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01 16:16:26

오카베 도시야

파일:육상막료장기.png
육상자위대 육상막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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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34대 육상막료장
岡部 俊哉
오카베 도시야 | Okabe Toshiya
파일:오카베 도시야.jpg
<colbgcolor=#c0a73f><colcolor=#FFF> 출생 1959년 2월 5일([age(1959-02-05)]세)
후쿠오카현
재임기간 제34대 육상막료장
2016년 7월 1일 ~ 2017년 8월 7일
경력 국가안전보장국 고문
군사 경력
임관 방대 25(육사 37)
복무 육상자위대
1981년 ~ 2017년
병과 보통과
최종 계급 육상막료장 (육상자위대)
최종 보직 육상막료장
주요 보직 북부방면총감
통합막료부장
제6사단장
육상막료감부 교육훈련부장
서부방면총감부 막료부장
제1공정단장
제28보통과연대장

강호동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오카베 도시야는 일본의 자위관이다.

육상자위대의 최선임 장교인 육상막료장을 지냈다. 유력한 통합막료장(합참의장) 후보였으나 남수단에 파견된 자위대의 일지 은폐를 이유로 사임하였다. 당시 방위대신이었던 이나다 도모미도 함께 물러났다.

2. 생애

1959년 후쿠오카에서 태어났다. 1977년 방위대학교 25기(육군사관학교 37기)로 입학했다. 1981년 졸업하여 육상자위대에 입대했고 3등육위로 임관했다. 1984년 제1공정단 부임 직후 이듬해 발생한 일본항공 123편 추락사고의 구조활동에 소대장으로 출동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후 1등육좌(대령) 시절에 육상막료감부 방위부 운용과장, 운용지원/정보부 운용지원과장을 지냈다. 처음 부임받은 부대가 공정보통과군(공수보병부대)이었다. 즉 병과는 보병이다. 대한민국육군사관학교와 비교하면 37기와 동기급이다.[1]

2006년에 육장보로 진급했는데 이는 임관 후에 진급에서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아야 하는 수준.[2]이다. 중앙즉응집단 산하의 공수부대인 제1공정단장을 지냈고 2008년 서부방면대 총감부 막료부장으로 재직했다.[3] 2010년에는 도쿄로 돌아가 육상막료감부 교육훈련부장을 지냈다. 2012년방위대학교 25기(육사 37기, 해사 35기, 공사 29기) 중엔 처음으로 중장급에 진출했다.[4] 최저복무기간인 4년은 금방 채웠지만 선배들의 인사적체로 인해 6년이나 소모된 것으로 추정. 육장 진급 후 제6사단장, 방위대학교 간사[5]를 지내고 2014년 8월 인사 때 통합막료부장으로 이동했다. 2014년 10월통합막료장이와사키 시게루(공자)에서 가와노 가쓰토시(해자)로 변경됨에 따라 러닝메이트가 바뀌었다.[6]

2015년 방대 23기(육사 35기) 출신의 이와타 기요후미육상막료장에서 물러날 것으로 보이는데 기수 차이로 볼 때 오카베 육장이 적절하기는 하다. 현재 방대 24기(육사 36기) 출신의 육상막료장(육군참모총장)은 이소베 고이치 동부방면총감, 다나베 기시로 북부방면총감, 반조 고이치로 서부방면총감(이상 2011년 육장 진급자), 다케우치 세이이치 육상자위대후지학교장, 마쓰오 유키히로 육상자위대연구본부장(2012년 육장 진급자)이 있다. 2012년에 육자대에서 방대25기(육사 37기)가 한 명 밖에 중장 진급을 못한 것은 방대 출신이 아닌 동기급 일반간부후보생 2명이 중장을 달았기 때문이었다. 도쿄대학 출신인 마쓰무라 고로[7]다구치 요시노리[8]가 방대25기의 다른 육자 장교들을 제치고 2012년에 오카베 도시야와 중장을 달았다. 하지만 방대 24기에서 아직 대장이 나오지 않은 관계로 좀 애매하다. 2015년 기준으로 이와타 육막장과 사이토 하루카즈(방대22기) 공막장이 임기가 각각 8월 27일8월 22일에 끝나는데 사이토 공막장의 후임자로는 거의 방대 24기(육사 36기)가 확실해 보인다. 8월 22일에 사이토 공막장의 후임자로 공자대의 방대 24기급[9]이 올라가고 5일 뒤에 육자대의 방대25기급[10]이 올라가는 구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와타의 재임기간이 1년 가까이 연장되어 2016년 7월이 되어서야 방대 25기(육사 37기) 출신의 오카베로 교체되었다. 사이토 공막장 역시 4개월을 더 재임하고 24기인 스기야마 요시유키에게 이임하였다.

