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fff> | Factory Records 팩토리 레코드 | }}} | ||
<colbgcolor=#fff><colcolor=#000> 설립 | 1978년 | ||||
해산 | 1992년 | ||||
본사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맨체스터 | ||||
설립자 | 토니 윌슨 앨런 에라스무스 마틴 하넷 롭 그레튼 | ||||
장르 | 포스트 펑크, 신스팝, 얼터너티브 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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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8년 토니 윌슨과 앨런 에라스무스가 설립한 영국 맨체스터의 인디 레이블이다. 1980년대를 풍미했던 영국의 음반사 중 하나다.2. 역사
2.1. 1970년대
팩토리 레코드의 공동 설립자인 토니 윌슨은 맨체스터 솔포드(Salford)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언론계에서 일을 시작했으며, 1970년대 중후반에 영국의 펑크 록 운동을 옹호하는 몇 안 되는 지역 예술 문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 하나인 소 잇 고스(So It Goes)[1]의 진행자였다. 사실 토니 윌슨은 'So It Goes'가 첫방송되기 한 달 전부터 펑크에 빠져있었다.1976년 6월, 토니는 맨체스터의 레서 프리 트레이드 홀(Lesser Free Trade Hall)에서 열린 섹스 피스톨즈의 전설적인 공연을 봤다. 이들의 공연에 충격을 받은 그는 펑크 록의 엄청난 팬이 됐다. 이후 토니는 섹스 피스톨즈를 자신의 방송에 출연시켰고, 블론디, 패티 스미스, 더 잼과 같은 펑크 아티스트를 방송에 소개했다. 'So It Goes'는 BBC가 제작한 음악 방송인 '탑 오브 더 팝스'와 '더 올드 그레이 휘슬 테스트'(The Old Grey Whistle Test)에 필적하는 인기를 보여줬다. 이 방송은 영국의 펑크 열풍에 불을 지폈으며, 펑크 씬에서 떠오르는 신인 밴드들이 방송에서 공연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더 클래시, 수지 앤 더 밴시스, 버즈콕스, 이기 팝 등이 이 방송에서 공연을 했다.
토니는 펑크 록 밴드를 TV에 출연시키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고, 친구 앨런 에라스무스(Alan Erasmus)[2]와 함께 지역에 있는 무명 밴드를 매니징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자신의 음악적 관심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1978년 4월 토니는 래프터스 클럽에서 열린 '스티프-치스윅 챌린지'(Stiff/Chiswick Challenge)에 방문했다. 이날 밤 출연한 밴드중에는 이안 커티스라는 이름의 프론트맨이 이끄는 4인조 밴드 조이 디비전이 있었는데, 이 밴드는 토니를 완전히 사로잡는 폭발적인 공연을 했다. 클럽의 DJ인 롭 그레튼[3]도 마찬가지로 황홀해했다. 토니는 즉시 조이 디비전에게 접근했으며, 이들에게 "당신들의 매니저가 되고싶다"라고 제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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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피터 새빌, 토니 윌슨, 앨런 에라스무스 |
또한 토니와 앨런은 영국의 북서쪽에서 떠오르고 있는 다른 신인 밴드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매니징하고 있는 밴드들을 소개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 1978년 5월, 토니와 앨런은 맨체스터의 모스 사이드 지역에 위치한 '러셀 클럽'(The Russel Club)이라고 불리는 건물을 구입했다. 그들은 금요일 밤에 장소를 받았고, 앨런의 제안으로 이 클럽은 '더 팩토리'(The Factory)라고 이름지었다. 또 토니와 앨런은 새로운 클럽을 홍보하기 위해 그래픽 디자이너를 고용했다. 이 디자이너가 바로 조이 디비전과 뉴 오더의 앨범 아트를 디자인한 피터 새빌(Peter Saville)이다.[4] 또한 팩토리 소속 아티스트들의 음반을 프로듀싱할 인물도 고용했다. 이 프로듀서는 조이 디비전의 많은 음반을 프로듀싱한 것으로 유명한 마틴 하넷(Martin Hannett)이다. 팩토리 레코드 설립 초기에는 이 두 명이 프로듀싱과 디자인을 전속으로 담당해 레이블의 통일된 사운드와 비주얼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클럽을 만든 이후 그동안 눈여겨봤던 밴드 조이 디비전과 레코딩 계약을 맺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팩토리 레코드를 출범해 음반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당시 토니는 아티스트들과 가장 느슨한 형태로 계약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 계약은 그가 소속 아티스트의 어떤 레코딩에도 관여하지 않고, 창작의 자유를 제공했으며, 모든 수익을 50대 50으로 나누도록 규정했다. 이 느슨한 계약은 팩토리 레코드의 모든 계약에 템플릿이 되었고, 즉시 팩토리를 음악계의 유일무이한 존재로 만들었다. 또한 토니는 음반사 사장임에도 불구하고 매출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 이상주의적이고 급진적인 경영을 했다. 그는 돈보다 아이디어의 품질과 진실성, 예술품의 표현과 영향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 디자이너 피터 새빌은 후일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상주의와 순진함으로 팩토리 레코드를 설립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파격적인 경영은 팩토리의 가장 큰 자산이자 가장 큰 약점이기도 했다.
