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21:08:47

유로니무스 살인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사건의 전말3. 문답 인터뷰4. 사건 이후

1. 개요

1993년 8월 10일 화요일 밤 노르웨이의 블랙 메탈 뮤지션 카운트 그리쉬니크(당시 20세)가 유로니무스(당시 25세)를 그의 집에서 잔혹하게 살해한 사건.

2. 사건의 전말

카운트는 그날 베르겐시에서 동료 스노레 루크(Snorre Ruch)[1]와 함께 유로니무스가 거주하던 오슬로시의 퇴위엔 거리 40B(Tøyengata 40B)[2]에 위치한 공동주택[3]을 찾아갔다. 새벽 3시, 스노레는 유로니무스의 집 앞에서 벨을 눌렀고 잠을 자다 깬 유로니무스는 짜증이 나서 문을 열어 주지 않았으나 카운트가 레코드 계약 문제로 상의할 것이 있다며 다시 유로니무스를 불러냈다. 스노레에 의하면 카운트가 레코드 계약에 대해 논의하고 싶다며 자신을 찾아온 것에 놀란 유로니무스가 방심하고 문을 열어주었으며 카운트와 유로니무스는 대화를 시작한 지 얼마 못 가서 격렬하게 대립했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유로니무스는 자기 집이 있었던 공동주택의 층계참에서 머리, 목, 등에 23군데 자상을 입은 채 시체로 발견되었다. 살인도구로 쓰인 카운트의 8cm짜리 칼은 나중에 경찰이 입수하였다.

아래 기사에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으니 그것을 읽어보는 게 더 좋을 듯하다. 읽어 보면 알겠지만 진짜 중2병적인 요소가 흘러넘치다 못해 폭발한다. 괜히 노르웨이를 위시한 대부분의 블랙 메탈 씬이 중2병 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

실제로 유로니무스의 전 여자친구는 "사타닉 서클 멤버들이 교회 방화나 살인 등을 저질렀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타닉 서클을 흔히 뭔가 거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던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그들은 그저 중2병에 걸려 자신들이 얼마나 세고 반항적인지를 표현하려 했던 노르웨이 양아치들일 뿐이었다."라고 말했다.#

버줌의 카운트(본명 바르그 비케르네스)가 Mayhem의 유로니무스를 암살한 사건에 대한 기사는 사실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이 사건 이후 일약 주목을 받게 된 카운트는 살인죄로 징역 21년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될 당시에도 수많은 인터뷰에 응한 적이 있는데 이것들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꽤나 자세하고 객관적으로 서술된 것을 기재하였다.

이 글은 1995년 4월에 INFERNO WEBZIN에 실렸던 것으로 이미 오랜 시일이 지났지만 이후에도 카운트는 한동안 감옥에 있었으니[4] 별로 달라질 내용도 없다. 1997년 카운트의 어머니가 카운트를 탈옥시켜 주는 대가로 모 우익 단체에 돈을 댔다가 구속당하는 일이 있었고 MAYHEM이 버줌의 앨범을 발매하기 위해 만들어진 MISANTHROPY 레이블[5]과 계약을 맺었다는 소식이 있었을 뿐.
피오르드 사이에 수정처럼 맑은 강물이 흐르고 세상 어디서도 접할 수 없이 파아란 하늘을 접할 수 있는 곳. 베르겐과 가까운 이곳을 노르웨이인들은 '피오르드의 관문'이라고들 부른다. 이곳은 북극점에서 고작 수백킬로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문명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곳인데 베르겐에서 이곳으로 통하는 터널을 피오르드 곳곳에 뚫은 노르웨이 정부 덕택에 우리가 이곳에 쉽게 와볼 수 있을 뿐이다. 그 건물은 마치 유스호스텔처럼 보였다. 빨간 지붕을 한 나지막한 건물들은 무척이나 아릅답게 보인다.

그는 내 손을 반갑다는 듯이 붙잡았다. 그의 머리는 짧았고 오래된 티셔츠에 반짝반짝 윤이 나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메탈 밴드 버줌의 유일한 멤버인 크리스티안 비케르네스(CHRISTIAN VIKERNES, 바로 카운트 그리슈나크의 본명이다)[6]는 창밖으로 서치 라이트와 감시탑을 쳐다본다. 이곳은 감옥이다. 그에게는 강도, 폭약류의 불법 소지, 묘지 훼손… 방화 등의 죄명이 붙여져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바로 살인죄였다.

"내가 죽인 그 사람은 나의 적이었다.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그것 말고 또 뭐가 있겠나?"

카운트는 묻는다. 적들은 서로 싸우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 우리는 늙고 병든 사람들을 모두 죽여버려야 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민주주의 체제는 모든 생명을 보호하려 한다."

그는 심각했다. 카운트는 미동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보들이다. 그들에게는 발언권이 없다. 나를 스칸디나비아의 통치자로 만들어만 다오."

하지만 이 젊은이는 애석하게도 20년 이상을 이 낙원 속의 유스호스텔에서 살아야만 한다.[7]

노르웨이인들에게는 "악마"와 동의어로 통하는 그의 이름이 지어진 것은 1973년 봄이었다. 베르겐에 살던 그의 어머니 레네는 비서였고 아버지 라르스는 전기 기사였다. 베르겐은 많은 야생 동물과 산들 그리고 황무지가 있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여기서 태어나 자란 탓인지 카운트의 사상엔 의외로 평화로운 부분이 있다.

