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르 울리에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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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르 울리에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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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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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前 축구 감독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제라르 울리에 Gérard Houllier | |
출생 | 1947년 9월 3일 | |
프랑스 공화국 오드프랑스지방 파드칼레주 테루안 | ||
사망 | 2020년 12월 14일 (향년 73세) | |
프랑스 파리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키 178cm | |
직업 | 축구 선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경영인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FC 위케이어 (1959~1968 / 유스) FC 위케이어 (1969~1971) AC 르 투게 (1971~1977) FC 마르티그 (1995~1996) |
감독 | AC 르 투게 (1973~1976) 누-레 민 (1976~1982) RC 랑스 (1982~1985) 파리 생제르맹 FC (1985~1986)[1] 프랑스 대표팀 (1988~1992 / 수석 코치) 프랑스 대표팀 (1992~1993) 프랑스 U-18 대표팀 (1994~1996) 프랑스 U-20 대표팀 (1996~1997) 리버풀 FC (1998~2004) 올랭피크 리옹 (2005~2007) 아스톤 빌라 FC (2010~2011) | |
기타 | 프랑스축구협회 (2007~2010 / 고문) 올랭피크 리옹 (2016~2020 / 이사) | |
국가대표 |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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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리버풀 FC의 감독으로 UEFA컵을 포함해 5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2. 선수 경력
1947년 9월 3일 프랑스의 테루안에서 태어났다. 울리에는 1959년에 12살의 나이로 위케이어 축구 클럽에 소속되어 1968년까지 유스팀에서 활동했다. 릴 대학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1학년 때 그의 아버지가 중병에 걸리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하고 시간 강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돈을 벌어야 했다. 1969~70년에는 리버풀의 얼솝 중학교에 들어가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대학의 아마추어 축구팀에서 미드필더로 뛰었다. 열정이 넘치는 선수였지만 단 한번도 프로 축구 팀에서 뛰지는 못했다. 이후 울리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위케이어 축구 클럽에서 아마추어 선수로 활동하다가 1971년 르 투게 클럽으로 이적했다. 그후 1973년, 울리에는 선수 겸 감독으로서 감독 커리어를 시작했다.3. 감독 경력
3.1. 리버풀 이전
1973년부터 1976년까지 르 투케에서 선수겸 감독으로서 활동하며 감독 수업을 받았다. 그 후 울리에는 1976년 뇌레맹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1982년까지 맡았다. 1982년, 팀을 2부리그로 승격시키는 데 성공했고 그의 실력을 주목한 RC 랑스에서 그를 감독으로 선임한다.랑스 시절 울리에 |
당시 랑스는 리그앙에 승격된 지 얼마 안된 팀이었는데, 울리에는 랑스를 3년간 이끌며 리그앙에 자리를 잡게 했고 1985년에는 UEFA컵에 진출시키는 파란을 일으킨다! 그의 활약을 주목한 파리 생제르맹 FC는 1985년 울리에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울리에는 선수단을 장악하고 팀의 기반을 다졌고 1년차인 1985-86시즌에 바로 리그앙 우승을 차지한다.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 울리에 |
그후 PSG를 이끌고 계속 호성적을 거두던 울리에는 1988년에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수석코치로 선임되었다. 수석코치로서 4년간 활동하다가 1992년에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었지만 1993년 11월 프랑스가 1994 FIFA 월드컵 미국 본선 진출에 실패하자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이때 울리에는 1993년 11월 17일 프랑스가 파리에서 불가리아에게 2:1로 패한 뒤 윙어 다비드 지놀라가 경기 종료 직전 상대의 역습을 허용하여 실점했기 때문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며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프랑스 국민들 또한 울리에의 주장에 동감했고 지놀라는 엄청난 비난에 시달리다가 끝내 1996년 유로 대회를 끝으로 국가 대표팀을 은퇴했다. 훗날 지놀라는 자신을 공개적으로 매장시킨 울리에에게 근거없는 중상을 하여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다며 그를 고소했다. 이 법정 싸움은 2012년 4월에 프랑스 법정에서 취하될 때까지 장기간 진행되며 지놀라를 괴롭혔다.