오카베 본인은 방면대 총감을 맡아본 적이 없어서 올라가기는 힘들 듯. 이는 동기급인 학사사관(도쿄학예대 출신) 다구치 육장도 마찬가지이다. 학사사관(도쿄대학) 출신인 마쓰무라 고로의 경우 총감 경력은 있으나 1990년대 이후로 OCS한테 육막장 자리를 준 적이 없어서. 그래서 그냥 24기가 진급할 가능성도 있다.

2015년 3월 북부방면대 총감으로 이동했다. 육상막료장으로 올리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결국 2016년 7월 1일에 이와타 육막장의 뒤를 이어 육상막료장으로 영전하였다. 내심 마쓰무라 고로가 간만에 일반간부후보생으로 육막장에 올라가는 것 아닌가 설레발이 있었으나 대장은 방대가 독점하는 자리임을 다시 확인하였다 [11]

2017년 8월 7일에 PKO 문서 은폐 문제로 인해 퇴임했다.

일본 정부에서 가와노 가쓰토시의 다음 통합막료장으로 점찍어둔 인사였단 얘기가 있다.[12] 그 때문에 그가 1년 반에서 2년 정도 육상막료장 자리를 지내고 통합막료장으로 올라갈 수 있는 시점을 맞춰주려고 가와노 통막장의 임기를 계속 연장했다는 설이 있다. 정부에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밀어줬는데도[13] 트롤짓해서 본인이 퇴역[14]하고 방대 27기 출신들에게 예상보다 1년 빨리 대장 진급 기회를 주고 26기들은 1명의 대장도 배출하지 못 하고 나가게 할 가능성을 높게 만들어 주는 등... 여러모로 자위대 역사에서 회자될 인물이다.

3. 여담

2020년에 일본항공 123편 추락사고에 대한 구조 활동 수기를 기고했다. 당시 오카베는 제1공정단에서 근무했다. 사고가 난 곳은 제12사단[15]의 관할 지역이었다. 8월에 정기 인사로 들어온 대원들과 환영회가 있어서 오카베는 저녁에 술을 마셨고, 주둔지 밖의 아파트로 가기 귀찮아서 그냥 부대 막사에서 잤다. 그날 당직을 맡은 36세의 사쿠마 유이치 중사가 항공사고를 인지하고 보고했고, 상부에서 명령이 없어서 일단 취침했다. 이후 새벽에 출동 명령이 내려오면서 제1공정단의 대원들이 헬기에 나눠타고 현장으로 갔다. 헬기에서 레펠 하강 직후에 무언가 부드러운 걸 밟았는데 사람의 귀였다고. 그의 수기를 종합할 때, 공정대원들은 전투 상황을 가정하여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구조 작업을 하기엔 아마추어스러운 면이 많았다고 한다. 경찰들과 협력하려고 교섭했지만, 군마 현경은 현장에 없고 정작 관할 밖인 나가노 현경과 경시청 경찰들만 있고 이들이 비협조적으로 나와서 헬기가 착륙할 장소를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수기 전문

아래는 수기 내용 번역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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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수기 "오스타카 산" 48시간의 지옥

36년 전 8월 12일 일본 항공의 기체가 오스타카 산에 추락해 520명의 희생됐다. 당시 육상자위대 소대장으로 현장에 갔던 오카베 도시야씨가 48시간의 장렬한 구조 활동을 되돌아봤다.

주간 신초 2020 년 8 월 13 · 20 일호

자위대는 8 월에 정기이동이 있어서 12일 주둔지의 대원클럽에서 전입대원의 환영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술도 마셨고 해서 주둔지 밖에 빌린 아파트에 가지 않고 부대 막사에서 자기로 했습니다.