"한겨울에 추운 숲속을 혼자 걸어가 보길 바랍니다. 그러면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숲이 말해줄 거예요."

이윽고 라르스가 사담 후세인 밑에서 일하게 되자 라르스의 가족은 이라크로 거주지를 옮겼는데 이즈음부터 라르스는 그의 부인과 아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카운트는 이라크의 학교에서 외톨이였고 집에서도 조용히 혼자 방안에 앉아 장난감들을 갖고 병정놀이를 하곤 했다. 나이가 들면서 그의 관심은 비디오 게임으로 옮겨갔고 싫증이 날 땐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읽곤 했다. 그는 책에 나오는 수많은 종족들 중에서 오르크를 가장 좋아했다.

카운트가 12살 되던 해인 1985년, 그의 어머니는 라르스와 이혼한 뒤 아들과 함께 베르겐으로 돌아왔고 그때부터 그녀는 그동안 못다한 사랑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아들에게 극진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카운트가 14살 때인 1987년, 카운트의 어머니는 그에게 기타를 사 주었고, 카운트는 하루에 수시간 동안, 어떤 때는 며칠 동안 계속 기타를 쳐댔다. 열심히 할수록 더 큰 즐거움이 뒤따랐다.

1989년, 카운트는 우루크하이(URUK-HAI)라는 원맨 밴드를 조직했는데 이 이름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악한 생명의 종족명을 딴 것이다. 얼마 후 그는 음악에만 전념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었으나 여전히 우루크하이는 그의 원맨 밴드였다. 왜냐하면 베르겐은 작은 도시여서 음악 취향이 맞는 친구를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카운트는 상관하지 않았다. 이즈음 어머니는 재혼을 했고 카운트는 드디어 마음이 맞는 친구들을 만나서 그들이 속해 있던 올드 퓨너럴(OLD FUNERAL)이라는 데스 메탈 밴드에 가입했다. 올드 퓨너럴 멤버들은 정기적으로 모여서 연습을 하며 가끔 라이브 공연을 펼쳤다. 그러나 곧 카운트는 공연이라는 것에 환멸을 느끼고 말았다. "무대 앞에는 술 취한 폭도들뿐이었다. 그들은 멍청한 얼굴로 무대 위를 쳐다보다 마구 머리를 흔들어댄다. 바보들…." 한편, 양부는 그런 카운트에게 머리를 자르고 직업을 가져보길 권했지만 이미 카운트에게는 음악만이 전부였고 그것은 그의 자상한 양부마저도 간섭할 수 없었다.

1990년, 카운트는 오슬로에 사는 친구의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카운트보다 5살이 더 많은 그 남자는 검은 머리를 길게 길렀고 검은 옷을 입고 있었으며 오이스텐 오르세트(Oysten Aarseth)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본명보다는 유로니무스(EURONYMOUS)라고 불리기를 원했는데 이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죽음의 왕자를 뜻한다고 했다. 유로니무스는 옷에 인민군(NATIONAL PEOPLE'S ARMY) 배지를 달고 있었으며 공산당원이었다. 또한 DEATHLIKE SILENCE PRODUCTION(이하 D. S. P.)이라는 레코드 레이블을 가지고 있었다. 유로니무스는 D. S. P.에선 오직 순수한 악의 음악만을 발매한다고 말하며 카운트에게 자신의 밴드 MAYHEM에 대해서도 얘기해주었다.

카운트는 왜 유로니무스가 공산당에 탐닉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유로니무스가 기독교도들에 대한 저주, 악의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등의 열변을 토할 때에는 완전히 매료되기도 했다. 유로니무스는 시골에서 상경한 어린 카운트를 마음에 들어했으며 무엇보다 카운트의 기타 연주 실력을 높이 평가했다. 비록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지만 카운트도 유로니무스를 진심으로 따랐으며 그를 숭배했다. 점차 카운트가 오슬로로 향하는 발길이 잦아졌다.

카운트가 성년(18세)이 된 1991년, 카운트는 올드 퓨너럴을 떠났고 앞으로는 오직 혼자서만 음악을 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카운트의 어머니는 베르겐에 조그마한 집을 얻어주었고 카운트는 집에 틀여박혀서 창문에 장막을 쳐놓고 촛불을 밝히며 반지의 제왕을 읽든가 기타를 연습하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즈음 그는 "반지의 제왕"에서 마음에 드는 이름을 두 개 찾아냈는데 하나가 버줌(Burzum)이었고 다른 하나는 카운트 그리쉬나크(COUNT GRISHNACKH)였다. 한편, 예전부터 고대 조상들의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카운트는 기독교도들에 의해 스칸디나비아 반도가 점령되기 전까지 노르웨이에 살았던 선조들이 전쟁의 신인 오딘을 섬겼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오딘을 섬겨서 기독교도들을 모두 죽이는 그날까지 음악을 하겠노라고 결심했다. 이때부터 고대 무기들을 수집하기 시작해서 카운트의 집에는 칼, 창, 도끼 등이 가득 찼다. 또한 카운트는 베르겐 지방의 고대 방언인 BERGENSK를 공부하기 시작했는데(이후 곡 가사도 BERGENSK어로 작사했다) 이 언어에는 '전쟁'을 뜻하는 단어가 다섯 가지도 넘는다. 전쟁은 노르웨이가 기독교도들에게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해 4월에는 MAYHEM의 보컬이던 DEAD(데드)가 엽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쏴서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시체를 발견한 유로니무스는 다시 오슬로로 돌아가서 카메라를 갖고 와서는 죽은 데드의 사진부터 찍었으며 죽은 시신의 두개골 일부 조각을 주위서 팬던트 목걸이로 만들어 동료 뮤지션들에게 선물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데드는 좋은 가수였고 중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자살을 통해 MAYHEM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는 점이다."

