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9 05:50:16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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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칭 예장고신
설립연도 1952년
소속국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총회장 정태진 목사[1]
부총회장 최성은 목사[2], 김승렬 장로[3]
사무총장 이영한 목사
교인 수 378,376명(국민일보, 2023년#)
교단 기관지 기독교보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교단 출판국 총회교육원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위치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총회
1. 개요2. 역사3. 교단 특징
3.1. 전반적인 내용3.2. 신사참배 거부 및 타 교단과의 관계
4. 노회 목록5. 자매교류 기관6. 기타
6.1. 산하 학교6.2. 출옥성도파 교단6.3. 파생 교단6.4. 학생신앙운동6.5. 기타
6.5.1. 비대면 예배 반대6.5.2. 1027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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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는 과거 일본의 강점기 때에 신사참배 강요를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해방 후 신사참배 회개운동을 했다는 것 때문에 장로교 총회로부터 쫓겨나 세워진(1952년) 교회이다. 고신교회는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중요하게 여긴다. 또한 장로교회(Presbyterian Cuurch)로서 종교개혁의 개혁신앙을 따르며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예배모범, 교회정치,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를 예배와 질서, 그리고 교리로 채택한다. 로마천주교회의 성직자 위계제도와 재세례파의 조직 없는 정치의 양극단을 거부하고 성경에 근거한 장로정치를 따른다.
또한 종교개혁 신앙을 파수하고 있는 세계에 흩어진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들과 연합을 이루고 있으며(ICRC[4]) 미국[5], 캐나다[6], 일본[7], 네덜란드, 대만[8], 남아프리카공화국[9], 호주[10] 등지의 여러 교회와 우호 및 자매 관계를 맺고 있다.

2. 역사

  •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H.N.Alen 의사가 입국하여 의료선교로 복음전도의 길을 열고 1885년 4월 5일 H.G Underwood 선교사의 입국으로 장로교 선교는 활발히 시작되었다. 1893년 1월 장로회 선교사 공의회가 조직되고 1901년 5월 15일 평양 장로회 신학교 개교, 1907년 9월 17일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되어 장로교 교회 확장은 잘 되었으나 1932년부터 일기 시작한 신사참배 강요로 기독교 학교가 어려움을 겪고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총회는 신사참배 하기로 가결하니 진리를 수호하는 주의 신실한 종들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 평양 장로회 신학교가 문을 닫고 주기철, 한상동, 주남선 목사 등은 검속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다가 주기철목사 등 많은 분들이 순교하고 한상동, 주남선 목사, 손명복, 조수옥전도사등은 평양형무소에서, 손양원 목사는 청주 감옥에서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출옥하였다. 이들은 한국교회 재건의 주역이 되었고, 순수한 개혁주의 보수신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1946년 6월 23일 진해에서 하기신학강좌를 개최하고 9월 20일에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였다.
  • 1948년 4월 제 34회 총회는 고려신학교 학생 추천문제를 [고려신학교는 총회와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노회가 천서를 줄 수 없다] 하여 문제가 제기되고, 이때부터 총회 내엔 출옥성도들이 중심된 고려신학교를 거세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고 장로교 분열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 1950년 4월 경남노회에서는 출옥성도들을 거북스럽게 여기는 친일목사들의 세력이 점차 확산되고 고려신학교 천서 문제를 반대하여 오다 경남노회가 5개로 분열되었다. 4월 21일 제36회 총회에서는 경남노회 총대 문제로 개회부터 소란이 일다가 급기야 경찰이 동원되어 진압이 되고 총회는 유회되었다. 그리고 2개월 후 6.25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중에 고려신학교 총무였던 손양원 목사[11]가 순교한다.
  • 1951년 5월 25일 전쟁 중이던 때에 유회된 제36회 총회가 열렸는데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경남(법통)노회에서 보낸 총대가 총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고 총회는 경남노회를 관계없는 것으로 선포하였다.
  • 1952년 4월 29일 제37회 총회에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경남(법통)노회는 총대를 파송하여 총회와 관계복원을 시도했다. 그러나 총회는 고려신학교 및 그 관련자들(경남(법통)노회))은 총회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재언명하였고, 경남(법통)노회의 엄주신 장로의 고별선언으로 고려신학교와 경남(법통)노회는 총회와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 1952년 9월 11일 제1회 총노회가 조직되고 노회 조직의 취지와 목적을 발표하였다. [12][13][14] 그리고 1956년 총노회를 총회로 개편.
  • 승동측과의 합동과 환원

    • 1960년 승동측(현 합동교단)과의 합동
      1963년 합동하였던 것에서 다시 분리하기로 결정
  • 반고소 고려파의 이탈

    • 1970년대 고려학원 이사회 문제로 법정에 고소되는 일이 발생한다. 교회의 문제를 세상법정에 소송하는 것에 반대한 반고소 세력이 당시 교단 내에 있었는데, 이때 반고소 측으로 경기노회와 경남노회는 양분되었고 이들은 분리되어 1976년 반고소 총회가 구성된다.[15] 후에 반고소총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 분열 이후 다시 하나로

    • 1982년 : 반고소 측 경남(법통)노회 120여개 교회가 1982년 고신으로 환원한다.
      1984년 : 반고소 총회(고려교단) 고려신학교 졸업생들이 고려교단을 이탈하여 고신교단에 가입하게 된다.
      2001년 : 고려교단 내부 목회자들 사이에서 석원태 목사 1인 중심의 교단운영에 따른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개혁이 도무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개혁세력이 고신과 부분 합동한다.
      2015년 : 9월 16일 총회를 기점으로 고려총회와 고신총회는 통합한다.[16] [17] [18]

3. 교단 특징

3.1. 전반적인 내용

해방 후 신사참배 문제 청산에 대한 갈등으로 갈라져 나온 장로회 교단. 약칭은 예장고신이며 소속기관으로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이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에 반대하여 옥살이를 하고 나온 목사와 성도약칭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교단이다. 이들은 총회에서 신사참배 한 것에 대한 회개와 일제에 의해 폐교된 평양신학교의 신학을 이은 정통신학,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자유주의신학에 반대하여 개혁주의 신학의 신학교 설립을 주장하며 신학교육을 통하여 교회의 회복을 위한 진리운동을 펼쳤다. 그 일환으로 경남지역에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당시 총회는 평양신학교의 폐교 후 서울에 자유주의 신학의 조선신학교를 세운 후였기에, 노회와 총회의 교권주의자들은 출옥성도들과 고려신학교파(경남지역 중심)를 제명시킨다. 쫓겨난 이들은 결국 총노회를 조직하여 독자적으로 총회를 구성할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교회개혁이라는 정당한 목표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부족하고 정죄하는 자라는 비판을 받으며 분리주의자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신사참배에 적극 참여하고도 회개하지 않고 교권을 잡았던 이른바 지도자들과 그들이 장악한 노회와 총회의 교권주의적 오만의 결과라고 평가된다.