특히 내가 토니에 대해 좋아했던 것 중 하나는 그가 돈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그의 예술을 위한 것이거나, 예술에 대한 그의 해석을 위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돈을 50대 50으로 나누는 것은 그의 아이디어였지만,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우리 음악에 관해서는 매우 손을 떼고 있었고, 우리에게 음악을 맡겼다. 이것은 레코드를 운영하는 상당히 무정부적인 방법이다. 우리는 또한 음악이 스스로를 대변해야 한다고 믿었고, 본질적으로 반 홍보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음반 표지에 우리의 이름을 올리지도 않았고, 음반을 판매하는 우리의 태도는 형편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팩토리는 중간에 일시적 하락을 제외하고, 조이 디비전과 뉴 오더의 성공으로 적어도 10년의 환상적인 시간을 보냈다.
피터 훅 #
피터 훅 #
토니는 제가 돈을 다른 밴드 멤버들과 똑같이 나누길 원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모든 것이 훨씬 더 부드럽게 진행될 것이기 때문에, 저작권료를 공유하고, 모든 것을 동등하게 공유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했고, 그거 아세요? 그것은 제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였습니다. 그것은 저를 웃게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토니가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숀 라이더 (해피 먼데이즈의 보컬) #
숀 라이더 (해피 먼데이즈의 보컬) #
1978년 소속 아티스트인 조이 디비전, 두리티 칼럼(The Durutti Column)[5],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를 위한 라이브 이벤트 '팩토리 클럽'을 개최했다. 다음 해인 1979년 1월에는 팩토리의 첫 번째 공식 레코딩인 EP 'A Factory Sample'를 발표했다. 팩토리 클럽에서 연주한 밴드들의 노래를 모은 EP로 조이 디비전, 존 도위(John Dowie), 카바레 볼테르, 두리티 칼럼의 노래가 수록됐다. 이 EP에는 'FAC-2'[6]라는 넘버링이 붙었다. 이 넘버링은 팩토리 레코드를 상징하는 독특한 시스템인데, 레이블에서 제작한 모든 것에 카탈로그 넘버를 부여하는 시스템이었다. 심지어 그림, 건축물, 문서, 기념일, 기타 잡다한 것에도 넘버링이 붙었다.
1979년 6월, 조이 디비전은 팩토리 레코드와 함께 데뷔 앨범 'Unknown Pleasures'(FACT 10)를 발매했다. 이 앨범은 팩토리 레코드의 첫 번째 스튜디오 앨범이기도 했다. 발매 당시에는 큰 성공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7], 비평가들에게 찬사를 받은 이 앨범으로 조이 디비전과 팩토리 레코드는 헌신적인 추종자를 얻었다. 오늘날 이 앨범은 포스트 펑크를 대표하는 명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Unknown Pleasures' 발매 이후, 조이 디비전의 인기는 꾸준하게 상승했다. 그러나 팩토리 레코드의 경영진은 근심 걱정 없이 쾌락적인 생활을 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고 있었다. 당시 이들은 레이블의 경영과 재정적 방편보다 히피적 이상주의, 화려한 미학 및 문화적 의미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
2.2. 1980년대~1990년대
나는 우리 모두가 그(이안 커티스)의 자살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실수를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그 위험을 완전히 과소평가했다. 우리는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만큼 우리는 멍청했다.
