로 진보 세력에 우호적인 편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진보란 민중당 등 사회주의 운동권 출신이었다가 냉전 체제 붕괴 이후 보수로 전향한 세력과 민주당계 자유주의 세력을 포괄한다.[9] 사실 이는 20세기 민주당계 정당의 특징이기도 했다. 주류는 (특히 YS/DJ 양김이 이끈 시대부터) 개혁적 보수주의를 내세웠지만 민주화의 열망으로 여러 성향의 인사들이 섞여있었다는 점에서 빅텐트 성격이 있었다.[10] 황성, 박영식, 이철승, 이수춘, 유갑종[11] 이러한 방식은 훗날 평화민주당이 신민주연합당으로 당명을 바꿨을 때에도 그대로 이어진다.[12] 관제 야당이었던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조차도 민한당, 국민당이라는 약칭으로 불리고 있었던 상황에서 약칭으로 신민당이 될 수 있는 신한민주당까지도 거부할 경우 형평성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했다.[13] 참고로 신민당은 1967년 통합된 신한당과 민중당의 앞글자에서 따왔다.[14] 지금은 총선, 대선, 지방선거, 재보궐 선거 날짜가 모두 법에 정해져 있다. 예를 들어 대선은 "대통령의 임기 만료일 전 70일부터 첫 번째로 돌아오는 수요일" 이런 식으로. 하지만 독재시절에는 법에 명확한 규정이 없었고, 그냥 정권이 임의적으로 자기들 유리한 날짜에 했다.[15] 또한 선거 8일 후인 2월 20일이 음력 설날인 구정이었는데,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휴일이 아니었다가 이 해부터 민속의 날이라는 하루짜리 공휴일로 지정되었다.[16] 중선거구제는 1개 선거구당 2~4명을 뽑는 방식이다. 즉 1위를 하지 않아도 당선될 수 있다. 참고로 소선거구제는 1선거구당 1인을 대선거구제는 1선거구당 5인 이상을 선출하는 방식을 뜻하며 보통 중선거구와 대선거구를 묶어 중대선거구제로 칭한다.[17] 사실 이때는 아직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이 밝혀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광주를 제외하면 사실상 호남 지역 전체가 여당 텃밭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12대 총선 당시 호남 지역 개표 결과를 보면 대도시인 전남 광주와 전북 전주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민주정의당이 1위를 차지했다. 전북 지역이야 묘하게 전남 지역과 정서 차이가 예나 지금이나 있으니 그렇다 쳐도 전남 지역에서는 광주에서도 그나마 27~28%로 저조했을 뿐이지, 그 외 지역에서는 30~40%대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다. 무엇보다도 김대중의 고향인 신안군이 속한 제3선거구(목포시·무안군·신안군)에서 민정당 최영철 후보가 전체 37.24%에 신안군에서 49.99%(!)를 얻었고, 제9선거구(장흥군·강진군·영암군·완도군)에서는 민정당 김식 후보가 전체 49.42%에 완도군에서는 60.1%(!)를 얻으며 당선되었다. 즉, 이 때까지만 해도 호남 지역조차 여촌야도가 극심했던 것.[18] 실제로 관제 야당인 민주한국당과 한국국민당이 있었기에 국회에서 별다른 잡음이 없었던 것.[19] 물론 마냥 꼼수만 부린 건 아니었고 기존의 관제 야당 쪽 인사들이 신한민주당에 입당하는 걸 막기 위한 공작을 펼쳤다. 대표적으로 민주한국당의 신상우 사무총장이 있었는데, 방준필 안기부 서울분실장이 불러내서 "우리는 이 세상 누구든 만신창이로 만들 수 있다. 의원님의 사돈에 팔촌까지 죄는 만들면 된다."는 섬뜩한 말로 협박하는 바람에 결국 민주한국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 (...)[20] 1위는 민주정의당 이종찬, 2위는 민주한국당 정대철로 예측.[21] 다른 지역은 그렇다쳐도 명색이 총재라는 이민우가 낙선한다는 것은 신한민주당 입장에서 가장 큰 타격이었다. 이 때문에 이민우가 끝까지 출마를 주저했던 것.[22] 다만 대구는 민한당이 접전 끝에 민정당을 제치고 승리한 점을 감안해야 한다.[23] 이에 경찰 병력과 안기부 요원들이 김포공항을 철저하게 봉쇄하여 시민들과 차단시키고 곧장 동교동 자택으로 데려갔다. 그런데 김대중이 혼자 온게 아니라 미국의 여러 저명 인사들이 호위하며 따라왔고 당연히 김대중을 모셔가는 과정이 미국인들에게 생생히 보여졌다. 무엇보다 공화당, 민주당 상원의원에다가 전직 외교관까지 있었던 탓에 미국 측이 강하게 반발했고 전두환 정권을 무안의 극치로 몰아넣었다. (...)[24] 당시 전체의석은 276석으로, 민정당은 148석을 차지했는데, 이걸 오늘날의 300석으로 환산하면 161석 대 111석이었다.