신사참배 거부로 인하여 폐교평양신학교 세력과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거부 순교정신을 계승하여 새로 세운 교단이다. 주기철 목사는 2016년 예장합동 평양노회에서 사후 복권이 선언되었다.(출처), [19]

평양신학교는 일제강점기 당시부터 개혁주의 신학으로 유명했던 곳이며, 이 때문에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중심 세력들은 대부분 평양신학교 위주였다. 그리고 관련자들이 제명당할 당시에는 당연히 고신 교단이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이들의 출신 성분이 성분인지라 신학적으로는 매우 보수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이들이 모여 고려신학교(高麗神學校)를 세웠고, 이것이 고신대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20]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은 총회 구성보다 신학교 설립이 더 빨랐다.

고려신학교는 경남과 부산을 근거지로 하였기에 경남과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에서 교세가 큰 편이다.
지역에 치우친 교세를 극복하기 위해 교단 차원에서도 노력하였는데, 고려신학대학원을 부산에서 천안으로 이전한 경우라던가 총회회관[21]을 서울에 둔 것 등의 여러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러한 노력으로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교세가 성장하였지만 여전히 부산과 경남지역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소수다. 2000년대 초반 고려교단의 서경노회가 고신으로 편입하였고 2015년 고려총회가 고신과 합쳐지게 되면서 수도권 지역에서의 교세가 일부 성장하였다. 그러나 노회의 구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강원과 전라지역에서는 여전히 약세다.

2015년 예장고려와 통합하였고 2024년 기준 예장순장과 통합을 위해 교류 중에 있다.

교단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라고 볼 수 있는 교단이다. 예장합동 측과 나란히 반 에큐메니컬 진영을 대표하지만 예장 합동보다 훨씬 에큐메니컬 운동을 반대한다. 반 가톨릭, 반 종교다원주의, 반 동성애, 반 자유주의 신학 등을 내걸고 있다. 당연히 세계교회협의회(WCC)나 WCRC를 거부하며 ICRC(국제개혁주의교회협의회)의 회원교회다.

참고로 동성애가톨릭에서도 반대한다. 다만, 동성 간 육체관계(성행위)나 동성결혼의 법제화 등은 단호히 반대할지언정, 동성애자를 저주, 핍박하고 모욕하는 행위를 용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사랑과 친절로 대하라고 가르친다. 한 마디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물론 이렇게 적었다고 해서 오해하지 말자. 고신도 앞에 서술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신학 노선은 보통 개혁주의라고 소개되는데, 쉽게 말하면 칼뱅주의, 장로회. 이는 총신대(합동), 안양대(대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합신)과 같다. 그 중에서도 칼빈의 전통적 견해에 비교적 강하게 찬동하는 경향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보다도 더 보수적 신학을 가지고 있다. 각종 신비주의, 은사주의적인 것에 대해 부정적이며 종교다원주의, 에큐메니컬운동의 자유주의 신학에 상당히 회의적이다. 교단 자체가 개혁신학의 고려신학교를 기반하여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기 교단 신학에 큰 영향을 끼친 한부선 선교사나 박윤선 목사, 한상동 목사의 영향도 크다. 한부선 선교사는 프린스턴신학교 출신(1924-1928년)으로, 이때는 이른바 구(舊)프린스턴신학의 마지막 시절이었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청주에서 사역하다가 첫 안식년을 맞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수학(1935-36)한 뒤에, 1936년에는 북장로교회를 탈퇴하고 미국장로교회(이후에 정통장로교회)의 창립 회원으로 가입하고, 장로교 독립선교부의 선교사로 파송받아 만주 봉천노회와 협력하였다. 1938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제 27회 총회가 부당하게 신사참배를 가결할 때 항의하였다. 1940년에는 “장로교 언약”(The Presbyterian Covenant)을 만주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이들과 작성하였고, 1941-42년에는 옥고를 치른다. 1942년에 강제 추방당하였다가 1946년 10월 18일에 미국 정통장로교회 선교부의 파송으로 한국에 도착하여 11월 13일부터 1960년까지 고려신학교에서 실천신학과 선교학 등을 강의하였다. 한부선 선교사를 위시하여 초기 교수들이었던 박형룡(1887-1978), 박윤선, 김진홍(1906-1988), 이상근(1911-2011), 김철현, 안용준 목사 등과 하도례 선교사(1925-2009)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졸업하거나 수학하였으니, 초기 고려신학교는 ‘한국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같은 분위기였다고 전해진다.