토니 윌슨 #
토니 윌슨 #
1980년 3월 조이 디비전은 2집 'Closer'(FACT 25)의 녹음을 마쳤다. 그러나 1980년 5월 18일 아침, 이안 커티스가 자신의 집 부엌에서 자살한 채로 발견되었다. 이안의 죽음은 조이 디비전 멤버들과 팩토리 레코드 경영진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안이 사망하고 한 달 뒤에 발매한 조이 디비전의 싱글 'Love Will Tear Us Apart'(FAC 23)는 UK 인디 차트 1위, UK 차트 13위를 기록해 큰 성공을 거뒀다. 이 싱글은 팩토리 레코드의 첫 히트작이었다. 1980년 7월 팩토리 레코드와 조이 디비전의 남아 있는 멤버들은 조이 디비전의 후신인 신스팝 밴드 뉴 오더를 출범했다. 뉴 오더는 1981년 1월에 데뷔 싱글 'Ceremony'(FAC 33)를 발표했으며, 같은 해 11월에 데뷔 앨범 'Movement'(FACT 50)를 발표했다. 뉴 오더는 데뷔 이후 많은 싱글을 히트시키며, 빠른 속도로 인기 밴드 반열에 올랐으며 팩토리 레코드의 간판 밴드가 됐다.
1982년 팩토리 레코드의 경영진은 맨체스터에 새롭고 큰 나이트클럽을 열어 레이블의 영원한 집을 짓겠다는 발표를 했다. 이안 커티스의 자살의 비극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레이블의 공동 설립자인 롭 그레튼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이 클럽은 팩토리 레코드와 뉴 오더에 의해 공동으로 자금이 조달됐다. 그래서 뉴 오더도 이 클럽의 공동 창업자다. 팩토리의 전담 프로듀서였던 마틴 하넷은 이 클럽이 45만 파운드라는 거액의 비용이 든다는 것을 알고 레이블을 그만두었다. 이 클럽의 디자인은 토니 윌슨이 뉴욕 여행 중 뉴 오더와 함께 방문했던 클럽에서 영감을 받았다. 토니는 이 나이트클럽을 창조성과 문화적 혁신이 꽃피울 수 있는 공간인 '맨체스터 사람들을 위한 대성당'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고향인 맨체스터의 부흥을 원했다. 피터 훅에 의하면 당시 맨체스터는 빠르게 쇠퇴하고 있었다고 한다. #
하시엔다가 나에게 제안되었을 때, 나는 '러셀 클럽' 같은 예전 팩토리 나이트 클럽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것이 그렇게 방대하고 웅장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토니였다. 그는 아이디어를 생각해서 가능한 한 크게 만들었다
스티븐 모리스 #
스티븐 모리스 #
1982년 5월 21일, 도심에 있는 판매실을 개조해 나이트클럽을 본격적으로 오픈했다. 클럽의 이름은 하시엔다(The Haçienda)[8]였다. 하시엔다는 급진적이고 미래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했지만, 처음에는 미온적인 반응을 얻었다. 하시엔다는 낮은 입장료로 인해 한 달에 5만 파운드의 적자를 내고 있었다. 근처에 있는 일반 술집보다 저렴했다고 한다. 또한 더 스미스, 마돈나[9] 같은 유명 아티스트들이 공연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좌석은 꽉 차 있지 않았다. 이듬해인 1983년 3월, 뉴 오더가 다섯번째 싱글 'Blue Monday'(FAC 73)를 발표했다. 'Blue Monday'는 팩토리 레코드 역사상 가장 큰 히트곡이었으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12인치 싱글(Twelve-inch single)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팩토리 레코드는 적자였다. 'Blue Monday'의 플로피 디스크처럼 보이도록 디자인된 화려하고 비싼 음반 커버 덕분에 큰 손실을 입었다.[10]
1985년에 토니 윌슨은 더 많은 신예 밴드를 발견하기 위해 하시엔다에서 'Battle Of The Bands'라는 음악 경연 대회를 개최했다. 난잡한 연주에도 불구하고 토니 윌슨의 지지를 얻은 밴드는 해피 먼데이즈라는 젊은 밴드였다. 이후 해피 먼데이즈는 팩토리와 정식으로 레코딩 계약을 체결했다. 이듬해인 1986년에는 일렉트로닉 뮤직(정확히 애시드 하우스)이 영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 하시엔다의 인기도 덩달아 급상승했다. 하시엔다는 하우스 음악과 테크노를 연주하기 시작한 최초의 영국 클럽들 중 하나였다.[11] 하시엔다는 애시드 하우스 혁명의 핵심이었으며, 당대의 문화적 중심지로 성장했다. 그리고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의 격앙된 문화와 '매드체스터' 운동의 상징격이었다. 당시 팩토리 레코드의 사장 토니 윌슨은 '미스터 맨체스터(Mr Manchester)'라고 불렸으며, 매드체스터 운동의 중심 인물이 됐다.
