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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FFF> 이상아 李尙雅|Lee Sang Ah | |
이름 | 이민주 (李民柱) [1] |
출생 | 1972년 2월 14일[조기입학] ([age(1972-02-14)]세)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원적 | 평안남도 강서군 [3] |
본관 | 덕수 이씨 [4] |
신체 | 163cm, 45kg, 235mm, B형 |
학력 | 서울신용산국민학교 (졸업) 용산여자중학교[5] (졸업) 안양예술고등학교 (연극영화과 / 졸업) 서울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 전문학사) 학점은행제 (미용학 / 학사) |
부모 | 아버지 이경식[6], 어머니 박명숙 |
형제 | 언니 이상은, 여동생 이상희[7] |
자녀 | 딸 윤서진(2000년생)[8][9] |
친인척 | 조부 이종극[10], 숙부 이일[11] |
소속사 | 후이엔이(후엔터테인먼트) |
데뷔 | 1984년 4월 28일《KBS TV 문학관 131화 <산사에 서다>편》 |
종교 | 개신교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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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배우.2. 특징
1984년 중학교 1학년 때 KBS TV 문학관 131화 '산사에 서다' 편으로 연기자 데뷔하여,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하이틴 스타로 이름을 날렸다.1970년대, 80년대는 그야말로 가위질로 대변되는 검열의 시대였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당시 10대들은 암암리에 테이프나 LP, 영화 등을 소비하면서 문화 소비층이 되었고 이런 트렌드에 80년대 중후반 일약 스타덤에 오른 배우가 이상아였다. 당시 남자 중고생들의 일명 3대 여신이던 소피 마르소, 브룩 쉴즈, 피비 케이츠의 대항마로 떠오른 한국 여배우가 이미연과 이상아였다.[12]
한참 후 알려진 사실이나 어릴 적 연기 인생 중 고난이 있었다. 1985년 영화 '길소뜸'에서는 당시 중2였는데 임권택 감독에 의해 강제로 노출 및 베드신을 촬영해야 했다.#[13] 다행히 연기를 그만두지 않고[14] 이후에도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하이틴 스타로서 큰 인기를 얻으며 이름을 날리게 된다. 1970년대에는 이영옥, 임예진, 강주희 등이, 이후 이상아와 비슷한 시기에는 강수연과 조용원, 최수지, 김혜수, 하희라 등이 하이틴 스타로 크게 활약을 했다.[15]
영화 '비오는 날의 수채화', '너와 나의 비밀일기'를 비롯해 특히 대학생들한테 큰 인기를 끌었던 MBC 드라마 '마지막 승부'에 출연하면서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아이돌 스타 못지 않게 최고의 인기를 얻으며 각종 광고에 등장했다.
1997년 동갑내기 개그맨 김한석과 결혼했으나, 바로 1년 후 이혼했다. 이혼이 '사고'로 취급되던 만큼 다른 이혼 연예인들처럼 방송활동이 뜸해졌다가 한참 후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와 SBS 아침 드라마 '순결한 당신' 등으로 복귀하는 듯 했으나 다시 활동이 뜸해졌다. 이 시기에 성형외과 코디네이터로 근무했다는 루머가 들리기도 했으나, 나중에 본인이 "병원 광고모델로 활동했을 뿐 방송계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고 해명했으며, 오랜 공백기 끝에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연예계에 복귀하였다.
3. 출연작
3.1. 드라마
- 터치 - 2020
- 전생에 웬수들 - 2018
- 언제나 봄날 - 2016
- 스타박'스 다방 - 2015
- 순결한 당신 - 2008
- 오남매 - 2002
- 그래도 사랑해 - 2001
- 만남 - 1999
- 그녀의 선택 - 1999
- 7인의 신부 - 1998
- 행복을 만들어 드립니다 - 1998
- 아무도 못말려 - 1997
- LA아리랑 - 1997
- 미스 & 미스터 - 1997
- 여자 - 1997
- 재동이 - 1997
- 남자 셋 여자 셋 - 1997
- 남자대탐험 - 1996
- 만남 - 1996
- 내 사랑 유미 - 1995
- 다시 만날 때까지 - 1995
- 좋은걸 어떡해 - 1994
- 무당 - 1994
- 마지막 승부 - 1994
- 사랑과 우정 - 1993
- 뜨거운 강 - 1993
- 나팔꽃 - 1993
- 걸어서 하늘까지 - 1993
- 추리 3부작 - 1992
- 목소리를 낮춰요 - 1991
- 고독의 문 - 1991
- 3일의 약속 - 1991
- 몽기미 풍경 - 1990