박윤선 목사는 고신교회와 고신신학의 지평을 웨스트민스터신조와 장로교 전통으로부터 네덜란드 개혁신학으로 확장시켰다. 그는 1930년대 평양신학교 재학 시절에 칼빈주의 또는 개혁신학을 배우지 못했다고 증언한다. 그는 박형룡 박사의 추천으로 1934년에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가서 공부하면서 개혁신학을 접하였고, 1938-39년에 두 번째로 유학하였다. 이 공부를 통하여 네덜란드 자유대학교에 가서 공부하려는 의욕을 가졌다. 비록 화란 유학 기간은 6개월에 불과하였지만, 1930년대에 화란어를 공부하고 화란 신학자 바빙크를 공부하고 화란 주석을 읽고 강의하고 주석을 저술하였다. 그의 활동으로 한국교회는 독자적인 첫 주석가를 통하여 개혁신학을 접할 수 있었다.박 목사가 고려신학교 초기부터 고려신학교에서 개혁신학을 성경 주해와 변증학, 신학 일반에서 가르쳤고 이후 고신교회 안에서 그의 제자들이 그의 경건회 설교를 전국교회로 가서 전하는 방식으로 개혁신학과 설교가 고신교회로 퍼져갔다. 그렇지만 그의 활동은 고려신학교 개교 이후 10년만에 중단되었다가 복귀하지만 1960년 9월 승동측과 합동 직전에 그가 교장직 수행을 제지당하면서 종결된다.박 목사는 당시 장로회총회의 교회정치 혼탁과 권력 투쟁을 비판하였다. 즉 제 15회 총회가 적절한 조사도 하지 않고 경남노회가 고려신학교와의 관계를 가지는 것을 막았다는 것이다. 교회회의도 실수를 범할 수 있으며, 신자의 양심의 자유를 따라 잘못된 결정에 항거할 수 있음을 칼빈과 여러 신조들을 인용하면서 옹호한다. 총회파가 마산 문창교회의 예배당을 차지하려고 세속 법정에 고소하자 고신교회에 속한 목사(송상석)도 맞대응하였다. 총회가 소송 가능성을 열어두자, 박 목사가 이것이 고려파 정신인 초기의 개혁과 회개 정신이 퇴색이라고 지적하고 남을 소외시키는 편협함도 비판하였다. 즉 고려파는 모든 한국교회를 회개케 하는 선택된 집단이기 때문에 소송에 휘말리면 고려파의 권위가 상실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그는 1957년 초에 자기의 가르침을 존중하지 않는 이들을 떠난다. 다시 복귀하나 주일성수문제로 1960년 9월 고려신학교를 완전히 떠난다. 박 목사는 초기 고신교회의 신학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 동란 당시에 피난지 부산에는 온갖 신비주의와 방언을 포함한 은사운동 그리고 이단이 창궐하였다. 한국교회가 전통적으로 사경회나 부흥회를 개최하지만 개혁교회의 특징인 성경교육을 교인들에게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못하였다. 박 목사는 개혁신학에 기초하여 문선명의 통일교, 박태선의 전도관, 나운몽의 용문산 운동 등을 비판하면서 고신교회의 신앙을 굳건하게 확립하였다. 이후 고신교회는 한국의 어떤 교회보다 불건전한 집회나 은사운동과는 늘 거리를 두게 되었다.

박 목사를 이어 이근삼 박사(1923-2007)가 고신교회 안에서 칼빈주의와 개혁신학을 계속 강의하고 발전시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이 교수는 칼빈주의와 개혁신학을 신봉하면서 이 용어가 그의 입술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장로교 신조인 웨스트민스터고백서와 요리문답을 해설하였고, 고려신학교와 고신교회가 장로교 전통 위에 서도록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칼빈주의 문화관에 입각한 기독교대학에 대한 열망은 누구보다 컸고, 현재의 고신대학교는 그를 떠나서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근삼 박사는 박윤선 목사에게 직접 배웠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멘토가 있다. 한명동 목사이다. 한 목사는 고려신학교 초기에 살림을 맡았고, 광복동·감천·암남동으로 이어지는 교지(校地)와 교사(校舍) 매입과 건축을 책임졌다. 그는 1955년부터 1965년까지 고려신학교 예과에서 독립한, 이후 고신대학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칼빈학원을 맡아 교장과 교수로 사역하였다. 한 목사는 일본고베중앙신학교에서 유학하면서 미국남장로교 선교사였던 풀턴(Samuel P. Fulton, 1938)의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유학을 시작한 1935년부터 첫 두 해 동안은 칼빈주의를 싫어하였지만, 곧 칼빈주의를 신봉하기 시작하였다. 풀턴의 칼빈주의는 웨스트민스터신조에 기초한 장로교적 개혁신학 전통을 말한다. 그래서 고려신학교 설립취지서에 나오는 문화운동인 기독교대학 언급은 한명동 목사가 기여한 바라고 추정할 수 있다. 박윤선 목사가 기독교대학교에 대하여 언급하거나 어떤 열망을 갖고 있었다는 증언이나 기록은 없다. 만약 박 목사가 유일한 작성자라면, 그가 유학하였던 화란 자유대학교도 언급되었을 것이다.

박윤선, 한명동 목사가 말하는 칼빈주의와 개혁신학은 한 편으로는 장로교 전통이요 다른 편으로는 화란 전통이다. 이근삼 박사는 이 두 전통을 연결한다. 고신교회는 1969년에 웨스트민스터고백서와 대교리문답서를 채택한다. 이때는 화란개혁교회와 자매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그 교회의 요청으로 이것들을 채택하였다고 볼 수 있으니, 그때부터 화란교회와 그 개혁신학의 영향이 고신교회에 영향을 미친다. 더욱이 암남동 교사를 신축할 때 화란개혁교회가 건축비의 절반을 모금하였고, 고려신학교 출신 교수 요원들을 받아 교육시킴으로 화란개혁교회와 그 신학의 영향은 1970년대 이후부터 고신교회 안에서 더욱 뚜렷하였다.

그렇다면 화란개혁신학이 고신교회의 내면에까지 영향을 미쳤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형식적으로 화란교회를 따라 굳이 시편을 부르거나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를 가르치거나 설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요리문답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이런 전통을 따라 웨스트민스터소교리문답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전통이 그 전과 후에도 고신교회 안에 정착하지는 않았다. 한 동안 SFC(학생신앙운동)가 이런 전통을 지킨 적은 있지만, 고신교회 안에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을 대하는 태도는 화란개혁교회의 그것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현 고신교회 안에서 신조에 있어서 개혁신학을 따르는 교회는 많지 않다.

