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年羹堯. 1679년 ~ 1726년 1월 13일. 한군 양백기인이었다.[1] 옹정제 시대의 장군. 조선 정조에게 홍국영이 있었다면 옹정제에겐 연갱요가 있었다 할 만한 최측근 오른팔이었다.강희조의 한군 세가 출신이다. 부친 연하령이 강희제의 중신이고, 연갱요의 적처는 납란 명주의 손녀이자 납란 성덕의 딸, 계처는 종실의 딸이었다.
강희 48년, 연갱요는 시랑을 거쳐 사천 순무로 임명되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황4자 윤진이 옹친왕이 되자 그 속하로 배정되며 자신의 이복 누이가 옹친왕의 측복진으로 지명된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그리 가깝지 않았다. 연갱요는 한창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어서 옹정제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었고, 내성적인 옹정제는 연갱요의 이런 태도에 안하무인하다고 질책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옹정제가 즉위하자 연갱요의 누이는 귀비로 봉해졌고, 연갱요는 무원대장군으로 봉해지며 막강한 권세를 누렸고[2] 청해 반란을 진압하고 서북면에서 군공을 세웠다. 연갱요의 군공은 즉위 당시 세가 부족했던 옹정제의 권위를 세워주었다. 옹정제는 그를 은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연갱요는 군인이지 정치인이 아니었다. 그는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도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랐고, 자신의 정치적인 위치를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 옹정제의 다른 측근인 이부상서 융과다와 갈등을 빚었는데, 연갱요가 자신의 수하들을 수도 없이 추천해서 인사제도의 운영을 방해했기 때문에 이부상서 융과다가 강한 불만을 품은 것이다. 그리고 호부상서 겸 이친왕 윤상도 연갱요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다 옹정제의 정적인 윤당을 감시하라는 명을 받고도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이전부터 친분이 있던 윤당을 정중히 대하며 그의 포섭에 넘어가 산섬의 행상들과 거래를 하여 함께 돈을 벌고 그와 밀서를 수십 통 주고 받았다.
옹정 2년 10월, 연갱요가 귀경했을 때 옹정제는 그를 환대했으나 그가 왕공대신들에게 무례하게 구는 모습을 보고 반감을 가지게 된다.[3]
옹정제의 연갱요에 대한 태도가 변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공부낭중 악주 사건 때문이었다. 공부낭중 악주가 일을 잘못 처리하여 은 수천 냥의 손해가 났고 공부상서인 윤사는 악주를 해임하고, 대신 자신이 은 1700냥을 납부하고 악주에게 은 1600냥을 빌려 완납했다. 그리고 악주는 연갱요에게 2만냥을 주어 자신을 포정사로 삼아달라고 청탁했고, 연갱요는 옹정제에게 이 일을 사실대로 고했다.
11월 13일, 옹정제는 조정에 나아가 울분을 쏟아냈다. "염친왕이 죄를 지어도 강등하지 않고 벌금만 부여했는데도 대신들이 미혹당해서 짐을 가혹하다고 여긴다. 지난 1년 동안 많은 대소신료들이 염친왕 때문에 연루됐는데도 죄를 달갑게 받아들였다. 악주는 결코 돈을 낼 여유가 없는 자가 아니고, 염친왕은 여유가 없는데도 이러다니 무슨 뜻인가. 염친왕이 악주를 대신해 밀린 돈을 완납한 까닭은 다른 사람은 가혹하고 나는 너그럽다는 것이다. 연갱요에게 은 2만냥을 주어 포정사로 삼아달라고 청탁했고, 연갱요는 사실대로 상주했다. 짐은 사람을 공평하게 쓰는 데 이런 소인배가 짐의 이름을 더럽히려고 한다."
비록 연갱요는 악주를 고발했지만, 옹정제는 이 사건으로 연갱요를 불신하였다. 현재 연구자들은 옹정제가 윤사도 관직에 붙어있게 해줄 수 없는 사람이 왜 연갱요에게 전향했는지 의구심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한다.
옹정 3년 옹정제는 연갱요에게 92개의 대죄를 대며 사사를 명한다. 죽은 후 가산을 몰수당했다.