- 완전한 사랑 - 1990
- 독도수비대 - 1989
- 호랑이 선생님 - 1981 ~ 1986
- 사랑이 꽃피는 나무 - 1987~1990
3.2. 영화
- 씬 - 2024
- 스타박'스 다방 - 2018
- 스피드 - 2015
- 천하장사 마돈나 - 2006
- 아빠는 보디가드 - 1995
- 넝쿨 속의 히야신스 - 1992
- 성인신고식 - 1990
- 쫄병수첩 2 - 1990
- 비오는 날의 수채화 - 1989
- 아낌없이 주련다 - 1989
- 팁 - 1988
- 너와 나의 비밀일기 - 1987
- 얄숙이들의 개성시대 - 1987
- 학창 보고서 - 1987
- 말괄량이 대행진 - 1986
- 젊은 밤 후회없다 - 1986
- 길소뜸 - 1985
4. 여담
- 길소뜸 공개 당시 또래 중학생들 사이에선 '이상아가 (임권택이 아닌) 아버지 이경식 감독 영화에 출연해 전라 연기를 펼치다 학교에 걸려 퇴학을 당했다'는 괴소문이 돌았다. 소문이 돌고있던 중학생들의 경우 길소뜸 자체에 관심을 가질 나이도 아니였고 인터넷 등을 통해 정보 수집이 원활하던 시절도 아니다 보니 그냥 다 믿는 추세였다. 여학생들은 이상아를 '중학교를 퇴학 당한 발랑 까진 여자'로 소문을 내는 등 심한 질투를 받아야만 했던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 개신교 모태신앙 신자다. 그래서인지 무당 촬영 당시 애를 많이 먹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상아는 교회 목사로부터 그만 두라는 충고를 받았고, 신앙적 문제로 초기부터 고통스러웠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 원래 넉넉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집안이었지만[16], 이상아가 연기 생활을 한 이후부터 어머니가 이상아의 매니저를 하면서 가족들은 딸의 수입에 의존, 흔한 헐리우드 아역배우의 부모처럼 가족 중 아무도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17] 아버지는 이상아가 벌어오는 수입을 매번 탕진했으며, 이상아가 조금씩 주목받기 시작한 중학교 초반에 영화감독 출신이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언니와 여동생의 학비[18], 결혼 비용까지 다 마련해야 했다고 한다. 그 탓인지 모르겠지만 인생의 굴곡이 심한 편이었다. 나중에 본인이 방송에 나와 이야기하길, 자기가 돈벌이 수단일 뿐인 억압된 집에서 탈출하기 위해 서둘러 김한석과 결혼했다고.
- 1997년에 동갑 개그맨 김한석과 결혼했지만 1년 만에 이혼하고, 2000년 가수 겸 영화 기획자 전철과 재혼했으나 1년만에 이혼했다.[19] 이후 2003년 윤기영과 결혼했지만, 2016년에 결국 이혼 보도 기사가 나왔다.
- 손지창이 방송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마지막 승부의 원래 여주인공은 심은하가 아닌 이상아였다고 한다. 복잡한 사유로 바뀐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성 조연으로 캐스팅된 여배우가 초반 연기연습 때 너무 못하는 바람에 잘리게 되었고, 그 조연을 채우기 위해 제작진들이 신인 탤런트 중에 찾다가 심은하를 찾게 되었는데 아예 심은하가 주인공 이미지에 더 잘 어울린다고 판단하는 바람에 심은하가 주인공이 되어버렸고, 연기력에 문제도 없고 인지도도 높았던 이상아[21]는 그 잘린 여배우의 조연 자리로 가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드라마가 공전의 대히트작[22]이 된 걸 보면 이상아에게는 억울한 사연.
- 한참 이승희 열풍의 영향 후 한국의 '미야자와 리에의 산타페'가 될 수 있다는 꼬드김으로 대한민국에 수준 미달의 디지털 누드 화보 기획이 유행하던 시절 역시 디지털 누드 화보를 발매한 적이 있다.
- 2019년 1월 1일 tvN 둥지탈출 시즌3에 첫 출연해 딸 윤서진과 함께 출연하였다. 하지만 악플이 이어졌고 사유는 계속된 3번의 결혼과 이혼. 방송에서 언급했지만 "딸도 이제 컸고 검색하면 엄마의 사생활은 다 나온다. 사생활에 대해 얼마나 싫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라고 고백했다.
- 방송 이후 이상아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둥지탈출 어떠셨나요? 화려한 댓글들 여전하더군요. 우리 주니어가 상처를 안 받았음 좋겠네요"라고 글을 올렸다. "참나. 아직도 결혼 3번째.. 뭐 이런 얘기 이제 식상하지 않나요? 남 얘기 너무들 쉽게 하는 세상. 요즘 세상.. 모든 일들이 나한테도 닥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함부로 쉽게 말하지 못할텐데 아쉽네요"라고 덧붙였다. 끝으로 그는 "인생 한 치 앞도 못 보는데.. 내일을 점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란 글을 더했다.