하시엔다 - 영국을 뒤흔든 클럽 | 하시엔다에서 공연하는 뉴 오더 |
이 클럽은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함께 가서 파티를 할 수 있는 완벽한 집을 제공했다. 만일 뉴 로맨틱스(New Romantic)가 런던에 그들만의 공간을 가졌다면, 하시엔다는 우리의 것이었다. 그곳은 팩토리 레코드가 만날 수 있는 장소였고, 결국 맨체스터 뮤직의 집이 되었다.
피터 훅 #
피터 훅 #
하시엔다는 1980년대 영국 청소년 문화의 정점을 대표했다. 이 클럽은 1988년에 발생한 문화 운동 '두번째 사랑의 여름'의 중심이었고, 맨체스터를 매드체스터라는 이름으로 80년대 영국 음악의 중심지 중 하나로 변화시켰다. 팩토리의 신예 밴드 해피 먼데이즈는 이 시기의 큰 인기를 끌었다. 이들은 하시엔다 시대의 상징이자 원동력이 되었으며, 뉴 오더와 함께 레이블의 간판 밴드가 됐다. 또한 해피 먼데이즈는 스톤 로지스와 함께 록 음악과 댄스를 결합시킨 매드체스터/배기 음악으로 주목받았다. 해피 먼데이즈를 대표하는 앨범은 'Pills 'n' Thrills and Bellyaches'(FAC 320)이다.
1980년대 후반에 팩토리 레코드는 적자에서 벗어났으며, 뉴 오더, 해피 먼데이즈, 하시엔다의 인기로 큰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팩토리의 전성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88년 여름의 절정 이후, 하시엔다에 강도들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장소인 구내와 그 주변에서 강도와 총기 범죄가 발생하면서, 하시엔다는 1991년 1월에 처음으로 문을 닫아야만 했다. 이 클럽은 몇 달 후 보안 조치를 강화하며 다시 문을 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하시엔다는 의도치 않게 팩토리 레코드의 몰락을 가져왔다. 당시 애시드 하우스 씬과 매드체스터 씬은 새로운 파티 마약인 엑스터시에 빠졌다. 이 음악을 즐긴 많은 사람들이 엑스터시를 복용했기 때문에, 클럽에서 아무도 음료를 사지 않았고, 이것은 엄청난 적자로 이어졌다. 매드체스터 운동이 끝나면서, 마약 범죄는 더 널리 퍼졌고, 거리에서 클럽 내부로 퍼져나갔다. 1980년대 후반에는 맨체스터의 마약 조직들이 클럽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레이블의 간판 밴드들 역시 문제를 겪었다. 뉴 오더의 경우에는 여전히 로열티의 많은 부분이 하시엔다에 다시 투자되고 있었다. 또한 뉴 오더는 하시엔다의 공동 운영자였기 때문에, 클럽의 변동하는 매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신보 'Republic'의 녹음에 무려 40만 파운드를 쓰고 있었다. 해피 먼데이즈는 'Pills 'n' Thrills and Bellyaches'와 싱글 'Step On'(FAC 272)으로 성공을 거뒀지만, 마약에 심각하게 빠져 있었다. 당시 팩토리 레코드는 히트 앨범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바베이도스에 있는 해피 먼데이즈에게 새로운 앨범을 녹음하라고 지시했으며 거액의 비용을 이들에게 지불했다. 하지만 해피 먼데이즈는 거의 모든 예산을 마약에 날려 버렸고, 몇 장의 평범한 레코딩을 녹음하고 돌아왔다. 그 결과물인 앨범 'Yes, Please'(FACT 420)가 1992년에 발매되었을 때, 그런지의 전성기가 도래했고 대중들의 관심은 맨체스터에서 시애틀로 옮겨갔다. 결국 팩토리는 절실히 필요로 했던 히트 앨범을 얻지 못했다.