그날 밤 중대 당직간부를 선 사람은 사쿠마 유이치 중사(당시 36세)였습니다. 자기 전에 사쿠마 중사에게 항공기 추락 보고를 받았습니다. (당시)제12사단의 담당 지역에서 난 사고이기에 제1공정 단에 재해 파견 준비 명령이 발표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일단 잤습니다.

그동안 헬기에서 레펠 강하(로프를 사용한 수직 강하)에 의한 신속한 현장 진출의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제1공정단의 차례가 되어, 제12사단에 배속되어 재해 파견이 새벽에 결정되었습니다.

아침 5시 전에 "명령 수령 나팔"이 울리고 영내에 남아 있던 우리는 즉시 출동 준비를 갖추고 집합, 대형 헬기 V-107 여섯 대를 타고 7시 54분, 나라시노에서 출발했습니다. 준비라고 해도 장비는 항상 등에 매고 있었고, 출발 전에 지도와 건빵을 지급받은 정도입니다.

여섯 대의 헬기 중 1번기는 제1공정단 파견부대 지휘관인 보병대장 이하의 "구조부대본부"의 요원이 탔고, 2번기부터 6번기는 각 대원 12명이 탑승했습니다. 12명 중 1명은 의무병이었고, 나는 3번기의 소대장으로 부하 중 10명을 선발했습니다.

소대장인 내 서포트로 평상시 연습에서도 항상 함께 했던 사쿠마 중사를 가장 먼저 지명했습니다. 헬기 조종사들도 어느 때보 다 빠릿하고, 긴장된 공기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현장 "오스타카 능선" 상공에 도착해 하강을 시작했을 때가 8시 48분이었습니다. 우선 1-3번기의 대원이 현장에 내렸고, 4-6번기는 소마가하라 산기슭에서 일단 대기하게 되었습니다. 공수 부대는 지휘관이 "먼저 하강"하는 전통이 있고, 3번기는 내가 리더이기 때문에 먼저 로프를 타고 산 중턱에 내려 섰습니다. 내 다음에 내린 것은 사쿠마 중사입니다.

공수대원에게 레펠 강하는 다반사이지만, 가파른 경사면에 착지한 순간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부츠의 뒷면에 척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있었습니다. "뭐지?"라고 생각 발밑을 봤더니 거기에 있던 건 사람의 "귀"였습니다. 사체를 건드린 것을 알고, 바로 "죄송합니다"라고 마음 속으로 사과했습니다.

강하 후 보병대장이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생존자 구출"과 "지형 정찰"이었습니다. 2번기의 소대와 함께 생존자를 수색하면서 능선을 올라갔습니다. 저와 2번기의 소대장을 중심으로 좌우 각자 5-10 미터 정도의 간격으로 가로로 퍼져 경사면을 올라가기로 되어있었습니다.

"생존자 발견!"

숨막히는 광경이었습니다. 항공기 연료에 불이 붙어 특이한 냄새가 나고, 바위에는 사람의 내장이 붙어 있었습니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면 또 머리칼이 달린 두피가 나무에 매달려있었습니다. 경사가 심해서 나무 줄기를 붙잡고 오르는데, 나무에 손댄 순간 소름이 끼쳤습니다. 자세히 보니 나무 전체가 피와 살점으로 새빨갛게 물들어있었습니다. 내 뒤를 걸으면서 그 "빨간 나무"를 만져 버린 대원도 "악"하고 소리질렀습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직업을 잘못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지옥과 같은 현장을 목격하고, 나는 "전장의 광경이란 아마 이런 것일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견딜 수 없었고, 나는 이런 일에 맞지 않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부하 앞에서는 티낼 수 없었지만, 그것이 본심이었습니다. 오스타카는 나에게 첫 재해 파견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익숙해졌지만, 그런 느낌은 불식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대원 모두가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 생존자가 있을 리가 없다"라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경사면을 오르면 오를수록 멀쩡한 시신도 적어졌습니다. 있는 것은 손과 발 같은 시체의 부분과 살점 피부뿐. 너무 처참한 곳이었습니다. 이런 사고로 도저히 인간이 살아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생존자를 찾지 못한 채 능선을 오르다, 이번에는 다른 방향을 향해 내려 가면서 수색을 계속하려고 했을 때입니다. 무전에서 놀라운 정보가 흘러 왔습니다. "생존자 발견!" 귀를 의심했습니다. "어?"라고 다른 대원과 얼굴을 마주했다.