유로니무스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멤버 중 한 사람의 말을 들어 보자.

"처음 유로니무스로부터 데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는 돈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의 사회 보장 카드를 찾아야 했다. 유로니무스는 데드가 자살했음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가 데드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데드의 자살로부터 수 주가 흐른 뒤 유로니무스는 오슬로에서 HELVETE(HELL)라는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유로니무스를 따르는 무리들은 "사타닉 서클(THE SATANIC CIRCLE)"을 조직하고 행동을 개시한다. 이 조직에는 '내부(INNER)와 외부(OUTER)' 서클이 있는데 이너 서클은 12명으로 구성되어 실제 전쟁을 수행하며 아우터 서클은 블랙 메탈을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었다. 유로니무스의 가게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으나 언제나 블랙 메탈을 하는 음악인들이 들끓었다. 모두들 그 가게에서 몇 시간이고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다가 가게 문을 닫고 나면 오슬로 유일의 '블랙 메탈 바'인 LUSA LOTTE 술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술에 취해 벌이는 토론에서 언제나 승리하는 자는 바로 두목인 유로니무스였다.

이 당시 영국인들은 종종 노르웨이인들이 메탈 밴드 베놈을 숭배하면서 보다 더 사악해지려 애쓰는 모습을 보고 비웃곤 했다. 영국인들의 생각에 노르웨이인들은 공연보다는 스튜디오에서 저질 음반을 녹음하는 것을 더 중요시한다는 것이었다. 유로니무스는 분노했고 사타닉 서클은 영국의 잡지와 음악인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이제 어느 영국 밴드라도 노르웨이에서 공연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이 경고를 무시하고 영국 밴드인 파라다이스 로스트가 공연을 강행하려 하자 일단의 블랙 메탈 팬들이 투어버스를 공격했다. 보컬리스트 닉 홈스의 말에 의하면

"갑자기 10살에서 12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들 무리가 버스를 둘러싸더니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제정신이 아닌 거 같았다."

서클의 선전포고는 영국인들에게만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스웨덴과 핀란드의 밴드들도 사악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일례로 Therion이 있다. 싱어인 크리스토퍼 존슨은 1992년 7월 28일 스톡홀름의 자기 집에서 자다가 수명의 폭도들에게 습격을 당하고는 집이 불타버리는 꼴을 당해야 했다. 집벽에는 버줌의 앨범 커버가 단검에 꽂혀 붙어 있었고 "카운트 그리쉬나크가 왔다 간다.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는 글이 씌여 있었다. 그로부터 나흘이 지나 욘센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희생자여, 나는 방금 스웨덴에서 돌아왔는데 내 앨범 커버와 성냥 한 개를 놓고 왔다…. 찾으러 갈 때까지 보관해라."

경찰은 18세의 수비 프루루넨(SUUVI PRURUNEN)이라는 소녀를 체포했고 그녀는 자신이 불을 질렀다고 자백했다. 그녀의 집에서는 그녀가 사타닉 서클의 일원이며 카운트의 명령에 의해 그 일을 저질렀다고 씌여진 일기장을 찾아냈으나 그 외의 증거가 없어서 카운트를 체포할 수는 없었다. 불쌍한 그녀는 이후 정신병원에 1년간 수감되었다.

이제 카운트는 서클 내에서 유로니무스에 이어 2인자가 되었다. 카운트가 얘기를 시작하면 청중들은 경청했다. 그가 오딘에 대한 얘기를 하면 모두들 가슴 벅찬 감동을 느꼈다. 멤버들은 카운트가 외국인들을 증오하면서도 히틀러나 스탈린을 숭배하는 것이 모순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갔으나 무엇보다도 그는 행동파였다. 유로니무스는 말만 하지만 카운트는 실제로 악을 실천했다.

1992년 6월 6일 밤, 홀멘콜렌(Holmenkollen) 교회[8]가 처음으로 불에 타 없어졌다. 얼마 후 두 번째 교회가 불탔고 이후 또다른 교회가 불탔다. 베르겐시 근교의 판토프트키르케(Fantoft kirke)[9]라는 교회도 불에 타 없어졌는데 이 교회는 12세기에 세워진 노르웨이에서 가장 평판이 높은 교회 중 하나였다. 1992년 한해 동안에만 모두 8건의 교회 방화가 있었고 교회의 화재 진압 시 소방관 한 명이 숨졌다. 카운트는 자신의 행위를 자랑스러워했으며 1993년이 되자 어느 기자에게 사타닉 서클의 교회방화에 대해 떠벌리면서 Mayhem의 데뷔 앨범이 4월에 출시될 것이며 앨범의 표지처럼 사타닉 서클이 노르웨이의 국보급 성당인 Nidaros Cathedral을 방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기자는 이를 듣고 경찰에 신고했고 카운트는 경찰에 소환되었지만 그곳에서 카운트는 범행을 부인했으며 증거도 없었으므로 석방될 수밖에 없었다.