1992년 말에 팩토리는 연이은 음반 발매 연기, 부실한 레이블 운영으로 늘어나는 제작비, 하시엔다의 고질적인 적자 경영으로 인해 엄청난 적자 상태였다. 그리고 그 해 11월, 팩토리는 법정 관리에 들어갔다. 당시 런던 레코드(London Records)가 팩토리를 인수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지만, 논의과정에서 무산되었다. 10여 년 전 조이 디비전과 토니 윌슨이 맺은 초기 계약이 인수의 발목을 잡았다. 레이블이 아닌 뉴 오더가 자신들의 백 카탈로그(back catalogue)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팩토리 레코드는 1992년 11월에 파산을 선언했다. 팩토리 소속 아티스트들은 대부분 런던 레코드로 레이블을 옮겼다.
팩토리 레코드가 해산한 이후 클럽 하시엔다는 5년 동안 운영됐다. 그러나 1997년 여름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으며, 2002년에는 클럽이 철거됐다. 클럽을 철거한 후에는, 아파트 건설을 위한 부지로 재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새로 지은 아파트의 이름은 하시엔다 아파트(Haçienda Apartments)다.
2.3. 해산 이후
1994년 토니 윌슨은 팩토리 레코드를 부활시키기 위해 후신격 레이블인 '팩토리 투'(Factory Too)를 설립했다. 이 레이블은 3년동안 런던 레코드가 소유했다. 이후 런던 레코드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레이블(Factory Records Limited)로 운영되었지만, 팩토리 투라는 이름으로 계속 거래되었다. 이 레이블은 1990년대 후반까지 운영됐다. 팩토리 레코드 밴드였던 두리티 칼럼이 소속했으며, 호퍼(Hopper), 스페이스 몽키(Space Monkeys), The 6ths도 이 레이블 출신이었다. 팩토리 투가 해산한 이후인 2000년에 윌슨은 사업 파트너들과 함께 F4 Records와 초기 온라인 음악 스토어인 뮤직 33(Music33)을 설립하기도 했다.1999년 5월 15일, 팩토리 레코드의 공동 창업주이자 조이 디비전과 뉴 오더의 매니저였던 롭 그레튼이 46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000명 이상의 조문객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스티븐 모리스는 롭을 뉴 오더의 다섯 번째 멤버라고 평했다. 조수인 레베카 볼튼은 롭에 대해 "그의 접근 방식은 밴드의 일원이 되어 음악을 만드는 부분이 아닌 모든 것을 처리하는 것이었지만, 비록 그는 매우 뛰어난 귀를 가지고 있었고 레코드가 어떻게 들리는지에 관여했다" "그는 자신의 밴드에 매우 헌신적이었고 그들의 음악의 챔피언이었고 그들에 대한 그의 믿음은 다른 모든 것보다 컸다"라고 말했다. # [12]
2007년 8월 10일, 팩토리 레코드의 사장 토니 윌슨이 57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이 발표된 이후, 맨체스터 시청에 있는 유니언 깃발이 존경과 조의를 표하기 위해 조기(Half Mast)로 계양됐다. 또한 팩토리 레코드에서 제작한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토니의 관(Anthony H. Wilson's coffin)에는 넘버링 FAC 501이 부여되었으며, 묘비는 팩토리의 디자이너였던 피터 새빌이 제작했다. 토니의 장례식에는 피터 훅, 숀 라이더, 스티븐 모리스, 앤디 루크 등이 참석했다. 또한 알렉스 퍼거슨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선수들과 스태프들, NME, 오아시스, 크리에이션 레코드의 사장 앨런 맥기의 헌화도 있었다. #
3. 특징
"음악가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회사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우리 밴드들은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13] 이것은 제가 피로 서명한것으로 유명한 조이 디비전과의 계약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다른 정치적 행위는, 80년대 내내, 결코 퍼블리싱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많은 돈을 벌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그것을 하고 싶지 않았던 이유였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은 정확히 무정부주의적인 것 같았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팩토리가 처음 2년 동안 홍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홍보를 하지 않습니다. 홍보 담당자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음악을 상품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토니 윌슨 #
토니 윌슨 #
하지만 팩토리가 이룬 것은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그 자체에 대한 도시의 생각을 구축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영국 인디 음악이라는 더 넓은 공동체에서는 절충주의와 이상주의를 향한 문을 열어 놓았다.