무선을 보내온 것은 4-6번기에서 내린 그룹이었습니다. 당초 소마가하라에서 대기를 명받은 3번기는 우리보다 1시간 뒤인 9시 45 분에 현장에 와서 하강을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하강 지점에서 능선을 올라간 반면에, 그들은 대대장의 명령에 반대 방향으로 내려 가면서 수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게노사와"라는 산기슭 둘레에서 도보로 올라왔다가 현지 소방단과 마쓰모토 주둔지의 제13연대와 합류했고, 그래서 4명의 생존자를 발견한 것입니다.

능선에 있던 우리는 "강하 지점에 돌아가"라고 지시를 받았습니다. 가파른 산에서 그 지역이 거의 평탄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부근에서 생존자를 헬기에 매달게 되었습니다. 하강 지점으로 잠시 돌아가니, 아래에서 생존자가 들린 채 올라왔습니다. 분명 사고기의 화장실 문 등을 들것으로 써서 옮긴 것 같습니다.

생존자 4명은 그 비참한 현장에서 하룻밤을 발견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상당히 쇠약해져있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의 소녀(카와카미 케이코씨로 알려짐)에게 "힘내!"라고 말을 걸면 "응응"이라고 수긍 같은 반응을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괜찮아 살 수 있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시간이 길었습니다. 구출용 헬기가 좀처럼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 번 요청하고 있는데 전혀 오지 않았습니다. 보도진의 헬기를 포함하여 많은 항공기가 상공에 날고 있었기 때문에 2차 재해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결국 생존자가 리프팅 지점에 옮겨진 후 헬기에 수용이 완료될 때까지 1 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헬기를 기다리는 동안 모두가 좌절하고 그중 현장에 도착한 적십자의 여성 간호사가 엄청난 서슬로 고함쳤습니다. 내 얼굴을 가리켜 지목하며 "만약에 사람들이 죽게 되면 너희들의 탓니까!"라고. 그것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도 어쩔 수 없는거야"라고 하는 기분이었지요.

헬기를 기다리며 현장에서는 호이스트(헬기에서 와이어에 의한 리프팅) 준비를하고 있었습니다. 적십자의 의사로부터 "대원이 직접 안고 타는 것이 좋다"고 말해, 자위대의 갈색 담요를 생존자의 몸에 감싸고 있었습니다. 먼저 리프팅 것은 요시 미키코 씨(당시 8세)입니다. 담요로 감싼 채 공수대원이 안고 헬기에 태웠습니다.

다음은 당시 14세였던 카와카미 케이코 씨. 그녀를 옮긴 것이, 나의 친구인 사쿠마 중사였습니다. 1번째와 마찬가지로, 담요로 싸서 준비를 했는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구출된 생존자의 모습을 촬영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어느새 주위에 있던 보도진들이 손을 뻗어 담요를 벗겨 낸 거죠. "무슨 짓이야!"라고 화내는 사이 다른 헬기가 바로 위에 왔고 와이어가 내려왔습니다. 어쩔 수없이 사쿠마 중사는 담요 없이 카와카미 씨를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세번째 요시자키 히로코 씨 (미키코 씨의 어머니, 당시 34 세)와 4번째 오치아이 유미 씨(당시 26 세)는 들것에 실린 상태에서 리프팅했습니다. 왜냐하면 안고 올리기에 탈진한 성인은 상당히 무거워 중간에 떨어질 우려도있어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세번째 요시자키 씨의 어머니를 태운 들것이 헬기에서 내려오는 바람을 받고 리프팅 순간에 빙글빙글 회전하고 말았습니다. 대단한 속도로 회전하고, 지금이라도 들것에서 몸이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들었습니다. 나는 바로 밑에서 두 팔을 벌려 "만일 떨어져 버리면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으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만, 이것은 우리의 정말 초보적인 실수였습니다. 본래 들것의 손잡이에 로프를 붙여 들것이 회전하지 않도록 지상 대원이 로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기본적인 일이지만, 역시 괴상한 현장에서 평온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일까요. 그 비상시에 아무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매달아 버렸습니다. 지금도 기억할 때마다 싸늘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오치아이 씨를 수용할 때는 제대로 보조 로프를 넣었습니다.