유로니무스는 카운트의 석방을 축하하며 "누구라도 사타닉 서클에 대해 어떠한 증언을 한다면 서클의 무시무시한 복수가 기다릴 것이다." 라고 경고했다. 카운트가 석방된 직후인 1993년 3월 버줌의 미니앨범 "ASKE"가 발매되었는데 유로니무스는 앨범의 표지를 불타고 있는 Fantoft kirke 교회의 사진으로 삼았고 앨범의 경품으로 라이터를 끼워 팔았다. 그리고 그 밑에는 "이것으로 교회를 모조리 불살라버려라!"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한편, 카운트는 구치소에서 풀려난 이후 유로니무스가 말만 거창한 위선자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가기 시작하면서 점차 유로니무스의 라이벌이 되어갔다. 사실 전에도 둘은 사상의 차이로 다툰 적이 종종 있었다. 유로니무스는 사타니즘을 신봉했지만, 카운트는 사탄 역시 기독교 신앙의 한 부분이라 여기며 기독교와 관련된 모든 것을 떨쳐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운트가 진정 원했던 것은 노르웨이의 신들을 다시 살려내고 진정한 노르웨이 인종과 문화를 재발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을 갈라서게 만든 다른 원인을 간과할 수 없다. 유로니무스는 카운트가 버줌 앨범의 제작을 위해 자기 어머니에게서 빌린 4000 크로네를 꿀꺽했던 것이다. 또한 카운트는 유로니무스의 여자친구인 16세의 스웨덴 소녀 일사(ILSA)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카운트는 권력을 원했고 이를 쟁취하기 위해 거사를 치르기로 결심했다.

1993년 8월 10일, 카운트는 어머니의 폭스바겐 골프에 다른 두 명을 더 태우고 어디론가 향했다. 한 명은 안드레아스 나겔세트(ANDREAS NAGELSETT)였고 다른 하나는 스노르(SNOR)라는 사람이었다. 안드레아스는 자기 집에 내려서는 밤새 크게 음악을 틀고 떠들어댔고(즉, 알리바이를 만든 것이다.) 카운트와 스노르는 오슬로로 가서 유로니무스를 찾아갔다. 먼저 스노르가 벨을 눌러 문을 열었다. 유로니무스는 속옷만 입은 채 문 앞에 서 있었고 카운트를 보고는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카운트는 몇 장의 서류를 꺼내 그의 코앞에서 흔들면서 레코드 계약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싸우기 시작했는데 유로니무스가 부엌 쪽으로 도망치자 카운트는 칼을 빼들어 그의 등에 꽂았다.

유로니무스는 바닥에 쓰려졌으나 몸을 굴려 도망치면서 카운트에게 나가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카운트는 천천히 뒤따르면서 찌르고 찌르고 또 찔렀다. 유로니무스는 기다시피 밖으로 달아나서는 계단을 내려왔고 카운트는 다시 그의 목에 칼을 꽂았다. 다음날 아침. 이웃들이 유로니무스의 시체를 발견했을 땐 무려 23군데의 찔린 흔적이 남아있었는데 그중 16개는 등에 나머지는 목과 머리에 있었다. 물론 카운트와 스노르는 그곳에 없었다.

카운트는 집으로 돌아와 영국의 CANDLELIGHT 레이블에 전화해서 "나는 카운트 그리쉬나크다. 유로니무스가 죽었다. 참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경찰은 유로니무스의 여자친구인 일사를 찾아갔는데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누가 유로니무스를 죽였는지 안다. 하지만 말을 할 수는 없다. 목숨을 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경찰은 스노르를 연행했는데 그도 역시 카운트를 두려워하긴 했지만 결국 그날 카운트와 함께 오슬로에 간 사실을 시인했다.

1993년 8월 20일, 경찰이 카운트의 집을 수색했을 때 150kg의 다이나마이트가 발견되었는데 이 폭약은 노르웨이의 국보로 11세기 이전에 지어진 Nidaros Cathedral 성당을 폭파하려고 준비해 둔 것이었다.

14세에서 22세까지의 젊은이 13명이 체포되었고 카운트도 거기 끼어있었다. 이들의 혐의는 묘지 훼손, 강도, 강간, 방화 등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94년 여름까지 13군데의 교회가 더 불에 탔다. 경찰이 밝힌 바에 의하면 서클 내에는 일종의 계급제도가 있어서 범죄를 많이 저지른 순서대로 계급이 매겨졌다고 한다.

카운트는 오슬로에서 9개월간 수감되었는데 의사가 혈액을 채취하려 하자 바늘로 찌르는 것은 남자답지 않다며 칼로 베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수많은 신문과 잡지에서 카운트와 인터뷰를 하고 싶어했고 그는 거부하지 않았다. 재판에서 그는 묵비권을 행사했는데 그의 변호사인 토르 엘링 스타프(TOR ERLING STAFF)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유명한 변호사로 자신의 의뢰인의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두 명의 심리학자가 카운트를 검사했는데 결과는? 지극히 정상으로 판명되었다.

"나는 그 공산주의 돼지를 죽인 것이 자랑스럽다."

창밖을 바라보며 카운트가 얘기한다.

"그 겁쟁이는 싸워볼 생각도 않고 도망쳐 다니기만 했다."