피치포크 #
피치포크 #
3.1. 카탈로그 넘버
팩토리 레코드는 발매 음반뿐만 아니라 팩토리와 연관된 모든 것의 카탈로그 넘버를 매겼다. 팩토리의 경영진은 '무엇이든 발매될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 레이블이나 아티스트의 릴리스가 특정 매체일 필요가 없으며, 정의된 수준의 생산 가치, 노력 또는 진지함을 요구하지도 않음을 보여줬다. 이 카탈로그 넘버들은 팬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넘버링은 팩토리가 해산한 이후에도 토니 윌슨이 인터뷰에서 번호를 부여했다. 최후의 넘버링은 FAC 501(2004년)이다.또한 카탈로그 넘버는 연대순이 아니었으며, 모든 릴리스를 구성하기 위해 고유한 분류 시스템으로 사용됐다. 발매 카테고리에는 접두사가 부여되었다. 예를 들어 FACT는 전체 앨범을 나타내는 접두사인 반면, FAC는 기타 발매 유형을 나타내는 접두사였다.
- FAC 1: The Factory 클럽의 포스터
- FAC 61: 마틴 하넷(Martin Hannett)이 팩토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14]
- FAC 83: 하시엔다 1주년
- FAC 98: 미용실[15]
- FAC 99: 롭 그레튼의 치과 파일
- FAC 104: 채널 4의 튜브 TV 시리즈 방송
- FAC 136: 공장 접착 테이프
- FAC 148: 복원된 물레방아 위의 양동이
- FAC 191: 하시엔다에 있던 고양이
- FAC 201: 드라이 바
- FAC 238 · 241 · 258 · 261 · 283 · 288 · 299 · 309: 오리지널 티셔츠
- FAC 251: 팩토리 본사 사옥[16]
- FAC 253: 토니 윌슨과 롭 그레튼의 내기
- FAC 383: 뉴 오더의 열광적인 팬 집단(The Vikings)
- FAC 401: 영화 '24시간 파티하는 사람들'
- FAC 424: '24시간 파티하는 사람들'의 DVD와 책
- FAC 433: '24시간 파티하는 사람들'의 웹사이트
- FAC 461: 팩토리의 작품집
- FAC 501: 토니 윌슨의 관
- FAC 502(마지막 넘버링): 포스터 '그리고 당신은 롭 그레튼의 추모 행사를 잊었다'
자세한 정보는 the factory records catalogue 참고.
3.2. 앨범 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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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디자이너 피터 새빌(Peter Saville)이 제작한 앨범 아트가 굉장히 유명하다. 피터 새빌은 팩토리 레코드의 전속 디자이너였고, 팩토리의 시각적인 면을 담당한 아트 디렉터였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모든것을 디자인 할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고 한다. # '녹음은 하루인데 아트워크에 1년이 걸렸다'라고 말할 정도로 앨범 아트의 공을 들였다. 'Unknown Pleasures'와 'Power, Corruption & Lies'의 앨범 아트가 가장 유명하다.