생존자 구출을 마친 것이 13 일 13시 29 분. 거기에서 다음의 임무를 명받았습니다. 헬기장의 구축입니다. 짐승이 다니는 길 조차 없는 가파른 산에 인력과 구조 물자를 신속하게 보낸다는 헬기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상공에서 로프 하강할 수 있었지만 이후의 작업은 헬기를 착륙시키는 것이 필수였습니다.

보병대장이 내게 대형 헬기(V-107)용 하나와 중형 헬기(HU-1H) 용 하나, 합쳐서 두 곳의 헬기장을 구축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우리는 훈련 · 연습 간이 헬기장을 만들지만, 그 때는 가급적 넓고 평탄한 곳을 찾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항공 기체의 날개가 떨어져 있던 근처에 주목했습니다. 그 근처는 비교적 넓고 평평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항공기 사고이기 때문에 사고 원인 규명을 위해 현장 검증도 필요합니다. 마음대로 현장의 상태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에 현장을 관할하는 군마 현경의 책임자를 찾았습니다.

주위에는 많은 경찰관이 있었지만, 거의 다 나가노 현경이거나 경시청 소속이었고 좀처럼 군마 현경의 책임자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간신히 찾아 교섭했더니 시종일관 "안된다." 어쩔 수 없이 현장 검증이 필요한 곳의 아래 지점으로 결정하고 주변의 나무를 베고 경사면을 굴착하고 깎은 암석과 흙을 아래에 담는 방식으로 중형 헬기 용 헬기장만을 만들기로했습니다 .

우리가 헬기장을 만들고 있는 동안에도 속속 사체가 옮겨졌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고, 13일 자정에는 헬리포트의 큰 틀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한밤중에 세세한 마무리 작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날 그 자리에서 쪽잠을 자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14일 아침 3시경부터 작업을 재개하고 7시경에 헬기장이 완성되었습니다.

"단풍잎"

하지만, 이 쪽잠이 힘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부터 헬기로 이송할 수 있도록, 헬기장 부근에는 시신이 모이고 있었습니다. 그 옆으로 누워 자려고 했지만, 한여름의 더위에 손상된 시신은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겁니다. 몇 번이나 깼습니다.

14일에는 완성된 헬기장을 사용하여 아침부터 몇 번이나 헬기가 왕래했고 15시 정도까지 총 121구의 시신을 운반했습니다. 이 숫자에 관해서는 쓰라린 추억이 있습니다. 이날 상급 부대에서 연락 간부가 현장에 왔는데, 헬기장의 운영을 지휘하고 있던 저를 보자마자 "오늘은 몇 구나 날랐지?"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대답이 궁했습니다.

사체라고 해도, 전신이 있는 것은 적고, 손만 다리만 있는 부분 사체도 많았습니다. 그것을 현장에서 가능한 빨리 옮기기 위해 개별적으로 포장한 부분 시신 등을 함께 담요에 싸서 "한 묶음"으로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121묶음"을 보낸 것이지, " 몇 구?"라고 물어도 모를 것입니다.

그런데 연락 간부는 즉답할 수 없는 나를 보고 "그래도 책임자냐!"라고 질타했습니다. 잠이 부족했던 탓도 있겠지만, 화가 나서 부하 한 명에게 "야, 거기 담요 좀 열어봐!"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사체가 몇 구인지 파악할 수 있어요!?"라고 반문하자, 상대방도 가만히 헬기를 타고 돌아갔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가장 힘들었던 것은 "단풍나무"입니다. 사체의 반송 준비중 비닐 봉지에 들어간 무언가가 날라 왔습니다. 붉고 작아 처음에는 단풍나무잎인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알고보니 피로 물든 아이들의 손바닥이었던 겁니다. 서서히 시신을 보는데 익숙해져 있었습니다만, 그것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정말 불쌍하고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습니다.

14일 15시경부터 날씨가 악화되어 시신 이송 작업은 거기서 중단됐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그날 밤도 전날과 마찬가지로 시신 옆에서 쪽잠을 자고, 다음날 15일 아침, 우리 공수부대는 임무를 마치고 헬기로 나라시노에 귀환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오스타카 산에 있던 것은 13 일 아침부터 15 일 아침까지 48 시간 정도입니다. 잠도 식사도 못한 채 극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하면 꽤 스트레스가 쌓여 있었던 것입니다.