[25] 그간 관제 야당으로 정권에 대한 견제 능력이 없다시피 했던 민주한국당과의 합당 자체도 모양새가 안 맞지만 무엇보다도 양대 계파인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신한민주당 위주의 야권 재편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26] YS계 인사로 12대 총선에서 대구직할시 중구/서구에서 당선되었다.[27] 신한민주당이 거세게 저항하자 이재형 국회의장이 경호권을 발동해 야당 의원들의 출입을 막은 가운데 민주정의당 의원 146명과 무소속 이용택 의원이 표결에 참여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28]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국회의원이 국회 내에서 회기 중 발언한 것을 이유로 구속당한 헌정 사상 최초의 사례다. 여담으로 유성환 의원은 1987년 7월 13일 보석으로 석방될 때까지 무려 9개월 가까이 수감 생활을 했고, 노태우 정권 말기인 1992년 9월 대법원에서 공소기각 확정 판결을 받았다.[29]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이택돈 의원이 아파트 관리인으로 비유했다(...).[30] 후에 일부가 빠져 66명[31] 실제로는 얼마 가지 못해 폐지되었고, 이듬해인 1989년에 국가원로자문회의법이 폐지되면서 지금은 헌법에서만 남아있는 사문화된 법률로 남아있다.[32] 물론 내각제가 무조건 나쁜 점만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지만, 당시 국민적인 지지는 절대적으로 대통령 직선제였다. 이를 무시하고 내각제의 장점이 있다는 이유로 여론을 무시하는 주장을 정당화 할 수는 없는 일이다.[33] 정확히 말하면 내각제 자체는 대통령 1인에게 과도한 권위와 권력이 집중되는 대통령중심제보다 더 민주적으로 운영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기는 하다. 소위 신대통령제에 대한 비판이 자주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8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여론에서 내각제가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당시 한국 사회에 전반에 팽배했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단 하나의 요구로 압축시킨 것이 바로 "대통령 직선제", 즉 국민의 대표를 국민이 직접 선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원내각제를 시행할 경우 정부수반의 명칭은 총리로 바뀌든지 하겠지만 어쨌건 기본적으로 의회에서 의원들에 의해 선출된다. 즉 당시 대중의 관점에서 본 이민우 구상이란 "야당에게 지분을 나눠준다면 체육관 선거를 계속해도 좋다" 내지는 "체육관 대통령 대신 의사당 대통령을 뽑으면 직선제는 안해도 좋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민우 구상 자체는 (전두환 정권에 유리한) 내각제 개헌을 받아들여주는 대신 언론자유 보장, 구속자 석방, 사면복권, 공무원의 정치중립 보장, 국회의원 선거법 협상, 지방자치제도 도입등 여러 반대급부를 요구하고 있었지만 (앞에서도 지적된 바와 같이) 실질적인 권력을 전두환 정권이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그런 약속들을 받아낸다고 해도 얼마나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지켜질지 보장할 방법 역시 없었던 것. 즉 이 문제는 내각제 대 대통령제의 제도적 장단점을 비교할 문제가 아니라 당시 한국 사회 및 한국 정치의 상황에서 이해해야 할 문제이다.[34] 또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늘 대통령제로만 표출된 것은 아니다. 직선제였음에도 문제가 컸던 제1공화국 시기에는 민주화의 상징으로 내각제 개헌이 대두되었다. 즉 양측 다 장단점이 있었겠으나 당시의 국민여론도 실질적인 가능성도 전두환이 대통령에서 내려와서 모든 권력을 내려놓는 대통령 직선제가 더 맞는 처사였다.[35] 2014년 헌법재판소에서 위헌결정을 하기 전까지는 선거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하거나 일정 득표율에 미달한 정당의 해산 규정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