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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에릭 켄 신세키 Eric Ken Shinseki | ||
출생 | 1942년 11월 28일 ([age(1942-11-28)]세) | ||
하와이 준주 리후에 | |||
재임기간 | 제34대 육군참모총장 | ||
1999년 6월 21일 ~ 2003년 6월 11일 | |||
제7대 제대군인장관 | |||
2009년 1월 21일 ~ 2014년 5월 30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21B4D><colcolor=#fff> 학력 | 미국육군사관학교 (B.A) 듀크 대학교 (영문학 / M.A. ) | |
소속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
1965년 ~ 2003년 | |||
최종 계급 | 대장 (미합중국 육군) | ||
주요 참전 | 베트남 전쟁 보스니아 전쟁 | ||
주요 서훈 | 국방공로훈장 (2회) 육군공로훈장 (2회) 해군공로훈장 공군공로훈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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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ric Ken Shinseki. 제34대 미합중국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으며, 퇴역이후 버락 후세인 오바마 행정부의 미국 제대군인부[1] 장관을 지냈다. 일본계 미국인으로 미군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인 대장이다. 그 전에는 앨런 오노(Allen K. Ono , 1933 ~ 2016) 육군 중장이 가장 높았다.2. 생애
1942년 11월 28일 하와이의 카우아이에서 태어났다. 조부모가 1901년에 히로시마시에서 하와이로 이주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자랐으며, 1960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미국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의 신세키.
1965년, 소위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서 몸을 사리지 않고 최전선에서 지휘하다가 발목 지뢰를 밟아 오른발 앞부분을 절단해야만 했다. 그 뒤론 뛰어난 지도력을 인정받아서 승진을 거듭 1997년 아시아계 최초로 미군 대장 진급자가 되었다. 1997년, 유럽주둔 미합중국 육군 제7군 사령관 겸 보스니아 전쟁 당시 NATO군 총사령관을 지냈고, 1998년에는 육군참모차장에 올랐으며, 이듬해엔 아시아계 최초이자 非백인최초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2020년, 흑인 출신 최초로 미군 참모총장 자리에 오른 찰리 브라운 미 공군참모총장 이전까지 미합중국 역사상 육해공군을 통틀어서 유색인종이 참모총장에 임명된 사례는 에릭 신세키가 유일했다. 그 이전 최고위직 중엔 흑인 합참의장이었던 콜린 파월이 있긴 했지만 이쪽은 참모총장직을 거치진 않았다.
2.1. 육군참모총장 시절
그는 조지 워커 부시 정권 시절 기동성과 경량화를 강조하는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의 견해에 공감대를 표시하면서 전 세계 어느 곳이든 24시간 내에 미합중국 육군을 파견할 수 있는 신속대응군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럼즈펠드와 신세키의 합작품으로 그 유명한 스트라이커 장갑차 여단이 창설됐다. 그러나 럼즈펠드가 XM2001 크루세이더 자주포 및 M1 에이브람스 전차 포신 강화개량[2] 등 화력 강화 사업 대부분을 취소해서 육군을 과도하게 경량화하려고 들자, 하자, 신세키는 이에 반대입장을 취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이라크 전쟁 때는 이러한 갈등이 더욱 심화됐는데, 신세키는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이후 치안을 위해 최소 60만의 병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가 럼즈펠드로부터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소리를 들었다. 