- 다만 이후에도 딸을 향한 악플이 계속 이어지자 2019년 1월 4일 "살면서 좋은 말만 듣고 살 수는 없지만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말로 사람을 죽이는 수준"이라며 고통을 토해냈다. "부득이하게 인스타그램 친구를 정리하게 됐다며 게시물 30개 이하, 비공개인 분들은 차단할 것. 이해 부탁드린다"라고 당부했으며, 소속사 마라톤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자신과 딸에 대해 악성 댓글을 게시한 네티즌에 대해 고소장을 제출한 사실을 알린 바 있다. #1 #2
- 예능 프로그램에서 두 번째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회상하며 축의금을 빼앗긴 이야기를 고백했다.#
[1] 2005년에 본명인 이상아에서 '이민주'로 개명했으나, 1년 뒤인 2006년부터 본명인 '이상아'로 활동명을 변경했다. 출처[조기입학] 1987년에 용산여중을 졸업했다.[3] 조부, 부친의 고향으로 실향민/대한민국 출신 3세이다.[4] 충무공파 파조{諱.舜臣(순신)}[5] 現 용강중학교[6] 1926년 3월 27일~? , 평안남도 강서군 출생, 영화감독 제작자 작가. 서울사범학교 본과 3년 졸업. 1956~1957년 유현목 감독 밑에서 조연출 활동. 소낙비(1958) 연출, 별들의 화원(1960) 제작 각본 연출, 춘향전(1961) 조연출, 비단이 장사 왕서방(1961) 제작[7]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 학사. 필라테스 강사. TV조선 엄마가 뭐길래 63회 출연(2017.1.26)[8] 2018년에 고3이었던 딸의 인스타그램의 팔로워가 6만 명이 넘는 수여서 화제가 되었다.#[9] 2번째 남편 소생.[10] 제6대 국회의원(전국구), 제3대 민주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11] 본명:이진식 (1932.1.22~1997.1.27) 평안남도 강서군 출생. 전 홍익대 교수, 특파원 출신 미술평론가. 프랑스 문화예술훈장(1995) 보관문화훈장(1999). 저서 : 현대미술의 시각(1985), 서양미술의 계보(1992)[12] 소피 마르소는 1966년 11월생, 브룩 쉴즈는 1965년 5월생, 이상아는 1972년 2월생으로 훨씬 더 앞선 세대지만(세 여배우 모두 이상아가 데뷔하기도 전에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성인 연기자들이었다), 당시에는 외국 영화가 몇 년 뒤에 한국에 들어왔다. (물론 일본 영화 잡지를 통해 개봉 전 먼저 알려지긴 했다.) 참고로 1970년대 후반에 이미 유명해진 두 여배우에 비해선 조금 늦게 데뷔한 피비 케이츠의 경우에는 고교 때 데뷔한 두 여배우와는 다르게 파라다이스를 찍던 1981년에 이미 줄리아드 스쿨을 다니던 대학생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본격 연기 생활을 한 이상아는 고교생 때부터 제대로 활동한 이미연과는 같은 학년이자 5개월 차이가 나며, 전성기는 좀 차이가 난다.[13] 대본도 안 주고 연기를 시키다가, 필요한 시점이 되자 "안 찍으면 찍은 장면 다 물어내야 된다"라고 협박했다고 한다.[14]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으로 데뷔한 이효정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고 사실상 그 영화가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개봉 당시에는 예능에도 출연하고 라이징 스타 취급을 받았지만 사실상 은퇴 후 단역만 한두 번 했을 뿐이다.[15] 비슷한 연배인 최진실은 성인이 되어 연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하이틴 스타는 아니었다. 나이는 최진실이 3살 많지만, 이상아가 널리 알려진 시기는 최진실보다 5년쯤 더 빠르다.[16] 용산구, 한강대교에서 가까운 데에 있는 빌라에 살았었다.[17] 고 최진실의 집안 또한 뜨고 나자 아무도 일 안 하고 의존하여 살았다고 한다.[18] 특히 여동생은 예체능, 그것도 돈이 엄청나게 드는 무용을 전공했다.[19] 딸의 돌잔치 사진만은 남겨 두고 싶어 딸의 돌잔치가 끝나자마자 바로 이혼했다고 한다.[20] 출처: 두시탈출 컬투쇼 2013년 4월 13일 방송[21] 나이는 같아도 이상아는 아역스타 출신으로 연기경력이 길어, 당시 성인이 되어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심은하보다 훨씬 인기와 인지도가 높은 선배였다. 심은하는 사실 데뷔 1년차 배우로 데뷔가 몇 달 되지 않아 단역 정도만 전전하고 있었다.[22] 심은하와 비슷한 신인이었던 신은경도 이 드라마에서 심은하처럼 비중이 높지는 않았어도 조연을 했고 드라마의 대히트로 인지도를 올려, 이후 종합병원이라는 드라마에 주요 배역으로 섭외되며 스타가 되었다. 마지막 승부에 출연한 당시 인지도 낮은 신인배우들은 마지막 승부로 인해 잘 나가게 된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