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6-23 21:10:26

오기수

파일:오기수.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오인수(吳麟洙)·오훈(吳薰)·오육파(吳陸波)
오능파(吳陵波)·오영훈(吳永薰)·오일영(吳一英)
남파(湳波)
본관 해주 오씨
출생 1892년 9월 25일
경상도 의성현 북부면 후죽동
(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후죽리)[1]
사망 1959년 2월 20일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 신천동
(현 대구광역시 동구 신천동)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112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3. 여담4. 선거 이력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정치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오기수는 1892년 9월 25일 경상도 의성현 북부면 후죽동(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후죽리)의 양반가에서 오학순(吳鶴淳)[2]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2년 12월 경성관립공업전습소를 졸업하고 1911년 1월 18일부터# 1913년까지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측량과 기수(技手), 1914년에 제도과 기수로 근무하다가, 그해 7월 28일 사직했다. 한때 의성경찰서 순사보로 근무하기도 했으며, 의성군에서 형평사(衡平社)를 조직하여 형평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19년 6월경 그는 의성군 의성면에서 마춘성(馬春成)에게 중국 만주로 가서 만주 및 상하이의 조선인들과 연락하여 곧 열릴 파리 강화 회의에 조선독립을 청원하여 참가국의 승인을 얻을 계획을 말하여 이에 가담할 것을 권유하여 그의 허락을 얻어냈다. 그후 기수는 실제로 만주로 건너가 조선독립단에 가입한 후 귀향하였다. 그러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그해 11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형집행정지로 출옥한 후 다시 독립운동을 계속하여 1920년 3월 19일에는 경상북도 영천군 영천면 완산동(현 영천시 완산동) 소재 영천역 앞에서 양한위와 만나 경기도 경성부에서 수집한 『독립신문』과 독립에 관한 경고문을 대구시내에 배포하였다. 또한 그해 10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양한위·권태일(權泰鎰) 등과 독립운동 자금 8천여원을 허병률로 하여금 상해로 송금하게 하였다. 그 후 그는 일제 관서를 폭파하고 대구 내의 친일 한인 관리들을 처단하기 위해 폭탄 입수에 힘쓰던 중 경상북도 경찰부에 체포되었고 1920년 7월 24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그해 8월 2일 앞선 마춘성 관련 사건에 대해선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받았으나, 독립신문 배포 및 군자금 모금 건에 대해서는 9월 27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제령 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인 1923년 4월 10일 오진문 등과 함께 북풍회(北風會)와 연결된 사회 운동 단체로서의 정의사(正義社)를 조직하였다. 1924년 1월 만주로 건너가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에 가입하였고, 1925년 11월 5일 한족노동당 중앙위원 및 교육선전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2월 상하이로 갔다가 그해 6월 모스크바 공산 대학 속성과에 입학하여 1929년 5월 졸업하였다. 그해 6월 만주로 돌아왔다가 8월 5일경 창춘경찰서 고등계에 검거되어 1930년 1월 1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귀향하여 의성군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하였다. 1932년 10월 10일 의성면 도서동(현 의성읍 도서리)에 있는 김규복의 양돈장에서 오병수·김규복 등과 비밀리에 만나 사회주의 보급을 위한 지도 기관으로서 의성적색독서회(義城赤色讀書會)를 조직하였고, 그 부서를 지도 겸 조직, 청년, 농민 등 3부로 나눈 후 그는 이 기관의 지도 겸 조직부 책임자를 맡았다.

이어 10월 28일 같은 곳에서 그는 동지인 김진봉(金鎭鳳) 등과 비밀리에 회합을 가지면서 의성체육회에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고 독서회원인 김두칠(金斗七)과 문소준(文小俊)으로 하여금 의성노동친목계의 조직을 맡게 하면서 의성 지역 각 관공서 경비원 및 지방의 근로자, 청소년 등을 모아 의성 적색 독서회의 지도하에 두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체포되어 오기수는 1933년 12월 4일 검사국에 송치되었고, 1934년 5월 2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예심이 종결되어 유죄로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그해 10월 26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미결 구류 180일 산입)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3]

1935년 7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1933년 의성공산당사건에 대해 경찰의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이 드러나 무죄를 선고받고 출옥하였다.##2

출옥 후에는 고향 의성군에서 신병을 치료하며 조용히 지내다가 해방을 맞았다.#

8.15 광복 후에는 우익으로 전향하여 1945년 11월 5일 미군정청에 의해 경상북도 고문에 선임되었으며 12월 20일 경상북도고문회 서기에 선출되었다. 1946년 3월 9일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상북도지부에 가담하였다.

1949년 대구부 동인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에서 신흥공업주식회사를 경영하기도 했다.#

1950년 1월 31일 대한청년단 경상북도단부 단장에 출마하였으나 장택상에 밀려 낙선하였지만, 그해 4월 13일에는 경상북도단부 단장에 만장일치로 추대되었다. 그해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청년당 후보로 경상북도 의성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대한국민당 박영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전시대책위원회 위원, 구국총력도연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 만촌동(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에 거주하다가 신천동으로 이주한 후 1959년 2월 20일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89년 8월 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었다.

3. 여담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제8선거구(의성군 갑)) 대한청년당 3,995표 (11.13%) 낙선 (5위)


[1] #[4][2] 일명 오병소(吳秉韶). 1924년 3월 17일, 자기 소유 토지나 일정한 직업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대서업(代書業)으로 조금씩 저축한 돈 100원을 경비곤란을 겪던 사립 의성학원에 의연금으로 기부한 바 있다.[3] 이 사이 구류갱신결정이 세 차례에 걸쳐 이뤄지기도 했다.1934.3.31934.6.11934.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