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17:33:19

이안 커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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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영국 대중음악 전문잡지 “Q” 매거진이 'Q magazine 21st anniversary issue- 204 page collector's issue'에서 음악의 판도를 바꿔놓은 21인을 선정했다.
엘비스 프레슬리 제임스 브라운 밥 딜런 비틀즈 지미 헨드릭스 벨벳 언더그라운드 크라프트베르크
레드 제플린 데이비드 보위 섹스 피스톨즈 브라이언 이노 마이클 잭슨 마돈나 R.E.M.
퍼블릭 에너미 리 스크레치 페리 이안 커티스 이안 브라운 커트 코베인 라디오헤드 데이먼 알반 }}}}}}}}}



<colbgcolor=#000><colcolor=#fff> 이안 커티스
Ian Curtis
파일:external/36.media.tumblr.com/tumblr_ncndyoB9Rh1sn1niho4_400.jpg
본명 Ian Kevin Curtis
이안 케빈 커티스
출생 1956년 7월 15일
잉글랜드 그레이터맨체스터 주 트래포드 스트랫퍼드
사망 1980년 5월 18일 (향년 23세)
잉글랜드 체셔주 메이클즈필드
국적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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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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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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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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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가수
소속 조이 디비전
악기 보컬, 기타[1], 멜로디카
활동 시기 1976년 ~ 1980년
신체 185cm
배우자 데보라 커티스 (1975년 ~ 1980년)
자녀 나탈리 커티스 (1979년 출생)
레이블 팩토리 레코드
1. 개요2. 생애 및 활동 내역
2.1. 어린 시절2.2. 조이 디비전 활동2.3. 우울증과 사망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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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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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 활동했던 영국 맨체스터 출신 4인조 포스트 펑크 밴드 조이 디비전의 보컬.

특이한 중저음 목소리와 막춤으로 조이 디비전을 유명하게 만들었으나, 안타깝게도 본인은 간질 증세와 우울증을 견디지 못하고 23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이후 조이 디비전은 해체되지만, 남은 멤버들은 뉴 오더라는 그룹을 만들어 신스팝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일찍 사망했지만 대중음악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1970년대 말~1980년을 상징하는 음악가들 중 하나로 꼽힌다.

2. 생애 및 활동 내역

2.1. 어린 시절

1956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부터 시와 문학을 탐닉한 이안은 장학금을 받을 만큼 우수한 학생이었으나 학업보다는 예술에 관심이 있어 학교를 그만두었다. 10대 시절에는 데이비드 보위, 짐 모리슨, 이기 팝같은 뮤지션들에게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세가 되던 1975년 소꿉친구였던 데보라 우드러프(Deborah Woodruff)와 결혼하였다.

2.2. 조이 디비전 활동

1976년 맨체스터를 방문한 섹스 피스톨즈의 콘서트에서 같은 동네 친구였던 버나드 섬너, 피터 훅, 테리 메이슨과 함께 밴드를 만들기로 한다. 이후 모집을 통해 드러머 스티븐 모리스를 영입하면서 밴드의 라인업이 완성되었고, 밴드의 이름은 데이비드 보위의 앨범 Low의 노래에서 따온 바르샤바(Warsaw)로 정한다. 하지만 비슷한 이름의 그룹이 활동한다는 것을 알고서 조이 디비전이라는 이름으로 최종 결정 되었다. 에후의 밴드 활동은 조이 디비전 항목 참고.

2.3. 우울증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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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14524.jpg|width=100%]]
사망 5일 전, 자신의 딸과 함께 찍은 생전 마지막 사진
1978년 처음 발작 증세를 가지게 되었고[2] 조이 디비전 활동을 계속하면서 이안은 점점 우울증뇌전증 증세로 건강이 악화되어 간다. 또한 어린 나이에 결혼해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음악가로서의 야망에 균형을 맞추는 데에 큰 부담을 느꼈다. 그러던 중 이안은 아닉이라는 벨기에 출신의 저널리스트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그녀와 아내 사이에서 갈등하게 됐고 결국 1980년 5월 18일 조이 디비전의 첫 미국 투어를 앞두고 자택 부엌에서 빨랫줄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시신은 아내 데보라가 처음 발견하였고 발견한 당시에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그러나 2010년 아닉은 이안과는 불륜 관계가 아니었으며, 두 사람은 플라토닉한 사랑을 나누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안이 죽고 2개월 뒤 조이 디비전의 마지막 정규 앨범 'Closer'가 발표되었다. 'Closer'의 수록곡 중에는 그의 죽음을 암시하는 가사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조이 디비전의 멤버들은 이안이 죽고 난 뒤에야 그의 가사 내용을 제대로 읽어보았다고 말했다.

팩토리 레코드의 사장 토니 윌슨은 후일 인터뷰에서 "나는 우리 모두가 그의 자살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실수를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그 위험을 완전히 과소평가했다. 우리는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만큼 우리는 멍청했다"라고 말했다. # [3]

이안이 사망한 뒤 남은 조이 디비전의 멤버들은 새로운 밴드를 결성했는데, 그것이 바로 뉴 오더이다.