이제 카운트는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는 것을 금지당했다. 그는 잠시 흥분하긴 했지만 곧 냉정을 되찾았다. 독방이나 바깥 세상과의 단절이 그를 괴롭힐 순 없다. 사실… 그 무엇도 그를 괴롭히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총 21년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한다. 이것이 노르웨이 법에 명시된 최고형량이다.

흔히 말하는 중2병과 같은 소아병적인 요소와 돈 문제 등 두 사람의 자잘자잘한 갈등이 범죄에 이를 정도로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배타적 민족주의적인 사고방식, 자신의 범죄 행위 및 범죄에 대한 반성이 전혀 없는 태도는 별개의 사안이라면서 사회적 시선보다는 본인에게 중요한 인생의 목표를 망설임 없이 추구하는 모습이나 그걸 뒷받침하는 뛰어난 실력 자체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아른핀 네세트[10]와 같은 악질 흉악범에게도 가급적 관용을 베풀려고 노력하는 노르웨이에서 단 한 명만 죽인 카운트가 유기징역 법정 최고형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을 4년이나 더 해야 했던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3. 문답 인터뷰

당시 범죄자와 나눈 인터뷰 전문.[11]

원문

인터뷰 내용에는 유로니무스의 인간성에 대한 비판과는 별도로 그에 대한 살인을 정당화하는 카운트의 일방적인 주장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읽을 때 주의가 필요하다.

참고로 인터뷰 내용에서는 21년형이 법정 최고형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아니다. 2002년까지는 무기징역이 법정 최고형이었고 이후 무기징역까지 폐지되면서 법정 최고형이 되었으며 노르웨이 정부는 무기징역을 대신해 예방 구금이라는 명목 하에 5년씩 형기를 연장하는 제도를 새로 도입했다.
Q> 왜 독방에서 지내나?
A> 경비들과 좀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이런 짓들을 생각나면 그냥 해버린다. 난 이 사람이든 저 사람이든 면회의 선택권도 없다. 그들은 간교하고 부당하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딴 짓을 한다는 것에 대해 열받는다. 그들은 개판이다.

Q> 그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들의 면회를 막는가?
A> 글쎄…. 지금 이 시간에도 그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내 여자친구의 면회를 막는다. 그들은 그녀가 여기서 몰래 뭘 받아갈지도 모른다고 떠드는데 개소리다. 일단 나를 체크할 때 장식을 떼고 그리고 옷을 다 벗은 후 검사를 받는다. 심지어 당신과 얘기하러 나올 때조차 그랬다. 어느 것이든 평범할 수가 없다. 정말 개같은 일이다.

Q> 이곳에 있으면서부터 어떠한 대우를 받았는가?
A> 다른 수용자들과 다를 바 없다. 나는 그렇게 믿긴 하지만 뭔가 계략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충분히 받을 수 있는 내용이 담긴 많은 내 편지들을 그들이 중간에서 저지시키는 것 때문이다. 가끔 한두 개 정도의 편지를 받긴 하지만 거의 다 그들이 막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편지에 역십자가를 그려서 보내기 때문이다. 난 봉투나 뭐 그런 것에 노르웨이 국기조차 그릴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것이 국가주의자(민족주의자)이며 사회주의자라고 그들은 말한다.

(주: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스웨덴, 아이슬란드의 국기 형태는 색깔만 다를 뿐 십자가를 옆으로 뉘여놓은듯한 형태로 동일하다.)

Q> 당신이 형무소에 도착한 첫날은 어땠는가?
A> 첫날… 콘크리트 바닥으로 된 넓은 방 중앙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채 있었다. 침대도 없었고 바닥 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24시간 동안 불을 켜놨다. 24시간 전 날 데려왔던 자들이 다시 와서 창살 사이로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날 담요를 하나 던져줬다. 당연히 그것은 매우 굴욕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요점이다. 씻지도 못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Q> 그 바닥에 누워 있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가?
A> 그것은 진짜 존나 웃기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내가 매우 겁먹은 걸로 생각했는지 그들은 '넌 진짜 끝장난 거야!'라고 해댔다. 그곳에선 물리적 테러가 아닌 정신적 테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도 이것이 더욱 나쁜 것이라는 것을 안다.

Q> 평소엔 어떻게 지내는가?
A> 글쎄 지금 이 순간에도 난 격리되어 있으니 평범하지가 않다. 그래도 오늘 샤워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래서 지금은 아무런 할 게 없다. 평상시엔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쓴다. 이곳에선 일을 하거나 학교를 갈 수 있다. 일할 때는 램프를 들고서 우르르... 매우 지적인 일이다 하하. 하지만 운좋게도 난 학교를 간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서 그곳으로 간 후 7시반부터 오후 2시 50분까지 있다가 점심을 먹는다. 그런후 4시에서 6시까지 원한다면 운동장에 나가서 좀 오랫동안 머무를 수도 있다. 그리곤 내 방으로 돌아온다. 다른 죄수 10명과 함께 써야 하는 주방이 있고 샤워실, 화장실, 이런 구역이 있다. 방안엔 화장실이 없다. 만약 소변이 마렵다면 세면대에다가 볼일을 봐야 한다. 그럼 두 번 다시 쓰지 못할걸, 하하…. 이곳에서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난 베르겐에 있을 때부터 책을 써왔다. 그들은 늘 이것을 못하게 해왔다. 그래서 난 억지로 할 수 있을 만큼만 했고 조만간 출판인에게 구두로 말할 것이다. 그 책엔 노르웨이의 '블랙 메탈(Black Metal)'이라 불리는 것과 관계된 몇 개의 장(章)이 있다. 그리고 몇 개의 장은 'Esctasy dance culture'(주: 원문대로 표기하였음)와 '이교도적 의식'의 관계에 대해서다. 그것은 정확히 고대 스칸디나비아 (노르웨이의) 마법에선 같은 것이다. 당신이 모든 기력이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춤을 춘다면 영혼이 몸에서 분리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Q> 어떻게 이곳의 현실에서 벗어나려하는가?
A> 음악을 듣는다. 그래도 카세트나 CD 플레이어는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바흐, 베토벤, 그리그(물론, 그도 역시 노르웨이인), 그리고 약간의 테크노를 듣는다.