결과적으로 고신교회 안에서 칼빈주의와 개혁신학은 거론되고는 있지만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한국교회 안에서 1970년대부터 강하게 불었던 교회성장운동의 여파도 이런 분위기 형성에 기여하였다. 이 운동을 여러 면에서 평가할 수 있겠지만, 교회 성장과는 거리가 멀다는 평가를 받은 화란 개혁신학은 영향을 미치면서 동시에 경원시 당하기 시작하였다. 한국교회의 성장이 멈추고 교인의 수가 감소하고 있는 현재에서 보자면, 이 현상의 책임은 교회성장론자의 신학이나 입장에 있지 개혁신학이 교회 성장에 어떤 부정적 영향이라도 미쳤다는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 화란교회가 출산에 의한 수적 성장만 한다고 비판을 받던 시절을 돌아보면, 격세지감이 든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세계적으로도 저조한 출산율로 인하여 수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한국교회도 역시 급격한 교회 공동화를 피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 앞에 서있다. 언약을 가르치고 언약백성의 사명을 기독교교육과 문화적 사명으로 확장시켜 가르치지 못한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고신교회는 칼빈주의와 개혁신학을 신봉하는 독특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여느 교회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현재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출처]

목사 개인의 성향과 그들의 목회 현장을 보면 일부 방언기도에 긍적적이거나 통성 기도[23]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정통적 칼빈주의(Orthodox Calvinism) 전통과는 확실하게 거리가 있다.[24] 하지만 유럽식 칼빈주의의 핵심 교파였던 네덜란드 개혁교회 해방파와 과거 밀접한 교류를 통해 신학적으로많은 영향을 받은것을 무시 할 수 없다. 그러나 우호 관계인 화란개혁교회의 여성의 목사 안수 허용 문제로 현재는 관계가 소원하다. 더욱이 ICRC의 회원권 박탈로 화란개혁교회(해방파)와의 교류가 중단되었다.

고신의 이러한 특성은 1990년대 후반 들어서야 부분적으로 현대적 악기를 도입하기 시작한 점이나 성경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여성 목사 금지 규정이 여전히 남아있는 점 등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기본적으로 예배 시간에는 피아노나 오르간, 기타 클래식 악기 정도만 사용한다. 신디사이저나 클래식 기타, 일렉트릭 기타 등을 사용하는 것은 예배 초반부 찬양 시간이나 정식 예배 순서가 끝난 후 마무리 광고 시간 등으로 한정된다.

그나마 우상숭배가 된다는 이유로 총회헌법에 강단 십자가 설치 금지를 명시한 예장합동과 달리, 예배당 내 종교적 상징물을 최소화하되 비치할 경우에는 그 신앙적 의미를 명확히 하도록 권하고 있으며, 십자가 설치를 총회헌법 차원에서 금지하고 있지는 않다. 이는 통합-합동 분열 이전의 예장 총회가 1957년 강단 십자가 부착 금지를 가결하였고,[25] 예장고신이 분리되어 나온 것은 해당 조항 제정 이전인 1952년이기 때문이다. 다만, 태극기, 성조기 등의 국가주의, 민족주의적 상징물을 강단에 비치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행위로 간주하여 엄격히 금하고 있다. 강단 십자가에 대한 예장고신의 입장은 예장고신 기관지 기독교보의 기사를 참조. [26]

그런 의미에서 고신 교단과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교단은 한국기독교장로회대한성공회. 다만, 정치 사회적 관점은 마냥 대척점이라 보기는 힘들다. 고신 교단은 기장 교단처럼 공식적인 정치적 성향이 있는 교단은 아니지만. 참고로 기장 및 성공회와 정치 사회적 관점까지 대척점인 교단은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과 파생교단들이다. 신학적인 보수성은 고신보다 버금가지만.

한편 예장합동과는 WCC를 거부하는 신학적인 유사성과 합동 교단을 세운 박형룡 목사가 신사참배에 순응하기보다 그나마 일본으로 도피하여 대항한 전력이 있다는 점으로 한때 통합을 시도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접점이 있으나 통합 후 합동측이 중심이 된 총회가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을 경성대학교 신학대학으로 대체하려고 했다. 고신측 입장에선 적대적 인수합병과 다름없는 행위였다. 결국 통합 3년만에 위기를 맞고 고소 사태가 발생하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27] 하지만 아예 의미없던 일은 아니다. 합동에서 이때 잔류한 출옥성도파를 좀 흡수하면서 총신대학교에 주기철관을 만드는 등 교단 내에서 아주 약간이나마 출옥성도파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다.

3.2. 신사참배 거부 및 타 교단과의 관계


한국 개신교계가 가지고 있는 태생적인 약점 중 하나인 신사참배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장로회 교단 중 하나이다. 고신도 이것을 알고, 교단 소속 선교원이나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자랑스럽게 가르친다. 혹자는 신사참배에 반대한 모든 개신교 교단을 출옥성도파라고 묶어서 부른다고 보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출옥성도파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옥살이를 하다가 나온 장로회 목회자와 신자를 통칭한다. 김치선, 박윤선, 박형룡처럼 미국이나 일본으로 도피하여 신사참배 박해를 피한 장로회 목회자도 있었고, 성결교회, 침례회는 교단 자체가 해산당해서 신사참배 문제로 파벌이 갈리지 않아서 굳이 옥살이를 한 목회자들을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앙의 순수성 측면에서 자부심이 매우 높다. 그러나 고신대학교를 제외한 모든 신학교의 교회역사학에서 신사참배를 언급하지만 고신 교단에 대한 교육은 전혀 하지 않았으며, 일선 교회에서도 고신 교단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타 교단에서 철저하게 출옥성도 관련 교육을 기피하고 관련 자료를 왜곡 및 은폐[28]했기 때문에 고신측에서 자체적으로 자료를 정리하고 홍보하는 역사편찬위원회를 따로 꾸려야 했을 정도다. 그나마도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고신이라서 가능한 일이고, 다른 출옥성도 위주 신사참배 반대 교단이었던 순장이나 재건의 경우는 아예 엄두조차 못 낸다. 한편 비출옥성도파 위주의 신사참배 반대 교단의 신학교의 경우에는 순장, 재건은 언급하면서 고신과 고신 계열 교단은 잘 언급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후술하겠지만 고신이 비출옥성도파 신사참배 반대 교단에게도 적대적으로 대한 탓에 악연이 깊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비기독교인은 물론이고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신사참배하지 않은 개신교 교단은 없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매우 많은데, 이는 엄밀히 말하면 절반만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남아 있던 교단 중 신사참배에 결의하지 않은 교단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나, 당장 한국 최초의 신학교가 있었던 연희전문학교(現 연세대학교의 전신)가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 선교사들이 강제출국됨과 동시에 일제에게 몰수 후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개칭당해 총독부에서 관리되었었고, 침례회(그 전신인 동아기독교)나 성결교회는 교단이 해산되어서 없어졌고, 신사참배하지 않은 장로회 교인들이 모여 만들어진 교단들 중 하나가 고신이기 때문.