경찰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자위대 헬기가 옮겨 오는 것은 곡괭이와 삽 등의 공사용 장비, 시신 보관용 담요 등 임무에 직결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경찰 헬기는 도시락이나 담배, 침낭을 많이 들고 왔습니다.

한 번은 펼쳐진 침낭이 헬기의 풍압에 떴습니다, 근처에 있던 내 부하가 황급히 뛰어 들어 눌렀습니다. 그러자 경찰관이 그를 향해 "이봐 자위대 양반, 침낭에 구멍난다고"라고 단언했습니다. 부하는 휴식 중이었기 때문에 담배를 들고 있었습니다. 경찰은 그가 장난스럽게 침낭에 누워 뒹구는 것처럼 보았던 것입니다. 그 경찰관에게 "야 이 등신아! 침낭이 떠서 로터에 닿으면 헬기가 추락한단 말이야!"라고 호통쳤습니다.

매스컴에도 화가 났습니다. 카와카미 씨의 담요를 벗긴 것도 그렇습니다만, 시신 사진만 찍는 무리도 있다보니 무심코 "작작 해라!"라고 꾸짖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14일 낮 무렵에 한 신문 기자가 가지고 온 조간 신문을 봤을 때는 역시 기뻤습니다. 거기에는 카와카미 씨를 들고 헬기로 옮기는 사쿠마 중사 사진이 1면에 실렸습니다.

지금은 재해 때 자위대의 활동이 미디어에서도 다루어지고 있지만, 당시 자위대는 어떤 의미로 숨어 사는 쪽이었습니다. 언론이 현장에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우리의 활동이 대대적으로 피사체가 되다니 나 자신은 상상도 하지 않았고, 어쨌든 놀랐습니다. 동시에, 우리들은 옳은 일을하고 있구나라는 실감이 솟았습니다.

5년 전에, 사고 30주년으로 방송국의 취재를 받았을 때, 감독이 입을 열자마자 "왜 자위대의 도착이 늦었습니까"라는 질문을 한 것은 뜻밖이었습니다. 원래 당시의 재해 파견 요청을 받아야만 최초 출동 할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마음대로 현장으로 향할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밤중에 현장에 갈 수는 없었던 것인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낙하산 · 보병 부대는 심야의 현장에도 구조 활동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수송 명령 당시 자위대 헬기는 밤에 볼 수 있는 장치가 장착되어 있지 않고, 어두운 밤에 미지의 산지 · 숲의 비행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12사단 예하 부대는 밤새 바로 암중 모색으로 현장을 향해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자위대는 할 수 있는 일을 했다고 나는 지금도 확신합니다.

스트레스 장애

오스타카에서의 경험은 이후 자위대 삶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가장 큰 것은 "스트레스 장애"에 대해 몸소 배운 것입니다. 사실 나라시노에 돌아온 후 불면증으로 고생했습니다.

낮에 일을 하고 있을 때는 그럴 일이 없지만, 밤 아파트에 가서 어두운 장소에 있을 때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침실은 물론 화장실과 욕실 전기도 켜 둔 채로 두지 않으면 불안. 그리고 취침 중에 문득 창문에 시선을 돌리면 베란다에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나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거의 전신의 사람도 있고, 상반신만 있는 사람, 타버린 사람 등 모든 사람, 오스타카의 현장에서 우리가 후송에 관련된됐던 시신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물론 환각이라고 스스로 납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나타나면 두려움을 느끼는 반면, 그만큼 불편은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저 "왜 나타나는 거야"라는 기분이었습니다. 결국 위스키를 마시지 않으면 잠들 수 없는 상태가 1개월 정도 계속 되었습니다.