Q> 혹시 이곳에서 자살할 생각은 하지 않았는가?
A> 내가 뭣 때문에?

Q> 굉장한 실의에 빠지지는 않던가?
A> 가끔. 그러나 자살은 겁쟁이나 하는 짓이다.

Q> 유로니무스를 죽인 것에 대해 후회하는가?
A> 절대로! 내가 왜! 중요한 점은 내가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일급살인죄로 날 기소했다. 그리고 모든 점들이 사실과는 다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여기서 모든 죄를 다 뒤집어써야 한다. 진상이 밝혀지면 내 형량은 최대 12년이다. 그것이 내가 적어도 이곳에서 6 내지 8년 정도만 더 버티면 된다는 문제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Q> 그를 죽였어야만 하는가?
A> 글쎄…. 그놈은 내가 죽였다. 그러나 그가 날 죽이려 했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다만 그는 해내질 못했을 뿐이다 하하. 그래서 내가 대신 그를 죽여버렸다. 솔직히 자기방어라고 말하진 않겠다. 왜냐하면 당시 현장에서 그는 진짜로 나를 위협하진 못했기 때문이다. 난 그를 두들겨 패버리거나 길거리 밖으로 걷어차버릴 수도 있었지만 죽여버렸다. 내가 그를 죽이지 않으면 그는 또다시 나를 죽이려고 했을 것이다. 두 번의 기회는 줄 수 없었다.

Q> 그가 왜 당신을 죽이고 싶어했나?
A> 중요한 점은 그가 1984년부터 블랙 메탈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는 항상 자신이 노르웨이 내 이쪽 계통에서의 왕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우리가 시작할 때쯤인 1991년도경엔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그 당시 상황은 열기가 오르고 있었다. 내 데뷔 앨범은 1992년 3월에, Immortal의 데뷔 앨범은 1992년 9월에 나왔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교회들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유로니무스는 정말로 방화에 몰두했고 항상 교회들이 불타오를 때마다 주위의 모든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가 다른 교회에 불을 질렀다'고 떠들어댔다. 또한 그는 사타니즘과 악마에 관련된 모든 것에 빠져들어갔다. 그런데 우리가 블랙 메탈 씬에 등장하기 이전에는 저런 것들 중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러자 점차 우리는 그가 짜증나기 시작했다. 비록 잠시 동안이었지만 우리 스스로를 사타니스트라 칭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늘 속으로 '나는 결코 진정한 사타니스트가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유로니무스 또한 그런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정말로 사탄이 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뭐 이런 염병할 문제에 대해 의견불일치가 생겼다.

Q> 그가 당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나?
A> 그가 나의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말했다. 그러자 나에게 이 얘기를 해준 그 친구에게 몇개의 편지가 도착했다. 이후 나는 그의 집 근처를 맴돌며 그를 향해서 내 주위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였다. 그날 우리는 새벽 3시경 성난채 말싸움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갑자기 그가 당황해있던 상태인 나를 공격하려 했었다. 그래서 난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서 부엌쪽으로 달려갔고 만약 그가 칼을 가지게 된다면 나를 해칠 테니 그가 칼을 가지기 전에 먼저 베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다시 그가 샷건이 있는 침실로 달려가길래 그를 잡아버렸다. 그러자 그는 비명을 지르며 온 동네의 초인종이란 초인종은 다 누르면서 살려달라며 도망을 쳤다. 골때린 상황이다. 그가 먼저 날 공격했는데 도와달라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하다니... 그것은 참 우스꽝스럽고 가련한 장면이였다. 이웃사람들은 경찰에게 사건 당시 얘기를 증언할 때 웬 여자의 비명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크하하하. 쫓고 쫓기면서 나는 그가 다시 공격하기를 기다리며 주시하고 있었고 그가 갑자기 내 뒤로 돌아와 날 치려하자 그의 머리를 찔러버렸다.

Q> 그를 죽였을 때 기분이 어떻던가?
A>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것은 그리 큰일이 아니다.

Q> 그를 죽일 당시 두렵거나 무섭지는 않았는가?
A> 내가 왜? 그냥 자연스럽게 죽였다. 내 생각에는 당신 역시 그렇게 위협받고 있는 특별한 상황이었다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런 히스테리가 살인동기가 된다는 뭐 그런 말이다.

Q> 그래도 사회적 규범은 지켜야 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면 모든 이들이 뛰며 달리며 서로들 죽이고 죽이려 할 텐데.
A> 물론 관습과 표준화된 법례는 필요하다. 하지만 돼지 같은 자식이 날 납치해서 구타와 전기충격기로 고문 끝에 죽이려는 계획을 짜고 있다면 당신 같으면 어쩌겠는가? 이건 당신이 얼마나 강한가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내가 그런 개쓰레기같은 자식한테 자비를 베풀라고? 웃기지 마라. 나는 사회의 법보다는 나의 법을 더 높이 산다. 날 죽이고 싶어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거기까진 좋다. 하지만 심각해진다면 내가 그를 먼저 죽여버릴 것이다.