한국 개신교계에서 출옥성도파와 비출옥성도파는 서로를 이단시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꽤 좋지 않은 사이였고, 개교회, 목사, 신자들의 개별적 교류라면 몰라도 교단 차원에서는 최소한의 교류만 하면서 서로 껄끄러워했었다. 출옥성도파를 내쫒은 원죄가 있는 기장과 예장통합, 소송을 겪어가며 고신과 갈라진 예장합동이 다른 개신교 교단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교단 신학이 중시되던 1990년대까지는 고신 측에서도 '합신', '대신' 같은 타 개혁주의 장로회 교단에게 합동과 친밀한 비출옥성도파라는 이유로 적대적으로 비판했던 역사가 있어서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합신 교단을 세운 박윤선 목사는 비록 비출옥성도파였지만 고신대학교의 교수로 활동했고 출옥성도파를 이끌었다. 하지만 박형룡과 함께 고신과 합동의 통합을 추진했고 합동과 고신이 분리하자 합동에 잔류한다. 결국 합동에서도 탈퇴해 합신을 세웠다. 또 대신 교단을 세운 김치선 목사는 장로회 정통 신학과 민족주의적인 설교를 했던 독립운동가였지만 일본 유학파라서 일본에서 선교를 하다가 광복 직전에 국내에 입국한 비출옥성도파였다. 특히 박형룡 목사가 일본으로 피난 왔을 때 거처까지 마련해줬을 정도로 친밀했다. 브니엘을 제외한 파생 교단들도 내부 갈등으로 분가한 사이라서 당연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교단이 없어진 성결교회, 침례회는 신학적으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교류가 매우 뜸해졌다.

그러나 상술한 역사는 교단 신학이 중시되던 1990년대까지의 이야기이고, 2000년대부터는 복음주의가 강조되어 교단 신학에 너무 골몰하여 서로 갈등하는 건 좋지 않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요즘은 고신 측에서도, 비 고신측에서도 과거의 일은 다 잊고 서로 교류하자는 분위기가 강하다. 게다가 고신대학교는 타 교단 신학교와의 교류에 꾸준히 노력했으며, 특히 심리상담 쪽에서 타 교단 신학교와의 교류가 있는 학술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비 고신 측 교회에서도 고신대학교 신학생이 전도사로 수련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고 그 반대도 볼 수 있다. 사실 편목 시험으로 교단을 옮긴 사례가 잘 없을 뿐, 웬만한 개신교 교단은 고신 출신 목사에게 편목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자격도 준다. 고려신학대학원은 목사 양성 과정이 꽤 빡빡한 편이라서 다른 개신교 교단에서도 좋은 유망주 팜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래서 고신에서도 비출옥성도파 교단들에 대한 감정도 많이 누그러졌다. 하지만 교회현장과 신학계에서의 교류가 조금 활발해졌을 뿐, 과거의 역사를 들춰내봤자 서로에게 좋을게 전혀 없기에 여전히 함구하는 편이다.

2020년대에는 타교단의 일부 대형교회와 교회사학계를 필두로 선배 목회자들의 신사참배와 고신 교단에 대한 핍박에 대해서 사죄하고 화해하자는 논의가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그 영향으로 타 교단 신학교에서도 고신 교단에 대한 교육을 시작했다. 근현대 한국장로교교회사를 가르칠 때 통합, 합동, 기장과 동일한 비중으로 다룬다. 물론 여전히 고신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이에 대해서 비판하는 목사나 신학자가 없는 것은 아닌데, 비주류 교단이긴 하지만 대표적으로 전광훈 목사가 있다.[29]

현재에는 대신, 합신과는 총회장들끼리 모여서 합동 수련회를 다녀올만큼 가까운 사이이다.

2024년 현재 순장교단과 통합을 위한 교류를 진행중에 있다.

4. 노회 목록[30]

총 35개 노회.부산, 경남에서의 교세가 높음을 알 수 있다. 해당 노회 목록은 2017년 제67회 총회에서 구역 조정 및 명칭 변경이 이루어진 것이다.@

5. 자매교류 기관[60]

  • 교회적 관계 (교회 교류)

    • [해외 고신총회]
      1. 예수교장로회 재미 고신총회
        2.예수교장로회 대양주 고신총회
        3.예수교장로회 유럽 고신총회

      [외국교단]
      1. 캐나다개혁교회 The Canadian & America Reformed Churches
        2.호주자유개혁교회 The Free Reformed Churches of Australia
        3.남아개혁교회 The Reformed Churches of South Africa
        4.미국장로교회 PCA : The 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
        5.미국정통장로교회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 선교적관계 (선교 교류)

    • [국내]
      1.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2.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해외]
      1. 화란개혁교회(자유파) The Reformed Churches in Netherlands (Liberated)
        2.일본기독개혁파교회 The Reformed Curch in Japan
        3.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 KAPC: Korean American Presbyterian Church
        4.프랑스개혁파교회 UNEPREF: Union Nationale des Églises Protestantes Réformées Évangéliques de France
        5.재일대한기독교회 KJPC: The Korean Church in Japan
        6.일본동맹교단
        7.인니복음장로교단(GPII)
        8.북동부인도개혁파교회 RPCNEI. The REformed Presbyterian Church, North East India
        9.중국빌라델비아교회 比拉德比亚教会
[한국 교회연합기관]
1.한국교회총연합
2.한국장로교총연합회
[해외 교회연합기관]

6. 기타

6.1. 산하 학교

  •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고려학원 - 1967년 설립된 사립 학교법인이다. 부산광역시 서구에 위치해 있다.