3. 여담

  • 대중에게 알려진 이안 커티스는 상당히 음울하고 어두운 이미지이지만 본래는 상냥하고 나긋나긋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대에만 올라가면 사람이 신경질적이고 날카롭게 변했다는 스티븐 모리스의 후일담을 들어보면 일종의 무대 공포증이 있었던 듯 하다.
  • 노래할 때와 달리 평소 그의 목소리는 오히려 테너에 가까웠다고 한다. 바르샤바 시절의 EP와 인터뷰 음성을 들어보면 정규 앨범에서의 목소리와는 사뭇 다르다.
  • 골초였다. 이안 커티스의 전기 영화 <컨트롤>을 보면 영화 상영 시간 내내 담배를 손에 들고 있는 이안 커티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라이브 퍼포먼스 중 특유의 괴상한 춤이 유명하다. Northern Lights cassette magazine (1979) 와의 인터뷰에서 춤은 노래의 감정과 가사의 내용을 표현하고자하는 방식이라고 밝혔으며, 몇몇 팬들은 그의 간질 발작 증세와 고통을 표현한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 어린 시절 술, 담배, 음반을 구할 돈이 부족했던 탓에 동네 가게에서 음반을 훔쳐 외투에다 숨겨 가곤 했다고 한다.
  • '컨트롤'은 이안 커티스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이다. '컨트롤'을 제작한 감독 안톤 코빈의 경우 젊은 시절 조이 디비전의 사진을 촬영한 적이 있다.
  • 이안 커티스가 쓴 가사와 메모들을 모은 책인 'So This is Permanence'[4]가 출간되었다. 출처
  • 1집 'Unknown Pleasures'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돈벌이가 충분하지 않았기에 공연이 끝나고 나면 공연장 청소를 해서 돈을 더 받기도 했다.
  • 이안은 햇빛 알레르기가 있어 햇빛에 장시간 노출되면 살갗이 발갛게 부어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이안은 작업실 내부에 햇빛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검은 커튼을 쳐놓아야 했다.
  • 1980년 이안 커티스가 미국 진출을 앞두고 BBC에서 했던 인터뷰가 유튜브에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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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이 디비전의 1,2집을 프로듀스한 마틴 하넷은 이안의 죽음 이후 엄청난 충격을 받고 이 여파로 헤로인을 시작하였고, 폭음과 마약 사용으로 인해 후에 그가 1991년 심장마비로 급사할 때에는 165kg에 이를 지경이었다고 한다.
  • 조이 디비전 활동 장소나 태어난 곳은 맨체스터지만, 이안 커티스의 가족은 맨체스터와 조금 떨어진 체셔에서 살았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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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버나드 섬너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안 커티스의 음악적 취향은 독일의 크라우트록이나 벨벳 언더그라운드, 이기 팝 등 미국에서도 마이너하기 짝이 없는 뮤지션들을 찾아 듣는, 오늘날로 치면 힙스터스러운 취향이었다고 한다. 반면 다른 멤버들은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딥 퍼플 등 자국의 유명 밴드들을 주로 듣는 지극히 평범한 취향이었고, 스티븐 모리스는 재즈 리스너였다. 이안은 이런 멤버들에게 언더그라운드 록음악을 알려주는 일종의 선생 같은 역할을 했다고. 훗날 밴드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 도어즈 음악을 멤버들에게 처음 소개한 게 다름아닌 이안이었고, 사실 다른 멤버들은 그 전까지 도어즈가 뭔지도 몰랐다고 한다.
  • 영국, 특히 락 음악가들 중 흔치 않게 보수주의자로 보이는데,[6] 마거릿 대처의 지지자였다.# [7] 물론 단순 보수주의자라고 속단할 수는 없는 것이, 당시 영국은 노동당 정부의 무능한 경제 정책으로 극한의 파업과 경제 침체기를 맞이한, 일명 영국병 시기였기에 진보 성향을 가진 사람들도 노동당을 혐오했다.[8]
  • 맨체스터 시티 FC의 팬이었다. 조이 디비전 멤버 중에서 유일하게 축구에 관심이 있었다고.


[1] 버나드 섬너가 신디사이저를 연주할 때는 직접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섬너의 기타를 연주했으나, 1979년 9월 이후 자기 기타를 마련했다. 기타 모델명은 Vox Phantom Special VI. 뉴 오더의 초창기 시절 섬너는 이안의 기타를 종종 사용하기도 했다.[2] <컨트롤> 영화에서는 조이 디비전 멤버들과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오한을 느끼던 이안 커티스가 갑작스럽게 간질 발작을 일으키고 급하게 병원으로 이송되어 뇌전증 진단을 받는 것으로 묘사되었다.[3] 이는 멤버이자 동료였던 이안의 죽음을 미리 막지 못했다는 자책 뿐만 아니라 훗날 토니의 전무한 경영능력에서 비롯된 팩토리 레코드의 몰락과도 관련된 말이기도 하다.[4] Closer의 곡 Twenty Four Hours의 첫 구절을 따온 것.[5] 이안 외에도 스티븐 모리스나 질리언 길버트도 같은 동네 출신이다.[6] 노동 계급 출신이 많은 영국 음악가들은 대다수 진보주의자인 경우가 많다. 당장 영국 대중음악계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작곡가들인 존 레논, 로저 워터스, 노엘 갤러거 모두 스펙트럼은 다를지라도 지지 진영을 평가하자면 전부 진보 진영에 묶인다. 확실한 보수주의자의 경우 이안 커티스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극우인 에릭 클랩튼을 제외하더라도 필 콜린스, 브라이언 메이, 믹 재거 정도가 전부였고 이마저도 재거는 지지 정당만 골수 보수당이지 리버럴한 면모를 자주 드러내는 편이다. 지금은 브라이언 메이는 진보 성향이고 대신 로저 달트리가 보수로 전향했다.[7] 영화 컨트롤에서도 자신이 보수당이라고 툭 던진 이안의 말에 "그럼 넌 나치냐?"고 되묻는 장면이 잠시 등장한다. 조이 디비전의 밴드명의 유래와 EP의 히틀러 유겐트 표지 등으로 생긴 나치즘 오해까지 이용한 일종의 블랙 조크.[8]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영국 음악계를 대표하는 최흉의 독설가 존 라이든. 그 시절의 그 양반이 까지 않고 넘어간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넘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