Q> 노르웨이 블랙 메탈계에 널리 만연되어 있는, 그러니까 교회 방화, 살인 등등 이런 것이 음악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A> 내 생각엔 음악과 함께 할 수 있는 매우 작은 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노르웨이에 블랙 메탈 씬은 없었다. 요점은 당신이 지금 말한 그런 것들이 기사로 쓰인 그날 이후부터 우리는 노르웨이 블랙 메탈 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Q> 형기를 다 마치기 전에 나갈 수 있을 것 같나?
A> 누구나 그렇듯 12년 후에 보호 관찰로 나가게 된다.

Q> 당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얘길 부모님이 전해 듣고 놀라지 않으셨나?
A> 설마…. 우리 어머니의 반응은 내가 돼지를 죽였다고 생각하시는 정도다. 우리 어머니 역시 그를 결코 좋게 안 보셨다.

Q> 테러 행위, 악마적 의식, 강간 등으로 행해지며 운영되던 'Inner Circle'이라는 것이 실제로 어떤 것인가?
A> 그것은 유로니무스의 또 하나의 꿈이었다. 그는 Inner Black Circle을 만들려 했고 우리는 잠시 동안 같이 활동하였다. 하지만 그는 너무 심각했다. 사타니즘에 그렇게 심각하게 빠져들었던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다. 아무도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을 달리 원하지 않았다. 사탄을 향한 의식적인 강간도 없었고…. 하여튼 그의 공상은 무산되었고 그때부터 나를 비난했다. 내가 보기엔 사타니즘은 두 가지의 형태로 나뉘어진다. 첫 번째로 이러한 사타니즘이 있을 수도 있다. 중년 나이의 독일이나 영국 사람이 너무 많은 포르노를 봐서 극도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선 발기가 안되는 그런 상황이 있다 치자. 그럼 잠옷 속에 뿔 달린 악마의 형상 같은 것을 넣어두고 성행위를 할 경우 그것은 그들의 사타니즘이다. 안 그런가? 나머지가 바로 교회에 대한 사타니즘이다. 첫 번째와 같은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비슷한 연배의 여인들과 교류하지 못하는 중년 남자가 젊은 소녀를 데리고 교회로 들어가서 섹스를 했다면 그들은 그것이 무척이나 재미있는 일이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노르웨이의 어느 곳에서도 결코 존재할 수조차 없다. 이 나라에선 엄중한 법들 때문에 그런 음란물들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Q> 결혼하러 당신의 여자친구가 온다면 그것은 가능한가?
A> 지금 이곳은 당신이 문을 잠글 수도 있는 일반 면회실이다. 결혼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아니지만…. 결혼은 가능하다. 친구들이 면회를 왔을 때 - 물론 그들이 이곳에 올 수 있도록 허락이 먼저 나야겠지만 - 방안에는 동시에 경비들이 같이 있게 된다. 행여나 우리가 무슨 활동을 위해 계획 짠다는 것 자체가 당연 금지되어 있다. 내 여자친구가 온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젠장할.

Q> 뭔가 현재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있는가?
A> 난 노르웨이의 격한 상황 때문에 혼란에 빠져 있다. 노르웨이의 신앙은 어느 한 시점이 되면 안주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어떠한 것이라도 맞서 싸울 것이다. 그것이 외계인이라도 해도. 종교적인 뜻에서가 아닌 정략적인 셈어림과 인종적으로 말이다.

Q> 새 앨범 'Filosofem'에 대해서 말해달라
A> 그것은 1993년 3월에 녹음되었다. 정말 오래된 것이다. 그 테잎은 그동안 계속 스튜디오에 있었다. 제일 먼저 카피 작업이 끝났을 때 한번 들어봐야겠다.

Q> 앞으로 버줌은 어떻게 되는가. 다른 앨범 녹음도 가능한가?
A> 베르겐에서 녹음을 해봤다. 키보드 사용과 음악작업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래서 모든 것을 녹음해봤다.(주: Balder's Död) 감옥에는 4트랙 MTR 녹음기가 있어서 이걸로 녹음을 해서 Misanthropy로 보냈다. 모든 트랙은 연주곡에다 일렉트로닉한 앨범이다.

Q> 악명높은 평판과 장기간 동안의 감금이 매력이 되어 당신의 앨범은 꽤 많은 판매량을 올리고 있다.
A> 아무것도 보질 못해서 그쪽에 관해선 전혀 모르겠다. 그런 쪽의 정보를 입수해 듣는 것은 경비에게 의존하는 것 외엔 없다. 1994년 중순부턴 음악잡지조차 읽지 못했다. 알다시피 그건 내게 매우 힘든 일이다.

Q> 현재 활동 중인 많은 팀들이 당신을 경멸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나?
A>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모든 이들은 유로니무스가 아니라 나랑 얘기하려했다. 그것이 그가 날 엿먹이려 했던 이유 중 한 가지이다.