그동안 육류도 전혀 먹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동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시절의 자위대는 아직 스트레스 장애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공정단은 남자 중의 남자가 모인 맹자들의 정예 부대였습니다. 연상의 부하를 통솔하는 젊은 간부로, 약점은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머리가 이상해진 건가? 병원에 갔다 와라"는 말만 들을 것 같아 상관에게도 누구에게도 상담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스타카에 출동한 자 중 외박을 신청해 나갔던 영내 거주 대원이 "섬뜩한 느낌"이라며 주둔지에 돌아와 모두 함께 자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이상하게도 안심했습니다. 그 대원을 향해 "한심한 놈"이라고 웃었습니다만, 내심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 동일하구나"라고 안심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훨씬 나중에 내가 대령으로 연대장이 되었던 2003년에 자위대가 이라크에 파견되었습니다. 나도 파견에 대비해 부대 지휘관으로서 스트레스 장애에 관한 교육을 받았고 (결국 나 자신은 이라크에 가지 않았습니다만) 더욱 그 후의 근무에서도 지휘관 · 참모에게 필요한 지식으로 배웠습니다 .

그래서 당시 26 세의 내가 오스타카 산 이후 자택에서 체험 한 것이 바로 '급성 스트레스 장애 (ASD)'의 전형적인 예였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이후 간신히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덧붙여서, ASD 상태가 1개월 이상 지속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고합니다.

전장과 대규모 재해 피해 지역 등의 열악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강한 인간도 스트레스 장애를 겪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단 48시간의 임무에 내 마음은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숨기고 혼자 괴로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자위대 해외 파견이나 재해 파견 때마다 정신 건강에 대한 관리를 체계적으로 실시하고 있습니다. 임무 종료 후 대원을 혼자 스트레스 장애를 대적하는 것 같은 상태로 방치하는 것은 안 되며, 만일 그랬다면 그 지휘관은 실격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귀중한 체험은 나 자신에게 지휘관으로서 많은 부하를 이끌고 임무를 완수하는 데 큰 양식이 되었습니다.

그 슬픈 사고에서 35 년을 맞이하는 지금, 다시 피해자의 명복과 생존자와 유족 분들의 삶에 행복이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오카베 토시야 (오카베 토시야) 전 육상막료장
1959 년 후쿠오카 현 출생. 전 육상 자위관 (방대 25기). 제6사단장, 북부방면 총감 등을 거쳐 2016년 제35대 육상막료장에 취임. 2017년 8월에 퇴임.

「주간 신쵸 출판사」 2020년 8월 13·20일 호 게재



[1] 육사37기로 대장까지 오른 인물은 김영식, 엄기학, 박찬주가 있다.[2] 자위대의 경우 위관급 장교에서 약 9.5년(졸업 직후 바로 임관이 아니라 간부후보생학교에서 반 년 이상 교육을 받고 소위가 된다. 그래서 기간이 애매.), 영관급 장교에서 약 15년을 지내야 장성급 장교로 진출할 수 있다.[3] 총감부는 부총감이 없이 총감, 막료장, 막료부장의 순이다.[4] 육자대에선 혼자였다. 방위대학교 25기 가운데 해자대는 3명, 공자대는 2명이 이 해에 처음 중장급 진출.[5] 방위대학교의 부교장격인 자리다. 민간인이 임명되는 교장1인과 부교장2인을 제외한 제복군인이 맡는 가장 높은 자리.[6] 미국은 합참의장과 합참차장이 같이 갈 때가 많지만 대장이 많은 미국과 달리 대장 자리가 4곳 밖에 없는 일본은 인사적체가 심각해 대장들이 2년 간신히 채우는 게 고작이라 이런 식의 인사는 이뤄지지 않는다.[7] 공교롭게도 오카베 도시야 이전에 통합막료부장을 지냈고 동북방면총감 역임.[8] 도쿄학예대를 나오고 육상자위대보급통제본부장 역임.[9] 1980년 입대자[10] 1981년 입대자[11] 5년 뒤인 2021년에 요시다 요시히데가 33년만에 일반간부후보생 출신으로 육상막료장에 오르게 되었다.[12] 통합막료장 자리는 2007년 신설된 후로 육(맛사키 하지메)-해(사이토 다카시)-육(오리키 료이치)-공(이와사키 시게루)-해(가와노 가쓰토시) 순이라 육자대에서 6대가 나올 거라고 거의들 예측했다.[13] 중장 시절에 어떻게든 군단장급 직책인 방면대 총감 경험을 쌓게 해주려고 통합막료부장에 임명된지 7개월만에 방면대 총감 자리로 옮겨줬다.[14] 퇴역도 멘탈이 나갔는지 감봉 조치가 내려오자마자 바로 나가버렸다.[15] 현재는 12여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