    • 고신대학교, 고신대학교 신학대학, 고려신학대학원 문서 참조.
      고신대학교는 1946년 설립된 고려신학교를 모태로 둔다. 1970년 고신대학으로 개편, 1993년 부터 현재의 교명을 사용하고 있다.
      신학대학원은 서류상으로 고신대학교에 소속해있지만, "고려신학대학원"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경영하고 있다.
  • 창신대학교 - 예장 고신 출신 목사와 성도들에 의해 설립되었지만, 부영그룹에게 경영권을 넘겼다.
  • 계약신학대학원대학교 문서 참조. 현재 폐교 상태.

6.2. 출옥성도파 교단

해당 교단들은 고신처럼 대한예수교장로회 에서 쫒겨난 출옥성도파가 세운 교단이며 고신과 비슷한 역사를 겪었다. 고신의 국내 자매교단이라고 봐도 된다. 고신보다 규모가 작고 더 보수적이며 더욱 힘든 역사를 겪어서 폐쇄적이다. 물론 이러한 교단 신학은 1990년대까지 엄격하게 지켜졌고, 2000년대부터는 복음주의가 강조되면서 점점 고신과의 신학적인 차이가 무너지고 있다. 후술할 내용도 각 교단이 각자의 신학적 스펙트럼을 빡빡하게 지킨다기보다 각 교단의 이해관계가 대충 이렇다고 보면 된다.
  • 대한예수교장로회(순장) - 출옥성도파이지만 평양신학교 출신도, 고려신학교 출신도 아니라서 고신에 합류하지 않았다. 한때 예장재건과도 손을 잡고 대한예수교 재건교회로 출범하기도 했지만 신학적인 성향 차이 등으로 인해 결국 예장재건과 예수교 순장로회로 갈라져 각자의 길을 갔다. 신학적으로는 정통 보수 성향이지만 타 교단에 대해 무작정 과격하지는 않은 온건 보수에 가깝다. 산하 신학교인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문서가 있으나 교단 문서는 없다. 현재 고신과 함께 교단의 통합을 논의 중에 있다.
  • 대한예수교장로회(재건) - 출옥성도파이지만 출옥성도파를 내쳐버린 대한예수교장로회(당시의 통합, 합동, 기장)의 행보에 매우 크게 실망해서 고신에 합류하지 않을 정도로 기성교회를 부정하고 교회의 순수성 회복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너무 배타적인 특성과 매우 과격한 언행 때문에 고신보다 훨씬 심하게 핍박당했고 다른 출옥성도파들도 접근하기 어려웠기에 교세가 커질 수 없었다. 현재는 기성교회에 대한 비판의 수위를 꽤 낮추고 한국 개신교 신앙의 순수성 회복에 집중한다. 그래서 가끔씩 초교파 운동에도 동참하고 있다. 산하 신학교인 재건총회신학교 문서는 없다.
  •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복구) - 기존 예장 교단의 회개 운동을 주도했던 온건파 출옥성도파인 이기선목사 및 이북5도연합회 교회들이 예수교장로회의 분열과정에서 각 장로교단에 흩어져 소속을 유지하면서, 각 교단의 독노회가 되었다.
  •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 박윤선 목사는 박형룡 목사의 제자였고, 신사참배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도피한 비출옥성도파였지만 고신대학교의 교수로 활동했고, 예장고신의 초대 총회장으로써 출옥성도파를 이끌었으며 예장합동과의 통합을 추진했다. 결국 고신과 합동이 분열하자 예장합동에 잔류하였다. 그리고 총신대학교와 예장합동의 내홍에 실망하여 예장합신을 세운다. 사실 박윤선 목사의 제자와 합동신학교 출신으로 구성되기에 출옥성도파 계열 교단이라기보다 교단의 역사가 출옥성도파와 밀접하다고 봐야 한다. 산하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를 두고 있다.
  •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과 파생교단 : 한편 박윤선 목사와 함께 합동에 잔류한 출옥성도파들은 대부분 합신으로 이동하지 않고 상당수가 합동에 잔류하였고 나머지는 합동 총회와 갈등하여 합동 계열 교단에 합류하였다. 다만 합동은 비출옥성도파 위주의 평양신학교 출신 보수주의 성향 목사들로 이루어져있고, 유독 분열과 내홍을 심하게 겪었고 소송을 통해 고신과 분가한 역사가 있어서, 현재의 합동 및 합동 계열 교단 내부의 출옥성도파들은 합신과는 교류하지만 고신과 교류하기는 꺼린다. 산하 신학교는 문서를 참조하라.