2. 대중매체에서
2012년 드라마 궁쇄심옥에서는 진짜 연갱요는 서모에게 암살당하고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면서 옹정제의 최측근으로 활동한다.[4]2017년 드라마 화락궁정착유년에 등장한다. 13세에 급제하여 태자의 시독이 되었다.
2.1. 옹정황제의 여인의 등장인물
{{{#!wiki style="min-width: 100px; display: inline-block; min-width: 15%" {{{#!wiki style="margin:0 5px; display:inline-block" {{{#!folding [ 등장인물 ] {{{#!wiki style="margin:-5px 0 -10px; word-break: keep-all" | <tablewidth=100%><tablebgcolor=#000> 주요 인물 | ||||
견환 | 심미장 | 안릉용 | 황제 | 윤례 | |
주요 인물 | 견환의 심복 | ||||
오라나랍 의수 | 연세란 | 완벽 | 최근석 | 온실초 | |
견환의 심복 | 기타 후궁 | ||||
유주 | 제월빈 | 이정언 | 풍약소 | 비운연 | |
기타 후궁 | |||||
조금묵 | 여영풍 | 부찰 의흔 | 정빈 | 순아 | |
기타 후궁 | |||||
하동춘 | 과이가 문원 | 여앵아 | 채빈 | 섭란의 | |
기타 | |||||
홍시 | 홍력 | 롱월공주 | 청앵 | 소배성 | |
기타 | |||||
전추 | 맹정한 | 마격 칸 | 견옥요 | 교송지 | |
后宮甄環传 등장인물 | ||
이름 | <colbgcolor=#fff,#1f2023>연갱요 (年羹堯) | |
배우 | 손녕 | |
민족 | 한족 | |
거주지 | 북경 | |
가족관계 | 아버지: 연하령 이복동생: 화비 자녀: 연빈, 연부, 연흥 매제: 옹정제 |
2.1.1. 소개
연하령의 아들이자 화비의 이복 오빠로,아이러니하게도 화비의 가장 큰 아군이자 가장 큰 짐이다. 아군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황제의 즉위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고, 이후에도 변방의 수많은 반란과 전쟁에서 승리해 막대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황제도 연갱요라는 정치적 변수를 무시할 수 없고, 화비가 계속 실수를 저지르고 황제의 분노를 직격으로 맞아도 웬만하면 솜방망이 처벌로 끝나기 때문이다. 견환 왈 "연갱요가 있는 한 폐하도 연세란을 죽이지 못해, 군권이 황권보다 강하니까..."라고 말이다.
반대로 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화비가 임신을 하지 못한 것이 바로 연갱요 때문이다. 황제는 화비에게서 아들이 생긴다면 연갱요가 외척이 되어 제위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화비는 결국 총애의 절정, 즉 자식을 낳는 것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거기다 머리가 나쁜 건지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는 자신의 자리를 망각한 채 황제 앞에서 굉장히 오만하게 군다. 그 화비마저도 당황할 정도.
2.1.2. 작중행적
1화의 맨 처음에서부터 옹정제 즉위의 2등 공신으로 봉해지며 등장한다. 연갱요는 공이 대단했고, 태후도 실력이 괜찮다며 인증을 했다. 실제로 마격 칸이 견환(당시에는 법명 막수)과 윤례에게 "연갱요가 있을 때에는 그나마 우리를 상대할 수 있었겠지."라 말하는 등, 군사적인 능력도 실적도 꽤나 괜찮았다.그러나 권력이 막강해질수록 오만방자함도 비례하게 되었다. 분명히 1화에서는 소배성 앞에서 겸손하게 "분부가 있으시오, 공공?" 이랬던 사람이 이제는 황제 앞에서도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당당하게 저지르고,[5] 윤례 앞에서 일어서지 않거나 견환(당시 완귀인)에게 시비를 거는 등, 황족과 비빈들도 대놓고 우습게 본다. 민가를 헐어내어 왕부보다 더 큰 저택을 짓고, 매관매직[6]에 황실의 태의들을 마음대로 부르는 권력 남용[7]까지 행사하는 등 방자함이 극에 달하지만, 그가 세운 공이 엄청난 데다 쥐고 있는 군권도 막강하여 황제도 차분히 기회만 노린다.