Q> 머리 색깔이라든지 외형은 왜 바뀌었는가?
A> 1992년도에 머리를 검은색으로 염색했었다. 94년도에 잠깐 염색을 풀고 머리를 깎았다가 모든 신문잡지들이 사진을 찍으면서 사타니스트라든지 기타 등등의 이미지를 위해 검은색이 좋다고 그렇게 하라고 해서 다시 검은머리로 염색했다.

Q> 앞으로의 미래는 어떻게 상상하는가?
A> 글쎄... 난 내 스스로 교육을 하고 결국엔 풀려날 것이다. 새로운 재판을 할 것이다. 그들은 달랑 편지 한 통으로 내게 21년형이라는 구형을 내렸다. 바로 이곳에서.

Q> 만약 내일 형무소에서 풀려난다면 삶이 좀 두렵지 않은가?
A> 뭣 때문에?

Q> 유로니무스의 친구 내지 멤버 또는 그의 가족들이 당신을 죽일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
A> 하하하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걸 확신한다. 하지만 난 내가 말한대로 아직 여기 이렇게 멀쩡히 서 있다. 어리석은 놈들만이 협박을 한다. 진짜 남자는 행동한다. 만약 그들이 정말로 날 죽이길 원한다면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에 대해 뻥까고 다니느니 차라리 그냥 입닥치고 기다렸다가 내가 여기서 나갔을 때 죽이면 되는 것 아닌가. 안 그런가? 요점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협박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기회가 왔을 때는 왜 죽이질 못했나? 내가 유로니무스를 죽였던 그 날은 누구든지 다 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를 죽이지 못하고 있다. 전혀 두려운 것이 없다.

4. 사건 이후

카운트는 2009년 16년의 복역 후 가석방 조치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2013년 7월 프랑스 사법 당국에 의해 테러 모의 혐의로 체포, 구속되었다. 관련 기사 그러나 며칠 뒤 확실한 혐의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기존의 혐의는 벗겨졌고 대신 인종 증오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만일 노르웨이 정부가 그의 가석방을 취소한다면 카운트는 바로 송환 조치되어 5년을 추가로 교도소에서 보낼 판이었다. 확실한 것은 그가 교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을 다룬 논픽션물인 '혼돈의 제왕'이 나왔고 일본 영화 감독인 소노 시온이 영화화하기로 했으나 카운트가 제작진을 향해 살해협박하는 바람에 유야무야된 듯하다. 2018년에 Bathory의 초기 드러머이자 뮤직비디오, 영화 감독인 조나스 애커룬드가 로드 오브 카오스라는 이름으로 영화화하였다. 그런데 영화는 사실과 다르게 유로니무스를 단지 폼만 좀 잡을 뿐인 선하기만 한 피해자로, 카운트 그리쉬니크를 스콜피온스를 좋아하는 채식주의자에 사타닉 서클의 범죄에 심취한 찌질이로 묘사하였다. 카운트 그리쉬니크도 해당 영화를 비판하면서 자신은 절대로 채식주의자가 아니며 오히려 육식주의자에 가까웠고 스콜피온스 같은 밴드는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유로니무스는 명확하게 게이였다며 해당 영화에 등장하는 유로니무스의 여자친구는 그저 그를 띄워 주기 위한 창작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1] 통칭 블랙손(Blackthorn). 사타닉 서클의 일원이자 원 맨 밴드 Thorns를 이끌었던 기타리스트. 유로니무스와 함께 De Mysteriis Dom Sathanas 앨범의 수록곡들을 작곡했다.[2] 스웨덴어, 노르웨이어로 가타(gata)는 '거리'란 뜻이다. 즉 퇴위엔가타는 '퇴위엔街'나 '퇴위엔路'란 뜻이 된다.[3] 블랙 메탈빠들이 올려 둔 사진을 보면 붉은색 벽돌로 된 4층짜리 공동주택이다. 한국에서라면 빌라 혹은 연립주택이라고 부를 것이다. 구글 어스에서 주소창에 +59.91535+010.76902(ISO 6709에 따른 위경도 표시. 북위 59.91535도, 동경 10.76902도)라고 치면 해당 건물을 볼 수 있다.[4] 카운트는 징역 21년만 선고받았기 때문에 무기수가 될 가능성이 없다. 오히려 무기수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20여 년 뒤 노르웨이 연쇄 테러를 저지른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크.[5] 인간 혐오라는 뜻으로 설립자는 바르그 비케르네스의 열성팬이자 노르웨이 고대 종교의 열성 신자인 여성이다.[6] 초명은 '크리스티안'이었지만 이 이름의 어원이 '그리스도교인'인 관계로 마음에 안 든다고 늑대라는 뜻인 '바르그'로 개명했다.[7] 실제로도 노르웨이는 스위스와 함께 수감자 처우와 교도소 시설이 가장 좋은 편인 나라다. 그 '유스호스텔'[8] 오슬로시 베스트로 아케르(Vestre Aker)구 홀멘콜렌동에 있으며 1903년에 완공되었다. 방화 사건으로 소실된 후 1996년 복원되었다.[9] 파나(Fana)구 나틀란드(Nattland)동 소재.[10] Arnfinn Nesset. 1936년생. 전직 간호사. 1983년 환자 22명을 독살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최대 138명을 죽였다는 말이 있다. 연쇄살인 혐의로 징역 21년을 선고받고 2004년 석방되어 현재는 모처에서 가명으로 산다고 추정한다.[11] "Metal Hammer" Magazine (January 1996). 번역: 하이텔 - Necro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