럼즈펠드는 단 15만 명만을 투입하려고 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2006년 11월, 의회에서 존 아비제이드 미국 중동방면 통합전투사령부인 중부군사령부 (USCENTCOM) 중부사령관은 "신세키가 옳았으며, 그의 말대로 우리는 더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경질당했다고도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임기를 모두 마치고 조기전역했다. 그는 전역식에서 "여러분은 유능한 지도자가 되기 전에, 여러분이 이끌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명령할 수는 있지만 지도력을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지도력 없는 명령은 공허함과 불신, 오만으로 가득 찬 공백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럼즈펠드를 겨냥한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2001년, 미합중국 육군 총원에게 베레모를 착용토록 한 것도 신세키가 육군참모총장 재임시기에, 재직시기에 내린 지시에 따른 것이다. 베레모는 시각적으로 정예라는 이미지를 주므로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고, 제작단가가 베레모가 대체할 기존의 녹색 정모[3]와 개리슨 모보다 싸다는 점, 벗었을 때 견장이나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어 휴대성이 뛰어나다는 등의 장점이 있었기에 대체를 추진했다. 몇몇 부대를 제외한 공용 베레모의 색을 검정으로 한 점이 제75레인저연대 대원들의 반발을 불러왔는데, 그들 전용의 베레모 색상이 검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세키 역시 레인저 부대 근무 경력이 있는 레인저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닥 큰 저항은 못 하고, 대신 영국군 SAS와 유사한 모래색 베레모를 자신들의 전용으로 바꾸는 수준에서 만족해야 했다. 이 베레모 전 육군 착용지시는 호불호가 꽤 갈렸는데, 앞서 언급한 이유로 좋아했던 사람도 있었지만 정모보다 멋이 없다거나, 더운 지역에선 챙도 없는데 모직으로 만들어 덥고 불편하다는 등의 불만도 많이 제기됐다. 특히 전투복에도 평시에는 무조건 베레모만 쓰라는 부분은 납득 못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4], 결국 최근에 전투복 착용시에는 일부 행사 등의 경우가 아니면 전투모를 쓰도록 규정이 바뀌었다.[5][6]
2.2. 전역 이후
전역 후 신세키는 회사나 대학교 등의 이사로 일하다가 2009년, 버락 후세인 오바마 대통령에 의해서 제대군인부 장관으로 지명되었고 2014년까지 재직했다.제2차 세계 대전 유럽 전선에 참여한 일본계 미국인[7]으로 구성된 제442연대전투단에 대해 의회 명예 황금 훈장 수여에 사인하는 버락 후세인 오바마 대통령. 사진을 보면 대충 일본계 미국인들 중에서도 높으신 분들을 다 볼 수가 있다. 맨 오른쪽이 에릭 신세키 장관이고, 그의 왼쪽에 보이는 흰 머리의 신사가 캘리포니아주 제15지역구[8]의 민주당 소속 마이크 혼다 연방하원의원이다[9]. 가운데 지팡이를 짚은 검은 머리의 노인은, 하와이 출신으로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 참전해서 한 팔을 잃은 대니얼 이노우에 연방 상원의원[10]이다. 그 옆의 손뼉을 치는 사람은 아시아계 최초로 장관직에 오른 노먼 미네타 전 미국 교통부 및 상무부 장관이다.[11]
