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1-03 00:36:14

여중용


성명 여중용(呂中龍)
남은(南隱)
본관 성주 여씨
생몰 1856년 3월 6일 ~ 1909년 12월 24일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금평리[1]
사망지 경상북도 금릉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여중용은 1856년 3월 6일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금평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 을미사변단발령이 발발하자, 그는 1896년 1월 22일 김산 향교에서 의병을 조직하는 데 가담하고 의병장에 이기찬(李起燦)을 추대하고 자신은 참획(參劃)에 선임되었다. 이후 군비 2천 냥을 부담하고 예건대장기(禮建大將旗)와 금산복의대장기(金山伏義大將旗)를 만들어 세우고 금산 구성 지례 등지로 진군하였으나 구성에서 일본군과 연합한 관군에 패전했다. 이후 고종의 해산 권고가 내려지자 의병을 해산한 뒤 자택에 은거했다.

1903년 전국의 의사들이 한마음으로 뭉쳐 국난에 대처해야 한다는 오백의사론(五百義士論)을 비롯한 양병론(養兵論)을 발표했으며, 1904년 3월에는 서울에서 충의사(忠義社)를 조직하고 133명의 지사를 규합하여 매년 2회씩 모여 국사를 논의하기로 하였다. 이해 여중용은 일본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하여 주한일본공사, 주한일본육군사령관, 주한 청·영·미·불·독 등 외국공사, 일진회, 정부삼판서(政府三判書)에 항의서한을 보내어 한국의 독립을 위협하는 조약이나 군사활동이 동양의 평화를 파괴한다고 경고하였다. 그 일부는 전문이 황성신문(皇城新聞)에 게재되었다.

1905년 5월, 여중용은 이병구(李秉九)·지우석(池禹錫)·우용택 등과 밀의하여 일본공사관 폭파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탐지되어 동년 7월 24일 앞서의 항의서 발표와 관련하여 일본헌병대에 연행 구금되었다가 다시 폭파계획사건에 관련된 사실이 겹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7월 후 석방되었지만 혹독한 고문으로 조골(助骨)이 부러지는 등 상처를 입었다.

1906년 5월, 여중용은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허위, 이강년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밀의하고 허위는 안동, 이강년은 상주, 여중용은 금산에서 각각 의병을 일으켜 서울로 진공하기로 약조했다. 이후 그는 그해 8월 귀향하여 김산군 병기소에서 무기를 수합하고 180명의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병석에서 졸도하여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후 병마로 고통받다가 1909년 12월 24일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기 직전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죽어 귀신이 되어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여중용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인근의 광명리와 함께 성주 여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여채룡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