6.3. 파생 교단

  • 대한예수교장로회(계신) - 1960년대 세속법정(고신측 표현으로는 '불신법정')에서 교단 내부 문제를 판단하는 것에 반발해 갈라져 나간 교단이다. 인준 신학교인 계약신학대학원대학교 있으나 고신교단에 학교 운영권을 넘겼다가 현재는 폐교된 상태.
  •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 - 1970년대 고려학원 이사회 문제로 발생한 고소 문제로 갈라지게 된 교단이다. 세상법정에 소송을 반대한 반고소운동이 당시 교단 내에 있었는데, 이때 반고소 경기노회와 경남(법통)노회가 분리되어 1976년 반고소 총회가 구성된다. 그러나 주도권 다툼으로 이들은 곧 결별하였고 경남(법통)노회 120여개 교회는 1982년 고신으로 환원한다. 이후 반고소운동의 중심에 있던 인물은 아니었지만 반고소 고려는 경향교회 석원태 목사를 중심으로 개편한다. 1984년 반고소 고려신학교 졸업생들이 석원태 목사가 고신과 합동한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조직적으로 고려교단을 이탈하여 고신교단에 가입하게 된다. 그러나 석원태 목사의 지도력으로 교단은 계속하여 성장한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교단 내부 목회자들 사이에서 석원태 목사 1인 중심의 교단운영에 따른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개혁이 도무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개혁세력은 2001년 고신과 부분 합동을 추진한다. 고려교단은 이 분열로 인하여 교세가 상당히 위축된다. 분리하여 나간 교회들 중 모교회 경향교회를 제외하고 나름 규모 있는 교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고신과 합동한 교회들은 고신교단 내에서 독노회로서 서경노회[61]를 구성하였다. 이후 2013년 말 고려교단은 경향교회 석원태 목사의 개인 문제로 또 한번 내홍을 겪는다. 이 일로 고려총회는 석원태 목사를 징계한다. 이 일로 고려교단은 또 다시 분열하는데 석원태 목사를 지지하는 쪽과 개혁을 원하는 쪽으로 갈라진 것이다. 이때 석원태 목사를 지지하던 교회들과 경향교회는 교단을 이탈하여 개혁교려 교단을 세운다. (후에 고려로 다시 명칭변경) 이후 고려총회는 2015년 9월 16일 총회 때 고신과 통합한다. 통합하기 전 이탈한 경향교회 중심의 고려(개혁고려->고려)는 2018년 내부문제로 제신노회라는 독노회를 구성하고 있다. 제신노회는 산하 신학교로 제네바신학대학원대학교를 운영한다.
  • 대한예수교장로회(브니엘) - 교단 산하 미션스쿨이었던 브니엘고등학교, 브니엘여자고등학교, 브니엘예술고등학교, 브니엘중학교 등과 브니엘학원 사태 문서는 있으나 교단 문서는 없다. 중아선교회 출신 박성기 박사가 세운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 브니엘교회를 중심으로 그 지교회들이 1986년 분가한 교단으로 다른 고신계열 파생교단들과는 달리 1980년대 후반에 알아서 원만하게 분가해간 교단이다 보니, 그나마 고신계열 파생 교단 중에서는 현재도 고신 교단과 관계가 좋은 편에 속하며 교단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교류도 하고 있다.
  • 예수교장로회한국총공회
  • 한국예수교장로회 - 예장고신 소속이었던 하승무 목사가 2012년 "한국 장로교 교단 최초로 역사적 정통 개혁교회 이념과 존 녹스의 스코틀랜드 장로회 전통의 역사적 계승"을 표방하면서 설립한 교단. 초기 명칭은 '한국정통장로교회' 였고 2017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하였다. 역시 별다른 마찰없이 원만하게 분가한 교단이라 지금도 고신과는 지속적인 교류가 유지되고 있다. 산하 신학교인 한국장로회신학교 문서는 없다.

6.4. 학생신앙운동

학생신앙운동 문서 참고.

6.5. 기타

6.5.1. 비대면 예배 반대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예배에 일찍부터 적극적으로 반대해 여러 차례 공권력의 개입을 받은 부산 세계로교회가 이 교단 소속으로, 교단에서도 2021년 9월 총회에서 비대면예배를 비성경적으로 규정해 공식적으로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정부의 비대면 예배 강제를 반대함을 분명히 했다.[62]

6.5.2. 1027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 관련

10.27 한국교회 연합예배 10월 27일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기도회[63]에 제74회 총회에서 참여하기로 결의하면서 교단 내부의 목회자들과 성도들 사이에 일부 혼란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라고 하지만 대규모 군중을 동원하여 어떤 한 사안에 대하여 의견을 개진하는 시위 혹은 집회의 모습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후술할 여론 논란으로 총회의 결의사항이지만 일부에서는 신앙양심상 참여하지 않겠다고 의사를 표명하는 이도 있다. 좋은 취지를 가지고 있지만 방법적인 측면에서 의견이 다른 상황이다.
  • 논의쟁점
    - 주일 성수와 공예배 문제: 고신총회 헌법의 예배 부분에 따르면 주일에는 예배와 안식에 방해되는 행위를 금하고, 세상 염려와 세속적 행위를 삼가야 한다고 한다. 개신교에서 주일은 일요일로, 이 날을 신자들은 거룩하게 지키며 공예배를 드린다. 2024년 10월 27일은 주일이다. 주일 성수와 공예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지던 것이 고신정신이라 하던데 이에 모순되는 부분이다. 특히 코로나 기간 대면예배를 금지하는 행정명령에 헌법소원까지 하였던 사례가 있기 때문에 아이러니한 부분이 있다. 꼭 주일에 해야만 하는가이다.
    - 신앙고백 문제 :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예배와 질서, 교리로 채택하여 신앙고백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1장에서 대회와 공회의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데 이에 모순되는 결정은 아닌 것인지 논란이 있다. 31장에 따르면 교회는 비상시국에 겸허한 청원이나 국가 공직자의 요청을 받아 양심상 행하는 조언 외에는 국가와 연관된 시민적 사안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고백한다.
    - 이전 총회의 결의사항과의 저촉 문제 : 2021년 71회 총회는 전광훈씨에 대하여 이단성이 있으므로 교류와 참여를 금지하는 결의를 하였다. 1027 연합예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광훈[64] 씨와 교류하며 함께 할 것에 대한 의지를 표명했다. [65] 총회 떄 이와 관련하여 총대의 질의가 있었다. 이후 주최측 사무총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전광훈 측과의 연대설에 대하여 강하게 부인했다. [66]


    이외에도 여러 논란이 되고 있는 사항이 많다. [67]
그러나 찬성하는 측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있더라도, 차별금지법 제정 및 동성애 합법화를 위한 첫걸음일지도 모르는 대법원의 결정에 지금이야말로 목소리를 높여야 할때이니 참여하여 힘을 보태야한다고 말한다.