그러던 중에 연갱요는 황제가 가장 싫어하는 10왕야 돈친왕 윤아와 결탁했다. 이런 점을 보면 군사적인 능력은 어떻든 간에 정치적 능력과 처세술과 같은 다른 점은 무능해 보인다. 굉장히 단순무식한 화비조차[8] 돈친왕과 결탁하는 것은 연갱요에게 해가 되면 됐지 득이 되지는 않을 것을 아는데 말이다. 돈친왕이 그에게 군사를 요청한 전서구가 윤례에게 발각되고, 이어서 편지에 아침부터 저녁까지라는 문자를 저녁부터 아침까지라고 오기한 것이 결정적인 꼬투리가 되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라고 쓰면 나랏일을 열심히 한다는 표현이 되겠지만, 저녁부터 아침까지라고 써버리면 밤일을 열심히 한다는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견원도, 과이가 악민, 융과다, 장정옥 등 신하들이 방자함, 부정부패 등 있는 죄 없는 죄들을 보태서 연갱요를 탄핵한다. 결국 이 때문에 동생이 황제에게 오빠의 잘못을 용서해달라며 이마가 찢어져서 피범벅이 될 정도로 머리를 찧으면서 절하는 소동이 벌어졌지만, 이미 마음을 먹은 황제가 꼬투리까지 잡은 이상 머리를 찧어 사죄한다고 수습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그 이후 연갱요는 서서히 수족이 잘리고 직위를 강등당하다가, 결국 황제의 명으로 아들들은 참수형에 처해지고 연갱요 자신은 자살하는 최후를 맞는다. 그리고 화비 또한 견환을 테러하려다가 냉궁으로 유폐되었고, 자신이 유산하고 이후 자식을 가지지 못한 원인이 바로 황제였다는 사실을 견환에게 들으면서 자살하게 되었다.
2.1.3. 가족 관계
극중에서는 연갱요의 아들들 중 세 명이 언급된다. 장남의 이름은 연빈으로, 작중시점에서 이미 작호를 가진 걸로 보아 꽤 공을 세운 듯하다. 차남의 이름은 연부로, 화비의 말에 따르면 연갱요가 가장 아끼는 아들이고 탁자산 반란을 평정한 후 고모인 화비와 아버지인 연갱요의 요청으로 작호를 받게 된다.연갱요가 애를 잘 가르쳤다고 황제가 칭찬하는 걸로 보아 아버지처럼 군사적 재능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연갱요가 한참 교만을 떨 때 연부 역시 형 연빈과 함께 염전을 크게 벌여 폭리를 취해 눈밖에 났다. 그 외 연흥이라는 아들도 있는데, 연갱요가 일등공 작위를 빼앗기고 태보 직을 박탈당할 때 연부와 함께 파면당했다고 나온다.
훌륭한 시스콘으로, 화비를 매우 아끼는 듯하다. 1화부터 소배성에게 화비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첫 선을 보인다. 견환이 화비를 갈궈서 화비가 소심해졌다고 생각하자 "세란을 건드리는 것들은 그게 누구든 간에 내가 가만히 두지 않겠다!" 라고 협박으로까지 들릴 수 있는 돌직구를 견환 앞에서 날린다.
그리고 화비에게 추천받은 인사들은 자기가 한 번 쳐낸 적이 있어도 (물론 돈의 유혹도 있었겠지만) 받아줄 정도이다. 황제도 화비의 화려하고 값비싼 장신구를 보고 "하나뿐인 여동생이니 그야 연갱요가 뭐든 해주겠지" 라고 한 바 있다. 화비가 임신을 하지 못하자 궁 밖에서 의사를 부르겠다는 것도 연갱요의 배려이고, 실제로 연갱요를 진료한 의사가 화비에게 간다. 일찍이 화비가 얼굴에 굴리다 그대로 여답응에게 선물했던 안티에이징용 옥 역시 연갱요의 선물. 화비가 심미장을 견환이 방문했다고 생각해 낚인 일, 그리고 견환을 유산시킨 일로 벌을 받자 오빠로서 마땅히 자숙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화비 문제를 상소에 언급하며 어떻게든 해 주려고 했던 연갱요이다.