4. 과거 소속 아티스트들
- 노스사이드(Northside)
- 네임즈(The Names)
- 뉴 오더
- 두루티 칼럼(The Durutti Column)
- 디스트랙션즈(The Distractions)
- 레일 칠드런(The Railway Children)
- 로얄 패밀리 앤 더 푸어(The Royal Family and the Poor)
- 리벤지(Revenge)
- 아이크 야드(Ike Yard0
- 어 서튼 레이시오(A Certain Ratio)
- 이에스지(ESG)
- 오케스트럴 머뉴버즈 인 더 다크
- 섹션 25(Section 25)
- 스왐프 칠드런(Swamp Children)
- 스톡홀름 몬스터즈(Stockholm Monsters)
- 씩 피그온(Thick Pigeon)
- 웨이크(The Wake)
- 일렉트로닉(Electronic)
- 조이 디비전
- 콴도 쾅고(Quando Quango)
- 크롤링 카오스(Crawling Chaos)
- 해피 먼데이즈
5. 여담
- 1989년에는 클래식 음악 음반사인 팩토리 클래식(Factory Classical)을 설립하기도 했다. 클래식 음반 발매는 1992년 해산까지 계속됐다.
- 팩토리 레코드는 당대 맨체스터 음악 씬의 중심이었다. # 그리고 팩토리 레코드의 사장 토니 윌슨은 맨체스터를 엄청나게 사랑한 인물로 유명했다. 그래서 2015년 문을 연 맨체스터 HOME/First Street 주요 광장은 토니 윌슨에 이름을 따서 '토니 윌슨 플레이스(Tony Wilson Place)'라고 명명되었다. #
- 2002년 팩토리 레코드의 흥망성쇠를 그린 전기 영화 '24시간 파티하는 사람들'(24 Hour Party People)이 개봉됐다. 제55회 칸 영화제에 출품됐으며, 평론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스티브 쿠건이 토니 윌슨을 연기했으며, 패디 콘시딘이 롭 그래튼을 연기했고, 레니 제임스가 앨런 에라스무스를 연기했다. 또 숀 해리스가 이안 커티스를 연기했다. 참고로 토니 윌슨도 방송 PD로 카메오 출연한다. 2007년 개봉한 이안 커티스의 전기 영화 '컨트롤'(Control)에도 팩토리 레코드가 등장한다.
- 팩토리 레코드의 사장 토니 윌슨은 경영에 관심이 없었다.[17] 이것은 팩토리가 파산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다. 스티븐 모리스는 "특히 재정적인 관점이 팩토리의 단점이었습니다. 토니는 그의 손등에 모든 것을 적는 것으로 회계를 처리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그는 실수로 그것을 씻어버릴 것입니다! 아무도 '아니,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어, 너무 많은 돈이야'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 팩토리의 공동 창업자이자 매니저였던 롭 그레튼은 "돈은 중요하지 않다"라고 정기적으로 말했다고 한다.# 피치포크는 이들의 경영 방식을 "레이블의 14년이라는 운영 기간 내내 소유주들이 내린 형편없는 비즈니스 결정"이라고 깠다. #
- 당시 팩토리 레코드는 "팝 음반은 신성한 것이었으니, 왜 그것을 아름답게 만들지 않겠는가?"를 주장했다. 그래서 팩토리 레코드의 음반 커버는 상당히 고급스럽게 디자인됐다. 또한 "음반이 좋으면 팔린다"라는 전통적인 마케팅을 했으며, 자신들의 음반을 싸게 파는 것을 거절했다. #
- 크리에이션 레코드의 사장 앨런 맥기는 "팩토리 레코드가 (아티스트와 레이블 사이에서) 50대 50의 거래를 한 것은 모든 인디 레이블의 템플릿이었고, 나는 팩토리가 없었다면 크리에이션이 없었을 것이라고 솔직히 말할 수 있다. 사실 1985년 토니가 우리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나는 음악을 완전히 그만두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
- 맨체스터에 팩토리 레코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공연장이 있다. 공연장의 이름은 'The Factory Project'. 1억 1천만 파운드의 거액이 들어간 예술 공연장이다. 2017년 1월에 계획 허가를 받았고, 2019년 7월에 개장했다. #
- 2009년 피터 훅은 팩토리의 클럽 하시엔다의 역사를 적은 책을 펴냈다. 제목은 'The Hacienda: How Not to Run a Club'이다.