[1] 진주성광교회 담임목사[2] 남서울교회 담임목사[3] 울산한빛교회 장로[4] 국제개혁교회협의회: International Counsel of Reformed Churches[5] 미국장로교 (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 PCA), 미국정통장로교회[6] 캐나다개혁교회 (The Canadian Reformed Churches)[7] 일본개혁파교회 RCJ[8] 대만개혁종장로회[9] 남아프리카 자유개혁교회(GKSA)[10] 호주자유개혁교회[11] 1948년 12월 취임[12] 취지 : 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본 장로회 정신을 떠나서 이교파적으로 흐르므로 이를 바로 잡아 참된 예수교장로회 총회를 계승하기 위하여 총노회를 조직한다. 목적 : 정통적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정신을 지지하는 전국교회를 규합하여 통합하며 개혁주의 신앙 운동을하며, 법통총회를 장차 계승키로 한다.[13] 총노회발회식선포(1)https://www.kosi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273[14] 총노회발회식선포문(2)https://www.kosi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362[15] 당시 경동노회도 반고소측이었으나 교단을 이탈하지 않고 내부적으로 해결하기를 원해 남았다.[16] 아래 파생교단 부분 참고[17] 고려교단의 미주노회는 재미한인예수장로회 고신총회와 통합하였다.[18] 고신총회와 통합 전 고려총회를 이탈한 교회들은 독자적으로 제신노회라는 이름의 독노회를 구성하고 있다.[19] 막내아들 주광조 장로는 예장통합교단 소속 영락교회 은퇴장로,출처 손자인 주승중 목사(셋째아들 주영해 장로의 차남)는 예장통합 소속 주안장로교회 담임목사이다.이 출처에서 주승중 목사가 말하는 숙부가 바로 앞서 언급한 주광조 장로이다.[20] 신사참배 거부를 위해 자진폐교한 적 있는 평양의 숭실대학교(당시 숭실학당)는 광복 후 1954년 서울에서 영락교회의 건물을 빌려 재건되어 현재 예장통합 소속이다.[21] 고신총회회관은 부산이 아닌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위치한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뒤편 삼호가든 사거리 인근에 있는데 고신총회 소속인 서울남교회가 총회회관 건물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출처] 유해무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고려신학대학원 개교 70주년 기념 학술대회(2016년 10월 27) 발표 논문. "Ecclesia semper reformanda: 고신교회와 신학 70년의 회고와 전망[23]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 나오는 '주여' 삼창으로 시작해 시끄럽게 소리 치면서 기도하는 게 대표적.[24] 아예 이것과 관련해 개신교 자체적으로 분석한 칼럼이 있을 정도다.[25] 분열 이후 예장통합은 1980년대 들어와 이 조항을 삭제하였다.[26] 예를 들면 고신 교단 소속인 대전 한밭교회충주양문교회는 본당 강단에 십자가를 설치하고 있다. 여기보다 더욱 보수적인 교단이 있는데 바로 예수교장로회한국총공회(예장총공회)다.[27] 이 영향으로 현재까지도 예장합동과 예장고신은 비슷한 신학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껄끄러운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 물론 고신대를 흡수하려 했던 합동의 수뇌부들 상당수가 그나마 소극적 저항이라도 했던 박형룡 박사와는 달리 신사참배에 순응한 김길창 같은 자들이라는 점도 있지만.[28] 아예 '출옥 성소들의 광적인 활동과 테러 행위'가 있었다며 날조된 교육을 하는 곳들도 있을 정도이며, 엔하위키 시절부터 근본주의/기독교/개신교 문서에 '광적인 활동'에 대한 서술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왔다.[29] 참고로 고신은 가장 먼저 전광훈을 이단으로 지정한 교단이라서 전광훈도 고신을 매우 싫어한다.[30] 2021년 기준. 아래 각주의 지역은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음.[31] 은평, 서대문, 마포, 성북, 종로, 중구, 용산, 노원, 도봉, 강북[32] 강서, 양천, 구로, 영등포, 동작, 관악, 금천[33] 동대문, 성동, 중랑, 광진, 서초, 강남, 송파, 강동[34] 안양, 과천, 군포, 의왕, 광명, 시흥, 안산, 수원[35] 양평, 하남, 광주, 성남, 용인, 오산, 화성, 여주, 이천, 안성, 평택[36] 김포, 부천[37] 고양, 파주, 양주, 의정부, 동두천, 연천, 포천, 구리, 남양주, 가평[38] 부산광역시 사하, 서구, 중구, 동구, 영도, 강서 가덕도[39] 부산광역시 연제 서부, 동래, 금정, 해운대 반송, 기장 철마, 경상남도 양산(물금 제외)[40] 부산광역시 부산진 동부, 남구, 수영 남부, 연제 남부[41] 부산광역시 부산진 서부, 사상, 북구, 경상남도 양산 물금[42] 부산광역시 기장(철마 제외), 해운대(반송 제외), 수영 북부, 연제 동부, 동래 동남부[43] 경상남도 창원 의창, 성산, 진해, 김해(진영, 진례, 한림)[44] 경상남도 진주, 사천, 하동, 남해, 의령[45] 경상남도 김해(동지역, 주촌, 대동, 상동, 생림), 부산광역시 강서(가덕도 제외)[46] 경상남도 마산 회원, 함안[47] 경상남도 마산 합포[48] 경상남도 창녕, 밀양[49] 경상남도 함양, 거창, 산청, 합천[50] 경상남도 고성, 통영, 거제[51] 중구, 북구, 동구[52] 남구, 울주[53] 대구광역시 동구, 중구, 남구, 수성, 달성, 경상북도 고령[54] 대구광역시 북구, 서구, 달서, 달성 다사, 경상북도 성주[55] 대구광역시 군위, 경상북도 봉화, 영주, 예천, 안동, 의성, 경산, 청도[56] 경상북도 울진, 영덕, 청송, 포항, 경주, 영천, 울릉[57] 경상북도 문경, 상주, 김천, 구미, 칠곡[58] 전남동부노회 지역 제외한 나머지 지역[59] 전라남도 순천, 광양, 여수, 구례, 보성[60] 출처[61] 서경노회라는 이름으로 쭉 존재하다가 고려교단과 고신교단 통합 후 2018년 노회 개편 때 이르러 지역노회에 가입한다.[62] 개혁정론 2021년 9월 30일 기사 참고.[63] https://rebuild-kc.com/[64] 사랑제일교회[65]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63413[66] https://www.nocutnews.co.kr/news/6233106?utm_source=naver&utm_medium=article&utm_campaign=20241024085004[67] http://reformedjr.com/board05_03/1842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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