2.1.4. 여담
환관을 경멸하여 서북에서 자금성으로 잠시 돌아왔을 때, 황제와 화비와 같이 식사를 하다가 소배성에게 시중을 들게 한 적이 있었다. 소배성이 비록 환관이긴 하나 도태감이자 황제의 심복으로 감히 신하가 턱짓으로 부릴 수 있는 신분은 아니었는데도... 그 화비마저도 당황해서 이러면 안 된다고 충고했지만 난 환관이 싫다며 생깠다. 그밖에도 차를 올려도 외면하고, 의자를 갖다줘도 거들떠보지 않는 등 엄청나게 무시했다.옹정황제의 여인 드라마에서는 연갱요가 먼저 죽고 화비가 뒤따라 자결한 것으로 묘사하지만 사실 원래 역사에서는 정반대로, 화비의 실제 모델인 돈숙황귀비 연씨가 1725년 12월 27일에 죽었고, 고작 약 2주 후인 1726년 1월 13일에 연갱요가 자결하게 된다.
드라마에서는 연갱요가 죽으며 연씨 가문도 박살난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실제 몰락한 건 연갱요와 그 아들들 뿐이며 연갱요의 부친인 연하령은 딱히 연루되지 않았고 연갱요의 형인 연희요도 내무부 총관을 지내는 등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나이가 어려서 처형당하지 않고 유배로 그쳤던 세 아들들도 2년 뒤에 사면받아서 북경으로 돌아와 조부 연하령의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다.
[1] 옹정제 즉위 후 한군 양황기로 대기된다.[2] 청나라 역사상 네번째 한군기 출신 대장군이다.[3] 연갱요는 이친왕부에 들렀다가 자신의 측근에게 이친왕부는 겉은 번지르르한데 안은 허름하다고 흉을 봤다.[4] 주인공 청천을 도와주는 조력이자 짝사랑하는 소춘인데, 선인으로 나오는 듯 하다가, 청천으로 인해 나비효과처럼 유일한 가족이었던 어머니의 죽음과 소언의 부추김으로 타락하여 연갱요 행세를 하게 된다. 소언과는 무언가의 기류가 흘렀으나, 소언은 4황자 옹정제의 측복진이 되길 원했기에 마음을 접고 동생으로 삼았다.[5] 황제와의 식사 당시 태감의 시중을 받지 않고 자기가 음식을 집어 먹었다. 그 정도야 오랫동안 군을 통솔하며 변방에 나가 있었으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동생이 당황하며 경고를 줬음에도 황제의 시중을 들고 있는 소배성에게 시중을 들라며 거만하게 명령했다. 황제는 그 오만방자함에 빡쳐 다른 태감이 덜어준 제비집 요리를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내팽겨친다.[6] 개중에는 연갱요 본인이 탄핵해서 파직시켰다가 뇌물을 받고 다시 황제에게 추천한 인물도 있다. 대놓고 황제에게 장난을 친 것.[7] 연갱요가 자기 아내를 치료받게 하려고 어의들을 차출하는 바람에 두통발작을 앓는 황후가 밤새 진료를 못 받았다. 다만 우연의 일치는 아닌듯. 귀비로 승급해 득의양양한 화비가 귀비 다음 품계인 황귀비가 후궁 실세고 황후는 껍데기라는 식으로 오만하게 군다. 이걸 본 황후가 연갱요가 어의를 차출한 때를 노려서 두통발작을 연기했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게다가 당시 궁에서는 원래 유사시를 대비해 태의 둘이 당직을 서고 있었는데 연갱요의 집에 있는 태의를 부른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연갱요의 집에 보내서 이들까지 억류당하게 만들었다.[8] 화비는 꽤 무식한 편으로 황제가 화비에게 "책은 잘 읽지 않는데 대답은 빠르구나."라고 애정을 담아서 깐 적이 있었다. 다만 그와 별개로 궁중 내의 온갖 암투를 저질렀으니 총체적인 지능은 결코 떨어지는 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