2014년 5월말, 2014 미국 보훈병원 비리사건의 책임을 지고 오바마 대통령과의 면담을 거쳐 사퇴했다. 사건의 전말은 애리조나 주의 한 보훈병원에서 실적을 올리기 위해 입원대기시간을 조작하며 수십 명의 퇴역군인 환자가 사망했다는 내부고발자의 폭로가 나오자 미국 각 지의 보훈병원에서 비슷한 비리가 보고되어 재향군인회 등의 여러 단체에서 사퇴압력이, 압박이 거세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1] 대한민국의 국가보훈처에 해당.[2] 140mm 업건 계획.[3] 당시 미 육군에는 가벼운 행사 때 입거나 항상 정복(의복) 차림으로 근무하는 인원(백악관, 미국 국방부 등 상급 기관이나 모병관 등)을 위한 녹색 정복(Dress Green)과, 큰 행사 때 입는 대례복인 청색 동예복(Dress Blue, 파란색이라 부르지만 검은색에 가까운 상의와 밝은 파란색 바지로 되어 있다. 준장 이상은 바지도 상의와 색이 같다.)이 있었고, 각 복장 색과 동일한 정모/예모가 함께 존재했다. 베레모는 이 가운데 녹색 정모만 대체했다. 2014년부턴 Army Service Uniform(ASU)이라는, 기존의 청색 동예복을 개량하고 동계 및 하계용 셔츠를 나누는 등 약간의 변형을 가한 신형 정복·예복 및 근무복이 도입되면서 녹색 정복은 폐지됐다. 베레모는 근무복 및 정복에 착용하는 용도로 청색 예모와 함께 남았다.[4] 미 육군 미국 내의 기지 대부분이 남부에 집중돼 있다는 점을 감안하자. 이들 지역 대부분은 한여름 온도가 최대 섭씨 40도를 오가는 땡볕 더위에, 습도 역시 한 몫 하는 곳이 수두룩하다.[5] 여담이지만 후일 미합중국 해군에서도 해군참모총장 마이크 멀린이 단순히, 단지 멋이 난다는 이유로 1975년 폐지시킨 간부용 춘추정복을 부활시켰다가 실무진의 비난만 듣고 멀린 퇴역 후 다시 폐지되는 일이 있었다.[6] 한국군 베레모 착용지시도 의도도 반발사례도,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7] 2차 대전 당시 적성국 출신이라는 이유로 일본계 미국인들의 상당수가 행정명령 9066호에 의해서 2차대전 시기에 수용소로 끌려갔고, 사회에서도 차별대우도 심했다. 그렇다보니 군에 입대해서 자신이 미국인임을 증명하려는 이들이 많았다. 다만 동족인 일본군을 상대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다보니 전원 유럽 서부전선에 배치되었다.[8] 2013년부터는 17지역구로 옮겼다. 15와 17 양 지역구들 모두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미국), 산호세(미국), 산타클라라 등의 베이 에어리어와 실리콘밸리 쪽 지역구.[9] 일단 1941년생으로 전쟁 참전용사 세대가 아니며(다만 어린 시절에 가족과 함께 수용소 신세를 졌다), 새너제이 주립대를 나와서 고등학교 과학 교사를 하며 사회운동을 하다가 정치에 입문한 사람이지만, 아무래도 영향력이 큰 일본계 미국인이다보니 부른 듯. 일본계로서의 정체성을 부인하지 않지만 일제 침략 역사의 바른 인식, 위안부 문제 등에서 일본 정부의 반성을 강력히 촉구하는 개념정치인이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의회 증언을 주도하고 일본정부의 사죄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켜 한국정부에서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이외에 의회 선서 때 성경이 아닌 코란에 선서를 한 무슬림 의원을 변호하거나, 9.11 테러 이후 땅에 떨어진 미국 내 무슬림들의 권리신장에도 관심을 보이는 등, 여러 진보적인 행동으로 이름이 높다. 또한 활동하는 지역구도 과학기술산업을 이끌어나가는 실리콘밸리라서 정계에서의 영향력이 굉장히 높다.[10] 미 의회 청문회에서 신세키의 육군참모총장임명안이 만장일치로 승인받는 것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혼다 의원과 마찬가지로 민주당원이지만, 여러 행보로 인해 일본 보수우익들의 원수가 돼 버린 혼다 의원과는 달리 이노우에는 일본 우익과 미국정계를 잇는 가교 노릇을 했기에, 한국과 중국에서의 평가는 대단히 나빴다. 당연히 위안부 미국 상원 결의안 상정에 반대해왔지만 위안부 문제를 미국도 그런 거 있다고 물귀신으로 늘어지는 일본 극우들 덕분에 분노한 미국 네오콘을 비롯한 보수층, 다수 미국정계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꼼짝없이 상정이 통과된 걸 바라봐야 한 그에게 일본 극우언론은 왜 막지 않았냐며 적반하장인 비난을 퍼부었고 그는 당연히 이렇게 된 게 니들, 일본 극우의 자업자득인데 나에게만 책임을 떠넘기느냐? 라고 분노 어린 반응으로 비난했다. 이러고 은거에 들어갔다가 2012년 12월 88세로 사망.[11] 9.11 테러 당시 이 사람이 교통부 장관으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당시 미국역사상 최초로 북미대륙전체에 대해 항공차단명령을 발동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