- 2021년 맨체스터의 과학 산업 박물관에서 팩토리 레코드 전시회가 열렸다. #
- 팩토리 레코드의 전기 영화 '24시간 파티하는 사람들'을 연출한 영화 감독 마이클 윈터바텀은 인터뷰에서 "음악업계는 보통 레이블이 뮤지션으로부터 착취하는 게 당연하지만, 토니 윌슨의 경우 정반대로 뮤지션의 요구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이뤄줬다. 그 결과, 팩토리를 도산시켜 업계 관계자로부터 멍청이라고 불려지고 있지만 반대로 뮤지션으로부터는 존경을 받고 있다. 그의 매력은 그런 점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
- 더 스미스가 팩토리 레코드와 계약할 뻔했으나 불발됐다. 자세한 내용은 더 스미스 항목 참조. 2014년 조니 마는 인터뷰에서 "만약 당신이 그 당시 맨체스터에 사는 음악가였다면, 무릎을 꿇고 토니 윌슨이라는 교황의 축복을 빌어서 스튜디오에 당신을 끼워 넣는 것이 거의 법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마는 스미스가 팩토리 레코드의 뚜렷한 미적 감각에 "순응"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
6. 관련 문서
7. 외부 링크
[1] 그라나다 방송국에서 방송됐다.[2] 당시 앨런은 코로네이션 스트리트 같은 드라마에서 조연을 맡았던 직업 배우였다.[3] 이후 그레튼은 팩토리 레코드의 공동 설립자이자 파트너가 됐다.[4] 조이 디비전과 뉴 오더 이외에도 킹 크림슨, 록시 뮤직, 피터 가브리엘, 스웨이드, 펄프의 앨범 커버를 디자인한 유명 디자이너다.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유니폼도 디자인했다.[5] 영국의 포스트 펑크 밴드[6] 피터 새빌이 러셀 클럽의 첫 번째 클럽 나이트를 위해 만든 포스터가 'FAC 1'이다.[7] 발매 당시에는 흥행을 못했지만, 꾸준하게 팔려서 스테디셀러가 됐다.[8] 넘버링 FAC 51이다.[9] 마돈나가 영국에서 처음으로 공연을 한 곳이 하시엔다다.[10] 이 싱글 커버를 디자인한 피터 새빌은 이 곡이 상업적으로 성공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비용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11] 하시엔다에서는 여러 장르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70년대의 사이키델릭 락, 펑크, 그리고 전통적인 기타 락을 하는 밴드들부터 그리고 하우스 음악 DJ들이 교대로 자신들의 음악을 연주했다.[12] 롭 그레튼이 마지막으로 발굴한 밴드는 도브스였는데, 도브스가 두번째 EP를 내기 전 사망했으며, EP는 그에게 바쳐졌다.[13] 판권, 인세 시스템도 소속 아티스트에게 100% 양도했다. 이러한 시스템은 후일 레이블의 폐쇄로 이어진다.[14] 1982년 마틴 하넷은 여러 재정적인 문제로 팩토리와 불화가 발생하여 팩토리를 고소했다. 이 논쟁은 결국 법정 밖에서 해결되었다. 이후 해피 먼데이즈를 프로듀싱하기 위해 팩토리로 돌아왔을 때, 프리랜서 프로듀서로 일했으며 팩토리 디렉터로 복직하지 않았다.[15] 하시엔다 지하실에 있는 미용실이었다.[16] 이 사옥은 현재 피터 훅이 "FAC251 더 팩토리" 인디 록 클럽으로 운영하고 있다.[17] 팩토리 레코드 사장 재임 당시 돈을 한푼도 못벌었다고 한다. 2007년 토니는 자신을 음악계에서 "돈을 한 번도 벌지 못한 유일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 두루티 칼럼의 리더 비니 라일리는 인터뷰에서 "토니는 아무것도 벌지 않았습니다. 그는 음악 사업으로 한 푼도 벌지 못했어요."라고 말했다.#[18] 블루플라크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들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개발로 인하여 무분별하기 역사적 건축물들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설치하는 명패다.