울리에는 실패한 감독이라는 비난에 시달렸지만, 그는 1994~1996년 프랑스 U18 대표팀을 이끌었고 1996~1997년 프랑스 U20 대표팀을 이끌며 프랑스의 재능이 있는 유망주들을 길러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998년 프랑스가 월드컵을 우승한 후, 울리에는 선수들을 길러낸 공을 인정받아 메달을 수여받았다. 이러한 그의 활약을 주목한 리버풀은 팀의 미래를 맡기기로 하고 1998년 울리에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3.2. 리버풀 FC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울리에 체제 문서 참고하십시오.3.3. 올랭피크 리옹
2005년 5월 29일, 울리에는 리그앙에서 우승을 차지한 올랭피크 리옹과 2년 계약을 맺었다. 그는 리옹을 이끌고 리그에서 순항했지만 챔피언스리그에선 AC 밀란과의 8강전에서 패하고 말았다. 울리에는 2005-06 시즌과 2006-07 시즌 모두 우승을 차지하여 리그 2연패를 이룩했고 프랑스 컵에서도 2005년과 2006년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2007년 5월 25일, 그는 챔피언스리그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은 리옹 구단주인 장 미셸 올라와 갈등을 빚다가 결국 감독직을 사임하고 2년간 휴식을 취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던 중 핌 베어벡의 후임감독을 찾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새 감독 1순위 후보로 대한축구협회가 접근했으나 본인이 거부했다고 하였다. 다만, 기본적인 큰틀에서 어느정도 합의를 보았으나 프랑스 축구협회와 가족들의 반대가 엄청 컸다고 한다. 결국 이에 거절한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영입 최우선 대상이였기에 아쉬움이 남는다.3.4. 아스톤 빌라 FC
2010년 8월, 아스톤 빌라 FC는 마틴 오닐을 경질한 뒤 울리에를 새 감독으로 선임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는 초반부터 잡음을 겪어야 했다. 기자회견을 가졌을 때 프랑스 축구 협회가 이를 문제삼았기 때문에[2] 계약서에 사인할 수 없었다. 울리에는 9월 15일 블랙번 로버스와의 리그 컵 경기에서야 비로소 팀을 지휘할 수 있었다.그러나 가브리엘 아그본라허, 스틸리얀 페트로프, 나이젤 리오-코커, 그리고 에밀 헤스키 등 팀의 주축 선수들이 모조리 부상당하고 만 것이다. 이 여파로 울리에는 아스톤 빌라 부임 이래 10경기를 치르는 동안 단 한 경기만 이기는 부진을 겪는다. 2010년 11월, 울리에는 이 초유의 재앙을 극복하기 위해 아스날의 미드필더였던 37세의 노장 로베르 피레스를 자유계약으로 영입했다. 하지만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고, 2011년 1월에 20경기를 치르는 동안 고작 승점 21점을 기록하는 부진에 시달렸다. 빌라는 18위에 머무르며 강등을 당할 위기에 직면했다. 팬들은 팀의 부진에 화가 나 울리에를 향해 "넌 아침에 해고되어 있을 거다"는 야유를 퍼부었다.
울리에는 1월 이적 시장 때 팀의 부진을 극복하기 위해 토트넘 핫스퍼로부터 수비수 카일 워커를 임대하고 선더랜드로부터 공격수 대런 벤트를 영입했으며 리옹으로부터 장 마쿤을 영입하고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로부터 마이클 브래들리를 영입했다. 2011년 2월, 아스톤 빌라는 9경기에서 5경기를 이기고 3경기를 비기며 12위로 상승하며 영입효과를 톡톡히 봤다.
그러나 3월 초순, 울리에는 맨시티와의 FA컵 경기때 주전 선수들을 대거 명단에서 제외시키는 결정을 내렸고 결국 팀은 맨시티에게 3:0으로 패했다. 언론은 경기를 일찌감치 포기한 울리에를 거세게 비난했다. 또한 이 시기 빌라의 주전 수비스 제임스 콜린스와 리차드 던이 클럽 스탭과 싸우는 일이 벌어져 팀의 상승세에 찬물을 뿌리고 만다.
3월 19일, 아스톤 빌라는 홈에서 지역 라이벌인 울버햄튼 원더러스와 맞붙었다. 이때 팬들은 "이젠 충분하다. 울리에는 나가라!"라는 배너를 들어올리며 울리에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울버햄튼은 이날 맷 자비스의 골로 1:0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아스톤 빌라를 상대로 31년 만에 거둔 것이었다(...). 이 경기 직후, 팬들은 울리에를 향해 "우리는 울리에가 나가는 걸 원한다", "우리는 네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라는 야유를 퍼부었다.
4월 20일, 팀의 부진과 팬들의 야유로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울리에는 밤중에 심장발작을 일으켜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는 의사로부터 더이상 감독직을 맡아서는 안된다는 선고를 받았다. 결국 그를 대신해서 게리 맥칼리스터 수석코치가 잔여 경기를 치러야 했다. 6월 1일, 울리에는 은퇴를 선언함으로써 지옥과도 같았던 아스톤 빌라에서의 1년을 마무리지었다.
4. 은퇴 이후
올랭피크 리옹과 프랑스 축구 국가 대표팀 기술이사로 일하고 있었다.그리고 2007년, 핌 베어벡의 후임감독을 찾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새 감독 1순위 후보로 대한축구협회가 접근했으나 본인이 거부했다고 하였다. 대한축구협회에서 최우선 협상대상으로 선정했고 당사자도 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결국 제안을 거부하면서 협상이 결렬됐다. 이유는 가족들과 프랑스 축구협회에서 거센 반대를 했다고. 특히 가족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했다고 한다. 이때 유럽언론에서는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직 제안도 받았다고 하는데 역시 울리에가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건강관리에 집중했지만 심장 수술을 받았다가 한국 시간 2020년 12월 14일 향년 73세에 세상을 떠났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파리 생제르맹 FC (1985~1986)
- 리그 1: (1985-86)
5.2. 개인 수상
- UEFA 올해의 팀: 2001
-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 2001
- 옹즈도르 올해의 감독: 2001
- 리그 1 올해의 감독: 2007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감독: 1999년 12월, 2002년 3월 · 10월
6.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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